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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일대기
    정주영 일대기1.정주영 일대기-이름 : 정주영 -출생 : 1915년 11월 25일 -사망 : 2001년 3월 21일 -직업 : 국내기업인 -학력 : 통천송전소학교 -경력 : 현대건설 대표이사명예회장,제14대국회의원 -수상 : 국민훈장 무궁화장, 국민훈장 동백장, 자이 레 국가훈장,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 -대표작 : 저서 '이 땅에 태어나서'2.정주영의 연대별 기업활동1930년대 : 맨 손으로 상경해 쌀장사 시작 1940~1950년대 : 현대의 모태 현대건설 창립 1960년대 : 국가기간사업 기틀 마련 1970년대 : 해외 건설 진출 및 중공업 체제 구축 1980년대 : 사업구조 고도화와 자동차ㆍ반도체의 수출 산업화 1990년대 : 첨단기술 개발 및 구조조정 박차 1998년 이후 : 금강산 관광사업 및 남북교류 활성화3.정주영의 경영철학첫째, 타고난 겸손함과 절약정신 둘째, 성실함과 부지런함 셋째,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 넷째, 무섭게 밀어붙이는 추진력 다섯, 끈임없는도전과 노력4.경영성과국내최초 해외 건설시장 진출(1965)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1970)-조선소 건설과 동시에 배를 진수시킨 세계 최대의 현대조선소(1973)-국내 최초 순수 우리 기술의 자동차 포니 생산(1976)포니의 생산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 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자체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생산국이 되었다.-20세기 최대의 역사,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공사(1976)20세기 최대의 대역사로 불리는 사우디 주베일산업항.-세계 최초의 정주영 공법으로 서해안 간척지 개발(1984)1984년 정주영은 노후화된 대형 유조선을 이용해 엄청난 압력의 물의 흐름을 막아 둑을 완성하는 '유조선 공법(일명 정주영 공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여의도의 48배 에 해당되는 서해안을 간척했다.-올림픽 유치 및 올림픽 성공적 개최(1988)나가노올림픽 훈장 수여식-소떼몰이 방북(1998)-금강산 관광사업 등 대북사업(1998~)4.결론지금까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해 진정한 사업가 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벤처정신은 한마디로 끊임없는 도전 정신과 창의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개척하는 이런 벤처정신과 부하들을 이끌어 나가는 강력한 리더십이야 말로 인간 정주영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정주영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경제 발전사와 발자취를 함께 해온 산 증인이자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근대화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단지 한 세기를 풍미했던 성공한 사업인 으로만 간주해 버리기엔 그의 업적과 공헌이 너무 다대하기 때문에 그의 경영철학과 리더십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그를 근본으로 하는 많은 훌륭한 경영리더들을 배출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nameOfApplication=Show}
    경영/경제| 2007.08.22| 14페이지| 1,500원| 조회(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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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경제사
    우리들은 경제학의 역사에서 아담 스미스 (A.Smith)의 “국부론”이나 마르크스 (K.Marx)의 “자본론” 등과 같이, 진짜 고전이라 할 만한 가치 있는 몇 권의 빼어난 업적을 유산으로서 공유하고 있다. 이 책들이 경제학의 고전으로서 계속 읽혀지는 것은, 그것이 시대의 경제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여 근본부터 경제학적 방법을 가지고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한가지는 그 시대의 경제문제를 넓은 역사적 시야에서 포착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이지만, 특히 그것이 사회구조의 깊은 곳과 관련된 근본문제라면 어느 정도 선행된 사항의 역사적 발전 소산이고, 역사의 흐름에 따르는 해결만이 다음 시대의 발전을 여는 돌파구가 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고전은, 그것을 음미함으로써 경제문제를 역사적 시야에서 포착되도록 훈련한다는 의미에서 경제사의 고전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 (A.Smith)는 중상주의에서 산업혁명에 이르는 시점까지 생존했는데, 18세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왜, 또 어느정도 그 기본적 추세에서 벗어나 있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로마제국 몰락 이후의 농업과 상공업의 역사를 통하여 고찰하였다. 또 10세기의 경제대국 영국의 압력에 대항하여 유약한 독일의 공업을 위하여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국민경제 생산력의 구축을 지적한 리스트는 무역정책을 중심으로 구미제국의 국민경제건설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명하고자 한 마르크스 (K.Marx)는 자본의 원시축적이나 대홍수전적인 상업자본, 자본제 지대의 발생,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와의 차이점이나 선행하는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에로의 이동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다.근대 이후의 서양 경제학의 역사를 알아보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 과정이 궁금하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유럽세계는 14-17세기에 걸쳐 대변혁을 경험하였다. 14~17세기의 변화가 없었다면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기 후의 경과가 다르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반란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발전이 강력하게 진전되어 14세기 말에는 농노제가 사실상 소멸되었고, 소부르주아 경제의 성립을 기점으로 하는 산업자본의 형성이 다른 나라에 앞서서 진행되었다. 14세기에는 사실 북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맞먹는 교역량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15세기에 들어와서는 네덜란드의 도전까지 겹쳐 엘베강 이동지역에서 상업지 활력이 사라져갔다. 동유럽의 귀족들을 덕분에 기존의 모든 농민적 권리를 무시하고 파괴하면서 차 지농들을 대규모 영주직영지에서 일하는 농노의 상태로 바꾸는 반동적 개혁을 일으킨 것이다.앞서 언급한 사례도 있지만, 이 시기에 일어난 동유럽의 계급투쟁을 고려하면 이 경우가 더 압도적이었던 듯하다. 사실 동유럽에는 광대한 토지에 비해 노동인구가 압도적으로 모자라기 때문에 농민의 도주는 영주에게는 절박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 영주들에게 영국처럼 노동력이 덜 필요한 산업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도 아니었다.이미 동유럽에서는 토지와 노동력자의 비율 그 자체가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귀족계급으로 하여금 농민들의 이동권리를 강제로 제한하고 대규모의 장원적 영지를 형성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농민들의 지위를 끊임없이 몰락시켜갔던 것이다.동유럽지역에서는 왕권이 미약한 편이었다. 국왕이 제대로 된 권력을 행사한 것은 17세기이후 절대왕정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폴란드는 이 무렵엔 강했다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악화된 경우이다. 프랑스처럼 왕권이 강하여 농민을 보호해준 것도 아니었으며, 영국처럼 귀족세력을 견제할 만큼 중산층이 성장한 것도 아닌 동유럽에서는 귀족세력을 제어할만한 존재가 없었던 것이다. 귀족세력은 따라서 마음대로 농민을 예속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독일에서는 농민전쟁이 실패한 후 동엘베(Elbe)의 농장영주제와 서엘베(Elbe)의 지대장원제라는 이중구조를 취하는 봉건적 토지소유제가 19세기까지 계속 되었다.다이에 대한 면역력의 증가와 생리학적 변화 기후 변화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인구가 갑자기 감소한 결과로 인해 인구·토지의 상승과 실질임금의 상승이 계속되어 조혼과 더불어 높은 출산율을 유발하였다. 비록 감소된 사망률 과 높은 출생율의 상쇄관계에도 불구하고 16세기의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를 통하여 물가는 일반적으로 하락하거나 안정적이었는데, 16세기 초에서 17세기 초에 걸친 기간에는 지속적인 물가등귀현상이 나타났다. 물론 국가에 따라 물가등귀가 현저했던 시기와 그 정도는 달랐으며, 또 상품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곡물(식량)가격을 보면 16세기를 통하여 나라에 따라 낮게는 3배에서 높게는 5~6배라고 하는 가격상승률의 차이가 있었으며 공업생산물의 경우에는 2~3배, 임금의 경우에는 2배정도의 차이가 있었다.이와 같은 물가등귀현상을 ‘가격혁명’이라 한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점차 전역에 걸쳐서 인구의 증가를 비롯하여 농업, 공업, 상업, 무역 등의 각 부문에 걸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물가의 지속적인 등귀도 또한 이러한 배경에 따라 발생하여 중요한 한 국면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17세기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국면에 있어서도 16세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불황적 양상이 농후하였다.중세에 있어서 사회적 분업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을 보면, 상업과 수공업은 길드에 편성되면서 도시에서 운영되었고, 농촌에서는 영업으로서의 수공업이 배제되었다(길드에 의한 영업의 독점). 그런데 서유럽의 각지에서는 약 15세기경부터 이러한 사회적 분업의 형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농촌내부에서 여러 종류의 수공업자층과 소상인층이 분화되었다.영국에서는 거의 18세기 중반까지 국가에 의한 직접적인 유도와 계획없이 자생적으로 산업혁명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프랑스를 맞이하여 해양국가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확립하고, 식민지를 시작된 일련의 기술혁신은, 지금까지 일반적이었던 숙련과 도구에 기반을 둔 수공업적 기술을 지양하고, 주요 산업부문에서 새로운 기계체계를 생산기술의 근간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전에도 인간 근육의 힘의 한계를 극복한 기계의 싹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 단편적으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노동에 필요했던 수많은 도구를 한 개의 기구로 결합한 작업기가 출현하였을 때, 도구에서 기계로의 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인 과정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업혁명이 종료된 19세기 중반,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경제적 지위를 누렸다. 면과 철은 세계 총 생산고의 대략1/2, 석탄은 2/3, 금속제품은 2/5를 영국 한 나라가 생산했다고 하는 간단한 사실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영국은 당시 ‘세계의 공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공업독점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의 면공업의 회전축이었던 통상망 조직은 세계 곳곳으로 확대되어, 오랫동안 나라를 봉쇄하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도 곧 어쩔 수 없이 개국하게 되었다. 소위 세계시장은 이렇게 하여 형성되었던 것이다.1863년 공황을 전기로 세계경제는 1896년까지 장기불황을 겪었다. 물론 이 사이에도 두 번에 걸쳐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었는데, 이 장기에 걸친 가격의 하락과 투자침체의 시련 중에 자본주의 경제는 크게 구조전환을 하였으며, 그 후 96년부터 제 1차 세계대전까지 다시 장기적 활황을 맞게 되었다. ‘대불황’에 의해 더욱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당시 세계경제를 이끌던 영국이었다.19세기 말 이후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발전은 여러 가지의 국면에서 새로운 전망을 가져왔다. 주요 자본주의국에 있어서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공업원료로서 다종 다양한 천연자원에 대한 대량수요를 새롭게 발생시켰다. 이 무렵 세계적인 규모로 급속히 추진되어 온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이 그것이었고, 가장 전형적인 사태는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 분할’이었다.1930년대에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휩쓸었학자들은 매우 낙관적이다. 아직도 사학자들이 30년대 공황을 20세기 최대의 불가사의 혹은 수없이 많은 요인이 서로 맞물린 종합적인 결과라고 여기는 것은 그들의 오해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상당한 정도로 합의에 도달했으며, 소위 대공황의 수수께끼는 거의 풀렸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들이 흔히 찾는 공황의 지표는 산업생산지수다. 이것이 광범위하게 채택되는 이유는 실업률이나 물가수준 등 다른 지표들과 상관관계가 클뿐더러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추계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국이 회복국면에 접어드는 시점은 거의 같지만, 지수가 공황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시기는 나라마다 다르다. 1920년대 미국은 세계대전 중에 막대한 해외자산을 축적하고 지속적으로 국제수지 흑자를 냄으로써 대외적으로 강력한 우위를 구축했다. 그러나 미국은 유럽경제 부흥에 신경을 쓰기보다 자국 내 안정을 가장 먼저 추구했다. 전시에 억압되었던 주택경기와 소비재산업 부흥을 중심으로 미국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라디오, 각종 가전제품, 화학제품, 자동차 등이 널리 보급되면서 경제뿐 아니라 미국인의 생활양식도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대량소비풍조 속에서 토지투기 붐이나 주식시장 과열 현상 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사회가 전반적으로 들뜬 분위기에서는 어느 한 부문에 주어진 충격이 아주 거대한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될 소지가 잠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미국은 1920년대에 상대적으로 보기 드문 호황을 누린 반면 영국은 이미 장기적 경기침체에 돌입했다. 따라서 영국은 상대적으로 1930년대를 그다지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듯 1920년대 상황이 교차하게 된 것은 당시에 금본위제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파운드화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고평가된 환율 때문에 영국은 긴축정책 기조를 유지해야만 했고, 그 결과 불황과 높은 실업률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최근에는 경제구조변화라는 측면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이 있는데, 주로 국제적 채권채무다.
    경영/경제| 2007.08.22| 7페이지| 1,500원| 조회(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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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경제학 (마르크스 경제학)
    먼저 이번 정치 경제학이란 과목을 수강하면 주류 경제학과 비주류 경제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관련 연구와 업적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서술 하고자 한다. 주류경제학이라 함은 산업혁명, 독점자본의 폐해가 극심해지는 19세기 후반 마르크스, 헨리조지와 같은 현실고발적인 경제학의 등장과 이어서, 왈라스, Martial 등과 같은 고전주의학파가 나오면서 고도의 근대수학과 자연과학적 분석을 이용한 경제학의 발전이 있었다. 1930년대 대공황과 더불어 고전, 신고전학파의 이론이 무너지면서 케인즈의 경제학이 각광받기 시작하는데, 이는 적극적 정부개입정책을 적극 찬성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케인즈도 시장의 효율적 자원배분 자체는 인정하는 수준에 있었기에 고전, 신고전과 더불어 주류경제학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경제 위기 때마다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은, 국가의 개입을 규제하느냐 아니면 국가가 더욱더 개입하느냐 하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 이전부터 나왔던 고전적 해결책이기도 하다.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는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의 발달로 자본주의가 가속화되어 부가 팽창하는 것에 비해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노동자와 그 노동의 현장에 있는 어린이 문제 등이 아주 심각했었다. 마르크스는 이를 통해 노동이 소외를 일으키는 근본 요인이며, 그러한 소외를 인식하도록 노동자를 깨우칠 수 있게 하려면, 사회는 반드시 자본주의로 이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로 이행되면 계급투쟁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은 자유의사에 의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는 어떠한 지배형태도 없애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고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쓰는 사회. 그것이 마르크스가 궁극적으로 다가올 미래향으로 묘사한 사회의 모습이다. 비록 그 때가 언제일지, 혹은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농민의 공동체집단에서 역사발전의 힘의 주체로서의 희망을 느꼈다.평생을 기울여 책을 읽고, 자료를 수집세계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는 아직도 자본주의가 자가 수정을 계속하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성격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이라고 했을까?마르크스사후의 왜곡과 갈기갈기 찢겨져서 레닌을 비롯한 크고 작은 혁명가를 자처하는 인물들의 천박한 이론의 장식품 혹은 가리개로 쓰이다가 버려져온 마르크스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은 이제 한물간 이데올로기로 취급받기까지 한다. 그의 책에서 각각의 역사발전단계의 구체적 동인이나 논증을 제기하지 못했으며, 마르크스도 인식하고 있던 근원적인 모순들은, 어쩌면 마르크스의 논거들이 그렇게 함부로 이용되거나 이용하기 위해서 배척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좀 더 진지하게 학문적으로 계승· 발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단지 지나간 철학으로서 돌아보는 것만은 아니다.마르크스의 철학이나 정치경제학의 이론들은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헤겔을 알아야 하는데, 그건 내게 너무 무리였다. 결국 그런 부분은 상식선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그 보다는 그의 아주 인간적인 모습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의 부인인 예니 와의 사랑.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열정은 학문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많이 달랐는데, 이것은 마르크스가 연구를 하고 책을 쓰는 사람임에도 혁명의 한가운데서 행동하기를 원했고, 또한 그렇게 해온 행 동속에서 일관되게 발견하는 치열한 삶의 모습이다. 5명의 아이들 중, 3명은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죽었으며, 나머지 2명은 나중에 자살을 한다. 마르크스 부부는 돈이 없어 죽은 아이들로 괴로워했다. 또한 독일의 유태인으로 고향에서 추방당한 이후로 몇 번의 방문 외엔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못했던 독일에 대해 마르크스는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그에 비해 엥겔스의 존재는 참으로 특이했다. 마르크스의 평생친구로서 처음엔 학문적으로, 그 다음엔 마르크스의 연구를 돕기 위해 자신의 학문적 길을 포기하고 돈 버는 일로 뛰어들도 이해될 수는 없고, 물질적인 생활관계를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시민사회의 해부는 경제학 속에서 찾아야만 된다. 1847년에는 「철학의 빈곤」이 발간되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최초의 경제학저서였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중엽 즉 산업자본주의시대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성립되었고 그 후 20세기의 제국주의시대와 전반적 위기시대에 들어와서 레닌과 스탈린에 의하여 발전을 본 이론체계이다.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다. 자본이란 무엇인가? 산업자본이나 상업자본이나 이자 낳는 자본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의 가치를 증식하기 위해 활동하는 가치다. 산업자본가는 공장을 세우고 기계와 원료를 구입하며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생산 판매함으로써 예컨대 최초의 자본 100억 원을 140억 원으로 증식시키며, 상업자본가는 상품의 매매과정에서 상업이윤을 얻어 자기의 최초 자본을 증식시키고, 이자 낳는 자본의 소유자(예: 금리생활자나 은행)는 자기의 자본을 대부하거나 증권에 투자하여 이자나 배당을 얻음으로써 가치를 증식시킨다. 이러한 자본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한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은 자연히 산업자본가, 임금노동자, 상업자본가, 소비자, 대부자본가, 차입자 등으로 마르크스는 구분하였다.마르크스주의자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 내지 전체 사회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가족을 넘어서 전 사회적인 범위로 코뮨적) 관계를 확장해가며,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새로운 유형의 주체가 있었어야 했다. 공산주의적 주체, 아니 좀 더 완화시킨 사회주의적 주체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전하는 기사들 탓인지 몰라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주의 사회에 사회주의적 인민이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오히려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근대인의 모습이 훨씬 더 극적으로 과장된 양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적 사회주의’ 근대인들로 가득 찬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부를 것이다. 인민 내지 공산주의적 주체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산관계 내지 생산양식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바뀌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잘못된 것일까?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 한다”는 역사유물론의 기본 명제는 기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그것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는 대답이나 ‘불충분한 사회주의’라는 말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대개의 위안이 그렇듯이 그것은 거대한 역사적 비용과 희생을 치르면서 드러난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위안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용기와 과감함이다. 사회적 주체에는 생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요소가 있고, 그 요소가 차라리 의식에 비하면 일차적이고 결정적이며, 그것은 바로 무의식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역설에, 납득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한다. 즉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주체 내지 인민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고, 무의식의 형성과 연관해 주체와 역사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론이 없었던 것이다.마르크스가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유물변증법으로 바꿔놓음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철학은 완성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물변증법의 법칙을 사회생활의 연구에 적용하면서 사적 유물론이 확립되었다. ‘유물사관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 출발한다. 생산, 그리고 생산물의 교환이 모든 사회질서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 역사상 어떠한 사회에서나 생산물의 분배, 그리고 계급 또는 신분에 대한 사회적 편성은 무엇이 어떻게 생산 되는가 또는 생산된 것이 어떻게 교환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모든 사회적 변동과 정치적 변동의 궁극적 원인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찾아서도 안 되고 영원의 진리와 정의에 대해서 증진해 가는 인간의 통찰 속에서 찾아서도 안 되며, 생산양식과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이론에 의하면, 상품의 가치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주의사회는 노동력(=노동자)도 상품이 되는 사회이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노동자와 그 가족이 생활에 필요한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말한다. 가령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으로 노동력의 가치에 일치되는 가치를 생산하는 데 6시간이 소요되었다면 필요노동은 6시간이다. 그러나 그 노동력을 구입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10시간 노동시킨다면 4시간이나 더 노동한 셈이 되는 데, 이 4시간의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한다. 잉여노동에 의하여 신가치가 창조되는데, 이것이 즉 잉여가치라는 것이다. 자본가의 이윤(기업이득·자본이자·지대 등)은 바로 잉여가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노동을 4시간이나 수탈해서 자본가는 이윤을 착복한다는 것이다.또한 마르크스는 상품과 노동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상품이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두 요소 또는 이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성질을 연구 분석하여야 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이 이중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노동이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다.그러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이란무엇인가? 서로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노동은 각각 그 목적, 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노동도구와 원료, 노동행정이 서로 다르고 지출하는 노동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이처럼 노동들은 물건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생산수단과, 노동을 하는 형태와 노동의 결과와 목적에 있어서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게 한다. 이러한 노동을 구체적 노동이라고 한다. 구체적 노동은 상품의 사용가치를 만들어 낸다. 상품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이 구체적 노동이라면 가치를 만드는 노동은 어떠한 노동이겠는가?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다.
    경영/경제| 2007.08.22| 6페이지| 2,000원| 조회(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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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 VS 이병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우리에게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경영이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기업가들은 어떤 모습일까? 매순간 수많은 가치의 판단에 앞서 기업가는 나름의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우리나라에는 성공한 수많은 기업가가 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최근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많은 교훈과 업적을 남긴 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전명예회장의 삶을 돌아보며 그의 기업가 정신과 경영이념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또한, 그는 어떻게 현대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어냈던 것일까. 정주영 회장은 건강과 생활철학, 사업에의 열정, 리더쉽, 신용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분이다. 항상 앞에서 진두지휘하면서도 조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데에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했다.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모험정신은 현대와 한국경제의 고속성장을 가능케 한 핵심요소였다. 그는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남보다 먼저 생각하고, 결정은 단호히 내렸으며, 그 후에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 실천한 것이다. 그의 사업 확장은 매번 주변의 반대에 부딪쳤다. 해외 건설 시장에 진출할 때도, 국내 최초의 자동차를 개발할 때도, 조선소를 건립할 때도, 금강산 관광 사업을 시작할 때도 모두들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사업들은 모두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 모든 것의 밑바탕이 되었던 것은 신용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쌀가게 점원으로 일을 하다가 신용 하나로 주인이 되었으며, 현대자동차를 설립할 때도 신용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여기까지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령교 복구공사를 보면 그가 신용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의 공사는 적자투성이였다. 공사를 끝내면 당장 빚더미에 올라앉을 판이었다. 웬만한 기업인이라도 그 정도의 적자를 감수 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그사는 엄청난 적자를 보고 계약 공기보다 두 달 늦게 완공되었다.이 고령교 공사는 그의 소신대로 신용을 지킨 대표적 사례이며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신용은 잃으면 그것으로 끝장임을 강조한 정주영 회장의 신용제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둘째, 현대자동차(現代自動車)와 기술주의(技術主義)이다.이는 도전과 개척주의와도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진취적 기계와 불요불굴의 개척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분야를 알고 기술을 기반으로 다각적으로 도전한 현대는 아산의 진취적 기계에 기술주의와 개척정신이 더해져 만들어낸 성공이다.기술경쟁력과 새 분야의 개척은 기업발전은 물론이고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정신이 지금의 현대를 있게 하였다.정주영 회장은 당시만 해도 불모지였던 자동차산업에 뛰어들면서 순수한국 기술로 포니라는 자동차를 만들어 세계시장 개척하였다.현대의 경영이념 제3조는 창의와 기술로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현대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며 자동차, 건설, 조선사업, 중공업, 전자, 화학, 항공 산업, 정보산업, 반도체 등 다각화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격적 경영은 기술을 기반으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창의와 기술개발에서 국내 어느 기업보다 앞선 독자기술을 확보하였다. 정주영 회장의 적극적 의지와 강한 추진력에 민족과 조국, 나아가 인류를 생각하는 사명의식이 더해져 오늘날의 현대와 세계 속의 한국을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세계와의 기술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들어 세계 최대의 제조업 대국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놀라운 사업실적을 기록하였다. 이는 무모한 도전이 아닌 기술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준비된 도전이었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셋째, 산업평화주의(産業平和主義)이다.이는 인간존중주의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기업은 곧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기업 경영에 있어 구성원의 만족도제고와 복지, 자기실현을 중요시 여겨왔다. 의 이윤추구를 두고 많은 갈등이 있겠지만 자신의 신념, 그 틀 안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은 기업 경영의 일행을 두고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됨됨이나 개인의 신념으로 기업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훗날 내가 기업가가 된다면 나의 뚜렷한 신념으로 최선을 다해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정주영 명예회장의 삶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세상에 펼쳐 입증시켜 보이는 과정이었다. 그의 일생을 관통한 가장 큰 경영철학은 '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였다. 1970년 대 초 조선소부지 사진 한 장을 달랑 들고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영국계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낙관주의였다. 조선 경험도, 조선기술자도 없는 현대에 차관을 빌려줄 수 없다는 그들을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가능하냐고 묻지 말라'며 설득했다. 정주영 회장은 경영에서 신용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돈을 모아서 돈만으로 이만큼 기업을 이루려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현대의 성공비결을 신용에서 찾았다. 상품에서의 신뢰, 모든 금융거래에서의 신뢰, 공급계약에서의 신뢰, 공기 약속 이행에서의 신뢰, 공사의 질에서의 신뢰 등 신뢰의 총합으로 오늘날의 현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그가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믿을만한 청년'이라는 신용 하나로 가능했다. 그는 지인들 사이에서도 신용이 높기로 유명하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한 번 약속한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백인문집 ‘아산 정주영과 나’ 에 기고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신용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인간적인 자상함과 섬세하고 따뜻한 면이 있음에 감탄했다.그는 깨끗한 기업, 부패 없는 나라를 꿈꿔 왔다. 가장 큰 기업보다 가장 깨끗한 기업이라는 평가가 붙여지기를 원했다. 수많은 건설현장을 유지하면서 부패가 끼어들면 부실공사가 될 수 밖 에 없다고 직원들을 일깨워 왔다. 정주영 회장은 생시에 ‘권력으로부터 박해받은 적은 있수 있는 탐심은 항상 경계하였다. 이치에 적합하면서 순수한 노력에 의해 재산을 획득하는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쓰는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모은 재물을 4등분하라고 하셨다. 그 중 1/4은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쓴다. 또 1/4은 생업을 영위하거나 자본의 재투자를 위해 쓰라고 했다. 정주영 회장의 경제적 안목도 대단했다. 다른 1/4은 부모와 수행자를 위해서, 나머지 1/4은 자신과 이웃의 빈곤에 대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잡아함경〉에 나온다. 현실에도 적용될 수 있는 좋은 부처님 가르침이다.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재산이 아니어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영원하고도 한량없이 누릴 수 있는 재산도 있다. 성자(聖者)의 재산이라고 하는 칠성재이다. 칠성재는 7가지의 법의 재산(法財)이다. 신(信)재, 계(戒)재, 참(斬)재, 괴(傀)재, 문(聞)재, 사(捨)재, 혜(慧)재가 그것인데, 이것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약간 변형해서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 지혜의 평화로움과 안락의 재산을 가지고 그 안에서 신심과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재물을 늘리고 부리면서, 참회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으로 늘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다.우리가 사용할 줄만 안다면 내가 가진 것, 나의 가능성 등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재산이 된다. 남들과 비교하는, 또는 비교되는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서 즐겁게 만족할게 살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근면ㆍ검소로 일관한 정주영의 생활상‘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강인한 추진력의 소유자’, ‘통일의 물꼬를 튼 개척자’,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한국 경제의 살아있는 전설 - 정주영 명예회장. 그는 한국경제 부흥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기업인이기 전에 근면과 검소함이 체화된 사람이었다. 그의 근면, 검소, 성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이 오늘날의 ‘현대’를 만들어 내는데 초석이 되었다.그는 젊었을 때부터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베 어 있었다. 그가 일찍 일어나는 이유는 그 날 할 전반에 걸쳐 올바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적과 필요에 따른 조령모개식 정책이나 인위적인 처방은 잘못된 것이다. 문제가 심각할수록 심사숙고를 거쳐 변화를 꾀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은 노동자들과 기업가들이 서로 합심해서 피땀으로 일으킨 나라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묵묵히 일해 온 노동자들과 세계의 내로라하는 기업들과 경쟁하여 달러를 벌어들이고 국가의 부를 쌓는 데 공헌한 기업의 역할은 제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우리나라의 기간산업을 일으켜 세우면서 나라와 함께 성장했으며 수출 산업을 선도적으로 이끌어온 ‘현대’가 자랑스럽다.‘한강의 기적’ 속에 ‘기적’은 없다. 다만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한 사람의 기업인이자 성실한 노동자로서 이 나라의 비약적 발전에 한몫을 다한 것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성실과 신용을 좌우명으로 삼고 오로지 일하는 보람 하나로 평생을 살았다. 일하는 것 자체가 그저 재밌어 일에 묻혔고 그러다 보니 일과 한 몸이 되어 살았다. 좋은 옷이나 음식이나 물건에 한눈 팔 겨를도 없이 그저 일이 좋아 일과 함께 살았다. 타고난 일꾼으로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오늘의 나 일 뿐이다. 일꾼으로서 지금의 나는 아직 늙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일에는 늙음이 없다. 최상의 노동자에겐 새로운 일감과 순수한 정열이 있을 뿐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물려줄 유산은 이러한 노동에 대한 소박하다면 더없이 소박한 내 생각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앞날을 개척해가는 데 이러한 내 생각과 지나온 삶이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 장강은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 듯 나아간다)”이라 하지 않는가. )정주영 회장의 책에는 기억에 남는 훌륭한 문구가 많았던 책이었다. 그 첫 번째는 이 책의 제목의 일부분이기도 한 “이봐, 해봤어?”다. 이는 ‘안 되는 일’을 여간해서 수용하지 않던 정 회장이 늘 입에 달고 다닌 말이라고 한다. 즉, 해보고 안 되는 것인지, 머릿속에서다.
    경영/경제| 2007.08.22| 8페이지| 1,500원| 조회(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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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크리스챤 기업, 기업가의 사례조사
    이번 경제학사 과제를 받아보고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 존경받는 크리스찬 기업, 기업가의 사례, 과연 누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보고 딱히 떠오르는 인물도 없고,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인터넷 검색’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몇몇 기업과, 기업인들을 알 수 있었지만, 한국유리회장 최태섭 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를 해볼까 한다. 딱히 어떤 느낌이 와서 조사 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의 과거에 일화를 보고 이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이 분은 정직함과 신뢰, 신용을 바탕으로 한 기업가정신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6?25 전쟁 당시 9?28수복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났는가 싶을 때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에서 최태섭은 친구들로부터 단무지를 군대에 납품해보자는 제의를 받아 그 동안 거래하던 은행에서 얼마의 돈을 빌려 공장을 차리고 약간의 돈을 벌게 되었다. 그 즈음 전세가 급변하여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짐을 싸고 하나 둘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피난가기에 바쁠 때, 최태섭은 은행으로 부랴부랴 달려가 “빌린 돈을 갚으러 왔소이다.” 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 은행직원은 지금 은행업무가 마비가 됐으니 다음에 오라는 말을 했다. 이에 최태섭은 자신도 피난을 가는 도중이며 전쟁 중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돈부터 받아 두라고 하고 돈을 갚고 영수증을 받아들고 나왔다. 이 때 그의 마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고 한다. 이 후 최태섭은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생선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기위해 다시 은행을 찾아가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을 갔을 때, 은행장이 1?4 후퇴 때 돈을 갚고 피난을 떠난 이 기업인을 알아보고 무담보로 2억원을 융자해 주었다고 한다.)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만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최태섭, 그가 바로 한국유리의 기적을 이룬 주인공이다. 과연 누가 전쟁 중에 돈을 갚을까 내가 그 당시 그 인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떠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1957년 3인의 기독교 실업인 이었던 최태섭, 김치복, 이봉수는 한국유리를 창립하게 되었다. 6?25직후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판유리생산에 착수하여, 전후복구와 경제개발 초기의 유리 수요를 자급할 수 있게 했다. 70년대에는 전기 ? 전자 ? 자동차 등에 쓰이는 특수산업용 유리를 개발하여 유리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경련고문, 크리스찬아카데미 재단이사장, 대한적십자사중앙위원, 古堂기념사업회재단이사장, 어린이재단이사장 고문 등 사회활동을 하였다.최태섭이 쓴 ‘사랑에 빚진자’) 라는 책은 자신의 회고록과 경영철학, 글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번에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사랑에 빚진자’ 이 말은 책 이름인 동시에 기도문이었다. 기도문의 예를 들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이 내용은 어렸을 땐 몰랐는데, 자라오면서 내가 빚을 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무슨 돈을 빌려서가 아니라, 사랑의 빚을 졌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다.그런데 나에게 빚쟁이는 마음이 하도 너그러워서 내가 오랫동안 갚지 않고 있는데도 여느 빚쟁이처럼 빚 독촉을 하지 않고 있다. 오늘도 나는 그 무겁고도 감격스러운 빚에 겨워 조금씩, 조금씩 빚을 갚고자 하나, 갚으려고 하면 할 수록 이 빚은 더 커져만 간다는 사실이다.그리고 소년의 최태섭은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신앙 철학을 세웠다.신앙은 환경을 바꾸고 운명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그는 그 때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다."온전한 성수 주일을 한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앞장서서 최선을 다하겠다."그는 이런 복된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오산학교에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이 청소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최태섭 회장은 오산학교에서 기독교 정신과 나라 사랑을 배운다. 이 두 가지 가치관은 최태섭 회장의 삶을 지탱한 기둥이 되었다. 오산학교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남강 이승훈 장로님이 화장실 청소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하시는 걸 보았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남몰래 혼자서 운동장의 눈을 치우시는 것도 보았다. 남이 꺼리는 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이었다. 그 분에게서 말이 아니라 몸으로 가르치는 참된 스승의 모습을 보았다.)오산학교에서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을 배운 최태섭 회장은 평생 사업을 하면서 지킨 원칙이 있다. 손해가 되어도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다. 한국유리는 형제들 두 분과 함께 운영을 했다. 세분이 형제다. 그런데도 동역관계가 수 십 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 이유는 최태섭 회장이 언제나 다투지 않고 양보하며 인화를 중시하며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또 이분은 종업원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공산화가 되어 다 기업주가 전 재산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했을 때도 이 분만은 종업원들이 구해주었다.한국유리의 발전은 기업가와 종업원의 지극 정성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일을 하면 기업은 쑥쑥 자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오산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정신이라는 사실은 설명할 필요 없다.최태섭 회장에게 돈을 왜 버느냐고 물어본다면 그 이유는 당연하다. 그 답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그럼 공부를 왜 하는가? 그 답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사랑하지 않는다면 큰 돈과, 많은 배움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것이 최태섭 회장이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의인, 곧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키우는 것이 사명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교회, 하나님의 가르침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의롭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지게 마련이다. 때때로 의를 행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오히려 잘 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인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며,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한다. 때가 되면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대신 증언해 준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세상의 법칙이라 생각한다.얼마 전 한국의 어느 교수는 ‘빈부 결정요인 연구’ 논문에서 부자가 되려면 능력보다 노력과 운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개인의 지능 등 타고난 능력과 대인관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부자가 되려면 노력, 운, 지능, 대인관계의 순으로 중요하며 사회, 주위환경 등 외적 요인보다는 자신의 노력 등 내적 요인이 경제적 성공에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한국적 상황에서 빈곤의 탈출에는 국가나 사회의 지원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의 노력과 태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도 많고,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많은데 과연 어떤 사람이 부자인가. 여러 해 전에 작고한 한국유리 창업자 최태섭 회장님은 많은 분에게서 존경 받는 기업인이었고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분이 남긴 말 중에 참 훌륭한 말이 많이 있다.“부유하기 때문에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돕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남을 위해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비록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남을 돕는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참된 부자다.”)참 부자는 잘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욥, 다윗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 등이 다 부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만 부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진정한 부자다. 많은 사람이 황금의 중량 때문에 지옥 속에 가라앉았다.세상의 부자가 하나님 나라의 부자는 아니다. 시에나의 캐서린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 부유함보다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준다고 지적하였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갈망하는 것이 일치가 될 때 비로소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부자가 된다. 하지만 물질은 아직 한 번도 소유와 갈망을 일치시켜준 적이 없다. 이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경영/경제| 2007.08.22| 4페이지| 1,000원| 조회(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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