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자금성(紫禁城)학 교 : 청주대학교과 목 : 세계문화기행제출일 : 2008. 5 . 20학 번 : 05441082성 명 : 이 민 규1. 자금성의 개요명칭: 자금성 (Forbidden City)위치: 중국 베이징건축기간: 1407년-1420년건축배경: 명의 황권 강화를 위한 천도계획건축시기: 중국 명나라 영락제좌표: N39 54 58.8 E116 23 27.22. 자금성의 역사와 문화자금성은 중국 명,청 양 시대 24명의 황제가 거처하던 중국 봉건왕조의 마지막 왕궁이다. 590년의 역사를 지닌 이 고궁은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가장 완전한 형태이며, 중국 최대의 박물관이기도 하다.이 고궁은 궁실만 모두 9,000여 칸이며, 면적은 72만㎡에 이른다. 애초 설계한 것의 반밖에 못 지었다고 하니 당초 구상이 얼마나 장대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왕궁 주위에는 높이가 3m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궁 장벽 밖에는 넓이 52m의 성을 보호하는 하천 (호성하)이 둘러서 흐르고 있어 하나의 성채가 완벽한 경계를 이룬 요새를 이루고 있다.자금성의 건축 배경에는 당시 영락제를 보좌했던 한 스님의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날 밤 스님은 천제가 살고 있는 ‘천상의 도시’를 꿈꾸고 나서 이와 똑같은 수도를 만들것을 황제에게 진언했다.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한다는 명분에 의해 영락제는 지상에 세계의 중심으로서 ‘천제의 도시’를 재현할 것을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자금성의 첫 글자 자(紫)란 ‘자미(紫微)'에서 나온 말로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하나이고, ’금성(禁城)‘이란 왕성을 뜻하므로, 자금성은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다.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자금성은 1407년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가 남경(南京/지금의 난징)에서 북경(北京/지금의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부친인 태조 홍무제(주원장)와 조카 건문제에 이어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북방으로 패주한 원의 잔존세력이 계속 위협을 가해오자 군사적으로 정권강화가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1406년 원의 수도인 북경으로의 천도 결정을 내리게 된다. 천도 계획과 함께 1년 후인 1407년 5월에 새 궁전인 자금성 건설을 시작한 것이다.관리들이 퇴근하는 저녁때가 되면 거대한 궁궐 안에 남성이라고는 오직 한 명, 수많은 여성과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황제만 남았다. 자금성의 낮생활은 활기를 띠어서, 궁궐에는 다양한 행정 기관들이 있었고, 이 기관에서 많은 문인들이 벼슬살이를 했다.18세기에는 궁궐에 상주하는 인원이 9천명이나 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으며, 궁권 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인원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각 기관들, 곧 식량저장소 및 부엌인 어선방, 의복보관소, 어린왕자들을 위한 학교, 황제와 왕자들의 무술 훈련장소, 무기창고, 귀중품 보관소 도서관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거대한 궁궐 뒤편으로 서쪽의 여섯 궁전 곧 서육궁(西六宮)과 동쪽의 여섯 궁전 곧 동육궁(東六宮)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황제의 아내들이 거처하던 곳이다.자금성의 생활은 황제라는 단 한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자금성안의 황제의 하루를 살펴보면, 황제는 몹시 이른 시각, 즉 새벽에 세 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종교 의례를 행한 뒤 오전 내내 국사를 보았다. 아침 식사는 아침 6시 30분경에, 점심은 12시 30분경에 먹었다. 항상 진수성찬이 준비되었지만, 황제는 상에 차려진 많은 요리들을 그저 맛을 보듯 아주 조금씩 먹었다고 한다. 점심식사 뒤에는 약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공무집행을 하였는데, 주로 보고서를 읽고 신하들을 접견했다.저녁식사는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오후 4시 이후에 황제가 원할 경우에만 차려졌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공부와 서예, 학자들과의 토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서양과학에 호기심이 많았던 강희제는 선교사들과 더불어 수학, 천문학, 물리학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궁박물원과 자금성의 개념은 동일하다고 이해 할 수 있다. 고궁박물원은 위에 설명한 명과 청대(代)의 황성이었던 자금성을 현재의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중국정부는 1925년부터 자금성을 고궁박물관으로 조성하여 개방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수많은 역사문물과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어 중국최대의 문화예술박물관으로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강희제와 건륭제는 이전 왕조의 황제들이 소장했던 귀하고 풍성한 예술품들에 누구보다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황실 소장품들 중에는 희귀서적, 귀중한 사본, 고대 탁본 등이 가장 많았다. 또한 청조의 황제들은 원조와 명조의 황제들이 수집한 그림과 서예 작품들을 물려받아 이미 귀중하고 값진 소장품들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던 황궁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갔다. 건륭제의 소장품 중 족자만 해도 만여 점을 헤아릴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군주들은 이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이들이 소장한 고대의 청동기와 도자기, 옥기 등의 수는 매우 많았다.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1911년 신해혁명이 끝나자 자금성은 중화민국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마지막 황제 푸이와 그가 이끌던 조정은 결국 1924년에 자금성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1925년에 위에서 설명했듯이 이 거대한 궁궐의 용도가 박물원으로 변경되었다.수많은 황실 소장품들은 애석하게도 청일전쟁(1935-1945)과 그 뒤를 이은 국공내전(1945-1949)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중국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그 보물들은 1만 여개의 상자에 담겨 모택동이 재건한 수도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14년 동안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지었다는 이 건물은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을지 상상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천자(天子)라는 막강한 권력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겠다. 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따르는 만리장성과는 달리 오직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한 건축물이었으므로 그러한 의미는 더욱 짙다고 하겠다.후에 청제국(淸帝國)의 국고가 바닥나서 1900년에는 궁궐을 유지할 수조차 없게 되었고 1925년에 궁궐 전체가 공식적으로 박물관이 될 때 까지 자금성은 이와 같은 황실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였다. 수많은 희생과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이 자금성은 그 자체가 위대한 예술품이며 명, 청대의 궁정 생활과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적으로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중국의 역사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전달하고 있는 가치있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비록 많은 소장유물이 지금의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고 하지만, 가는 곳마다 전시되어 있는 예술품과 공예품들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중국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 현재도 미래에도 큰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된다.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외조)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으로 크게 나뉜다. 남쪽에 있는 외조는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閣)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의 웅장한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당나라 때에는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태화전의 앞마당에는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쳐진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이 있다.자금성은 철통 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갈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의 거처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