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산업구조국제경영학과 김보람1. 스웨덴 산업의 역사적 배경 2. 산업구조 3. 사업분야의 변신 4. 주요사업분야 5. 결론목 차1. 산업 발전의 역사적 배경스웨덴의 산업 확대는 개혁과 1842년부터 시작된 의무초등교육체계 확산에 힘입은 것 또 하나 스웨덴의 산업 확대에 기여한 것은 전통적인 철광업에 대한 직업교육 스웨덴 산업화의 전제 조건은 길드제도의 폐지와 증가하던 산업에서의 자유를 폐지하는 새로운 형식 스웨덴은 또한 20세기에 있었던 두 개의 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아 이득을 얻었다 VOLVO Ericsson 등의 굴지의 기업을 거느린 나라최근의 산업경향 (산업 생산구성비)최근의 산업경향 (산업 분야별 고용분포)33%32%30%21%15%정부부문43%42%40%43%43%서비스21%22%25%28%30%광, 공업3%4%5%8%12%농림,수산2000 년1990 년1980 년1970 년1965 년3. 사업 분야의 변신 1) 지식 집약형 산업의 증가스웨덴은 R D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국가 중 하나. 1990년대 동안 매년 산업 R D 투자가 10% 씩 상승하였고, 산업 R D 소비의 절반은 기업들 사이에 일어났는데 그 선두는 ABB, Ericsson, Volvo, Astra 등.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산업은 점차 지식 집약형 분야 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가장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지식 집약형 산업 분야와 서비스 분야. 지식집약 산업의 증가는 또한 스웨덴이 IT산업의 선두국가라는 것을 반영. 사업 분야의 광범위한 환경 투자 또한 높은 지식집약의 일부분에 포함됨.2) IT중심 – 시스타 21C 스웨덴이 꿈꾸는 Wireless Land스웨덴 정부는 대기업과 대학이 서로 연계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사이언스 파크의 설립,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 고급인력 양성 등 각종 제도적인 인프라를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어 왔다. 스웨덴 과학기술정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다른 OECD 국가에서와 같이 특정 산업 및 기술개발에 대한 선별적인 보조금이나 조세 혜택 등을 통한 지원 방식이 아닌 연구개발 인프라, 교육체제, 규제 제도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하고 있는 분야가 지역 발전, 교육 및 노동력 재훈련 ,중소기업 지원에 관한 것이다.시스타 사이언스 파크유럽의 실리콘 벨리 정보통신 업체700여 곳 상주 (민간기업이 주도) 세계 정상급 기술 350여종 보유 완벽한 산(産), 학(學) 협력체제 IT강국이 될 수 있었던 든든한 버팀목 우리나라에겐 좋은 모델로 본보기가 됨4. 주요산업 분야비싼 인건비와 협소한 내수시장.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함께 제조업이 강한 대표적인 나라로 꼽힘. 발명과 혁신으로 극복해 통신,기계, 자동차,제약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함. 북유럽의 중심이며 지구상 최고의 복지국가, Erisson과 ABB, Volvo 등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낸 나라. 현재 IT,통신,기계,자동차,생명공학 분야의 산업클러스터들이 경쟁적으로 '기술의 융합화'를 도모하고 있음.4. 주요산업 분야 – 분야별 산업1) 텔레커뮤니케이션 지난 십 년간 매우 빠르게 확장되어옴 → 연간 산출량 증가는 1993년 이래로 30%이상으로 전체 수출의 거의 20%에 달할 만큼 수출가치가 배로 성장함. 2) 운송장비 몇 십년 동안 고용과 수출모두의 입장에서 스웨덴에의 가장 중요한 산업 하 나로 여겨져 옴. 작은 규모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트럭, 버스, 항공기, 기차, 선박, 항공기 엔진 등 광범위한 운송장비 분야를 가지고 있다.4. 주요산업 분야 – 분야별 산업3) 기술 공학 - 기술공학은 ABB, Electrolux등의 기업들이 장악. 최근 몇 년, 기술개발 소비가 급격히 높아졌고, 상품관련 서비스 내용도 매우 좋아졌으며 시스템 납품규모도 확대 됨 4) (조제)약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급성장하는 산업 분야임. 일자리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야이나 스웨덴 수출의 약4%정도를 차지함.- 스웨덴의 주요기업 -스웨덴의 산업구조 변화 추이5. 결 론근본적인 산업발전의 원동력 - “교육” 때문에 성공하였고 다시 그 “교육”에 투자하는 스웨덴 - “평생학습계좌”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임을 보여줌) - 창의성5. 결 론무조건 밝은 미래는 아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생산 활동인구 감소 높은 대외 의존도 Internet,정보통신IT관련 주들의 주가하락 후발 주자인 한국, 대만 등과의 가격경쟁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스웨덴 세계시장의 불황 속에 오히려 늘리는 투자 GDP대비 R D투자 세계1위 (3.9%){nameOfApplication=Show}
서론Ⅰ. 왜 양자역학인가?오늘날 양자역학은 원자핵 내부에 존재하는 소립자들을 연구하고, 우주 탄생의 순간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 현재 우리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레이저나 반도체, 자기 부상 열차에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가 사용되었으며, 전자 현미경을 만들거나 단백질과 유전자의 구조를 분석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양자역학의 성립과정과 중요성, 그리고 그 의미를 풀어보기 위해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본론Ⅱ. 하이젠베르크. 그는 누구인가?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1901년 12월 5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 후 1910년 고전어와 그리스 문헌학 선생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뮌헨으로 자리를 옮기었기 때문에 그는 1911년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을 들어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예비역 보병장교로 소집됐기 때문에 전쟁 중 거의 집을 떠나 있었다. 이렇게 하이젠베르크는 부모의 보살핌이 거의 없이 줄곳 혼자서 공부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미적분학, 타원함수 등을 독학으로 배웠으며, 수론(Number Theory)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려고까지 했다. 이렇게 기성세계로부터 단절됐던 것이 후일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인 사상의 출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젊은이들은 패전 후 낙심에 차있던 구세대들을 불신하고,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다. 즉 구세대는 이미 부수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세계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신세대에 의해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당시의 청년운동에 지도자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의 변환과 당시의 사회적 현상 사이에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인 교류가 존재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Ⅲ. 그는 무엇을 발견했는가.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위치에 대한 오차는 관측하는 파장에 비례하기 때문에 위치를 측정할 때 측정오차를 줄이려면 파장이 짧은 파를 사용해 측정해야만 한다. 허나 전자기파에 있어서 파장이 짧으면 에너지가 증가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큰 전자기파와 충돌한 전자는 에너지가 증가하게 돼 운동량이 증가하게 된다. 결국 이렇게 운동량이 증가하게 되면 원래의 운동량을 측정하지 못한다. 이 둘을 종합해 보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를 사용하면 운동량에 교란을 주기 때문에 정확한 운동량을 측정할 수 없게 되고, 정확한 운동량을 측정하기 위해 파장이 긴 전자기파를 사용하면 위치에 대한 오차가 커지므로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역학에 포함되어, 새로운 물리관을 창조했다. 즉,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함으로써, 근대적 물리관 이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뉴턴 중심의 근대적 물리관 은 19세기까지 뉴턴의 고전역학으로 고착화 되었다. 뉴턴중심의 물리관 에 입각하여 ‘라플라스’ 는 내가 만물의 운동량과 위치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호언장담 까지 했다. 물리학자에게는 뉴턴의 확실한 운동법칙이 있었고, 그들은 만물의 운동을 설명 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미래를 예측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양자역학이 탄생하며, 그러한 사고는 여지없이 깨어져버렸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우리는 상태의 확실성을 안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상태의 확실성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의미하고, 따라서 양자역학의 탄생으로 우주는 순식간에 확실한 우주에서 불확실한 우주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을 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뉴턴의 이론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현대 물리학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Ⅳ. 하이젠베르크와 사회 속에서의 관계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젊어서 청년운동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우파적인 인물이었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유태인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식의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런 공격을 받은 이유는 나치주의자들이 보기에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의 학문이라고 간주했던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공격은 하이젠베르크가 좀머펠트의 후임으로 뮌헨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저지하던 때를 전후해서 절정을 이루었고, 결국 그의 스승이었던 좀머펠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뮌헨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에는 임용되지 못했다.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나치에 대해서 얼마나 협조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독일 과학사가와 미국 과학사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서 핵개발에 참가했던 독일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군사무기를 개발하는 것에는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인 태업을 했다고 한다. 즉, 자신들이 나치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해서 결국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고 후일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숙제이지만, 나치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양심적인 독일 과학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늄 개발을 결정할 당시인 1942년 전쟁 상황은 독일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독일의 지도부는 전쟁이 일찍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원자탄 개발 같은 계획을 추진할 필요성은 절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독일의 핵개발 팀은 주로 이론물리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우라늄의 연구를 실험실 수준에서 곧바로 거대한 생산 설비가 요구되는 산업적, 군사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배경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실험 물리학자, 화학자, 공학자, 그리고 거대한 설비의 건설 경험이 많았던 산업가들이 함께 참가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아무튼 1942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1일에는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현대 일본경제시스템의 현상과 변화 및 전망Ⅰ. 일본경제시스템의 현상1. 경제구조개혁 추진일본 정부는 경기침체, 금융불안, 재정적자 및 고령화의 진전 등 현재일본이 처해있는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종 규제완화 추진 등 제도의 선진화를 도모하여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각 경제주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경제구조개혁을 추진하고 있다.2. 금융시스템 안정화일본금융시장의 불안정은 기본적으로 정부와 민간분야간의 유착관계가시장 메카니즘에 의한 자본의 흐름을 왜곡하고 금융제도의 투명성부족이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감을 저해한데기인하나, 직접적 원인은 거품경제 붕괴 이후의 부실채권 누적이라 할수 있다.Ⅱ. 일본경제시스템의 변화1. 고도성장기 이전의 일본경제시스템1) 명치시대명치시대의 명치정부는 회사제도를 도입하고 화폐의 통합, 식산흥업정책등의 경제적 제도 개혁을 통하여 근대적인 자본주의 국가완성을 시도하였으며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였다.2) 대정시대대정시대에 대내적으로 산업의 고도화와 대외적으로 수출증대로인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는 국내적인 요인보다는1차세계대전과 조선식민지지배 등의 국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일본은 이 시대부터 서구선진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3) 소화시대미국에서 발생한 경제공황이 일본까지 그 영향이 파급됨에 따라그때까지 일본의 경제는 외형적으로는 서구선진국 수준으로 팽창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미흡한 점이 많이 잔존했었다. 경제의 회복력은급속하게 상실되었고 정부가 추진한 재정정책, 금융정책으로 문제를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경기가 침체되었다.4) 미군점령기이 시대 일본경제는 패전에 의해 구체제가 붕괴하였고 외세에 의해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개혁 등을 통해 혁신적인 경제적 발전을하였다.2. 고도성장기의 일본경제시스템1) 적극적인 투자의 확대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세계의 경제 성장률은 약 5%정도로 높았고일본의 중요산업인 중화학공업의 필수 불가결한 원재료와 에너지가저렴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던 외부적인 요인과 일본의은행들은 기업에게 설비투자의 확충이 가능하도록 차입금을 적극적으로지원한 내부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적극적인 투자가 가능했던 것이다.2) 기술혁신기술혁신이 뒷받침된 민간기업의 설비투자의 증대는 투자가 투자를유발함으로서 수요의 증대를 가져왔다.3) 경제정책과 경제계획정부는 성장산업에 대하여 세액감면 및 금융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부여하였다. 또한 정부는 1955년부터 1976년까지 8개의 경제계획을
식민지 근대화론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의미세계사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과거 피식민국가들이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좁게는 우리나라가 일 제 강점기에 식민지하에서 근대화되어갔다는 것을 이른다. 한국이 1960년대이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신흥산업국(NICs, NIEs)에 이르게 되자, 이러한 한강변의 기적을가져온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들이 국내외에서 진행되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 동안 식민주의사관에 기초하여, '망언'을 되풀이해 오던 일본 학계가 먼저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 일본에 지배하에있던 한국과 대만이 전후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것에 착안, 두 나라가아시아에서 신흥산업국에 도달하게 된 것은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말하자면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를 앞서의 '식민지 수탈론'과 구별하여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개발론'이라 한다.식민지 근대화론은 정체성 이론과 직결되어지는 것으로????신판정체성 이론????이라고도 불리워진다.즉 80년대 일본 경제 사학자들에 의하여 ????정체성 이론????이 부활된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인것이다. 그 내용은 한국이 6, 70년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통치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사실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등장 배경에는 그동안 한국 근대 사학계가 너무 ????식민지 수탈론????에만 얽매여 있었다고 하는 점에도 이유가 있다. 많은 농민들이 수탈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일부의 부르주아들은 富를 축적하였다는 점, 식민 통치 기간이었지만 경제성장이 분명히 일어났었다는 점을 너무 간과해온것이 사실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러한 점을 지적한다. 즉 한국은 토지조사사업을통하여 전국의 토지를 근대적인 소유관계로 개편할 수 있었으며,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미곡 중에는 군량미 조달의 필요성에서 쌀에 대한 배급제도와 쌀 잡곡에 대한 ‘공출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스스로 생산한 쌀은 일제당국에 부락단위로 강제로 팔고 필요한 식량을 배급받아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게 되었다. 한편 일본자본가들의 과잉자본을 조선에 투자하고 전쟁이 필요한 필수품을 조달을 위해 군수공업을 위주로 하는 공화정책이 추진되었다. 공화정책의 결과 한반도내에는 새로운 공업지대가 형성되었다. 함경도 증남을 중심으로 한 북부공업지대 신의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공업지대 서울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공업지대가 그것이다. 한반도 북부에 공업지대가 많은 지하자원과 압록강의 수풍발전소 부진강 발진소와 같은 수력자원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발전한 까닭도 있지만 일본 독점자본의 이득을 위한 배려가 크게 작용한 까닭이었다. 식민사관에 입각한 근대화식민지론을 주장하는 그들의 주된 주장 공업분야에 걸쳐 많이 주장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명백한 거짓임을 알아야 한다. 자국의 경제적 공항을 해결하기 위해 상호공존의 길보다는 한.중 양국민을 이간질 시키고 30만 명이나 되는 일반주민을 학살하는 일본인들이 자국민도 아닌 조선백성을 위해서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는 말은 그들의 정신적 실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국민의 이익을 위해 쌀 생산을 주로 해오던 조선농민들에게 산미중단이란 방법으로 자국민의 이익을 우선시 하던 그들이 조선의 근대화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기쳤다는 것인가.1930년대 일본은 조선을 병잠기지로 삼기 위해 조선에 군수공업을 발전시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조선에 공업단지를 형성하고 철도를 건설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은 너무나도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는 당시 세계정서에 편성하던 일본이 선진국의 경제 대공항으로 인해 일본 자국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 해결방안으로 조선을 1차 병잠기로 삼았던 것은 당시 일본의 행적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그들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공업화지조사사업이 '근대적인 토지소유체제'를 가져왔다는 주장, 총독부가 적극적으로 조선에 공업을 일으켰다는 주장, 서기 1930년대에 일제가 많은 공장을 세우면서 조선의 공업이 발전했다는 주장, 식민지 시절의 '공업화'와 '토지개혁'이 광복 이후에 그대로 한국에 이어졌다는 주장 - 을 자료와 실례를 들어가면서 반박할 것이며, 이런 논의 자체가 일어나는 현실을 비판하고 한국 역사학계의 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경제종속론 비판을 촉구할 것이다.*조선총독부는 과연 조선의 공업을 '장려'했나?'식민지 근대화론'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적극적으로' 자본을 유치하고 공장을 세우고 철도를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의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서기 1910년 12월 [회사령]이라는 법을 발표하였다. [회사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본국'의 경우와는 달리,(거기서는 기업을 만들기만 하면 무조건 허가해 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가 회사를 적극적으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총독부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아야만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억제책을 썼다. 외국 기업도 조선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지부를 세울 수 있어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억제당했다.또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회사는 회사 창업주를 감옥에 가두고 벌금을 물려서 회사를 꾸려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 안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회사설립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기틀을 닦는 일)을 막았던 것이다.한마디로 조선총독부는 회사령을 발표하여 조선에서 회사가 세워지고 커지는 일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자본주의가 자라나는 일을 막았다. 비록 서기 1920년에 회사령이 철폐되기는 하지만, 이때 성장이 가로막힌 조선의 자본주의는 이후로도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조치를 취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자본주의화를 도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그렇다면 회사령이 철폐된 이후에, 그러니까 상황을 농촌의 근대화라고 한다면, 총독부는 농촌을 '근대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봉건적인 토지소유제도를 더욱 강하게 굳힌 셈이다.게다가 총독부는 농민들이 그런 지주제도에 반항하거나 불만을 털어놓는 일까지도 경찰과 군대로 강하게 억눌렀다. 반(半) 봉건적인 제도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나 불만 제기를 '권력'인 총독부가 억누르고 그 제도를 부수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은 총독부가 '근대화'로 가는 과정을 억눌렀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결과적으로(사실은 의도적으로) 총독부는 조선 농민들과 조선의 농촌이 근대화를 향해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만약 농촌을 근대화 시키려고 했다면 광복 이후 이루어진 토지개혁이나 지주제 타파(조선 - 북한 - 의 경우)로 봉건적인 소유제도를 강제력으로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농민들이 자치를 하거나 농민들이 자작농이 되는 일을 막고, 대부분의 농민을 소작농으로 삼아 지주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어 저항을 허락하지 않은 총독부의 조치를 '근대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농촌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과연 자본주의에 도움을 줄 만한 존재들이었는가? 자세히 살펴보았을 때 답변은 부정적이다. 농민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쳐야 했는데,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중요한 매개체인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현물(現物)'이었고 그것도 수확량의 50%를 넘었다. 농민에게는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소작료를 낼 때 돈이 아니라 곡식이라는 현물로 내야 했던 자체가 자본주의적이지 않거니와, 잉여 생산량의 대부분을 소작료로 바치고 남는 것이(소비활동에 쓰거나 다른 일에 투자할) 거의 없어서 소비자가 될 수 없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경제에 기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인신구속관계도 근대적이지 못했다. 지주와 소작인이라는 관계 자체가 봉건적인 관계였다. 또 지주는 (마치 중세 서유럽에서 영주가 '중요한 노동력'인 농노를 단속했듯이) 농민들이 지주에게 진 빚을 반드시 갚도록 소작인을 '5인조 제도'로 묶어 서로 감시하도록 하고 소작인이 '도당을 만우월권을 인정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39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러시아와 일본의 중립지대로 할 것도 요구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요구는 몇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여 결국은 양국의 무력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1904년의 러일전쟁이었다.1. 국권피탈과정동학농민 운동과 갑오개혁이 실패로 끝난후, 민족운동은 실력양성과 국권회복을 목표로 내걸고 재기했다. 개화파의 흐름을 잇는 사람들은 1896년 에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수용한 대중운동. 민중계몽운동에 몰입했다. 한편, 위정척사파 유생들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투쟁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벌였다. 한국을 독점하려던 일본은 러시아와 여러 차례 막후 교섭을 벌였으나 여의치 않자,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이 러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은 안하무인격으로 한국의 주권을 유린했다. 1905년 11월에는 이른 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맺어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모든내정에 관여했다.국가 존망의 위기에 놓인 우리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특히 1907년 8월에 일본이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자, 평민과 군인도 의병투쟁에 광범하게 참가했다. 그리하여 전 국토에서 한국민과 일본군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이 싸움에서 의병 7천여명이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2. 민족의 수난과 시련우리 민족의 비장한 국권회복투쟁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본은 1910년 8월 22일에 이른 바 한국병합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원천 봉쇄하려고 처음 10여년간 철저한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종교를 제외한 한민족의 모든 자주 단체와 언론기관을 폐지하고 헌병과 경찰이 하나가 되어 치안뿐만아니라 행정까지도 엄격하게통재했다. 그리고 교육 등에서는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말살하는 동화다.
일제의 침략과정과 한민족의 저항1. 대한제국시기의 국제정세대한제국)이 성립된 1890년대 후반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있었던 시기로 이 때문에 나름대로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청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자 러시아는 일본의 세력팽창을 염려하여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의 반환을 요구한 바 있었다.(三國干涉 : 1895). 이에 따라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준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3차에 걸친 러시아와의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 협상에 의하여 일본은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대신 자국은 한반도에서의 경제적 우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조선 국내에서는 독립협회 등이,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측히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침투를 반대하였다. 또 러시아의 극동정책이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하여 요동지역을 점령하려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 정책에 따라 러시아는 요동반도의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조차하고(1897) 조선으로부터는 마산포를 조차하여 극동함대의 기지로 삼으려다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즈음 청에서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의화단(義和團)사건)이 일어나자 열강은 이를 구실로 북경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출병했던 러시아는 사태가 끝난 뒤에도 청국에 남아 만주침략의 의도를 드러내었다. 청과 밀약을 맺어 실질적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보호령으로 만들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이 밀약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의 항의로 폐기되었지만 러시아의 만주점령 정책은 계속되었고 독일, 프랑스가 이를 양해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은 영일동맹을 맺어(1902) 청에서의 영국의 이군을 인정해 주는 대신 러시아의 남방진출을 견제하는 한편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권을 인정받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남진정책을 계속하여 1903년에는 압록강 하류의 용암포(龍岩浦)를 점령하고 군사시설을 설치한 후 정식으로 조차를 요구하여 왔다. 이에 대해 일본은 러시아의 군대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한국에서의 일본 이권을 용인할 것도 제의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철군을 거부하고 일본이 한국을 군략상의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39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러시아와 일본의 중립지대로 할 것도 요구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요구는 몇 차례의 협상에도 불구하도 타결점을 찾지 못하여 결국은 양국의 무력대결로 치닫게 되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1904년의 러일전쟁이었다.2. 러일전쟁과 그 영향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포하였다.(1904.1) 그러나 일본군은 서울을 침입하여 각종 건물과 군사적 요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력으로 위협하여 한국정부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였다.(1904.2) 이 의정서는 관례에 따라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예컨대 한국은 시정의 개선을 위하여 일본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제3국의 침입이나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황제의 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때는 일본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간섭을 보장받게 되었으며 한국이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폐기 되었다. 이후 일본은 한국에서 경부철도,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고 연안에서의 어업권과 항행권 등의 이권도 얻었다. 또 황무지 개간권 마저 획득하여 영토를 강탈하려 했으나 한국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다.일본은 한일의정서에 있는 한국은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는 조항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대한시설강령’을 1904년 5월에 결정했고 나아가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 : 일명 韓日協定書)을 체결하였다.91904.8) 이것은 한국정부가 일본의 추천을 받아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두고 주요안건에 대해 이들과 협의를 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메가다(目架田種太郞)가 재정고문으로, 그리고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가 외교고문으로 초빙되었다. 이 스티븐스는 후일 미국에 돌아가 일본의 통감정치를 찬양하다 전명운, 장인환에게 암살된 인물이다. 그런데 이 때 조약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궁내부, 군부, 내무, 학부에도 일본인 고문들이 설치되어 이른바 고문정치(顧問政治)가 시작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정치의 각 방면에 있어 일본의 통제와 간섭을 받게 외었다. 특히 외교권이 그러하여 독일, 프랑스, 청, 일본 등에 파견 되었던 한국공사는 소환되었다.러일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연전연승하였다. 이에 미국은 양국의 중재에 나섰으나 한편으로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이리하여 미국과 일본 사이에 가쓰라, 태프트밀약이 성립되었다.(1905.7) 이 조약은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1905.8)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 이익을 보장받았다. 특히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중재에 의해 맺어진 포츠머드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한국에 있어서의 정치, 군사, 경제적 우위권을 러시아로부터 보장받고 러시아가 갖고 있던 요동반도의 조차권을 할양받게 되었다.(1905.9) 이에 따라 일본은 한국에 대한 마지막 경쟁자를 물리치고 한국의 보호국화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였다.3. 일제의 한국 침탈과정한국 보호국화의 정책은 착착 진행되어 일본은 우선 송병준, 이용구 등을 사주하여 친일단체일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 필요성을 주장케 함으로써 보호조약이 한국인의 소원에 의한 것으로 위장하려 하였다. 그런 다음 일본 정치계의 원로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일본공사 하야시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제2차 한일협약(韓日協約 : 일명 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였다.(1905.11) 일본은 당시 수상격인 참정(參政) 한규설이 조약체결을 반대하자 헌병으로 하여금 끌어내게 하고 외부대신인을 가져다가 조약에 날인한 것이었다. 이 때 이 조약의 체결에 직, 간접적인 협조를 한 이들도 있었는데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이 소위 ‘을사오적(乙巳五賊)’이었다.을사조약의 핵심적인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완전히 박탈하고 황제에게 내알할 수 있는 통삼을 둔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이토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1906.2) 이른바 통감정치(統監政治)가 시작된 것이다. 1905년 독도를 강제로 약탈한 바 있던 일본이 1909년 간도지방을 청에 넘겨준 것은 이때의 외교권 박탈로 인한 결과였다. 통감부는 본래 한국의 외교사무를 관장한다는 명분으로 설치되었지만 실제로는 경무부, 농상공부, 총무부 등을 두어 내정 전반을 관장하여 후일의 총독부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은 이 조약이 한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이준, 이위종, 이상설 3인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고정은 강제 퇴위되었다.(1907.7) 고종을 퇴위시키고 병약한 순종을 즉위시킨 일본은 같은 달 곧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 일명 丁未七協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정부가 시정의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과 한국 고등 관리에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을 것,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얻을 것,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각 부의 차관에 일본인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가 시작되었다.이 조약을 맺은 직후 일본은 재정부족을 이유로 내세워 한국군대를 해산시켜 버렸다.(1907.7) 이로써 한일합방의 마지막 장애가 되는 군사력마저 제거해 버렸다. 또 기우각서(己酉覺書)를 교환함으로써 한국의 사법권까지 박탈하였다.(1909.7) 나아가 일본은 일진회로 하여금 ‘합방촉진성명’을 내개 하는 한편 ‘병합 후의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 결정의건’을 내각회의에서 통과시켰다.(1910.6) 그리고 약 2개월 후 한국정부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당시의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8개조항의‘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1910년 8월 22일 조인, 동 29일 공포〕4. 한국 국민들의 저항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한국국민이 방관한 것은 아니었다. 러일전쟁 중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국민들은 보안회(保安會)를 조직,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언론은 일제히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장지연은『황성신문』에「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였으며 『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등도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각 지방의 조약파기 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조야의 인사들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가 하면 민영환 같은 이는 자결까지 하였다. 근대해산에 항거하여 당시 대대장이었던 박성환의 자실이 있기도 했다. 또 각지에서 열사들에 의한 항일의거가 속출하였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살해하였으며(1908)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안중근(安重根)은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만주 하얼삔에서 저격하였다.(1909)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1909)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은 의병운동(義兵運動)이었다. 항일의병은 1895년 민비시해와 단발령에 자극받아 일어난 을미의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일제에 무력적으로 저항하였다. 이 의병운동은 대체로 그 시기와 성격에 따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