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27
검색어 입력폼
  • 장의식저, 역사이야기 7~9장 내용요약, 생각 평가A좋아요
    ◁◀제7장~제9장 요약정리▷▶제7장 역사와 사실1. 사실이 아닌 사실들일본의 역사서에 짐무천황이 기원전 660년 천황에 즉위했다는 것, 조오몽 토기를 1만 년 전에 제작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또한 일본은 역사 조작까지 하고 있다. 돌을 깨트려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이것을 발굴하고는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는 자작극을 벌였고 우리나라 임나(가야)에 식민지를 경영했다는 주장도 있다. 『삼국사기』에 신라가 가장 먼저 수립되었다고 되어있는데 김부식이 신라 중심주의자였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삼국유사』에 고조선을 세운 시기가 기원전 2333년으로 서술되어있는데 몽고의 침략으로 간접지배를 받던 시기에 쓰여져서 민족의 자긍심과 주체성을 높이기 위해 사실이 아닌 사실을 추가하고, 민족의 뿌리를 더욱 거슬러 올라갔다. 이처럼 역사에는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처럼 서술되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2. 역사적 사실1) 제 1 측면‘역사적 사실’의 범위는 매우 넓은데 원칙적으로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과 현상들은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으나 반드시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실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반드시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2) 제 2 측면어떤 사건이나 과정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들의 전후관계와 전체성, 또는 그 어떤 기준과의 관련 여부이다. 기준의 수립에 전제되는 것은 그러한 기준을 수립하는 주체(역사가)이다. 이때 주체의 능동적 역할과 인식 과정에 대한 주관적 요소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한 요소를 배제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3) 제 3 측면역사적 사실은 무수한 작은 사실들을 어떤 일정한 문맥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세부적인 사항을 도외시함으로써 단순화하여 인식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역사적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모든 역사적 대로의 사실’은 있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은 어떤 것들을 사실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것들 중에서 적절한 것을 선택하고 역사가가 그렇게 선택된 사실들을 적절하게 조립하고, 그것들의 시간적?지리적?물질적 한계를 설정하고, 또 그것들을 해석하는 모든 과정에서 역사가와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조건과 자신의 사관(이론)등이 끊임없이 개입되는 가운데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제8장 실증주의와 현재주의1. 실증주의1) 실증주의 역사관독일의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역사가의 임무는 과거를 평가하거나 동시대인들에게 교훈을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건을 ‘본래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 실증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실증주의를 반대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제시하였다. 첫째, 역사의 인식주체와 객체인 사실은 역사인식에 있어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형성하며, 상호 영향을 미친다. 둘째, 역사 인식관계는 결코 수동적?관조적이 아니라, 그 관계 속에 있는 역사 인식주체의 역할 때문에 항상 수동적이다. 셋째, 역사가의 인식과 인식에의 참여방식은 사회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항상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 현재주의1) 현재주의 역사관크로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신의 창조물이라면 역사적 사실도 정신이 창조한 것이며, 객관적으로 주어진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듀이는 역사 구성이 필연적으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으며, 현재의 역사라고 하였다. 미국의 찰스 베어드는 역사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사고이며, 항상 하나의 선택의 결과라고 했다. 미국의 칼 베커는 역사는 상상력에 의한 하나의 창조물이며, 개인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코니어스 리드는 사료의 선택은 현재의 관심에 의하여 제약을 받으며, 역사는 그 선택에 의하여 현재의 요구를 드러내고자 하는 역사가의 창조물로 변형된다고 주장하였다.2) 현재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현재주의는 역사가의 현재적 관심과 필요성에서 역사를 바라보기다.2. 역사주의와 상대주의역사주의적 입장에 의한 역사 인식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 객관성을 가질 수 있고 따라서 부분적 진실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 절대주의라는 점에서는 상대주의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로 매도할 수도 없다.◁◀제7장~제9장에 대한 다른 책의 내용▷▶1. 역사적 사실의 본질사실(事實)이란 입증된 역사의 소재이며, 그것은 바로 이미 그 입증이 공인된 사실들에 입각한 지식의 기반이다. 이러한 소재를 우리는 단순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인명사전이나 역사사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사항들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기술(記述)에는 단순사실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단순 사실은 역사가의 해석이나 설명행위와 관련되며, 이와 같은 역사가의 해석은 똑같은 사실들에 기반을 두면서도 때로는 거의 상반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때 특정한 사실이 역사가에 따라 달라질 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로 하여금 동일한 견해를 갖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역사의 본질과 인식, 학연사, 차하순-2. 실증주의와 현재주의1)실증주의적 역사학파는 역사학을 과학과 동일한 차원에서 다루려고 한다. 문화현상을 다루는 역사학이나 자연현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이나 그들의 학문적 방법에 있어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의 연구대상이 인간사회라 할지라도 역사가가 실제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사회에 대한 사료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에서와 같은 연구방법(귀납법적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은 엄격한 실험은 할 수 없더라도 관찰에 의하여 대신할 수 있으며, 역사적 사실들을 수합하여 그것들을 비교함으로써 일반적인 결론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콩트를 비롯한 실증주의 역사학은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역사현상의 사실들의 확인작업은 어느 정도 실천되었지만 그 작업 이후 법칙을 추론하는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문화현상역사인식 방법을 중요시함으로써 사실에 의해 정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에 의해 사실이나 사건이 야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실추되었던 인간의 정신을 재건하려는 그들의 의지로 풀이된다.-역사학의 이해, 건국대학교 출판부, 임희완--역사학을 위한 변론, 소나무, 리처드 에번스-3.역사주의와 상대주의1. 역사주의의 특성첫째로 역사주의는 사건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여기서 역사성은 어떤 사건이든지 반드시 시간과 공간적 차원에 묶여있다는 특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든지 그것의 개별적인 것은 시간적으로 구속되어 있어서 시간적 변화에 의해 그 가치를 따져야 한다는 것이며, 문화는 결국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역사주의는 다이나믹한 발전적 역사관으로 역사과정 밑에 깔려 있는 불변의 구조나 인간성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역사주의는 간단하게 말해 자연주의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사상의 배후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둘째로 역사주의는 역사학 특유의 역사적 방법을 가진 사상이다. 역사주의는 자연현상을 실험과정을 통하여 일반 법칙을 유도하는 자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와 자연 사이에는 서로 넘나들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이 있는 것으로, 전자의 세계에는 인간 이성의 자유가, 후자의 세계에는 사실의 기계 조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의식 목적이 결여된 반복적이며 기계적 운동이 작동되고 있으며, 반면에 역사에는 창의적 정신이 부단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나 문화에는 특이하고 다면적인 성격과 소위 우연성이 적지 않다. 역사가는 다양하고 다원적인 문화적 현실을 오히려 총체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직관에 의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셋째로 역사주의는 하나의 ‘세계관’을 가진 사상이다. 즉 역사주의는 인간과 사회 및 세계를 ‘역사화’하려는 사고방식, 인간과 사회를 시간적 변화 속에서 인식하려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건들이나 일들을 변화라는 흐름가치의 설정,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 등등에 있어서 개인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셋째, 상대주의는 역사적으로 절대주의와 대립되어 쌍곡선을 이루어가며 흘러왔다. 신이라든가 이에 준하는 절대적 기준과 영구적이고 불변하는 진리에 대한 신념을 앞세우고 그 앞에 인간의 복종을 강요하던 시대에는 주로 절대주의가,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하던 시기, 그리고 인간개인이 중심이 되어 사물들을 인식하고 거기서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시각이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 등 상황의 변천에 따라 변환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기에는 상대주의가 우세를 점하여 왔다. 또 사회가 어떤 이념이나 신앙 등과 같은 것을 앞세운 체제에 의하여 폐쇄되었던 때에는 절대주의가 지배적이었고, 반대로 커다란 전쟁이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폐쇄사회가 개방화되고 사회의 단위와 성격이 다양화되는 때에는 상대주의가 지배적인 것으로 되어 왔다.-역사적 상대주의, 집문당, 이상현-◁◀제7장~제9장에 대한 나의생각▷▶제7장의 내용을 보고 여태껏 역사를 배워왔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내가 배우고 언급한 것이 “정말로 진실인가? 사실인가?”하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가 주로 역사를 배우고 접한 것은 국사, 세계사라는 이름을 가진 교과서나 각종 역사 서적들이었다. 이러한 여러 종류의 역사책을 읽어보면서 그 속에 담긴 여러 가지 내용을 그냥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그저 “여기에 나온 내용이 과거에 실제로 있어온 진실이다”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사람이, xx년도에, 어떤 장소에서, 어떤 것을, 어떻게 했다”라고 마치 내가 보았거나 경험한 사실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흔히 역사연구를 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는 것은 역사책인데, 여기서 역사책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들 중에서 몇몇 특정한 사건이 어떤 역사가에 의해서 선택되어지거나 재해석되어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역사책에 .
    인문/어학| 2008.12.17| 6페이지| 2,000원| 조회(297)
    미리보기
  • 장의식저, 역사이야기10~11장내용요약, 자기생각.
    ◁◀제10장과 제 11장 요약정리▷▶제10장 역사 인식을 위한 구분법1.공간적(지리적) 구분: 역사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전개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계 모든 지역의 역사를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통상적 방법이다.2. 시간적 구분1) 시대구분의 필요성: 역사를 몇 단계의 시기로 구분, 인식하는 방법을 ‘시대 구분’이라고 하는데 역사를 일정 단계로 구분함으로써, 변화의 모습을 단계적 ? 계기적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2) 시대구분의 흐름(1) 초보적 시대구분: 그해의 중요한 일을 충실히 기록한 역사서술을 연대기라 하는데, 중국이나 우리의 개념으로 편년체라고 하는 것이다. 지역의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통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의 왕조에 충실하여 역사서를 저술하는 것을 단대사라 한다. 서양에서도 순환론적인 역사인식이 있었다.(2) 3분법과 4분법: 시대를 구분하는 단위로는 통상 3개 단위, 아니면 4개 단위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이를 3분법 ? 4분법, 혹은 3시기 구분법 ? 4시기 구분법이라 한다.(3) 시대 구분의 기준: 시대 구분을 할 때의 기준은 당연히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변화에는 양적확대와 질적 전환이 있다.(4)마르크스의 시대구분: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3단계로 구분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노예제 사회-농노제 사회-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한다는 것이다.3)시대구분의 실제(1) 3분법의 실제: 고대의 종말과 중세의 시작에 대해 유럽이나 우리나라, 중국의 경우 여러 측면을 고려하지만, 이러한 시기 구분에도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영향은 강하며, 우리나라나 중국이 아니라, 서양 역사를 분석하여 도출된 이론이지만, 이쪽 지역의 역사를 분석하는데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시작에 대해서도 견해의 차이가 큰데, 먼저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의 문화가 근대사회의 출발점이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지지와 함께 반발도 받았다. 이처럼 근대적인 요소를 중세적으로 상당한 모순도 안고 있다. 하지만 시대구분에 의해서 역사가는 잡다한 사실들에 대해 체계와 논리를 부여할 수 있게 되고 역사가가 시간을 구분하고 무수한 사실들을 동류로 나누어 독자에게 보여줄 때, 좀 더 쉽고 체계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효용성이 있다.3.주제에 의한 구분: 주제에 따른 역사구분은 역사의 주도세력, 사상조류, 문예양식, 정치 ? 외교적 사건, 또는 사회 경제적 운동 등의 주제로 구분하는 것이다.제11장 종교로 본 인간의 역사1. 제 1 단계; 인류 초기의 다신교적 믿음: 인류 역사의 초기단계에는 거의 예외 없이 온갖 신들이 인간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다신교 사회였다.2. 제 2 단계의 발단(1) 석가모니와 불교: 석가는 신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믿음에 도전하여 신이 없다는 대담한 무신론을 전개하고, 인간 평등론에 입각하여 8정도를 윤리적 기준으로 제시하며 불교를 창시했다.(2)공자의 유교와 노장과 제자백가: 공자는 ‘천명’을 강조하면서 하늘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즉 윤리와 도덕적 근원으로 말하였다. 맹자가 ‘민심이 곧 천심’이라 한 것도 하늘을 초월적 신으로 보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도가의 노자나 장자는 진리의 절대적 기준을 ‘신’이 아닌 ‘도’로 설정하며 신이 인간세상을 지배한다는 고대적 믿음에 대해 도전하였다. 법가의 이사 ? 한비자는 ‘법’을 최고의 가치로 보고 그것만이 인간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고 사회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묵자로 대표되는 묵가는 신을 긍정하였지만 화려한 장례와 제례는 반대하였다.(3) 그리스의 유물론 철학자와 소크라테스: 유물론 철학자들은 존재의 근원은 물, 불, 흙, 공기라고 하면서, 신이 아닌 물질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이라 해석했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인간 세계를 지배한다는 믿음을 배척하고, 그 믿음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윤리와 도덕과 가치를 부정하였다.(4) 예수와 기독교: 다신교의 신앙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철저하게 깨트려버린 것은 예수가 창시한 유일신 사상의 기독교였다데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그것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아소카 대왕에 의해 전파되었다. 중국에서 발흥한 것은 대승불교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전래되었으므로 당연히 대승불교가 성행하였다. 불교는 탄생지인 인도에서는 크게 쇠퇴하였다.(2) 유교의 영광과 오욕, 그리고 죽음에 대한 유교의 입장: 유가는 오랜 인고의 세월 끝에 한나라 무제 때 국가정통의 학문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유교는 불교와 도교의 성행과 무신론에 기초함으로써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이기주의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교는 죽음을 인정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으로부터 오는 슬픔조차도 숙명으로 감내하는 길을 택하였다.(3) 도교의 발흥과 유불과의 갈등: 도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불과의 갈등도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투쟁은 도교의 교리를 풍부하게 하였다.(4) 기독교의 영광과 오욕: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하며 서양의 정신세계와 일상의 삶까지도 지배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로 양분되는 오욕을 겪었다.3. 제 3 단계; 종교개혁1) 선불교의 발흥선불교는 달마를 접점으로 생성된 중국 불교였다. 달마를 초대 조사로 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에 이르러 6대 조사를 거치며 선불교는 크게 발흥하였다. ‘진정한 법을 얻으려면,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를 찔러 죽이고, 석가를 만나거든 석가를 찔러 죽여라’는 ‘살조살불’과 ‘문자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 불립문자이다.2) 신유학의 전개성리학은 불교와 도교, 선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성립되었고 성리학적 사색은 이일원론, 기일원론, 이기이원론으로 나뉘어져 전개되었다. 왕양명은 성만이 아니라 정까지도 이로 파악하여, 성과 정이 동시에 내포된 심 자체가 이라는 ‘심즉리’를 주장하였다.3) 기독교의 종교개혁: 기독교의 세속적 부와 욕망에 사로잡힌 사제와 교회에 의해 자행되는 부패가 만연되어 가고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의 실패를 배경으로 종교개혁이 이 없다. 앞의 시기와 뒤의 시기는 물리적 시간으로 보면 동일한 시간적 측정단위일 수 있으나 역사적 시간으로 보면 상이한 의미를 가진 현실이다. 따라서 시대구분의 필요성이 있다.진정한 시대구분은 르네상스 시대의 3분법과 함께 시작되었다. 3시대 구분은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시대의식과 계몽 사상가들의 역사관에 의하여 확립 되었고, 본래 문예 분야에서 시작된 이 3분법은 17세기에 이르러 역사학 분야에 까지 파급해 나갔다. 1920년대 초 독일에서 트뢸치가 역사인식의 수단으로서의 시대구분의 가치를 인정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역사가들의 엇갈린 의견들이 나왔다. 먼저 시대 구분의 기준이 문제되었다. 문화가 풍부한 내용을 갖는 때가 시대와 시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가, 아니면 사회와 정치에 위기가 올 때가 분수령이 되는가 하는 논의가 그것이다.3분법이 내포한 모순에 대한 검토는 지난 반세기 동안의 사학이론 및 연구방법론에 반영되어 왔다. 첫 번째의 고려 대상은 고대의 범위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대의 개념이 서양사 전체를 두고 생각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로 정해진 고대의 시작이 반드시 다른 지역에 적용된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르네상스 문제라고 총칭될 수 있는 근대의 시작에 관한 문제는 일찍부터 학계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와 고대문화와의 관계를 재론되었다. 3분법의 모순은 특히 “고대”니 “중세”니 하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데, 거기에는 시간적 거리, 사멸 또는 퇴락 등의 편견이 개입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고대”의 어느 부분이 그 내용에 있어서 “근대적”일 수 있고 현대사의 부분이 어떤 의미로는 “고대적”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1400년대를 근대라고 규정하였으나 그들의 “근대”는 항구적으로 근대일 수 없으며 시간 경과에 따라 그것은 다만 명칭상의 찌꺼기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근대는 그 범위가 끝없이 확대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근대의 범위가 일정하지 않다는 사실은 제 4 의 시대구분인 최근세 또어질 성질의 것이다.-역사의 본질과 인식, 학연사, 차하순-2.종교로 본 인간의 역사인간을 가리켜 ‘이성적인 인간’이라고 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이 가진 이성, 곧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그 밖에 인간은 ‘공작하는 인간’이라고 하여 다른 동물과 달리 연장을 만들어 무엇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음을 강조하고, ‘웃는 인간’ 혹은 ‘상징을 사용하는 인간’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의 인류학자 마레트에 따르면 진정으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이다. 지구상에 있는 종족 중에 어떤 형태로든 종교가 없는 종족은 없고, 반면에 동물 중에 종교적 신념이나 제의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동물은 아직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종교적 인간’이라는 말이 차라리 더욱 적절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종교적’이고 ‘고칠 수 없이 종교적’이다. 물론 나는 교회나 절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 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적어도 서양의 추세를 보면 최근에 종교가 힘을 못 쓰거나 죽어 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교회나 절에 나가는 것만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종교를 어떤 외형적 조직체나 일련의 교리 체계로 본다고 하면 그러한 종교는, 적어도 일반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힘을 못 쓰거나 죽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당면한 궁극적 물음을 물어 보거나 삶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자세가 깊은 의미의 종교적 자세라고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지 않을 수 없고 시대가 바뀐다고 이런 종교적 자세가 줄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에 와서 더욱 강하고 깊어지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볼 때 종교는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삶에 없을 수 없는 요소이다. 따라서 인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요소로 깊이 자리 잡은 종교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인문/어학| 2008.12.17| 6페이지| 2,000원| 조회(425)
    미리보기
  • 장의식저, 역사이야기 4~6장 내용요약및 자기생각 평가A좋아요
    《제4장~제6장 내용요약》제4장 역사의현재성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흔히 ‘역사는 과거를 알아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내다보는 것’ 이라고 대답하는데, 역사는 확실히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 특히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미래는 현재의 연속이고,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며, 과거가 없는 현재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예로써 아이는 자신을 누가, 언제, 어떻게 낳았는지 물어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때 아이는 과거를 통해 현재 존재하는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 살인사건에서도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으로 달려가 단서들을 포착, 사건의 대체적 윤곽을 파악하고 다음으로 죽은 자의 죽기 직전의 행적, 즉 과거를 파헤쳐야 한다. 그 전의 주요한 행적들을 추적하다 보면 죽은 자의 실체나 살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용의자도 찾아낼 수 있다. 또 용의 선상의 인물의 전과를 조회함으로써 그 용의자의 정체를 밝히고 결국 이런 제반의 내용들을 토대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맞선보기를 예로 들면, 맞선을 보는 것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직접 만나 자신의 판단으로 상대를 파악하여 최종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이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유력한 방법은 그 사람의 과거를 파헤치는 것이다.이처럼 역사를 통해 현존하는 어떤 존재의 정체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현존하는 어떤 존재만이 아니라, 그 존재가 행하는 행위라든가, 그 행위의 과정이라든가, 행위의 결과인 현상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역사는 그 목적론적 본질에서 ‘어떤 존재와 행위, 과정, 현상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제5장 사회과목으로서의 역사역사에 있어서 과거는 살아있는 과거로서 현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현재의 정체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존하는 사회의 실체이며, 동시에 사회를 살아가는 현존하는 인간들의 실체이며, 나의 실체이다. 즉, 역사는인데, 이러한 교육과정의 제정 과정은 우선 교육전문가로 위원회를 구성, 현재 교육과정을 검토하는 ‘현행 교육과정 개정을 위한 기초연구’를 진행한다. 이 연구에 근거하여, ‘교육과정 총론 시안’이 개발되며, 이를 심의하고 최종 확정하면, 확정된 총론에 의거하여 ‘각론 시안’을 개발한다. 여기서 각론은 각 교과별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개발된 후 교육부의 심의를 거치고 실제 운영해 보는 단계와 수정을 거쳐 최종 확정 공고되어 진다. 그렇다면, 교육과정에서 역사는 왜 교과목으로 설정된 것일까?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모여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러한 사회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를 잘 알아야 하고 사회를 잘 아는 만큼 사회생활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위해 교육과정에서 설정한 것이 사회과 과목들인데, 사회과 과목들은 역사-일반사회-지리로 구성되어진다. 일반사회는 인간의 집단생활에서의 이해관계의 대립과 충돌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런 정치의 구조가 어떤지, 어떤 원리 아래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려주는데 이것이 ‘정치’라는 교과목이다. 또 인간 사회에서 경제체제와 구조가 어떠하고, 어떠한 원리 하에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혜택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을 다루는 것이 ‘경제’이다. 또한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과의 협력, 그리고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의 사회적 문제도 있는데, 이것을 다루는 것이 ‘사회’이다. 그 외에 ‘문화’와 ‘법’이라는 과목도 사회이해의 매우 중요한 과목이다. 지리과목으로는 한국 사람으로 배워야 할 한국지리, 그리고 한국이 세계에서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세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세계지리가 있고, 이러한 지리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지리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문지리, 그리고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지리가 있다. 역사가 사회과목으로 설정된 이유는 한 사회를 보다 분명히 이해하여, 그 사회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사회의 현재의’라고 하는 형태로 묶여져 통합 운영되며, 교과서 역시 ‘사회’로 되어 있다. 이것은 통합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교육원리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사회나 지리적 측면으로서만 발견하기는 어려운, 현존하는 한 사회의 실체를 보다 분명하게 발견하게 해 주는 것이 역사의 한 본질이다.제6장 인문과학으로서의 역사역사는 한 사회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학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역사는 사회라는 존재의 실체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존하는 인간 존재의 실체에 대한 해명을 주요한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이점에서 보면 역사는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과학(인문학)의 일종이다. 역사를 인문과학의 한 영역이라 하기에 앞서 우선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면, 학문은 ‘보편 타당성을 갖춘 지식체계, 혹은 그 탐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학문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학문의 발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먼저 학문은 지식이 발생한 이후 발생하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지식의 발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이 많은 문제를 사색하면서 의문을 품고, 그 회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식이 발생했다. 지식이 발생하면 학문은 그 성립의 기초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에 의해 나온 여러 단편적 회답들 중 어느 정도 보편 타당성을 획득한 해답들, 즉 지식들이 살아남고 그러한 지식들이 여러 사람에 의해 축적되고 체계를 갖추면서, ‘보편 타당한 지식체계’로서의 학문도 점차 성립되게 되었다.학문은 여러 갈래가 있는데, 학문을 갈래짓기 위해서는 의문의 갈래를 분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의문은 의문의 주체인 인간 자신에 대한 의문,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한 의문,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자연과 이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나누어진다. 이 순서에 따라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다.역사는 인간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는 면에서 인문과학이라 할 수 있는관적 입장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수밖에 없다.인문학의 목적은 인간을 탐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육체가 아닌 주로 그 내면을 탐구하여 인간의 본질을 해명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학문 갈래로 문학과 사학과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성립된 인문학의 대표적인 학문 영역들이다.《제4장~제6장에 대한 다른 책의 내용》인간은 어디에 위치해 있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건 역사와 관련을 맺게 되며, 때로는 역사에 의해 족쇄가 채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하르트비히가 지적한 바 있듯이 ‘역사문화’속에서 살고 있다.어린아이가 동화를 들을 때도 역사와 접촉하게 된다. 동화란 언제나 ‘옛날 옛적에’ 라는 말로 시작되기 마련이다. 어린 아이들은 허구와 현실을 구분해 내지 못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과거에 존재한 것은 무엇보다 그들을 매혹시키고 넋을 잃게 만드는 현재의 세계다.다른 한편 전쟁세대나 전후세대처럼 과거의 부담을 안고 살아가면서 역사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자도 역사와 관계를 맺는다.또한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자신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역사를 끌어들이는 자와 그 말을 경청하고 있는 자는 똑같이 역사와 관계를 맺는다.또 자기를 현재에, 즉 현재의 기분과 동요에, 현재의 유행과 간섭에 무기력하게 내맡기지 않기 위해 과거 속에서 자기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자도 역사와 접촉한다. 정돈된 틀 속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자, 역사가 남긴 것, 즉 거대한 건축물, 매혹적인 음악과 문학, 심오한 철학과 위안을 선사하는 종교나 학문과 같은 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자, 요컨대 문화의 결실을 즐기는 자도 역시 과거와 관련을 맺는다. 또한 문명의 업적들을 너무나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는 자는 물론 진보의 역사가 갖고 오는 파국적 결과를 두려워하는 자도 역시 역사와 접촉한다.역사와 관련을 맺고 있고 역사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역사와 인간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점을히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역사를 갖고 있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무엇이 존재했냐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무엇이 존재하느냐가 드러나게 된다.예를 들어 이런 저런 여자가 과거를 갖고 있다는 식의 비꼬는 듯한 표현이 이러한 사태를 분명히 드러내 준다. 남자도 ‘사건들’을 친다. 그런데 여자가 ‘사건들’을 치게 되면 그 여자는 과거를 갖게 된다. 과거에 발생한 사건이 꼬리처럼 그 여자에 달라붙어 그 여자의 부속물이 되고, 그 여자를 낙인찍고, 결국 그 여자의 존재에 대한 규정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과거는 현재와 연결된다.또한 과거는 미래와도 연결된다. 누군가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미 이 말속에 장차 그러리라고 예견되어지는 발전방향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는 법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역사를 갖고 있는 사람은 뭔가를 잉태하고 있는 미래도 함께 갖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이 역사에 대해서 맺고 있는, 모든 시간대를 관통하는 관련성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역사성이 역사가 인간의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왜 유의미한가라는 것에 대한 좀 더 심오한 근거가 된다.드로이젠은 백과사전과 역사방법론에 관한 강의를 모아 편찬한 『역사학』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역사란 인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고, 인류의 자기 확신성이다.”인간의 종족사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숙고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숙고를 통해서 좀 더 적절하게 답해질 수 있을 것이다.과거의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실존에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할 때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게된다. 역사와의 접촉은 이러한 접촉이 어떤 모습을 띠든지 간에 상관없이 역사성과 관련을 맺는다. 어떤 이는 신과 영웅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서 서술하고, 다른 이는 로마의 건립 이후부터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고 또 다른 이는 집단적 체험을 자기 민족의 신화와 기원으로 만한다.
    인문/어학| 2008.12.17| 6페이지| 2,000원| 조회(342)
    미리보기
  • 장의식저, 역사이야기 1~3장내용요약 및 자기생각 평가A좋아요
    《제1장, 제2장, 제3장의 내용 요약》제1장 역사의 개념1.원초적 역사역사란 1차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원초적 역사’, 혹은 ‘1차적 의미의 역사’ 라 한다.1차적 의미의 역사의 주체를 인간으로만 단정지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 의해서 일어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에 비해서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 일방적으로 우월한 점에 착안하지 않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다른 존재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우수하지는 않다.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도 결국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에 법칙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므로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사 역시 거대한 자연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의 다른 존재도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원초적 역사의 내용에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행위가 있다. 그리고 둘째로 그러한 행위의 과정도 있다. 셋째로 행위의 결과로서의 현상을 가지고 있다.2.서술로서의 역사역사책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다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일부만을 적어 놓았다. 그렇다고 하여 기록되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 그 책을 저술하는 사람에 의해 선별된 것이지 쓰여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이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제2장 역사를 알면 무엇이 좋은가?1. 고적답사고적답사를 실시하는 데에 있어서 학생들이 고적답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켜보면 필자가 대학을 다닌 예전에 비해서 고답을 더 잘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이는 오랫동안 진행된 고적답사를 통해 얻어진 답사 자료나 이미 고답을 다녀온 선배의 경험이 학생들이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나 노력, 시간을 줄여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2. 대통령과 왕대통령과 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전례가 있음으로 해서 전임 왕이나 대통령이 각 경우에 어떻게 하였는지를 참고 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좋은 것은 계승하고, 못한 것은 개선함으로써 전임 왕이나 대통령보다도 더 나은 일들을 기획하고 집행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보고서 우리는 참고할 전례가 없다는 것에 얼마나 많은 시행 착오를 겪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새로 기획하고 준비하는데 드는 막대한 시간, 노력,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것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나 이에 대한 기록, 즉, 역사이다.3. 몽고침략과 강화도몽고가 강화도를 침략했을 때 김포에서 1킬로 남짓 한 바다를 건너지 못했던 것은 바다에서 싸워 본 역사적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고려와 남송의 사람들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고 안내를 하도록 하여 일본을 침략했지만 실패했는데 그 또한 바다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부재 때문이다.4. 역사라는 이름의 블랙박스역사는 망망대해를 오고간 경험이나 그것을 기록한 해도와 같이 바닷길에 오른 사람의 생사를 갈라놓을 정도의 보물과 같은 것이다. 역사는 비행기가 푸른 창공을 수없이 왔다갔다한 일들이나 그것을 기록한 블랙박스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전모를 밝혀줄 열쇠가 그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5. 인간의 자기 발견과 세상 이해역사를 알면 자기 자신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잘 안다는 것은 돈이나 지위나 명예와 같은, 인간이 바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밑천이 된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충고와 비판을 들어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도 필수적인데, 인간이 자신을 발견하는데 역사를 아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역사를 알면 자기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이고, 나아가 사회가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제3장 역사의 발생-역사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은 역사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아는 것이다.1. 원초적 역사의 발생1)인간의 출현고고학적 발굴이 없던 상황에서는 역사의 발생을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창조설로 보았다. 오늘날에는 지구, 생명체, 인간이 한꺼번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주의 탄생, 그리고 지구의 탄생, 생명의 탄생, 그리고 진화를 통해 인간이 탄생되었다는 진화론으로 역사의 발생을 보고 있다.2)원초적 역사의 발생원초적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들”로써 실제 주체가 인간이므로 그 원초적 역사는 인간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후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최초의 인류로서 고생인류의 출현을 역사의 시작으로 보든 현생인류의 출현을 역사의 시작으로 보든 이들의 출현과 그 후 엄청난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들은 기껏해야 양적 확대에 불구 하다. 신석기 시대가 되면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들고 농사와 목축을 하며 토기를 만드는 등 대단한 질적 전환을 이루는 데 이를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청동기 시대에 인간이 돌이나 나무가 아니라 금속을 만들어 쓴 것은 대단한 진보였다. 철기시대에 철기의 사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야기하였다.2. 서술로서의 역사의 발생서술로서의 역사는 그것을 서술하는 수단 즉, 문자를 필수 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문자의 발생과 그 괘를 함께 한다. 문자는 인간의 표현 욕구에 의해 만들어 졌고 대체로 청동기의 사용, 국가의 형성과 때를 같이한다. 역사서술에 있어서 문자 이외에 역사의식이 필요하며 문자가 개인, 집단, 국가의 자기표현 욕구와 통치 수단에서 출현했듯이 서술의 역사도 개인이나, 집단, 국가의 표현 욕구와 통치수단의 요구에서 출발한다. 특히 국가를 형성한 집단은 자신들 집단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우월성을 과시함으로써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수단도 발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서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제1장, 제2장, 제3장의 주제에 대한 다른 서적의 내용》차하순『역사의 본질과 인식』학연사차하순의 「역사의 본질과 인식」에서는 역사의 의미를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첫 번째 의미인 과거로서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 즉, 지나간 사건의 전부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과거는 지나간 사실들, 즉 시간적으로 소멸된 사실들이라고 보고 그 사실은 사회와 문화의 총체라고 보고 있다. 또 이 사회와 문화의 총체인 역사를 경험적 지식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역사를 인류가 전체적으로 경험한 사실들의 저장고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기록으로써의 역사는 역사가 무수한 과거사실들 중에서 엄격히 “선택된” 일부, 즉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 라고 보고 있고 그 단순 사실의 선택과정에서의 역사가의 판단이 필연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가의 해석”의 필연성의 측면에서 단순과거가 역사가에 의해 그 내용의 진위가 분석, 검토, 평가되어 지고 해석되어 지는데 이러한 해석이 합리적인 절차를 거치고 설득력을 갖게 되면 객관적인 “역사 지식”이 된다고 보고 있다. 즉, 역사는 역사가에 의한 해석, 역사에 대한 지식, 한마디로 역사연구 또는 역사학을 가리킨다고 세 번째 의미를 말하고 있다.이 부분에서 보면 차하순은 역사의 의미를 교재『역사이야기』와는 다르게 세 번째 의미인 지식으로서의 역사, 즉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어 지고 검증된 하나의 지식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역사의 주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먼저 인간만의 역사에서 19세기 카를 마르크스와 좀바르트 그리고 셸링 등의 학자의 의견을 예로 들어 설명해 놓았고 가장 주목할 학자로 “콜링우드”를 들었다. 콜링우드는 “자연의 모든 과정을 역사적 과정이 아니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설사 어떤 피상적인 면, 즉 연대적으로 일어난다는 면에서는 역사와 비슷할지 모르나 결코 역사적 지식은 아니다”라고 하였고 이러한 이유는 자연의 과정에서의 내적 세계의 부재를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들의 연쇄과정이며 사고와 성찰이라는 내적 세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인간사회의 현실은 “외부”와 “내부”를 모두 가지고 있으며 이 내부야말로 역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는 사고의 역사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두 번째로 자연사에 있어서 18세기 뷔퐁, 16세기 보댕, 18세기 헤르더, 그리고 20세기의 웰스를 들고 있고, 대표적 학자로 툴민을 들고 있다. 툴민은 『시간의 발견』이라는 저서에서 인간과 함께 자연도 역사를 가질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모든 시간적 발전은 일련의 위상을 지니고 있는데, 그 위상의 하나하나는 각기 다음 단계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출발점을 이룬다”고 말하면서 “진화”는 “진보”와 달리 필연적이며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과 인간을 다 같이 포함해서 현재 상태는 매우 다른 과거로부터 진화되어 나온 자연스러운 발전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필자는 이 두 가지 견해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은 인간만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동조하며 그 이유가 인간의 역사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자연은 단순히 생존과 생성의 한도 내에서 변화하는 것이지 인간처럼 적응이상의 “작용”을 위한 활동은 부재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인간적 현실이 경험하는 역사과정에 대해 무언가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역사의 부분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인간의 역사와의 관련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역사의 효용성에 대해서 필자는 과거를 알게 됨으로써 현재의 생활에서 과오를 피하고 장래를 살아가는데 지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훈으로서의 역사에서 교훈은 역사적 사실의 일반화에 입각하고 있는데 역사상에 일어난 하나 하나의 상이한 개별적인 사실들과 사건들이 무엇인가 동일 범주로 분류되어 공통된 특성으로 묶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에 있어서의 일반성은 보편적인 인간성 때문이라고 보고 있고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고 그것이 시, 공간적인 변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일반적인 유형을 가지는 예측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일반화로 예측도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문/어학| 2008.12.17| 5페이지| 2,000원| 조회(572)
    미리보기
  • 19세기 중국사회 내용요약
    제1장 19세기 중국의 서양인식과 세계관의 변화1. 머리말제1장은 19세기 서양의 충격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과정에서 1895년까지를 설명하고자 하며 그 전제로 서양문화의 중국 전래와 서양에 대한 이해 노력과 인식의 변화를 살피고, 이를 수용키 위한 중국인의 사상적 배경인 양무사조의 실체와 이를 바텅으로 전개된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2. 서양문화의 전래와 그 인식1) 서양문화의 전래중국과 서양의 직접적인 교섭에서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던 것은 선교사였다. 그런데 제수잇파의 선교사의 합유선교의 방법)이 문제가 되어 예의지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교황청은 강희제에게 제수잇파의 포교가 잘못된 방식이었으므로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교황의 뜻을 수용치 않았고 유가 사대부들도 천주교에 대해 반교의 태도로 돌아서며, 선교사들의 활동은 제한 되었고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기독교는 금교되면서 중국과 서양의 교류는 축소되고 말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싱가포르, 마카오 등을 중심으로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이들은 중문으로 된 서양의 역사와 지리, 과학과 기술의 내용이 포함된 잡지를 발행하였고, 학교를 세워 이곳을 중심으로 서학전파 및 선교의 중심지로 삼았다.2)이인(夷人)에서 양인(洋人)으로의 인식변화중국인들에게 있어 서양인들은 이인, 즉, 오랑캐에 불과한 존재였다. 매카트니가 1793년에 중국과의 교섭을 위하여 중국에 왔을 때, 그리고 두 번째로 암허스트가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중국은 그들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요구한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이’자 사용문제는 결국 제2차 아편전쟁 이후 천진조약의 조약문에 이 같은 규정을 넣음으로써‘이’자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예의 문제도 각국의 예절대로 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중국의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질서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고, 중국은 이때부터 다른 나라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중국과 서양의 관계에서만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었을 뿐 일반 관리나 사대부들의 세계관해 전해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에서 철도부설을 구상하였다.(2) 1860년대의 철도건설 반대론1960년대 전기에는 서양의 상인, 철도설계사 등에 의해 철도건설이 주장되었고 중· 후기에는 주로 북경에 상주하였던 외국 공사나 총세무사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60년대 전기의 중국은 철도건설이 자신들에게 어떤 좋은 점이 되는지 몰랐고, 서양인의 침략을 우려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 · 후기에도 이러한 철도건설이 계속적으로 제기되자 1867년10월 12일에서 1868년 1월 16일까지 3개월동안 논쟁이 이루어졌는데, 그 의견들을 요약하면 민정이 불편하다는 점, 즉, 풍수지리상 중요한 지역이 방해를 받아 민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소민의 생계를 위협할 것이라는 점에서 건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반면에 철도에 대해 중국의 장래에 이익이 된다고 보고 중국의 주도하에 철도를 건설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3) 1870년대의 철도건설제기70년대에 들어 철도건설문제는 양무파 관료들인 이홍장, 정일창, 곽숭도 등의 주도로 긍정적으로 제기되었고, 설복성, 왕도, 마건충 등 개량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들은 상업과 수송, 군대 이동등에 편리함이 있기 때문에 경제가 발달된 지역에 건설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4) 1880년대의 철도건설과 반대론80년대에는 철도건설문제가 좀더 구체화되어 세 번에 걸친 논쟁이 이루어지게 된다. 첫 번째는 회계장군 유명전에 의해서 철도건설이 제기되었을 때이고 두 번째는 83년에서 88년의 프랑스와의 전쟁을 대비하여 이홍장에 의해 제기되었을 때이며, 세 번째는 천진에서 통주까지의 이홍장의 철도건설제기에 의한 논쟁이었다. 이러한 철도건설의 제기는 양무파와 수구보수파 사이의 논쟁을 일으켰고 반대보수파의 진부한 논리는 중국의 철도건설을 지연시켜서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4)아동의 미국유학과 취소(1) 용굉의 유학계획과 실현노력양무파는 선진 서양의 기술을 구입하는데서 나패배로 인한 것이었고 천진교안사건 이후 둘 사이의 협조 관계는 무너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청조는 조공국가에 대한 지배권을 여전히 유지하려 하였고 이는 조공국들에 대한 정책변화로 나타났다. 그것은 조선과 유구를 대하는 청조의 정책에서 여실히 보이며 청은 이 둘을 방파제로 여기고 있었다. 한편 조선의 경우에는 조선을 구미제국과 일본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조선보호론을 제기하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에 대한 간섭은 가속화 되었고 군란 당시 북양함대 7척 중 6척을 출병시킴으로써 조선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조청수륙상민무역장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경제침탈·군사보호와 같은 근대 자본주의의 식민지 수탈개념이 용해되어 있었다. 이는 청일전쟁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힘을 잃은 청은 1899US에 가서야 한중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조선과 청이 대등한 관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이상과 같이 청은 조공국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근대적 국제질서에 편입하려고 시도하였다. 이것은 청이 서구의 제국주의 질서를 수용하여 조공국가들에 이를 강요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3. 근대산업사회의 건설1)서구식 공업화의 시작과 확대1차 아편전쟁의 패배는 청에게 군사공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군사·무기와 관련된 근대산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중국의 신식공장은 주로 해안가에 지어졌으며 이는 연안에서의 해군력이 취약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면서 무기의 효과가 입증되어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과 같은 한인출신관료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군사공업이 추진되었다.이러한 산업화 촉진을 위해 연료와 재료가 절실히 필요했고 외국에서 들어오기보다 중국의 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서 1894년까지 38개의 광산기업이 생겼다. 이와 더불어 제철소나 철도, 철광개발 등이 잇달았다.그러나 운영방식에 있어 관주도의 이른바 ‘관독상판’식의 운영방식에만 매몰되어 다른 공장과의 연계가 부족하였고 관주도라고 하지만 자금은 대부분 지방 독무에게헌국가를 구상하여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점진적인 개혁을 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양도는 책임내각을 강조하였다. 이후 양도는 정부에 진출하여 군주를 중심으로 한 임헌군주제를 논의한데 비해 재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양계초는 국회와 민의를 중심으로 입헌제를 주장하였다.3)입헌군주국가의 추진과정입헌군주제의 추진은 안으로는 청정부가, 밖에서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입헌군주제의 본격적인 검토는 러일전쟁 이후 시작되었는데, 많은 관료들의 건의가 있었고, 정부는 해외로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이들 중 일본의 중앙집권적 입헌제도가 채택되었고, 헌법의 대강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 참조되었다.그리하여 중앙집권적 관제 개혁이 단행되고 많은 근대적인 제도들이 만들어졌으나 이는 황제중심체제의 틀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보수관료의 반대와 일본의 입헌제도가 모델이 된 데에 있다. 이후 “흥정헌법대강”을 근본준칙으로 광범위한 개혁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구의 자유와 민권이 보장된 것이 아니었고, 헌법상 군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4)국회 개설운동과 자의국·자정원청이 ‘예비입헌’을 발표한 후 전국적인 국회개설청원운동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청정부는 “자정원·자의국장정”을 제정하였다. 1909년 각 성에 지방의 신사나 관료들이 주도하여 자의국이 개설되었다. 이곳은 지방의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지 못했다. 정식국회개설이 늦어지자 청원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청 정부는 재정상의 군란과 재해를 이유삼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의국은 ‘각성자의국연합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청원이 계속되자 청정부는 예비중앙의회격인 자정원을 설치하였다. 모델은 역시 일본이 되었다. 이제 이 예비적 성격의 의회는 공식적으로 민의를 황제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헌법제정권, 예산심의와 같은 국회자체의 기능은 없었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게 강제 합병되자 입헌주의자들은 조속한 국회개설을 서둘렀다. 조선의 멸망은 못했지만 1907년 이후의 봉기들은 여전히 동맹회가 지니고 있는 대의가 따라 움직이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였다.무장봉기의 마지막은 신군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군은 청일전쟁 후 원세개와 장지동이 훈련시킨 자강군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이들은 청 정부의 과도한 징세와 관료의 부패에 불만이 있었고 동맹회와의 연대 가능성이 농후해진 상황이었다. 이들은 성 중심주의적 사고를 지향하여 각 지역에 배치되어 동맹회의 조직적 거점이 될 수 있었다. 처음 이들은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청군의 반격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동조세력을 얻게 되었고, 두 번째 봉기인 무창봉기에서 마침내 청조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무창봉기 직후 “중화민국임시정부조직대강”을 기본으로 황제체제에서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근대적 이행도 국민을 자산가와 지식인층으로 상정함으로써 중화민국은 황제가 없는 한족의 국가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을 뿐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주인이 되어야할 국민 대다수를 외면한 채 오히려 그들을 희생시키기만 했다.6. 새로운 사회관계1)신분관계의 지속과 변화청은 기본적으로 만주족이 최상부를 차지하는 사회였다. 이들은 모든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청말에 이르면 이런 그들의 이권도 한인들과의 갈등과정에서 점차 약화되어 만, 한의 경계는 허물어지게 되고 만주족은 법적으로 더 이상 우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팔기의 경우 청말에 이르러 그들의 수입은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농업과 수공업·상업에 종사하는 팔기들이 점차 늘어났다.한편 지배층으로서 신사층이 관료와 과거합격자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지방사회에 거주하면서 아편전쟁이나 태평천국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향총을 방어하기 위해 자위군을 이끌면서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공공사업뿐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청말에 이르면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교육이.
    인문/어학| 2008.12.17| 11페이지| 2,000원| 조회(46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4
4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1
  • A좋아요
    3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4월 22일 수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9:26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