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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현실주의와 데페이즈망
    초현실주의초현실주의라는 말은 1917년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창안되었다. 그는 혁신적인 두 가지 예술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그 중 하나가 에릭 사티가 작곡을 하고 피카소가 무대막과 의상을 디자인한, 장 콕토의 무용극‘퍼레이드’였다. 이 작품의 프로그램에 실린 해설에서 아폴리네르는, 그 저녁 공연이 여러 요소들을 배합해 창출해 낸 예술적 진실은 리얼리즘을 초월한 진실, 즉 ‘일종의 초-현실주의’라고 썼다. 또 다른 예는 아폴리네르 자신의 연극작품인 ‘티레지아스의 유방’으로, 그는 이 작품에 ‘초현실주의 연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두 공연 모두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초현실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으나, 1924년의 초현실주의 운동을 야기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저자인 앙드레 브르통과 그의 친구 필리프 수포는 그 단어를 채택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길 갈망하는 새로운 표현형식에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브르통은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자신과 ‘친구들’의 문학적 예술적 시도를 묘사하기위해 채택했다. 오늘날 통용되듯이, 그 모험은 1920년대에 파리에서 시작되었고, 마침내는 시를 비롯해 회화, 산문, 조각, 사진 영화 제작 및 간섭주의자의 활동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비록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공통의 목적을 공유했고 공동의 주제들과 내용을 탐구했다 하더라도, 초현실주의는 결코 단순히 양식 그 자체는 아니었다. 초현실주의 예술은 서로 다른 많은 형태를 띠었다.데페이즈망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에서 맨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맥락을 벗어나 대상 사이에서 이상하고 낯선 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환경의 변화’를 뜻하는 말로서, 비상식적인 사물의 배치를 통해 또 다른 시각적 충격과 상상의 여지를 준다는 부분에서 데페이즈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당혹감과 신선함은 데페이즈망의 형식이 현재에까지 많은 부분에서 차용되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C.로트레아몽의 시에 “재봉틀과 양산(洋傘)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유명한 구절은 데페이즈망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의 직접적 영향을 준 인물로 키리코를 들 수 있으며 초현실주의자들 중 마그리트나 달리가 즐겨 사용했다.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회화의 극사실적 방법을 통해 데페이즈망을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 그 이후 전개된 미술의 양식 중 콜라주나 오브제등을 이용한 앗상블라주, 컴바인 페인팅, 누보 레알리즘, 정크 아트와 같은 많은 부분에서 넓은 의미의 데페이즈망을 찾아볼 수 있다.데페이즈망의 사상적 형식적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사실 고대미술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16세기 미술이나 낭만주의, 상징주의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도 그 형식적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과 불교의 선(禪)사상에서 데페이즈망의 사상적 기원을 간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유일의 진리가 아닌 모순과 부정을 통한 진리의 세계를 말한다는 것에서 그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다.모든 미술사의 양식이 그러하듯이 초현실주의에서 즐겨 사용하던 데페이즈망 역시 한명의 작가에 의해 한순간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한명의 작가가 이루어 내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 그 전에 있어왔던 역사에 대한 대답이며 데페이즈망 역시 시대적 상황과 사상의 변화 그것과 맞물려 움직인 문학과 예술, 그 밖의 많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간접적 대답일 것이다. 20세기 초 유럽은 세계 제1차 대전에 휩싸이게 되고 이성과 합리에 의해 세워졌던 모든 이론적 체계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기초위에 세워진 이 세계는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 기초위에 우연과 비합리를 내세우며 ‘다다’라는 이즘이 발생하였는데 이 정신의 연장선상위에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이 자리를 잡아간다. 또한 이 당시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피투라 메타피지카’의 대표적 작가 키리코는 데페이즈망의 형식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보여 진다. 이것이 1920년대 후반의 일이며 이 당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이론은 데페이즈망의 사상적 근원이 된다.회화에 있어서 데페이즈망의 형식은 20세기 초 중반의 추상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던 모더니즘의 시기를 지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특히 미국 하이퍼리얼리즘의 세력이 완화된 1970년대 후반부터 대두한 신초현실주의에서는 하이퍼리얼리즘의 영향과 더불어 극대화된 사실주의적 성향의 데페이즈망이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하이퍼리얼리즘의 지나친 엄격성과 비감정적, 비개성적 측면에 식상하여 등장한 것으로 추상표현주의 이래 굳어져온 모더니즘 형식중심의 모든 경향에서 탈피한 내용중심의 구상미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데페이즈망의 형식 분류1.세부의 확대 : 거대한 사과, 방안을 꽉 채운 장미2.보충적인 사물과의 결합 : 산과 독수리, 잎과 새3.무생물의 생물화 : 발가락을 가진 구두,유방달린 옷4.신비스런 개방 : 의외의 광경으로 열리는 문5.생물의 물질적 변형 : 돌로 만들어진 새6.해부학적 경이 : 팔목이 여자 얼굴로 된 손대표적인 작가회화는 데페이즈망에 있어 가장 맨 처음 널리 사용했던 방식으로 대표적인 작가 마그리트와 함께 초현실주의의 달리, 에른스트 등이 사용하였으며 대체적으로 극사실적 방법을 통해 화면을 구현하고 있다. 이는 초현실주의의 형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초현실주의가 이성과 합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정상적인 형태의 사물을 발견하기 힘든데 반해 데페이즈망의 형식은 일상의 사물을 정상적으로 정밀히 묘사하면서 위치를 간단히 전이시킴으로써 존재양식을 변화시킨다는데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에 있어서 극사실적 방식은 중요한 요소로 보여 지는데 일상의 반전을 위해 일상의 극사실적 재현은 시각적, 관념적 충격을 극대화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라는 것은 격렬히 다가오는 순간적 감정이 아닌 낯선 사물들의 결합을 통해 사고의 길로 인도하며 시적으로 다가오는 파문은 단순히 표면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얘기하는 듯하다.르네 마그리트1898년 벨기에에서 출생한 마그리트는 1916년부터 브뤼셀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에서 수학하면서 미술공부를 시작하였고, 이후 10여 년간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제작한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경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창조해 나가기 시작했고, 1927년부터 3년 간 프랑스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파리에 머물기도 했다.1925년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의「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기점으로 결성된 초현실주의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촉발된 다다이즘(Dadaism)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성과 합리주의로 대변되는 서구문명 전반에 대한 반역을 꿈꾸었던 예술 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의해 속박되지 않는 상상력의 세계를 회복시키고 인간정신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사용해 거의 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했던 것과 달리 마그리트는 사과, 돌, 새, 벨,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 되거나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을 이용한 작품들을 주로 선보였다.
    예체능| 2010.11.17| 4페이지| 1,000원| 조회(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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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상주의 미술 평가A+최고예요
    인상주의19세기 후반, 주로 1860∼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주의로, 인상주의미술을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쳤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이와 같이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각적 인상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해내기 위해서 색채의 반사 작용을 연구하였고, 자유로운 붓놀림의 효과를 실험 하였다. 사실 인상주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고, 화가의 눈에 띄는 모든것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으며, 실제 세계의 모든 측면이 미술가의 가치있는 연구 대상이 되었다.인상주의가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인상주의 탄생미술상의 인상파가 성립된 것은 1860년의 파리에서였다.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 보다는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처의 중심인물은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 이후 종래의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피사로, 세잔느, 모리조, 기요맹-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과거의 아카데믹한 수법은 자연을 눈으로 본 그대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그림은 고전 시대 작품의 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형태의 배열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공간이나 견고함에 대한 인상조차도 각각의 대상을 새롭게 관찰하기보다는 확고한 전통적인 규범을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인상파는 이러한 아카데믹한 수법이 자연과 대립된다고 생각하고 인상주의 동료들과 견해를 같이했다. 그들은 색채와 입체감의 묘사에 있어서 새로운 발견들을 높이 샀다. 그들은 또한 이때까지 알고 있었고 배워왔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상에 따라 자기가 본 그대로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이들은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1863년 낙선자 전람회에 출품한 과 1865년 살롱에 출품한 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들이 카페 게르보아에서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 활동이 탄생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은 이모임을 해산시켰으나,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이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데 풍경화파의 외광표현에 접한 사실은 인상주의 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후 드가와 마네, 테오도르 뒤레 및 조르주 리비에르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 뤼엘의 후원을 받게 된다. 1873년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세잔느, 그리고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것을 계기로 이듬해 1874년에 자신들의 앵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르루아라는 미술기자가 '인상파 전람회' 라고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인상주의의 특징인상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연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물의 표면에 비친 광선효과의 본질을 추구하고, 인지된 광선효과를 어떻게 회화로 옮길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그들은 자연에서 항상 변화하는 광선 속에 둘러싸여 있는 사물의 색채, 즉 고유색을 분석했다. 고유색이 한가지 이상의 색채로 구성되어 있다는 그들의 관찰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할된 필법과 손수색채의 병치와 같은 그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색채 분석에 대한 그들의 우선적인 관심에 있었다. 그들은 반사광에 따른 아양한 색채를 기록하는데 몰두하였고, 여러가지 현상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바닷가나 강변 등 대기의 변화가 민감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찾았고 빛과 공기의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변화를 표현하기 증기를 내품고 있는 기관차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또한 젊은 화가들은 자연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아뜨리에에서 스케치나 기억에 의해서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를 야외로 들고 나가서 햇빛 아래의 자연을 그려내었다. 그들은 각자의 다른 감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취향의 차이만큼 다른 종류의 그림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ㅇ열정적으로 묘사된 자연풍경이나 인물상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형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까지 별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풍겨오하라는 장르를 통해서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었다.인상주의의 전개 및 쇠퇴전 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와 접촉하였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상주의적 접근 방식이 파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화가들은 현대생활을 주제로 선택했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고, 더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인상주의화가라 부르기도 했다. 초기의 경멸조로 인상주의를 부르던 때보다 실로 발전한 것이다.1870년대는 인상주의가 절정에 달했으며 화가들간의 결속도 잘 되었던 시기였다. 1886년에 마지막으로 열린 제 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기존 인상파 화가는 드가와 피사로 뿐이었고, 르동, 고갱, 쇠라와 같은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도 순수한 광학적 감각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 마지막 전시회에 출품한 쇠라, 고갱 외에도 세잔와 반 고흐를 위시한 새로운 화가들은 이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 해결책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1910년대부터 후기인상주의 화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인상주의 화가모네 [1840.11.14 ~ 1926.12.5]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파리 출생. 소년시절 르 아브르에서 보냈으며, 18세 때 그곳에서 화가 로댕을 만나, 외광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초기에는 쿠르베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터너, 콘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부터 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모네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였던 것이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의도는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사실주의"현실 세계의 일상적이며 평범한 주제를 찾아 사실적, 객관적으로 표현한 화파이다."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변형을 행하지 않는 예술사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주의가 뜻하는 바는 "회화란 구체적인 예술이므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과거로부터의 장면은 용납될수 없다."는 쿠르베의 말에서 명료해진다. 쿠르베가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의 의미는 지금의 현실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희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데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볼때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과화를 추구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확대되었는데 그 발생에는 부르주아의 대두, 과학의 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미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틱한 생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체능| 2010.11.17| 4페이지| 1,500원| 조회(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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