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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담스미스
    ??Ⅹ?Ⅸ. 서 론1Ⅰ. 시대적 배경2Ⅱ. 아담 스미스의 생애와 저서3Ⅲ.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40. 국부론의 개요41. 분업론52. 가치론과 가격론63. 분배론84. 자본 및 재생산105. 생산적 노동과 자본축적 11Ⅳ. 아담 스미스의 경제사상12Ⅴ. 아담 스미스의 경제정책14Ⅵ. 결 론16참고문헌Ⅰ. 서론빈곤으로부터의 탈피는 아마도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소수의 뛰어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빈곤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의식주의 해결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유사이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근대 경제학에서 이에 대한 해답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회 전체가 계획에 입각하여 조직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실에서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국가이므로 이 견해는 국가(정부)가 경제를 주도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는 이와 반대로, 국가는 국방과 치안만 담당하고 경제는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에 맡기는 것이 좋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를 자유주의 경제관(경제적 자유주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최초의 자본주의인 상업자본주의가 서양에서 등장한 16세기이래 정부주도의 경제관과 자유주의 경제관은 지배적인 위치를 교대로 맡아왔다. 정부주도의 경제가 한동안 발전한 다음 문제점이 발생 누적되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면 자유주의 경제관이 주류가 되면서 자유주의 경제로 전환하고, 자유주의 경제가 한동안 발전한 다음 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질곡에 빠지면 다시 정부주도의 경제와 경제정책이 등장하는 반복과정이 계속되어왔다. 근대의 서양에서도 국민국가가 등장한 이후 처음에는 정부주도의 경제관인 중상주의(mercantilism)가 지배적인 사조로 등장하였다. 부국강병을 위하여 정부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발전시킬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서양은 중상주의의 시대였다. 정부주도의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유주의 경제관, 즉 경제적 자유주의를 처음으로 때 허치슨 교수 밑에서 공부한 동기로는 중산주의시대에 자유무역을 주장한 유명한 경제학자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이 있다.스미스의 성적이 우수하자 그라스고우 대학당국은 그에게 졸업과 동시에 장학금을 주어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의 배리올(Balliol) 대학에 진학시켰다. 17세때 그 곳으로 간 스미스는 1740~46까지 6년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다가 2년후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의 강사로 재직하면서 수사학(Rhetorics)과 문학을 강의했다. 아담 스미스의 강의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어져있는데 제1부는 자연철학 제2부는 도덕감정론 제3부는 정의론 제4부는 편의론으로 구성되어있었다.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제1부는 산학 제2부는 윤리학 제3부는 법학 그리고 제4부는 경제학으로 구성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751년에는 그라스고우 대학의 논리과 교수로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허치슨 교수가 물려준 도덕철학 교수 자리를 인계 받았다. 스미스는 이 자리를 1763년까지 12년간 지켰으며, 이 때 그는 『도덕정감론』을 발간 했다.1764년 프랑스의 젊은 바르쿠 공장의 스승으로 초빙됨을 계기로 그는 프랑스를 두루 살펴보는 가운데 당대 저명 사상가들인 볼테르(Voltaire), 케네(F. Quesnay), 튀르고(Turgot) 등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이 때부터 그는『국부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영국에 돌아와서도 계속한뒤, 10년 만인 1776년에 드디어 초판이 발간 되었다.그의 첫 번째 저서 『도덕정감론』은 1757년에 제 1판이 나왔는데, 그 반향은 매우 컸다. 그리하여 1761년 2판, 67년 3판, 74년 4판, 81년 5판, 90년 6판 등 판을 거듭할 때마다 수정?보완되었다. 그의 두 번째 저서가 바로『국부론』인데 이것 역시 제 1판이 1776년에 나온 이래 2판 1778년, 3판 84년, 4판 86년, 5판 89년 등으로 거듭되었으며 판을 거듭할 때마다 그 내용이 수정?보완되었다.Ⅳ. 아담 스미스의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올바르게 지적하는 한 편, 어떤 때는 해당 상품이 교환될 때 구입하는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잘못 지적하기도 한다.즉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 상품으로 지배할 수 있는 ‘노동의 가치’라 하여 지배노동가 치설(commanded labour value theory)을 주장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모든 상품의 가치 란 그 상품을 획득하는데 투입한 노동의 가치이다’라고 주장하여 투하노동가치론(embodied abour value theory)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아담 스미드는 이 두가치론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단순 상품 경제에 국한하는 한 이러한 개념적 혼동은 두 개의 노동량이 우연히도 같기 때 문에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는 자본축적과 토지사유화이전의 사회인 원시 미개사회에서는 지배노동가치설과 투하노동가치설이 일치했지만, 문명화사회 즉 자본축적 과 토지사유화가 된 자본제사회에서는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지대와 이윤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산 노동(즉 노동력)을 고용함으로써 생기는 자본과 노동력의 교환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물의 가치가 그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나는 문제를 풀 수 가 없었다. 아담 스미스가 결국 생산비이론으로 빠지게 된 이유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었다.그리하여 아담 스미스는 노동에 대한 임금, 자본에 대한 이윤, 토지에 대한 지대가 실질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노동만으로는 가치를 결정할 수 없고 임금, 이윤, 지대가 실질가격의 구성요인으로 파악하여야 하나고 인식했다. 이것이 생산비설이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가치구성론이라 부르고 있으며 피에로 스라파는 합산이론(adding up t heory)이라 부르고 있다.결국 생산설비로 빠짐으로서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렇지만 아담 미스는 임금, 이윤, 지대의 실질가치는 역시 지배노동가치에 의가 상품가격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면 가격에서 임금과 이윤을 공제하고 나면 어떻게 지대가 남을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된다.아담 스미스는 또 지대가 사회의 진보와 함께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직접요인으로서는 토지개량과 경작확대 때문이고 간접요인으로서는 노동생산성의 향상과 생산적 노동의 증가 때무이라고 하였다.스미스의 분배론은 임금, 이윤, 지대로 분리를 했지만 결국 원리를 제대로 밝히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나중에 리카도에 의해 가치론과 분배론이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을 듣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원인은 아담 스미스시대 까지는 국부의 중대문제가 중요했지 아직 분배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사정과 연관이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들어와서 분배문제는 심각해지게 된다.분배론의 의미와 한계를 가치론과 연관지어 좀 더 평가를 해보자. 아담 스미스의 분배론은 이러한 상당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미흡한 상태로 남아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것은 노동가치이론의 관점을 견지하지 않고 생산비론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만약 아담 스미스가 생산물의 가치는 인간노동에 의해 창출되어 각 사회계급들 사이에 분배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면 각 계급의 수입이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분배이론에 대한 연구를 더 진척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는 생산물의 가치는 다양한 생산비 내지 생산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입-임금, 이륜, 지대-을 합한 결과라는 생산비 이론에 빠졌다. 그로 인해 각각의 수입은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앞서 서로 독립된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다시 이 수입들-즉 임금과 이윤-의 크기가 어떻게 결정되는 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아담 스미스는 수요와 공급이론에 의존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이윤수준이 자본의 풍부함, 더욱 엄밀히 말하면 자본축적률에 의존 한다고 한 것은 그러한 인식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자본이 급격히 증가하면 이윤율은 떨어지고,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수입(이윤과 지대)이 생산적 노동을 고용하는 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생각했다. 즉 수입이 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저축이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는 저축 역할을 매우 중시했다. 저축을 하는 사람은 국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사람이고 낭비하는 사람은 ‘공공의 적’이라고 보았다.저축이 투자로 연결되고 그러면 고용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가치 즉 국부가 증가한다는 논리는 이후 저축은 투자와 일치한다는 고전파 사사의 정식화로 되어 갔다. 그리하여 저축과 투자의 불일치에서 나타나는 실업이나 투자의 증가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를 가져와 기술적 실업을 야기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고려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과 자본에 대해 아이작 루빈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농업과 공업이 독립된 생산부문임을 제대로 인식했던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들이나 노동자 자본의 생산성에 대해 훨씬 정확히 이해 할 수 있었다. 아담 스미스는 농업이든 공업이든 간에 가치 내지 잉여가치를 낳는 노동은 생산적이라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앞서 보았듯이 아담 스미스의 개념사용에는 혼동이 있다. 그는 때때로 생산적 노동을 잉여가치 를 낳는 것으로 규정하지만, 어떤 때는 가치를 지닌 물적 생산물 속에 대상화된 노동으로 정의하기도 한다.)아담 스미스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는 동시에 자본이라는 개념도 확장시켰다. 중상주의 시대에 사람들이 자본이라 칭했던 것은 대개 이자를 받고 빌려준 일정 액수의 화페였다. 중농주의자들은 자보이 실제로는 화폐가 아니라 생산수단으로써 사용된 생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그들은 농업에 투자된 자본만 생각했으며 자본을 주로‘순생산 물’(즉 지대)을 증가시키는 수단으로 여겼다. 아담 스미스는 자본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공업과 상업에도 적용시켰다. 더욱이 그는 자본 개념을 이윤 개념과 연관시켜 자본을 이윤을 낳는 자산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중농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생산된
    경영/경제| 2010.10.05| 19페이지| 1,000원| 조회(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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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인
    Ⅰ서론우리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미송리식 토기와 비파형 동검이 중국의 요령성, 길림성지방을 포함하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어 있음을 배웠다. 이것을 통해 공통된 생활권을 갖거나 서로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철기와 함께 출토된 명도전, 반량전을 통해 기원전부터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한 것을 알 수 있다.집단주의 문화의 사상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체면을 중시하는 점 등의 비슷한 점과 많은 민족성의 차이 등 한국인과 중국인은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 비슷함 속에서도 다름이 있었다. 이제 부터 그것들의 하나하나를 살펴보겠다.Ⅱ. 중국인의 특성중국인은 예로부터 많은 특징을 가진 국민이었다.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자긍심이 매우 강하고, 제도보다는 인관 관계를 우선시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제도가 아닌 ‘關係’가 일을 한다는 말이 있다. 특히 중국인을 사귀려면 제일 먼저 “신뢰”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서양인이 중국인을 비하시키는 데 주로 사용하는 말의 하나가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체면을 매우 중시한다.’는 것이 있다. 또 우리의 생각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의 이익과 관계가 없거나 친구 사이가 아니면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인정이 많은 우리로서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외적 환경이나 외모보다는 실력과 실용을 중시하며, 결과를 보고 판단한다.중국의 역사와 지리는 그들의 국민성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끼쳤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그들은 내란을 비롯해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당했다. 그래서, 쉽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내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적 배경에 의해서 명분을 중요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널리 유포되었다. 역사에 의해 지배 계층은 근 만년 가까이 지배의 위치에 있으면서 생긴 특성으로서 지배 계층은 귀족 의식, 예의 의식, 중화사상, 인내력, 절개를 중시하는 편이고, 피지배 계층은 전제정치 하에서 시달려 오면서, 농사나 자신들의어 중국인의 목슴 만큼이나 중시하는 “面子(미옌즈:체면)를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체면 중시 사고는 과거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향수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평균주의 사고 방식에 의해 심화되었으며 각 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집단거주의 형성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많은 사람들이 체면 중심 사상이 왜 생겨났는지 잘 모르는데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다.중국은 주?춘추 전국시대를 통해 이 명분중심사상?체면 중심 사상이 발생하였다. 패자(覇者)가 되고자 하는 많은 무인들은 천자를 옹립하는 목적으로 천자의 수호(守護)라는 명분을 외쳤다. 그리고, 그 후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계속 민중을 지키고, 국가를 편히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명?청 시대에는 외세를 물리친다는 명분이 있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만년 가까이를 지속해 온 그들의 사상 속에는 명분을 중시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중국인들은 세상 모든 일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인간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해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근대 서양에서 취하는 태도와는 달리 편의주의적 이며 실용주의적이다. 중국의 민족성이 상식적이고, 중국인들이 연구하는 학문은 실천 중심이라는 점은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및 공자, 맹자 사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중화사상이라는 말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이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에 퍼져 나간다고 믿는 중국의 민족 사상이다.중화사상이라는 말은 등에서 처음 나타났다. 과거의 한족(漢族)은 이 사상을 통해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해 왔다.과거 한족이 황허강 유역에서 농경 생활을 하면서 문명을 개척해 나갈 무렵 그 주위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한족은 다른 민족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발달시켰는데, 문화가 무르익은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면서 주위의 민족들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선민(選民)이라고 믿었고, 굳건한 중화사상을 가졌다. 당시 파벌로 이야기되던 조선조의 역사가 학연과 지연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연고주의를 만든 뿌리라고 말하고도 있으나, 통상 현대 사회에서 연고주의를 지칭할 때에는 흔히 60, 70년대부터 시작된 지역간의 불균형적인 경제 개발과 그와 함께 비롯되었던 정치인들의 지역감정 조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쨌든 연고주의가 사회의 비리를 조장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입시부터 취업과 이 이후의 삶까지 주변 연고에 의해 좌우되기에 한국인들은 이런 연고 형성에 노력을 기울인다. 좀 더 나은 연고의 형성을 위해 선이란 것도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결혼이란 매개체로 인해 서로 다른 가족이 한 가족이 될 수 있기에 좀 더 나은 연고지를 찾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한국처럼 조건만 보고 상대방을 골라 선을 보고 결혼하는 방식은 미국과 같은 외국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연고주의와 연결된 특징인 것이다.두 번째로 학벌주의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집값이 소위 ‘학군’에 따라 좌우되고, 입시철에는 자살 입시생들이 항상 나타난다. 고등학생들의 유일한 목표는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공부를 똑같은 방식으로 공부한다. 공부라는 말보다는 ‘외운다.’ 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주입식 교육방식이 만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독 학교를 통해 개인적으로 이루지 못하는 권력의 독점을 집단적인 학벌중심의 투쟁으로 이루려는 경향이 있다. 또 권력을 한 번 잡은 사람은 다시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학벌로 얻은 사회적 지위는 귀속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그러면서 서울대는 이런 우위독점체제를 합리화하는 기반이 되어 독재정부를 가능하게 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인권문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괜히 일을 벌여 명문대학을 가는데 걸림돌이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현재의 입시체제와 학벌위주의 사회는 이렇게 학생들의 비판적 의식을 알 수 있다. 얼굴 하나 지키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체면문화의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혼 문제 이다. 결혼이 당사자만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행사인 만큼 남들의 눈을 의식한 과시적인 부분이 많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결혼한 신혼부부 한 쌍의 평균 결혼비용은 신랑이 9천 6백여만 원, 신부가 3천 3백여만 원으로, 합계 약 1억 3천만 원에 달했다. 혼수 비용 문제는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체 결혼비용의 60%가 넘는 주택구입비는 남성들의 큰 부담. 이로 인해 결혼이 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위인 결혼이 이런 식으로 변질 되어간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밖에도 체면을 중시하기 위해 값비싼 명품을 구입하고, 이는 사치문화로 이어졌다.마지막으로 ‘빨리 빨리’ 문화를 들 수가 있다. 점점 확산되는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음식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빠르게 나오고 간편히 먹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패스트푸드나 테이크 아웃 음식이 발달함에 따라 비만도 점점 증가하면서 그에 따른 질병들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남을 생각하지 않는 공동체주의가 파괴 되고 있다. 빨리빨리 하다보니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개인주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한 사회가 되면서 부실공사가 속속 들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아픈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가 그 예로 들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슬퍼했다. 요즘에는 조기임신, 자살충동 인터넷 중독 등 청소년들에게 나타나는 문제점들이 빨리빨리 문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빨리빨리 문화는 우리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준 것도 사실이다. IT강국 한국은 빨리빨리 문화가 만든 최대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기업들은 새 제품을 출시할 때 제일처음 한국에서 선보인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 그만큼 트랜드를 빨리 읽고 소비한다는 뜻이다. 급속한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로 이루어낸 성과라 할 하겠는가. 우리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교실 앞 태극기 옆에서 붙어있던 급훈의 대부분이 협동, 봉사, 성실, 근면 등의 집단주의 사회에서 중시되는 항목이라는 사실과 한국인의 입버릇처럼 붙어있는 ‘우리’라는 단어의 사용이 그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중국인이 한국인의 단결을 부러워하며 ‘뭉치지 못하는 근성’이 언제부터 중국인의 특성이 되었는지 한탄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어, 중국인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는 체면인 듯하다. 중국에 관한 책을 펴면 가장 먼저 목차에서 접할 수 있는 부분, 바로 ‘체면의 중시’라는 부분이다. 체면은 중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들의 인간관계는 체면에 따라 유지되며, 사회생활도 체면에 따라 결정되고 만들어진다.우리가 잘 아는 초한지의 영웅 항우는 백전백승하다 마지막 전쟁에서 참패하고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다가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겠는가!” 라고 하며 결국 자살을 했다. 항우가 자살하자 많은 이들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면목이 없다’라는 성어를 남기며 이름을 남길 수 있었으니 죽은 후였지만, 그는 결국 체면을 살릴 수 있었다.중국인은 ‘죽어도 체면이다’라고 하는데 왜 죽어도 체면을 지키려하는 것일까?중국 문화의 사상 속에 담긴 단체의식 때문이다. 단체의식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단독의 개인이 아니라 일정한 사회관계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자 체면이 있어야 했다. 실제로 체면을 차리려는 것은 타인과 마주하기 위해서이다.문화론 수업시간에 음식과 문화 파트의 수업 중 식사를 함께 할 때 자리 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뭐 그리 자리 배치가 중요하다고 그러는 걸까?”하고 많은 궁금증이 들었지만 중국인의 특징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상당.
    인문/어학| 2010.10.05| 8페이지| 1,000원| 조회(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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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상주의
    ??Ⅹ?Ⅸ. 중상주의란?1Ⅰ. 중상주의의 무역이론2. 중금주의2가. 무역차액주의2나. 보호무역주의3Ⅱ. 중상주의의 발전4Ⅲ. 중상주의의 비판5Ⅳ. 결론6참고문헌Ⅰ. 중상주의란?중상주의는 서구의 15c-18c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시기까지 약300년 동안 자본주의의 초기적발전의 시기에 있어서 지배적인 경제정책과 이론을 말한다. 절대왕조 하에서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생성된 신흥상공업자를 주축으로 국제무역을 통해 관세 및 조세수입을 증대시킴으로서 국가의 부를 축적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경제사상이 종교와 윤리학에서 독립되어 생성하게된 그 구체적인 형태가 중상주의이다. 경쟁국의 국력 희생을 대가로 자국의 국력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증대시킨다. 이것은 정치적인 절대주의의 경제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상주의 시대의 17세기 정치가들, 특히 영국의 토마스 먼,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콜베르, 그리고 이탈리아의 안토니어 세라는 결코 중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1776)에서 사용하면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중상주의에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결합되어 있다.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국가의 부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국가가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귀금속의 입수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귀금속을 무역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 무역수지의 순조, 즉 수입에 대해 수출의 초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식민지는 수출 시장으로서 그리고 모국에 대한 원료의 공급 지로서 봉사해야 했으므로 제조업은 식민지에서는 금지되었고 식민지와 모국간의 모든 교역은 모국의 독점 하에서 이루어졌다.절대군주제국가에서 상업자본이 형성되던 시기의 경제사상 또는 경제정책의 체계이고, 근대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의해 지배를 확립하기까지의 초기 단계에서 원시적 축적을 수행하는데 사용된 여러 정책과 이를 뒷받침한 이론체계이다. 경제정책으로서의 중상주의의 핵심은 초기 산업자본을 위해 국내시장을 확보하고, 국외체되고, 이론적으로는 A.스미스 (1776)의 출판과 함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고, 주요이론으로는 W.페티(william Petty 1623~1685). 『조세공납론 A Treatise of Taxes and Contributions』부에 대한 관점, 부의 근원=노동, 최초로 노동가치설 제시하였고 노동은 가치뿐만이 아니라 가격도 규정한다. 다만 이 때의 가격은 자연가격(=가치)의 의미라고 주장하였다D. 흄(?David Hume1711-1776). 『경제학논집 Political Discourses』에서 화폐수량설의 고전적 정식을 말하였고, 흄은 화폐 수량설을 국제적으로 적용, 금본위의 '자동 조절론(self-flow-doctrine)'을 전개함으로써 무역 차액(balance of trade) 이론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주장한다. 각 국은 자신의 경제적 역량에 거의 비례하는, 다시 말해서 각각의 자연적 수준에 조응하는 화폐량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초과하는 화폐량을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는 당연히 다른 나라의 무역상의 질투(jealously of trade)와 적대적 관계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호의 번영과 국제적 우호, 평화를 추구하는 자유무역이야말로 '자연의 道(natural course)' 이다. 이 점에서 흄은 중상주의와 아담 스미스를 연결하는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Ⅱ.중상주의의 무역이론가. 중금주의중금주의(bullionism)란 14세기경에 중세국가들이 금은의 축적에 의해 자국의 부를 증가시키려는 사상을 말한다. 따라서 중세국가들은 주권에 의해 외국무역을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여 수출을 통해 금은을 반입하고 축적한 반면, 획득한 금은의 해외반출은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중금주의 사상의 대표적 이론가는 말린즈(E. Malynes), 미셀덴(E. Misselden), 세라(A. serra)등이 있다.중금주의 정책을 실시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는 중앙집권적 국가제도의 확립을 위해 막대한 화폐적 지출이 필요했무역을 국부를 얻는 첩경으로 보았다. 또한 일반적 무역차액론(General balance of trade)을 통해 개개의 거래나 개개 지방의 거래에서 적자가 발생하여 금은이 유출된다고 하더라도 거래전체나 전국적인 거래에서 차액이 흑자가 되면 국부는 증대될 수 있다고 했다.또한 무역차액주의는 수출뿐만 아니라 재수출을 하기 위한 금은의 유출도 국부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역 차액론에서는 중금주의와 달리 화폐수량, 가격, 외환 시장의 문제를 무역차액과 연계시켜 전개하였다.무역차액주의의 이론적인 대표적 주자는 토마스 먼(T. Mun))을 들 수 있다. 그는 1620년에 시작된 불황기의 화폐부족의 원인으로 은을 수출하는 동인도회)사가 비난을 받게 되자 은을 수출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입한 상품을 재수출하면 더 많은 화폐를 획득할 수 있다고 그의 저서에서 주장하면서 동인도회사를 옹호하였다. 또한 그의 다른 저서에서 그는 무역차액론을 체계화하여 외국무역의 차액이 일국의 국부의 증감을 초래한다고 주장하여 중상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특히 철저한 무역정책을 실시한 영국이 대표적 국가였다. 이러한 정책을 위한 시책으로는 수출세 경감제도, 수출보조금, 관세환급, 독점 및 특권제도, 수입 관세 등이 있다.수출세 경감제도는 자국상품의 수출을 촉진하기 위해 수출상품에 대한 수출세를 경 감하거나 전폐한 제도이고, 수출보조금은 외국인이 영국상품의 질이나 가격이 마음 에 들지 않아 구매하기 꺼릴 때 외국인이 그것을 사가도록 정부가 그 값을 대신 치러 주는 것이며, 관세환급은 상품을 재수출한다는 조건하에 수입을 해오는 상인에 대하여 관세를 면제해주거나 저율의 관세만을 부과하는 것을 의미하면 중간무역을 위한 상품수입이나 수출을 위한 원료구입 등이 해당된다. 그리고 독점 및 특권제 도는 정부가 대회사에게 독점이나 특권을 부여하여 상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것이며 소수인에게 특허 회사를 설립케 하여 무역상의 특권을 인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무역 에 대한 통제가 용이하국과 독일 등에서 국내산업보호의 필요성과 유럽국가에서 팽배한 국가주의에 의한 보호무역으로 말미암아 그 빛을 잃기 시작한다.Ⅲ. 중상주의의 발전영국은 식민지의 개척이나 공업의 발전에 있어서 뒤늦게 시작한 나라였다. 16세기초만 하더라도 영국은 상공업이 발달되지 않아서 수출상품은 주로 원료였으므로 공산품을 수입하였으며 무역도 주로 외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들도 존재 할 수 없었고 貨幣資本은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정부는 무역을 재정 정책적인 관점에서 다루게 되었으며, 수출입관세가 부과되었고, 모든 海外去來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여기에서 정부의 統制란 관세를 받는 일과 화폐가 외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은의 유출이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외국상인이 영국에서 상품을 판매하면 반드시 그 대금을 영국에서 생산된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데 지출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국의 貿易業者가 상품을 수출하였을 때는 그 일부는 금, 은만 수입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의 초기 중상주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관세와 귀금속에 대한 재정정책이었다. 이처럼 화폐자체를 부라고 봄으로서 어떠한 명목으로도 금?은의 유출을 허용하지 않았던 정책을 중금주의라고 한다.상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중금주의와 같은 재정정책은 해외무역을 어렵게 하였으므로 貿易借額主義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세기 후반 영국의 국내경제는 전환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양모가 수출의 주종상품이었으나 이제는 의류로 바뀌어지고 해외무역이 발전하면서 상인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海運業과 工業도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상업에 비해서 산업자본의 역할은 미비한 상태였고 아직 구매자자본으로서의 원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상인들이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공업은 수출과 직접 관련을 갖게 되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것이 봉건주의체제를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정부 역시 해운업 및 수출산업을 고 스페인에서 대량으로 유출된 금은은 유럽에서 장기간의 인플레이션을 유발시키는 상황이 나타났다.중기 중상주의 시대에는 금은의 유입을 유출보다 많게 하는 것 유리한 유출보다 많게 하는 것과 수출의 촉진을 위한 정책 등이 주를 이루었으며 대규모 상인회사등 무역 독점체의 형성, 식민제국의 건설. 연세 및 정부보조금, 반제품 및 생산원료의 유출억제(수출관세 등)수입의 억제를 위한 정책 을 펼쳤으며 그 정책으로 수입금지, 수입관세를 보였다. 후기 중상주의시대에는 생산의 통제를 위한 정책으로 생산방법과 제품의 질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를 해왔다 노동자 조례 훈련, 고용조건, 노동력의 배분등을 국가가 직접통제(예전에는 길드의 담당), 항해조례등 의 정책을 펼쳤다.Ⅳ.중상주의의 비판그러나 중상주의의 이러한 사상은 산업발전과 함께 경제활동과 외국무역에 대한 통제를 배재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지향하게 됨으로써 자유무역론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바본(N. Barbon)은 17세기 후반 중금주의적 사상을 비판하고 국가의 부는 금은의 축적이 아니라 일국에서의 고용량에 의해 평가된다고 주장하면서 외국무역의 기본을 국내산업에서 구하고 국제분업에 의한 자유무역을 주장하였다.노얼스(D. North)도 같은 시기에 금은이 부 그 자체는 아니므로 법적 규제에 의해 금은을 통제하는 것을 반대하고 국가가 인위적으로 화폐량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18세기 후반 흄(D. Hume)은 전통적인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고전경제학의 길을 연 영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사상가로서 화폐를 교환수단으로만 파악하여 무역차액설 을 부정하고 화폐의 자동 조절 기능을 제기하여 에 의한 무역수지의 자동 조 절 기능을 주장하고 자유무역에 의한 국제분업을 주장하였다.15.6세기 근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부강책으로 생겨난 중상주의의 이론과 정책은 이미 지적한대로 17세기 말엽부터 서서히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18세기에 이르러 산업의 중심이 상업에서 공업으로 옮겨지게 되자 중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경영/경제| 2010.10.05| 9페이지| 1,000원| 조회(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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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체제
    ??Ⅹ?Ⅸ. 서 론1Ⅰ. 경제체제 개혁 개요 및 추이10. 경제체제 개혁 개요11. 경제체제 개혁 추이2Ⅱ. 경제체제 개혁 이전과 이후30. 개혁 이전의 경제발전 전략31. 개혁 이후의 경제발전 전략4Ⅲ. 중국의 경제체제 개혁50. 농촌개혁51. 다종 소유제 형식52.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의 결합53. 가격의 자율화54. 기업의 경영방식 변화6Ⅳ. 결론6참고문헌Ⅰ. 서 론아시아의 많은 개도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현대화의 발걸음은 서방 선진국보다 한 세기 더 늦게야 시작되었다. 중국의 대규모적인 현대화는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 중국이 창건된 후 50년대 초 제 1차 5개년 계획을 실시한 때로부터 시작되었다.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40년 동안 현대화 분야에서 기울인 중국의 노력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낙후하고 빈곤한 기초 위에서 신속하게 이룬 공업부문은 비교적 완벽하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갖추고 13억 인구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것은 중국 역대의 왕조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새 중국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다.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중국 인민들이 공인하는 진리로 되어있다. 따라서 중국의 경제성과는 세계의 찬양을 받고 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 세계경제가 발돋움을 하고 있을 때 중국은 오히려 대약진인민공사화 문화대혁명 등과 같은 국내 정세와 과학적인 법칙을 위반한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국가 경제발전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게다가 고도로 집중된 계획관리체제는 경제적 활력을 질식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고, 중국의 경제발전 또한 상당한 성과를 이룩할 수 없었다.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하기 시작 현재까지 중국의 체제개혁과정은 대체로 4단계로 구분된다. 제1단계는 1978년부터 1984년으로 농촌개혁을 중심으로 하여 체제개혁을 성공으로 이끄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농촌개혁이 일단락 되자 제2단계 도시기업 개혁으로 전환이 실행 1978 년 등소평이 중국지도부의 전면에 등장하여 개혁개방정책을 전개하기 시작 1992 년 강택민이 중국의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는 ' 사회주의시장경제의 건설 ' 에 있다고선언, 명확한 개혁의 방향 결정2010 년까지 사회주의시장경제 체제를 완성하고,2020 년에는 성숙 단계의 사회주의시장경제 체제 건설을 목표로 추진‘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는 공유제 인 국유제와 집체소유제를 주체로 하여 비공유제인 個體戶, 私營企業,三資企業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경제요소가 함께 발전한다는 전제 아래 운영- 정부가 경제·사회정책,경제법규,계획지도 등 필요한 행정관리를 통하여 적절한 분배와 조절 정책을 시행, 시장경제 운영의 질서를 유지2. 경제체제 개혁정책 추이① 개혁개방 초기 정책대외개방 및 농촌경제 개혁 정책 (1978.12)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기초 단계로서 " 調整,改革,整頓,提高 " 의 8 字 方針의 3 개년 경제조정 계획 실시 (1979~1981) 제 6 차 5 개년 계획 (1981~1985) 제 7 차 5 개년 계획 (1986~1990)② 제 8 차 5 개년 계획 (1991~1995.8.5 계획)농업을 최우선 산업의 하나로 설정,농업 중점 정책 지속 실시기초공업과 기초설비에 대한 우선 정책 실시※ 남순강화(南巡講話)- 1992 년 등소평이 당시 중국지도부의 보수적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상해,심천,주해 등 경제 특구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 확대를 주장하며 발표한 문장을 일컬음- 주요내용은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논쟁은 의미가 없으며,사회주의 생산력 발전,국력 증강,생활수준 제고의 세가지 분야에서 어떻게 우위를 차지할 것이냐가 중요하다(三個有利于)는 것으로 사회주의 사장경제의 이론적 기초 제공③ 국민경제·사회 발전 10 개년 계획 (1991~2000)2000 년까지 국민생산 총액을 80 년의 4 배 수준 달성 공유제를 기초로 한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경체제와 운영제도의 수립④ 제 9 차 5 개년 계획 (1996 제 10 차 5 개년 계획 (2001-2005)현대화 건설 제 3 단계 전략의 최초 5 년간의 계획국민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속도 유지,전략적인 경제구조조정 달성,경제성장의 질과 효율성 제고를 통하여 2010 년 GDP 를 2000 년 GDP 의 2 배로 확대하기 위한 기반조성⑦ 제 11 차 5 개년 계획 (2006-2010)주요 목표는 GDP 년 평균 성장률 7.5%, 2010 년 1 인당 국민소득 2000 년 대비 2 배 증가,기간 중 도시 신규취업자 및 도시유입 농촌취업자 각 4,500 만명 증가,2010 년까지 도시지역 실업율 5% 이내로 통제- 2010 년 총 교역액 2 조 7 천억불(상품 : 2 조 3 천억불,서비스 : 4 천억불) 산업구조조정 : 2010 년까지 서비스업의 GDP 비중 3%, 서비스 취업자의 전체 취업 자 비중 4%, 연구개발비 (R&D) 의 GDP 비중 2% 로 증가 자원, 에너지 절약 : 2010 년까지 단위 GDP 당 에너지 소모율 20% 절감,단위공업생산의 용수소모량 30%절감,공업고체폐기물 종합이용율 60% 제고,전도시에서 점토벽돌사용금지- 2010 년까지 도시오수처리율 70%, 도시생활쓰레기 무해화처리율 60% 이상 생산안전수준 제고 : 2010 년까지 안전사고사망율 35%, 공업광업 상업취업인원 안전사고 사망율 25% 로 감소 도시- 농촌의 균형발전 차원에서 도시화율을 47% 로 제고 인프라건설 : 2010 년까지 철로건설 1.7 만㎞(그 중 여객전용선 7 천㎞), 총도로 연장 230 만㎞(그 중 고속도로 6 만 7 천㎞) 2010 년까지 국민 평균 교육년한을 9 년으로 상승,도시 기본 양로보험 가입자수 2, 23 억명,농촌의료 수혜율 80% 이상 총인구를 13.6 억명 내 통제,총 경작지 면적 1.2 억헥타르,삼림율 20% 유지,주요 오염물 배출총량 감소율 10% 달성 기간 중 매년 도시주민 및 농촌주민 소득 증가율 5% 달성Ⅲ. 경제체제 개혁 이전과 이후1. 개혁 이전의 경제발전 전략1949년~1978년의 경제 발전 상, 기술개선, 공업과 기타 경제사업 적정 배치, 소비와 저축의 적정비율 유지, 국가계획의 강화, 사회주의 경제요소의 부단 증강, 비교적 짧은 기간에 농업국을 공업국으로 전환하여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특히 중공업 우선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문제점: 급격한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중공업 우선 발전전략은 농업부문의 부진을 초래(식량 부족과 원자재 부족)하였으며, 대규모 기본 건설중심의 투자 집약적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집중으로 실업률의 증대초래(1953~57년 노동인구는 2000만 명 증대하였으나 고용확대는 178만 명에 불과)하였다.(2)제 2단계 : 대약진 기 (1985~60)㉠배경: 스탈린 식 불균형 발전 전력의 한계인식에 따른 발전전략을 전화하고자 했다.㉡목표: 공업과 농업 동시발전, 즉 15년 이내에 강철과 기타 주요 공업제품의 생산량에서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모든 요소를 동원해 중공업 우선 발전을 토대로 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실현 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대약진 정책은 공업은 강철 중심. 농업은 식량중심으로 2대 운동이 전개되었다.㉢추진: 농업부문의 과잉노동력을 동원, 즉, 잉여노동력을 노동집약적인 관개, 개간, 치수 사업에 활용하여 농산물 생산을 증대시켰다. 과학기술은 2원 체계에 근거를 둔 생산과정 중시. 즉,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관개, 개과, 치수 사업에 활용함과 동시에 농촌의 소규모 공업 생산 확충에도 활용하는 이 방법은 이원적 체계에 의해 실시. 즉 공업의 전통적 부문과 집약적 방식을 중시하고자 함.㉣문제: 농업생산의 급격한 감소로 농업과 식량위기 자초, 국민생활수준 급격하락. 이러한 이유는 정책적 오류 외에 소련기술자의 철수도 관계가 있음.(3)제 3단계: 경제 조정 기 (1961~65)㉠특징: 농업위기에 대한 대응적 조치, 정책의 초점이 농업을 기초로 하고 공업주도의 국민경제 발전, 추진, 종전의 경제계획과 투자의 우선 순위를 전환(우선선위: 농업->경공업->중공업 순), 생산력 발전을 위해 물질적 인센티브를 중시하였다.(4)제 4단계적인 개발전략(경제의 발전을 생산요소의 증가, 즉 축적, 생산수단, 노동력에 의존), 자급자족의 경제체제 실현을 목표로 하는 반 폐쇄적인 개발전략, 공업화 추진을 농촌과 도시 2개 부문으로 나누어 실시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를 농촌에 비해 우대하는 전략(고용의 경우 도시의 안전 취업을 위해 농촌인구를 엄격히 통제).2. 개혁 이후의 경제발전 전략-개혁 개방으로 인한 경제 발전의 호황시기-1976년 10월 사인방이 타도되고 10년간 지속되었던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었다. 1978년말 중국공산당은 11기 3중전회를 소집하여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 ‘4개현대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4개현대화’란 농업, 공업, 국방 및 과학기술 등 4개 부분의 현대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모택동 사호 2000년말까지 이 4개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목표로 하여 제반 정책적 개혁조치를 단행하고 경제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중국경제는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정상적인 발전 귀도에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기간에 제정된 제 5,6,7,8,9차 국민경제 5년 계획은 모두 예정된 기간 내에 목표를 달성하였다. 특히 개혁 개방정책의 강력한 실행으로 중국경제는 체제면에서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농업은 여러 해 계속해서 풍작을 이루었고, 공업은 더욱 왕성하게 발전하였다. 대외무역은 빠르게 성장하고 시장은 활기를 띠었으며, 국력은 크게 증강되고 국민생활은 점진적으로 향상되었다.Ⅳ. 중국의 경제 체제 개혁1. 농촌개혁.토지의 공유제를 유지하는 기초 위에서 가정을 단위로 하는 생산량을 감안한 청부경영책임제를 실시. 국가의 농산물 분배임무의 완성을 담보하는 전제하에 농민의 생산경영 활동은 전적으로 농가에서 자주적으로 결정함으로써 경작지 소유권과 경영권의 효율적인 분리를 실현하였다. 농민들이 자체적인 이익과 비교적 충분한 생산경영 자주권을 획득하게 되어 농민들의 적극성을 크게 고무하였다. 지난 20년 동안 농업 총생산액이 해마다 5다.
    경영/경제| 2010.10.05| 9페이지| 1,0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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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대보험
    ??Ⅹ?Ⅸ. 서 론1Ⅰ. 건강보험20. 건강보험의 의의21. 건강보험의 운영 및 종류22. 건강보험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2Ⅱ. 고용보험30. 고용보험의 의의31. 고용보험의 급여방법32. 고용보험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4Ⅲ. 산업재해보상보험40. 산업재해보상보험의 의의41. 산업재해보상보험의 급여종류52. 산업재해보상보험의 과제5Ⅳ. 국민연금90. 국민연금의 의의91. 국민연금의 급여종류92. 국민연금의 현황93. 국민연금의문제점 및 개선방안10Ⅴ. 맺음말11참 고 자 료Ⅰ. 서 론사회보험은 사회보장정책의 주요수단으로서 근로자나 그 가족을 상해·질병·노령·실업·사망 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것이다.사회보험은 노동능력의 상실에 대비한 산업재해보험, 건강보험, 노동기회의 상실에 대비한 연금보험, 고용보험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사회보험은 개인보험처럼 자유의사에 의해서 가입하는 것은 아니며, 보험료도 개인·기업·국가가 서로 분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보험료의 계산에 있어서도 위험의 정도보다는 소득에 비례하여 분담함을 원칙으로 함으로써 소득의 재분배 기능을 가진다.한국에서는 산업재해보험과 건강보험을 실시하고 있으며, 국민연금제도는 1988년 1월부터 실업보험은 1995년 7월부터 시행되었다.(단위:억원)구 분2003예산2004예산증 감?지역건강보험27,79228,567775?공교건강보험 정부부담보험료 지원2,6033,013410?국민연금 지원(농어민연금)1,157(760)885(797)△272(37)?고용보험 지원222△20?산재보험 지원5858-합 계31,632(760)32,525(797)893(37)Ⅱ. 건강보험1. 건강보험의 의의의료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며 나아가서는 적극적으로 건강과 체력을 증진시키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개인이나 사회를 심신양면에서 더욱 건전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의료보장이란 사회보장의 일반이나 의료비의 보장이라는 견해와 의료 그 자체 및 건강의 보장이라는 두 견해가 있으며 이것은 경제보장이라는 견해와 비경제보장이라는 시설에 수용중인 경우에는 보험급여가 정지된다.이밖에도 건강보험수가로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경우가 '특진'을 신청한 경우에 지정진료비를 전액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보험료를 3개월 이상 체납하여 급여제한을 받은 기간에 소요된 진료비는 본인이 부담하고, 현역으로 군복무중에 피보험자가 요양기관을 이용한 때의 진료비도 본인이 부담한다.3. 건강보험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건강보험은 국민연금과 달리 보험자와 피보험자간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보험자, 피보험자, 그리고 요양취급기관으로 이루어진 삼자관계이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다. 즉, 피보험자는 보험자에게 보험료를 내고, 요양취급기관에서 요양급여를 받으면, 보험자는 요양취급기관에게 요양비를 지급한다.요양취급기관은 병의원(치과병의원 포함), 약국, 한방병의원 등으로 다양하기에, 요양급여의 내용과 수준 그리고 전문직의 역할 등에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최근 의약분업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의료계의 요구를 수용하느라 의료수가를 대폭 인상하고, 의약분업의 세부내용에서 의료계와 약계의 대립은 건강보험의 장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다른 집단을 잘 조정하는 것이 건강보험을 발전시키는 한 과제이다.우리 나라의 건강보험은 질병과 분만으로 인하여 취업하지 못하는 기간동안 생계비를 지급하는 '상병수당' 또는 분만수당이 없고, 전체 진료비 중에서 요양급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가량에 그친다는 점에서 "진료비 할인제도"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즉, 종합병원을 외래로 이용할 경우 전체 진료비의 55% 가량을 본인이 부담할 뿐만 아니라, 입원시에는 진료비의 20%를 부담할 뿐만 아니라, 진찰료와 식대, 상급 병실료, MRA 등 일부 검사료, 지정진료비, 간병료 등은 모두 본인이 부담하여 전체 진료비의 45% 가량을 본인이 부담한다. 외래와 입원환자에 대한 요양급여를 높히는 것은 보험료의 인상이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적정한 보험료와 요양급여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해묵은 과제이다.보험재정의 적자를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사회보험이므로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의 협력은 필수적이다.2. 고용보험의 급여방법1) 고용안정사업근로자를 감원하지 않고 고용을 유지하거나 실직자를 채용하여 고용을 늘리는 사업주에게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여 고용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고용안정사업은 고용을 유지하도록 돕는 고용조정지원(고용유지지원금, 채용장려금, 재고용 장려금, 지역고용촉진지원금)과 쉽게 채용되지 않는 인구층의 고용을 촉진하려는 고용촉진지원(장기실직자 고용촉진 장려금, 고령자 고용촉진 장려금, 여성고용촉진 장려금, 직장보육시설운영지원금, 직장보육시설설치비용융자)이 있다.2) 직업능력개발사업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직업훈련을 실시하거나 근로자가 자기개발을 위해 훈련을 받을 경우 사업주?근로자에게 일정 비용을 지원해 준다. 사업주를 지원하는 사업은 직업능력개발훈련 지원, 유급휴가훈련 지원, 직업능력개발훈련시설/장비 설치비용대부 등이 있고, 근로자를 지원하는 사업은 수강장려금 지원, 근로자학자금대부, 실업자재취직훈련지원 등이 있다.3) 실업급여사업근로자가 실직하였을 경우 일정기간 동안 실직자와 그 가족의 생활안정 그리고 원활한 구직활동을 위하여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다. 실업급여에는 구직급여와 취직촉진수당이 있다.3) -1. 구직급여고용보험에 가입한 사업장에서 만 6개월 이상 근무하다가 회사의 폐업, 도산, 인원감축 등 본인의 뜻과 달리 퇴직한 경우에는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다. 전직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한 경우에는 구직급여를 받을 수 없다. 구직급여는 실직 근로자의 생계안정과 재취직을 촉진하기 위하여 지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가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여야 한다.구직급여는 퇴직당시의 연령과 보험가입기간에 따라 90~240일동안 실직전 임금의 50%를 지급한다. 즉, 연령은 30세 미만, 30~50세, 50세 이상과 장애인으로 나누어서 연령이 높을수록, 가입기간이 길수록 구직급여를 오래 지급한다. 소정급여일수가 종료되어도 재취직을 하지 못한 사사회보험이다. 건강보험이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부상과 질병에 대하여 요양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산재보험은 근로자가 업무수행중 또는 업무수행과 관련하여 부상, 질병 또는 사망한 경우에 근로자 본인의 치료와 본인과 부양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다.한편, 공무원, 군인, 사립학교교직원은 공무원연금 등에서 공무상 부상과 질병에 대해서 별도로 급여를 제공하기 때문에 산재보험이 적용되지는 않는다.산재보험의 비용은 전액 고용주가 보험료로서 부담한다. 특정 사업장의 산재보험료는 업종별 재해율에 따라 결정되는 보험료율에 해당사업장의 임금총액을 곱해서 결정한다. 따라서, 보험료율의 결정은 고용주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인데, 상시 30인 이상 근로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은 업종별 재해율을 감안하되, 최근 3년간의 보험수지율(보험료 수입액에 대한 보험급여비 지출액의 비율)이 85% 이상이거나 75% 이하인 때에는 업종별요율의 40% 범위 내에서 할증 또는 할인하는 개별실적요율제도를 가미하고 있다. 이는 산업재해가 적은 사업장에게 보험료를 할인해주는 것인데, 할인혜택을 받기 위해서 명백한 산업재해를 산재로 처리하는 것을 기피하도록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산재보험은 당초 노동부가 관리운영하였지만, 1995년에 고용보험을 실시하면서 산재보험의 정책업무와 집행업무로 구분하여, 보험료율의 결정, 보험급여수준의 결정 등 정책업무는 노동부에서 담당하고, 보험료의 징수, 보험급여의 지급 등 집행업무는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 담당하고 있다.2. 산업재해보상보험의 급여종류산업재해보상보험의 급여는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에 대한 요양급여와 간병급여, 일하지 못한 기간동안에 대한 휴업급여, 치료 후 장해가 남는 경우에 장해급여, 그리고 사망시 그 유족에게 지급하는 유족급여와 장의비가 있다.1) 요양급여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에 걸렸을 때 의료기관에서 상병의 치료에 소요되는 비용을 치유시까지 지급하는 현물급여이다. 급여내용은 진찰, 약제 또는 진찰재료와 의지 기타 보철구의 지급, 처치·수유가족이 2인 경우 연금은 매년 832만원)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일하다 죽고 이를 대가로 남은 배우자와 자녀가 받은 금액이 5천만원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은 급여의 수준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민사상 손해배상에 갈음하여 지급하는 장해특별급여와 유족특별급여를 활용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적정한 급여를 주기 위해서는 보험료를 인상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선택은 아닐 것이다.04년 산재보험 관련 정부시행계획에서는 산재보험과 관련하여서는 크게 개선된 점이 없고 근로복지공단을 방문할 필요가 없이 인터넷을 이용한 고용?산재보험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되었다.Ⅴ. 국민연금1. 국민연금의 의의국민연금은 국민의 노령·폐질 또는 사망에 대하여 연금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 사회보험연금을 급여하는 사회보험에는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그리고 사립학교교원연금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은 일부 직업집단을 위한 것이고, 대부분의 국민은 국민연금에 가입하고 있다.국민을 위한 연금제도는 1973년에 '국민복지연금법'이 제정되어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오일쇼크 때문에 연기되었다가, 1988년부터 '국민연금법'이 시행되고 있다.국내에 거주하는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은 의무적으로 국민연금의 가입대상이 된다. 다만, 다른 법에 의한 연금제도의 적용대상인 공무원, 군인, 사립학교 교직원은 제외된다. 1998년 시행 초기에는 10인이상 사업장 근로자에게만 적용되었다가, 이후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에게 확대되었다. 1995년에는 농어촌주민에게 확대 적용되고, 1999년 4월에는 도시자영자에게 확대 적용되어서 18세 이상 전국민이 연금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국민연금의 급여비용은 보험료로 조달함을 원칙으로 한다.보험료의 수준은 제도도입 초기에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처음 5년간은 3%, 그 다음 5년간은 6%, 그 이후에는 9%로 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현재 사업장 가입자는 표준보수월액의 9%(노동자 4.5%, 사용자 4.5%)를 보험료로 이다.
    경영/경제| 2010.10.05| 22페이지| 1,000원| 조회(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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