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과 섹슈얼리티1. 서론20세기 성문화의 특징은 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들이 이완되고, 혹독한 성적 금기에서 혼전 혹은 혼외 관계에 대한 상대적 관용이 생기고, 성도착자들에 대한 도덕적, 규범적 비난이 줄어들며, 어린이의 성적 욕망을 억누르던 금기들이 대부분 소멸해가는 현상이다. 사실상 오늘날 섹슈얼리티와 사랑의 개념에 대한 놀랄만한 변질은 ‘현대성‘ 그 자체에 어울리는 말일지 모른다.성에 대한 금기와 억압이 전근대적 문화의 특징이라면 성에대한 관용적 사고와 개방적 태도는 현대문화적 특징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으로 인하여 오늘날 이성애적 성의식과 일부일처제적 가족제도 등, 성에 대한 신념과 제도가 큰 변화를 겪고 있다.오늘날 성과 사회에 관한 많은 문제제기적 질문들이 있다. 현대에 와서 왜 이렇게 섹슈얼리티가 전보다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가? 그리고 현대의 섹슈얼리티는 제도와 권력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오늘날의 성에 대한 다양한 의식과 행위들을 볼 때 성은 억압되었는가? 해방 되었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 대중매체,예술작품, 일상생활 속에서 왜 여성의 육체 및 섹슈얼리티는 바라보며 즐기는 대상이 되었는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도 남녀의 성차이적 관계가 내재하고 있는가?이 글에서 우리는 현대의 성과 사회구조에 대한 푸코와 기든스의 이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외에 다양한 시각을 중심으로 현대사회에서의 섹슈얼리티의 표현 및 그 변화의 사회적 의미와 가능성을 살표보고자 한다.2. 성과 권력푸코의 성에 관한 사변은 ‘억압가설‘에 대한 문제제기로부터 출발한다. 즉 그의 연구는 지금까지 성이 억압되어 왔다는 사실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지, 그리고 성에 관련된 권력역학이 본질적으로 억압적인지데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에서 출발한다. 푸코는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담론의 기저에 깔려 있는 권력 - 지식 - 쾌락의 기능과 존재이유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16세기 이래 성의 담론화는 억압받기는커녕 반대로 선동다. 이처럼 성적담론이 증가하고 이를 일정한 담론체계로 유도하여 가두어두는 것이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지식의 형성과정이자 사회통제의 기술인 것이다. 푸코는 프로이트의 억압가설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비밀이고 이에 대한 지식과 권력은 비밀수호와 진리탐구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푸코가 발견한 사실에 따르면 다양한 변태적 세슈얼리티에 관한 담론체계는 변태성을 억압하고 제거하려는 의도보다는 개인의 의식과 행동, 자기정체성을 분류하여 하나의 항구적인 실체를 부여하여 통제하는 하나의 기제에 불과하다. 지식과 권력은 분류와 이해의 중추적 역할을 함으로써 수많은 성적욕망을 정상/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이를 고착화하고 광기와 마찬가지로 섹슈얼리티도 분석과 치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사연구자들이 분류하여 생산해내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푸코는 성에 대한 분석과 담론이 사회제도의 형성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한마디로 섹슈얼리티는 권력작용으로써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고착화 재생산된다고 보았다.3. 성찰적 성과 성차이기든스는 푸코의 성에 관한 담론이 지식-권력 수준에서만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성의 설명에 머무는 것에 부족함을 느낀다. 즉 지식과 권력이란 국면과 연결된 특정한 담론의 형태에 머물러 있어 현대적 삶 속에서 뚜렷이 발견되는 자아성찰적 면을 간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든스는 푸코의 이론적 결함을 메우는 대안으로 ‘제도적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창출한다. 이 개념은 성과 권력이 사회제도적으로 구조화되는 것과 동시에 그 속에서도 자아 또는 개인의 의지나 선택이 작용하는 것을 인정한다. 기든스는 성과 재생산적 제도, 권력의 관계에서 개인의 성찰적 의지를 중요시여긴다. 현대적 섹슈얼리티는 더 이상 재생산과 친족질서를 유지하는 도덕적 수단이 아니라 개인적 친밀성에 기반한 관계를 형성하는 수단이며 이는 자아에 대한 성찰, 자율성, 행복을 향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자기정체성에 대한 개인적 성찰은 사랑과 관련된 섹슈얼리티의 의미에 대한 변환적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푸코가 섹슈얼리티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가족의 변화와 밀접히 연관된 낭만적 사랑의 연관문제 그리고 성차이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푸코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 권력창출의 수단으로서 감시가 확산된 결과로 보지만 기든스가 보기에 그것은 성차의 권력이고 여기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배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4. 억압된 성과 성도착프로이트-맑스주의 창시자 빌헬름 라이히는 모든 성적 욕망의 장치를 억압과 관련지어 재해석하고, 그러한 억압을 전반적인 지배와 착취의 기제에 결부시키고, 억압과 지배 및 착취로부터 해방되는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라이히는 부르주아 사회의 권위주의와 권력에 대항하여 성적 에너지가 억제된 신경증적 ‘소인배‘들의 성기중심적 섹슈얼리티를 비판하고 사랑을 포용하는 행복한 섹슈얼리티의 표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적절하게 표현된 섹슈얼리티는 행복의 원천이며 권력과 지배의 유혹이나 갈망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리비도가 차단되어 강박적으로 표현되는 대중의 성격은 ‘신경의 평형상태‘를 깨트리고 방어체계를 해제함으로써 치료할 수 있다. 문제는 사디슴, 이기심, 탐욕 등으로 좌절된 리비도를 해방시키고, 심리적, 성적 발전이 왜곡됨으로써 상실된 오르가슴 능력을 회복하는 일이다. 라이히는 동성애를 좌절된 리비도의 산물로 보고, 성해방이 진전됨에 따라 동성애나 포르노그래피는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라이히는 현대문명의 억압적 특징을 강조하였다. 서구의 현대사회는 가부장적 구조, 일부일처제적 결혼을 강조함으로써 권위주의적, 착취적 사회체계를 지지하고 있다. 라이히에게 있어 건강한 섹슈얼리티를 위한 성해방이란 정치사회적 개혁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라이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적 본능의 재발견을 통하여 현대사회의 경제적 착취구조와 사회적 지배의 매카니즘을 드러낼 수 있고, 사회비판적 매개를 찾고자 하였다. 라이히에게서 무의식의 해방이란 억압적 노동구조로부터 벗어난 쾌락추구이다. 진리와 행복의 기준에 따르는 쾌락추구는 억압사회적 부상은 억압적인 법과 권력에 대한 냉소나 복수의 의미가 아니며, 권력의 힘을 참고 견디어내는 쾌락의 역설적인 형식의 의미를 담고있는 것도 아니다. 성도착의 정착은 결과이자 수단이다. 즉 성과 쾌락에 대한 권력의 관계가 세분화되고 증가하여 육체와 행동에 스며드는 것은 주변적인 성적 욕망의 격리, 증대, 공고화를 통한 것이다. 성적 욕망의 세분화와 증대는 쾌락을 세분화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증대와 연결된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이래 의학, 정신병학, 매춘, 포르노그래피가 중개하는 경제적 이익에 의해 지탱된다.기든스도 한때 성도착으로 여겨지던 불법적인 성행위들이 오늘날 널리 확산되고 이에 대한 도덕적 질타가 약해져가는 현상을 현대사회 변화의 특징으로 보았다. 지금 현대사회 안에서는 다양한 성의식과 성행위에 관련된 현대인의 섹슈얼리티가 다양한 생활양식으로 점차 인정받고, 개방적이고 공적인 자리에서 논의되고 있다. 기든스는 이러한 섹슈얼리티를 ‘신체와 자기정체성, 그리고 사회규범이 일차적으로 연결된 지점‘으로 보고 자아형성의 과정으로서의 현대적 성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오늘날 동성애 등 성도착에 관한 사회적 인정을 요구하는 성적다원주의의 모습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모습으로 이해된다. 이에 따라 성차문제, 성의식과 성행위의 다양성에 대한 개인적, 도덕적, 사회정책적 쟁점이 사회전면에 부상되고, 관련 집단들이 투쟁하는 양상은 성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성도착에 대한 편견과 폭력에 대항하여 성적 다원주의를 확보하고자 하는 일련의 투쟁적 담론들은 모두 기든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성찰적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5. 보여지는 성, 바라보는 성1) 노출과 관음의 세계프로이트는 관음증을 성감대와는 독립적인 성본능의 충동으로 보고, 전 성기적 자기 에로티시즘에 결부시켰다. 관음증을 지배적이고 음란한 응시로써 타인을 종속시키는 것과 연결시켰다. 바라보는 사람은 타인을 보는 쾌락의 대상으로 삼고 이를 통제하는 의미에서 능동부위의 노출에 싫증을 쉽게 느끼는 가부장적 사회 속 남성의 변덕스런 관음적 시각과,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패션산업의 논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프로이트적 분석에 따르면 여성패션의 성적 매력의 표현은 여성의 나르시즘과 관련된다. 남근이 없는 여성은 자신의 육체에 대한 만족과 육체를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으로 신체노출에 민감하고 에로틱한 옷에 나르시즘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의 성적 질투와 사회적 선망에 대한 경쟁심은 여성 스스로를 꾸미는데 더욱 열중하게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여성의 노출본능 못지 않게 남성의 관음적 본능은 옷의 성적 어필을 강화시켜왔다. 보려는 본능은 성적 충동의 근원적 요소 중 하나이고 접촉본능에서 유래하며 정신분석학적으로 성적 쾌감을 주는 행위이다. 남성은 여성의 노출을 바라보면서 즐긴다. 가부장적 사회는 남성의 이러한 관음증세에 대해 관대하다. 남성중심의 사회속에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은 남성의 관찰과 통제의 대상이 되어옴에 따라 여성은 수동적으로 보여지기를 원하는 습성을 갖게되고 노출적인 몸치장을 하게 되었다.그러나 노출에 의한 성적 욕망의 표현에 대해 사회문화적 규범과 관습은 항상 관대하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출본능과 성적 본능의 자유로운 표출은 금기시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금기를 범하는 순간 죄의식을 느끼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금기를 타파함으로써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금기는 인간문명의 산물이다.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금기사항과 억압적 요소가 많이 존재한다. 성적 충동과 무한한 성적 만족은 절제하지 않으면 수치심과 죄의식이 수반되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인간은 절제있고 정숙하게 보이기 위해 성기와 성감대를 옷으로 가렸고 신체노출은 하나의 금기사항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문명의 상징인 이 금기에 도전하고 이를 위반하고 싶어한다. 옷속에 속살과 성감대를 노출시키고 싶고 또 그것을 엿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금기시된 신체부위가 드러날 때 성적 욕망이 분출되는 것이다.
1. 오이디푸스 왕과 서양정신1) 자유고대 그리스 인들은 운명에 굴복하는 신의 노예가 아니라 운명과 맞서 싸우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들에게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스 비극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서양정신이라 할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고 태어난 사나이 오이디푸스. 그리스 비극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은 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맞서 싸운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기록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 당당히 절대적인 존재인 신과 맞섰다. 신보다 미약한 힘을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의 노예로서 굴복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자신의 운명과 싸웠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로이 결단하고 행동하면서 운명과 싸워 나갔지만 자신이 내린 자유로운 결단과 행위로 인하여 비극으로 빠져 들어간다. 자유의지로 운명과 맞서려는 영웅 정신으로 무장한 오이디푸스는 그러한 자유 때문에 철저히 파멸한다. 코린토스의 왕자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저주스런 운명을 피하기 위해 나라를 버리고 떠난 오이디푸스의 결단과 행동은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온다.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기 스스로 자유로이 내린 결단과 그 결단을 실천에 옮긴 능동적인 행동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만약 절대자인 신이 내린 신탁에 맞서는 대신 신의 노예로 모든 자유를 내던지고 신에게 굴복했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자유를 지키는 위대한 영웅 또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은 절대적이며 완전한 존재다. 그에 비해 인간은 신에 비해 미약하며 불완전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신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신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뜻에 따라 고민하고 결결과적으로는 절대적인 존재인 신에게 패배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 비참함 속에서도 자유만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당당함을 지켜냈다.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사실을 덮어두려 할 때도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주에 빠진 테베시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조사를 계속하여 결국은 자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를 밝혀내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파멸시킨다. 두 눈을 잃고 왕좌에서 쫓겨나 방랑의 길을 떠나는 오이디푸스. 그러나 그의 비참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결코 무기력한 패배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이 휘두르는 운명이라는 칼 앞에 저항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노예가 아니라 운명에 당당히 맞서 싸운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킨 위대한 패배자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2) 나르시시즘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매혹돼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듯 타인을 외면하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은 자유와 더불어 또 하나의 대표적인 서양정신으로 그리스 비극 “오디푸스 왕”에도 투영되어 있다.오이디푸스는 주체성이 강한 나머지 독단과 독선에 사로잡힌 모습도 보인다.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이면에는 이오카스테에 대한 배려 없이 테베시의 왕으로 백성들을 책임지고 있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자기애(自己愛)가 존재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 이는 스스로 자유로이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성을 가진 자유인이라는 긍지를 느끼며 홀로아름답고 홀로 자유로운 상태로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정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가 코린토스를 떠나는 행동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저주스런 운명에 처한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밝히기 않자 테이레시아스를 모욕하는 행동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나 타인에데에도 조사를 멈추지 않는 행동에도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자기의지에 따라 주체성 있는 자유인의 행동은 때때로 자신만의 관점을 편협하게 고집하고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고립된 개인적 주체성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의 여러 행동들 또한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각의 고립되어 있는 개인들이 보편적 주체성을 실현하고 거기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객관적으로 명료하게 드러내는 진실한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의 당사자들이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기만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문제되는 사태에 대한 전체적인 전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입장 자기의 관점 그리고 자기의 이해관계에만 사로잡혀 모든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고 갔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이디푸스가 자유를 가진 주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대화를 통해 타인의 입장과 의견을 받아들여 전체를 위한 공감대를 얻어내는 것을 방해하여 오이디푸스를 파멸의 길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나르시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서 마음을 열고 타인을 진심으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파멸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2. 하고로모와 동양정신1) 천인합일 (天人合一)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 명심보감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로 하늘의 뜻에 순응하라는 유가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천인의 날개옷을 손에 넣었지만 순리에 따라 천인에게 날개옷을 돌려줌으로써 전생의 업에서 벗어나는 어부 백룡의 행동은 천인합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우주와 인간의 원리를 일관된 것으로 보아 인간은 우주의 원리 즉 하늘의 뜻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인합일은 하고로모 안에 내포되어 있는 동양정신의 하나로 주어진 상황에서 선(善)한 행동을 하도록 강내자 어부 백룡에게 자신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어부 백룡의 마음 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일깨우려는 하늘의 뜻이다. 사악한 마음과 선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늘의 뜻에 따라 날개옷을 돌려주는 선한 행동을 하고 그로인해 스스로를 구원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인간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절대적인 존재인 하늘의 뜻을 우러러 받들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수동적이며 운명론적인 정신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어부백룡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어부백룡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천인의 고통을 지켜보고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선한 마음을 일깨우려는 하늘의 뜻 이었다는 것 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부 백룡은 주체성을 가진 자유인이라기보다 하늘의 뜻을 대신해서 행하는 하늘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어부 백룡이 날개옷을 돌려주는 자비를 베풀어 천인의 춤 준하무를 보면서 천인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내용은 천인합일의 백미라고 하겠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하늘의 뜻에 따라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하는 하늘의 세계에 하나로 합쳐져 그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순응과 보상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순천자(順天者)가 흥(興)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순천자(順天者)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부 백룡이 사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날개옷을 돌려주지 않고 그로인해 전생의 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역천자(逆天者)가 망(亡)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되었을 것이다. 선한 마음과 사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하늘의 뜻이다. 하고로모에서는 천인을 통해 인간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 선한행동을 하게하고 인간에게 천인의 춤 준하무를 보여주고 그를 구원해 주었지만 그 반대로 천인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일깨워 악한 행동을 하게하고 그를 벌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늘이 결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나 어부 백룡이 하늘에서 내려와 물고기로 있다가 눈을 찌른 어부를 미워해 어부 백룡으로 태어났다가 천인에게 날개옷을 돌려줌으로써 업을 씻고 하늘로 돌아갈 기회를 얻는 내용은 모두 영원 회귀를 원하는 동양정신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영원 회귀는 인간의 생성과정을 역으로 소급하는 과정을 밟아가는 역리의 수련을 통하여 우주가 분화하기 이전의 카오스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영원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고도 하겠다.이는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한 내용과도 일맥상통 한다. 즉 도(道)는 만물을 파생시키는 본원이고 도(道)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변화 발생하여 나오는데 그 발생은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으며, 셋이 만물을 낳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하나’란 천지만물이 분화 되지 않은 카오스(chaos) 상태이고, ‘둘’은 천지(天地) 혹은 음양(陰陽), ‘셋’은 천지 음양이 교합해서 만물을 낳게 하는 허허로운 충기(沖氣)다. 이런 우주 생성원리에서 인간이 태어났으므로 인간 또한 마음을 모아 성명(性命)을 닦고 기(氣)를 기르며 신(神)을 지켜 욕망과 망상을 없앰으로써, 거꾸로 셋에서 둘로 돌아가고, 다시 둘에서 하나로 돌아가 그 하나를 지키고, 하나에서 다시 道로 돌아가 영원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하늘에 살던 백룡이 물고기로 변신해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눈을 찌른 어부를 증오한 업을 쌓아 어부 백룡으로 환생하여 인간 세상에 있다가 천인의 날개옷을 돌려주고 모든 업을 소멸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게 되는 내용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역리의 순환구조를 보여준다. 하늘에서 지은 죄과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죄과가 소멸하자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것을 형태적 역리라고 한다면 천상으로 회귀하는 것은 공간적 역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죄과를 씻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하늘의 도움으로 자신의 죄과를 씻고 본래의 신성성(神聖性)을 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