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진화세기에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면 그 많은 숙제중 하나는 그건 아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이것은 더 나아가 우주만물은 창조되었느냐? 아님 진화되었느냐? 하는 문제로 발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창조란 무엇이고? 진화론이란 무엇이 길래? 수세기부터 지금까지 끝이지 않는 논쟁거리가 되는 것일까?우선 창조론이란 무엇일까? 짧게 말하면 우주 만물이 어떤 신적 존재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기독교에 성서인 성경책 창세기 1장 1절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근거를 두고 있다. 창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것으로서, 제작이라는 말과 구별된다. 제작은 이미 있는 것을 다른 형태로 변형하여 만들지만, 창조는 아직까지 없었던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그렇다면 진화론은 또 무엇일까?진화론이라고 하면 우리는 한결같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중하교 과학시간에 기린사진과 공장에 붙어 있는 나방사진과 함께 등장하는 바로 찰스 다윈이라는 사람이다.사람들은 찰스다윈이 진화론을 처음 제기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화론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 중에는 사물의 생성(生成)문제를 논한 사람이 많았다. 그 중 한 사람인 엠페도클레스는 지(地) ·수(水) ·풍(風) ·화(火) 4원소의 결합 분리로 경험세계의 생멸(生滅)의 사실을 설명하려 하였고, 동물체의 여러 부분이 발생하여 지상에서 결합되었다고 했으며, 아낙사고라스는 사람은 물고기 모양의 조상에서 유래하였다고 설명하였는데 흔히 사람들은 이들의 설이 진화관념의 효시라고 여긴다. 체계적인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라마르크이다. 그는 《동물철학》(1809)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동물분류학 ·생명론 ·감각론과 함께 진화사상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찰스다윈은 진화론을 확립했다. 그는 저서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서 자연선택설을 근간으로 하여 새로운 종이 생기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였는데 변이(變異)의 원인 중의 한 가지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도 채용하였다. 그러나 다윈은 라마르크의 ‘전진적 발달’을 배격하였다. 다윈은 자연선택설을 제창했을 뿐만 아니라 진화의 증명이 될 수 있는 생물학상의 사실적인 예도 많이 들어 생물 진화를 사람들에게 확신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영국의 산업자본주의 발전을 반영한 것이며, 자유경쟁에 의한 번영의 이념을 생물계에 도입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종의 기원》이 종교적인 반감을 일으키면서도 급속히 보급된 원인 중의 하나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물학의 각 분야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과연 창조론이 맞을까? 진화론이 맞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회에서 다뤄지는 문제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학생인 나에게도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창조와 과학이라는 수업시간 이외에도 이야기성서라는 시간에 이 문제를 놓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이 아닌 그저 교과서에 나온 진화론에 대해서만 선생님이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나 또한 그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탐구해보지 않았기에 나의 입장이 창조론인지 진화론인지 뚜렷하지 못했다.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왠지 금기상황을 어긴 일처럼 여겨져 왔고, 내가 창조론자여도 진화론에 대하여 반악하기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너무 없다는 한계점과 마주해야했다.이번 기회를 통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나는 창조론과 진화론 둘다 믿는다.하지만 나의 주장은 창조론의 바탕을 둔 진화론을 믿는다는 주장이다.나는 친구들이 닭이 먼저야? 달걀이 먼저야? 이렇게 묻는다면 한 치 망설임 없이 닭이 먼저라고 대답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달걀은 닭이 품어주거나 부화기가 있어야 병아리가 태어나는데 닭이 없으면 달걀을 품을 수도 없고, 옛날에는 부화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닭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그럼 친구들은 바로 “그럼 닭은 어디서 왔는데? 달걀이 있어야 닭이 나올 수 있는 거 아니니?”라고 반격한다. 이러면 나는 꼼짝없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당할 수밖에 없는 꼴이 되고 만다. 하지만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있다.그것은 창세기 1장 2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고 기록하셨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땅의 짐승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달걀이 아닌 처음부터 땅의 짐승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여기에서 성경구절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주장할 수 있냐도 묻는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책이다. 어떠한 허구도 쓰여 있지 않는 책이며 진리이다. 또한 성경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진화론자들의 주장가운데 사람의 조상은 유인원에서부터 진화가 되었다는 것이다.거기에 대한 증거로 오스트렐라피테쿠스부터 호머사피엔스까지의 화석들을 발굴 하고 분석하면서 사람이 생활에 편리하게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화론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이 유인원이 우리의 조상이라면, 물고기가 우리의 조상이라면, 유인원과 사람사이의, 물고기와 사람사이의 현재 진화하고 있는 모습은 왜 현재 찾을 수가 없는 것일까?진화론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도 원숭이의 모습과 같은 모습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화론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울때 자주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체 중에 꼬리뼈와 맹장의 역할이다. 꼬리뼈와 맹장은 진화과정에서 퇴화된 기관이라고 주장을 하곤 한다.하지만 미국 듀크대학의 외과의사 윌리엄 파커 교수는 맹장은 좋은 장내 박테리아 모아 두는 곳”이라고 한다. 음식물이 항상 지나가는 소장과 대장의 터널에서 비켜난 자리, 은신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맹장은 이렇게 좋은 박테리아를 모셔 놓고 있다가 심한 배탈, 설사 등이 나 장내 좋은 박테리아가 휩쓸려 나갔을 때 이를 보충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꼬리뼈 역시 근육-인대 연결되는 주요 부위라고 밝혔다.
출생- 1835년 11월 29일 (중국) - 1908년 11월 15일서태후라는 이름은 황제의 궁을 가운데 두고 동태후와 서태후의 거처가 동쪽과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성은 예흐나라, 혹은 옥란, 난아, 왕소겸으로 불린다. 그녀의 출생설은 1999년 중국 문화예술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유기라는 교수의 논문에 서태후의 출생에 관한 정보가 있는데,"서태후의 유년시절의 이름은 왕소겸, 산시성 가난한 한인 농가의 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 팔려가다 시피 북경으로 왔었고,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다가 만주족 귀족 가문인 예흐나라 가문의 입양되어졌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학자들은 서태후의 출생은 만인이며 그의 부친은 북경 수비를 담당하고 있던 감독관이었다. 라고 하고 있으며, 두 번째 출생설은 아버지 혜징이 반란의 도당들과 어울려 지냈다는 누명을 써 삭탈관직을 당해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자 자신을 뒤쫓고 있는 무리들 때문에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는 것이다. 어린 서태후와 아버지가 정착하면서 살았던 곳이 산시성이라 하는데 그 때문에 서태후는 산시성 지방의 민요를 잘 불렀다는 것과. 이런 이유로 그가 딸에게 만주어는 물론이고, 만주글자도 딸에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어느 것도 서태후의 진짜 출생인지 알 수 없으며 아직도 중국 사학계에서는 서태후의 출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실제 서태후는 만주어보다 한어를 더 잘했으며 처음 수녀로 궁궐에 입궁을 할 당시 만주어를 몰라 주변 궁녀들의 비웃음을 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의탁할 곳 없는 서태후의 유년시절은 떠돌면서 기방 혹은 한인 부호의 집에 종살이를 했었다는 말들도 있다.궁생활서태후의 어린 시절은 매우 빈곤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인 영록을 버리면서 까지 궁녀가 되고 싶어 했다. 1851년 16세에 궁궐의 수녀로 발탁이 되어 처음으로 황궁에 들어갔다 소녀 시절 서태후는 야심가였다고 전해진다. 하루빨리 황제의 후궁이 되어 어려웠던 시절을 만회하고 싶어했다.수녀로 들어간지 1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용안조차 뵙지 못하자 젊음과 미모, 묘하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말솜씨가 있었던 서태후는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 재위 1850~1861) 주변 환관들의 환심사고, 황제를 모시고 있던 내관에게 뇌물을 주어 황제가 이수원에 행차를 할 적에 자신을 불러주도록 유도를 했다. 어린 서태후에게 뇌물을 먹은 내관은 시름에 잠긴 황제를 의도적으로 이수원으로 유혹하여 서태후에게 황제를 안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시 황제에게는 정식 황후인 자안황후 외에도 한족 후궁인 이귀인(훗날 이귀비)이라는 여인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는데 이귀비는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딸을 사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시름에 잠기게 된 황제 앞에 서태후는 산시성 민요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 노래 소리를 들은 황제가 친히 서태후를 불렀다고 한다. 그 후부터 그녀는 수녀에서 귀인이라는 직급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1860년 서구 열강의 북경 침범과 피난 과정에서 함풍제는 31세에 요절한다.함풍황제에게는 황후와 이귀비 외에도 후궁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서태후가 회임을 하여 아들을 낳아놓으니 아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함풍황제는 서태후의 직위를 의비로, 아들을 태자에 책봉하고 난 다음에 그녀를 황귀비로 봉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이귀비만을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가 낳은 딸들을 총애했다.평소에도 잔병치레가 많았다는 함풍황제는 자신이 임종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은밀히 황후를 불러 자신이 직접 쓴 편지와 옥쇄를 그녀에게 전해주고 "내가 죽거든 태자의 생모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즉시 사약을 받게 하여 죽게하라." 라고 했다.1861년 나이 30세로 함풍황제가 서거를 하고, 서태후로 군림하게 된 그녀는 우선 함풍황제의 사랑을 지독하게 받은 이귀비를 밤중에 몰래 납치 해 손발을 잘라 항아리에 쳐 죽였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추측이고 실제로 이귀비의 행방은 함풍황제 사후 오리무중에 남아있다.또한 서태후는 극악한 시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다.일화 중에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황제가 황후와 신혼을 즐기고 있을 때 혜비가 울며 서태후에게 달려와 "폐하께서 신첩을 찾지 않으시니 신첩 폐하의 용안을 언제 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라고 고하니 황후를 괘씸하게 여긴 서태후는 동치제의 침실로 달려가 황후를 끌어내고 황제에게 혜비의 처소에서 지내라고 엄명을 내렸다.평소에도 서태후의 잔학성과 강압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동치황제는 급기야 미복차림으로 궁궐을 벗어나 홍등가(사창가)로 자주 출입을 했다는데 그 후 동치황제의 얼굴과 몸에서 붉은 반점이 피고, 소변이 불규칙하게 나왔다고 한다.서태후는 평소에도 황후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다. 서태후는 황제의 침수로 달려가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며 따귀를 사정없이 치고, 주변의 내관들에게 몽둥이를 구해오라하고 돌아가면서 황후를 때릴 것을 명령했다. 생모의 비정한 모습을 눈으로 목도한 그는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며 졸도했는데 그 때 동치황제는 1874년 12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중국 사학계에서는 동치황제가 문란한 생활로 성병에 감염이 되었다고 하고, 어떤 사학자들은 천연두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그 진의는 아직 명확치 않다.서태후는 그 후 동치황제의 죽음을 동치황후로부터 뒤집어 씌워 그녀를 자금성 은밀한 곳에 감금한다. 당시 동치황후는 동치황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서태후는 그 아이가 사내아이로 태어난다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라 예상을 하고 일부러 물과 음식을 주지 말라고 엄포했다.그리고 6세의 동치황제를 대신해 두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사실상 모든 정무는 서태후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과 같았다. 아들이 황제로 즉위를 하자 자신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선 숙순, 재원 일파들을 소탕해 '신유정난'을 일으켰으며 자신의 뒤 후원자인 공친왕 혁흔을 정계로 등용케했다.유명한 일화중 하나인 서태후와 동태후의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동태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몸져눕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이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것이 기회다 싶어 자신이 부리는 궁녀와 짜고 동태후를 위하는 척 약사발을 들고 동태후의 침실로 향했다.인자한 동태후는 자신을 찾아준 서태후를 반갑게 맞이했는데 서태후는 자신이 직접 다린 약이라 하며 약사발을 건냈다. 그 때 서태후는 졸도를 하며 쓰러졌고, 놀란 동태후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서태후의 궁녀가 "우리마마께서 마마의 탕재를 손수 지으시다 의원의 말에 사람의 피를 넣어 다리는 것이 효험이 더 크다하여 그 방법을 시행하시다가 그만..." 라고 말하자 동태후는 그 말에 감동하여 건강을 회복했다.그 후 동태후는 서태후를 불러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준 공으로 소원이 있으면 말해달라 했는데 서태후는 동태후가 가지고 있는 선황의 유언을 자신에게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자 동태후는 크게 고민을 하더니 이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황의 옥쇄가 찍힌 유언장을 주게 되었고, 그것을 받은 서태후는 받은 즉시 불로 태워버리고 말았다. 선황의 유언이 없으니 자신을 폐하고 싶어도 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서태후는 그 때부터 180도로 사람이 변하여 전과 마찬가지로 동태후를 오만하게 대했는데 이미 선황의 유언이 담긴 서찰을 태워버렸으니 그녀를 폐할 수 없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었다고 한다.사치생활서태후의 폭정은 계속되어 하루 세 끼 먹는 식탁을 풍성하게 채우지 않으면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고, 비단 옷만 해도 3000벌이 넘었으며 금은 보화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받은 뇌물만 해도 수백억이 넘었다고 전해진다.그녀의 하루 식탁은 농민 4만 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풍성했다고 전해진다, 서태후가 부린 사치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바로 현재까지도 중국의 대단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이화원이다. 서태후는 청,일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려 자신의 처소인 이화원을 치장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전쟁 중에도 오로지 처소 꾸미기에 급급했던 서태후. 이화원은 현재까지도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특히 인공으로 파낸 호수는 마치 바다와도 같다. 현재 유네스코에도 지정되어 있다.정치활동동치황제가 죽고나자 서태후는 자신의 동생의 아들인 재첨을 황제로 옹립한다. 재첨은 도광제의 제7서자 순원친왕 혁현의 아들인데 이 때부터 그녀는 부계로 왕위를 잇던 청나라를 모계 혈통으로 이끌고 만다. 서태후가 옹립한 황제는 광서황제, 서태후 때문에 재대로 된 정치도 못해본 황제이다.그러나 명목상 중국의 황제는 광서제였다. 이제 어엿이 성인이 된 광서제는 자신의 나라를 자기가 직접 통치하고 싶었다. 광서제는 청일전쟁을 통해 황제의 좁은 입지를 벗어나보려 했다. 그는 서태후를 졸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일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광서제의 입지를 넓혀주는 계기가 될 것을 두려워한 서태후의 방해 공작으로 서태후는 전쟁 중에 군비의 일부를 빼돌려 이화원을 치장하는 데 썼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어이없는 패배로 끝이 나고, 열강의 압박은 심해졌다. 광서제는 나라도 부강하게 하고 서태후로부터 벗어나보고자. 캉유웨이, 링치차오(양계초)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 학자군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과 제도를 고쳐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취지로 변법자강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운동은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보수파들에 의해 번번이 방해를 받았다. 서태후 세력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개혁파와 광서제는 당시 군부세력으로 뜨고 있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쪽이라 생각한 서태후를 선택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자금성 영대에 유폐시켜 버리고 그를 도와 변법자강에 나섰던 지식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캉유웨이를 비롯한 일부는 해외로 망명하여 목숨만은 건졌지만, 어쩌면 청조의 마지막 시도였을지도 모를 변법자강운동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이를 무술정변이라 한다. 후에 모든 견제 세력이 사라진 조정에 서태후의 또다시 독무대가 차려졌다. 명분상으로는 수렴청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TV에서 가끔 이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나는 아직도 나의 머리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곤 한다.10년이 지난지금.. 아직도 그곳의 악몽은 끔찍하다..바로 5.18내가 초등학교 3학년시절 학교에서 체험학습으로 5.18국립공원을 찾은적이 있었다.당시 10살이 였던 내가 5.18에 대해서 아는게 뭐가 있었을까? 그냥 훌륭하신 분들이 묻히셨던 곳이라고 해서 아이들과 장난치며 돌아다니다가 난 5.18지하 전시장으로 들어가게되었고, 그 곳에서 무심결에 보았던 고문사진한장 ..그때부터 나의 악몽은 시작되었다.너무 충격적인 모습이였을까? 집으로 돌아온 어린나는 3일내내 잠한숨 자지 못하고 전시관을 돌면서 들었던 음악이 가끔 TV광고에서 나오기만 하면 몸서리 치면서 당장 TV를 끄곤하였다. 그리고는 10년이 흘렀다.인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고, 또한 호남지역에 살고 있는 이상지금은 그러한 현상이 없어졌다.그런데 호남의 역사와 문화시간에 교수님께서 답사를 다녀오라고 하셨다.난 문득 머리에 스쳤다. 5.18도 가능할까?사실 나의 친구들은 좀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우리가 배운 범위안에서 답사를 가야할꺼 같다며 고인돌 공원을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5.18사건이 나의 마음을 끌고 있다는 것을 느낀이상 점수를 떠나서 다시한번 방문했으면.. 쫌 더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 우리가 배우지 않은 광주 5.18를 나의 첫 답사지로 정하였다.5.18에 답사를 가기위해 나와 나의친구는 사전 조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우선은 5.18이 무엇이고 왜 일어났는지를 알아야했다. 그래서나는 검색 포털 사이트에 무작정 5.18을 검색해 봤다. 생각보다 아주 깔끔하고 정확하게 관련 정보들을 찾기 쉽게끔 나왔었다. 너무 좋았던 것은 5.18사적지를 쉽게 구분해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을 쉽게 고를 수 있었다는점이다. 먼저 5.18의 시작지라고 할 수 있는 전남대학교를 찾아가기로 했고,먼저 전남대학교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봤다.내가 고2때 전남대학이트 조차 찾지 못했다그래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전화를 해서 박물관에 없고, 따로 평생교육원엔에 5.18기념관이 있을을 알 아낼수가 있었다.그렇게 나는 우리가 가야할 장소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를 사전조사하고 나의 친구는 교통편을 알아오기로 했다.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10시 50분에 광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고 1980년 5월의 광주를 찾아 떠났다.5.18의 발생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선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이야기 해야한다.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솟구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저곡가 저임금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으며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되었다.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었다.그러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부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전라도 광주였던 것이다.1979년 10·26사태이후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유신연장 음모에 의해 안개정국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함에 따라 그 동안 용솟음쳤던 민주화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진압하고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일부 정치군인들이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었다.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전남대 교문옆에는 5.18민중항쟁의 사직표시가 있었다. 그곳 비석은 이곳이 5.18발생의 첫 충돌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전남대학교는 너무나 컸다 남의 학교에서 건물을 찾기에 무리은 아주 뜻밖이었다. “아~우리 학교에 그런 곳이 있었어? 본거 같기도 하고 잘 생각이 안나네.. 잠깐 기다려봐 저기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물어 봐서 가르쳐 줄께”하지만 몇몇의 학생들이 지나갔음에도 불구 하고 재학중이라는 학생들도 그곳이 정확이 어디에 있는줄 몰랐다. 결국 참다 못한 내가 “평생교육원이라는 곳에 있다고 했는데..”이러니깐 그때서야 아저씨는 우리에게 평생교육원의 위치를 가르켜 주셨다.기념관을 정확하게 몰랐던 경비아저씨도 당황 스러웠지만 재학중인 학생들도 몰랐다는 사실이 나를 더 당황시켰다.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평생교육관안에는 5.18기념재단이라는 이름으로 되어있었다.그런데 아뿔싸 내가 박물관은 토요일에 연다는걸 확인하고는 여기도 당연히 토요일도 열꺼라 생각하고 토요일도 개관하는지 확인을 하지 못한 잘못 때문에 우리는 굳게 닫힌 문을 뒤로 하고 허무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수 밖에 없었다.전남대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할꺼 같았다 선배님들의 애국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있는 얼이 숨쉬고 있는 이곳에서 공부하노라면.. 부럽을 뒤로 한채우리는 다음 장소인 5.18국립묘지를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러 갔다. 그곳을 가기 위해선 518번의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 버스는 30분에 한 대씩 운행하기 때문에 조금의 불편함이 있었다.망월동에 위치한 국립묘지를 버스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니 만날 수 있었다.버스에서 내리면서 “어? 버스 번호가 518번이네.. 5.18국립묘지를 가서 518인가?”버스의 노선도를 자세히 보니 전남여고, 옛 도청인 문화예술의 전당역 ..이러고 보니 5.18관련 사적지를 따라 운행되는 버스였다. 이런 것을 보면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지 않아도 되는 광주는 참으로 문화의 광주라는 타이틀이 어울렸다.조금 걸으니 국립 5.18민주 묘지라는 큰 비석이 눈에 보였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숨이 턱 막혀왔다.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나의 몸이 반응 하는 것을 보니 내 자신이 걱정이 되었다. 괜히 지레 겁부터 먹어서 포와 분노에 떨며 처참하게 훼손된 주검을 손수레에 싣고와 이곳에 묻었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거나 5월 27일 도청 함락때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묻혔다. 그 뒤 이곳이 “민주성지”로 세계적으로 각광받게 되자 군사반란집단은 묘를 파내게 하는 등 묘지 자체를 없애려 획책 하기도 했다. 1994년부터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97년 새로운 5ㆍ18묘지(국립5ㆍ18민주묘지)가 완성되자 이곳에 묻혔던 영령들은 치욕의 17년을 뒤로하고 새묘역으로 이장되어 비로소 편안히 눈을 감게 되었다. 여기 구묘역은 당시의 참상을 처절하게 안고 있는 곳으로 원형을 복원하여 겉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광주광역시에 사적지로 지정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우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묘지를 둘러 보기로 했다. 이곳은 10년전의 나의 기억속 그 곳과 다른것 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다르다는 것은 10년전은 소풍시즌이라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오늘은 사람이라곤 나와 함께 답사를 친구와 할아버지 3분만 덩그러니 광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쓸쓸하기만한 묘지를 둘러본후 나는 담대한 마음으로 10년전 충격을 안겨준 전시관을 찾으로 돌아 다녔다. 어느 한 곳은 좀 더 좋은 관람을 위해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고 5.18추모관이라는 세련된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옛날에는 지하에 있었는데 새로워진 건물을 보니 내신 세월이 많이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친구와 건물을 들어서는데 그곳 관리자로 보이시는 분이 졸고 계셨다. 얼마나 사람들이 안왔으면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졸고 계실까? 다 우리의 세금으로 저 분들 월급주는 것일 텐데 착찹한 마음이 들었다. 추모관은 정말 깔끔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충격적인 사진들만 진열되었던 옛날에 비해 설명도 잘 해 놓고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센서가 반응해서 자동으로 영상물들이 보여지곤 했는데 깜짝깜짝 놀라면서 봐야 했지만 학생들에게 흥미를 주면서 설명도 쉽게 되어 있는거 같다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1층에는 유족들이 부모님을 잃고, 사랑하는 아들 , 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