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웅*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
검색어 입력폼
  • 고려전기의 불교사상
    고려전기의 불교사상Ⅰ.서론Ⅱ.본론 1. 신라 말의 불교사상① 화엄종② 선종⑴선종의 수용2. 고려 초의 불교사상① 선종입장에서 교종사상의 포용② 교종입장에서 선종사상의 포용3. 광종의 불교통합운동① 균여의 통합불교⑴균여의 사상⒜성상융회사상⒝성속무애사상② 법안종⑴등장⑵사상4. 현종대 이후의 불교계① 균여파와 의천파의 대립② 법상종의 대두5. 천태교학① 의천과 천태종Ⅲ.결론Ⅰ.서론사상을 이해할 때 특정 사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의 내용과 특징을 파악함과 동시에 시대에 어떠한 사회계층이 주도적으로 사상체계를 수용,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응용, 발전시켜 나갔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려시대의 불교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 종파의 성립이 갖는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그러면 종파성립의 단계를 말해주는 기준을 인물과 사원 중심으로 조직적 체계적으로 볼 수 있다. 즉, 종파성립은 특정 계층만의 특정의 산물이 아니라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는 산물이어야 한다. 불교가 전 사회계층이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불교 대중화와 연관되어 있다. 불교대중화는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일반 민들의 성장을 전제로 하여 지배층과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 이라고 할 수 있다.앞에서 알아볼 고려전기의 불교사상을 알아보기에 앞서 신라 말의 교종과 선종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라시대의 불교계의 사상사적 과제가 교학 면에서 대승불교의 2대 조류인 중관파)와 유식파)의 통합문제 이었다면 고려시대의 사상사적 과제는 敎?禪대립의 극복과정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여러 단계의 시도를 통해서 마침내 신라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불교를 정립시키게 되는 것이다. 신라 하대 선종이 새로이 성립되면서 시작된 교?선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불교교단의 정비와 아울러 교?선 통합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교?선 통합의 여러 단계를 통해 발전적으로 변화한 고려전기의 불교사상을 알아보자.Ⅱ.본론1.신라 말의 불교사상① 화엄종신라 하대, 특히 9세기 후반부터 왕건의 후삼국글(金石文)과 선사들에 관한 신비로운 요소를 덧붙여 서술한 『祖堂集』에 실린 일부 승려의 행적이 참조된다. 이들 중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는 『삼국유사』의 선종관계 자료와 함께 선종사를 정리하는 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금석문에는 9산선문의 계보에 속하지 않았던 선사들에 대한 표현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 때문에 논자에 따라서는 9산선문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어휘로 대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그러나 고려 중기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어 일종의 공인된 개념어로 정착된 이 어휘를 대신할 만한 과학적인 개념어가 아직은 창출되지 않았다. 또한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시 말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의 법맥전수관계를 시간의 순서대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① 희양산문(봉암산문) = △△신행-지증도헌-정진긍양② 가지산문(북악) = 원적도의-보조체징-선각형미-진공△운③ 실상산문(남악) = 선정홍척-수철△△④ 봉림산문(혜목산문) = 원감현욱-홍각이관-진경심희-진공충담-자적홍준-원종찬유⑤ 동리산문 = 적인혜철-선각도선-광자윤다-통진경보⑥ 성주산문(숭엄?숭암산문) = 낭혜(광종)무염-원랑대통-대경려엄-법경현휘-홍법△△(?)⑦ 사자산문 = 철감도윤-징효절중-법경경유⑧ 사굴산문 = 통효범일-낭원개청-낭공행적⑨ 수미산문 = 진철이엄⑩ 기타 = 쌍계사 혜소/서운사 순지/ 갈항사 혜거2. 고려초의 교?선대립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여 새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것은 토착호족 세력과 군진세력이 제휴하면서 이루어져 갔다. 王建은 바로 이러한 세력배경을 가지고 등장한 인물이다. 왕건은 호족연합책으로 후삼국을 통합해 갔다. 그런 과정에서 결혼정책을 추진하여 자신은 물론 전국 유력 호족의 딸과寺法印國師寶乘塔碑?, 朝鮮金石總覽 上, 224~230쪽).탄문은 藏義山寺에서 주로 화엄을 수학하고 15세 되던 해에 信儼律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곧 교종사상을 아우를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이후 장의산사의 수도생활이 그에게 교선융합사상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경전을 하루 동안 읽으면서 반드시 수행을 했고, 신엄율사도 그에게 “하루 동안 현행을 행함이 30夫를 대적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탄문의 사상적 특성을 총체적으로 지적한 앞의 비문 기록에는, 그가 禪根과 아울러 律敎를 갖춘 인물로 부각되어 있다.밖으로 경론을 추구함이 율교라면 안으로 자성을 깨치는 면이 선근이다. 이와 연관시켜 그의 법호인 탄문과 字인 大悟는 교선융합적인 사상과 연관하여 붙여졌다. 즉 탄문은 敎의 뜻에서 붙여진 것이고 自性의 깨침은 신라하대 이래 선종산문에서 강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탄문은 교선융합사상 경향을 내세우면서 고려 초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선종산문의 포용에 관심을 두었다.3. 광종대의 불교통합운동①균여의 통합불교균여는 태조 6년(923)에 태어났으며, 그의 가문은 대호족이 아닌 지방의 군소 토호였으며, 일찍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의 출생지인 황주지역의 불교사원은 대부분 그 곳의 강호였던 황보씨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균여도 그들과 연고되어 있었다. 균여는 출가하여 그 후 광종 4년(993)에 균여는 국사 謙信의 천거로 祈晴祭를 주관하였다. 後周가 사신을 파견하여 광종을 책봉하려 할 때 마침 비가 오자, 균여가 圓音으로 강연하니 하늘이 맑아졌다고 한다. 광종 4년경이면 화엄종 승려인 겸신이 국사에 봉해질 정도로 광종의 화엄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다.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균여는 광종과 접근할 수 있었다. 책봉의례를 위한 국가적인 기청제를 주관한 점으로 미루어, 이 때 균여는 광종대 전제정치의 태동에 관여하였을 것이다. 광종은 기청제를 마친 균여의 가족 10여 인에게, 칙명으로 가가 田 25頃과 노비 5명을 내리는 등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의상의 사상을 근간으로 법장의 사상까지를 융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인 [一]속에 전체를 통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음미해 보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만물의 제법상에 대한 파악이 균여의 화엄사상 속에 결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법상의 원칙적인 理속에서 융회되어 하나로 파악될 때 事나 理는 모두 민멸되어 존재를 초월해 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혼연된 一體로 나타나게 된다.性은 理이고 相은 事이기 때문에 성상융회사상은 理와 事의 융합사상 즉 理事無碍사상으로 연결된다. 상이 실체를 갖지 않는다면 성은 주체가 되는 점이 다를 뿐, 性과 相이 다 같이 민멸되어 혼연된 일체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性相無碍사상으로 불러야 마당하다. 균여는 이러한 상상융회사상을 相在不在門?相是不是門?空不空門의 三門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상재부재문에서는 事相이 自性을 가지지 않으므로 융회가 가능함을 논했다. 상시불시문에서는 事相의 민멸을 논했다. 공불공문에서는 성과 상이 혼연된 일체로 융합되는 주체를 논했다.⒝성속무애사상균여의 화엄사상 내에는 神異的인 측면이 강조 되었다. 그는 순수 교리적이라기보다는 토착적인 신앙을 흡수하여 사상체계를 완성시켰다. 균여사상의 신이한 측면은 광종대 중기에 토착적 사조가 크게 일어나는 것과 연관된다. 이때에 등장하는 토착사조나 균여사상의 신비적 측면은 광종의 전제주의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토착적이거나 신이적인 면을 강조하는 균여의 사상은 서민 백성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다. 실제 균여는 향가를 지어 聖俗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묶고자 하여 聖俗無碍사상을 내세웠다. ?普賢願歌?에서 師의 마음은 본래 부처의 경지와 같으니 세속과 가깝게 하기 위해 俗과 眞(聖 혹은 僧)을 융합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동방과 서방, 남녀나 귀천까지를 융합하려는 강력한 통합사상을 내세웠다.균여는 성속무애사상을 펴면서 특히 서민 대중을 의식하고 있었다. 균여는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부처에게로 귀의시키고자 ?보현원가?를 상융회적 성향에 매료되었고 아마도 광종대 중기의 법안종에 대한 관심은 성상융회적 경향에 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법안종사상에는 교선일치의 경향이 담겨 있고, 그것은 선종의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면서 교종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다.고려 초의 법안종 승려들도 처음엔 성상융회사상에 관심을 두었지만, 점차 시대가 내려오면서 교선일치의 사상체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교종 내부의 융합 즉 성상융회사사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으며, 교선일치의 사상을 가졌으나 어디까지나 선종의 입장에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4. 현종대 이후의 불교계①균여파와 의천파의 대립문벌귀족사회가 정착됨으로써 교종, 특히 법상종과 화엄종 중심으로 불교는 전성기를 맞는다. 광종대의 화엄종은 균여로 대표되지만, 문종대에 불교계 내지 화엄종단을 장악한 의천은 균여파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의천은 균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다음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海東의 先代 諸師가 남긴 기록은, 그 학문이 精博하지 못하고 억설이 더욱 많음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몽매한 後生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어서, 중생이 능히 聖敎로서 거울을 삼아 自心을 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구하게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등 諸師의 책은 잘못된 것이다. (義天, 大覺國師文集 권 16, 示新參學徒緇秀)문종대를 전후한 시기에 균여파에 속한 화엄종 승려를 많이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균여파도 의천이 견제해야만 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창운과 혁련정의 활동이 이를 알려준다. 혁련정은 숙종5년(1100)에 요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예종 즉위년(1106)에는 長樂展學士 諸學院事가 되었다. 장락전이나 제학원은 서경의 分司기구로서, 혁련정의 이런 면은 의천과 상반될 수 있다. 혁련정은 의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고 의천은 김부식과 상통할 수 있는 관계였다. 김부식이 의천의 사상을 계승한 세속인이라면 혁련정은 균여의 사상을 계승한 세속인이라 할 수 있다.균여파와 의천파의 대다.
    인문/어학| 2007.10.25| 13페이지| 2,500원| 조회(395)
    미리보기
  • 삼국유사 발표문입니다.
    一然과 三國遺事20032728 조웅래1. 서론2. 일연, 그는 누구인가①일연의 생애②일연의 사상3. 삼국유사 의 내용과 성격4. 삼국유사 의 사학사적 의의5. 삼국유사 와 삼국사기 비교6. 결론Bonus- 기출문제1. 서론누가 일렀는가, 우둔함과 지혜로움에 종자가 있어 지극히 우둔함으로 큰 깨달음을 바라나니, 형세가 땅만큼 차이가 있다가도 한번 기틀을 잡아 돌아옴에 문득 본래의 깨달음과 같아진다. 가섭 부처님의 미소로부터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고 불법의 등불을 서로 이어 지금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그마음을 전하고 그 정수를 얻어 해지는 곳에 밝은 해를 돌리고 해뜨는 곳에 신묘로운 빛을 밝히기는 오직 우리 국존이 있을 따름이다.즐겁던 한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한끼 밥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인간사 꿈결인줄 내 인제 알았노라일연을 대변해주는 위 두문장, 즉 전자는 일연 비문의 일부분이고 후자는 삼국유사 를 찬술한 사찰인 경상북도 군위 인각사에 세워진 일연의 시비에 새겨진 글이다. 일연은 노년에 왜 삼국유사 를 찬술하였던 것인가를 우리는 맘에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저자의 생애는 그 대상의 책을 이해함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징검다리와 같기 때문에 일연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겠다. 역사와 문화 창조의 주역은 인간이기에 인간의 의지, 고뇌, 염원,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와 함께 그의 정신과 사상을 주목함은 당연한 접근자세일 것이다. 앞으로 알아볼 각각의 내용을 통해 일연의 사상과 삼국유사 가 같는 의미를 다시 새겨볼수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저 달단(達旦,몽고)의 완종(頑宗)이 까닭 없이 우리 나라를 침범해서 우리 변방을 탕패(蕩敗)시키고 우리 인민을 살육하면서 경기(京畿)까지 짓밟고 사방으로 날뛰어 마치 호랑이가 고기를 고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피겁(被劫)을 당하여 물고자(物故者)가 길에 낭자합니다.- 이규보 -2.일연, 그는 누구인가.위의 글은 이규보가 몽고가 침입하여 전국토와 백성들을 합격하여 이 무렵 개경을 다녀왔다. 그 후 그는 현풍의 비슬산 보당암에 머무르다가 1236년 몽고족이 침입하여 전국이 유린당하자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 해에 일연은 삼중대사의 승계를 받았고, 1246년에는 선사의 지위에 올랐다. 1249년 鄭安의 부탁을 받아 남해의 정림사로 옮긴 일연은 3년간 대장경의 조판에 협력하였다. 1256년에는 지리산 길상암에 머물렀다. 1261(원종2)년에는 왕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가서 禪月寺사에 머물러 지눌의 법을 계승하여 설법하였다. 1264년에 경북 영일군 운제산 吾魚寺로 옮겨 살다가 비슬산 인홍사의 주지가 되었다. 1269년에는 강화도에서 대장경낙성회향법회를 주관하였다. 1277년에서 1281년까지는 청도의 운문사에 머물렀다. 1282년 충렬왕의 간곡한 청으로 개경의 광명사에 머물면서 禪法을 설하였다. 이 때 國尊에 책봉되었고 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다. 조정에서 그에게 軍威의 인각사를 수리하고 토지를 하사받으며 그는 여기에 머물다가 1289년 84세의 나이로 열반했다. 71년간의 승려생활동안 그가 머문 곳을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알아볼 삼국유사 에 인용된 자료수집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②일연의 사상1283년(충렬왕9년)에 국존에 봉해진 인물이므로 그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의 변동과정과 그가 몸담았던 불교계의 변화 양상을 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일연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당시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이나 민중의식, 그리고 몽골 침입에 대항하는 자주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현실의 위기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동했는가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일반적인 전통은 종합불교 즉 통불교(通佛敎)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연의 불교도 종합 불교적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비문?에서 혼구(混丘 ; 1251~1322)가 “화상의 학풍은 광대하고 모두 갖추어 헤아릴 수 없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는 의미로 봐도 무방하다. 이 외에도 화엄종과 관음신앙도 강조하였으며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와 민족을 보고서 자주의식을 고취시키고 정통성과 주체성을 찾도록 했으며, 민중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실천신앙으로서 정토신앙을 강조했다.)3. 삼국유사 의 내용과 성격일연은 승려로서 불교 중심적 사관을 통해 보았지만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위에서 인용된 ?비문? 알아본 것처럼 불교적 소양뿐만 아니라 유교적 소양도 뛰어났다. 삼국유사 에 인용된 방대한 사서를 통해서 볼 때도 일연이 종교 중심적 사관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삼국유사 의 서술 방식을 볼 때 외형적인 특징은 방대한 참고 자료의 규모이다. 최남선은 삼국유사 에 인용된 자료가 일반적인 正史, 각종 공문서, 불교 관련 기록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휘장에 새겨진 자수의 문구에 이르기까지 찬자가 활용한 자료의 성격은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거론된 자료의 종류도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상대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이며 아울러 사료의 보고라고 극찬하였다. 삼국사기 는 왕명을 받아 정사로서의 기전체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삼국유사 는 개인에 의해 편찬된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공적인 제약 없이 자신의 관심대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으며 다방면의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삼국유사 에서 기존 사료에서 인용한 흔적이 확실한 것은 별도의 인용된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반면 자료를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그 출처를 밝혔으며 주를 통해서 인용된 글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였다. 즉 사료를 원형 그대로 객관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삼국유사 의 사서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며, 자료의 방대함의 이유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神異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기이?는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으로서, 한국의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실은 것이며, 간혹 주를 달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그대로 이다. 따라서 왜 설화를 그대로 실었을까? 라는 질문에 추측해보면 이와 같은 설화는 이야기꾼에 의해 지어내진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설화를 그대로 기록으로서 전할 필요성이 있기에 서술했을 것이다. 그 결과 삼국유사 의 기이편 내용은 딱딱한 공적문서를 통하여 정치사를 엮은 삼국사기 보다 당시 일반 국민들에게 많은 공감대를 살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도 삼국유사 에서 당시의 습속과 사유 형태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興法編은 삼국에서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불교전파에 대한 기술로 사실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도 설화적인 내용이 들어있지만 대부분은 문헌자료에 의거한 것이다.塔像編은 불교신앙의 대상인 석탑?범종?불상?사찰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불교문화사에 대한 것으로 기왕의 고승전에 없는 새로운 편이다. 이에도 설화로 전하는 영험적인 내용을 일부 전하고 있으나 寺誌?金石文 등을 통하여 비교적 구체성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義解編은 불교 교리에 능통한 승려에 대한 전기이다. 그러나 교종 철학에 능통한 자만이 아니라 이미 道에 통하여 기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행동한 고승의 이야기, 공예에 신통한 良志의 전기, 신이를 일으킨 고승의 영험 등이 실려 있다. 또 고승전에서 자료를 취하면서도 설화를 함께 실었다.神呪編은 고승들의 신통한 주술력에 대한 설화를 모았다. 기이편과 더불어 신이적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편이다. 단지 기이편이 왕에 대한 설화가 주라면 神呪編은 승려의 신이에 대한 설화이다.感通編은 세속적인 부귀를 탐내지 않고 초연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승려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화랑이나 일반 사람도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두 세속사를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 불교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마지막의 孝善編은 가정의 기본윤리인 효가 불교에서도 존중되는 덕목이라는 것과계가 있다. 그가 긴 생애를 경상북도에서 머문 것은 삼국유사 가 신라를 중심으로 엮어진 배경이었고, 경남지방에 10여 년 머문 것은 가야사를 강조한 배경이었다. 강화도와 개경에 머문 것은 단군 조선과 여타 부족 국가를 기술한 것과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 는 설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런 설화를 이용한 것은 문헌 중심주의적인 삼국사기 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생각된다. 불교사관을 정신사관이라고 규정하여 전통적인 정신문화를 폭넓게 수록하며 유교사상을 거부하지 않은 채 수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삼국유사 는 확실히 김부식의 역사관을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신이로운 것을 주로 다루었다고 하여 이를 神異史觀이라고 규정하는 것 보다는 마음의 작용을 강조한 불교적 종교사관이라고 표현하여야 적합하다. 유교의 도덕적 교훈사관에서 소홀히 한 고대의 신앙적 종교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일연의 역사관을 신이사관으로 규정함은 온당하지 않다. 삼국유사 는 사찬인 동시에 종교사였기 때문에 자유롭지만 고승전 체재를 근간으로 하면서 왕력편?기이편?효선편 등 기왕의 고승전에 없는 편목을 새로이 넣었다. 그리고 각훈이 편찬한 해동고승전 이 고승 위주의 귀족적 종교사인데 반하여, 삼국유사 는 승속을 혼합과 동시에 융합하고 독실한 신앙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서민이나 노비도 서술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일연은 각 항목에 제목을 붙여 유사한 사례를 묶어 놓는 구성 방식을 창안하여 한 고승의 이야기를 두세 곳에 나누어 실기도 했고, 고승도 한계성이 있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기도 했다.이러한 점들은 삼국유사 가 같은 종교사이면서도 해동고승전 에 비하여 크게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 의 사료적 신빙성을 대단히 높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평가인데 삼국사기 와 일치하는 내용을 검토해 보면 연대?인명?구체적인?내용에 있어서 정확성이 삼국사기 에 비하여 떨어진다. 일연이 이용한 자료가 주로 민간에 전래한 필사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인문/어학| 2007.10.07| 9페이지| 1,500원| 조회(322)
    미리보기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18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03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