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사상 정리(송. 명대 유학 ~ 청대유학까지 정리)목차-근대철학 특색-근대철학 발흥원인-북송오자의 사상-주렴계-소강절-정명도-정이천-장횡거-주자의 사상-육상산의 사상-주자와 육상산의 사상의 비교-왕양명의 사상-청대의 유교사상근대철학의 특색))-원래 유학은 실천도덕에 주력. 송대유학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도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원리를 연구함-가르침의 근본을 성(性)에서 구하고, 성의 근본을 우주에서 구함-일상도덕의 철학적 기초를 논함-송명의 신유교는 인성(人性)과 우주의 관계를 중시 & 이 기 심 성(理 氣 心 性) 연구-이를 총칭하여 송. 명의 성리학이라고 함근대철학 발흥원인))-송나라의 유학 장려-불교. 도교의 영향 : 불교는 유교를 자극. 격려함 -유학자들의 연구심을 고취시키고, 유교 사상이 사색적이 되게 함 . 도교는 유교를 해석함에 도교의 사상을 들여옴-훈고학에 대한 반동 : 훈고학의 선배인 복건, 정현 등의 뜻만 중시, 공자. 맹자를 중시하 지 않음. 문자해석이나 글귀의 하찮은 부분에만 얽매임성리학의 선구자들 : 북송오자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정명도. 정이천)주렴계))-「태극도설」과「통서」에서 주렴계의 학설을 알 수 있음?태극도설?요약우주론)태극으로 우주의 본체와 만물의 근원을 삼음-태극이 무극이며, 태극과 무극은 차이가 없음-태극의 움직임과 고요함으로 음양 양의가 성립되며, 양의는 오행을 생성하고, 오행은 만물 을 생성-양의가 성립되면 오행이 분포되어 남녀 양성을 낳음(건도-남자형성, 곤도는 여자형성)-오행은 음양이고 음양은 태극이며 태극은 무극으로 그 본성이 하나임-오행의 상세함과 소략함 문에 만물과 사람의 구별을 낳게됨인성론)사람의 본성은 순수하고 지극한 선임-사람은 가장 빼어나고 우수한 오행의 기를 받음-사람의 본성은 성(성의 근본을 태극으로 삼아 태극과 성은 차의가 없음, 우주의 본체에서 말한다면 태극, 사람의 본성으로 말한다면 성)윤리설)-인성론에 근거, 사람의 본성은 성(誠)이며, 인,의,예,지,신 오상하였다.-천지의 과정: 시간의 측정을 원, 회, 운, 세 로함-만물 생성론: 만물은 사시와 사유로부터 생성됨/ 사시(四詩) , 사유(四維)-인간사 4수로: 4수가 자연현상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또 인간세계도 지배한다고 보았다.-인성론: 인, 의. 예, 지 를 고유의 본성으로 삼음-인생관: 만물은 하늘의 사시와 땅의 사유로 말미암아 발생, 사람과 만물은 본질이 서로 같 음윤리설)-우주의 비밀과 심오함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며, 도덕과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음-천일합일의 경지를 자극한 선이라 함, 천인합일은 사물과 나의 그윽한 합침-성은 선하며, 성을 가리는 것이 정, 정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은 선을 발휘하기 위함임-수양공부: 유익한 단편적인 교훈들을 기술비판)-?역? 철학의 계승자-풍부한 사색력으로 수론 철학을 건설하려고 노력-억지로 꾸민 점이 역력, 현상 4수론이 그 일계임-두 정자(정명도, 정이천)는 소강설 학설 계승 X장횡거-유학의 게승자, ?주역?을 종(宗)으로 하면서 ?중용?을 적(的)으로 ?예?를 체(體)로 공자, 맹자를 극(極)으로 삼음-불교, 노자 배척 but 그영향도 받음-태허를 학설의 근본사상으로 삼음철학설)우주관의 심원함과 정밀함이 특징, 태허(太虛)라는 개념을 개발하여 우주의 본체와 현상해석태허론-태허는 우주의 본체임-태허는 무형의 기, 기가 응집하여 모이면 음, 발산하여 움직일때 양-태허가 기이고 기가 태허, 태허와 기는 분별될수 없음→(기일원론)-우주간 만물은 모두 태허의 활동으로부터 생성됨-태허는 스스로 활동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음, 활동의 성능이 있기에 태허를 태화라고함-태허가 모이면 만물이 되고, 흩어지면 현상을 잃어 태허로 돌아감→만물은 태허가 모이고 흩어짐에 말미암아 생성?소멸, 그러나 태허가 음취?발산하더라도 본질이 다른것은 아님-우주 만물이 천차만별인 까닭은 음양2기의 교합정도가 같지 않기 때문귀신론-귀신은 음양 2기의 양능(선천적 기능)임-귀신은 가고 옴, 굽힘과 폄의 뜻임-귀신은 음, 신은 양인성론-만물은 태허의 활동 천부적인 것이기는 하나, 수양을 통해서 변화 시킬 수 있음-수양공부: 안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예를 중시하는 것-마음을 바르게 하여 허심평기의 경지에 다다르면, 기는 스스로 천지의 성에 합하게 됨-예를 지키면 천인합일, 물아일체 사상을 체험할 수 있음-예를 지킴은 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며, 성을 유지하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임정명도))철학설)?주역?에 근본을 둠, ?주역?의 태극 양의설을 근본사상으로 우주관, 인 성론, 윤리설 연역우주관-?주역?에서는 태극으로부터 음양 양의를 낳고, 음양 양의로부터 만물을 낳는다고 함≒정명도의 우주관-태극이라는 용어 대신 건원일기(乾元一氣)라는 용어 만들어냄-건원일기: 정명도 우주관의 궁극원리-천지간 만물은 모두 음양 2기의 교감으로부터 생성됨, 만물은 같은 뿌리를 가진일체-만물에 구별이 있음은 만물이 생성될 때 음양 2기의 교감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임-교감이 치우침을 얻으면, 새, 짐승, 풀, 나무 가되고 바름을 얻으면 사람이 됨인성론-생(生)은 성(性)이며, 성은 기이고 성기무이(性氣無二):성은 기이고 분리되지 않음기는 성임. (여기서 기란 건원일기)-성은 생과 같으며, 사람은 건원일기로부터 생성, 인성과 건원일기는 하나이며 나뉘지X-성은 선악이 아님, 각 개인이 태어날 때 건원일기를 얻음이 치우치거나 바름이 같이 않으 므로 [품격이 과불급의 구분을 낳아] 성(性)의 선과 악이 유래 (과불급X-선, 과불급○-악)?기질에 편정과 불급의 구분이 있으므로 과 또는 불급인 것을 악이라고 함인생관-천지간의 만물이 건원일기로부터 생겨남-천일합일, 물아일체 사생여일 적인 인생관은 장횡거와 유사윤리설)-인을 중시, 인에 도달하는 것을 최고 목적으로 삼음-인의 뜻을 넓게 해석, 인은 모든 행실을 통괄 한다고 봄-사람의 본성이 인이므로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더라도 선에 도달함→성인의 경지에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 일반인은 수양이 필요함-마음: 도심(원기가 몸에 주재로 된것) +인심(도심의 밝음이 인욕으로 가려성: 만인의 보편성. 선한것-재: 사람마다 다름→선악의 분별이 생김 / 맑은 기를 받아 생기면 선, 탁한기를 받아 생기 면 불선-성이 발하여 정이되니, 성이 본체이고 정은 작용-성과 마음은 바탕이 같은데 명칭만 다른것, 마음이 곧 성(성 즉리)윤리설)-수양 공부 방법: 거경, 궁리-거경: 마음을 한군데로 집중하여 잡념을 버리는 일→경은 주일무적하는 것임(하나를 위주로 하면서 다른데에 정신 팔지 않는것)겨겅의 방법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임-궁리: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하여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 궁리의 방법은 독서, 고금의 인물을 논하는 것, 사물에 접해서 마땅함을 얻는 것주자 ))북송오자 사상을 집대성 했으며, 중국 사상의 집대성자우주론)-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정이천의 이기이원론 융합-우주의 본체를 태극으로 삼고, 태극을 이기이원의 종합이라고 여김이기론)-태극은 이이며, 태극은 시간공간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개념 .태극은 시간공간을 초월한 절 대적인것-이(理) - 형이상의 도(道) -만물 생성의 원리-기(氣) - 형이하의 기(器) -만물 주형의 원리-> 이가 없으면 기가 없고, 기가 없으면 이가 없음. 둘중하나가 없으면, 존재와 존재의 변화는 있을수 없음-태극은 음양을 낳고, 음양이 교감하여 오행을 낳고 오행은 만물을 낳는다.-태극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물은 동일, 만물의 차별과 종류가 있는 까닭은 기의 청탁이 있기 때문. 사람은 가장 맑은 기를 받아 생성. 기타만물을 사람에 비해 혼탁한 기를 받음인성론)-인성을 본연지성 기질지성으로 나눔-본연지성은 이로부터 생기고 기질지성을 기로부터 생김-본연지성은 선이며, 기질지성은 선악의 구별을 낳는다.-> 비유) 본연지성은 물과 같고 , 기질지성은 선악의 구별을 낳는다.-성체정용 - 성은 마음의 바탕이고, 정은 마음의 작용임-마음이 성과 정을 관장. 성과 정은 마음의 체와 용-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 본연지성이 작용하는 것을 도심. 기질지성이 작용하는 것을 인심이라고 함-도심은 선이지만 쉽게 인심(=정욕)에 쌓음->주자는 거경. 궁리를 수양공부의 2대강령으로 이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고 봄 . 주자는 궁리를 더 중시 (선지후행설)-선지후행설 : 학문을 하여 바른 도를 익히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봄육상산))철학설)심즉리설-육상산의 철학은 심즉리(心卽理)를 근본사상으로 하고 있다.-심이 곧 이. 이가 곧 심이다. 마음은 이에 갖추어짐. 마음밖에 이가 없음-이는 우주의 본체이며. 만물간에 이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음-마음은 이이므로 마음에 준하여 행동한다면 천리를 반하지 않음이 없게 됨-마음을 본심. 양지양능이라 칭함-바깥 사물의 유혹 때문에 사사로움(私)에 기울고 혹은 사악함(邪)에 기운다.-사심(私) 혹은 사심(邪)이라 하여 본심(本心)과 구분함-인심과 도심의 구별을 배척. 하나 마음을 다른 방향에서 관찰 것이지 결코 각각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도심은 천리, 인심은 인욕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천일합일 사상에 위배인성론)-심즉리 설에 따르면 성선론자임을 알수있다. (인성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음)윤리설)-이론적 측면보다 실천적 측면을 중시-수양론 : 마음을 밝게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임-궁리 : 자기의 본심을 의식하는 것 (주자의 궁리에 대한 의미와 전혀 다름 )자신이 갖고 있는 본심을 의식하여 자기를 밝히고 본능적인 선을 발휘하여 물욕제거-사고함 : 나에게 존재하는 본심을 생각하는 것비판)-간이직절의 학풍주장 . 실천궁행을 표방하며 공리공론 배척-장점 : 직절간명. 실천궁행-단점 : 실천가였으므로 학설이나 견해가 너무 단도직입적. 이론적 연구가 적음주자 . 육상산(육자) 비교))공통점)-주자와 육자는 모두 정자학의 계승자->그런 점에서 1. 선천양심론 주장2. 이를 보편적으로 해석3. 성리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음차이점)-주자는 정이천 학설을 계승, 육자는 정명도 학설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학풍의 차이주자) 번연총좌 (풍부하고 흘러넘쳐 번잡함)육자) 직절간명 (직각적이고 간명함)연구방법의 차이주자) 경험적 지식을일)
플라톤 『국가』 요약플라톤 『국가』 각권의 주요 논의제 1권 - 정의에 대한 정의제 2권 - 정의의 본질과 기원- 수호자의 교육에 대한 논의제 3권 - 수호자들을 위한 교육법 : 시가, 음악, 체육- 통치자의 자격제 4권 - 수호자의 행복- 수호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 : 부, 가난 / 중시해야 할 것 : 교육, 양육, 입법- 훌륭한 국가에 필요한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정의로운 사람에 대한 정의제 5권 - 남녀 평등에 대해서 논의- 아내, 자식 공유의 문제- 이상 국가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제 6권 - 철학자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이유- 선의 이데아 (태양의 비유로 선의 이데아의 개념을 설명)제 7권 - 선의 이데아 (동굴의 비유로 선의 이데아를 설명)- 동굴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요한 학문 : 수학, 기하학, 천문학, 변증론- 수호자의 선발과 교육방법제 8권 - 잘못된 국가 체제 : 명예체제, 과두체제, 민주체제, 참주체제제 9권 - 참주의 성향과 불행한 인간인 참주- 가장 행복한 인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쾌락제 10권 - 모방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영혼 불멸설제 1권소크라테스가 피레우스에 가서 축제 행사를 구경하고 오던 중, 케팔로스의 아들인 폴레마르코스의 권유에 의해 케팔로스의 집에 가서 대화를 하게 된다. 소트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집으로가 케팔로스에게 노년의 삶에 대해서 묻자, 케팔로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노령이 아닌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의 생각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케팔로스가 노년을 수월하게 버티는 것은 생활방식이 아닌 재산 때문일 것이라고 하면서 케팔로스에게 재산과 생활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케팔로스는 오로지 재산이 노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재산이 도움이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 이유로 재산이 있으면 남을 속이거나 빚지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빚진 채 죽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또 빌린 것을 갚는 다 위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트라시마코스에게 질문을 계속 함으로써 트라시마코스의 동조를 얻어낸다. 하지만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에서의 올바름은 결국 강자의 편익이 되는 것임을 주장하고 강자가 더욱 잘 살고 있다는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세우려고 하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결국 사람의 올바름은 훌륭함(덕)이며 지혜이지만, 올바르지 못함은 나쁨(악덕)이며 무지라는 것을 합의하게 된다.제 2권트라시마코스가 소트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글라우콘은 그냥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되살려 냄으로써,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론과 함께 올바름에 대한 더 적극적인 주장을 유도해 내는 작전을 구사한다. 그래서 그 자체로 좋은 것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 있는데, 이들 중에서 어느 것에 올바름이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지를 소크라테스한테 묻고선, 그야 물론 마지막에 언급된 것에 속한다는 대답을 얻어낸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아데이만토스와 합세하여 올바름은 그 자체로는 기피할 성질의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 따위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이 좋게 생각 할 뿐인 것이라고 하며, 올바른 사람보다도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누리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함을 말함으로써, 소크라테스가 이에 맞서 올바람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주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람이 도대체 무엇인지부터 밝히는 일에 착수한다. 그런데, 올바름에는 개인의 것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겠으니, 이를 먼저 찾아보기로 하고, 나라를 이론상으로 수립해 본다. 성향에 따른 분업을 효용성 때문에 생기게 된 공동체인 나라는 '최소 한도의 나라'에서 시작하여 '호사스런 나라'로 확대되어 감으로써, 온갖 직업을 갖는 많은 사람이 사는 나라가 될 수 밖에 없게 되어, 영토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는 결국 같은 현상을 겪게 되는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리하여 나라를 지키고다스릴 수다. 다음으로 노래와 선율에 관련한 논의를 시작한다. 음악에 관해서는 아름다운 것들 또는 훌륭한 것들을 접해야 일찍부터 추한 것들을 꺼릴 수 있고, 그 훌륭함의 논거를 만나면 그 친근함 덕에 그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고 언급한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성품들을 곧 아름다움에 연결시키고 이를 다시 사랑에 직결시킨 후 은악에 관한 논의를 종결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체육의 문제로 넘어간다. 특기할 만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상식과는 반대로 육체의 단련을 위해 체육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혼을 만들기 위해 체육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육체를 정초한다. 따라서 체육에 관한 논의 역시 마음에 관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 시가도 체육도 모두 혼을 위해 제도화된 것이다. 양자 모두를 학습함으로써,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체육이 격정적인 혼의 측면을 발달시킨다면 시가는 철학적인 혼의 측면을 계발한다. 이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지나치게 부드러운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서는 통치자의 자격에 관한 문제로 넘어간다. 그들은 슬기롭고 유능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해서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마음을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라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조건을 통과한 사람만을 나라의 통치자 및 수호자로 임명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일반사람들에게 들려줄 거짓말을 하나 고안해낸다. 땅 속에서 태어난 금의 자손, 은의 자손, 쇠와 청동의 자손에 관한 신화가 그것이다.제 4권아데이만토스는 만일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되면 수호자들이 정작 나라에서 좋은 일로 혜택을 입는 게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우리가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서 유념하고 있는 것은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며, 우리가 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일에 있어서 가장 훌륭 덕분에 지혜로워 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지혜는 수호자들의 몫인 셈이다. 다음으로 용기에 대해 논한다. 한편 용기는 전사들이 지닐 수 있는 덕목이다. 소크라테스란 용기란 일종의 보전에 대한 신념, 즉 보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두려움에 대한 분별과 올바른 견해를 유지하는 힘을 지니는 것이 용기라고 한다. 두가지 덕에 대해 논한 후, 다음으로 절제에 대해 언급한다. 제는 일종의 질서고 어떤 쾌락과 욕망의 억제라고 한다. 이를 흔히 자기 자신을 이긴다고 표현하는데 이 애매한 표현을 조금 더 명료화하면 혼의 한결 나은 부분이 한결 못한 부분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 안에서 미천한 사람들의 욕구가 소수의 공정한 사람들의 슬기에 의해 제압되고 있다면 그 나라는 절제 있는 나라이다. 사회의 특정 부류가 전담하는 다른 덕목과 달리 절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요구되는 덕목인지라 소크라테스는 조화로이 바로 정의라고 한다.제 5권아데이만토스가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부인과 자식의 공유의 문제를 시비건다. 소크라테스는 이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여자와 남자의 성질에 대한 언급을 시작한다. 여자와 남자는 성향이 다르므로 직업도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의 천성은 남녀간에 같으므로 남자의 직업을 여자가 가질 수도 있고, 여자의 직업을 남자가 가질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우리가 여자들을 남자들과 같은 목적에 이용코자 한다면, 여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따라서 마땅히 남자들에게 베풀어진 시가 교육과 체육 교육도 여자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또한 수호에 능한 남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호에 능한 여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여자들은 같은 부류의 남자들과 더불어 나라를 수호하도록 선발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남녀의 동등한 통치 참여를 논의한 후 비로소 처자 공유의 문제로 돌아온다.앞서의 논의는 처자 공유의 논의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언급한 바, 선발된 남자들과 여자들이 공동의 주거, 성품이 고매하다.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그러나 실제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철학함으로 인하여 쓸모없는 이들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탓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에게는 최고의 학문을 감당해 낼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고의 선이란 선의 이데아를 말하는 것이다. 선의 이데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유용하고 유익한 것이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선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태양의 비유를 든다. 각각의 것에는 그에 해당하는 하나의 이데아가 있고, 이 이데아들은 실재하는 것이다. 각각의 현상들은 감각에 의해서 알려지는 반면 이데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지성에 의해서만 알려진다. 그런데 대상과 눈만 있다고 대상이 바로 보이지 않듯이, 보는 감각과 보이는 힘은 청각의 경우와 달리 중간의 어떤 매개자를 필요로 한다. 이 매개자가 바로 빛이다. 우리에게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는 것이 태양이듯, 인식되는 것들에게 진리를 제공하고 인식하는 자에게 그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좋음의 이데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두개의 지배적인 힘이 있는데, 하나는 지적영역을 지배하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영역을 지배한다고 말한다.제 7권선에 이데아가 무엇인지 설명한 후, 소크라테스는 동굴의 비유를 들어 선에 이데아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동굴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동굴 안에 사지가 결박된 사람들은 머리조차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맞은 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서, 그림자가 아닌 불빛을 보도록 강요된다면, 그리고 여태 보아 왔던 것들은 모두 허상이고 이제부터 보는 것이 참으로 옳게 보는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듣는 다면, 그는 당장에 적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익숙해지고 나면, 태양이야말로 가시적인 세계의 것들을 다스리는 것이며 동굴 안에
소크라테스의 진리관&소피스트의 진리관목차- 소크라테스의 진리관- 소크라테스의 도덕사상- 소피스트의 진리관- 프로타고라스의 사상- 고르기아스의 사상소크라테스의 진리관초기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궁극적 원리에 관해 광범위하며 우주적인 의문들을 제기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헤시오도스에 의해 제시된 통용 가능한 언어에 의해 설명 가능한 세계에 대한 논리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되었고, 그것은 인간과 삶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입안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는 그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철학의 물결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소크라테스 이후의 철학자들은 자연과 사물과 우주에 관한 이론을 제기하는 대신에 인간의 지식의 문제에 집중하면서, 과연 인간의 정신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문은 다양한 종족들과 시민들간의 문화적 차이들에 관한 논의에 의해 더욱 가열될 수 있었다.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에 대해 가장 준엄하게 비판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이였다. 당시의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를 동일한 부류로 취급했던 이유는 어떠한 문제든지 그 논제를 냉정하게 분석한다는 면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하나의 적극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소피스트들이 극도로 면밀하게 어떠한 주제이든지 그 주제에 대해 또 다른 측면에서도 훌륭한 논지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었다. 또한 그들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허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이념들과 가치, 이성에 의한 판단과 그 의미까지도 상대적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확고부동한 지식을 위한 기초의 정립이 그의 임무라고 믿었다. 또한 그는 선한 삶을 위한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아는 것과 행하논의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반어법에 대한 불쾌함과 아울러 엄정한 엄격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대부분 어떤 주제에 대해 무지(無知)를 가장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주제에 관한 가장 충실한 지식을 유도해 내고 있다. 그는 이 변증술의 방법을 일종의 지식의 산파술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에 따르면 이 산파술은,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그를 점차적으로 교정해 줌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끌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영혼의 영원한 구조에, 다시 말해 숨어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정신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이 주장 역시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그는 되는대로 사는 삶이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심사숙고하지 않는 생각 역시 소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화의 경우에는 결론 없이 끝나곤 했는데, 이는 듣는 이에게 독단적인 관념에 붙잡혀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를 질서 정연한 사유 과정을 통해 스스로 확실한 지식으로 인도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소크라테스의 도덕사상-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知)와 덕(德)은 같은 것이었다. 만일 덕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善)하게 만드는" 데 관련되는 것이라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과 지(知)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선과 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을 아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는 덕이며, 덕은 바로 지의 목적인 것이었다. 지와 덕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던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악덕이나 죄를 지의 부재(不在)라고 주장했다. 지가 덕인 것처럼 무지는 악덕이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알면서 악덕에 빠지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동시에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영혼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갖으며, 그 갈망은 내면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즉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행위"는 적합한 행동양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행복에 대해 필연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 그 행동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전제한다. 어떤 행동들, 무슨 행위들이 행복을 낳을 것인가? 몇몇 행동들은 마치 행복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때문에 인간은 종종 의문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선택하기도 하나, 이러한 경우에도 인간은 그 행동이 자신을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이 그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 따라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행복의 상징들인 권력, 쾌락, 부(富), 의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과 참된 행복의 기반을 혼동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 것이다.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악덕과 무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의 행복을 낳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무지였고, "영혼을 가능한 선하게 만드는 행위"와 관련된 무지였다. 그러므로 악행은 행동 양식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나 신념의 결과로 발생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쾌락이 행복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다. 악행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이 행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는 어떠한 행위가 행복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을 불행으로 이끌거나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실제로 옳은가는 그 행동이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 즉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문제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소피스트의 진리관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를 중심으로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을 지식인이라 자처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가 있다.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습속을 지닌 다른 여러 나라에 살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현상에 근거한 많은 지식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문화적 토양에 대해,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해 좀 더 신중한 태도, 즉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이나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을 제공하였다.소피스트들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상황은, 그들의 실용적인 기술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지닌 화술(話術) 및 산문과 문법에 대한 서로간의 경쟁심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과거의 귀족 정치는 민주 정치로 대치되었고, 이는 자유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토론을 유발함과 아울러 사회적 활동을 강화하는 경향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테네 지식인은 귀족주의적 교육을 받아온 탓에 민주주의에 적응하는 일에 서툴렀으며,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교육이 가계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교, 문법, 시(詩), 예술과 법률, 수사(修辭) 등과 같은 보다 세련된 이론적 교육이 전혀 없었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문화적 공백 상태에 침투하여 새로운 사회적 교육에 대한 수요를 창출함과 동시에 그들의 절박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시민의 대변자 또는 교사가 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에서 불리한 증거를 타파하는 일에, 혹은 의문의 여지가 많은 철학적 명제를 주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그리스인들은 어떠한 진상의 다른 측면을 변호할 수 있도록 소피스트들이 변호인을 교육시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피소자도 기소자가 그에 대해 사용하는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을 자신의 변호를 위해 마땅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지식의 배후에 그것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이 문화에서 존중되는 사항도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존중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진리는 일종의 상대적인 진리였으며, 가치는 그 가치가 입증될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로소 가치가 될 수 있을 뿐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가치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악한 것을 선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가, 혹은 정의롭지 못한 명분을 어떻게 정의로운 것으로 판단될 수 있도록 하는가와 같은 기술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상류계급의 젊은이에게 전통적인 관습과 종교 및 윤리적 견해에 대해 비판적이며 파괴적인 분석 태도를 교육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에게 결정적인 오명을 지운 것은 그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초기의 소피스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적 견문을 보급하는 일에 따르는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으며, 그를 위해 그리스 시민을 교육하기를 원하였으나 점차 그 교육에 대한 금전적 요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강의에 대한 적정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부자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갔다. 오늘날의 미국법정에서 유명세를 지닌 변호인들이 천문학적 금액을 주머니에 넣고 의뢰인을 위해 지략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왜 소피스트들이 부정직한 지식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젊은 시절 소피스트 밑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이다."
기독교의 발생&기독교의 자연관 ? 인간관 ? 윤리관기독교의 발생예수는 대략 B.C. 4년경 헤로데 대왕의 치세 말기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B.C.6세기 경 유대교가 바빌론 유수기를 거쳐, 페르시아의 키루스대왕의 귀환 명령과 성전 건립 허락을 바탕으로 비로소 체계를 갖추고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을 하지 못하였지만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종교적 박해를 심하게 받았고, 이에 대항하여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100년 남짓 독립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유대는 거대한 세계제국인 로마의 팽창속에 흡수되어 유대인이 아닌 에사오 후손의 왕(헤로데)의 치세 밑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의 유대인 들은 이런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들에게 정치적 독립과 종교적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메시아를 갈구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종교와도 물과 기름이 될 수밖에 없는 유대교의 특성상 로마 치세에서 늘 유대인 들은 독립을 꿈꾸어 왔고, 그에 따라 유대 지방은 늘 정치적, 종교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 따라서, 누군가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이와 비슷한 행동을 추구한다면 유대는 금방 독립전쟁이 촉발될 분위기여서 늘 로마의 주목을 받았고, 당시 대다수의 지식층을 점유하던 바리사이인들 사이에선 그들의 판단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이 메시아라고 주장한다면 그보다 더 중한 범죄는 없게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만약 초창기 기독교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선교에 힘을 쏟지 않았다면 예수의 신격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바울과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던 야고보의 주도권 싸움에서 야고보가 순교함으로써 자동적으로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걸림돌이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대단히 적대시하였고 따라서 초기 기독교는 이방인들이 아니고는 전도할 대상 자체가 극히 드물게 되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데에는 세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할례와 율법아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 자체라는 묘한 교리를 세우게 된다. 이 교리는 과거 플라톤시대의 로고스 사상과 맞물려 초기 교부들이 삼위일체설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즉 성부,성자,성령은 다른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유대교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일신 사상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신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기독교의 자연관지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매우 좋으셨던 창조의 신비로운 현장이다. 그러나 지구 환경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지구촌 모두의 생명이 위협당하고 있다. 산업 혁명에서부터 시작된 가공할 만한 환경 파괴는 급속한 산업화와 기계화 그리고 세계 인구의 폭발적 급증으로 인한 대량 생산에의 압력과 ‘광적인 성장욕’이 환경 파괴를 재촉한 것이다.구약 성서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남자를 창조하고 에덴동산을 동식물로 가득 차게 한 후에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창조한다. 그리고 아담이 동물에 이름을 부여한다. 이것은 동식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는 동물을 다스리는 인간의 능력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이용하고 자연을 변모시키는 것은 신성한 신의 계획의 일부라고 여겨졌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은 유럽인의 사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정말 기독교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존재이며, 인간이 자연위에 군림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인가. 창세기 1장 28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에 대하여 생태론자들과 성서 옹호론자의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생태론자들의 주장오늘날의 생태계 위기의 상황에서 볼 때에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결과하게 하며 이것은 더 이상 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작용하게 되었존재론적 목적론적 가치판단을 포함한다. 이렇게 선하게 창조된 땅을 파괴적 폭력에 내맡긴다는 것은 창조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 참된 의미의 복은 타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스리다"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관리한다는 것을 뜻한다.기독교의 인간관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성경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과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피조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불순종하여 범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시편 51편에 있는 참회와 자복의 기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 참회와 자복의 기도에서도 살펴 볼 수 있는데 이성, 양심, 의지, 사랑 등등이 모두 다 불순종의 해독을 받았다. 이 죄악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였으며 사회악의 씨앗이 되었다. 이것이 자연인에 대한 성경의 고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한 형제가 되어야 마땅했으나 죄는 이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악하며 범죄 한 인간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를 성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성경은 죄악과 범죄에 대한 경고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나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 육의 일과 심판을 말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속죄, 중생, 성령, 성화, 부활, 영생을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둘째 아담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세상에 성취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구원받은 한 인간뿐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질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과 자기 자신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수많은 성경 맥락에서 제기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맥락들은 대략 두 가지 것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유신론과 무신론이 바로 그것이다.인간의 본성은 복잡한 현상을 이루 있기 때문에 그 정의 들은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어떤 이들은 정의는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모두가 부분적으로 흐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적인 본성의 문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실존적인 관계들의 문제가 서로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본선에 관한 논의는 어느 것이든지 수많은 사상의 조류들을 최근의 것까지 포함하여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구약, 신약의 시대와 고대, 교부들의 시대, 중세와 문예부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에 대한 해석도 많이 달라졌다.기독교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하나님의 최고의 창조물이며 결국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때까지의 삶이다. 그 삶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가 맞물려 있다. 마지막 까지 그 뜻과 진리를 향하여 거듭난 모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구원에 기초된 개인적이나, 전도에 기초하여 대중적인 삶 역시 중시 하였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의 확신이 밑바탕이다.기독교는 결코 사람의 생성과정을 현상적으로 설명하여 주는, 과학적 인간관을 부정하지 아니한다. 기독교 신앙은 세계의 발생이나 사람의 생성과정을 현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그 밖에 있는 창조기사는 현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존재의 의미를 말한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인간관과 성서적 인간관과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서로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 신조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데에 있다. 성서에 의하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존재의 근거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종교사적 고찰보다도 차라리 하나님께 대한 성서 의미는 오로지 그 사랑에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사람 편에서는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 성서의 주장이다.기독교의 윤리관첫째,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의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명령의 한 형태이다. 윤리적 의무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윤리 명령은 당연히 하나님의 불변의 도덕적 속성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도덕적 속성과 일치하는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신다. 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명령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므로, 우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시므로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간략히 말하면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의 의지(God's Will)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불변의 도덕적 속성을 거스르는 일은 결코 하시지 않는다.둘째, 기독교 윤리는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속성에 뿌리를 둔 도덕 명령은 절대적이다. 즉 그것은 항상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어떤 명령은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하나님은 특정한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아담과 이브의 도덕적 진실성을 시험하려고 하셨다. 아담과 이브가 당시 특정한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지만, 우리는 현재 그와 같은 명령에 더 이상 구애받지 않고 있다. 그러한 명령은 하나님의 의지에 토대를 두었지만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한편,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율법이 모세에게 전달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모세의 율법 아래서, 그리고 모세 시대 이후에도 존재했다. 간략히 말해서.
칸트의 의무론&벤담과 밀의 공리주의하나의 행위가 옳은 행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 어떤 입장을취하느냐에 따라 윤리철학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하나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 자체가 지닌 특성에 따라 구별되어야 하며, 그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의 기본적 도덕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행위 그 자체의 특성에 판단의 기준을 두는 윤리관에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관이 속한다.다른 하나는 오직 그 행위의 결과만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행위의 결과에 그 판단 기준을 두는 윤리관에는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가 속한다.칸트의 의무론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의 첫머리를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이 세계 안에서, 아니 이 세계 밖에서조차도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반인들이 상식적 차원에서 선하다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이어나간다. 예를 들면 명석한 두뇌나 뛰어난 판단력, 풍부한 재치와 같은 정신적 재능 그리고 용기, 결단력, 인내심과 같은 개인의 성향들 또한 권력, 부, 명예, 건강, 만족감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좋은 것으로 인정하고 바라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좋은 것이라는 점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들이 무조건적이고 무제약적으로 선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이 질문에 대하여 칸트는 일상적인 예만 들어보아도 선한 것으로 간주되는 위와 같은 대상들이 무조건적으로 선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어떤 흉악한 범죄자가 소유하고 있는 명석한 두뇌나 용기, 인내심 등은 그를 더욱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만들기에 충분하며 잘못된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내가 누리는 부나 명예도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을 추구하려는 은밀한 의도가 숨어 있다면 그의 행위는 의무에 들어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의무로부터 행해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의무에 들어맞는 행위가 곧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칸트는 어떤 행위를 평가함에 있어 ‘적합성’ 내지는 ‘적법성’의 측면과 ‘도덕성’의 측면을 엄밀하게 구별하여 진정으로 도덕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행위는 오직 의무로부터, 의무감에 의거해서 행해진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결국 칸트의 윤리설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의무로부터 행해졌을 경우에만 도덕적일 수 있으며 그 자신이 언급대로 ‘무조건적으로 선한’ 선의지에 따른 행위일 수가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함에 있어 그것이 의무라는 내적인 동기에 따른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그 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면 그 행위의 결과나 행위의 적합성 등은 전혀 평가의 기준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칸트의 윤리설을 윤리적 동기주의 또는 내적인 심정을 도덕성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심정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그런데 칸트는 지금까지 언급해 온 의무의 개념을 다시 도덕 법칙과 연결시킴으로써 논의의 전환을 시도한다. 칸트에 있어 의무란 그저 막연한 감정이나 단지 구속받는다는 느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도덕 법칙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점은 칸트가 의무를 ‘법칙에 대한 존경심으로부터 행하는 행위의 필연성’이라거나 아니면 ‘실천적 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으로부터 생겨나는 나의 행위의 필연성’이라고 정의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칸트 윤리학의 목표는 바로 일상인들이 지니는 의무감의 근거에 놓여있는 실천 법칙을 정식화하여 분명히 드러내고 그것들이 왜 우리에게 구속력을 지니는가를 밝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이에 대한 준비 작업으로서 칸트가 제시한 명법의 개념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칸트는 명법을 가언 명법과 정언 명법의 두 종류로 분류한다. 고찰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행위하기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위한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나는 상대방을 이러한 원리에 따라 대우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어떤 다른 원리에 따라 대우할 것을 요구할 자격이 도덕적으로 없음을 의미하며 또 내가 상대방에게 나를 어떤 방식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한다면 나 또한 상대방을 같은 방식으로 대우하여야만 함을 의미한다. 칸트의 윤리학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윤리설에 있어 이러한 윤리적 보편성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것이며 모든 도덕 법칙의 필요조건의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칸트는 이 보편 법칙의 정식을 통하여 준칙이라는 형태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행위자의 의도가 보편화 가능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자문함으로써 그런 의도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는 다른 어떤 고려보다도 선행하는 것이며 바로 이 점에서 보편 법칙의 정식은 다른 모든 정언 명법의 정식에 선행하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행위 선택과 관련해서 ‘이는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이다’라거나 ‘나는 이 점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식의 이유를 들어 보편화될 수 없는 자신의 준칙을 정당화하고 이에 따라 행위한다. 칸트의 보편 법칙의 정식에 따르면 이런 시도는 도덕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그렇다면 이 정식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거나 고려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대우나 고려에 근거를 둔 준칙은 보편화될 수 없으며 따라서 결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칸트는 자신이 정언 명법의 여러 정식들 중 최초로 제시한 보편 법칙의 정식에서부터 이미 자율적인 여러 행위자들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그러한 공동체의 개념은 칸트가 정언 명법의 정식들 중 제일 마지막수단시한 것)를 들고 있다. 이런 경우들이 옳지 않다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이는 인간을 수단시한 경우를 보여주는 소극적인 예이며 결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한 적극적인 경우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자율적으로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해 나가는 이성적 존재이므로 이러한 인간을 존중하고 가능한 한 그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동시에 상대방을 마치 어떤 목적도 지니지 않은 존재처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특히 목적 자체의 정식과 관련해서는 이 정식에 등장하는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라’는 문구가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많은 경우에 상대방을 수단시하면서도 전혀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책꽂이가 필요하여 목수에게 책꽂이를 짜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 나의 목적은 분명히 책꽂이를 얻는 것이며 나는 목수를 이에 대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목수를 수단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수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하며 이러한 보상이 목수의 목적, 즉 목공일을 함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는 그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 즉 나는 목수를 수단으로써 사용함과 동시에 목적으로도 대우하고 있다. 물론 목수를 단지 수단시하며 전혀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나는 비난받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책꽂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든지 그것을 부당하게 훔친다면 나는 목수를 오직 수단시한 것이 되며 도덕적으로 당연히 비난받을 것이다.-목적의 왕국의 정식 : ‘너의 준칙을 통하여 너 자신이 항상 보편적인 목적의 왕국의법칙을 세우는 구성원인 듯이 행위하라.’칸트는 이 정식을 정언 명법의 형식과 내용이 결합된 ‘모든 준칙의 완전한 규정’이라고 표현한다. 앞서의 두 정의 유일한 근거라 할 수 있다.공리주의칸트의 의무론과 더불어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니는 규범 윤리학의 체계 중의 하나인 공리주의는 기본적으로 목적론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어떤 행위의 결과가 추구하는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그 행위는 옳은 행위이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그른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 결과나 모든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 결과가 좋다면 그 행위는 옳은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목적론적인 윤리설에서는 옳고 그름이 좋고 나쁜 결과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의무론적인 윤리설에서는 어떤 행위를 옳거나 그르게 만드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의 종류이다. 즉 어떤 행위가 모든 도덕적 행위자가 행해야 하는 의무에 속하는 것일 경우 그 행위는 옳지만 의무에 반하는 것일 경우 그 행위는 그르다. 의무론적인 윤리설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칸트의 윤리설이라면 목적론적 윤리설의 전형은 공리주의라 할 수 있다. 공리주의는 19세기의 영국에서 경험론을 배경으로 벤담이나 밀과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철학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전반적으로 영국 경험론의 철학자들은 윤리학의 측면에서도 인간의 경험 안에서 도덕적 가치의 근거를 발견하는데 전통적으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성립된 윤리적 이론으로 쾌락주의(hedonism)를 들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한다’라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라는 기본적 가치를 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여야만 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하는 것이 쾌락주의가 등장하는 일반적 사고 과정이다. 넓은 의미에서 공리주의도 쾌락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 또한 행위의 결과를 통해서 그 행위를 판단하려고 한다. 즉 어떤 행위의 결과가 바람직한 것이라면 그 행위는 좋은 행위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그 행위는 나쁜 것이 된다. 물론 경험론에 근거한 모든 철학자들이 좋은 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