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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당쟁사 (1권) 요약,비평 평가A+최고예요
    한국근대사 Report당쟁, 일제의 논리를 넘어서이성무著,「조선시대 당쟁사」1권을 중심으로 - 사림정치기1. 당쟁에 관한 논리2. 문치주의 소산3. 사림의 도학정치4. 시대구분과 사림정치5. 사림정치의 권력구조6. 사림정치기의 당쟁사6.1. 당쟁의 서막 - 선조대와 광해군조6.2. 명분론과 현실론 - 인조, 효종대6.3. 이론논쟁을 통한 권력투쟁 - 현종대7. 당쟁의 허와 실지도교수 :제 출 일 :학 번 :이 름 :1. 당쟁에 관한 논리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을까? 물론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당쟁으로 인하여 나라가 겪어야 했던 부정적 측면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쟁’ 혹은 ‘당파싸움’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 붕당정치의 역사를 운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 안에서 권력을 둘러싼 정치집단의 정쟁이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면 현재의 시각에서 내린 판단일 수 있다. 그 시대의 시각에서, 그리고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난 그 이유에 대한 접근 또한 함께 이루어져야 온전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성무의 「조선시대 당쟁사」는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에게 만연한 조선시대에 대한 편향적 관점에서 탈피하게 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논리를 따라 조선시대 당쟁에 관한 시사점들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일제 강점기에 일본 어용 학자들은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편이 낫다는 논리를 끌어내기 위해 당쟁을 이용했다. 시데하라 히로시는 당쟁의 역사를 사화(士禍)시대까지 끌어올리고, 당쟁의 원인은 개인간의 감정문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정쟁의 양상을 추악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또한 호소이 하지메, 미지나 쇼에이 등은 당쟁은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 때문에 일어난 것인 만큼,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병폐라고 몰아붙였다. 이러한 민족성론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할 목적으로 이양상을 보인다. 우리 민족이 주변 강대국들의 간섭 속에서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주의, 문치주의 덕분이었다.이것의 기원은 우리나라가 중국화의 길을 걸으면서부터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게 되자, 무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복 왕조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당)이 이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세계제국으로서 중화중심의 세계관을 전파한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관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문치주의 정치가 시행된다. 문치주의는 황제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수반한다. 국왕에게 집중된 권한을 국왕 혼자만의 힘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권한을 신료들에게 위임해 통치하는 방법을 썼다. 정치권력이 일단 신료들에게 배분된 이상 권력을 둘러싼 국왕과 신료 세력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국왕은 혈통에 의해 계승되기 때문에 계승자의 능력에 따라 왕권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신료들은 시험을 거쳐 능력 있는 인재 위주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에 신료들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군과 신료의 충성관계에서 출발한 중앙집권적 문치주의의 특성상 신료들간에 붕당을 지어 당쟁을 일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런 특징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로 사림의 도학정치가 실시됨에 따라 국면이 달라지게 되었다. 통치자 그룹인 관료가 되기 위해 도덕적 수양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관념이 퍼짐에 따라, 젊은 신료들은 이를 근거로 노 재상들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했고, 나아가 국왕에게 군림해 왕권을 제약하기에 이르렀다. 왕권이 제약되고 신권이 강화되자 금기로 되어있던 붕당이 조성되고 붕당 사이에 당쟁이 치열해지게 되었다.3. 사림의 도학정치사림의 바탕이 되는 선비의 정치참여는 중국 춘추시대까지 소급된다. 춘추시대 공자는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주례’로 복귀할 것을 부르짖었다樂)에 기초한 예치주의(禮治主義)가 실현되어야 했다. 이른바 정명사상(正名思想)이다. 공자와 맹자의 유교적 실천윤리는 한나라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확립된 이래 당.송에 이르러 형이상학적 철학체계를 가미해 더욱 발달했다.(주자학) 주자학은 12세기 고려에 전래된 후 조선 왕조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더욱 심화되면서 사림정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조선시대의 당쟁이란 이러한 사림정치의 산물이고, 사림정치는 유교적 문치주의의 산물인 것이었다.4. 시대구분과 사림정치이성무는 조선의 정치사를 집권한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사대부정치기’, ‘훈신정치기’, ‘권신정치기’, ‘사림정치기’, ‘탕평정치기’, ‘외척세도정치기’로 구분한다. 사대부정치기는 여말선초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를 말하며, 훈신정치기란 사대부 독주의 정국이 전개되던 때에 수양대군(세조)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공신세력, 즉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한 시기를 일컫는다(세조대- 중종대). 권신정치기는 공신세력의 시대가 가고 사림파의 과도한 개혁주장에 염증을 느낀 국왕이 등을 돌림으로써 정권이 짧은 기간 외척 권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시기이다(중종말기-명종). 이후 선조조에 이르러 권신들이 타도되고 사림들에 의한 정치가 실시되었는데, 대적할 세력을 잃은 사림들은 자기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 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이때가 본격적인 당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사림정치기이다.(선조-경종) 영.정조대에 이르러 전랑권, 언론권이 혁파되고 탕평정치로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외척 세도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가 펼쳐지는데 이것을 탕평정치기라한다. 마지막으로 탕평기에 성장한 외척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외척세도정치기이다.언급한 바처럼 본격적인 당쟁의 시대는 사림정치기이다. 사림이란 세조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사들을 대신해 불러들인 것을 시작으로, 예종과 성종 역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선비집단이다. 정만조는 이들 간(사헌부와 사간원), 옥당(홍문관), 전랑은 모두 청직이었다. 그러나 전랑은 옥당보다 청현했고, 옥당은 대간보다 청현했다. 따라서 옥당은 대간으로부터 선발되었고, 전랑은 옥당으로부터 선발되었다. 때문에 대간의 언론은 옥당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옥당의 언론은 전랑의 뜻을 참작해야만 했다. 또한 전랑은 자기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과 대간, 옥당 등의 엘리트 관직을 추천할 수 있는 통청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하관의 통청은 판서가 전랑과 함께 가부를 결정했다. 따라서 전랑, 특히 문관인사와 관련한 이조전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조전랑이 되기 위해서는 전임 전랑의 추천을 받아야만 했고 3사, 특히 옥당 관원으로서 명성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라야 했다. 이러한 전랑 자리를 둘러싼 당쟁이 심해지자 1714년에 전랑권을 혁파하고, 옥당 관원들을 차례로 전랑이 되게 했으며 대간의 관원도 전랑이 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전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뇌물이 성행해 전랑권을 일시 부활시켰다(정조 원년). 그러다 다시 1789(정조13년)년에 완전히 혁파되었다. 전랑권을 둘러싼 이러한 분쟁의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기세력의 확대를 꾀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확대하여 본다면 인사권과 함께 언론의 장악을 위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간과 옥당관원은 전랑이 추천했기 때문에 대간과 옥당의 언론은 전랑의 뜻에 따라 나오게 되어 모두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일치했다. 따라서 언론 3사를 통해 나오는 이른바 공론은 모두 전랑의 지휘를 받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정치, 특히 사림정치에서 여론(공론) 형성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삼사와 특히 이조전랑직은 사림정치를 뒤에서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6. 사림정치기의 당쟁사6.1. 당쟁의 서막 - 선조대와 광해군선조조에 이르러 권신들이 타도되고 사림들에 의한 정치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대적할 세력을 잃은 사림들은 자기 분열하여 붕당이 생기고 붕당간에 당쟁이 치열해졌다. 당쟁의이, 김효원 등 후배 사림들은 스스로를 군자라 하고 선배 사림을 소인이라 하여 공격했다. 양자의 충돌은 1575(선조 8)년에 일어났는데,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데서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것이다. 여기서 동인은 정여립 옥사를 과도하게 다루어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철과 서인들의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 했다. 그리고 남인이었던 유성룡이 왜란 대 화의론에 찬동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었는데, 대체로 광해군조에는 대북이 우세했다. 대북정권은 적자가 아니라는 광해군의 약점을 의식해 형인 임해군과 배다른 어린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였고,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일련의 사건들이 서인의 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유발시켰으며 광해군은 쫓겨나고 따라서 대북정권도 무너지게 되었다. 결국 당쟁은 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도록 하고, 정권까지도 붕괴시켰던 것이다.6.2. 명분론과 현실론 - 인조, 효종대인조반정 이후 북인은 역당으로 지목되어 철저히 붕괴되었고, 상호 비판과 견제의 논리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으며 공존의 원리는 가식에 불과했다. 인조조의 서인정권은 비상 시국에 인심을 수습하기 위해 남인을 관제 야당으로 불러들였다. 대북정권이 독주하다가 스스로 분열하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남인 뿐 아니라 소북 세력도 끌어들였다. 서인 중에서 공신 출신의 공서와 사림 출신 청서의 대립이 더 기본적인 대립 구도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이 되고 또한 사림의 종장인 산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공신들은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도 사림의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공신과 사림의 주장은 같을 수가 없었다. 병자호란 때 공신들은 후금과의 화의를 주장했지만, 사림들은 척화를 주장했다. 같은 서.
    인문/어학| 2010.05.05| 6페이지| 2,000원| 조회(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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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대 유교의 국교화
    [동양고대사 발제문]漢代 유가사상의 통치이념화1. 머리말2. 시기별 통치이념화 특징2.1. 무제(武帝) 시대2.2. 원제(元帝) 시대2.3. 왕망(王莽)의 新 정권2.4. 후한(後漢) 시대3. 유가사상의 통치이념화 목적3.1. 새 왕조의 대안 이념 및 황제권의 강화3.2. 지방민의 지배 도구4. 맺는 말1. 머리말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방향지우는 요인은 다양하다. 한 사회의 법과 제도, 관습과 문화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외적으로 인간을 규정해 간다면 그 근저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그 사회의 사상적 기반은 사회를 형성하고 결속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 한 것이다.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전?후 4백여 년에 걸쳐 존속했던 통일제국인 漢은 이후 2천여 년간 계속 된 중국문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데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현재 중국을 의미하는 명칭으로서 漢子, 漢民族, 漢文化 등 漢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상 한대에 와서 중국문화의 터전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중국이라는 나라를 태동시킨 한나라의 사상에 대한 탐구는 단순히 2천년 전의 한을 아는 것뿐 아니라, 중국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가사상은 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이자 백성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정치와 사상, 문화, 백성들의 생활, 그리고 동양문화의 성격 형성에 큰 기여를 한 사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과정으로 인해 유가가 한대에 통치이념으로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한나라가 강성했던 통일제국이자 중국문화의 터전을 놓은 나라로서 역사적으로 어떠한 중요성을 갖는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2. 시기별 통치이념화 특징2.1. 무제(武帝) 시대한 무제는 유학자 동중서의 제언에 따라 유학을 관학화했다. 동중서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을 익혀 경제(景帝) 때 박사가 된 학자였다. 그의 사상은 신비적인 정치철학으로, 특히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운용한 그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은 황제를 정치 뿐 아니라 윤리, 종교 등의 중심에 두는 사상이어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을 노린 무제에게는 아주 적합한 사상이었다. 동중서는 유교연구를 국가차원에서 실시할 것을 상주하여 재가를 받아, 유교경전인 오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오경박사관(五經博士官)을 설치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태학을 설치하고 50명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1년간 오경박사로부터 경술(經術)을 배우도록 하였다. 제자들 중 성적이 우수한 자는 낭관(郎官))으로 발탁되었다. 또한, 지방의 군국(郡國)에서 유교의 덕목인 효행이나 청렴한 행위를 실천한 사람을 한 명씩 천거시켜 선발을 거쳐 낭관에 임명하는 관리등용법인 효렴제(孝廉制)를 개설했다.이러한 유학의 국학화(國學化)에 따라, 학자와 관료가 일치하는 중국적 관료주의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으로 아직 유가가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무제가 표면적으로 유교를 내세우긴 했지만, 유교의 관학화가 정착된 것은 선제와 원제(元帝)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무제가 유가사상을 국학으로 채택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법가정치를 시행하여 외유내법(外儒內法)의 한제국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이는 실제적으로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덕치(德治)와 이상론을 표방하는 유가로는 부족했기 때문이다.2.2. 원제(元帝) 시대원제시대에 나타난 변화는 유가적 관료가 다수 관계에 진출하면서 정책면에서도 그들의 의견이 크게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원제시대에 등용된 유가적 관료들은 민생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황실경비를 삭감하고, 10만에 이르는 관노비를 해방하여 북변 수비군대에 충원하며, 돈을 납부하면 죄를 면제해 주는 속죄법(贖罪法)을 폐지하여 부자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막대한 경비를 소비하고, 유가의 체제에 어긋나는 군국에 설치되었던 황제묘가 폐지되고 황제묘제가 정비되었다.이러한 의례 문제는 원제의 다음인 성제(成帝)시대까지 계속 논의되었으며 더욱이 하늘의 신인 상제(上帝)와 토지의 신인 후토(后土)를 제사하는 제도 등은 애제(哀帝) 때 비로소 확정될 정도로 논의가 분분하였다. 한편 이러한 논의의 근거가 되는 유교경전에 대한 정리가 진행되어 고전의 수집과 교정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원제에서 평제(平帝)의 시대를 거쳐가면서 유교경전을 정리하고 의례를 개혁하면서 유가의 정치적 이념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하였다.2.3. 왕망(王莽)의 新 정권왕망은 당시 유행하던 신비적 유학을 배경으로 한 예언인 참위설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한 끝에 결국 천하를 찬탈해 신을 건국한다. 유교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왕망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주공이 지었다는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유교적 이상국가의 건립에 나섰다.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왕전제(王田制)와 주대의 정전법을 모델로 한 토지제도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토지 소유화가 진행되고 있던 호족과 관료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한다. 왕망의 개혁은 전국시대 이후 이상화된 유가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탁고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시대역행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혼란을 초래했다. 한편 유학의 중화의식을 그대로 대외관계에 적용해 주변의 이민족을 경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이민족 군장을 모두 왕에서 候로 격하시키는 정책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한 무제 이래 겨우 안정되었던 주변 제국의 이반을 초래하여 흉노는 다시 한제국을 침략했고 북변의 긴장상태가 결국 왕망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2.4. 후한(後漢)시대후한은 왕망정권을 위협했던 호족과의 연합정권적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후한은 국호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전한의 모든 제도와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토지소유 등의 문제는 전한 말과 마찬가지로 심각했지만 유교만큼은 호족의 지배이념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후한시대에는 유교가 정치와 사회의 본령을 이루게 되고, 유교 가운데 예교주의(禮敎主義)가 발달하게 된다. 낙양에 국립대학인 태학을 설립하여 유학생을 양성하고 이들을 효렴과 등을 통해 관리로 발탁했다. 효행(孝行)?염결(廉潔)이라는 유가적 덕목이 강조된 과가 가장 명예롭게 여겨지게 된 것은 광무제(光武帝)의 의향에 의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중앙과 지방, 정부와 민간은 무력이나 법률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덕의 힘에 의하여 서로 내면적으로 결합해 갔던 것이다. 즉 유교이념이 사회 전체에 확산되어 예교주의 사회가 되어 갔던 것이다.3. 유가 사상의 통치이념화 목적3.1. 새 왕조의 대안 이념 및 황제권의 강화왕조가 바뀌게 되면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지배할 만한 통일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한은 진이 행하였던 폭압적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그 유산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왕조 교체의 당위성을 진의 가혹한 법치, 엄형주의 통치의 종식에서 찾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도가의 무위정치를 기본으로 한 소극적 정치를 시행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농업 생산력과 경제가 부흥되면서 유가의 정치이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통일된 천하를 경영하는 데에는 부적절했다는 것이 한초(漢初) 유가 사상가들의 견해였던 것이다. 따라서 도가 이외에 한이 내세울 수 있는 사상은 법가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유가밖에는 없었다.한편 왕조의 집권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덕치주의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법에 의한 지배가 필수적이었다. 이는 이념과 현실의 문제이지만, 동중서가 제시한 춘추공양학은 법치주의의 이론적 무기로 변용될 수 있었다. 즉 유학의 이름을 내걸고 법치의 수행이 가능했던 것이며 이로써 황제권의 강화 또한 꾀할 수 있었다.이러한 황제권의 강화의 이론적 뒷받침을 유가에서 찾을 수 있는데,『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보면 일통설(一統說)이 있다. 이것은 덕치주의에 의한 세계국가의 이상을 말하는데, 여기에 왕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중시한다는 새로운 해석을 더하여, 강대한 군주권이 덕치국가를 위해 행사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군주권은 천명에 의하여 권위가 부여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군주권은 천명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 된다. 그래서 한은 유가를 통해 한 왕조의 대안적 이념과 황제권의 강화라는 두 가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어학| 2010.05.05| 4페이지| 2,000원| 조회(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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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해혁명의 혁명성
    辛亥革命의 革命性에 關한 小考1. 혁명의 요건2. 혁명의 경과2.1. 혁명의 배경2.2. 신해년의 사건들2.3. 혁명과 반혁명3. 혁명에 대한 두 가지 관점3.1. 혁명의 주체3.2. 성공여부4. 변화와 미래를 위한 혁명1. 혁명의 요건신해혁명(辛亥革命)은 1911년에 일어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함으로써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끝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여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진 사건을 가리킨다.) 그런데 신해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신해혁명의 혁명적 성격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로서 신해혁명에 의한 청조의 타도와 공화제 정부의 수립이 과연 사회구조의 변화에 혁명성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의 변혁을 가져왔는가 라는데 초점이 놓여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해혁명은 혁명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부정적 시각이 존재한다.) 이른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라 불리는 근대 중국사회의 구조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해혁명은 그 성공보다는 실패의 측면이 강조되면서 ‘실패’하거나 ‘불철저’한 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역사 안에서의 혁명을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사회나 정치, 경제, 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을 가리킨다. 신해혁명 역시 그러한 혁명의 범주에 속하나 언급한 바와 같이 혁명적 성격 그 자체에 대한 논란과 혁명으로서의 독특한 점들이 상당 부분 발견된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신해혁명이 이러한 일반적인 혁명적 요소를 얼마나 충족시키고 있는지 살펴보고 신해혁명이 가지고 있는 혁명으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신해혁명이 혁명으로서의 가치와 중국역사 내에서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2. 혁명의 경과2.1. 혁명의 배경중국의 근대사 안에서 신해혁명의 배경을 언급하자면 그동안 축적된 많은 것을 언급하고도 모자라겠지만, 우선 비교적 신해혁명과 가까이 발발하였던 의화단 사건을 들 수를 회장으로 하는 절강성의 광복회(光復會), 황흥(黃興)을 회장으로 하는 호남성의 화흥회(華興會) 등의 민족주의적 결사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정부의 탄압을 받아 지도자 대부분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 모두는 일본에서 접촉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두 번째 유럽망명에서 돌아와 일본에 들른 손문과 함께 1905년 구제달로(驅除?虜)), 회복중화(恢復中華), 창립민국(創立民國), 평균지권(平均地權)을 행동강령으로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공통의 이론적 기초로 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창설된다. 이것은 혁명을 지향하는 전국적 운동의 통일적 중추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동맹회 성립 이래 화남, 화중 각지에서 회당(會黨)과 신군(新軍)에 작용하여 몇 차례나 거병하였다. 1907년에는 광동, 광서, 운남에서 여섯 번이나 무장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였고 1911년 4월 손문과 황흥의 지도하에 화교와 일본유학생을 중심으로, 광주에서 동맹회성립 이래 최대 규모의 봉기를 감행하였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만다.(황화강기의, 黃花崗起義)) 일련의 무장봉기 실패는 그때까지의 혁명 지도방침에 대한 대립을 표면화시키고 분열을 격화시켰다. 동맹회가 몇 개의 분파로 나뉘어짐에 따라 혁명역량이 분산되어 통일적인 운동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동맹회는 사실상 혁명을 지도할 만한 주체적 조건을 상실하게 되었다.)2.2. 신해년의 사건들러일전쟁 전후 중국동맹회의 성립으로 혁명적 기운의 증대는 청왕조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청조정부는 혁명세력과 격심한 적대관계에 있는 개량주의자들의 입헌군주제에 대한 요구에 응함으로써 그들을 체제쪽으로 끌어들여 혁명세력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입헌제 채용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일련의 조치들을 거쳐 1908년 9월에는 장래 반포될 헌법의 기본방침을 정한 헌법대강(憲法大綱)이 공포된다. 이것은 일본 천황보다도 훨씬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명시하고 있었고 국민의 권리는 축소되어 있었다. 더욱이대표로 하여 상해에서 교섭 중에 손문이 돌아와 각 성 대표에 의해 임시정부 대총통에 선임되었고 1912년 1월 1일을 중화민국 원년으로 정하였다.)2.3. 혁명과 반혁명손문의 혁명정부 선포로 그 기초가 확실해진 것은 아니었다. 손문의 역할은 당신 진행중인 혁명파측과 청조측(원세개측)의 남북교섭을 해결하는 것이었고 임시정부는 문자 그대로 장래의 정식정부가 성립하기까지의 임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1월 2일 손문은 원세개(袁世凱, 1859-1916)에게 전보를 쳐서 만약 원세개가 평화해결을 원한다면 손문은 대총통을 양위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했다.) 남북화의는 이미 혁명정부의 기정방침으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청왕조를 단숨에 타도해버릴 만한 역량이 혁명세력 측에 없었고 원세개의 대총통취임에 거의 저항감을 갖지 않았던 점, 내전의 장기화는 열강의 간섭을 유발한다는 견해, 재정압박 등이 요인이었다. 단지 손문이 할 수 있던 것은 원세개가 대총통에 취임하기까지 한정된 시간에 이제 탄생한 중화민국에 어떠한 민주적 방향성을 부여하여 원세개를 그 틀 안에 넣어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한 주춧돌이 3월 11일에 공포된 중화민국임시약법(中華民國臨時約法)이었으며 서양의 근대 헌법을 모방하여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적인 헌법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원세개는 청조권력을 장악하고 청제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2월 12일 선통제 부의(溥儀)에 의한 퇴위가 발표되었고 원세개가 임시공화정부의 조직과 중화민국 임의 통일교섭의 전권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3월 10일 북경에서 대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는 혁명세력들간에 세력화가 난립한 가운데서 참의원,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이끈 국민당의 송교인(宋敎仁, 1882-1913)을 암살하고 북경에서 조곤(曹?)이 지휘하는 제3사령부의 병변(兵變), 이어서 천진, 보정, 통현에서 계속 발생한 병변을 구실로 손문이 내건 조건)을 무시하고 북경에서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손문에게서 원세개로 권력이 이동한 이후 일종의 전환점을 갖게 되었휘파(安徽派)와 풍국장(豊國璋)이 장악한 직예파(直隸派)로 나뉘었고, 전국 각지에 중소 군벌이 할거하여 각각 열강들과 연결하여 서로 대립항쟁을 계속하였으며 북경정부는 명목상 중앙정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 군벌할거의 상황은 1928년의 국민정부수립까지 이어지게 된다.)3. 혁명에 대한 두 가지 관점3.1. 혁명의 주체혁명을 계획하고 주도한 세력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주도세력이 지배층이나 정치세력인 위로부터의 개혁인지, 그 반대로 시민과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냐에 따라 그 혁명의 내용과 성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신해혁명은 청조의 붕괴를 이끌어낸 정치적 성격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혁명이 발발한 시대인 근대라는 시기적 성격과 결부시켜 과연 신해혁명이 그러한 근대적 혁명에 부합하는가를 질문해 볼 수 있다. 신해혁명은 이른바 시민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근대적 혁명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부합하는가 라는 질문은 신해혁명의 성격을 진단하는데 중요한 질문이다.청 왕조가 이른바 ‘신정’(神政)과 입헌제의 준비에 착수하고 있던 시기에 왕조의 토대는 무너져가고 있었다. 단적으로 민중의 생활의 피폐이며, 각지에서 빈발하는 ‘?米’(창미, 쌀소동)의 풍조는 이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1907년부터 1910년의 3년 사이에 장강하류 유역의 창미사건은 80-90건에 달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1910년 장소창미(長少?米)사건이다. 이것을 초래한 것은 자연재해와 동원(銅元))의 남발에 의한 인플레의 진행이지만, 그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지주, 상인, 외국상인에 의한 쌀의 매점이었다. 이것은 민중이 당시 처해있던 비참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들은 그런 생활 때문에 살기 위해 행동으로 일어선 것이다. 그것은 호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해혁명의 배경이 된 사회적 조건이었다.) 한편 지방 신사층에 의해 일어난 철도와 광산의 이권회수운동, 청조의 신정(新政혁명내용에 있어서는 각 파의 이해에 큰 차이가 있었다.)혁명파는 무창봉기나 그 이후에 통일적인 지도능력의 결핍과 혁명파 자체의 내부의 강고한 단결이나 통일적인 행동은 결여되어 있었다. 이점은 혁명의 목표나 성격에 대한 혁명파의 인식의 한계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결국 혁명에서 핵심적인 과제인 권력의 장악에 실패하는 결과와 혁명파 자체의 분화를 초래하였다. 한편 또한 혁명파는 무창봉기에 의해 활성화 된 회당(會黨)이나 농민대중의 반항투쟁과 혁명봉기에 대해 이를 적절히 유도함으로써 혁명의 진전을 가져오는 데에도 한계를 드러냈다. 혁명군측은 12월 중순 이후 혁명의 목표를 청조의 양위(讓位)와 공화정의 수립 및 남북의 통일에 의한 조속한 국내질서의 회복이라는 것으로 마무리 짓기 위하여 청조측과 타협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이렇듯 초기에는 국민적 열망과 혁명파라는 지식인 시민세력에 의해 의도되고 주도되긴 하였지만 원세개라는 기득권 군벌세력에게 주도권을 내어줌으로써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혁명의 결과물들에서는 혁명으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일종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이점은 서구의 근대 역사 안에서 일컬어지는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혁명의 주체에 있어서 일관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3.2. 성공여부혁명의 주체세력을 혁명파라는 지식인 세력과 민중들이라고 가정하였을 때 그들이 혁명의 목표로 한 것은 앞서 살펴본 중국동맹회의 공통의 목표였던 ‘청조의 타도’와 공화제 수립, 손문의 삼민주의 안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부강한 민주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신해혁명은 260여년간의 만주족지배와 수천년에 걸친 왕조체제를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구만주 왕조의 고위관료 원세개에게 정권을 양도한다는 결정적 대가를 지불한 결과였다. 본래 청왕조의 붕괴는 혁명세력의 역량에 의해 쟁취했다고 하기보다는 계속된 실정(失政)에 의해 왕조 스스로가 붕괴의 길을 걸어갔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최후의 일격이 무창봉기로 시작된 일련의 무장투쟁다.
    인문/어학| 2010.05.05| 8페이지| 2,000원| 조회(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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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비교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사학사적 비교1. 유교와 불교이념을 담은 역사서2. 시대상황3. 체제와 내용4. 역사인식과 사학사적 의의1. 유교와 불교이념을 담은 역사서고려시대 역사서술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저술을 꼽으라면 단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꼽는다.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지은 現傳하는 最古의 사서이며 기전체라는 엄정한 체제와 양식을 지닌 官撰사서로서, 통치사상이었던 유교이념을 구현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서라는 점에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이와 함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가진 특성과 상당히 대비된 면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대표적 사서이다. 고려시대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기능하였다면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사회통합의 원리로서 불교 또한 양대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삼국유사는 바로 불교적 사상에 입각해서 일개 승려에 의해 씌여진 사서이다. 삼국유사가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사료적 가치, 그리고 삼국사기가 가진 특성과 한계를 보완해준다는 측면에서도 귀중한 유산이다. 이러한 한국 중세를 대표하는 사서를 비교분석해 본다는 것은 사학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그 시대의 사상과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두 저술을 시대상황, 구성, 내용과 역사관 및 의의로 나누어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2. 시대상황삼국사기는 1174년(명종 4) 고려 사신이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옥해』(玉海))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초간본이 이미 12세기 중엽(1149∼1174)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저자 김부식이 활약하던 12세기의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위기상황이 전개되었다. 인종(1122-1146)대였던 당시 나라 안팎에서는 거란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금나라가 새로이 등장하여 고려에 압력을 가해 국내 정치에 커다란 파동이 일어났다. 국내적으로는 문벌 귀족 가문 가운데 독주하던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문벌 귀족 중심체제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서경인이 중심이 되어 개경의 문벌 귀족 중심의 체제에 도전하면서 서경으로 천도하고 대외적으로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던 여진을 정벌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는 곧 묘청(妙淸, ?~1135)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고대적 습속의 잔존과 물밀듯이 들어오는 송나라의 국제적 문화 등으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과거출신 유학자였던 김부식으로 하여금 유교이념의 새로운 정비를 통한 중앙집권체제 강화와 국제적 관계 안에서 민족의 자주의식의 고양이라는 과제를 안겨주었던 것이다.삼국유사는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에 의해 청년시절부터 자료수집에 임하여 만년에 집필에 임하여 84세로 죽기까지 저술한 필생의 역작이다.)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인종대와는 다르다. 당시 고려는 고종 18년(1231) 몽고군이 쳐들어와 이후 30여년 동안 대몽항쟁이 있었고 고려 왕실의 지위는 원 황실의 사위에 불과하게 되었다. 권문세가들은 원나라와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급급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고려의 국가적 위신과 민족적 자주권이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러한 민족적 위기의식은 일연으로 하여금 유교적인 도덕사관으로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신앙의 종교적 측면의 서술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움과 당시의 고난에 찬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에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음을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3. 체제와 내용체제에서 삼국사기는 중국 정사의 기전체 양식을 따르고 있다. 총 50권 가운데 本紀 28권, 年表 3권, 志 9권, 列傳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본기 분량을 절반 이상으로 한 것은 열전 위주의 중국 사서와 크게 다른 점이다. 여기에는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관계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당시 삼국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本紀의 내용을 통해 왕의 치적을 역사서술의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 志 가운데서 地理志가 4권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강렬한 영토의식을 내세운 것으로 파악되며, 제천행사를 강조하여 천손민족임을 묵시적으로 나타냈다. 또한 職官志의 우대는 본기를 우선한 것과 같이 왕권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한편 열전에는 69명의 개인전기가 실려있는데 특히 김유신 이하 신라인에 편중되어 있으며, 고대사의 이상적 인물상으로서 김유신의 爲國忠節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끝으로 31개의 논찬은 중국 중심의 예론이나 포폄을 목적으로 한 유교적 덕목으로 일관하였다. 무엇보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와 같이 우리나라의 사실을 중국적 기준에 따를 것이 아니고, 우리의 독자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예법에 어긋나는 동성혼의 경우 우리나라에 반드시 적용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며, 신라 왕명도 고유한 우리말로 사용함으로써 중국과 차별짓고 있다.)삼국유사는 전 5권에 9편으로 되어 있지만, 일정한 역사 서술 체계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형식으로 저술한 것이다. 추측컨대 삼국사기의 기전체적 체제인 本紀, 列傳, 志를 기본으로 삼아 왕력, 기이, 탑상편을 만들고, 열전편의 내용을 다시 여러 고승전의 과목에 의해 늘리고, 나중에 전체적으로 순서를 조정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일연은 고기, 사지, 금석문, 고문서, 사서, 승전, 문집 등을 폭넓게 수집하였고, 중국 쪽 자료도 널리 수집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발굴해 낸 민간전승의 수많은 설화와 전설들도 주요 자료로 제시함으로써 관찬사서로서의 한계를 가진 삼국사기와는 다른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체 분량의 절반을 배당한 과 의 구성은 다른 고승전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은 후고구려와 후백제까지 기술하였으며, 가락국의 왕력이 포함되어 있다. 은 국가의 흥망에 신이한 힘이 작용한다는 인식에서 ‘신이한 것을 기록한다’는 이름을 붙였으며 고조선에서 후백제까지의 내용을 59항목으로 다루었다.) 또한 에서는 불탑과 불상 등의 불교 조형물에 대하여, 에서는 원광을 비롯한 고승의 전기가, 에서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의 행적을, 에는 부모에 대한 효행 및 불교적 선행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저자의 신분답게 불교적 관점과 사상을 바탕으로 서술되어 있다.4. 역사인식과 사학사적 의의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젊은 문사들과 함께 私家에서 저술되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적 성격과 그 형식에 있어서 기전체라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고려시대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적 특성이 그 전반에 깔려있다. 우선 삼국사기는 역사내용을 하늘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즉 천제지변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정치상황에 영향을 준다는 사고 하에서 기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근대사의 역사서술의 공통적 특성인 교훈으로서의 역사관을 들 수 있다. 특히 묘청일파에 대한 김부식 일파의 승리를 분열에 대한 통일의 응징으로 설명하여 역사적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서술을 국민통합과 교화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는 3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을 이루어가는 것을 하나의 발전으로 보고 있다. 저자는 3국을 처음부터 하나의 완성된 국가로 보았으며 경순왕의 귀부를 필연적인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 신라와 고려 교체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삼국사기가 단재 신채호 이후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역설한 것처럼 유교중심의 사대정신에 투철한 역사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중국과 다른 왕후를 동반한 순행이나 동성결혼이 우리나라 현실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중국과 다른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 전통사학이 갖고 있는 述而不作의 객관적 서술자세를 정착시켜 후대에 역사편찬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인문/어학| 2010.05.05| 4페이지| 2,000원| 조회(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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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의 역사와 문화사적 의미
    역사학 개론 Report밀의 역사와 문화사적 의미들어가는 말1. 밀과 서양의 빵1.1. 밀의 기원과 전파1.2. 역사 안에서 빵과 그 의미1.2.1. 마술이자 화폐 - 이집트1.2.3. 빵의 종교 - 그리스도교1.2.4. 유럽의 밥1.2.5. 전쟁의 변수2. 동양의 면(麵, 국수)2.1. 중국의 병(餠)2.2 우동과 소바 - 일본2.3. 동남아시아의 국수3. 밀과 문화3.1. 우리나라에서의 식생활 변화3.2. 빵 문화와 쌀 문화맺는 말 - 음식문화를 넘어서[참고자료]지도교수 :제 출 일 :제 출 자 :들어가는 말최근 국제 식량, 특히 밀가루 가격이 요동치면서 국내 경제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빵을 만드는 제과업체들은 가격인상을 서두르고 있고, 한편 식사 때에 쓰이는 식빵만큼은 가격을 동결하겠다는 광고가 줄을 잇고 있다. 밀을 주식으로 하지 않는 우리나라가 그러할진데, 밀을 주식으로 하는 유럽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받는 영향은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그 기원에서부터 먹거리와의 밀접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니 인류 역사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굶주림 때문에 먹거리를 찾기 위해서 세계를 탐험했고 자기 아닌 외부와 접촉 및 교류하면서 일종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문명과 국가가 이룩되고, 범죄와 전쟁, 법의 제정과 같은 인간 삶의 자취를 이루어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류의 먹거리에 관한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오늘날 지배적인 서구문명을 이끌어온 주식량인 밀과 그 음식인 빵에 대한 고찰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본 과제에서는 밀(빵)의 역사를 통한 인간 삶의 변천과 그것의 의의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빵으로 대변되는 밀 음식과 그 문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평가해 보고자 한다.1. 밀과 서양의 빵1.1. 밀의 기원과 전파밀은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이용해왔던 기장, 귀리, 보리, 밀, 호밀, 옥수수와 함께 인류으로 곡물을 뜨거운 돌에 굽거나 물을 섞어 죽처럼 끓여 ‘죽과 납작한 빵’을 먹어왔고, 이것은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숯불에 구운 그들 고유의 빵을 먹었으며,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아서 보관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인들과 만났을 때 귀리로 만든 납작한 빵밖에 몰랐다. 아시리아인도 납작한 보리빵만을 먹을 줄 알았다. 대부분의 민족들이 한결 같이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보관하는데 급급했는데, 오직 이집트인들은 오히려 밀가루 반죽이 부패하는 과정을 터득했던 것이다. 부풀어 오른 빵을 오븐에서 꺼내는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신비로운 힘이 작용한 마술과 같은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제조된 제품’, 빵은 이집트인에게는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문화적 수준과 측량의 척도였다. ‘빵의 개수’는 부를 의미했고, 그래서 이집트 전역에 있는 오븐은 실질적인 화폐 주조공장이었다. 수 백년 동안 임금은 빵으로 지급되었는데, 화폐기능을 하게 되면서부터 빵은 착취와 지배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파라오가 여행을 나설 때면 수만 개의 빵을 구웠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기원전 1200년경 제20왕조 때의 람세스 3세 고분에서 아몬라 신에게 바친 빵 목록이 발견되었는데, 열일곱 종류가 넘는 빵이 200만 개에 달한다. 발굴된 빵을 통해 당시의 수준 높은 제빵 기술을 알 수 있다. 사후 세계를 믿었던 고대인에게 빵은 절대적인 음식이었다. 영혼과 미라가 합체하는 내세의 식량이기 때문이었다).1.2.2. 국가의 흥망 - 로마제국이집트의 제빵기술이 로마로 건너가자 제국 내에는 제빵사들이 생겨나고 이집트의 빵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빵이 생겨난다. 로마에서는 상업적인 제빵업자와 제빵업자 조합이 생겼고 36만 명의 로마인이 빵을 배급받게 되었다. 주로 제빵소의 주인은 해방된 노예로서 정당하게 부를 쌓은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제빵사들의 강한 자의식은 이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해준 길드를 설립한 것이다. 이들은 자체 내규를 정하여 제행것이었다. 한편 예수가 말한 애매모호한 말 뜻의 신비함 때문에 그것을 기치로 이용한 이들에 의해 많은 이들이 전장에서 죽어갔고, 몇 차례의 교회분열)과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이렇듯 서구 문명과 정신을 지배해 온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빵의 하느님인 예수를 통한 것이었다. 세속의 빵을 넘어 영적인 빵의 예언자였던 예수는 갔으나, 그를 통해 빵)은 생명을 나타내는 한편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1.2.4. 유럽의 밥로마제국이 동과 서로 갈라지고,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인해 멸망함으로써 중세시대를 열게 된다. 로마시대에 이집트에서 건너온 제빵 기술이 확산되면서 제국 내에 보리, 호밀, 밀을 가지고 빵을 주식으로 삼는다. 물론 봉건제와 장원제 하의 중세 유럽의 하층민인 농노의 생활상은 그렇지 못했다. 로마의 노예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식사는 대개 곡물과 야채를 섞어 끓인 멀건 수프로 마셨다). 로마 멸망 이후 그리스도교와 함께 제빵기술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고 빵은 점차 모든 식사의 기본적인 음식이 되었다.11세기부터 빵은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음식들은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져서 일반적으로 빵에 대한 ‘부가물’(accompaniments)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문서에서 빵을 언급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농업계약에서 농토는 ‘빵이 나는 땅’으로 기술되었다. 농업은 ‘빵의 수확’으로 묘사했고 지대와 십일조는 빵을 단위로 해서 계산했다. 빵을 만드는 ‘반죽통’은 가정에서 최고 중요 물품이었고, 한지붕 아래에서 사는 가족은 ‘같은 빵을 먹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빵은 중세유럽인에게 있어 삶의 기준점이었다. 분명한 것은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곡물 대체물 내지 다른 대용물에 의존하여 식량 위기를 풀 가능성이 갈수록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점차 ‘곡물 농사가 아니면 생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으며, 빵의 부족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빵의 부족은 기근을 의미했다).유럽의 만성적인 곡물 부족 현상으로 를 말살하는 일을 말이다. 이 과학적 약탈 시스템은 전쟁을 위한 목적 이상의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의 기호에 맞게 유럽 인구수를 조정하려는 계획적인 시도였다. 히틀러는 "인종말살은 과학이다."라고 말했다).2. 동양의 면)(麵, 국수)오늘날 싸고 맛있고 먹기 간편한 국수)음식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근세 이후 화교의 진출로 인해 아시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에 국수음식이 침투되어왔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쌀가루를 원료로 한 국수도 많다. 이탈리아에서 출현한 파스타는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사랑받고 있다. 중국의 전통 국수기술을 계승한 인스턴트라면이 일본에서 개발되면서, 아시아가 본원지인 국수는 세계적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처음의 국수는 중국 황화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지역은 추운 지역이라 밀이 많이 재배되고 다양한 밀가루음식이 만들어졌다. 곡물을 빻아서 국수로 가공하기까지 인류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 전통적인 기술은 국수제조법에 전해진다. 국수는 밀가루가 대표적인 재료이기는 하지만, 많은 곡식과 다양한 제법으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반죽을 양쪽에서 잡아당기고 늘여서 여러 가닥의 국수를 만드는 방식인 납면(拉麵)계열(일본의 라면, 중국의 납면), 밀가루반죽을 길게 늘여서 벌린 막대기에 감아 당긴 후, 가는 국수를 만드는 방식인 소면(素麵)계열(일본과 한국의 소면, 중국의 선면), 반죽을 손으로 눌러서 가늘게 만들고 칼로 썰어 만드는 방식인 절면(切麵)계열(한국의 칼국수, 일본의 우동, 소바), 반죽에 끈기가 적은 메밀반죽이나 쌀 반죽을 작은 통 사이로 뽑은 다음 물에 삶아 국수를 만드는 방식인 압면(押麵)계열(한국의 냉면, 중국의 하수면), 그리고 쌀을 갈아서 찌거나 삶은 후 칼로 가늘게 썰어 국수를 만드는 방식인 하분(河粉)계열(동남아 쌀국수) 등이 그것이다).2.1. 중국의 병(餠)고대 중국에서는 북부를 중심으로 분식이 발전하게 된다. 밀가루 음식을 두루 병(餠)이라고 일컫는소바와 달리 쫄깃한 면을 위해 준강력분을 사용하여 만들고, 돼지 뼈나 닭 뼈를 곤 물을 사용해 영양가 높은 음식이란 이미지가 있다. 1958년에는 인스턴트 라멘, 라면이 탄생했는데 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로 빠르게 보급되었고, 나아가 세계로 퍼져나간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라면을 모방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2.3. 동남아시아의 국수동남아시아 국수음식의 특징은 화교의 진출을 계기로 전해졌고 국물에 말아내는 국수가 발달했으며 국물이 뜨거워서 젓가락을 사용한다. 또한 밀이 나지 않는 태국에서는 쌀국수를 즐겨 먹는다. 동남아시아는 면식문화의 역사가 짧다. 19세기에 이주한 화교가 절면과 압출면 기술을 전한 이래 빠른 속도로 각지에 전파된다. 같은 화교여도 차오저우, 푸젠, 광둥 등 출신지에 따라 국수음식의 특징이 다르다. 예컨대 오키나와는 푸젠, 태국과 베트남은 차오저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푸젠과 광둥의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태국 사람들은 국수를 즐겨 먹는데, 쌀가루, 녹두가루, 밀가루 국수를 만들어 국물에 말거나 국물 없이 먹는다. 태국 고유의 생선젓을 비롯한 고명과 건더기가 다양하다).3. 밀과 문화3.1. 우리나라에서의 식생활 변화우리나라는 신석기 후기 잡곡농사로 농업이 시작된 이래 기원전 10세기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다. 기후조건이 벼농사에 알맞았으므로 다른 작물보다 벼농사에 주력하면서 각 고장 풍토에 맞는 콩, 보리, 조, 기타 잡곡 등이 경작되었고 이것들을 상용음식으로 하는 식생활 양식을 가지게 되었다. 잡곡 중 산출량이 많았던 보리, 쌀, 조 등을 재료로 한 밥을 주식으로 하고 다른 것을 반찬으로 하는 일상식은 삼국 후기부터 지금껏 뿌리 깊게 토착화 되었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급격한 경제성장 및 식생활을 위시하여 여러 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고, 특히 식생활 양상은 서구화 및 외식화 현상이 대도시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즉, 고도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인의 생활과 의식구조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여, 국민의 소득이 경제성장과 더불다.
    인문/어학| 2010.05.05| 11페이지| 2,500원| 조회(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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