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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근대사상
    일본 근세의 사상- 사무라이들에 의해 주창된 중상주의- 막말 사상의 다섯 가지 키워드-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 준 사상가들들어가며근세 일본의 봉건 사회를 우리는 흔히 막번幕藩 체제라 부른다. 이 막번체제는 쇼군 및 다이묘의 강력한 영주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기구로서 단지 정치기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지지하는 사회구조, 생산구조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체제의 기본적인 골격은 국가 체제의 기초가 되는 공조貢租를 농민이 부담하고 있으며, 그 밑에 공工, 상商, 천민이라는 신분제도를 구성하고 있고, 이 지배 계급의 정점에 군림하는 자가 도쿠가와 쇼군이지만, 도쿠가와는 전국의 지배자라고 하는 성격과 함께 최대의 다이묘라고 하는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막번 체제는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농촌을 토대로 하여 신흥 도시와 상업자본의 발달을 영주의 권력 하에 통제하여 무사계급이 지배자의 입장에 선다고 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체제가 18세기에 접어들어 서서히 동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막번 체제는 붕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원인은 간단히 언급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18세기에 접어들어 상품경제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막번 체제의 저변을 받치고 있던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그로인해 재정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어, 지배 계급인 무사 계급의 경제적 궁핍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여기에 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민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밖으로는 서구열강으로부터의 외압이 가속화되면서 260년간 이어져 온 봉건체제가 막을 내리기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막부체제의 동요는 자연스럽게 봉건체제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기에, 막부와 번藩도 정치와 재정의 개혁을 필두로 적극적으로 체제의 재정비를 꾀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단행하게 된다. 그 개혁과 변화의 물결은 정치나 경제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이나 사상의 영역에서도 두드러지기 시작한다.한편 에도막부의 몰락은 단순히 위와 같은 국내와 오사카大坂, 교토東京가 크게 성장하였다.(2)보호 무역경제적인 발전과 더불어 에도시대에는 대외적인 외교무역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는 조일 무역에 있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쓰시마對馬의 소오宗씨의 외교노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쓰시마는 연간 20척의 무역선을 조선에 파견할 수 있었고, 이후 정례적으로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상대적으로 남방의 류쿠와 북방의 아이누는 일본에 정치적인 영향력에 상당히 편입되는 양상을 보인다. 류쿠는 중국에 조공하면서 중, 일 삼각무역으로 부를 획득하고 있었는데 1609년 시마즈島津씨에게 정복되면서 사쯔마번이 영유하게 되었다.) 아이누)는 ‘에조蝦夷’라고 불리었는데,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인 영주가 전용용지를 확대하다가 1633년 막번체제에 통합되었다.스페인, 포르투갈, 중국과의 무역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1604년 이에야스는 교토와 사카이, 나가사키의 상인에게 생사독점동업조합을 결성시켜, 포르투갈 선박이 싣고 오는 생사生絲의 독점을 실시했다. 이것은 멀리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의 무역을 통제하여 이윤을 막부가 독점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 1601년부터 제도화 된 슈인센朱印船제도는 이에야스가 발행하는 도항허가장을 매개로 일본상선과 남쪽의 교역을 보호, 관리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었다.) 막부의 무역관리는 크리스트교의 금지령과 맞물리면서 쇄국의 형태로 강화되어갔다. 막부 초기 크리스트교의 묵인을 무역의 권장과 함께 하였으나, 신자의 증가는 경계를 강화하게끔 만들었다. 이에 일본의 무역은 나가사키와 히라도平戶 두 항구로의 무역제한, 1623년 포르투갈인의 추방, 이듬해 스페인과의 단교 등으로 정부정책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윽고 1633년~39년까지 쇄국령이 내려지게 되었다.이처럼 일본의 대외무역은 대 중국과 조선, 류큐와 아이누로 대변되는 조공무역)과 동남아시아의 서구 열강과의 제한 무역을 통해 철저히 막부중심의 보호무역의 형태로 도시아키本多利明는 정부주도의 대외무역을 주창했다. 또한 교통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주장했는데, 교통과 육상뿐만 아니라 해상 교통까지도 포함된다. 도시아키는 농민을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는 교통로를 넓혀 생산물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해상 교통의 권리를 상인들의 손에서 떼어 내어 막부가 직접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상교통의 문제는 (막부의 의지와는 다른)개항 문제로까지의 발전된다. 도시아키는 제한된 땅에서 나오는 문물로 인한 경제력의 한계를 직시하고 관선을 제조하여 적극적으로 해외 무역을 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번과 번의 경제 규모를 넘어서 국가 대 국가의 경제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특징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가이호 세이료海保靑陵는 상품 경제 발전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상가이다. 세이료는 사회의 제문제가 기본적으로 상품 및 상업 경제의 발달 과정에서 온 것임을 문제 삼았다. 이에 상업 자본을 긍정하고 여러 가지 사회, 경제적 기구를 신장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는데, 막번 체제를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경제의 재건을 모색한 것이다.세이료는 무사의 의의를 돈과 결부시켜 좌우됨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무사들의 의식 개혁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무사층은 대개 가록만으로는 생활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이 돈을 차용하는 등 매우 궁핍한 생활을 했다. 세이료는 이런 상황에 대해유교 윤리에 고착됨에 따라 천시되어온 상업의 풍조를 개선하고 무사가 합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것을 추구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에도 시대의 봉건 체제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 구체적인 방책으로서 세이료는 두 가지를 제안했다. 먼저 그는 각 번이 영지 내의 유통 루트를 관리함으로써 민간의 출입 상인으로부터 통행료를 징수할 것을 제안했다. 둘째로 그는 번이 주도하여 특산품을 개발하고 그 제조와 판매를 관리할 것을 제안했다. 즉 이것은 번의 전매제도이다.도시아키와 세이료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무사의 입장에 가까웠 문명’ 이라는 사고방식으로서, 이 때 ‘이夷’란 그 중화사상의 영향 바깥에 있는 세력 즉 미개한 야만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攘’은 쫓아내다는 뜻이다. 즉 양이란 ‘문명이 더럽혀 지지 않도록 문명을 알지 못하는 오랑캐가 접근해오면 이들을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라는 배타적사상을 가리킨다.일본에서 문명이란 존왕 그 자체이므로 일본의 천황을 숭경할 줄 모르는 유럽세력이 일본 땅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존왕과 양이는 한 세트를 이루게 된다. 또 도쿠가와 막부는 제3대 쇼군 이에마쓰 통치기부터 쇄국정책을 취했으므로 쇄국을 유지하는 것이 그대로 양이가 된다.이러한 양이 사상은 항해술이 발달한 19세기 당시의 국제 사회에 있어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했다. 따라서 일본인 중에서 현실적 인식을 하는 이는 쇄국정책과 양이사상을 비판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쇄국을 하고 있는 이상, 양이는 ‘현실 긍정의 사상’으로 여겨졌다. 또한 당시 천황은 개인적으로 유럽문화를 싫어한 양이주의자였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양이사상은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올바른 ‘정의’로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양이를 비판하는 현실주의자는 일본인으로서 자격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한편 개국은 말 그대로 모든 나라와의 국교를 맺을 것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인데, 이는 당연히 ‘쇄국’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 존왕 사상의 입장에서는 ‘악의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개국 쪽이 현실에 더 가까운 정당한 주장이었다. 실은 막부 요인 중에는 페리 내항시의 노중이었던 아베 마사히로를 비롯하여 ‘속내로는 개국주의자’였던 인물이 적지 않았다.4. 좌막과 토막, 그리고 막말의 사상‘좌막(佐幕)’과 ‘도막(倒幕)’은 대립적 키워드이다. 전자가 도쿠가와 막부의 편에 서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지향하는 혁명파의 입장이다. 좌막파에는 도쿠가와 본가 도쿠가와 어삼가(御三家)), 그리고 아이즈 번(會津藩)처럼 도쿠가와 일족과 연고가 깊은 번들이 속해 있다. 한편 도막파 진영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하여 암살당하고 말았다.(사쿠라다몬가이(櫻田門外)의 변) 이미 막부의 전제 정치가 통용되지 않는 시대로 흘러가게 되었고, 막부의 독재는 무너지기 시작된 것이다.이 와중에 어느덧 하급무사들 중에는 무조건 양이만 외칠게 아니라 사태에 근본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막부를 타도하자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이 제시하는 새 정부형태는 이때까지 정치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천황 중심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근왕지사라고 부르며 주로 막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사쓰마, 죠슈, 도사번(土佐藩, 현 시코쿠 남부 코오치현)을 중심으로 근왕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때 시대를 풍미했던 근왕지사쪽 히토키리(人斬り) 들은 좌막 쪽 인물들의 암살을 호시탐탐 노리며 다녔고 좌막에 속하는 신센구미(新選組) 등은 이런 근황 유신지사들을 색출하느라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게 되고, 이런 싸움이 계속되던 차에 결국 대세는 기울어 사쓰마와 죠슈의 합작을 계기로 서남웅번을 중심으로 한 도막파가 중심이 되어 조정을 이용한 쿠데타적 상황으로 전개, 약 270여 년 간 지속된 에도 막부는 형식상 여기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즉 좌막 → 존왕양이 → 존왕도막으로 막말 사상은 이어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뛰어난 독창성을 보여 준 사상가들1. 에도 시대의 독창적 사상가에도 시대의 사상은 어떤 것이든 대체로 ‘원점이 되는 사상’을 과거에서 구했으며, 거기에다 면밀한 사색을 첨가함으로써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일체 과거에서 원점을 찾지 않은 채 철저히 백지부터 시작하여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고 사색을 심화시킴으로써 완전히 독창적 사상을 완성시킨 사상가도 있었다. 그런 사상가로는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1715~1746)와 안도쇼에키(安藤昌益,1703~1762)가 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독창적 사상가라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기존 사상이 아무리 역사를 움직이는 권위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눈으로 기존 사상을 비판할 수 있었던 사상문이다.
    인문/어학| 2007.12.09| 10페이지| 1,000원| 조회(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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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천국립박물관을 다녀와서
    대부분 사람들의 강원도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우스갯소리로 강원도하면 감자라고 한다. 어떻게 들으면 약간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절대 틀린 소리가 아니다. 두툼하게 오른 살 사이에서 김이 어른거리는 찐 감자와 낡은 막국수 틀에서 막 뽑아 나온 국수로 만든 메밀국수에 입맛 다셔지고 거기에 중국산 콩이 아닌 순수 한국산 콩으로 만든 담백한 두부를 포함한다면 금상첨화이다. 가히 강원도의 대표 별미라 할만하다. 비록 한 단면만 살폈지만 강원도의 이미지는 분명, 신 사회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분명 강원도만의 특별한 문화를 찾아나간다. 그러한 강원도를 조금 더 가까이서 체험하기 위해 국립춘천박물관을 찾았다.국립춘천박물관은 강원도 지역에 처음으로 지어진 국립박물관이라고 한다. 국립춘천박물관은 예백(曳白)문화권이었던 강원도의 역사적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전시, 보존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겠다는 목적이 본래의 건립 배경이었다고 한다. 강원도민의 오랜 열망 속에 2002년 10월 30일에 개관하였고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강원도의 문화유산을 보존해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별 전시 내용을 보면 상설전시실1은 선사의 강원 을 주제로 강원지역의 선사문화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상설전시실2는 고대의 강원 으로 삼국시대의 문화상과 불교문화가 계획되어 있었으며 상설전시실3에는 고려의 강원/금강산 이라는 주제로 귀족문화와 불교문화, 강원의 보고(寶庫)가 계획, 전시되고 있었다. 끝으로 상설전시실4에는 조선 및 근?현대의 강원 으로 양반문화, 유교문화와 강원의 미래가 담겨져 있었다.먼저 ‘선사의 강원’ 전시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주먹도끼, 긁개, 밀개 등 구석기인들의 생활도구와 복원된 홍천 하화계리유적의 석기 제작장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석기 제작장에는 가운데 장타원형 모릇돌이 있었고 주변에 거의 완성된 석기와 망치돌, 격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양구 상무룡리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재 석기로 새기개와 밀개, 좀돌날몸돌과 좀돌날 등은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흑요석을 통해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교역과 이동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신석기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을 통해 신석기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토기와 돌검, 화살촉에 시선이 갔는데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등에서 출토된 덧무늬토기와 양양 지경리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에서는 표면에 문양을 표현하는데서 여러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났다.청동기 유적에서는 한국식 동검, 구멍무늬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등 강원지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들이 전시되어있었다. 특히 토기의 이름들이 생소했는데 구멍무늬 토기는 청동기시대에 가장 유행한 민무늬토기의 한 종류로 아가리 바로 밑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한 줄 내지 두 줄로 배치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공열토기, 유공토기라고 불린다고 한다.고대의 강원부분에서는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었는데 강원도 각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고분유적을 통해 당시 삼국의 문화를 비교할 수 있었다. 이때에는 철기가 등장하고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게 되어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는 시기이다. 강원지역의 특징적인 집터 유적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원주 법천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자루솥과 동해 구호동에서 출토된 뿔잔은 나의 시선을 한동안 머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청동자루솥은 액체를 데우는 데에 사용했던 용기의 일종의 몸통에 말발굽 모양의 다리 3개가 있고 손잡이가 붙어있는 형태이며, 주로 청동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원주 법천리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 한다. 뿔잔은 소나 코뿔소 등 동물의 뿔을 잘라 술과 같은 음료를 마시던 습관에서 유래된 용기라 한다. 처음에는 짐승뿔을 잘라 이용하였다가 점차 상아나 금속, 옥, 토기, 등으로 만들었다. 형태는 뿔의 모양을 본떠 만든 것과 굽다리에 뿔잔을 붙인 것 등이 있다 한다.통일신라시대의 유적들도 많았는데 토기, 기와, 불상, 범종 등을 통해 강원지역에서 꽃피운 불교문화를 만나볼 수 있었다. 또한 복원된 선림원지종과 함께 울리는 은은한 범종소리도 감상할 수 있었다. 선림 원지종은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으로 종의 하대에는 불좌상을 연이어 배치하였고 연화보상화문으로 장식된 4개의 연곽 안에는 9개씩 연꽃봉오리연뢰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어 있었다. 또한 광배라는 석조 조각은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하기 위하여 부처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광배의 종류에는 머리에서 발산되는 빛을 조각으로 표현한 두광과 몸에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신광, 전체를 감싼 거신광이 있다 한다.다음에 간 곳은 2층에 있는 고려의 강원부분이었다. 그곳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청자, 금속공예품 등을 중심으로 강원지역의 문화,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관아 건물로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강릉 객사문이 모형으로 축소 제작되어 전시되어 있었다.또한 강원지역의 대표적 불교문화재인 국보 제124호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이 전시되어있었다. 이외에도 사리구 등의 불교공예품을 통해 사상을 예술로 승화시켜 정착한 고려불교미술의 정수를 느끼고 동시에 강원인의 예술적 감각을 엿볼 수 있었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강릉시 한송사 절터에 있던 보살상으로 보좌살상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높은 원통형 보관과 입가의 엷은 미소가 특징이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만든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한다.조선, 근 현대의 강원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강원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고지도와 각종 고문서, 불교미술품, 회화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보물 제 745호 월인석보와 영월 창령사지출토 나한상 등을 통해 이 지역의 불교문화를 청풍부원군 상여와 목인형들을 통해 장례풍습을 알 수 있으며 강원의 생활과 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유리원판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월인석보는 석가의 일대기와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국영하여 세조 5년 왕명으로 주자소에서 간행한 초간본이라 한다. 그리고 영월 창령사지 출토 나한상은 그 숫자도 놀랐지만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표정들이 전혀 다르고 생생하게 느껴져 아직도 그때의 놀라움이 남아있다. 나한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진지를 얻어 세상 사람들의 공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성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월 창령사지에서 나한상과 나한상을 봉안했던 나한전 터가 최초로 함께 발굴되었으며 출토된 다량의 나한상들은 오백나한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금색 거북모양이라 눈길을 끈 단종과 그 왕비 보인은 처음에는 뭔지 몰랐는데 보인이란 옥새 곧 임금의 인장, 왕비나 왕세자빈 등의 인장을 뜻한다 한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698년 임금으로 복위되면서 만들어진 보인이라 한다.
    인문/어학| 2007.10.24| 6페이지| 2,000원| 조회(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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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원장전
    주원장전1. 유랑 청년1. 어린 행자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4년의 상반기에 회하(淮河) 유역의 백성들은 가뭄과 메뚜기떼 피해, 그리고 전염병의 창궐로 극심한 재난을 겪고 있었다. 고장촌(孤庄村)의 주오사(朱五四)집안은 대가족이었는데, 반 달 만에 세 식구가 죽었다. 주오사의 막내아들 원장(元璋)은 원나라 천력(天歷) 원년(1328) 9월 18일 생으로, 보기 좋게 생긴 몰골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균형이 잡혀 있고 위엄과 침착함이 흐르고 있어 누구든지 그를 한번 보면 다시는 그 괴상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어릴 적에는 놀이는 만들어내는 데 가장 재주가 있어, 나이가 몇 살 많은 애들조차 그가 시키는 대로 곧잘 따랐는데 가장 즐겨하던 놀이는 황제놀이였다. 또 책임감이 강해 많은 아이들이 진심으로 자기들의 두목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원장이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육친(六親)은 모두 끊어져, 천지는 비록 넓다 해도 이 몸 하나 의탁할 데가 없었다. 이에 옆집의 왕대랑이 예전에 주오사가 황각사(皇覺寺)에서 원장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던 일을 상기시켜 주어 황각사의 행자가 되었다.2. 행각승황각사에 오자 노스님 일가족과 절의 모든 중들의 잡역까지 맡았으니, 실상 종살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원망만 가득 찼으나 다투고 나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으므로 참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황각사가 천재(天災)가 너무 심해 소작료를 받을 수가 없자 억지로 중의 행색을 꾸며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돌며 목탁을 두들겨댔으므로, 세상 물정을 보고 시야가 넓어졌으며 사회지식을 풍부하게 쌓았고 강인한 체력을 단련시키게 되었다. 지정(至正) 8년에 황각사로 돌아온 행자(行者)는 뜻있는 장부를 물색하고 많은 책을 읽는 등 장래에 큰일을 해낼 준비를 하였다. 주원장이 유랑하던 몇 년 동안 회서(淮西)지방에는 뒷날 서계(西系) 홍군(紅軍)의 창시자가 되는 팽형옥(彭瑩玉)이 숨어서 활동하면서, 혁명세력을 조직하고 있었다. 팽형옥이 비밀모자랐으며 병력도 적었다. 원장은 머리를 짜내어 서달, 탕화 등 어린 시절의 동무들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여, 일약 병사를 거느리는 군관이 되었고 1년 뒤에는 전공(戰功)에 따라 다시 총관(總管)으로 승진하였다. 원장이 보기에는 호주에만 묶여 있다가는 세력을 키울 수 없음은 물론, 언젠가는 사단이 벌어질 것 같아 주장(主將)의 허락을 얻어 측근인 서달과 비취 등 24명만을 대동하고 이동, 남쪽의 정원(定遠)을 시작으로 병사를 모집하였다. 그는 기율을 가장 중시하여 편제를 다시 짜고 훈련을 강화하여 많은 수의 용감한 장수들과 수만 명의 훈련을 받은 대부대를 거느리게 되어, 이후의 군사활동에 견고한 기초를 다져 놓았다. 정원사람 이선장(李善長)의 권유로 평민 출신의 동향 황제인 한 고조를 모범으로 삼은 원장은, 원군과의 한차례 격전 후 한 지방을 진수(鎭守)하는 대장이 되었다. 원나라 지정 15년 2월, 홍군의 사령관인 유복통이 한림아(韓林兒)를 찾아내어 황제로 옹립하여 소명왕(小明王)이라고 하였으며 국호를 송(宋)이라고 하고 연호를 용봉(龍鳳)으로 정했다. 곽자흥의 병사 후 주원장은 좌부원수(左副元帥)가 되었다.3. 대원수화주도원수부(和州都元帥府)의 세 원수 중, 주원장은 자기 계열의 군대가 있었고 이선장이나 풍국용 같은 참모가 있었으므로 서열은 세 번째이지만 사실상 일을 주관하는 엄연한 주수(主帥)였다. 화주에서 원군의 몇 차례 포위 공격과 식량고에 시달리던 홍군은 장강 건너편의 태평(太平)부를 점령하고, 곽천서와 장천우 두 원수가 죽은 뒤 원장은 이제 명실상부한 도원수(都元帥)로서 소명왕 휘하의 대장이었다. 용봉 2년 3월 초하로, 원장은 대군을 이끌고 집경로(集慶路)를 함락시키고 응천부(應天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원장은 원군이 남쪽을 돌아볼 여유가 없던 기간에 근거지를 굳히고 실력을 키워, 단계적으로 원나라의 분산된 병력과 할거하고 있던 군웅을 소멸시켜 나가며 강토를 넓혀 갔다. 원장은 식량부족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며 강한 군대와 풍 제정과 공신 살육도 모두 이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원장과 장사성이 10년을 겨루며 치고 받았으나 쌍방에 모두 이득이 없다가, 원장이 무창에서 개선한 뒤로 군사력을 집중시켜 동오에 진공하기 시작하자, 국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원장은 회수의 여러 성을 점령한 뒤 지정 26년 5월, 격문을 돌려 장사성을 성토하였는데, 이 격문은 실질적으로 홍군을 성토하는 격문이었으며 주원장이 미륵교와 홍군을 배척하고 배반함을 공개적으로 또 정식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이는 주원장의 일생 가운데서 한 시대를 구획하는 큰 변화로서, 농민봉기의 영수로부터 지주계급의 영수로 변신한 것이다. 제3차 공세 때 평강성을 포위하여 밤낮으로 공격하여 사성을 사로잡으니 동오는 드디어 멸망하였다.3. 남정북벌원장은 원나라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유리한 형세를 틈타, 동과 남으로 정벌을 단행하여 지반을 키워 나가고 군사력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서오(西吳)의 원장은 원군이 내전에 바쁘고 주요 군사력이 서로 물고 물리는 유리한 시기에 남정과 북벌을 한꺼번에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복건과 양광(兩廣)을 평정한 뒤에 남부는 사천과 운남 이외에는 모두 한 덩어리로 연결되었고, 후방의 인력과 재력을 무제한으로 북벌군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북벌군이 무서운 기세로 중원을 석권하고 홍무 원년 8월 2일, 내전이 한창인 대도에 진입하니 원나라 몽한지주계급의 연합통치는 이 날에 정식으로 뒤엎어졌다. 북방평정 후, 홍무 4년 정월에 출병하여 하(夏)를 공격하니, 10월에 탕화 등이 천촉(川蜀)의 군현을 모두 평정하여 하(夏)는 멸망하였다.4. 개국 황제1. 국호를 대명(大明)으로남정북벌을 달성한 뒤, 원장은 중서성좌승상(中書省左丞相) 선국공(宣國公) 이선장(李善長)의 권유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홍무 원년(1368) 정월 4일, 주원장은 천하의 이름을 대명(大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하였으며 응천(應天)을 수도로 삼았다.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통일제국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어 까닭없이 대외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였고,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침략을 용납하지 않고 강토를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명조가 각 소수민족 인민을 통치하는 원칙은 두 가지였다. 변경에서는 방임정책을 펴 편지의 토사가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면 간섭을 하지 않았고 내지에서는 동화정책을 폈다.3. 수도 건립과 북변의 방어홍무 원년(1368)에 원장이 황제를 칭하고 남정북벌을 하며 홍무 20년(1387)에 요동을 모두 평정하여 남북을 통일시켰다. 이 20년 사이에 원장의 지위는 왕으로부터 황제로, 다스리는 판도도 남방 일부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오왕시대의 도성이 이 확대된 이후의 국면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국도(國都)의 확정과 국방계획의 마련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그 무렵 조야(朝野)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두 가지였다. 황조의 건도와 제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국도를 동남의 재부(財賦)지구에 두고 자제를 북변의 방어거점에 봉하면, 경제?군사적으로 황가의 통치권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어 모두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홍무 25년에 황태자가 병사하니 천도에 대한 일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았고, 제왕의 분봉과 취번을 실시하여 친왕에게는 변경을 지키게 하고 군무만을 처리하게 하였다.4. 중앙집권의 강화주원장은 오랫동안 국가를 다스린 실제 경험을 총괄하고 원나라 통치 90년의 성공과 실패에 교훈을 얻고 연구와 논쟁과 몇 차례의 개혁을 거쳐, 특히 잔혹한 통치계급의 내부투쟁을 거쳐 전국을 통치하는 관료기구를 단계적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이를 더욱 집중되고, 더욱 귄위 있으며, 더욱 완비된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 모든 대권을 조정에 집중시켜 지방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로 바꾸고, 중앙의 중서성을 폐지하고 육부(六部)로써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주원장이 황제로서 승상 직권을 겸하였으므로 중앙집권이 발전하여 최고봉에 이르렀고, 주원장은 역사상 권력이 가장 강한 군주가 되었다. 홍무조 30여 년 동안에 격렬하게 한 시기로서, 탐관오리를 가장 많이 죽인 시기였으나 주원장이 죽은 후에도 부정부패현상은 여전히 남았다. 주원장은 가장 권위있는 황제로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었어도, 사회제도와 사회성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2. 상비군과 특무 조직중소지주계급을 기초로 한 고도로 집중된 주원장의 봉건통치정권은 방대한 상비군과 엄밀한 정보조직을 통하여 인민의 반항을 진압하고 국가를 보위하는 작용을 하도록 하였다. 주원장이 만든 상비군은 농업생산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하여 유기(劉基)가 만든 것이 위소제도(衛所制度)였다. 원장은 용봉 10년 4월에 부오법(部伍法)을 만들어 거느리는 인원수에 따라 장령의 칭호를 정하였는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상비군의 조직을 위(衛)와 소(所) 2급으로 나누었다. 특무조직은 검교(檢校)와 금의위(錦衣衛)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검교는 주원장이 특별히 설치한 특무인원으로, 그 직무는 “경사에 있는 각 아문 관리들의 불법행위와 풍문을 모조리 보고하는 것”이었다. 금의위는 역모를 비밀리에 정탐하고 거리를 늘 주시해야 하는 하나의 완비된 군사특무조직으로서, 황조의 부(府), 부(部), 원(院)과는 예속관계가 없었으며 황제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고 오직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지방에는 순검사(巡檢司)가 설치되었는데 직권은 도적을 잡고 수상한 자를 심문하는 것이었다.6. 사회생산력의 발전1. 농업생산의 회복과 발전명초 사회생산력의 발전은 원말 농민봉기와 농민전쟁의 결과 원말의 대지주계급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고, 또한 새로운 통치자 주원장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어 농민에게 얼마쯤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보의 결과는 먼저 농업생산의 회복과 발전에서 드러났다. 20년 동안의 오랜 전쟁으로 파괴되면서, 인구가 줄고 경작지가 황폐해진 것은 명초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와 같은 파국을 빨리 바꾸고 재정수입을 늘이기 위해, 주원장은 농민에게 몇 년 동안의 조세와 요역을 면제하였고되었다.
    인문/어학| 2007.10.24| 7페이지| 1,500원| 조회(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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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기사학과 그 근세론 비판
    궁기사학과 그 ‘근세론’ 비판머리말나이또오가 송대 이후 근세론을 제창한 것은 1918~19년경의 일이었다. 당과 송 사이에 모든 분야에 걸친 현저한 역사적 변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근세라고 규정하였고, 이는 그 뒤의 중국사 연구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혁기의 발견은 현상적 파악의 면이 강하고 중국사를 그 구조의 내적 발전으로서 파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뛰어난 변혁기의 파악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중국사회를 경제적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한 것은 꼭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결국 그는 중국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정부의 중국침략정책을 긍정하며, 그 정책에 대하여 동양사가로서의 지도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미야자끼 이찌사다는 나이또오의 근세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 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를 풍부하게 새로 개척하여 중국사를 체계적으로 다시 파악하여 그것을 세계사적 발전 가운데에 성격지었다. “역사사상을 파악하는 방법으로서”는 “결국 종래 유럽사에 적용된 3시기 구분법이 가장 편리하다.” 그에 의하면, 고대사적 발전이란 도시국가로부터 구심적 통일대영토국가의 형성이고, 중세는 그 분열 곧 원심적 장원제사회이고, 근세는 중세의 부정 위에 선 내셔널리즘에 의한 재통일의 시대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근세는 중국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 안에서뿐 아니라 세계사적 근세의 뜻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미야자끼의 근세론을 이해하는 데는 중국근세론의 범위 안에 머무를 수 없고 그의 중국사상, 세계사상의 체계적 이해가 필요하다. 그 영역은 동양 서양의 구분이 없으며 옛과 지금에 두루 통달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사회에서부터 사상?종교?문화?회화에 이르기까지 널리 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 누구나 다 아는 ‘미야자끼사학’을 여기서 논하려는 것은 첫째로는 나의 역량의 한계 때문임과 동시에, 일정한 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미야자끼사학에서는 근세론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그의 중국사 이해의 열쇠가 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 근세론과 독제. 그저 송왕조 성립까지의 장기에 걸친 전제지배의 역사 또는 그 지배하에 있는 향촌에 있어서의 공동체적 여러 관계가 송 이후의 전제권력의 형성을 어떻게 규제하고 있는가? 송왕조의 통일을 중세적 분열의 부정, 재통일로서뿐이 아니라 그것에 영향을 주고 있는 연속의 측면도 고려하지 않고서는 송 이후의 전제지배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지 않겠는가?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집권적 관료기구를 집요하게 필요로 한 기반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태까지의 송대사 연구의 주류인 생산관계로서의 지주?전호관계의 관점만 가지고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는 찾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중국 전근대사에 있어 우리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미해결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전제지배의 기반으로서의 향촌구조의 재검토가 필요한 것이다.2. 근세론과 토지소유송-이후-중세설에 대립하는 하나의 중요한 논거로서 미야자끼의 근세자본주의설이 있다. 그는 농촌 및 도시에 있어서의 자본의 조기전개를 말하고 있다. 농촌에 있어서의 업주, 상업상의 경기, 그리고 정치에서의 서리 이 세 중간계급의 발생이야말로 “중국근세의 사대부로 하여금 사대부이게 하는 3대 지주인 동시에 또한 중국 근세사회의 특색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먼저 대토지경영에 있어 그가 중간경영자라고 말하는 업주의 발생에 대하여 잠깐 검토해보기로 하자. 그에 의하면 업주란 “지주와 소작노동자의 중간에 있는 경영자”이고 “소작지의 경작이 부곡과 같은 천민에 의해 행해질 경우 이 중간적인 경리자는 지주측에서 두게 되지만, 전호가 원래 자유민이고 지주와의 사이에 봉건적인 주종관계가 없는 경우 전호 가운데서 이 중간경리자가 출현한다”라고 하여 전주-업주-종호의 이중소유관계를 밝혀놓았다. 그는 전호측에서 업주가 분리되는 과정으로서 ①투헌 ②매매 ③궤명협전 ④포전 ⑤개간의 다섯 경우를 상정하였는데, 나의 결론은 이들은 거의가 지주층 또는 토지소유자층의 업주화의 과정이지 직접생산자로서의 전호층의 업주화는 아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있어서의 근세적 성격을 밝혔다. 토지소유의 영세화, 소작관계의 분산화에 따라 지주전호간의 신분적 예속관계는 소멸하고 자본주의적 경영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영세분산화가 과연 동시에 전호의 신분해방을 직접적으로 가져왔을까? 이 시대의 전호는 자립재생산도 불가능할 정도로 고액의 사조의 수탈을 받고 토지를 매개로 하여 결합된 지주에게 고리의 채무관계로 속박되어 있었다. 미야자끼는 토지소유의 영세분산화 상황하에서 지주가 전호를 혹사하는 것은 중세적인 법제적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적 위력이며 양자는 대등한 경제적 계약관계이고 전호는 지주의 인격적 신분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민이라고 하였다. 그라나 한편으로 중대한 봉건적 성격이 남아 있다고도 하고 있다. 그는 명대에 있어서의 전호의 사조불납에 대한 관권권력의 개입과 전호의 고공화를 봉건적 성격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한 공권력의 개입은 봉건적 잔재로 가볍게 처리해버리기에는 너무도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는 지주의 개별적인 경제의 강제를 국가가 대신해주고 있었다고 보아야지 지주?전호관계가 순경제적 계약관계였다고는 할 수 없다. 지주는 ‘자본’의 힘만 갖고는 전호 지배를 관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왜 지주가 스스로의 힘을 가지고 사조 징수를 관철하지 못하고 공원력의 개입을 필요로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지주?전호관계의 성격 그 자체에 내재함과 동시에 위에서 말한 전제권력의 구조와의 관계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3. 근세론과 ‘자본주의’미야자끼가 지주가 전호를 혹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위력’ 탓이라고 할 때, 그가 쓰는 ‘자본주의’라는 말은 그만이 쓰는 독특한 개념이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농민층분해, 자본의 원시축적과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소농경영의 부농화의 방향에서 파악된 것도 아니다. 그의 근세자본주의란 전기적 상업자본, 고리대자본에 바탕을 둔 유통경제를 그 실태로 하고 있다. 그의 근세자본주의의 실태는 봉건사회에 내재하는 전자본주의적 경제구조로 하면 농민운동이란, 첫째로 그 동기에 있어 농민이 계급의식을 갖고 일어섰는가, 둘째로 폭동의 주체가 농민이며 그 운동에 농민적 의식이 작용하게 됐는가, 셋째로 결과적으로 농민의 지위향상을 가져왔는가의 세 가지 중 그 어느 하나에 해당되지 않으면 그것을 농민운동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중국 근세의 여러 반란의 특질은 그 만연성에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첫째로 지식인의 참가에 의하여 정권 획득을 위한 혁명운동으로 변한 것, 둘째로 비밀결사의 기존세력을 지반으로 한 것, 비밀결사의 구성원은 소금밀매 상인이나 교통노동자로서 농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농민전쟁연구에 대해서는 그 실증의 과정이나, 개개의 운동의 이해방식 또는 농민운동론에 대하여 나도 약간의 의문은 갖고 있지만 미야자끼처럼 농민을 다른 일체의 계층과 분리하여 농민운동을 좁은 틀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다른 농민운동을 떼어내버리는 방법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등무칠의 난 그 자체도 순수한 농민운동이라고는 하나 엽종류 등의 광도의 운동과 떼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송 이후의 반권력투쟁은 모두 농민운동 범주에서는 제외되어 버린다. “정당한 요구를 내걸어도 용납되지 않고 그저 토지를 붙들고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가능한 비참한 처지에 있는 농민은 늘 보호자를 구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수동적이었으니 강력하게 보호해주는 자를 따라갈 따름이었던 것이다. 중국근세사회의 특질은 도리어 이러한 점에 있는 것이다.” 근세사회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층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된 담당자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송 이후 청말에 이르는 여러 반란을 근세적이라고 보는 것은 그 주체가 농촌과는 유리된 계층으로서 농민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근세의 여러 반란은 도시유민층을 주체로 한 운동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같은 유민층의 이해는 그의 근세자본주의의 이해에 대응되어 있는 것이다. 태평천국도 또 유민층을 주체로 한 운동으로 근세 여러 반란의 특질인 만연성을 갖추고 있으며 농민이 최종적으로 봉건적 지주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은 토지해방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5. 근세론과 송학미야자끼에 의하면 근세란 무엇보다 종교개혁, 학예부흥, 고대통일에의 동경, 인도주의, 과학존중, 미신배제이고 중세의 부정 즉 현상타파라는 공통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바로 유럽의 르네쌍스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근세는 이슬람선교 운동의 영향을 받아 송대에서 시작된다. 종교개혁은 정토교?선종 등의 불교 및 도교이며 유교의 개혁운동인 송학의 형성은 종교개혁임과 동시에 더 나아가 학예부흥이라고 하였다. 내가 의문나는 것은 송학이 과연 중국사상사에 있어서의 르네쌍스였는가 하는 점이다. 유럽에 있어서의 종교개혁?학예부흥은 근대사회 형성의 사상적 기점이다. 송학은 당까지의 훈고적 유학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변철학과 실천윤리를 체계화한 신유학이었고 전통적인 오경 중심의 국교유학을 비판하였다. 주자의 ‘격물궁리’의 설은 합리적 사변을 그 방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이란 구체적으로는 삼강오륜이고 상?하의 도덕적 신분질서를 영원의 이로 삼는 것이고 그 향약설은 폐쇄적인 가족윤리를 그 근저로 하고 있다. 그 뒤의 독재군주지배의 사상적 지주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 명교적 성격 때문은 아니었을까. 중국혁명의 사상운동이란 그러한 주자학적 명교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적 통제의 이데올로기와의 싸움이고, 그 운동은 르네쌍스를 기점으로 하는 유럽 근대사상의 세례를 통하여 진행된 측면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그는 일본에 있어서의 학예부흥을 고꾸가꾸에서 찾고 그것을 근세적 합리주의의 정신으로 본다. 고꾸가꾸 사상은 그 중에서 르네쌍스적 성격을 볼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도꾸가와 시기에 있어서의 유학사상의 전개도 학예부흥으로 보고 있다. 본래의 주자학과 도꾸가와체제에 수용된 주자학이 반드시 같지는 않았던 것 같으며 그 뒤에도 주자학은 외래사상으로 도꾸가와 사회 내에서 사상적 변용을 이뤄갔다. “세 개의 세계에서의 학예부흥의 가치가 반드시 .
    인문/어학| 2007.10.24| 6페이지| 1,5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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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남아의 불교에 대해
    1. 머리말동남아시아지역 불교를 남방불교라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방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하고 이 지역의 불교를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무지의 극치를 달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자료의 빈곤과 관점의 편협성으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것이나 남방불교에 대한 무지의 극복을 조금이라도 이루는데 이 글의 목표가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 불교의 성격과 이 지역 대중들이 현재 어떠한 관점으로 생활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진행시키고자 하는 것을 먼저 밝혀 둔다.우리는 먼저 동남아시아지역에 대한 고찰을 해봐야 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지역, 그리고 스리랑카(샤일론섬)까지도 포함하는 일정치 않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를 자세히 보면 마치 남성의 성기와 같은 모양인데 양옆으로 들어오는 인도 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부딪히는 문화국경선으로 크게 중국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과 인도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나눠질 수 있다. 물론 근대에 여러 유럽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필리핀에서처럼 기독교의 전파를 통한 서양화되고 불교적, 민족적 성향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이들 지역은 불교를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불교국가들의 지역이다. 현재 동남아시아지역은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고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세계사에서조차 등한시되고 외면되는 지역이며 이것은 불교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2. 본문동남아시아지역을 먼저 지리적인 요건으로 살펴보자. 이 지역의 나라로는 버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 라오스 인민민주주의공화국, 타이왕국, 민주 캄보디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공화국, 필리핀 공화국, 싱가폴공화국, 그리고 스리랑카까지만 이 글에서는 포함하는 것으로 한다. 지형별로 나눈다면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이슬람교도와 서양의 침입에 의해 불교권이 소멸했으며 이 사실은 민족적 전통성이 많은 부분 비해 그 당시 엄청나게 발달한 인도문화에 융화되어 힌두교 등의 문화와함께 들어온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므로 사실상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분리할 수 있는 시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중국의 잦은 침입을 받았던 월남만큼은 지속적인 중국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유 불 선 혼합형태의 중국식 대승불교가 전파되는 등 중국문화가 지배적으로 전파되었는데, 본래 월남이란 말은 중국의 월나라의 멸망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정착하여 나라를 구성한데서 비롯한 말이다. 이 지역은 천여년 정도의 중국의 지배 속에 있으면서 중국문화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던 곳으로 다른 동남아시아지역과 역사적 출발점에서는 분리되는 곳이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동남아시아국가들과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된다.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제국주의국가인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들에 의해 타이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의 식민지 생활은 이들 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강한 반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비슷한 시기에 해방한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민족의 자존심을 미국과 일본에 팔고 있는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이들은 과거 제국주의였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며 그 영향으로 사회주의 특히 불교적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 교리가 현실과 떨어진 신앙이 아니라 바로 현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바탕 속에서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도 불교를 통해 민중이 통일되었고 서양에서 물밀듯이 몰아치는 문화적 충격을 완충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남방불교】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견되어 상좌부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 불교는 팔리어설이 있지만 대체로 석존의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여겨지고 본격적인 전도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아들(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에 의해서이다. 마힌다 일행이 스리랑카로 온 경로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며 이들은 서부 인도지역의 팔리어를 사용하는 상가(승가)로서 이 상가는 상좌부파였다.이 당시 스리랑카의 국왕은 데바낭피아티사(재위 BC 250-210)로 이들에게 수도인 아누라다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를 기증하였고 이것이 정비되어 마하비하라(大寺)라는 사원이 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봐서 스리랑카에도 자이나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우대 받았다는 것은 스리랑카에 벌써 불교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이거나 건국신화에 인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있는 왕족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역시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스리랑카에서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 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후 밧타가마니아바아(재위 BC 43-17)왕이 자이나교사원을 부수고 아바야기리비하라(Abhayagirivihara,無畏山寺)라는 사원을 세워 마하티사 장로에게 기증하는데 이 장로에게는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출가자이면서 일반 가정에 출입이 잦았으며 이 장로와 함께 있는 승려들도 왕의 신임을 믿고 오만한 행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강하게 비판되면서 상가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쩌면 왕실의 신임을 얻기 위한 불교집안내 권력싸움에서 마하티사 장로가 밀려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때 그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한다. 이것은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대사파(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으로 대사파의 경우 정법의 맥이 흔들린다는 위기감 형성과 그 당시 외부의 침입과 기아로 발생한 시대적 불안감이 결합유역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행해지는데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하고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하여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리하여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59-1113)가 버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와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다시 잇게 한다. 스리랑카와 버마 등은 서로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의 장로를 초청하여 법통을 잇는데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고자 노력하는 부파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이처럼 국가의 차원을 떠나 그 만큼 불교의 법통을 중시하였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때 스리랑카로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에 있었으나 대사 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주석서(註釋書)(미힌다장로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경전에 대한 주석서이다.)를 수집하여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가는 칭송을 받고 있다.스리랑카불교는 확실히 민중 속에 파고들어가 그들에게 삶의 의의와 생활원리, 공덕관념에근거한 선행 등을 가르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을 교단사 측면에서 보면 항상 왕권과 밀접한 관련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남방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11세기에 버마, 13세기에 태국, 그리고 14세기에는 캄보디아로 각각 불교를 전파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불교는 배척당했다. 그 뒤를 이어 이 섬은 네덜란드가 지배(1655-1799)하게 되는데, 이 때 다시 승단의 법통이 끊어졌다. 17세기 초 스리랑카왕 비말라 담마 수리야2세는 버마에서 비구를 초빙해 법통을 이었으. 양가의 자제로서 장남이나 외아들이 아닌 건강한 어린이만 선택되며, 이들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인 에서 교리. 수행. 일반교양. 불경 등을 배운다. 이 학교에서는 세속의 신도도 교육을 받는다. 스리랑카에서의 불교의식은 대체로 밤에 행해진다. 신도들은 밤에 사찰을 찾아와 설법을 듣는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대개 꽃이며, 낯에 꽃을 채집해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담아와 공양을 한다.중요한 불교의식으로는 포야데이와 페라헤라, 보리수공양 등이 있다. 포야데이는 매월 음력 보름날 하는 행사로 금욕, 참회의 날이다. 모든 신도는 이 날 육식을 금하며 흰옷을 입고 독경과 정진. 설법을 듣는다. 페라헤라는 유명한 불치(佛齒)를 코끼리의 등에 올려놓고 벌이는 순행제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속행사의 하나다. 이 행사는 불치가 처음 들어온 4세기경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또 보리수 공양은 성수(聖樹)가 있는 마하보디사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신도들은 나무 주위를 7번 돌며 물을 뿌린다.스리랑카 스님들의 사회활동은 철저한 자비행의 실천이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유아원과 일요학교는 영세민을 위한 것이고, 고아라든가 지체부유자를 보호하는 곳도 불교단체이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회사업가 아리야라트내씨도 독실한 불교신자다. 스리랑카 불교는 완전히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가 있다. 집집마다, 사무실과 버스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아침 5시 반 국영방송국의 예불방송에 맞춰 예불을 시작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2) 버마의 불교버마는 버마족과 카친족, 카렌족, 산족, 몬족등 다양한 종족이 모여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인도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지형상으로 말레이반도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진다. 버마족은 상부 평원지역에 있으면서 북인도 지역에서 넘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부지역은 인도의 아쇼카왕시대 전도사인 (기원전3세기경) 소나와 유타라 라는 전도사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인 몬족이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였다. 11세기초 버마족의 있다.
    인문/어학| 2007.10.13| 7페이지| 2,000원| 조회(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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