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eration of the Korean adoption law0. IntroductionThe Act on Special cases Concerning the Promotion and Procedure of AdoptionThe first chapterThe first amendment; This law's purpose is providing related facts for promoting adoption for abandoned children, protecting foster sons, and planning to promote welfare.(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第1章 總則第1條 (目的) 이 法은 要保護兒童의 入養을 촉진하고 養子로 되는 者의 보호와 福祉增進을 도모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規定함을 目的으로 한다.)This is the first amendment of the current Korean adoption law. I thought it is ridiculous when I first saw this law, because of the name of the law. As you see in the title of the law, one of the law's purposes is promoting adoption. Why did the Korean government make a law to promote adoption? Is there a reason to promote adoption still in 2008? And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adoption and welfare?Korea is one of the most notorious countries for its international adoption. Because of this, many people who don't know Korea well may think that Korea is a poor or undevel 保護에 있어서 그 地域社會의 한 成員으로서 認定되는 相當한 待遇를 받도록 하겠다는 誓約과 이에 對한 本國 公共機關 또는 그 委囑을 받은 者의 保證이 있을 것)This Third Amendment also shows the first Korean adoption law was made for international adoption. Requirement for the adopting parents were just focused on their enough property to support foster sons. Boon Young Han(2007) criticized this amendment that they do not regard child’s rights to support in adjusting to a new family, new culture, language and country. Most serious problem of this amendment is that these five elements were all. There are no additional requirements for foster parents. This amendment should have had more specific requirements.The Sixth Amendment (Representation of foreigners)Foreigners could let organizations which is designated by decree?law stand part of adoption procedure第6條 (外國人의 代理) 外國人은 閣令의 定하는 機關으로 하여금 入養節次의 一部를 代理하게 할 수 있다.I believe that this amendment was for international child adoption agencies such as Halts. Because of this amendment, international child adoptiontence. Perhaps they could have get protests from foster parents who refused taking adoption by the Korean government. They might think that the Korean government considered them they didn’t have proper nature.(2) Current phase of the Korean adoption lawIn 1995, the name of the law was changed again. And this time, it added more words and attached more details. And they made chapters above amendments. Now this law has seven chapters with 28 amendments. The name of the new adoption law was The Act on Special Cases Concerning the Promotion and Procedure of Adoption (입양촉진및절차에관한특례법). And next paragraph is the official reasons why the Korean government changed the adoption law.To activate domestic adoption by developing prior adoption system based on procedures only to welfare service which really care right interest of foster sons, deliberating welfare policies for foster sons, and complementing imperfection of the current law.(國內入養을 活性化하기 위하여 종전의 節次中心의 入養制度를 要保護兒童의 權益保護를 위한 실질적인 福祉서비스로 발전der of the ministry health, welfare and family affairs(第3條 (責任) ④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요보호아동의 입양 활성화 및 입양 후 가정생활의 원만한 적응을 위하여 다음 각호의 사항을 실시하여야 한다.1. 입양정책의 수립 및 시행2. 입양에 관한 실태조사 및 연구3. 입양 및 사후관리 절차의 구축 및 운영4. 입양 및 가족 지원5. 입양 후 원만한 적응을 위한 상담 및 사회복지서비스 제공6. 입양에 대한 교육 및 홍보7. 입양 모범사례 발굴8. 그 밖에 보건복지가족부령이 정하는 필요한 사항)And in this revision, they made the day and the week of adoption.The Third?Second Amendment (The day of adoption)Article 1; Every year 11th May is decided as the day of adoption, and one week from the day of adoption is decided as the week of adoption for settlement of healthiness adoption culture and promoting domestic adoption.Article 2; A nation and self?governing organizations must enforce projects such as proper events that are suitable for the day of adoption by Article 1.(제3조의2 (입양의 날) ①건전한 입양문화의 정착과 국내입양의 활성화를 위하여 5월 11일을 입양의 날로 하고, 입양의 날부터 1주일을 입양주간으로 한다.②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한 입양의 날 취지에 적합한 행사 등 사업을 실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However I did not know there is the day of adoption in Korea behe Korean adoption law about international and domestic adoption need to change for UNCRC 4) and last, once again, UN Committee on the right of Child expressed their regret that the Korean government did not signed Hague Convention. For ratification of Hague Convention, the Korean government has to make the international adoption law first. Even though there is the Korean adoption law and it deal with international adoption, but there are limit which this law couldn’t deal with. It is really important and significant for Korea, because of protecting welfare and right of children and keeping safety in Korea society. So this is the time to sign Hague Convention by the Korean government. I wish the Korean government sign to Hague Convention to protect child’s right and as a member of global community as soon as possible.4. ConclusionIn this paper, I traced alteration of the Korean adoption law. As you saw, the Korean adoption law was legislated for international adoption. Still now, Korea852]
조선유교사회 농업기술 발달과 사회변동의 의의-『한국사회사연구』와 『조선유교사회사론』을 중심으로-1. 들어가며1990년대 후반, 아시아의 용들이라고 불렸던 국가들이 줄줄이 경제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는 그동안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바라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시아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유교자본주의에 돌렸던 서양은 IMF사태 이후 아시아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전통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비판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는 구식과 동의어로 간주되기도 하였다.유교적 가치, 아시아적 가치는 과연 오늘날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일까. 이태진 선생님은 유교적 가치에 대한 이런 논쟁에 대하여 역사가의 논쟁 참여 의무를 지적한다.) 또한 농업경제의 이념성과 기획성, 국가적 민(民)의 창출과정, 의술발달ㆍ인구증가ㆍ농업기술 개발을 통한 농업노동력 창출과 경제력 획득, 경제발전을 위한 조선왕조 국가의 적극적 개입 양상을 돌아보고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유교와 경제발전은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조망한다.본고에서는 이태진 선생님의 이러한 견해와 관련하여 특히 조선시대 농업기술의 발달을 통한 경제 발전과 이로 인한 사회 변동을 선생님의 다른 저서들을 통해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유교적 가치, 아시아적 가치가 그동안 조선사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2. 조선유교사회의 농업기술발달과 사회변동(1) 조선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조선왕조 600년의 긴 시간동안 변함없이 왕조를 지배하던 사상은 유교였다. 조선의 국가 시스템은 유교에 의하여 움직였으며, 이는 위로부터 아래까지 사회 전 영역에 걸쳐서 적용되는 규범이었다. 따라서 유교에 대한 이해 없이는 조선시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어렵다. 특히 앞서 다룬 유교와 경제발전에 대한 사회경제적 이해, 그리고 왜 유교가 조선시대에 유효하였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는 조선시대를 규정하기 어려울 것이다.조선왕조에서 유교는 백성의 생활개사회발전과 문화발전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이태진 선생님의 『한국사회사연구』와 『조선유교사회사론』은 조선시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틀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농업기술의 발달이 어떻게 사회변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변동으로 인한 사회운영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일련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변화 과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2) 15,16세기 성리학의 보급조선을 지배하는 사상이었던 유교, 성리학이 어떻게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은 농업 기술의 발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기, 14세기부터 새로운 형태의 농경인 연작상경(連作常耕)하는 집약농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15세기 말엽부터 새로운 수리상의 성과가 수경을 확대시키는데 기여하는 등의 수리 혜택이 확대되었다. 15, 16세기의 이러한 집약농업기술의 발달은 여러 부면의 변혁, 발전의 토대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업발달에 미친 영향이었다. 농업경제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소농민까지 소량으로 시장을 위한 상품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면포가 화폐기능을 하게 되면서 15세기 장시 발달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16세기 농업발달의 결과로 상업발달이 이루어지는 한편 지방에서는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유교문화가 지방사회에 뿌리내리게 된다.)유교문화가 지방사회에 어떠한 양상으로 뿌리내리게 되는지, 특히 15, 16세기 신유학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조선사회에 정착되었는지는 농업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사성이 보인다. 송대 중후반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강남지역은 신유학 발달의 본거지이자 새로운 농법기술인 강남농법의 진원지였다.) 15세기 조선의 과제는 이러한 발전된 강남농법을 도입하여 벼농사의 기술적 제약을 타개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이와 함께 신유학에 대한 이해가 점점 높아져 갔다. 이러한 현상을 이태진 선생님은 역사적 변동은 한편으로 제언과 함께 양대 수리수단이었다. 16세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수전을 확대시키고, 이앙법의 본격적인 보급을 마련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를 통해 수전 농업은 양적, 질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언전 역시 천방과 함께 15세기에 바탕이 마련된 집약농업기술이 16세기에 새로이 얻게 되는 양대 성과 중 하나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순한 농업적인 성과만이 천방관계의 발달과 언전 개발이 이루어낸 것은 아니었다. 개발과 보급 주체에서의 차이점은 농업기술 문제에서 더 나아가 훈척 계열과 사림의 대립이라는 당대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천방관계의 발달과 언전 개발에 대하여 이태진 선생님은 이 둘을 지방 중소지주층이 성리학을 보급시킬 수 있었던 경제적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천방 개발의 경우, 이러한 천방의 개발에는 규모에 따라 인력이 십수명에서 수백명까지 필요하였다. 이러한 인력은 향약 조직에 따라 충분이 동원될 수 있는 규모다. 인적 규모의 상응성 외에, 향약류의 보급을 추구한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 천방 개발에 관련한 사실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농업 경제력 발전을 통해 서원 건립과 같은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일을 지방 중소지주층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언전의 경우 역시 16세기 언전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개발과 경영 측면에서 유향소와 함께 훈척 세력이 수탈의 기반으로 사용하게 되었다.)(3) 농업기술 발달과 동아시아농업기술의 발달이 사회변동을 일으키고 사회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16세기 조선의 모습은 비단 조선에만 국한된 양상이 아니었다. 16세기의 농업발전에 따른 경제변동과 이로 인한 정치, 사회적인 변화는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다. 이태진 선생님은 16세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타계하고자 농업기술의 발달에 초점을 맞추어 이 시기의 변동성을 설명하는 한편, 동아시아 전체의 변동 과정을 통해 이 기간의 동아시아 번영이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중국사와 일본사에서 16세기 상품상하 계층을 막론하고 변동을 일으켰다. 새롭게 생출된 부를 둘러싸고 지배신분층 내 알력, 대립, 농민층 분해에 따른 파동이 일어났고, 관상(官商)의 유착관계에 따라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16세기의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성리학은 상품유통의 발달로 조선사회가 큰 변동을 겪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응관계로 지방사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즉 사림의 재지 중소지주라는 특성상 상품경제시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는데, 사회변동을 겪은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농촌사회의 안정을 전제로 한 상업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결국 16세기 성리학과 양명학은 상업자본 발달기 동아시아의 대표적 사상체계로, 상업적 분위기에 대한 구체적 대응을 가진 사상이자 윤리체계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사림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 조선시대의 지방사회에서 매우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태진 선생님이 지적하듯이 임진왜란을 겪은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두 차례나 호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이전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굳건한 조선시대의 사상적, 사회경제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4) 17세기 사회변동과 사림16세기 조선시대 위에서 살펴본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한 사회변동을 통하여 사림세력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16세기의 조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은 바로 당시의 붕당과 사화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붕당과 사화는 조선사회를 좀먹게 하여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는 타성적 시선이 팽배하다. 그러나 이태진 선생님은 붕당에 대한 이러한 회의론적 시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중소지주층의 대두와의 관련성을 통해 붕당을 설명한다.과전제가 직전제로 바뀌고 직전제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과전제도는 붕괴되고 사림이 정치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림은 관권의 일방성을 배제하고 향촌사회 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향촌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하에서의 수직적인 군신관계가 과전제도가 붕괴하면서 재지 지주층의 본연적 속성인 향촌사회 지배력을 발휘하면서 중앙정계에서도 붕당적 결성을 이루어 나간 것이다.) 붕당정치의 성립 역시 농업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제도의 변혁이라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회변화의 한 부분이었다. 붕당의 발생과 역할에 대한 이러한 성찰이 바탕이 되어야 붕당의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이후 조선사회는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서 변하였는지 역시 농업기술의 발전과 사회변동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변화양상은 계속 이어진다. 17세기 후반 이앙법의 보급은 당시 조선 농업기술에서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이앙법의 보급을 계기로 벼농사의 황두꾼 조직이 두레로 바뀌게 되었다. 두레는 조직의 구성면에서 지주층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농민사회 구성원의 자율성을 높였다. 두레 자체의 향상된 경제력을 통하여 공고한 결속력을 발휘하면서 신분적 강제로부터의 일탈을 획득해 나갈 수 있었다.)(5) 조선후기 사회변동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최종적으로 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을 살펴봄으로써 앞서 살펴본 변화의 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의 방대한 내용과 증거들을 살펴보기보다 이러한 논의가 가지고 있는 함의가 현재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숙고해 보는 것이 온당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조선시대 농업기술의 발달과 사회변동의 과정에 관해서 살펴본 것과는 다른 주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식민사관으로부터의 극복을 위한 내재적 발전론의 등장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논의들이 대두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양반사회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태진 선생님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조선후기 사회변동론은 1980년대 거센 비판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맹아론과 같은 주장은 자본주의 경제국가들의 그것에 비하면 미약다.
Rhee Seungman , the first president of Korea,Regarding his political activities in 1940’s and estimationIntroduction1945. 08. 15, Korea was liberated from Japanese Imperialism. But Korea was not utterly free from two powerful countries,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Moreover, the US department of state,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and the Left and the Right parties struggled for supremacy in South Korea.Rhee Seungman was the final winner of this complex political field in South Korea. He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Korea and fulfilled his political ambition. But current reputation of Rhee Seungman is controversial. Somebody said he is a father of the country, the best independence movement person, a real man of diplomatic talent. But the other said he is pro-Japanese, an opportunist, and a president who abandoned his people.In this presentation, I would like to show his political activities in 1940’s. We could judge him by these records.Rhee Seungman’s political activities in 1940’sIn 1910, Rhee had a doctor's degree at the Princeton University, and from 1910’s to 1930’s he did political movement in the US. So his political movement inclined to the US. He spent his whole political ability especially in diplomacy. However he had no real diplomacy achievement before the Independence day of Korea (1945. 8. 15.), because his diplomacy method was not popular in South Korea, and his political support as a base was lower than other politicians.From 1942. 06. 13 to 1942. 07. 12, Rhee Seungman made a speech at the "Voice of America" as a representative of the temporary government of Korea in Korean. But he was not a true representative, and most of his speeches were not based on truth. It was too hard to get information, therefore many politicians and people in Korea believed that he was a real representative without any criticism. This chance gave him image of a father of the country and Korean considered him as a national leader.After the Independence day of Korea, 3 things made Rhee the best political leader in Korea. It was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support of the Left and the Right and his charisma. And he rode on the US policy in Korea. Soon he had great influence in the political field.Finally, Rhee Seungman became the best political leader of Korea. But he betrayed his US supporters, and tried to change US policies in Korea as he intended.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and his US supporters were raged but he took the rein of the Korea government perfectly. In 1947, he declared a separation from his old political supporters including Kim gu who helped Rhee so longtime as a political partner and devoted his life for liberty of Korea. In 1948, Rhee seungman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Korea.Estimations by the US and conclusionFollowing two estimation show who Rhee Seungman was clearly and significantly.In G-2 Periodic Report, no. 703 (1947. 12. 8.), the first US Ambassador to Korea, John J. Muccio, said “In my opinion, Rhee Seungman turned democracy to his dictatorship (Rhee Autocrat). He is a fussy and extremely obstinate dictator without the question.”In Prospects for the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 ORE 44-48, Appendix A (1948. 10. 28), CIA estimated Rhee Seungman that “He took an advantage of everything he needed. Only important exception was he never dealt with communism. But he was a shallow-brained person, his acts were often irrational and childish. However he approved that he had great abilities in the political field.”Every man has merits and faults. It depends on the point of view, an estimation on one man is very different. But we could say how the first president of Korea, Rhee Seungman was. We could also say what he did and what his faults were. To conclude, like CIA says, he was a shallow-brained person, but he was a clever politician.ReferenceJung Byung Jun. Study of Rhee Seungman. Yuksabipyungsa, 2005.Yu byung en. Reconfiguring of VOA broadcasting. Basongtoronhwe, 1988.
고려 무신정권과 민의 저항1. 들어가며고려시대 무신정권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특색 있는 정권이다. 무신세력이 정권을 잡았다는 점도 특별하거니와, 그 이후 무신정권이 보였던 강한 독자성과 주체성, 자주성은 이전과 이후 정권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매우 독특한 점이다. 또한 무신정권은 정권을 잡고 정치구조를 지배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구조를 만들고 정권 안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 수립 후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에서 항쟁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무신정권 수립 이전부터 계속되어왔던 농민과 천민의 항쟁은 무신정권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격화되었고 민심은 동요하였으며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 이러한 점은 무신정권이 가지고 있던 독특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취약점을 가지고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내용이다.본고에서는 무신정권의 대민정책과 이후 무신정권에 대한 농민과 천민의 저항이 표출되게 된 배경을 추적하고, 저항의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무신정권의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당대 무신정권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통해 당대 무신정권의 정치적 지형도를 확인하고자 한다.2. 민의 항쟁 배경무신란은 고위 무신들의 정치적인 쿠데타가 아니었다. 난에 참여한 인물들의 신분 출신은 대부분 미천한 신분이었고 일반군인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 고위 무신들이 추가적으로 합세한 성격이었다. 무신란은 하급 무신들과 일반군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이 고위 무신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무신란에 가담했기에 무신란은 초기보다 더욱 과격한 양상을 띠고 확대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일반군인들의 무신란에 대한 광범위한 참여는 지방민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무신란으로 인해 지방으로 피한 문신들을 지방민들은 용납하지 않았다. 무신란의 성공으로 인해서 고무된 것은 일반군인들 뿐만이 아니라 지방민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무신정권의 수립 이후 각종 관직에 하층민의 진출이 늘었고, 뒤에 언급하겠지만 무신정권 아래에서 과거를 통해 등용된 문신의 수가 점차 증가한 것도 무신정권의 긍정적인 면모였다.무신정권은 성립과정에서 문신귀족을 다수 제거했지만 이후 문신체계를 정비하는데 노력하였다. 새로운 문신체계는 일부 구문신 계열을 포섭 등용하기도 했지만, 무신정권 아래에서 과거를 통하여 등용된 문신들이 점차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문신들은 항상 무신의 견제와 탄압으로 인하여 정치활동은 위축된 상태였다.) 또한 최씨정권에 이르러서는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추종하고 아부하면서 그들의 활로를 개척하였다. 이처럼 문신들이 무신정권에 예속되고 굴종하게 되었다. 최씨정권에서 문신들이 우대를 받기는 하였으나 전적으로 문신들이 무신과 결탁하고 예속되게 된 대가였으며, 문신들이 무신의 정권 합리화와 정당화에 공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신세력을 견제할 제어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신정권의 등장으로 인해 문벌 주도의 정치체제와 문벌의 특권은 해체되고 권위는 약화되었으나, 그로 인한 정치적 세력의 공백을 채운 것은 무신정권이었다.중앙집권적 사회구조 하에서 재지세력(在地勢力)은 중앙정부의 통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중앙정부와 그의 대행자인 지방관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농민항쟁은 국가-재지세력 대 농민간의 대립관계와 국가 대 재지세력의 모순관계가 관철되었다.) 그리고 12?13세기의 농업 생산력 발달과 그로 인한 향촌사회 내부의 농민층 분화는 민에 대한 토지탈점과 과중한 수탈로 이어졌다. 또한 12세기 이래로 대토지 겸병의 확대에 따른 부재지주화(不在地主化) 현상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중앙에 대한 종속성이 심화되었고, 재지세력의 상경종사를 어렵게 함과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중앙의 권력에서 밀려나 낙향하게 된 재지세력들은 기회만 있으면 중앙으로 다시 올라갈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주어지면 재지적 기반의 성과물을 중앙으로 옮겨놓기에 바빴다. 따라서 지방의 중앙에 대한 종속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지방으로 낙향하였던 인사들은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겪고 있었으며, 그 결과 재경세력과 재지세력, 재지세력 내부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농민항쟁과의 결합현상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농민항쟁을 경험한 재지세력들 중 일부는 무신정권과 결탁하여 반란군의 진압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무신정권은 현지의 토착세력과 결탁을 추구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계층간의 분화가 더욱 촉진되었다.)무신정권은 위와 같이 12세기 이래로 계속 이어져 오던 지방사회와 하층민의 동요를 진정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중앙에서의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방 통제책을 시도하였다. 무인정변 이후에는 극단적 문인탄압과 지배체제 변동에 대항하여 문신, 사원, 지방세력이 동요하면서 무신정권은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시에 사용하였다.) 찰방사를 파견하여 지방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무인정변 이후에 무절제하게 파견되었던 지방관과 이와 결부되어있던 재지세력들에 대하여 견제를 꾀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지방사회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무신정권의 노력은 무신정권의 파격적이고 전면적인 지방관 교체와 같이 지방행정이 파행적으로 치달으면서 여타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무신정권의 움직임은 기존 지방사회 정책의 폐단을 수습하지 못하였으며 지방사회에 혼란을 불러왔고, 오히려 지방사회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무신정권은 12세기 이래의 모순과 하층민의 불만에 대한 개혁세력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무신정권의 등장에 대한 하층민들과 지방민들의 고무에도 불구하고 이에 부응하지 못한 점. 무신정권이 재지세력에 대한 안정적인 지배를 성공하지 못한 점. 그리고 지방사회의 폐단을 수습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기 위한 대민정책의 실패도 저항과 항쟁이 발발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3. 무신정권에 대한 민의 항쟁 양상무신정권기에 들면서 민란이 격화된 것은 그동안 쌓였던 민의 불만이 무신의 난이 지니는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폭발한 것이었다. 민란의 주 원인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신정권의 지방통치 폐단과 지방민과 하층민의 고무, 민중의 성장, 재지세력 내부의 갈등과 대립, 농민의 궁핍을 들 수 있다. 문신귀족정치기부터 농민의 궁핍은 농민의 항쟁으로 표출되고 있었고, 무신정권이 성립된 후 무신들의 토지겸병과 지방관들의 횡포와 수탈로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궁핍해졌다. 그리고 무신정권기의 신분질서 동요와 그에 따른 변화는 민중의 지위와 신분의식을 상승시켰고, 무신정변 이후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크게 문란해졌던 것이다.)무신정변이 일어난 뒤 3년 후인 명종(明宗) 3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堂)이 정중부, 이의방을 토벌하고 전왕(前王)을 복위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김보당의 난은 2개월도 못되어 진압되고 말았다. 항쟁이 폭발하자 무신정권은 군사를 내려 보내어 김보당의 핵심 세력을 제압하고 전왕을 참혹하게 살해함으로써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그러나 김보당의 난 당시 김보당의 세력은 상당히 컸으며, 난의 핵심 세력은 대부분 문벌 출신이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항쟁이 일어났다. 따라서 김보당의 난은 무인정권에 대한 문신세력의 반항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김보당의 난은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전왕을 복위하여 문벌귀족정치로 복구하려는 성격으로 전형적인 반무신란의 모습이었다.조위룡(趙位龍)의 난은 이듬해인 김보당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인 명종(明宗) 4년 서경에서 발생하였다. 조위룡의 난은 발발한지 2년이 지난 명종 6년에 진압되었다. 무신정권은 조위룡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써야 했을 정도로 조위룡의 난을 주도한 세력은 강성하였다. 실제로 조위룡의 난에는 서북면의 거의 모든 제성(諸城)이 참가하였다. 또한 동북면의 제성도 많이 호응할 정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항쟁의 주동자였던 조위룡은 관인 출신이었지만, 그 주체는 제성의 도령(都領)에게 이끌린 서북지방의 주인(州人)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조위룡이 기병할 때 양계(兩界)제성에 보낸 격문에서 북계제성이 거칠고 억세다고 개경의 중방(重房)이 의론하여 정벌하는 군사를 발하였다고 하였으니 어찌 앉아서 주륙을 당하겠냐고 하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즉 서북계인을 토벌하려는 무신정권에 대한 민란 성격의 반발이었던 것이다.조위룡의 난 이후 항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난이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명종 20년 동경(東京)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으며, 이어 3년 후에는 경주지역에서 초전민(草田民)이 연합세력을 형성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였다. 자연재해와 더불어 지방관?토호(土豪)?사원의 침탈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반발은 어느덧 세력이 커져서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였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이의민(李義旼)은 이들을 이용하여 신라부흥까지 계획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군대와 격전 끝에 초전민들은 연합전선이 무너지고 이후 무신정권은 이들을 처단하는 한편 그들의 처자를 노비로 삼았다. 이에 분개하여 농민들이 다시 봉시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운문산(雲門山)에 숨어들어가는 것으로 항쟁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신라 부흥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권력층 내부에서 입지가 불안해 진 이의민은 최충헌(崔忠獻)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후 무신정권은 농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강구책을 내어놓으나 실패하고, 진압된지 5년 만에 경주는 다시 농민봉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 과학의 차이와 융합의 길;프리초프 카프라와 장회익의 주장을 중심으로필자는 얼마 전 장회익의 『삶과 온생명』에서 제1부 제1장 「동서양의 학문 세계,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읽고 느낀 감상을 쓴 적이 있다. 당시 필자는 저자가 서양과학을 동양과학에 비하여 우위에 두고 있었다는 인상을 짙게 받았다. 그 이유는 서양과 동양의 학문 전통을 융합하여 하나의 보다 완전한 학문으로 승화시킬 방법을 강구하는 부분, 동양 문화권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대물 지식의 성과를 인정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부분, 동양 사상을 통해 얻어낸 삶의 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서구적 관점의 시각을 통해 새롭게 조명해 봄으로써 동양적 지혜의 성과를 재확인 할 수 있다는 부분에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저자의 의도와 주장을 오해한 것이었다. 저자의 논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저자의 저서를 여러 편 읽고 침착하게 도출해 내었어야 하나, 한 편의 논문만을 읽고 필자는 너무 성급하게 장회익의 논지를 단정지어 버렸다.필자가 읽은 장회익의 「동서양의 학문 세계, 어떻게 서로 다른가」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장회익의 저서 『삶과 온생명』의 여러 논문 중의 한 편이다. 그의 저서에서 주목할 부분은 장회익의 사상이 신과학을 제시하였던 프리초프 카프라와 얼마만큼의 차이를 보이느냐 하는 점이다. 『삶과 온생명』에서 장회익은 카프라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그의 저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The Tao of Physics)』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대 물리학과 물질관이 동양 사상 속에 담겨 있는 세계관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물리학으로 대변되는 20세기 현대 과학이 더 이상 과거의 고전 물리학적 자연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이동하였음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병폐를 야기한 서구 과학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카프라의 글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 과학계와 사상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신과학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카프라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 장회익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는 신과학, 서양과학에 대한 자성의 촉구의 이면에는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사상이 일치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카프라의 인식은 장회익과는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가.이 책은 동양적 지혜와 서양의 과학 사이에 본질적인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과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한다. 또한 현대 물리학이 기술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물리학의 길-도(道)-이 마음을 담는 길이 될 수 있으며, 영혼의 지식과 자기 실현의 도정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프 카프라카프라가 주장하는 서양의 과학과 동양의 철학이 유사함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서구에 있었던 기존의 고전 물리학적 세계관이 붕괴되고 새롭게 정립되고 있는 유기적 세계관이야말로 동양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물리학을 힌두교, 불교, 중국사상, 도교, 선(禪) 등의 차원으로 나누어 비교하는 한편, 물리학의 세부적인 내용을 동양 사상의 큰 틀 안에서 비교하기도 한다. 각종 도표와 그림들을 통해서 이러한 비교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정확한지를 보여주는 카프라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발터 티링(Walter Thiring)이 장(場)개념을 설명하는 것과 조지프 니덤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중국의 견해를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비교는 벌써 오래 전에 나온 주장임에도 불과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당대 신과학을 제시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러한 카프라의 주장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다.필자 역시 카프라의 견해가 꽤나 위대해 보였으며 동양과 서양의 과학은 결국 일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카프라의 주장을 차분하게 검토하여 보면 이러한 주장은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제시로 볼 수 없다. 서양 ‘과학’과 동양의 ‘철학 사상’의 비교이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명쾌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체적인 일치성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이러한 자신의 연구의 기반이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체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카프라의 저서를 읽는 개개인의 판단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카프라의 주장대로 동서양의 학문이 진정으로 원초적 일치성을 가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개인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체험은 카프라의 주장에 대하여 적절한 근거가 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카프라의 주장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서양의 과학 이론에 대하여 동양의 보이지 않는 철학 사상을 적절하게 끼워 맞춘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드러난다.이러한 점들을 생각할 때 단순히 개념간의 외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카프라의 논의들은 많은 오해와 헛된 기대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삶과 온생명』, 장회익카프라와 달리 장회익은 서양과학과 동양과학에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대인(對人)지식과 대물(對物)지식을 발전시킨 서양학문은 대생(對生)지식을 발전시킨 동양학문과 많은 차이가 있다. 오랜 시간 이러한 양상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동서양의 학문은 서로가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지닌다. 그러나 장회익은 동서양의 학문 사이에 보이지 않은 내적 관련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직접적으로 서로 번역이 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우회적으로는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회익은 저서의 2장에서 주역과 양자역학을 비교 검토한다. 장회익은 주역과 양자역학이라는 두 학문 사이의 유사성을 상정한다. 인간이 이룩해낸 학문 체계들이 필연적으로 공통적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며, 이러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인간 지식이 가지는 본질적 요소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한 점은 장회익이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동양 학문과 서양 학문의 ‘기본적인 차이’를 인식하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다는 것이다.) 장회익은 주역과 양자역학을 비교하면서 측정을 하는 대상과 우주관에 대한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한다. 이를 통해 동양의 과학은 현실 상황에서 현명하게 대처할 방법을 주지만 검증성과 신뢰도가 떨어지고, 서양의 과학은 신뢰성과 정치성은 높으나 파편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장회익은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학문의 성격이 다름을 지적한다. 그의 관점에 따르자면 동서양의 학문은 엄연한 차이가 있으나 융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어지는 『삶과 온생명』의 14장에서 저자는 과학과 동양 사상이 융합 가능한지를 타진한다. 그는 전체 동양 사상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시아권의 전통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신유학과 한국에 전래되어 발전된 성리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이해보다는 인간의 심성론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즉 정회익이 주장하는 대생적 학문이었다. 따라서 서양 과학과 같은 대물, 대인 학문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리학은 단지 인간에만 침잠했던 것이 아니었다. 장회익은 율곡의 「천도책」이나 여헌의 「우주설」등을 통해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대물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리학은 실험적 검증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고 학문의 목표 그 자체가 ‘치지(致知)’에 이르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중간과정인 ‘격물(格物)’에 대한 중요도가 떨어지기에 성리학은 격물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장회익은 이러한 근거를 들어 카프라의 견해를 비판한다. 그는 카프라의 주장이 서양 과학과 동양 철학사상 사이의 외형적인 유사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의미 있는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만약 진정으로 의미 있는 유사성이 있다면 한쪽 개념에 익숙한 사람이 다른 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불교와 도교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저자의 말대로 외형적인 유사성에 불과할 뿐이다.카프라의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나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으며, 장회익은 카프라가 외형적인 유사성만을 강조했다고 비판하였다. 서양 과학과 동양 철학사상의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하기는 하나 ‘과학’과 ‘철학’의 개념적 거리만큼이나 둘 사이에는 엄연한 구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장회익은 단지 카프라의 주장을 비판하고 서양 과학과 동양 철학사상이 이질적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카프라와 장회익의 주장을 종합하여 판단한다면, 서양 과학은 대인, 대물 지식이고 동양 철학사상은 대생 지식이다. 동양 철학사상은 서양의 과학과 같은 관찰에 의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그 둘 사이에는 외형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형적인 유사성을 넘어서 동서양의 학문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의 융합을 생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