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좀 많다구요? 줄이는게 더 어려워서 어쩔 수 없습니다 헤헤^^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목 차Ⅰ. 들어가는 말Ⅱ. 몸 말1.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2. 니버의 시대적 상황가. 사회·경제적 상황나. 정치·문화적 상황다. 종교적 상황3. 니버의 신학과 사상가.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기원나. 니버의 인간이해(인간의 본성과 운명)다. 사회속의 인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 니버 사상의 변화과정4. 라인홀드 니버에 대한 비판 제기Ⅲ. 나오는 말━━━━━━━━━━━━━━━━━━━━━━━━━━━━━━━━━Ⅰ. 들어가는 말현대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현대 사회의 철저한 이해와 더불어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의 역할은 전체 교회의 양심으로 확대되어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사회의 윤리적 정체성 확립의 책임감을 교회가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종교 개혁이후 루터와 칼빈을 거쳐 형성된 개신교의 사상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윤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개신교의 발전은 철저한 개인윤리를 발전시켰고 사회 개조적 차원의 역할은 거의 전적으로 결여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니버는 기독교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1930년대 이후 미국의 신학계뿐만 아니라 정치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그리고 그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본 인간과 사회이해를 통해 오늘날 사회 속에서 기독교가 가져야할 정체성과 실천적 방안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Ⅱ. 몸 말1. 라인홀드 니버의 생애라인홀드 니버는 독일에서 이주해온 구스타프 니버(Gustav Nuebuhr)목사의 아들로서 1892년 7월 21일 에라이트에서 출생했다. 니버는 이든신학교와 예일대학교신학달에 따른 기계의 발달은 농산물의 과잉생산을 낳게 하고 이에 따른 농산물 하락으로 농민들은 몰락위기에 처하게 된다.19세기 후반의 미국의 특징중 또 다른 한 가지는 물밀 듯이 들이닥친 이민자들의 유입인데 이렇게 들어온 이민자들은 원 미국인들과 심각한 마찰을 초래하게 된다. 기계가 발달한 산업사회 의 발전은 대량생산의 수단이 사람이 아닌 기계로 대체 되면서 많은 실업자들을 낳게 되고 있는 실정에서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이민자들의 유입은 당연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게 되었다.반면 1920년대의 미국은 자본의 발달과 잉여생산의 홍수 속에서 물질만능풍조가 가장 팽배하게 되었는데 정부는 대기업들과 결탁하였으며 사회 하층민보다는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0년 동안 미국은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부유층에 비하여 노동자들의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고 있었던 것을 무시하였고, 기계화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있음에도 방관 만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부터 잉여 생산물에 따른 가격 인하로 인한 농민의 몰락은 그들을 도시로 이주하게 만들었다.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의 실질적이 수준은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소비가 자연 줄어듦에 따라 미국의 경제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일반국민의 소비감소로 인해 대기업가들은 자신들의 공장과 생산을 확장하기보다는 주식에 투자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은행잔고를 털거나 빚을 내어 증권에 투자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29년 10월 24일 증권은 폭락하게 되고 경제대공항으로 이어진다. 문어 발식으로 기업을 독점하고 있던 대기업의 몰락은 연쇄 부도를 초래하였다. 대공황으로 미국사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실업자들과 어린아이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갔고, 증권의 몰락에 따른 투신자살도 연일 이어졌다. 가정은 파괴되고 젋은이들은 가정을 떠나 방황하고 있었다. 결국 자유방임주의를 대폭 수정한 전면개혁이 루즈벨트에 의하여 단행되었고 미국국민들은 대공황의 긴 계속 발전하게 되고 이러한 산업자본주의로 인해 생산된 잉여물의 처분을 위한 대외정책으로 남미와 태평양 국가를 향한 팽창주의 정책을 펴게된다.19세기말 기적적인 산업부흥과 경제성장을 달성한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세계의 주도국이 된다. 결국 미국은 관세 높은 유럽의 시장보다는 남미나 태평양 지역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논리와 함께 미국의 팽창주의에 한몫을 더 한 것은 앵글로 색슨족으로써 가지는 민족적 우월감이었다. 이러한 우월감은 원미국계인 앵글로 색슨족에게 다른 많은 나라를 문명화시켜야 하는 과업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청교도 정신에서 왔다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선택된 그들을 이용해서 세계를 개종시키고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세계에서 선택받은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문맹국들을 기독교화시키고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은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고 더 나아가 세계를 개종시키기 위하여 남미와 아시아로 뻗어나갔다.다. 종교적 상황19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미국 종교는 복음주의적 형태를 띄고 있다. 20세기 미국의 신교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라는 양대진영으로 분열되었으며 보수주의 신학은 정치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진보적 정치학과 연관을 맺었다. 이 시기에 많은 부흥운동가들이 배출되었으며 제1차세계 대전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자 보수주의 목사들은 정부를 지원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깊은 신학적 위기를 느꼈다. 1919년에 보수주의자들을 향한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보수주의자들은 근본주의 연합을 결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근본주의자들은 성장을 거듭해 온 보수적인 신교도들의 연합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세력이 막강하였다. 1930녀대 초반의 경제공황이 가져온 재정적 압박에 의하여 어느 정도 지연되기는 했으나, 그들의 개 교회와 기관들은 계속하여 성장하였다.전체적으로 1920년대 미국의의 완전가능성을 긍정하고, 기독교의 이웃사랑이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들에 실제적 해답을 제공해 준다고 믿고, 인간이 곧 이 땅위에 명백하게 수립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목회자를 배출시켰다. 그러나 그의 목회현장인 디트로이트의 한 교구에서의 13년간의 목회 경험은 그의 낙관주의와 이상주의를 좀먹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의 이상주의적 사상은 산업사회가 그 많은 구성원들에게 가하는 상해, 착취의 현장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도덕적 이상주의의 설교가 얼마나 무용한가를 발견하게 되고 또한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인간의 주요 수단인 "권력의지"를 인식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주의에 대한 실망의 과정은 서서히 이루어졌고 1928년 디트로이트를 떠나 유니온 신학교로 올 무렵 니버는 인간이 사회에 압도당하는 동시에 자기 강화를 위해서 사회를 조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스스로는 봉사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대하여 실제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데 대하여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그는 많은 교회가 기존질서를 축복함으로써 교회가 생존해야 한다는 어려운 현실 앞에 굴복해 버렸음을 인식하였다.나. 니버의 인간이해 (인간의 본성과 운명)인간의 본성에 대한 니버의 분석은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정신적 성장 면에서 자기 초월의 높이를 강조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창조된 존재요 유한하고 의존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무한하고 초월자이신 하나님에 맞서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세계의 필연과 우연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자 자연, 인생, 그 자신, 그의 이성 및 세계를 초월하는 정신적 존재라고 이해한다. 이렇게 자연과 정신의 합성물인 인간은 사랑 받는 피조물로서 자유의 선물을 부여받은 상태에 있는데 이러한 인간은 바른 선택과 그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니버가 생각하는 바른 선택은 인간이버리는 것이다. 니버는 그러한 예가 성서에서 나타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며 오늘날로 말하면 인종차별주의자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한다.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인간 본성은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데 인간의 역사는 낙관주의나 이상주의자들처럼 역사 안에서 완성되는 것도 비관주의나 현실주의자들처럼 대립과 충돌로 끝나는 것도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대립과 투쟁을 통하여 궁극적인 종말로 진전되는 과정이라고 '인간의 운명'에서 니버는 분석한다. 따라서 역사의 완성은 역사 안에서 불가능하며 다만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근사치적 해결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 하면서 역사 안에서의 기독교는 사회 윤리적 책임을 피할 수 없으며 그 시대의 근사치적 해결에 동참하여야 한다고 말한다.다. 사회 속의 인간(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년 니이버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저서가 발표되었을 때 미국교계와 신학계엔 상당한 충격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앞서 지적한 대로 1920년대의 미국 교계는 정통주의와 진보주의의 영향에 의하여 낙관론적인 사회관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적으로 실현될 것을 믿고 있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의 합리적 노력에 의하여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이며, 혁신적인 기독교적 사고에 대하여 니이버는 그것이 잘못된 과대망상일 뿐만 아니라, 반복음적 사상이라고 비난했다.정통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인간의 개인적 선한 의지가 개발되고 기독교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회 개선이 실현될 것이라는 사상은 마치 닭이 계란을 낳고, 계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는 과정을 통하여 언젠가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가능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니이버에 의하면 인간은 이중 구조,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양심과 덕성과 이성(理性)을 지니고 있는 반면, 철저하게 죄악에 물들어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하여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문이다.
Ⅰ. 들어가는 말Ⅱ. 마틴 루터 킹의 생애A. 출생 배경B. 성 장 기C. 대학시절D. 크로저 신학교 시절Ⅲ. 흑인 인권지도자로서의 마틴 루터 킹A.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B. 버밍햄 교도소C.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D. 미시시피 버닝E. 이후의 활동Ⅳ. 마틴 루터 킹의 비폭력 사상Ⅴ.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Ⅵ. 닫는 말Ⅰ. 들어가는 말"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세익스피어의 소설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이 남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햄릿이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뱉어 낸 이 말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그의 독백은 근친 상간으로 얼룩진 왕실의 타락한 도덕성과 불의, 부패, 세상의 온갖 부도덕한 일들에 대하여 그저 눈감고 조용히 타협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자기 한 몸을 던져서라도 이러한 불의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세상을 구원하는 장렬한 죽음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마틴 루터 킹 목사는 증오와 폭력을 영원한 망각의 강에다 버리고, 비폭력으로 살아 남자고 했고, 말콤 엑스는 그 누구와도 타협을 거부하고 직선적이고 호전적으로 하고 싶은 말 다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백인과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 양보함으로써 흑백통합을 통해 문제 해결을 주장했던 킹 목사와는 달리, 그 정도로 무슨 용서와 화해냐며, 경쟁력도 없이 무조건 같이 버스자리 앉고, 학교 다니는 것에 만족할 때가 아니라, 흑인 스스로의 자부심을 갖고, 독립할 수 있는 기반만 있다면 흑인은 흑인끼리 분리되어 자치구로 살아도 된다는 서로의 입장 차로 반목했던 두 사람이었다. 이 둘의 모습은 마치 영화 미션에서 나오는 「로버트 드 니로」와 「제레미 아이언스」의 모습과도 닮아 보인다.끝까지 살아 남아서 더 많은 합법적인 투쟁을 전개하려 했던 킹 목사나, 언젠가 백인이나 백인이 사주한 흑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며 거침없이 독설을 퍼붓던 말콤 엑스, 모두 괴한의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누구의 노선이 결과적 되었다.이런 대공황의 상황에서 흑인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1861년에 있었던 남북전쟁의 결과 흑인 노예들은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지만 그들은 자유대신에 경제력을 잃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민이 된 흑인들은 더 이상 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대신 그들은 먹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지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은 아무런 기술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자진해서 농장 노동자의 길로 들어갔고 그러한 그들은 보며 백인들은 우월 의식과 경멸감을 동시에 가졌었다.이러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능력 있는 흑인들은 사업에 성공해 백인들과 같은 부를 걸머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 흑인들의 삶은 가난에 찌들려 있었고 정부나 백인교회는 그들의 삶에 무관심했다.이러한 사회배경 속에서 마틴 루터 킹은 전통 있는 남부 흑인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킹의 아버지는 소위 "블랙 퓨리턴"의 꿈을 이룬 소수의 흑인 엘리트 계층이었다. 킹의 아버지는 모어하우스 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 애틀랜타주 흑인 최대의 에비니저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였고 에비니저 침례교회는 백인 사회의 월가에 해당되는 애틀랜타 오우버나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우번가는 흑인들이 경영하는 보험회사, 은행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킹의 아버지가 당시의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유력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이것을 볼 때 킹은 비록 미국 사회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던 시절에 태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안정된 흑인 중류 계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킹은 자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다수의 흑인 어린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돈벌이의 현장으로 나갈 때, 아버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경제적인 고민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B. 성 장 기루즈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의 타결책으로 뉴딜 정책을 실시한지 2년이 지난 해인 1935년 킹은 처음으로 소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킹은 애틀랜타 대학의 부속학교를 거다. 이 시절에 그는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목회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대학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목사로서 일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른다.둘째로, 킹은 모어하우스 대학 시절에 흑인 대중들과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게 되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어려운 현실과 고통을 몸소 이해하게 되었다. 킹은 여름 방학 때 철도 회사의 하역 인부로서, 또 다른 여름에는 남부 스프링 베드 메트리스 회사의 창고계로서 일하였다. 일은 모두 중노동이었는데, 이때 그는 흑인 남자가 같은 일에 종사하는 백인 남자에 비하여 훨씬 적은 급료밖에 받지 못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다.셋째로, 이 시절에 킹은 애틀랜타시의 '대학생협회'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킹은 처음으로 평등하게 백인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고 교제를 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킹은 인종 문제에 대하여 이전 보다 훨씬 개방적 견해를 갖게 되었다. 훗날 킹이 흑인 인권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배타적이지 않고 백인들과 연합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시절의 이 경험에서 깨달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D. 크로저 신학교 시절모어하우스를 졸업하던 해 가을, 이미 2년 전부터 목사였던 킹은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이 애틀랜타를 떠나서 펜실베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는 킹이 서적을 통하여 위대한 사상들과 만나는 시기였다. 이 시절 킹은 헤겔과 라인흘드 니버, 윌터 라우센부쉬, 간디, 마르크스, 사르트르, 칼 야스퍼스 등의 글을 읽었는데 특히 그중 헤겔의 글은 훗날 킹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헤겔의 변증법 사상은 장차 킹의 철학에 중심적인 요소를 이루게 되었다. 킹은 헤겔이 말한 "세계사적 인물이란 그를 통하여 세계 정신의 의지가 실현되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과 정반합적인 역사에 대한 통찰은 훗날 킹이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또한 이 시기에 킹의 사상에 영향을1일 일이었다. 로사 파크스라는 할머니는 버스에 타자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백인남성이 차에 오르자 자리를 내주고 뒤로 가 서서 가라는 버스운전사의 말에, 파크스 할머니는 이를 거부하고 백인 남자들에게 뭇매를 맞고 경찰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당시 27세의 킹 목사는 파크스 할머니의 공판일 이었던 12월 5일부터 버스 보이콧을 전개하자는 성명서를 내고, 일요일(12월 4일) 몽고메리의 각 교회에서 인쇄물을 나누어주었다.흑인 승객의 60퍼센트만 협력해 주어도 대 성공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거의 100퍼센트가 협력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 동안 인도는 직장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알라배마 주립대학의 학생들이 자동차 함께 타기(카풀운동)를 자발적으로 하고 있었고, 개중에는 2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번은 어떤 카풀 운전사가 눈에 띄게 불편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할머니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할머니, 차에 타세요. 걸어가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운전자에게 할머니는 그냥 가라고 손짓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나 자신을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과 손자들을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거라오.”킹 목사는 파크스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새로 형성된 저항 단체인 몽고메리 진보연합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날 교회에서 열렸던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의 첫번째 집회에서, 킹 목사가 대중에게 가진 첫 연설문은 다음과 같다.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 날까지우리는 중대 행동을 위해서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는 한 가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되찾겠다는 결단으로 뭉쳐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랑합니다. 얇은 종이에 불과했다가 확고한 행동으로 변형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부 형태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이곳에 모였습니다…여러분,인권운동사에 , 아니 전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 얼마만한 큰 사건이었는지 킹 목사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1956년 12월 20일, 마침내 버스 내 인종분리를 금지하는 명령이 몽고메리에 내려졌다. 몽고메리의 승리는 표면적으로 미국 연방최고법원의 결정이 내려졌을 때 확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항의운동에 참여한 순간부터 이미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다. 흑인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그날까지 흑백분리 제도에 대항하여 일사불란한 집단행동을 계속할 수 있음을 자각했으며 그런 인식을 전 세계인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흑인들에게 무력감과 수동성, 그리고 피해의식을 벗어 던지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자긍심과 후세들을 위해, 전세계 민주화의 대의를 품고, 사명감을 가지고 무장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B. 버밍햄 교도소연방최고법원으로부터 버스 내 흑백분리법률의 위헌판결을 받아내고 흑백통합버스에 최초로 승차한 킹 목사는 일약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본격적으로 흑인들의 인권투쟁은 시작되었다.버밍햄은 조지 윌러스 주지사가 관할하는 앨러배마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는데, 이 윌러스 주지사는 취임선서에서 '오늘도 차별, 내일도 차별, 영원히 차별'을 맹세한 사람이었다. 버밍햄은 미국 최고의 흑백차별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다.1963년 버밍햄에서 식당의 런치 카운터 연좌운동, 불매운동, 선거인 등록을 위한 평화행진, 버스 보이콧등 다양한 기독교 인권운동을 감행한 킹 목사는 급기야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투옥된 킹 목사는 인권운동미국의 주요 교파의 대표 성직자 8명이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위운동을 극단주의자, 범법자, 무정부주의자로 규정하는 신문광고에 대해 옥중에서도 반박 편지를 쓰면서 투쟁하였다.킹 목사가 보석으로 석방되긴 했지만 버밍햄 사태는 날로 심각해져만 갔다. 버밍햄 경찰들은 시위에 참여한 1,000여명의 어린 학생들까지 투옥했다. 한때는 구속자가 2,500명에 이르렀으며, 경찰견과 소방호스를 사용해서 어린이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