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서양사의 연대 중 가장 상징적인 해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그 해 이후에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이 절대왕정의 억압에 대한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프랑스 혁명가들은 아메리카 같이 계몽사상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아메리카혁명보다 과격하게 혁명을 일으켰다. 아메리카 혁명 지도층은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지만 영국의 법과 사회적 문화유산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지도부는 구제도의 모순(앙시앙 레짐)을 청산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정치/사회/문화적 구조로 대체하려고 했다.프랑스 혁명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역사적 변화를 일으키게 된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었다. 19세기를 통틀어 낡은 질서를 고수하려는 파와 새로운 이념을 옹호하려는 파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서 혁명이 승리를 거두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 대혁명은 근대사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며, 그에 대한 이해는 19세기 역사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2. 본론? 혁명의 발단18세기 중반의 프랑스 중세 이래의 봉건적 잔재와 제도적 모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은 농민에게 과도한 개인적 봉사와 경제적 부담을 요구하고 있었다.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효율적이지 못했다. 소수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 계층은 대부분의 국가의 재산을 소유하며 과세를 피하며,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실정에 대해 프랑스 지식인의 날선 비판이 있었지만 정부는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다.프랑스 루이14세 이래 대외 전쟁으로 국가 재정이 파탄지경에 들어갔고, 특히 미국 독립전쟁에 대한 지원은 프랑스를 모라토리움 직전 상태로 이끌었다.중세말 이래 유럽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도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신분제도는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평민층(도시 있었다.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제3신분인 평민층은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계급과 수공업자, 농민층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인구의 80%차지하고 있는 농민은 무거운 조세적 부담을 지고 있었다. 염세는 프랑스 혁명 전 가장 큰 조세 수입원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는 7세 이상의 사람들에게 1년에 일정한 소금을 사도록 강요했다. 또한 영주는 여전히 농민들에게 봉건적은 공납과 역을 제공받거나 역 대신 면역세를 받았다. 농민보다 훨씬 잘 살았던 부르주아 계층은 높아진 교육수준에 의해 사회적 지위 향상과 정치적 참여를 열망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국가의 부채를 주로 담당하면서 정치적인 권리가 박탈되어있는 현실을 개선하려고 하였다.프랑스 혁명의 직접적 발단은 국가재정의 파탄에 있었다. 당시 가장 번영한 국가였던 프랑스는 지식인이나 부르주아계급은 앙시앙레짐에 크게 반발하였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던 프랑스의 부르주아 계급에게 당시 프랑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들은 낙후된 것이었다.프랑스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앙시앙레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파탄에 있었다. 프랑스 왕이나 정부가 재정적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국가 재정 위기는 이미 루이14세 시대에 연이은 전쟁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미국 독립 혁명 참전으로 인해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프랑스 정부의 신용도는 점차 하락했다. 당시 프랑스의 국채 이자율은 20%로 영국에 비해 5배나 높았다. 1763년부터 1789년까지 정부 부채는 배로 늘어나 4억 리브르에 달하고 1789년의 적자는 2천 7백만 리브르였으며, 국가수입의 반 이상이 정부의 적자를 메우는 데 지출되었다.루이 16세는 이러한 상황을 깨닫고 일찍이 1774년 튀르고를 등용하여 재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세율을 낮추고 특권계층에게 과세를 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1776년 파면 당하였다. 이후 루이16세는 재정개혁을 계속 시도 하였으나 번번이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혁명의 전개 남은 수단은 약 150년 동안 소집하지 않았던 신분회를 소집하는 것뿐이었다. 신분회는 왕이나 귀족들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재정지원을 받으려고 소집되곤 했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1788년5월 다음 해에 있을 신분회 소집이 공고되었고, 정치적 절충을 거쳐 제3신분 대표의 수는 많아졌으나 표결방식은 예전과 같이 신분별로 진행 될 예정이었다.제 3신분에 속한 프랑스 국민의 절대 다수는 신분회 소집을 계기로 사회개혁을 요구하였다. 이에 청원서를 올리게 되었다. 이를 ‘카이에’라고 하는데 공통으로 지적된 내용은 특권계급이 특권을 버리고 공평한 과세를 해야 한다는 것, 명문화된 헌법을 제정해야한다는 것 등이었다. 5월 5일 개회된 신분회는 관례에 따라 각각 다른 방에서 신분별 회의를 하고 신분별 투표를 요구하였다. 1789년에 1신분과 2신분이 각각 3백 명 이었으며, 3신분은 6백 명으로 12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표결이 1인 1표가 아닌 1신분 1표였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으로는 제 3신분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러한 신분회의 소집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1789년 6월 20일 제3신분 대표들은 특권계층 대표가 일부 합세하는 가운데 테니스코트에서 프랑스 헌법을 제정 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서하였다. 이러한 테니스코트의 선서는 절대왕정의 종말과 주권 재민의 출발을 선언한 것이었다. 3일 후 루이16세는 회의에 참석하여 신분별로 따로 모여 회의 할 것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또한 왕이 떠난 후 제3신분에게 관리가 다가와서 해산할 것을 요청하였다. 제 3신분 대표였던 미라보는 “우리는 국민의 대표이며 창끝으로 몰아내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왕에게 일러라” 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 자리에서 제 3신분의 대표는 국민제헌의회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6월 27일 보고를 받은 왕은 국민제헌의회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의회가 헌법제정에 착수하자 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 활를 상징하는 음산한 감옥이었다. 하지만 바스티유에서는 7명의 잡범들만 있었고, 기대한 바와 달리 정치범은 한명도 없었다. 분노한 군중들은 무장하지 않고 있던 스위스 수비병을 학살하였다. 바스티유 습격은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신화가 되었고, 귀족계급의 방해공작을 분쇄하는 효과를 나타냈다.바스티유 함락 이후 파리 자치시정부가 각 구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파리시는 민병을 모집하여 4만 8천명의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이 때 처음 나온 3색기는 수도를 상징하는 빨강과 푸른색, 부르봉왕가를 의미하는 흰색으로 된 깃발이었다.바스티유 습격 소식은 지방으로 퍼져 여름 내내 농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했기에 영주측이 보관하고 있던 장원 문서를 태우고 성을 약탈하고 소각하는 이른바 샤토전쟁을 일으켰다. 농촌은 혼란에 빠졌고 공포분위기가 감돌았다.농촌의 혼란과 난동에 관한 보고서가 국민의회에 보고되자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 일부 귀족이 봉건 특권의 폐지를 제의하였다. 8월 4일 밤 귀족과 성직자들은 앞을 다투어 봉건제 폐지에 찬성하였다. 이 법령으로 인해 농노제, 봉건적 공납, 십일조, 길드의 제약 등이 폐지되고 전 프랑스 국민은 평등해지고 계급차별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 나온 8월의 법령은 봉건제 사망문서라 불리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혁명의 성공8월의 나머지 기간에 제헌의회 대표들은 새 헌법의 기본원칙을 기초하였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선포하였다. 이 선언은 영국의 권리장전과 미국의 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으며 루소의 정치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선언은 입헌정치 정신을 요약하였으며 민주주의 혁명의 배경이 된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 선언은 순수한 민주주의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의회는 헌법제정에 착수했으나 루이16세는 국민의회를 탄압하려하였다.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한 군대가 3색기를 짓밟고 연회를 열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있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를 떠나 혁명세력의 중심지인 파리에 갇히게 되었다. 1791년 9월 국민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다. 또한 국회는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1791년 중기 이후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국민제헌의회 의원은 입법의회에 진출할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 결과 대부분 정치경력이 없는 무명 인사들이 입법의회의 의원이 되었다. 입헌의회는 과격파인 지롱드당이 장악했다.혁명의 과격화의 원인으로 몇 가지를 뽑을 수 있다. 그 중 직접적인 요인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동맹군 사령관인 브라운 슈바이크공은 왕권을 재정립하고 프랑스 질서를 바로 잡을 것 선언하였다. 이는 프랑스혁명을 과격하게 만들고 왕의 지위를 땅에 떨어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후에 루이 16세와 그의 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1793년 8월에 군사정세는 재차 악화되어 북동 국경지대의 프랑스군이 각 전선에서 부득이 후퇴하게 되자, 국내의 위장 왕당파나 지롱드파는 활개를 펴고 활동을 하였으며, 도시의 식량위기도 급속히 증대하였다. 파리에서는 최고 가격제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귀족과 함께 매점상인, 악덕 부르주아를 공격하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당통까지도 부당소득자의 오명이 씌워졌다.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9월 5일 시민을 동원해서 국민공회에 몰려가 ‘혁명의 무제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반혁명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청하였다. 공안위원회는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 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기간 동안은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의 ‘혁명정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93년 가을부터 다음해에 걸쳐 지속된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먼저 반혁명의 이름 아래 지방에 은신했던 지롱드파 명사들이 처형되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롤랑 부인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처럼 약 1년 동안에 1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강압적인 공포정치에 지쳐있던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면.
광주의 5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사학과 20110150 김선영1. 대안 문화 공간 May Hall처음 이 과제를 받았을 때는 받아들고서 ‘멘붕’이 왔다. 광주에 대인시장만큼 유명한 대안문화공간이 어디 있을까라는 미련한 생각에서였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아서 솔직히 어떤 공간을 써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다. 여러 대안 문화 공간 중에서 내 눈에 특별히 들어 온 곳은 May Hall 이라는 공간이었다. 며칠 전, 광주극장에 남영동1985라는 영화 시사회를 보러갔다. 그 곳에서 May Hall 이라는 크리스마스 기념연극을 한다는 리플렛이 눈에 들어왔다. 약도를 보고 ‘아 이곳’하고 무릎을 탁 쳤다. 만날 지나다니는 곳 가까이 두고도 스치듯 지나가 존재를 놓쳤던 그곳, May Hall은 인쇄골목 어귀에 있었다.2. “신기하고 엉뚱한 공간 May Hall"먼저 May Hall의 소개에 앞서, 5월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혹자는 5월에 피어나는 장미가 생각난다고 할 것이고, 혹자는 어린이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5월 하면 광주와 메이데이를 말하고 싶다.메이데이는 5월, 노동자들이 다 모여 연대를 실현하는 날이다. 그리고 32년 전 5월의 광주는 참혹한 학살이 자행된 곳이었다. 또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던 곳이었다. 아픔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날 인권의 도시,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워지고 있다.이 곳, May Hall이 구도청에 자리잡게 된 이유는 32년 전 5월 광주의 무대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연대와 나눔으로 이루어진 5월. 그러한 정신을 살려, 신기하고 엉뚱한 공간인 May Hall은 탄생 하게 되었다. 낡고 버려진 공간, 쇄락의 길을 걷고있는 공간을 고쳐 탄생한 공간인 것이다.만남과 소통, 나눔, 위로, 평화와 창조를 채워나가도록 애쓰는 문화 공간, 이러한 연대정신은 32년 전, 광주의 5월을 떠올리게 한다.CMS회원제로 운영되는 이 곳은 금액의 차이에 따라 ‘물’ ‘거름’ ‘햇살’ 회원으로 분류된다. 이렇게 이름을 붙인 까닭은 위의 세 요소가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이라는 씨앗이 싹트기 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을 물/거름/햇살로 빗대었다.May Hall의 공간 운영은 다음과 같다. 3층은 아지트로서 커피와 와인, 구하기 어려운 음악들과 남도소리, 같이 나누고 싶은 양서들이 즐비한 곳이다.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 모든 전등과 의자는 쓰다 버린 것들을 재활용한 것이다. 이 곳은 조용하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는 공간이며, 조촐하게 친구들과 파티를 열 수도 있는 곳이다.4층은 강당으로, 화가들은 전시도 하고 가수들은 공연도 하는 공간이다. 전문 큐레이터가 안내하며, 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게 설계 되었다. 작지만 소박한 공간이다. 5월 기념교회도 5층을 오가며 모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4.5층. 다락방 혹은 골방쯤으로 표현 될 수 있는 이 공간은 비좁은 공간이지만, ‘나’를 찾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묵상. 기도 등이 이루어진다.5층은 옥탑방 교실. 문화예술의 토론장(場). 이곳은 새로운 작품이 태어나기도 하는 곳이다. 낮에는 햇빛을 그득 받고, 밤에는 달빛을 그득 받으며, 바람은 사람사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를 버무려 예술의 혼으로 승화시키는 창조공간인 것이다.3. May Hall과 함께하는 사람들May Hall이 복합 문화 공간, 대안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기까지 함께 해 온 사람들이 있었다.만약, 이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May Hall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May Hall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소개한다.“따뜻한 모임”“5.18민중항쟁 기념교회 기독교 대한 복음교회 오월교회”4. 전시/연극/공연May Hall은 개관함과 동시에 활발한 전시/연극/공연을 펼치고 있다.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전시는 11월 18일 일요일에 이루어진 SuhZebby KIDS! "수제비와 아이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전시 퍼포먼스였다.그리고 12월 14일 금요일 늦은 7시 30분에 떠돌이별 임의진의 크리스마스콘서트가 열린다.5. 총평 그리고……남영동 1985 시사회를 가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내가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는 실제로 대안문화 공간이 어마어마하다. 이러한 정보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광주에 있는 대안문화공간을 찾아라!’ 라고 한다면 대인시장, 예술의 거리를 누군가는 쉽게 생각 할 것이고 누군가는 한참 후에야 생각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