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타 지 마 할(Taj Mahal)Ⅰ. 무굴 제국 - 힌두 문명 속의 이슬람 제국인도는 세계 4대 고대문명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 세계적인 종교가 태어난 땅이다. 인종도 다양하고 공식 언어만 해도 열다섯 가지나 된다.하지만 인도는 뭐니 뭐니 해도 종교의 땅이다. 인도인들은 각기 자신의 종교를 갖고 살아가며 종교에 살고 종교에 죽기도 한다. 그들에게 종교는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다. 그런 인도이기에 국기마저 종교를 표현하고 있다. 인도 국기는 가로로 긴 세 가지 색면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는데, 맨 위 오렌지색은 힌두교를, 맨 아래 녹색은 이슬람교를, 가운데 흰색은 그 밖의 모든 종교를 상징한다.인도를 배경으로 발생한 종교들은 하나같이 현실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 세계라며, 공덕을 쌓아 절대적인 자유, 즉 해탈의 경지에 이를 것을 가르친다. 불교는 그를 위해 자기 성찰을, 힌두교는 무욕을 방편으로 내세웠다. 인도인들은 또 육신의 죽음이 삶의 종말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죽음은 슬픔의 계기가 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만큼 이승에서의 삶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한다. 그것은 인도인의 삶과 의식 전반에 스며 있는 힌두교의 영향 때문이다.불교나 힌두교, 자이나교와 달리 이슬람은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을 믿는 터키계 사람들이 새운 무굴 왕조가 인도 북서부와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무굴 제국은 1526년 인도의 북부지방에서 발생하여 1858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3백여 년간 존속하면서 인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건국 시조는 티무르 왕조의 왕족 집안에서 태어난 바부르이다. 제국의 이름 무굴은 아라비아어로 ‘몽골’을 뜻한다. 어릴 때부터 델리를 유린하고 스스로 인도의 왕이라 칭했던 선조 티무르를 존경하며 인도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바부르. 그는 네 차례의 공격 끝에 델리를 평정하고 아그라에 입성해꽃피우는 데 기여했다. ‘백색 대리석의 진혼가’, ‘세게 최대의 사랑의 기념탑’이란 별명을 가진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쟈한은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어릴 때 이름은 쿠람이었다. 1627년 부친 자항기르가 세상을 떠나자 쿠람은 샤자한이란 이름으로 등극했다. 수많은 원정으로 영토를 크게 넓힘으로써 제국에게 최고의 번성을 안겨준 인물이기도 하다.역사상 대제국에는 장대한 건축물을 짓고 도시를 조경한 ‘건축 왕’이 있기 마련이다.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로마 제국의 하드리아누스 대제,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 등이 그 예이다. 그들이 남긴 건축물은 하나같이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무굴 제국의 샤자한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무굴 건축’이라 부르는 장려한 양식을 탄생시켜 절세의 건축 왕이 되었다. 왕궁이자 요새인 아그라 성을 새롭게 꾸몄으며, 델리에 레드포트를 건설했다. 또 라호르에 살라마르 정원과 라호르 성채를 세웠다. 조부 악바르가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면 샤자한은 지상의 낙원을 건설하겠다는 정열에 불타 아름다운 건축물을 곳곳에 세움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그는 무굴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행동력이 넘쳤으며 예술을 장려했고, 많은 시간을 보석과 귀중품을 감상하는 데 보냈다. 유능한 군 지휘관이기도 해서, 이십대 초반에 군사를 이끌고 반역을 꾀한 토족을 정벌해 아버지 자항기르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Ⅱ. 타지마할 - 무굴 건축 최고의 걸작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는 수도 뉴델리에서 남동쪽으로 2백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16세기 무굴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번성한 아그라는 버스로는 델리에서 네 시간, 열자로는 세 시간쯤 걸린다.타지마할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 하나의 보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타지마할 축조 당시의 연대기에는 ‘그 위용과 아름다움은 천상의 일곱 개 낙원을 능가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낙원이란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보았다는 것으로, 거기에는 일곱 개의 강이 흘렀다고 전 지상낙원으로 만들고자 그 안에 반드시 정원을 두었고, 그곳에 온갖 꽃을 심었다. 못도 빠뜨릴 수 없는 구성요소였다. 인류 최초의 낙원이라는 ‘에덴동산’이 있었다는 이라크의 우르는 페르시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이란인들은 실제로 중세 사파비 왕조의 도읍지 아스파한에 낙원 같은 정원을 건설했다. 무굴 제국의 문화적 뿌리는 바로 이 페르시아였기에 인도의 아그라에는 타지마할 정원을 조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장방형의 정원은 모든 시각적·감각적 요소를 동원하여 조영되어 바이올렛과 쟈스민, 장미 등이 자라고, 길을 따라 키 큰 사이프러스가 녹음을 드리운다. 못은 야무나 강에서 끌어올린 물로 만들었다.정원과 건물 사이엔 엄격한 구분이 없다. 묘당의 높은 기단이 둘을 갈라놓고 있을 뿐이다. 정원과 묘당은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하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엔 정적인 것이 없고, 리듬감마저 자아내어 마치 한 편의 음악처럼 흐르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묘당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존재하는 높이 42미터의 미나렛은 타지마할의 완성미를 더해줄 뿐 아니라, 본관을 중심으로 5도씩 바깥으로 벌어지게 함으로써 전면에서 똑바로 보았을 때 탑이 원근법에 의해 안쪽으로 구부러지지 않고 반듯하게 보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만에 하나, 지진이 발생하였을 경우 안쪽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세워져 있다.그리고 이 미나렛에 둘러싸인 묘당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순백의 표면에는 꽃, 잎사귀, 가지 등 식물 문양뿐만 아니라 과일, 새 등 무굴 시대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또는 서로 엉켜 있고, 문 위에는 코란 구절이 특유의 흐르는 듯한 서체로 조각되어 있다. 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전혀 단조롭지가 않다. 또 하얀 대리석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여 특유의 색깔을 빚어낸다. 새벽녘에는 보랏빛과 분홍의 장밋빛 그리고 억제된 황금빛을 머금으며,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오를 때에는 건물 자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낮에는 화사한 흰색을 그대로 뿜어낸다.산스크리트어로 양산이란 뜻이다. 이 양산은 타지마할에서 묘당 지붕과 미나렛의 꼭대기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영묘 내부에는 열여섯 개의 방이 있는데, 핵심은 지하 1층의 팔각형 묘당이다. 묘당에는 각 면에 커다란 이완이 있어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아치형으로 상부의 둥그런 천장마다 벌집 모양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으며, 그 위 벽면은 갖가지 꽃들이 새겨져 있다. 이완 옆으로 난 창문도 크기만 작을 뿐 형태나 장식에서는 이완과 다르지 않다. 격자창으로 들어온 빛은 내부를 안온하게 만든다. 바깥 기온이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그곳은 늘 섭씨 22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공간은 그리 넓지 않으나, 두 개의 석관이 있을 공간으로는 적당하다. 뭄타즈와 샤자한의 석관인데, 진짜는 아래층에 안치되어 있고, 일반인이 출입하여 관람할 수 있는 것은 가짜인 이 두 석관이라고 한다.원래 인도에는 묘당이라는 건축이 없었다. 윤회사상을 믿어 무덤을 아예 만들지 않은 것이다. 인도에 묘당이 들어선 것은 이슬람이 전래된 이후부터인데, 처음에는 둔중했다가 기존 양식에서 벗어나면서 웅대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춰나갔다. 1565년 델리에 축조된 후마윤 묘가 선구적 역할을 했다면, 정점을 찍은 최고의 걸작은 타지마할이다. 후마윤 묘가 정원 한가운데 축조된 데 반해, 타지마할의 묘당은 북쪽에 치우쳐 있어 앞으로는 넓은 정원을 조망할 수 있고, 뒤로는 야무나 강을 바라볼 수 있다. 인도 건축사에 찬연한 빛을 발하는 타지마할은 전통적인 힌두 문화에 이슬람 문화가 융합된, 무굴 최고 걸작으로 평가된다.Ⅲ.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 - 대리석에 새긴 진혼가타지마할은 군사 원정과 예술 진흥이란 이질적인 두 가지 면에서 혁혁한 공적을 남긴 샤자한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샤자한이 누볐던 전장의 먼지는 가뭇없지만, 아이를 낳다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비에 대한 사랑은 위대한 기념비가 되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건축 공사는 뭄타즈 마할이 죽은 이듬해혼식은 1612년 4월 30일에 거행되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쿠람에게 결혼 선물로 아랍·터키종이 교배해서 난 명마와 1천 마리의 코끼리, 에티오피아와 러시아 변경 지대에서 뽑아온 노예, 황금 술잔과 최고급 비단을 바쳤다. 신부 집에서는 악사와 가수, 댄서들을 동원한 가운데 성대한 연회가 열렸고, 여기에 황제 자항기르도 참석했다. 결혼 축하연은 한 달이나 계속되었고, 자연 아그라는 흥분에 휩싸였다. 낮 동안에는 현란한 행렬이 길을 메웠으며, 밤에는 검은 비로드의 하늘을 찬란한 불꽃이 수놓았다. 결혼식이 끝나자 샤자한은 신부에게 ‘선택 받은 자’를 의미하는 뭄타즈 마할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란 뜻으로, 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쿠람은 이미 페르시아인 아내를 두고 있었다. 아버지 자항기르가 페르시아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시킨 정략 결혼이었다. 이슬람 왕조는 궁전 내 여인들이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한데 모여 거처하는 하렘이라는 방을 두었고, 일부다처제를 유지했다. 순서로 따지면 뭄타즈 마할은 샤자한의 세 번째 여인인데도, 역사서 어디서도 뭄타즈 마할 이외의 여인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샤자한은 그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고, 뭄타즈 마할에게만 빠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왕국의 입장에서도 페르시아 출신인 뭄타즈 마할의 존재가 중요했을 것이다. 당시 무굴 왕과 무굴의 고위층 인사나 지식인들은 페르시아를 단순히 선조의 피가 흐르는 곳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대국으로 존경했다.하지만 정략적인 면을 떠나,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 두 사람은 다시없는 천생연분이었다. 왕은 왕비에게서 위엄과 온화한 마음, 지성과 진중함을 겸비한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견했다. 샤자한은 국정에 관해서도 왕비와 의견을 나누었다. 왕비는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다.샤자한은 1630년대에 들어서면서 데칸 지역을 침공했다. 왕자 시절부터 아내를 동반했던 그는 이때에도 왕비를 데리고 갔다. 원정길인 인도 중부의 부르한푸르에서 뭄타즈는 갑자기 산기를 느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