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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 금융 시장의 변화
    국제 금융 자본 시장의 변화와 아시아의 과제출처 : 일본경제백서 2009 일부 발췌(1) 세계를 도는 자금의 흐름최근,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의 흐름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민간기관 조사(이하「M&C(2008))」)에 따르면 금융면에서 상호의존관계를 높이고 있고, 2006년 말에는 대외 투자 잔액이 74.5조 달러로 사상최고가 되었으며 2007년도 유럽과 미국시장에서의 신용불안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이 같은 가운데 일본에 대해서도 2000년 이후, 미국과 유럽, 아시아 및 중동 간에는 자본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과 각국?지역 간의 자본거래 증가는 상대적으로 작다」라는 지적이 행해지고 있다). 이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금의 흐름의 융성에 대해서 확인해 본다. 자본수지로 본 세계의 자금의 흐름(2006년, 2007년)1)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금의 흐름다음 그림은 미국, 영국, 유로권의 3대지역간의 자본거래가 특히 활발함을 보여준다. 즉, 국경을 넘은 자본의 흐름은 유럽과 미국중심인 것을 알 수 있다.미국으로 세계의 자금이 모이는 구조가 형성됨으로, 유럽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아시아, 중동, 중남미 등의 신흥국으로부터도 폭넓게 자금이 유입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3대지역의 하나인 영국으로부터 일본에 대한 자본의 흐름이 유럽과 미국간가 맞먹는 정도의 크기가 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이와 더불어, 2006년과 2007년을 비교함으로써, 미국 서브프라임 주택대부문제)의 영향을 검증할 수 있다.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이 유로권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자본이동이다. 2006년에는 유로권으로부터 미국에 대한 자본수출이 1,896억 달러에 달하고 있었지만 2007년에는 535억 달러의 자본유입으로 바뀌었다. 이는 EU의 금융기관이 미국의 증권화상품(CDO)등)을 대량으로 매각하였기 때문이다.그리고 BIS)통계에 의해서, 각국 은행의 대외 여신 잔액의 상황을 보면, 미국중심의 자본수하였던 것이다.(2) 다양화되는 금융?자본시장 참가자금융의 세계화에 따라, 투자자, 기업, 금융 기관 등의 각 참가자의 행동양식이 변화하고 있다. 투자자는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고, 최적인 투자기회를 보다 폭넓은 선택방안(산업, 지역, 통화)에서 택하도록 하고 있다. 또, 다국적기업은 국경을 넘는 사업 활동이나 M&A을 위한 자금조달이 국내?국외 쌍방의 금융?자본시장을 통해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금융기관은 세계수준에서의 격심한 경쟁에 노출이 되어, 종래의 중개 업무이나 수수료사업 이외의 수익원을 찾아야 한다고 되고 있다.1) 발전한 금융기관의 재편?통합실제로 각국의 금융기관은 수익확대를 위해서 위험에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충실한 자기자본과, 개인고객에 대한 업무에 필요한 대규모의 정보시스템 투자, 여러 가지 금융거래가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 등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초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금융기관의 재편이 활발하게 되었다. 또, 2000년 이후에는 국경을 넘어선 금융기관의 M&A가 활발해졌고, 세계에서 금융기관의 재편성이 진행되고 있다.2) 새로운 주체의 등장국경을 넘어선 자금흐름의 확대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종래의 다국적기업이나 금융기관 활동에 덧붙여, 투자펀드 등의 움직임을 들 수 있다). 특히,① 국제 분산 투자를 추진하여, 2006년 이후 국제상품시장에도 본격적으로 투자하는 연금 자금② 원유가격급등으로 운용자금이 커진「오일머니」③ 아시아 각국을 중심으로 엄청난 규모로 팽창된 「외화준비」④ 私募로 자금을 모아 다양한 방법으로 운용하는「헤지펀드」 각 금융참가자 규모와 그 성장율⑤ 국경을 넘어서 비상장기업에 대해 투자하여, 그 기업의 성장?재생을 지원하는)「Private Equity Fund」.가 주목된다. M&C(2008)에서는 이들의 2006년 말의 잔액과 2000년에서부터 2006년에 걸친 연평균 성장률이 추계되어 있다.다음 그래프를 보면 특히, 근래 성장률이 높은 것은 ② 에서 ⑤ 시장 거래량에서 점하는 헤지펀드 지분을 보면, 크레딧트?(금융)파생상품(60%), 고수익채(47%), 신흥국채권(45%)등의 시장에서 매우 높은 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5) 주목 받고 있는 소버린웰스펀드소버린웰스펀드(Sovereign Wealth Fund(이하「SWF」))란 일반적으로 중앙정부를 시작으로 국가의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투자펀드이고, 통화당국에 의한 남는 유동성의 운용이나 후세를 위한 자금 준비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한다. SWF은 결코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50년 이상 전부터 설립되어 있었다. 근래, 아시아 신흥국의 경상수지흑자 축적에 의한 외화준비 확대나 원유가격 급등에 따른 산유국가 오일머니 축적에 의한 여유자금 확대 등을 배경으로, SWF을 신설하는 움직임이 수 없이 관찰되는 등, 자산규모를 증대시키고 있어 그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또, SWF은 미국 서브프라임주택론 문제에서 큰 손실을 낸 유럽과 미국 은행 등에 대한 출자를 행하였기 때문에, 그 동향이 나날이 주목을 모으고 있다. 민간조사기관)에 의하면, 2007년의 전 세계의 M&A총액 1,640억 달러 중, SWF가 관여하고 있는 것이 630억 달러를 상회하고 있고(전체의 35%). 나아가 2008년 1월 금융부문에 대한 출자에서 점하는 비율은 93%에 달하고 있어, 최근의 금융부문에서 특히 큰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조사회사 디로직에 의하면, SWF는 작년 9월 이후, 금융부문에 540억 달러의 자금을 주입하고 있다.표2를 보면 SWF 자산규모는 계속적으로 누적되는 거액의 무역흑자 및 오일머니를 배경으로 나날이 확대되고 있고, 헤지펀드 규모를 넘어서서, 2007년 말 시점에서는 3.5조 달러 규모로 추계되고 있다. 가장 자산규모가 큰 것은 아랍수장국가연방의 아부다비투자청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자산규모는 8,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로 추정된다. 세계의 SWF국가명펀드명자산원자소유자,자산관리 등투자전략&전략적자산배분아랍에미리트ADIA(아부다비투자청)ADIC(아달러는 정부로부터 위임받아 총 20달러를 외환기금사가 운용→글로벌 자산 배분투자 지향→SAA는 아직 사용하지 않음캐나다앨버타유산저축신탁기금$15 billion기타앨버타주정부 소유, 앨버타 파이낸스 운용글로벌 SAA방법으로 투자, 채권30%, 주식 45%, 부동산 10%, 대체투자 15%칠레경제사회 안정화기금$9.83 billion동2006년 설립, 정부소유.칠레 중앙은행 운용SAA는 국채 72%, 28%는 단기금융시장 기관(달러?유로?엔)에 배분연금준비기금$1.37 billion동위와 동일SAA는 국채 79%,21%는 금융시장기관(달러?유로?엔)에 배분보츠와나풀라(보츠와나화폐단위)기금$5billion이상다이아몬드정부와 보츠와나 중앙은행 공동소유→선진국 주식과 채권에 투자신흥(공업국)시장에는 투자하지 않음출처: 「Global Financial Stability Report 2007 April」IMFSWF에 의한 투자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행해지고, SWF와 투자수입국가의 쌍방에서 이익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으로, 투자수혜국가의 입장에서는 이윤추구 이외에도 국가전략이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안전 보장 면에서 우려가 되는 점, 다액의 공적자금의 흐름이 변하는 것에 의해 세계시장에 대한 충격이 예상 된다는 점, 정보공개에 불투명한부분이 큰 점들이 걱정되는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정세를 고려하여, 현재, IMF 및 OECD에서는 SWF의 통치구조와 투명성 확보 등의 관점 및 투자수혜 국가의 투자 규제 등의 관점에서 SWF 및 투자수혜국가 우수사례의 책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현재, SWF 자산규모의 합계는 IMF 추계에서는 2013년에는 6조 달러에서 10조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향후 SWF은 세계 자금흐름의 속에서 더욱 존재감을 확대시킬 것이다.(3) 국제자금순환의 변화 조짐국제금융허브로 영국?EU가 대두하는 한편으로 중국 등의 아시아 신흥국이나 산유국가에서 EU에 대한 수출이 확대되는 등, 실체 경제면에환할 것을 발표했다. 이 같은 달러로부터 유로에 대한 전환 결과, 신흥국을 중심으로 세계 외화준비에서 점하는 달러의 비율이 낮아지면서 유로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③ 지폐발행액 증가각 통화의 신규지폐발행액을 보면 당장 유로는 달러를 웃돌고 있다. 지폐가 보다 많이 수요 되는 것은 그 통화가 실제거래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실물거래 베이스에서는 유로의 존재감이 달러를 상회한다고 해석된다.④ 국제채권을 뒷받침하는 통화BIS통계에 의하면 2006년 12월말의 국제금융시장의 채권 발행 잔액은 17.6조 달러, 통화별로 보면, 유로중심의 지분이 가장 높아 47.3%, 두 번째가 달러중심으로 36.4%, 그 다음이 영국 파운드 중심으로 8.3%였다.2) 이후의 국제금융?자본시장의 전망이상과 같이, 유로의 존재감이 확대되고 있다. 당분간은 미국경제의 실속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 일개국 중심의 자금유입구조가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구조변화가 헤지펀드 등의 새로운 참가자의 존재감 확대와 더불어, 국제금융?자본시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앞으로의 동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4) 아시아의 국제금융?자본시장의 흐름1) 아시아통화위기1997년부터 98년에 걸쳐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아시아의 신흥국에서 발생한 통화?금융위기(이하「아시아 통화위기」)는 그때까지 높은 성장을 계속했던 이들 아시아 각국에 대량 유입되어 있던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의 단기자금이 일제히 철수하여 통화가 급락(통화위기)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주요수출품목인 반도체 시황이 악화되어 수출 감소나 경기후퇴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국의 외환제도 변경을 계기로 시작했다.이들 국가들에 대한 자본유입은 당초 직접투자가 과반을 차지하다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직접투자가 90년대 들어 정점을 맞이한 후, 부동산?증권투자 등의 비실물 부문에 대한 투자가 활발해져 단기적으로 이동하는 외국자본의 유입이 주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외국자본의 유입규제완화와 사실상 달러.
    경영/경제| 2009.05.26| 11페이지| 2,000원| 조회(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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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영토분쟁 평가A+최고예요
    목차쿠릴열도와 북방 4도 문제 ( 러시아 / 일본 ) ----------------------1) 쿠릴열도와 북방 4도 ---------------------------------------------2) 영토분쟁의 간략한 내용 ------------------------------------------3) 분쟁지의 중요성 ------------------------------------------------4) 영토갈등의 국제법적 배경 -----------------------------------------5) 조약과 관련된 각국의 증거 --------------------------------------센카쿠 열도 문제 ( 대만 / 중국 / 일본 ) -------------------------1) 센카쿠 열도 ---------------------------------------------------2) 영토분쟁의 간략한 내용 ------------------------------------------3) 분쟁지의 중요성 ------------------------------------------------4) 분쟁에 대한 각 국의 입장 -----------------------------------------5) 주장에 대한 근거 -----------------------------------------------6) 국제법상의 평가 -----------------------------------------------독도 문제 ( 한국 / 일본 ) -----------------------------------1) 독도 --------------------------------------------------------2) 독도의 가치 --------------------------------------------------3) 영토분쟁의 간략한 내용 -----------------------------------------4) 분쟁지의 중요성 ---금, 황 등 (해양 석유나 천연가스 존재) 의 해저 지하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경제적 중요도가 높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실정으로 풍부한 수산 자원과 무역로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4) 지리적 의의쿠릴열도는 약 1만 5,600㎢로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가장 적합한 곳이 약 1만 6,613.46㎢인 강원도이다. 강원도보다는 약간 작지만 이 정도면 우리나라로 보았을 때는 굉장히 큰 열도라고 할 수 있다.(5) 국제 ? 정치적 의의일본의 영토분쟁은 모두 국제적 여론을 얻기 위함이다. 이 네 섬 중에 하나라도 일본 손에 넘어가면 국제적인 여론은 지금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또한 미국의 불분명한 태도도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싣고 있는 실정이다.4) 영토갈등의 국제법적 배경- 1854.12.15. 시모다 조약 제2조금후의 일본국과 러시아국의 경계는 에토로후 섬과 우푸루 섬의 중간으로 한다. 에토로후 전도는 일본국에 속하고 우루푸 전로도로 부터 북쪽 쿠릴제도와 러시아의 사할린까지는 일본국과 러시아국간의 경계를 나누는 이제까지의 관례대로 한다.- 1875 樺太千島交換?約쿠릴열도와 사할린 영유권 교환 ( 지도 )- 1905.9.5 포츠머스 강화조약제9조 "러시아제국 정부는 사할린도 남부 및 그 부근에 있어서의 일체의 도서와 당해 지방에 있어서의 일체의 공공영조물 및 재산을 완전한 주권과 함께 영원히 일본제국에 양여하며 기타 양여지역의 북방경계는 북위50도로 정한다." ( 지도 )- 1945.2 얄타회담4항 소련의 대일참전에 관한 협정 (얄타비밀협정), 소련은 독일항복 2∼3개월 뒤 다음의 조건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 외몽골의 현상유지, 사할린 및 쿠릴열도의 소련귀속.- 1945.7.26 포츠담선언 ( 포츠담 항복 권고 최후통첩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국의 주권은 본주, 구주, 북해도 및 서국과 우리들이 결정하는 제소도에 국한되어야 한다."- 1945.8려지면서 영토분쟁이 발발했다.2) 영토분쟁의 간략한 내용1895년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그 다음 해에 센카쿠 열도를 일본 령으로 편입 시킨 후, 이 섬들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2차 세계 대전 후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은 강점한 영토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받아들였음에도 중국에 센카쿠 열도를 반환하지 않았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센카쿠 열도를 일본에 흡수시켰지만 그 당시 중국은 내부의 문제로 인해 신경 쓰지 않았다.센카쿠 열도는 종전 시 미군에 의해 오키나와와 함께 점령 되었고, 미군이 센카쿠 열도의 일부 섬을 사격장으로 사용하면서 1970년경에 일본 령으로 굳어졌다. 이에 중국은 1971년 12월 성명을 내고 동 도서의 영유권을 처음 주장했다. 1972년 미군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면서 센카쿠 열도도 일본 령으로 되돌아갔다.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지난 1978년 중국어선에 의한 영해침범이 있었고, 이에 맞선 일본의 우익단체가 등대를 설치했다. 1992년 중국이 센카쿠제도와 남사, 서사제도의 영유를 명기한 영해법을 채택했고, 일본은 강력히 항의하는 등 아직도 분쟁이 일고 있다.3) 분쟁지의 중요성(1) 지리적 의의일본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과 관련, 중국대륙붕이 일본 영토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그 중간선을 그어 동쪽은 일본의 관할이라는 중간선 론을 주장하고 있고, 중국은 대륙붕이 자국연안으로부터 오키나와 서쪽해상까지만 뻗어있고 센카쿠 역시 대륙붕 위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유권 문제로 이어진다. 또한 이곳에는 고등어 ? 정어리 등과 같은 어족 자원이 풍부한 황금 어장이 산재해 있다.(2) 역사적 의의중국은 청일 전쟁 때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은 제국주의 시대에 맺어진 불평등 조약으로 센카쿠 열도에 대해 무력에 의해 강탈당한 것에 불과하며 샌프란시스코 조약 역시 미국과 일본 간의 일방적인 조약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센카쿠 열도정부 내무대신에게 센카쿠 열도를 오키나와 현에 편입시키자고 건의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경계표지를 설치, 칙령 제 13호로 국내법상 영토편입 조치를 시행했다.또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센카쿠 열도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모노세키 조약 전부터 센카쿠 열도는 일본의 영토이며, 그렇기 때문에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센카쿠 열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 그 후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의거하여 일본에 반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895년 이후 일본 정부가 계표의 설치 및 개발 허가조치, 기상관측소 설치 등 실효적 지배를 시작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3조에 의거한 미국의 신탁통치에 센카쿠 열도가 포함되었고 같은 맥락으로 오키나와 반환 조약 때 센카쿠 열도가 반환되었다고 주장한다.(2) 중국 측 주장에 대한 근거중국이 센카쿠 열도를 영유한 것은 1372년부터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명나라 홍무제가 현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 왕국을 정복, 그 후로 조공을 받아왔다고 주장하고 이러한 관계가 1879년 일본의 편입 전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은 이 같은 오래된 센카쿠 열도의 사용관행과 중국인들의 점유와 개발을 입증하는 역사적 문헌의 존재를 들어 영유권을 주장한다.16세기 중국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중국의 연안 방어구역이 강화되었는데, 그 때 센카쿠 열도 역시 복주성의 5개 해군초개구역 중 하나에 포함되었었다는 군사적 관학 기록도 있다. 또 1893년 서태후가 약사에게 센카쿠 열도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중국은 청일전쟁의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 제 2조에 따르면 ‘대만에 인접하거나 부속된 도서’로서 센카쿠 열도를 규정지었으며 그 이후 센카쿠 열도가 일본에 의해 강점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2차 대전에 패전국인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절취한 모든 영토’, ‘탐욕과 폭력의 수단으로 약취한 모든 다른 지역’에 조어도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6) 국제법상의 평가센카쿠 섬과 관련된 법적 쟁점은 쟁점 상호간의 해역은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기 때문에 좋은 어장을 형성한다. 어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는 회유성 어족인 연어, 송어, 대구를 비롯해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5) 매개체적 의의남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정치적 이념과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모든 정치적 환경에서 벗어나 한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게 되며 독도는 가장 적합한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서 남북 공동대응은 상징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남과 북이 따로 대응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한민족으로서 공동체 의식은 더욱 강화 될 것이다.(6) 독도 주변 해역의 천연 가스층독도 인근해역 울릉분지는 천연가스의 벨트를 형성하는 지역으로 관측되고 있다. 1982년,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UN 해양법 협약이 채택되었다. 바다에 대한 공해 자유의 원칙에서 연안국이 200해리 (1해리=1.8Km) 까지 해저를 포함한 바다의 모든 부분에 대한 탐사, 개발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일본 측 추산에 의하면 일본 령 내에 매장된 독도의 하이드레이트 층은 현재 일본에서 소모되고 있는 천연가스 100년분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그리고 일본은 시험생산 체계까지 돌입하였다. 이것은 일본정부의 체계적 독도 침략으로 볼 수 있다.3) 영토분쟁의 간략한 내용1945년 한국의 광복과 함께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귀속되었고, 따라서 1952년 1월 18일에 보고된 ‘인접 해양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서 한국 정부는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의 한계를 명백히 하였다. 또 1954년 8월 독도에 등대를 세워 세계 각국에 통고하는 한편 독도 주변 영해 내의 수자원을 확보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정부의 조치에 대하여 일본이 1952년 1월 28일 한국에 항의하며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옴으로써 독도에 대한 영토분쟁이 시작 되었다.일본은 역사적으로 독도를 긴 세월동안 이용해
    사회과학| 2008.11.14| 18페이지| 2,500원| 조회(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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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일전쟁2 - 러일전쟁의 의의 중심으로
    ■ 서론1. 고찰 ------------------------------------ 1■ 본론1. 러일전쟁 --------------------------------- 11) 러시아와 일본의 국내 상황 / 12) 배경과 원인 / 23) 전개 / 44) 결과 / 102. 러시아의 패인과 일본의 승인 ------------------- 111) 러시아의 패인 / 112) 일본의 승인 / 133. 의의 -------------------------------------- 141) 러일전쟁의 제국주의적 요소 / 152) 한반도와 러일전쟁 / 163) 일본, 다이쇼데모크라시와 러일전쟁 / 164) 동북아시아와 러일전쟁 / 17■ 결론 -------------------------------------------- 181) 맺음말 / 18※ 사진 속 러일전쟁 / 19■ 참고자료 ----------------------------------------- 21■ 서론1. 고찰우리나라는 조선 말 역사적 전환기에 세계의 근대화 물결에 합류하지 못한 채 강대국에게 침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우리의 국토는 그들의 이권다툼으로 얼룩졌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적 개혁에 성공한 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두 차례의 전쟁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며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청일 전쟁이 사실 상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조선 땅에서 중국과 일본이 충돌한 전쟁이라면, 여기서 다룰 러일 전쟁은 서양의 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와 팽창주의의 야심을 품었던 일본이 만주와 한국의 배타적인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제국주의 전쟁으로,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영토 안에서 벌어져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손꼽히는 전쟁이다. 당시엔 아시아의 신흥국이 유럽의 일대 강국에 도전한 전쟁으로, 전 세계적으로 귀추가 주목되던 대사건이었다. 전후러시아 측의 사망자는 약 5만 명이었고, 일본 측 사망자는 약 8만 4천명으로, 청일전쟁 시 (약 1만 3천명)의 대략 6.5배나 된다.러일전쟁을 전후했다.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힘으로 러시아와 싸워 승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대한 영국·미국의 이권을 지키는 헌병 역할을 스스로 떠맡고 나섰고, 이로써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의 막대한 전비 17억 엔 중에서 8억 엔을 영국과 미국에서의 외채모집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한편 러시아도 삼국간섭 후 1896년 러청은행을 설립하고, 북만주를 횡단하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단거리로 잇는 동청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하였고 또 1898년 뤼순·다롄을 조차하고 여기에 대규모 해군 근거지를 계획했으며, 조선에 대해서도 1897년 재정고문과 군사고문을 파견, 1898년에는 한러은행 등을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 일어난 이권반대운동과 영·일 양국의 방해로 취임하지 못하고 곧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한러은행도 폐쇄되었다.이에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일보 후퇴하여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굳히려 하였다.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제국주의 열강과 공동 출병한 러시아군은 만주를 점령, 조선을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삼으려 하였으나, 일본이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여 대응하자 러시아도 양보의 태도를 보여 4월 만주철병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환부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해 1902년 10월 제1차 철병을 단행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적극적인 대 만주정책으로의 선회로 1903년 4월로 예정된 2차 철병을 거부하는 대신에 오히려 만주에 군대를 증파했다.이후 러시아는 봉황성·안동성 일대를 그 지배하에 두고 뤼순을 요새화했으며, 같은 해 7월 동청철도를 완성했다. 또 8월 아무르 지역과 관동지역을 동아시아 총독구로 하는 이른바 동아시아 총독부의 설립을 발표했으며, 1903년 4월 압록강 하류 용암포를 점령하고 군사기지를 설치하여 조차를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만한교환의 원칙으로 수차례 교섭을 시도했으나, 더 이상 협상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결의하게 되었고 1904년 2월 4일 대 러 교섭 단절과 아울러 개전을 결정, 2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게 해 달라" 고 요청을 하게 된다. 하지만 1902년 영-일 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영국은 일본에 불리할 것을 고려해 당연히 이것을 거절했고, 발틱함대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했다. 한편, 발틱함대가 지구반대편으로 항해하며 대장정을 하고 있을 무렵, 이미 극동함대가 퇴각한 동아시아에서의 전황은 이미 거의 끝이 난 상태였다.그런 상황에서 1905년 5월 27일, 발틱함대는 3만 7000km를 항해하여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무려 9개월 만에 쓰시마해협에 겨우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해군은 이미 미리 알고 함대를 대치시켜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서 쓰시마해전이 벌어지게 된다.쓰시마해전의 결과는 매우 참혹하였다. 장장 9개월의 지친 항해로 인해 러시아의 수병들은 매우 지쳐 사기가 떨어져있었고 (당시 러일전쟁의 무대가 러시아 입장에서는 극동에 치우쳐 있어 물자의 수송이 매우 어려웠다. 해상로가 있었지만 그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과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도 어려웠다.) 이 같은 이유로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발틱함대는 이동하던 중 보급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반면, 사기가 충만하고 본국의 해안에서 싸울 수 있었던 일본해군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결국 발틱함대는 아시아까지 달려온 보람도 없이 매우 무기력하게 괴멸 당하였다.대패 한 발틱함대는 원래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단 두 척만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38척 중 36척이 가라앉았고 이로써 일본군은 확실히 승기를 잡게 된다.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그 쓰시마해전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영웅이 되었고 일본해군은 이제 미국과 함께 태평양의 제해권을 양분하게 되었다.발틱함대 패배 후 러시아는 이후 군사력과 재정이 파탄 나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쓰시마해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만한 자금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의 금융재벌들에게 돈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들이거나 하지를 못했다. 예부터의 구성분자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강압하지도 못했고 그래서 로마노프 군주제는 양편에서의 경쟁에서 패하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제국은 경찰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무척 자의적으로 지배되는 국가이기도 했는데, 러시아 군주제는 권위주의의 극단의 사례에 속했다. 이러한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로 전제타도의 함성이 자주 일어났다.1762년과 1801년에는 황제가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러한 황제살해 사건은 재위의 황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쿠데타였다. (뾰토르3세 폐위 후 바뷔르1세 살해 1762년) 1825년에는 처음으로 참의미의 혁명적인 조직이 형성되었고 이는 군 장교와 귀족과의 음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전제타도와 농노제의 해체를 목표로 한 청년귀족 사관들이 봉기한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타도되었고 그 후 1826년에 제위에 오른 니콜라이 1세와 그의 후계자 알렉산도르2세는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허술한 집에 벽에 통치자의 초상화를 장식했고 황제의 말은 문자 그대로 곧 법률이었다. 간단한 구두의 훈령이 입법부의 모든 법령을 무효화시켰으며 지방의 경찰은 행정적인 명령에의 의해 형벌을 가하는 권한을 지녔다. 그렇게 되자 19세기 이후 황제 중 어느 누구도 선거에 의한 대의원제도의 의회와 권력을 나눈 황제는 없게 되었으며, 정당은 금지되었다. 공개적인 집회는 엄격히 통제되고 저작물도 발행 전에 사전검열이 실시되고, 당연지사처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② 짐스러운 러시아의 거대함러시아 제국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쿠라이나, 시베리아, 바르트, 자카프카스 지역을 정복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기후가 무척 춥고 시베리아의 광대한 지역은 영구적인 얼음 땅이고 중앙아시아의 일부는 사막이었다. 러시아 본토는 온화한 기후다. 그러나 모스코바의 추위는 런던이나 파리, 뉴욕의 겨울보다 훨씬 길었다.그런 러시아의 거대함도 큰 짐이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통치하고 있던 폴란드 동부에서 태평양측의 브라지오스톡까지 5정하고 만반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 군대에 이길 자신은 없었다. 절대적으로 이길 승산이 없었으므로 사전에 어떻게든 유리한 태세를 갖추고 난 후, 미국을 움직여 미국이 두 나라 간의 강화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③ 러시아의 좋지 않던 정세러일전쟁은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세계최대의 함대인 발틱함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구 반대편인 조선까지 가려면 몇 개월이 걸려야 했는데, 그동안 일본은 철저히 러시아를 공격 하였다. 발틱함대는 항상 얼어있는 북극해 때문에 남쪽으로 가야만했는데 당시 영국의 소유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여야만 했다.그러나 영일 동맹으로 인하여 전세가 일본에 불리해질 것을 안 영국이 통과를 시켜주지 않아 아프리카 희망봉으로 해서 돌아가야만 했다. 더군다나 인도,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발틱함대가 지나갈 때마다 속속들이 일본에게 보고가 되었다. 빠른 길로 지나가지 못할뿐더러 일본에게 정보가 즉시 보고되어 발틱함대는 일본 근해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공격을 당했고, 결국 발틱함대는 궤멸하게 되었다.④ 일본의 부상일본은 신흥공업국으로서 제국주의에 첫발을 딛는 시기라, 공업의 발전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군대가 신식화가 되면서 군 장비는 물론이고 그것을 다루는 전문지식까지 갖춘 현대식 군대로 거듭나고 있었다.3. 의의러일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식민지분할을 위한 열강들의 세력 각축의 결과였다. 이는 한국 및 만주를 둘러싼 두 국가의 무력충돌에 그치지 않고 일본의 배후에는 영국·미국의 자본이, 러시아는 프랑스의 자본이 각각 지원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만주와 중국의 진출 및 태평양진출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정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며, 무엇보다도 대륙으로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의 실현이 이루어지게 된다.오늘날 많은 일본인에게 러일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방위전쟁으로 기억된다. 그들에게 있어 러일전쟁은 온 국민이 참여해 서구 열강에 승리를 거두고
    사회과학| 2008.10.14| 21페이지| 2,000원| 조회(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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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일전쟁
    목차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P1. 러일전쟁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P2. 배경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3P3. 원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4P4. 진행과정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P4-1 발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P4-2 경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6P5. 결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7P6. 영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P6-1 한반도에 미친 영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8P6-2 동북아에 미친 영향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0P7. 러일전쟁 後 ? ? ? ? ? ? ? ? ? ? ? ? ? ? ? 권 획득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일본의 외교책으로서 러시아와의 타협을 모색하려는 '러·일 협상론'과 영국과 제휴하여 러시아 견제를 노리는 '영일동맹론'이 대립되었으나, 결국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성립되어 러시아와의 대립이 명확해졌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만주의 독점적 지배는 물론, 압록강 연안에 진출하여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③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 국내에서는 주전론과 반전론으로 국내 여론이 양분되는 듯하였으나, 세론의 대세는 차차 주전론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1903년 6월 23일본 정부의 주요 각료·원로들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과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각각 인정하는 ‘만·한교환론’(->사실은 한국을 일본의 지배하에 두고, 만주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력 약화를 노렸음)에 의한 대(對)러시아 교섭을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 8월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응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양국의 교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육군을 중심으로 전쟁준비가 진척되었으나,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에 비추어 군사행동을 남만주에 한정한다는 전제에 입각한 계획이었다.④ 일본 지도부의 개전의지가 무엇보다도 확고하였다는 점이 러일전쟁의 무시 못 할 원인이 되었다. 러-일전쟁기의 일본 내각의 중심은 가쓰라 타로 수상과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었다. 특히 고무라 외상은 러시아와의 충돌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고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였으며, 가쓰라 수상도 러시아가 만주 점령에 이어 조선 지배를 시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영일동맹을 추진하였다.4. 러일전쟁의 진행과정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 3척의 러시아 전함을 인천에서 격침9일 일본 원정군 서울 진입10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23일 한일의정서 체결4월 8일 영불협상5월 18일 한국, 일본의 압력으로 러시아와 체결한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함8월 20일 한일협정 (일본인 고문 채용을 규정함)22일 제 1차 한-일 양국의 전쟁 수행능력은 펑톈 회전 전후부터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러시아는 계속되는 패전으로 사기가 침체되고 그 해 1월 ‘피의 일요일)’로 비롯된 군대의 반란과 농민폭동(제1차 혁명)이 일어나 혁명 진압이 급선무였다.약 20억 엔의 전비 가운데 12억 엔의 공채 모집에 응함으로써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 ·미국도 일본의 승리가 만주의 단독 점령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10년 전의 청일전쟁 승리에 이어 러시아마저 물리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리하여 미국 ·프랑스는 3,4월경 러-일 양국에 강화할 것을 종용하였고, 동해해전후 일본은 러시아가 군을 재정비하기 전에 미국에게 러-일관계의 중재를 부탁했고,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알선으로 8월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렸다. 러시아는 자국에서 전쟁이 치러 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할양을 거절하였으나, 일본은 협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사할린을 무력 점령한 상태였다. 일본의 요구에 대해 격분한 러시아 귀족들과 국민들이 재개 전을 원하는 기운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장기전을 치를 군사력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또 중재를 맡은 미국 또한 일본의 요구가 지나치게 많다는 국민여론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절충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섬의 할양을 내용으로 한 조약이 9월 5일 조인되고, 16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한국지배권의 확립과 남만주 진출이 결정되어,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여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중국 동북성 또한 일본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동시에 대륙의 권익을 꾀하는 미국과의 대립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 되었다.그러나 이 같은 '견제 부재의 상태'가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겐 불행의 씨앗이었다. 한국 식민지화, 만주국 건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1945년 미주리 함상에서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어지는 광란의 역사 길로 들어서게 했던 세계 전쟁사에서도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히는 특이한 전쟁이다. 대륙의 노제국과 신생 일본 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격렬하게 맞붙은 이 전쟁은 모든 전투가 제3국인 대한제국과 청나라 영토 안에서 벌어졌다.자기 땅을 전장으로 내준 대한제국과 청나라 모두 이 전쟁에 대해 ‘국외중립’을 선언했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승전국이 차지한 전리품 역시 패전국의 영토가 아닌 제3국의 영토였다. 당장 일본 수중에 떨어진 것은 뤼순·대련 지구였지만, 전쟁 발발 1년 후 대한제국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사실상 국토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다.국외중립을 선언했다지만, 사실상 국제 사회의 외톨이였던 대한제국과 청은 이 제국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이 북상하는 길 일대에 사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의 군수품 운반에 동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일본군은 군수품의 소속을 쉽게 식별하려고 짐을 진 한국인들의 뺨에 부대별로 다른 색깔의 점을 칠했다. 일본군이 북진하는 길 연변의 마을들은 매운 추위가 몰아치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산속으로 피란을 떠났다. 마을이 텅 비고 전쟁을 직접 치른 것 이상으로 황폐해졌다.그러나 대한제국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멈추지 않았다. 외교력도 군사력도 없는 정부와 우왕좌왕하는 지도층의 모습이 서양 종군기자들의 보도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국제적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제정치와 동맹에 의한 세력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자기 나라 땅이 외국군의 전장이 되었는데도 기껏해야 ‘국외중립’을 선언하는 것 이상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 지도층이 특히 웃음거리가 되었다.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 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 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 결정한 것은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구축한 근대화된 군사력이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실제적이고 확실한 패는 군사력이다. 물론 경제력이나 국제적 공조 등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의 근원은 군사력이다.지난 백년간 우리는 물리적인 힘이 없어 엄청난 고통을 당했음에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국방력 건설에 게을리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함을 알 수 있다.?러일전쟁 100주년[ 신문기사 ]①“고국 정착했지만 이젠 사할린가족 사무쳐”(2008.09.12)추석을 사흘 앞둔 11일 오전, 인천 연수구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건물 안은 휑했다. 그곳 입주자 넷이 함께 쓰는 방 안에서 할머니 세 명이 가족사진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사할린에서 돌아온 영구귀국 동포들이다.1999년 문을 연 이 복지관엔 거동이 불편한 사할린 동포 83명이 산다. 일제시대 강제 노역에 동원돼 사할린으로 갔다가 광복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다.한국·러시아 수교(1988년) 후, 1990년대 초반부터 사할린 동포 영구 귀국 운동이 일어나 현재까지 약 2300명이 경기도 수원·안산과 인천 등에 정착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태어난 동포 1세대'만 정착대상이어서 이들 대다수는 사할린에 있는 가족들과 '생이별' 한 사람들이다.경기도 안산 등에 있는 '정착촌'에 들어간 이들은 대한적십자사에서 임대 아파트를 받고,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2인 기준 월 80만원 가량 생계비를 지원 받는다.인천 복지관 거주자들의 평균 연령은 83세. 홀로 살아가기 힘든 사할린 동포들이 머문다. 복지관이 방과 식사를 제공하고, 정부가 기초노령연금으로 월 8만4000원씩 지급한다.(중략)발틱함대가 대한해협에 도착, 일본 해군과 맞붙었을 때는 북해(北海)를 떠난 지 이미 6개월이 지나 병사의 사기도, 물자도 바닥난 상태였다. 1902년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이 발틱함대의 수에즈 운하 통과를 불허하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온 때문이었다. 이토(중략)
    인문/어학| 2008.10.14| 15페이지| 1,000원| 조회(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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