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최근세사_구체제의 몰락과 프랑스혁명의 발발.hwp서양 최근세사 구체제의 몰락과 프랑스혁명의 발발△구체제의 몰락 (18c말. 1789)유럽은 프랑스혁명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3신분 체제(국왕>1신분>2신분>3신분)였던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신분체제가 몰락하게 되었다.1신분은 성직자, 2신분은 귀족, 3신분은 이들을 제외한 모든 시민을 말한다. 1신분은 고급 성직자 하급성직자로 구성, 불과 인구의 1%에 해당하였고 그들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토지를 소유함에도 토지 또한 과세하지 않았고 십일조라고 불리는 일종의 헌금만을 납부하였다. 2신분은 전체인구의 4% 정도에 해당하였고 궁정귀족(궁전에 자리하던 중앙귀족), 지방귀족 (지방권력을 책임지나 명성이 조금은 떨어짐), 법복귀족(법을 담당하는 귀족)으로 구성되었으나 돈을 주고 귀족 신분을 사는 형태가 많았다. 이들 귀족 또한 납세하지 않았고 토지 소유자들에게는 세금을 납부하게 하는 등의 봉건적 권리를 행사하였다. 3신분은 1,2신분이 아닌 모든 시민을 가리키며 전체인구의 95~96%에 해당되었으며 프랑스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농업, 상업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농민은 대농, 자영농, 빈농, 반소작농(고용농 4가지 형태로 분류할 수 있고 그 중 빈농, 고용농 집단은 특권층에 봉사하는 형태로 생활하는 꼴이었다. 비농업자인 도시민들은 부유시민(페이양파), 중간시민(지롱드파), 하층시민(자코뱅파)으로 구성되었고 부유, 중간시민을 부르주아라고 일컬었으며 하층시민은 쁘띠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또한 가장 낮은 시민 세력인 무상시민(상필로트)은 후에 혁명의 추진력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중세에 수공업자나 소상점주였던 시민들은 중상주의가 전개되면서 자본 경쟁력에서 밀리게 되며 하층시민으로 전락하였다. 반대로 대규모 상공업, 금융업, 학문종사자들은 중상주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시민들에게는 길드제라는 상인들만의 유통 조직이 성립되어있었는데 길드만 가입되어있으면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집단은 단연 부르주아 집단이다. 이들은 아무리 자본이 많아도 교육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아도 3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신분체제의 모순이었다. 재산도 직종도 달랐던 3신분은 신분이라는 명목으로 사상을 함께할 수 있었고 이들은 새롭고 창조적 정신으로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커지게 된다.△프랑스혁명의 장기적인 원인구체제의 모순은 결국 1789년 혁명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혁명의 발발 2년 전 그 당시 상황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흉년과 실업의 연속에서 3신분은 세금납부의 부담도 짊어지고 있었다. 세금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왕실의 재정문제로 인해 점점 세금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었다. 왕권약화와 더불어 시민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시민들은 곧 왕실에 불만을 갖고 혁명의 씨앗을 키우게 되었다.혁명 당시 국왕은 루이16세였는데 루이14세(국왕의 권위가 최고조였던 시기) 말 때부터 잦은 전쟁을 치루고 패전을 하며 재정을 바닥내고 있었는데 16세가 되면서 더욱 부채질을 하게 되었다. 루이 16세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탈출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재정을 조달해주었고 미국은 독립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재정은 더 바닥나게 되었고 점점 세금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새금 개혁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2신분도 세금을 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2신분은 이 개혁내용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되었고 그 중 고등법원에서는 그 내용을 왕실 독자적으로 행해선 안 되고 삼부회라는 회의기관을 걸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부회는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베르사유궁전에서 개최되었다. 모인 인원의 수는 천 명 정도 , 대부분은 3신분이었으나 여기엔 또 다른 모순이 있었다. 다양한 집단이 모인 3신분은 의견을 통합하는데 어려울뿐더러 행사할 수 있는 투표권도 딱 하나였다. 언제나 1, 2신분에 2:1의 투표수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3신분은 결국 1789년 6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의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3신분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폐지하고 해체하려 하였다. 이에 3신분은 해체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고 국민의회를 계속해 추진하며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 코트의 선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시민군을 조직(민병대), 무기 확보를 위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고 곧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키게 되었다.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7.8월경 농촌에서는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자신들의 농기구로 정부군에 대한 방어 태세를 하고 처음 공격한 곳은 영주의 성이었다. 귀족들은 농민반란의 위협을 받으면서 농민들의 반란 원인을 알고 곧바로 농노제를 폐지하나. 그러면서 농민들의 반란이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 것이 혁명이 발발하고 얻어낸 첫 번째 성과였다. 그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발표되었다.총 17개로 이루어진 선언이엇다. 내용은 자유, 평등, 권리에 대한 것이었으며 루소가 주장한 사회계약설의 키워드가 담겨있는 걸 알 수 있다. 권리선언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3신분이 자유로워지지 않았고 경제적인 심각성은 더 깊어갔다. 1789.10월 사건이 발발, 파리의 주부 들이 흉년으로 빵 부족에 시달리며 생활고가 깊어지자 베르사유 궁전까지 배고픔을 호소하고 왕궁으로 난입하게 되었다. 구체제가 몰락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프랑스 혁명은 시작되었으며 혁명기는 세단계로 구분지을 수 있다.△프랑스 혁명의 경과 (1789.6~ 1799.11)*1단계 : 1789.6~1792.8 온건한 혁명*2단계 : 1792.9~1794.7 급진적 혁명*3단계 1794.8~ 1799.11 반동적 혁명(보수적)1단계 온건한 혁명혁명 초기에 혁명가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하여 헌법에서는 교회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게 된다. 1790년엔 성직자 시민헌장이 만들어진다. 성직자는 국가소속, 교회도 국가소속,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다는 내용등 기존의 권위, 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천상의 권위였던 교회는 한순간 국가 종속 기관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분명 불만을 가진 성직자는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또한 길드제를 폐지한다고 선언을 한다. 길드제를 자본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방해요소 였고 비자유적이였다. 혁명을 주도했던 부르주아들은 자본주의를 이룩하려는 집단, 길드제를 폐지하여 경쟁력을 높이려고 하였다. 교회재산 몰수 또한 교회재산으로 경제력 회복과 부르주아들의 경제력 보호를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1791년 헌법에는 입헌 군주제를 명시하고 있다. 헌법에 따라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려고 했다. 곧 제한 군주제로 볼 수 있다. 왕은 더 이상 군대를 통제할 수 없었을 뿐더러 권력을 맘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또한 참정권에 대한 내용도 제시하였다. 구체제에서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던 3신분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3신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수동적 시민을 구분하여 적용시켰다. 혜택을 받는 능동적인 시민은 일정정도의 재산을 갖고 세금을 낼 수 있었던 부르주아 집단에만 해당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2단계 급진적 혁명혁명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강력한 군주가 있었던 절대왕정)는 왕을 공격하는 프랑스혁명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합병하여 프랑스를 공격하였고 패전을 한 혁명집단은 위기감을 느껴 1792년 6월 궁에 들어가 공격을하고 8월에 왕가 왕비를 끌어내 프랑스는 왕이 없다며 공화정을 선포를 한다. 혁명은 곧 급진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의회를 주장하는 페이양파는 세력이 약해졌고 공화파 지롱드는 왕은 살리자, 자코뱅(급진파)은 왕을 죽여라 라고 실전을 벌였고 투표하여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앙뜨와네뜨는 처형되고 만다.그리고 지롱드파와 자코뱅파의 대립으로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권력을 잡은 자코뱅은 방해가 되는 지롱드파 사람들을 숙청하고 Robespierre를 중심으로 하는 자코뱅파의 혁명은 더 급진적으로 흘러간다. 1년에 4만명 정도를 숙청하기 까지 이르는데 이 시기를 terror의 시대라고 하며 이윽고 공포정치가 전개되었다. 공포정치라고 해서 막연히 잔인한 것이 아닌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상필로트(긴바지를 입고 다니던 하층민)를 비롯한 하층민을 대변해주며 혁명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신해혁명과 손문을 보는 역사적 관점에 대한 고찰목차Ⅰ.서론Ⅴ. 신해혁명을 이해하는 관점ⅰ) 대륙의 관점ⅱ) 대만의 관점ⅲ) 외국학계의 관점Ⅱ. 신해혁명의 발발과 민국 초기의 정세ⅰ)발발배경ⅱ)민국 초기의 정세Ⅲ. 손문의 삼민주의와 민족주의Ⅳ. 손문의 역할과 한계Ⅵ결론Ⅰ서론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인 2011년. 중국과 대만에서는 이미 대대적인 기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신해혁명 주역의 후손들과 정부 각계 지도자 및 학자들을 모아 ‘신해혁명 100주년’ 회의를 열어 정통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학계에서 신해혁명의 이해를 두고 이렇게 열정적인 것은 아마도 청나라가 멸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 의 과정의 시작이 바로 신해혁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금 중국은 손문의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그동안은 모택동 사상과 공산당의 평가가 더 활발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로 일본의 많은 근현대중국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은 모택동 및 중국공산당으로 쏠렸고 손문연구는 비교적 소수의 연구자들의 의해 다루어졌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현대 중국의 시작은 신해혁명이 알렸고 그 중심에는 손문이 있었다.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제국주의의 간섭아래 처음으로 세계관에 대한 시점을 바꾼 것도 이때 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신해혁명은 서구 열강에 패배한 틀에 박힌 봉건에 대한 반감을 가진 혁명파의 도전이다. 그러나 여기서 혁명의 성격에 대한 관점도 다양하다. 부르주아혁명, 근대적 혁명, 전민혁명, 비혁명, 혹은 왕조혁명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홍콩 대만의 복귀라는 중요한 정치적인 요소에 관해서도 이에 대한 평가의 관심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신해혁명을 둘러싼 중국과 대만간의 경쟁은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에서 비롯된다. 그 정통성을 둘러싸고 대립해왔지만 이제는 대륙과 대만의 화합을 위해 혁명과 손문에 대한 서로간의 엇갈린 관점을 하겠다.Ⅴ신해혁명의 대한 관점ⅰ)중국 - “신해혁명은 중국에서 2천년 된 전제 군주제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파破’의 의미를, 또 새로운 민주공화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입立’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그러나 중국은 신해혁명이 자산계급, 즉 ‘부르주아의 민주혁명’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 했다. 즉 민족브르주아지의 이익을 대표한 브르주아혁명파는 강력한 지도권을 갖지 못하고 연약한 상태로 존재하여 브르주아 공화국의 달성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이라는 프롤레탈리아들이 지도하게 되었고 결국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혁명으로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는 손문을 비롯한 혁명파의 한계를 지적하고 중국인민의 반제·반봉건 투쟁이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더욱 깊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으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중국 본토에서도 현재 신해혁명의 위대함과 손문의 업적을 인정하고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절대적인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ⅱ)대만 - 대만에서도 손문의 적계로서의 중국국민당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신해혁명을 절대시하거나 손문을 국부로서 신성시 하는 경향이 강했다.대만의 학계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주장하는 '구(舊)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장옥법이 주장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 장옥법은 브르주아혁명론을 부정하고 있지만 신해혁명이 미국독립이나 프랑스혁명을 모범으로 삼았는 것,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는 신해혁명의 구성요소 였다는 것등은 인정ㅎ고 있어 혁명의 근대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대만에서는 손문, 동맹회, 국민당과 혁명파를 정통시하고 다른 분파나 반대파를 경시하거나 적대시 하는 경향이 있어 ‘손문 정통사관’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 같은 결함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정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ⅲ)외국 학계의 관점서론에서 언급했듯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본토와 마찬가지로 신해혁명을 브르주아 혁명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통’을 지키려는 세력에 대한 ‘근대화 세력’의 승리라기보다는 전통적인 “권력을 둘러싼 중앙과 지방의 경합이 극점에 달한”사건이라는 것이 코헨이 추상한 근년의 신해혁명사이다. 코헨은 신해혁명을 혁명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라고 보고 있다. 대륙이나 대만의 신해혁명의 혁명성 성격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과 달리 코헨은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립의 정도로 평가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Ⅱ신해혁명의 발발과 민국 초기의 정세ⅰ)발발배경신해혁명은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의 봉기를 계기로 다음 해인 1912년 1월 1일 혁명지도자 손문이 중화민구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고 2월 12일 청조의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새로운 공화정이 등장하게 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이다.아편전쟁과 청일 전쟁의 패배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자신이 우습게 알아왔던 상대에게 자괴감과 충격을 받았고 이는 중국인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주었다. 서구열강과 일본의 중국침략과 분할에 대해 청조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 하자 중국 지식인들은 자강운동으로 불리는 양무와 변법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주체가 소수 지식인들이였다는 점과 청조의 존속을 전제를 하였다는 성격적 한계 때문에 대중적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 중국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다른 시도로 손문의 흥중회(興中會)에 의해 전개 되었고 이것이 다름 아닌 신해혁명의 대두인 것이다. 즉 아편전쟁 이후 계속된 서구의 침략과 이로 말미암은 중국의 분할위기 속에서 지식인의 자각과 함께 대두된 운동이 양무와 변법이라면, 청일전쟁에서의 패배 위기 속에서 무기력한 청조에 대한 민중의 절망과 함께 새로운 정체를 모색하기 위한 대두된 움직임이 신해혁명인 것이다.ⅱ)민국 초기의 정세신해혁명은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세력의 활동과 청조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움직임이 결함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이것이 조직화 된 것이 ‘중국동맹회’인데 이 창립대회에서 손문은 총리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신해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여러 차례에 걸친 기에 이른다. 원세개의 독단이 드러나자 동맹회의 송교인은 민의를 바탕으로 다수 의석을 획득하여 여다 정당과의 협상을 거쳐 8월 25일 북경에서 ‘국민당’을 창당한다. 1912년 말부터 1913년 초 국회와 지방성의 선거에서 국민당은 커다란 승리를 거둔다. 그러자 원세개는 의회의 기능을 약화시켜야만 자신의 권력 강화가 가능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송교인을 암살한다. 이때부터 혁명파에 대한 무력탄압이 시작되었고 비용을 충당하기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으로부터의 차권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세개의 독재는 비난의 여론이 들끓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국민당 내부는 원세개에 대응 방안을 놓고 분열되었고 무력타도를 주장한 손문을 따르는 이열균이 강서에서 토원사령부를 설치하고 정덕전이 강소에서, 진형명이 광동에서 토원사령부를 설치하였고 이어 안휘, 호남, 사전, 등지가 원세개 정부로부터 독립을 선포함에 따라 중국은 제 2학명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중국의 국내 정세는 자신의 독재 권력을 확립하려는 원세개와 이를 저지하려는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간의 대립으로 점청될었고, 결국 원세개의 황제 등극과 몰락으로 귀결되었다.Ⅲ손문의 삼민주의와 민족주의손문은 어린 시절 태평천국운동에 가담했다 살아남은 이를 스승으로 모셨고 어린 시절 하와이로 건너가 서양을 체험한 것은 그에게 부강한 근대국가의 건설의 필요성에 확신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또 1884년부터 1885년 사이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벌어진 청불전쟁과 그 처리과정에서 보여 진 청나라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목격하고 이를 반드시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손문의 초기 민족주의 사상은 이민족 정권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의 민족관념은 청정부가 붕괴된 신해혁명 이후 새롭게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겪으면서 점차 변화하게 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는 1924년 자신의 경연 내용을 책으로 묶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탄압을 받고 손문 스스로 일본으로 망명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남북 군벌 간의 내전이 심해지자 서양열강들의 침탈은 더욱더 강해졌다.신해혁명을 준비할 당시 손문의 민족주의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외치며 만주족 정부를 타도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일견 종족주의적인 민족주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보다는 통일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중국의 활로는 개척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즉, 당면한 목표가 청조의 타도였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만주족과 한족의 대립을 부각시켰지만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소수민족을 포함한 한족 전체가 살아남는 것이었다. 따라서 5.4운동을 거치며 손문의 민족주의가 반제국주의라는 내용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삼민주의는 손문이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구성한 하나의 이론체계는 아니지만 선언적이며 선동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커다란 대안적 구상으로서 중국의 미래상에 대해 구체적인 기틀을 세우게 하였고 중국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적시한 만큼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이후 개혁, 혁명 운동가들에게도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Ⅳ손문의 역할과 한계1912년 1월 1일 손문이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게 된 것은 신해혁명이 1차적으로는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손문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의 능력은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을 건국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중화민국의 통치기반을 확립하는데 는 능력이 미치지 못해 원세개와의 타협을 불가피하게 하였으니 진정한 혁명의 성공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해혁명뿐 아닌 제 2혁명의 과정에서 손문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청조의 국권이 흔들리고 민생이 도탄에 직면하게 될 때 개화 지식인들은 청조의 존속을 전제로 한 양무와 변법을 추진하는데 그쳤으나, 손문은 처음부터 청조를 전복하고 공화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한 혁명을 제창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개혁파들과는 완연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점에서 신해혁명의 발단다.
호한사회 민족정책을 통해 바라본현 중국의 소수 민족문제와 민족정책의 방향Ⅰ서론Ⅱ 중국의 소수민족 실태Ⅲ중국이 시행한 소수민족정책의 과정ⅰ)민족융화 정책 시기(1949-1957)ⅱ)민족동화 정책 시기(1958-1976)ⅲ)민족융화 정책 시기(1977-1995)ⅳ)민족동화/융화 양면 정책 시기(1996-)Ⅲ. 호한사회에서의 민족정책 - 호한체제ⅰ)호한체제의 정의ⅱ)서진시대 소수민족 억압정책의 실패ⅲ) 전진의 민족융합 정책ⅳ)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ⅴ)북제의 실패한 민족정책과 북주의 호화정책Ⅳ결론Ⅰ.서론지난 2009년 중국의 서쪽 지역인 신장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들이 한족을 무차별 공격한 유혈폭동이 일어났다. 광동으로 일하러간 위구르 족 젊은이들이 한족에게 습격당해 숨졌다는 유언비어가 폭동의 원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은 티베트의 독립과 동북공정 등으로 인한 소수민족과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중국은 92%의 한족과 8%의 55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이러한 다민족 국가의 형태는 갑작스레 형성 된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서서히 발전되어온 결과이다. 지금은 물론 중원은 어느 순간부터 한 민족의 사는 땅이 아니었다. 곧 중국의 역사발전과정은 한족(漢族)과 소수민족간의 부단한 융합(融合)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동한 시대 이후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중원 및 주변 지역으로 이동, 정착하여 여러 민족이 뒤섞여 거주하게 되었다. 이때 내륙으로 이동한 북방 소수민족은 대체로 저강(?羌), 흉노(匈奴), 동호(東胡)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북방의 흉노족은 동한 말년부터 남흉노와 북흉노로 갈라졌는데 남흉노의 호한야선우는 한나라에 투항했다. 동한 조정에서는 병주(지금의 산서성 북부 및 섬서성 북부)를 남흉노 거주 지역으로 정하고 이곳에 정착한 5,000여 개 부락과 한족을 함께 살도록 하면서 부역을 면제해주는 우대 정책을 폈다. 이렇게 남흉노의 부락 수령은 제후 대접을 받았고 자손들은 그 자리를 세습, 상층부 인사들은 점차 한족 민족 언어문자정책, 소수민족 풍속습관 존중정책이었다. 신 중국은 국가 통제력을 강화할 연합작전을 구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정책 내용은 각 민족들은 그들만의 전통과 풍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용인 되었다.중국 정부는 어느 민족이건 대소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을 하며 1951년 중앙 인민정부 정무원(政務院)에서는 1949년에 제정된 임시헌법의 효력을 가진 [공동강령에 의거하여]‘소수민족과 관련된 멸시와 모욕적인 성격을 가진 호칭·지명·비명(碑名 )·편액·對聯에 대한 처리 지시’를 공포하였다. 195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족 자치 실시요강]과 [흩어져 거주하는 모든 소수민족 출신자가 민족평등의 권리를 누릴 것을 보장하는 결정을]공포하였다. 이렇듯 신 중국 건립 후 중국에서는 각 민족의 평등권 리를 명확하게 규정 민족평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또한 민족 지역자치를 시행, 국가의 통일된 지도하에서 소수민족의 집거지역을 기초로 지방자치정부를 설치하여 소수민족이 직접 그 민족 내부의 지방적 사무를 관리하도록 하게 했다. 민족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관건은 소수민족 간부를 적극 양성하는 것이므로 소수민족 출신의 지도자들을 신정부 정치지도자에 포함시키려는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0년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간부를 적극 양성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일찍이 시행방안을 공포하고 각 소수민족 자치구에 12개의 대학기관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그 결과 이전에 비해 소수민족 간부가 대폭 증가하였고 실제로 수년 동안 소수민족 간부는 매년 만 명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이어 낙후된 구제도를 폐지하고 민주개혁을 실행했다. 지리 교통 문화 등 각 방면에서 구중국의 소수민족 지역은 한족 지역보다 훨씬 더 낙후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의 사회제도는 여전히 노예사회, 심지어 원시, 반원시 사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계급적 사회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신 중국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을 위한 민주개혁을 적극 적이면서도 신중하게 실시하였다. 정부에서는 한족 지역의 개혁과는 다른 비교적 완화된 정치적인 변화로 인한 근거 없는 민족 융합에 대한 확신과 민족 모순의 특수성을 중요시 하지 않는 계급 투쟁론에 입각한 사실상의 강제 동화 정책 시기라고 할 수 있다.ⅲ)민족융화 정책 시기(1977-1995)문화 대혁명 시기가 지나고 동화정책은 다시 융화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 11기 대회를 통해 실용주의 노선의 덩샤오핑 체제가 확립되자, 중국사회는 시장경제 요소가 도입되고, 서방국가와의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이 속에서 소수민족정책에도 영향을 끼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1981년 중국공산당 창립 60주년을 맞이해서 중국당국은 사회주의 민족관계의 개선·발전 및 민족단결 강화를 강조한다.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따라 중국정부는 경제개발을 최우선의 정책목표로 삼으며 소수민족 지역에 대해서는 그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자치권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의 측면에서도 매우 온건한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에 소수민족 지역에서도 자유시장이 열리는 것을 묵인하였고, 대외무역 촉진을 위해 수공예품 수출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덩샤오핑은 중국의 회교 소수민족에게 메카 순례를 장려하고 라마사원과 문화대혁명 기간에 파괴된 다른 종교적 건축물의 재건도 허가하는 등 문화·교육 방면에서도 관대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소수민족에게는 1가구 1자녀 정책에 대한 예외를 적용을 핵심으로 하는 인구정책, 소수민족의 종교 등 문화에 대한 존중을 핵심으로 하는 종교정책, 소수민족 지역에 대한 각종 특혜 및 우대를 기본으로 하는 경제 정책 등으로 구체화 되었다. 덩샤오핑 실용주의 노선의 소수민족 정책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이 기존의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동화정책에서 각 민족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융합정책으로 전환함을 보여준다.ⅳ)민족동화/융화 양면 정책 시기(1996-)개혁개방 이후 실시되던 유화적인 민족융화정책은 1996년 소수민족 분리운동이 지하운동에서 반 합법 내지 공개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을 를 ‘한’으로 하고 한족 황제를 조상으로 모시며 민족화해정책을 애써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부하들은 오히려 한족 백성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박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 했다.그러나 부하들은 그런 유연의 주장과는 달리 무력으로 한족 백성을 죽이고 살해하는 등의 행위를 보였다. 유연이 죽고 아들 유총이 즉위했는데 유총은 한족의 지지를 얻는 정책을 버리고 민족압박정책을 취했다. 낙양을 점령한 병사들에게 방화하고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게 했으며, 남아 있는 서진 관리들을 모조리 참수하도록 했다. 유총은 호족과 한족을 나누어 다스렸다. 자신이 통치하는 병주의 경우 한족은 좌우사예가 총괄관리하고 흉노족과 기타소수민족은 흉노선우좌보와 흉노선우우보가 총괄 관리하도록 했다. 그 후 유요가 황제에 자리에 오르면서 민족압박정책을 강력하게 추진 한나라 황제를 더 이상 조상으로 모시지 않았다. 국호도 ‘조’로 고쳤으며 모든 관직 명칭은 흉노식으로 변경 그 자리를 소수민족이 맡게 했다. 한족은 피통치자로 전락했다.이러한 흉노족의 할거정권 조는 20년간 유지 되었는데 이후 국호가 조인 또 다른 소수민족 정권에 의해 멸망했다. 후조라 부르는 이 정권은 갈족의 석륵이 세운 것이다. 석륵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소수민족들의 축소판이었다. 그가 받은 고통은 서진 통치자들과 토호들이 소수민족에게 가했던 잔혹한 억압과 착취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러한 착취는 소수민족이 한족 통치계급과 나아가 한족 백성마저 극단적으로 적대시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반란을 일으킨 뒤 서진 관리들을 마구 죽이며 자신의 원한을 풀었다. 처음에 석륵은 유연을 따랐지만 재빨리 독립해 기주를 차지하고 국호를 ‘조’로 하였다. 석륵은 서진 관리들은 적대시했지만 미천한 출신의 한족 선비들은 임용해 우수한 전략을 내놓도록 했다. 그의 용인술은 한족을 완전히 배척한 유요보다는 이런 점에서 훌륭했다고 보여진다. 석륵은 한인 선비들에게 문서와 장부를 관리하게 하며 이렇게 석륵의 세력은 점차 강해져 결국 유요의 전조를 멸망시키고 북층들의 지지는 끌어내지 못했다. 또한 기타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에서 군사적 정복과 함께 회유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저족 자체가 타 소수민족에 비해 수적으로 결코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한족 지주계급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각 소수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고 무력을 통합 위협의 강도도 약해서 회유정책의 효과 역시 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견은 수가 비교적 많은 선비족 출신의 귀족을 장안으로 이주시켰고 , 이듬해 15만이 넘는 선비족 등 소수민족을 관중으로 이주시키고 몇 만의 저족을 관동으로 이주시켜 현지의 소수민족을 감시, 탄압하도록 했다. 이는 오히려 저족의 원래 근거지인 관중이 비는 결과를 가져왔고 관중의 선비족이 막상 들고 일어 났을 때 부견은 움직일 군대가 없어 강족 군대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강족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켜 전진 정권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민족융합정책은 전진 초기 성공적인 통일 정책으로 주목받았으나 정책 또한 한족에 치우친, 그것 또한 결정적인 지배계급과 손잡지 못하여 후반 동진을 공격하는 중 군사력이 무너지면서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를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야심에 차있던 소수민족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그러나 부견의 민족융합정책을 통해 북방 여러 민족의 융합 추세가 다시 일어났고 이는 전 중화민족의 발전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역사의 흐름에도 부합하는 일이다.ⅳ)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전진의 이러한 혼전 속에서 선비족 탁발부가 세력을 키워 북방에서 제일 강력한 정권이 되었다. 선비족 탁발부는 저족이나 강족 ,남으로 이주한 흉노족과 선비족 모용부보다 한화 정도가 낮았다. 또한 대다수의 탁발부 수령들은 한족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한족문화를 배척했다. 그러나 선비족의 탁발씨 왕조는 한족이 대다수인 중원을 통치하려면 한족문활ㄹ 수용하고 한족 왕조의 통치 방식을 따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한족 왕조의 통치 방식을 본뜨려면 한족의 권문세족을 임용하여 그들을 통치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