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이등박문), 1841.10.14~1909.10.26]1841년 - 10월 14일에 야마구치 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로 하야시 쥬조의 양자로 들어갔으나 후에 이토가의 양자로 들어갔다.1856년 - 요시다 쇼인의 쇼카숀슈쿠에서 수학하였다.1863년 -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영국 공관에 불을지른다. 이 해에 번의 후원을 받아 런던의 대학에 서 수학하였다.1864년 - 일본으로 돌아와 외세의 강대함을 내세워 외국 세력과 화해할 것을 종용하는 소위 말하는 동양도덕 서양예술의 차원의 의견을 피력했다. 죠슈한이 친바쿠후파로 변하자 다카스기 신 사쿠와 함께 죠슈한을 다시 반바쿠후 정권을 세우는 전투에 참가하였다.1870년 - 미국 파견 사절단에 부사의 신분으로 참여하여 미국에 갔다.1871년 -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1881년 - 오쿠마 시게노부를 정부에서 축출하였다.1882년 - 독일에서 약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헌법에 대해 연구하였다.1884년 - 후작에 임명되었다.1885년 -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내각이 설립되면서 12월 22일에 초대내각의 총리대신이 되었다.1887년 - 헌법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1888년 - 헌법 초안이 완료되었다.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1889년 - 11월에 전에 완성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이 발포되었다.1890년 - 양원제 국회가 설립되는데 기여하였다.1892년 - 8월 8일에 5번째 총리로 취임했다.1898년 - 1월 12일에 7번째 총리로 취임했다.1900년 - 10월 19일에 10번째 총리로 취임했다1903년 -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였다.1905년 - 11월 9일에 서울에 도착. 11월 15일에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 하였다. 12월에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이 되었다.1907년 - 공작에 임명되었다. 7월 24일에 정미 7조약을 이완용과 체결하였다.1909년 - 6월에 통감을 사임하였다. 10월 26일에 만주시찰과 러시아 재무대신과의 회담을 목적으로 도착한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11월 4일에 히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현대 일본 정치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메이지헌법(1889)의 초안 작성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하였다.메이지 유신의 지사이며 일본 최초의 총리대신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더불어 큰 국적으로 취급받고 있다.이토 히로부미는 그 당시 조선 합병에 회의적이었으며 조선을 자영토로 취급하기 보다는 경제적 식민지로 보고 이권을 착취할 생각이었기에 그의 죽음으로 조선합병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이토 히로부미의 평가는 일본에서의 공적과 한국에서의 만행을 알면 알수록 두 국가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중근이 지사냐, 테러리스트냐는 질문은 이미 많은 논쟁이 되고 있으나 개인적으론 당연히 지사라고 본다.
『남북한 통일국가의 성격에 관해』소속-동아시아 학번:20051945 성명:박진형수업-EU통합사(김동원 교수님) 제출일:2008/10/9그 동안 남북한은 분단 이후 서로 각자의 통일방안을 내놓고 선전 내지는 정당화에 경주해 왔다. 상대방이 받기 어려운 통일 방안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했다. 그러한 남북한이 2000년 6월 정상회담에서 처음으로 통일방안의 ‘접점’을 찾았다. 남과 북이 연합제와 연방제의 공통점을 찾는다고 합의한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멀리는 통일을 향한 출발점이고 현실적으로는 두 개의 국가적 실체를 상호 인정한다는 합의를 뜻한다.이런 맥락에서 우선 그 동안 남북한 통일방안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정리한 후, 이 통일방안에 대한 각기 다른 의견과 주장과 논리를 분석한 후, 이를 토대로 앞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개요1.남북한 통일방안의 전개 과정(1)남한 통일방안의 역사적 전개 과정(2)북한 통일방안의 역사적 전개 과정2.결론내용(1)남한 통일방안의 역사적 전개 과정남한은 분단 이후 1960년대까지는 남북한간의 적대적 관계를 전제로 유엔에 의한 통일의 실현이라는데 정책적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남북한간의 경쟁적 관계를 전제로 민족자주적 통일의 실현을 위해 주력해 왔다. 또한 1980년대부터는 민족화합의 차원에서 남북한간의 평화공존과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통한 평화적 통일의 실현에 정책적 노력을 경주해 왔다.1990년대와서는 정치적,국가적 통일에 앞서 민족공동체의 우선 건설 즉, 민족통일의 우선 실현이 현실적이라는 인식 아래 남북한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한 점진적 단계적 통일의 실현에 보다 많은 노력을 경주에 왔다.(2)북한 통일방안의 역사적 전개 과정북한의 통일방안은 북한정권의 역사적 형성, 주체사상, 기타 북한의 여러 정책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왔다. 또한 그 이면에는 외적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와, 내적으로는 분단체제의 형성 이후 남북이 걸어왔던 각기 다른 역사적 경험이 내재되어 있다.북한의 통일방안은 북한의 대남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수립되어 왔는데, 대남정책에는 전 한반도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대남혁명이 가지는 성격과 이를 위한 전략과 방도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이나 ‘민주기지론’, ‘남조선 혁명론’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정책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전략적 의미가 퇴색해 갔다. 물론 현재도 ‘남조선 혁명’을 포기했다는 공식적인 선언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남북한 역량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남한사회 내에서 북한의 실상이 광범위하게 알려지게 됨에 따라 북한의 대남전략이 갖는 파급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2.결론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점은 첫째, 당장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을 기초로 점진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추진한다는 점. 둘째, 남과 북은 현재 상태에서 상대방을 정치실체로 인정하고 일정 범위 내에서 연합적인 기구를 통해 필요한 사항을 상호 조절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점. 셋째, 제 분야의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 동질성 회복을 추진하는 것을 상호 수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광수에 대하여?이광수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 가운데 가장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른 사상이나 인식의 변화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즉, 이광수의 친일행로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된 사건과 연관된 작품들을 인식변화라는 큰 틀에서 살펴볼 것이다.들어가기에 앞서-이광수라는 한 문인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어 간 일생사가, 우리 역사의 수치스러운 부분과 어떻게 맞닿아 있고 반응을 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를 통하여 한 시대의 지식을 대표하는 문인이 어떤 자리에 서야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인가를, 그리고 어떻게 처신해야 지식인으로서, 또한 문인으로서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계속하여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이광수하면 무정’ 이러한 생각을 당연하게 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이광수라는 이름은 우리의 문예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며 『무정』이라는 최초의 현대소설의 작가라는 이름은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러나 빛이 되는 작품들에 반해 그의 친일행적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명성에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지금부터 이광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참고-연보1892 평북 정주 출생1902 부모 별세1903 동학에 입도, 둘째누이 애란 요사(夭死)1905 일진회 유학생에 선발되어 도일1910 조부 별세, 백혜순과 결혼1917 『매일신보』연재「무정」완결1918 백혜순과 이혼, 허영숙과 베이징 애정 도피, 도일하여 조선청년독립단 가담1919 「조선청년독립단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로 탈출,『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 취임1920 흥사단 입단1921 허영숙과 재혼1922 『개벽』에 「민족개조론」발표1926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취임, 수양동우회 발족1932 『동아일보』에 「흙」연재1933 조선일보사 부사장 취임1937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종로서에 유치1939 조선문인협회(친일 문학 단체) 회장 역임1940 창씨개명 (가야마 미츠오 香山光郞)1950 한국전쟁중 납북, 사망⑴출생(가계)춘원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길산면 광동리 돌고지 마을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춘원이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마흔두 살, 어머니가 스물두 살 때이며, 아버지는 ‘이종원’(李鍾元),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그의 아버지는 무능하고 허황된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춘원에게 끼친 도덕적 영향은 별로 없다. 그의 어머니 김씨는 퍽 어렸고 또 변변치 못하여 장손 며느리 이면서도 제수하나 제대로 차릴 줄 몰랐으며, 그래서 아들에게 큰 감화나 영향을 주지 못한 느낌이 짙다. 후에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 생각하여도 동정이 간다”고 적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보아 춘원에게 어머니상은 동정의 대상에 멈추어 그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춘원의 아버지상은 어머니상보다는 수등 위라 할지라도 한번도 자랑스럽거나 남의 앞에서 떳떳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동학혁명?청일전쟁?갑오경장 등의 사건이 그가 두 세살 때에 일어났다. 그로 인해 우리나라는 외세에 눌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웠던 때였다. 이 어려운 시대에 그는 가난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하지만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
『정체성이 무엇인가?』처음으로 도회지에 나온 시골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할 것이다. 처음 보는 자동차 떼와 커다란 건물들, 많은 사람들과 넓고 긴 도로, 모든 것이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도회지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 소년은 시골에서의 자신과 도회지에서의 자신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시골에서 미덕이었던 여유는 도회지에서는 게으름이고, 시골에서 공부 잘하던 모범생이 도회지에서는 공부 못하는 천덕꾸러기다. 자신을 어떤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 도회지에 온 시골 소년은 이런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가네시로 가즈키'라는 작가가 쓴 소설를 예로 들어보자. 예전에 라는 영화가 나와서 예고편 하는 것을 몇 번 보긴 했었는데, 소설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설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빌려서 보았다. 한국의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재일 조선인으로 ‘조총련’에 소속되었다가 ‘민단’으로 소속을 바꾼 프로복서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동포3세 고등학생이 일본내의 민족차별을 극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가는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인 스기하라는 조총련계 소속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덕분에 선택의 여지없이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민족학교에서 초,중학교를 다니며 뭐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환경속에서 뒤틀리며 불량 소년으로 자라날 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하와이에 가기 위해 한국국적으로 ‘국적’을 옮겨도 별 볼일없이 생각하는 그런 소년이다. 넓은 세계를 보겠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아가며 일본계 고등학교로 진학까지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일본인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전 학생운동의 투사였으며, 일류 기업의 회사원으로서 재즈를 좋아하는 지식인임에도 한국인의 ‘피가 더럽다’는 황국일본의 순혈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 조총련계와 한국계 사이의 깊은 골은 말 안해도 충분히 알 것이다. 이렇게 전일본인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민족차별의 문제를 작가는에서 ‘민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해결을 모색한다.이 소설은 기존 ‘재일문학'이 그러했듯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체성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우울하거나 심각하지 않고 명랑하고 유머러스하게.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코리언 재패니즈(한국계 일본인)'라고 소개하는 등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소개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있다.자아정체감은 자신에 관해서 통합된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개념이다. 자아정체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자기의 성격, 취향, 가치관, 능력, 관심, 인간관, 세계관, 미래관 등에 대해 비교적 명료한 이해를 하고 있으며, 그런 이해가 지속성과 통합성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이상과 행동 및 사회적 역할을 통합하는 자아의 기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 정신 상태가 중요하며 그것만이 정체성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우리가 겪고 있는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의 난제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한 채 정체성 문제를 논해온 것이 사실이다. 정체성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로 여긴 나머지 정체성이란 용어를 언급하면서 별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정체성의 문제는 전통적으로 형이상학의 문제라고 했다. 어떤 사물이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그 사물로 인식되거나 존재할 수 있다면, 즉 우리가 변화된 사물을 변화를 겪기 전의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것이 전통적인 정체성의 문제이다. 변화를 겪으면서도 동일성이 유지된다면 그 동일성을 우리가 어떻게 확보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한국인이라는 동일한 명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갑’씨는 기독교도이고 양복을 주로 입지만, ‘을’씨는 회교도이고 생활 한복을 주로 입는다. 이 둘 모두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아니 무엇으로 그들이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가? 아주 단순히 답하자면 여권을 보면 된다. 즉 여권에 적힌 국적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여권의 국적난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다면, 그 여권의 주인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답인가? 이 답은 다소 공허하다. 프랑스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한 방송인 ‘이다도시’의 여권 국적난에는 한국이 적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다도시’의 정신까지 한국적인가?
<< 윤동주 평전 >> 을 읽고...송우혜| 푸른역사 윤동주 [尹東柱, 1917.12.30 ~ 1945.2.16] <내용요약>윤동주는 ‘윤영석’(1895~1962)과 ‘김용’(1891~1947)사이에서 1917년 12월 30일에 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태어난 사람으로 당시 주변사정은 여러모로 처절했고 다사다난했다. 그가 태어난 명동마을은 큰 규모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를 갖고 있는 기독교촌으로 명동과 명동소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는데 그가 28년 생애에서 꼭 절반인 14년을 명동에서 살았다는 것 외에도, 그의 인격 및 시적 감수성의 골격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명동소학교 4학년 때, 그는 벌써 소년소녀들을 위한 월간잡지를 구독했으며, 5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 월간잡지를 몇 호 발간하였다....:: 그의 삶을 보고 느낀점 ::우리 문학사에서 윤동주와 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다.그는 깔끔하고 결백(潔白)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搖動)하지 않는 태산(泰山)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氣像)을 지니고 있었다.그는 독서의 범위도 넓었는데 문학, 역사, 철학, 이런 책들을 그는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정독을 했다. 어떤 때에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을 새김질을 하고 나서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공책에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를 함부로 써서 원고지 위에서 고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즉,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주일, 몇 달 동안을 마음 속에서 고민하다가, 한번 종이 위에 옮기면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마음 속에서 시를 다듬었기 때문에, 한 마디의 시어(詩語) 때문에도 몇 달을 고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