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의 언어적 상황에 대한 조사《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11년(1285년)에 승려 일연이 쓴 역사책으로, 단군 ? 기자 ? 대방 ? 부여의 사적과 신라 ? 고구려 ?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불교에 관한 기사 ? 신화 ? 전설 ? 시가 따위를 풍부하게 수록하였다. 《삼국유사》는 고려 인종 23년(1145년)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으로서,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이전의 우리 민족의 언어적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래에서는 《삼국유사》에 나타나있는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민족의 언어적 상황에 대한 자료들을 발췌 ? 정리해보고자 한다. 순서는 원문에 나타나있는 순서이고, 조사에 사용한 책은 2007년 민음사에 출판된 김원중 번역의 《삼국유사》이다.권 제1, 기이 제1,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계에 있다.―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했다” ⇒ 흘승골은 ‘승흘골升訖骨’이 거꾸로 된 것으로 ‘수릿골’이라는 의미다.권 제1, 기이 제1, “때문에 탁수?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道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권 제1, 기이 제1,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권 제1, 기이 제1,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 차차웅은 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에 대한 칭호다.“《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을 말한다.” ⇒ 잇금은 잇자국을 말한다.“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립立을 수袖로 쓰기도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마립이란 궐?을 말하는 방언이다.” ⇒ 궐은 서열을 말한다.권 제1, 기이 제1,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 이질금은 ‘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족장,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권 제1, 기이 제1,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 때에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 탈해치질금의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권 제1, 기이 제1,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아이라는 뜻이다.”권 제1, 기이 제1, “제13대 미추이질금味鄒尼叱今―혹은 미조未組 또는 미고未古라 한다.―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 여기서 미조, 미고는 근저根抵, 원본元本이라는 뜻인 ‘및’, ‘밋’의 사음寫音이라는 설이 있다.권 제1, 기이 제1, “이것을 속어로는 달도??라고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면서 모든 일을 금한다는 말이다.” ⇒ 양주동 박사에 의하면 달도는 우리말 ‘설, 슬’과 새해 첫날을 뜻하는 ‘설’의 음이 상통하는 데서 온 훈차라고 한다.권 제1, 기이 제1, “이때부터 시호가 쓰이기 시작했고, 또 우리말에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부른 것도 이 왕 때부터다.” ⇒ ‘마립’은 두頭, 상上, 종宗의 의미고 ‘간’은 대大, 장長의 뜻이니, ‘정상’을 뜻하는 존호로 왕에게 쓰였으며, ‘??한’, ‘마루한’으로 발음했다고 한다.권 제1, 기이 제1, “속히 군사를 돌리라는[速還] 것이다. 화독畵犢과 화란畵鸞 두 개의 반절反切이니라.” ⇒ 원문 ‘이절二切’의 의미가 꽤 불분명한데, ‘화독’의 반절음은 ‘혹’이고 ‘화란’의 반절음은 ‘한’이므로, 두 반절음이 어울리면 ‘혹한’이 되는 바 ‘혹한’은 속환速還의 의음擬音으로 당시 통용하던 한자음을 써서 ‘속환’을 수수께끼로 표현한 것이다.권 제2, 기이 제2, “우리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사이에 있으며, 내 이름은 단오端午―지금 풍속에 단오를 수레옷[車衣]이라고 한다.―라 합니다.”권 제2, 기이 제2,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 득오실에서 실失은 골짜기[谷]나 고을을 뜻하는 향언 ‘실’의 음차라고 본다.권 제2, 기이 제2, “그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죽은 후의 시호―이라 했다.”권 제3, 흥법 제3, “당시 사람들이 승명僧名을 몰라 아두삼마阿頭??라 했는데, 삼마란 향언으로 승려를 말하며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권 제3, 흥법 제3, “이때 마음을 닦은 사람으로서 성은 박씨, 자는 염촉厭?―이차異次 또는 이처伊處라고도 하는데, 이는 방언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자로 번역하면 싫다[厭]는 뜻이 된다. 촉?,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기록하는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쓴 것이다. 지금은 윗글자는 번역하고, 아랫글자는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촉 또는 염도厭覩 등으로 쓴 것이다.―인 자가 있었다.”권 제4, 의해 제5,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가서갑加西岬 또는 가서갑嘉栖岬이라고도 쓰는데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세속에 곳[古尸]이라고 하기 때문에 혹은 곳사[古尸寺]라고도 하니, 갑사岬寺란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000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으니 어떤 사람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가 아뢰었다.”권 제4, 의해 제5, “그는 항상 작은 절에 머물면서 날마다 미친 듯이 만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부궤화상負?和尙이라 불렀다. 그가 머무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불렀는데 부개는 삼태기의 향언[신라말]이다.”권 제4, 의해 제5, “법사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고 또 다른 이름은 신당新幢―당幢이란 것은 세속에서 털[毛]이라고 한다.―이었다.”
박정희를 말하다― 근대화의 우상인가, 개발독재의 원흉인가 ―1. 사라지지 않는 신드롬, 박정희2008년 5월, 대부분의 국민들은 모르고 살아도 좋았을 ‘광우병’이니 ‘대운하’니 하는 말들 때문에 나라가 참으로 시끄럽다. 처음에는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에서만 시작했지만, 이제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와 착각으로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불신과 증오로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논란의 장본인으로서 취임 100일 만에 국민들로부터 탄핵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명박의 행보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사기꾼이라도 좋다’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지지를 통해 대통령이 된 이후로,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국민들 좀 때려잡아도 좋고, 누가 뭐래도 경제만 살리면 나중에는 다 아무 소리 못할 거다.’라는 신조로 꿋꿋하게 100일 동안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을 보고 있자면, 오랜 세월 동안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한 사람과 참으로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은 아무래도 ‘제2의 박정희’라는 말이 너무도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마 1997년의 IMF 경제위기 이후가 아닐까 싶다. 때마침 오랜 여당 정권이 야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그 후로 10년을 지나오면서, 나라경제가 조금 안 좋아지거나 할 때면 어김없이 언론들은 앞 다투어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말로 정부의 경제적 실패를 꼬집으며 국민들의 머릿속에 박정희를 다시 살려내고는 했다.한강의 기적과 새마을 운동으로 대표되는 한국경제의 신화적 영웅, 박정희.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친일파, 반민족 기회주의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희대의 독재자로 기억되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라는 그 경제 개발에 있어서도 매판경제와 정경유착의 원조, 개발독재와 기형적 자본주의 이식의 원흉으로 손가락질 받기도 하는 대통령, 박정희. 그의 죽음 이후 30년이 지난 오늘는 것이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이미 죽고 없지만 그가 남긴 청산하지 못한 역사와 되풀이되는 역사를 볼 때, 박정희를 바로 보고 그가 남긴 것들을 다시 한 번 톺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당대의 과제인 것이다.특히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정권으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고 치더라도, 경제개발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그 성과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선택적 비판이 여전히 폭넓게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이러한 관점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성과가 냉전적 분단체제와 정치적 독재체제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자로서의 전과를 사면해주는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그리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그가 남긴 성과들은 사실 성과가 아니라 오늘날의 파행적 자본주의 체제를 만든 재앙의 시작이었다는 지적들도 많이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개발독재’로 대표되는 그의 경제개발 방식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치명적인 부작용들을 안은 채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주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20여 년간의 지배를 통해 박정희가 남긴 뿌리 깊은 오해와 굳어버린 인식들은 핵심적인 장애로 남아있다.한국 현대사에 일대 획을 그은 인물로서 조국 근대화의 유일무이한 우상임과 동시에 민주주의와 민족적 염원을 자신의 권력욕 앞에 무참히 짓밟아버린 독재자이기도 한 박정희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 제일의 쟁점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를 둘러싼 대조적인 평가들을 함께 냉정히 살펴보면서 이 시대가 박정희에게 내려야할 정당한 평가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2. 조국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우상1980년대에 듀브가 주장한 서구식 근대화의 일반적인 현상의 특성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첫째, 근대화는 급격한 경제성장이다. 둘째, 근대화는 다차원의 변화이다. 국민들의 인식과 행동, 그리고 사회제도 등 모든 분야의 변화가 그것이다. 셋째, 근대화는 체따르자면, 한국의 근대화 역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화된 몇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먼저 한국의 근대화는 1960년대 이후 줄곧 지속된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그 개발의 과정 속에서―진전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스스로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근대화로 가는 제 1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한국경제는 1960년대 초까지도 투자와 생산을 위한 원시적 자본축적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경제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때 박정희 정부는 급박한 두 가지 정책수단을 강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첫째로 화폐개혁을 통한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동결하여 산업개발공사에 강제로 투자하도록 만들었으며, 둘째로 서독 등 외국으로부터 외자를 도입하여 개발과 경제성장을 위한귀중한 종자돈으로 삼은 것이다.한국의 근대화는 공업화와 산업연관효과 및 도시화와 농촌사회에의 파급 등으로 진전되었다. 한국의 근대화는 1962년 2월 3일에 울산만 해안에서 외친 공업화를 위한 선언, 그 진군나팔로부터 대장정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 후 한국경제는 두 차례에 걸친 개발의 10년을 보내면서 농업인구와 그 생산이 지배적이었던 이른바 농업국의 위치에서 공업화된, 아니 중화학공업의 비중이 50%를 넘어서는 현대화된 새로운 산업구조를 갖추었다.아울러 한국의 근대화는 저개발과 후진국의 굴레를 벗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지구의 북반부 지역 국가들이 선진국의 위치에 서 있는 데 비하여 그 남반부 지역 국가들은 무지와 질병, 그리고 빈곤상태에 머물러 있는 데서 이른바 ‘남북문제’는 야기된다. 하지만 근대화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많은 개발도상국이 겪고 있는 저개발과 후진성을 극복하는 가운데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향한 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근대화를 개발과 동의어로 보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박정희가 이룩한 한국의 근대화는 한국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리고 이것의 바탕에는 박정희가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통해 한국민들의 가슴에 남겨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고, 바로 이 자신감이 우리도 선진국 진입의 잠재력이 있다고 여기게 하는 국민적 자긍심으로서 작용할 것이라는 것이다.3. 개발독재와 파행적 자본주의의 원흉박정희 개발독재체제는 냉전―분단체제를 정략적으로 활용한 반공국가주의 ‘총력안보’ 독재체제이다. 국민에게는 국가에 대한 충성과 사명만을 강요하면서 박정희 개인의 영구집권을 꿈꾸는 정치적 반동으로 민주주의는 질식되고 말았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평화정착과 정반대의 길인 적대적 대결 일변도로 치달았다. 안보적 동기에 의해 주도된 돌진적 중화학공업화의 모험 속에서 정치적 독재와 특권적 공룡재벌 간의 보수적 공생체제, 기형적 관치금융체제, 병영적 노동통제―동원체제가 구축된 것, 대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이중구조가 확연해지고 수도권―영남 패권적 불균형 발전이 심화된 것, 대외의존과 불안정이 심화된 것, 환경파괴―에너지과소비형 ? 위험축적형의 돌진적 성장제일주의가 체질화된 것 등, 이 모든 파행적인 개발체제의 모순 또한 주로 유신체제에서 발생했다.그런데 이 시기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대중국정책에서 역사적인 탈냉전적 전환을 단행한 시기이며, 한반도 분단, 타이완 지원, 일본 재건을 기본 축으로 공산진영과 대결해온 동아시아 냉전체제가 이를 주도해온 미국 자신에 의해 해체의 길로 들어선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한국의 국정능력 여하에 따라 냉전반공독재, 남북대결주의, 돌진적 성장제일주의, 재벌 전횡경제, 지역패권주의라는 보수 ? 반동적 퇴행의 길이 아니라, 탈냉전 민주주의,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 성장―안정―분배의 조화, 분권과 균형발전이라는 전향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의 길로 갈 수 있는 기회의 창이 열린 시기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고 보수반동의 길로 치달았던 것이다.박정희의 유신체제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1960년대와는 달리 1970년대에는 개발독권은 김대중 납치사건 등의 공작과 공포정치로 이 민주―평화적 대안을 압살했던 것이다.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성과 위에서 성장 ? 안정 ? 분배의 조화를 도모할 수 있는 좀 더 유연한 발전의 길이 존재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의 대안은 그와 같은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이완 모델과 비교시각에서 보아도 중화학공업화 프로젝트는 문제투성이이다. 한국과 대조적인 타이완 개발주의의 특징으로는 성장과 안정의 조화, 민간자본에 대한 통제와 복지지향, 국영기업과 중소기업의 결합체제, 점진적이고 유연한 산업정책, 금융정책에서 물가안정을 중시하고 양의 이자율을 보장하는 통화주의적 보수주의, 부채비율이 낮은 기업의 재무건전성 외환보유고의 누적을 들 수 있다.이와 대비하여 박정희식 개발주의는 안정과 안전, 복지를 무시한 성장제일주의와 난개발, 특권재벌체제의 비대와 쇠잔한 중소기업, 돌진적이고 경직적인 산업정책, 특혜적이고 인플레이션조장적이며 음의 이자율을 동반한 관치적 금융억압주의, 고부채의 외형확장적 기업 행태, 외채의 누적 등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 같은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결함이 정형화된 것도 주로 중화학공업화 체제에서 비롯된다. 미국과 일본의 정부 차원의 협조 지원과 ‘3저 호황’과 같은 예외적인 대외적 조건에 힘입어 중화학공업이 수렁에서 헤어나자 한국경제는 곧 실패의 교훈을 망각하고 다시금 과다차입―외형확장주의의 길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무분별한 대외개방과 악조합을 이루어 IMF 경제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박정희의 개발독재 모델은 기적과 위험, 근대화와 반(反)근대화, 심지어 역(逆)근대화의 모순적 혼합물이다. 첫째,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냉전―분단 상황을 뛰어나게 국민동원과 독재정권 유지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준전시(warfare) 개발독재이다. 여기에는 한국판으로 개조하면서 모방 학습한 전전 일본의 초국가주의 ? 군국주의 ? 제국파시즘의 정신이 흐르고 있다. 유신 개발독재체제는 탈냉전 남북화해와 평화제제 수립의 기회를 저버리고 북한을 적으로 삼아 이 적
세종의 시대와훈민정음 창제의 목적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세종대왕의 능으로2008년 4월 26일 토요일, 경기도 여주군에있는 영릉(英陵, 세종대왕릉)을 다녀왔다. 답사지로 영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국어사에 있어서 제일의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역시 훈민정음의 창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세종대의 시대상에 대한 고민을 통해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한 새로운 의문들을 던져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동서울터미널에서 여주행 시외버스로 1시간 30분, 여주터미널에서 택시로 10분을 달려서 영릉에 도착했을 때는 막 정오를 넘긴 시각이었다. 영릉은 사적 제195호로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 광주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하였다고 한다. 1469년에 여주로 옮기게 되었고,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고 한다.정문을 지나 영내로 들어서자 왼편의 너른 잔디밭에는 유명한 앙부일구와 자격루를 비롯하여 세종 당시 발명된 수많은 과학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잔디밭을 지나서 ‘세종전’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세종과 관련된 유물들을 모아둔 기념관 같은 곳이었다. 야외에는 크기가 큰 과학 발명품들이 있었던 것에 비해 세종전 안에는 서적이나 그림 등과 같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훈민정음 언해본》,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등과 같은 훈민정음 관련 자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울러 입구에 위치한 큰 판넬에는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과 과정에 대해서 《훈민정음 해례본》과 《세종실록》의 기록을 인용하여 설명해두기도 하였다.세종전을 나와 오른편에 세종대왕상을 두고 ‘훈민문’으로 들어가니,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너른 잔디밭 가운데로 영릉으로 올라가는 깨끗한 길이 나왔다. 길의 중간쯤에 원래는 홍살문이 있어야 하지만 보수공사 관계로 해체해놓은 상태라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홍살문을 지나면 큰 구릉 위에 능이 보이는데, 그 아래로 제사를 지내는 곳과 음식을 하는 수라간, 제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묵던 곳 등이 있었다. 능으로 올라서니 울창한 도래솔 안에 생각보다 아담하게 자리잡은 봉분이 있었고, 오래된 석등과 12간지 석상들이 그곳을 지키고 서 있었다. 풍수지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빼어난 경치를 갖고 있었다.조선 초기 사회의 모습과 세종의 정책조선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통해 세워진 나라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왕의 지위에 올라서도 그는 명나라로부터 국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명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내리고 조선국왕을 인정해준 것은 3대 태종에 이르러서였다. 이것은 ‘존명사대’를 건국의 명분으로 내세운 조선으로서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선 초기에도 이처럼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의 문제가 크게 존재했는데, 이것은 비단 나라밖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백성들의 정치적 ? 사회적 의식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져있어서, 새로운 왕조를 쉽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백성들의 정치의식 향상은 멀리 무신집권기에서부터 그 시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민 출신이었던 이의민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고, 만적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을 하면서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몽고의 침략을 받으면서, 무사안일에 빠진 집권자들을 대신해서 백성들은 몽고의 횡포를 감당하며 맞섰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백성들의 정치 ? 사회적 의식은 자연히 성장할 수밖에 없었고, 백성들이 국가로부터 이반함과 동시에 고려의 지배 체제는 안으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해체되었던 사회 질서를 바로잡아 정통성을 확립하고, 백성들의 동요를 진정시켜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을 것이다.조선 왕조가 초기부터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업은 인구가 자주 이동을 해야 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이 자주 이동을 하면 통제하기도 어렵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상업에 대해서는 많은 차별과 규제를 가하고 농업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한 곳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이를 위해서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특히 세종대에는 농사와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기구들을 발명함과 동시에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서적들을 최초로 편찬하였다. 이처럼 농업을 강조했던 정책들은 백성들을 땅에 붙들어두고 민심을 사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고, 결국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목적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되었다. 현재 한글날로 삼아 기념하고 있는 양력 10월 9일은 바로 훈민정음의 반포일을 어림으로 정한 것이다. 우리는 훈민정음, 바로 한글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이었던 원세개도 한글의 우수성을 칭송해 마지않으면서 심지어는 어려운 한자보다는 한글을 쓰자는 주장을 펼칠 정도였다고 하니, 한글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은 단순히 자문화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이 분명할 것이다.또한 현재 국어로 사용되고 있는 문자 가운데 이를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 그리고 그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경우는 우리 한글 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자멘호프가 만든 에스페란토어, 몽골족이 원나라 때 만든 파스파 문자 등 만든 과정이 분명한 문자도 있지만, 그것들은 국어가 아니거나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죽은 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재도 말과 글이 일치하는 국어로 쓰이고 있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 밖에 없는 것이다.하지만 후대에 와서는 이처럼 칭송을받고 있는 한글이 처음 창제되었던 당시에는 모진 구박과 홀대를 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고도 슬픈 사실이다.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서 드디어 ‘국문’으로 다시 불리기 전까지 한글은 ‘언문’, ‘암글’, ‘중글’ 등의 이름으로 낮추어 불렸고, 국가의 공문서에도 모두 한문으로만 기록되었다. 국가의 중요한 사업으로서 왕이 직접 나서서 만든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제 당시부터 무려 45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언문’으로 낮춰 부르며 국가의 공식 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세종전 입구의 안내 판넬에도 적혀있었지만,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은 “우리말의 음운체계가 중국과 달라서 본디 중국어를 기록하도록 마련된 한자로는 통하지 않으므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 표현하려고 하여도 끝내 자기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서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다.”라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그것이다.이것을 우리 고유의 글자가 없다는 국가의 체면 때문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해석하거나, 세종이 백성을 사랑한 마음이 남달라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모두 개운치 못한 해석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정말 그런 이유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바로 훈민정음을 공식문자로 삼았어야 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 위의 두 가지 목적에 의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면, 창제 당시부터 훈민정음을 ‘언문―상스러운 글자’라고 부르며 450여 년간 중국의 한자를 ‘진서―참된 글자’로 떠받들어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럽지 않다.훈민정음 창제의 진짜 목적?나는 앞서 얘기한 조선 초기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당대적 관점으로 다시 한 번 《훈민정음 해례본》의 설명을 주목한다면 훈민정음 창제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우리말의 음운체계가 중국과 달라서 본디 중국어를 기록하도록 마련된 한자로는 통하지 않으므로”라는 말 속에 숨겨진 훈민정음 창제의 진짜 목적은 ‘한자의 중국어 발음을 우리말 기호로 표기하여 중국어를 쉽게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라는 것이다.앞서 조선 초기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조선 건국의 정통성의 문제와 명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가 있다. 명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한반도의 새로운 왕조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명과의 외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했을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발음을 표기한 기호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어의 발음을 이해하고 널리 학습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중국어를 배우기 위한 수단으로써 우리말의 표기를 위한 기호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그리고 앞서서 조선 초기 사회의 중요한 사회적 과제 중에 명과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정치 ? 사회적으로 높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백성들의 민심을 모으고, 백성들을 새로운 지배체제 안으로 재편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고 한 바가 있다. 그에 따라 농업을 강조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실시하였는데, 훈민정음의 창제는 바로 이러한 과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정치의식이 높아진 백성들에게 바로 훈민정음을 통해서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명분을 알리고 민심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백성들의 대부분이 한문을 읽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배층과 백성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백성들과 지배층 중 누가 더 답답했을지, 누가 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을지도 분명할 것이다. 새로 왕조를 만들어 백성들을 그 질서 속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지배층들의 요구가 훨씬 높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