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弓裔)에 대한 기존 인식의 비판적 검토목 차1. 머리말2.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3. 기존 인식의 문제1) 기존 사료의 한계2) 왕건·궁예정권의 연속성 문제4. 구비설화에서의 궁예와 재평가5. 맺음말1. 머리말9세기 이후 통일신라(統一新羅)는 골품제(骨品制)의 모순과 중앙정권의 약화, 그리고 지방 호족(豪族)의 난립이 발생하면서 점차적으로 국가체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사회혼란을 틈타 등장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은 각자 옛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강역에서 전 왕조를 계승한다는 명목 하에 태봉(泰封)과 후백제(後百濟)라는 새 왕조를 세우게 된다. 이른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후삼국시대의 승자는 궁예의 휘하로서 송악(松岳)을 기반으로 성장한 해양세력인 왕건(王建)의 몫이었다. 한때나마 후삼국을 호령하던 이들의 역사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세운 고려(高麗)의 등장과 함께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남은 채, 역사 속에서 점차 그 자취를 잃어가게 되었다. 특히나 이 과정에서 태봉의 역사는 궁예의 폭정에 중점을 둔 채 왕조 교체의 당위성을 주는 쪽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그 결과 궁예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시 폭군이라는 이미지에 갇혀있기에 보다 객관적이고 정밀한 평가가 필요한 상태이다.이렇듯 궁예에 대한 기존의 인식은 곧 역사가 승자의 입장을 대변할 뿐, 과거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음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궁예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와 같은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1980년대 이후 역사학계는 기존 사료대로의 해석을 지양하고,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궁예를 평가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을 중심으로 전승된 구비설화 등을 연구함으로써 궁예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최근 연구 성과들을 기반으로 궁예에 대한 기존 인식과 그에 대한 문제점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궁예에 대한 나름의 역사적 재평가를 내어느 왕의 자식이라고 특정되지는 않았으나 신라 왕족임에도 출생 당시 상서롭지 못한 조짐 때문에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비화는 궁예가 후삼국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반(反) 신라적 태도를 견지하는 데 중요한 명분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서는 궁예가 부석사(浮石寺)를 방문하던 중 사원에 걸려있던 신라왕의 화상을 칼로 찢는다거나 귀순한 신라인들을 무참히 죽인 것으로도 나온다.이러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궁예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취지로 태봉을 건국하는데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같은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왕건의 경우 궁예와 정반대 행보를 걸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궁예의 한계가 부각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왕건의 경우 궁예를 몰아낸 뒤 신라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침으로써 결과적으로 후삼국통일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궁예의 한계가 드러나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본다면 궁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기록상에 묻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한편 태봉을 건국한 이후 궁예는 점차 폭군으로 변모해 나가는데 특히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그러한 면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또한 『고려사』 이후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비롯한 여타 사료에서도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점차적으로 궁예의 폭군 이미지가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으로『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그때에 궁예는 반역이라는 죄명을 덮어씌워 하루에도 백여 명씩 죽이었다. 이리하여 장수나 정승으로서 해를 입은 자가 십상팔구에 이르렀다. 궁예는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을 체득하여 부녀들의 음행까지도 알아 낼 수 있다. 만일 나의 관심법에 걸리는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3척이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놓고 죽이고 싶은 자가 있으면 곧 그것을 달구어 여자의 음부를 찔러 연기가 입과 코로 나2차 사료라는 한계점과 편찬의 주체가 고려왕조임을 고려했을 때, 왕건의 정변으로 쫓겨난 궁예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 한계와 부정적 인식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봤을 때 궁예의 능력이나 업적보다는 그의 포악성과 무자비함을 강조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왕건의 경우 그 업적을 미화 및 과장함으로써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출생설화의 경우 두 인물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나지만 그 징조가 부정적으로 풀이된 궁예와는 달리 왕건은 신이한 영웅의 출생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령 『고려사』에는 왕건의 6대조부터의 가계를 설명하는바, 왕씨 가문의 혈통을 당나라 황실 및 용왕과 관련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왕건이 태어나기 전 풍수지리에 능통한 승려 도선(道詵)이 왕건의 부친 왕륭(王隆)에게 집터를 골라 주고 왕건의 출생을 예언한 설화 역시 신이함을 부각시키고 있다.더욱이 정변과정에서 왕건이 내세우고 있는 천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인과적인 해석 없이 단지 덕망 있는 왕건이 폭군을 몰아냈다는 단편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결국 이러한 기록들은 왕건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얼마간 과장된 것이 아닌지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이와 관련하여 최근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무위사(無爲寺) 선각대사비(先覺大師碑)의 비문내용은 궁예에 대한 기존 사료의 오류를 수정하고 문헌상에서 보이지 않던 궁예의 행적을 전하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비는 신라말 승려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천우(天祐) 9년 8월에 이르러 전주(前主)께서 북쪽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시고 남쪽을 평정하고자 하시었다. 그래서 큰 배들을 일으키어 친히 수레를 몰고 오셨다. 이때 나주(羅州)는 항복하였으므로 강가의 섬(浦嶼)에 군대를 멈추었지만, 무부(武府)는 저항하였으므로 서울(郊畿)에서 무리를 크게 일으키셨다. …… 이에 대왕께서는 일찍이 대사가 근래동안 지속됨에 따라 태봉과 고려의 정치적 관계 역시 단절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왕건이 즉위 초에 내린 교서를 살펴보자.이전 임금(궁예)은 …… 이러한 형편에 함부로 연호를 만들고 왕으로 자칭하였으며 처자를 살육하는 등 천지에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지어 죽은 사람에게나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 원한을 맺었으며 결국은 정권을 전복당하였으니 어찌 경계할 바가 아니랴. 내가 여러 신하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라 모든 풍속을 변혁하고 다 함께 새롭게 나아가려 하노니 마땅히 새 규율을 세우고 이전 일을 심각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교서에 의하면 왕건은 궁예가 함부로 연호를 만들거나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왕건은 과거 풍속을 변혁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왕건정권은 자신들이 실정(失政)이라고 주장했던 태봉정권의 많은 정치적 유산들을 물려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호의 계승이다. 궁예는 재위하는 동안 국호를 처음 고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세 차례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이런 궁예의 국호변경을 고구려 계승의식을 저버린 행위로 이해하고, 고려를 국호로 택한 왕건만이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해석해 왔다. 하지만 마가진단(摩訶震旦)의 약어인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이라는 의미로, 이를 통해 당시 궁예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 아우르는 통일을 지향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태봉에 대한 정확한 뜻을 밝혀놓은 기록은 없지만, 이 역시 궁예가 염원했던 세계관, 즉 이상향의 표현으로 보인다. 따라서 궁예의 국호 변경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기반으로 천하 중심의 대동방국과 천하통일이라는 가치를 내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두 번째로는 자주적인 연호 사용을 들 수 있다. 궁예는 무태(武泰), 성책(聖冊),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 등 독자적인 연호를 여러 차례 바꾸어 사용하였다. 당시 이러한 연호사용은 신라나 후백제에서 찾아볼 수극적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915년) 10월 압록강에서 고기를 낚았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고,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보검(寶劍)을 바쳤다.(918년) 2월 진, 오월, 발해, 고려, 회골, 조복, 당항, 및 유, 진, 정, 위, 노 등의 주에서 각기 사신을 보내 와서 조공하였다.(918년) 3월 고려 및 서북제번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와서 조공하였다.한편 왕건의 경우 942년에 거란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 매달아 죽여 버리는 등 잔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초기 고려와 거란과의 외교관계는 비교적 긴밀하게 진행되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922년) 봄 2월에 거란이 낙타와 모직물을 보내 왔다.(925년) 고려국이 내공하였다.즉, 위에 사례로 보았을 때 왕건 역시 궁예가 취했던 거란과의 친교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이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은 왕건이 거의 사망할 때쯤이다. 고려 건국 직후에는 여러 반역과 반란이 잇따랐고, 새 지배세력과 관련된 정치적 불안상황에서 대외적인 환경의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새 지배세력의 기반을 위해서라도 태봉의 대 거란 우호정책이 지속되어야 함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의 고려건국이 새로운 왕조가 성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궁예 정권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4. 구비설화에서의 궁예와 재평가이와 같이 기존의 문헌사료를 중심으로 한 궁예에 대한 인식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리하여 근래에 이르러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궁예를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짐에 따라 기존의 역사기록으로는 밝히기 어려웠던 궁예에 대한 새로운 모습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궁예와 관련된 구비설화에서는 기존의 인식과 상반된 궁예상을 전하고 있다,궁예왕에 대한 것은 여기 저 울음산이라고 있어. 그걸 명성산(鳴聲山)이라고도 하지. 거기가 뭐냐면 궁예왕이 마지막에 피
明成皇后, 조선의 근대와 좌절-명성황후의 대외정책의 한계와 의의에 대하여-목 차1. 머리말2. 19세기 중엽 조선의 대내외적 상황3. 민 왕후의 대외정책1) 민씨 정권의 개혁과 청의 내정간섭2) 민 왕후의 引我政策3) 청일전쟁과 민 왕후의 시해4. 민 왕후의 정책에 대한 평가5. 맺음말1. 머리말1895년 10월 8일, 새벽의 적막을 깨는 괴한들의 칼부림에 조선의 국모가 처참히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그 진실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못한 채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 사건을 을미사변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건의 피해자인 명성황후, 즉 민 왕후의 생애는 현대에 들어 대중매체와 미디어의 힘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다시금 받고 있으며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 역시 바르게 잡고자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최근 들어 민 왕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녀에 대해서도 단순한 정치적 희생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다.특히 당시 민 왕후를 직접 만나본 서구인들은 그녀를 지적이고 유능한 외교관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그녀가 그저 현모양처에 조숙한 왕비가 아니었음을 짐작해볼 수가 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 본격화된 서구세력의 등장과 근대화의 바람은 당시 조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당면 과제였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 열강과의 외교정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정책의 중심에는 바로 ‘외교관’ 민 왕후가 존재했으며, 그녀가 생존해있는 동안 조선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근대와 자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그리하여 본서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근대와 자주를 둘러싼 조선의 정치 상황과 민 왕후의 외교 정책에 대하여 시대 순으로 정리해보았으며, 더불어 오늘날 그녀의 외교술이 가지는 의의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2. 19세기 중엽 조선의 대내외적 상황19세기 중엽의 동아시아는 장구한 세월에 걸대원군이 잡게 되었다. 대원군은 우선적으로 세도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복권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왕권강화를 위해 시작된 경복궁 중건은 지나친 요역 부담과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자금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되는 당백전을 발행했으나, 당백전의 발행은 오히려 물가 상승과 이에 따른 사회혼란만 야기하여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원성만 사게 되었다.한편 외부에서는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서구 열강의 요구가 점차 거세지고 있었는데, 이와 더불어 본격화된 천주교의 유입은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질서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결국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서구 열강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병인박해를 비롯하여 丙寅洋擾(1866)와 辛未洋擾(1871)가 발생하였다. 이 두 차례의 양요 이후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대원군은 ‘오랑캐들이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라는 비문을 통해 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이러한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고종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의존한 채 독자적인 정치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독단은 왕임에도 실세가 없었던 고종으로 하여금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반발심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정치폐단을 논하면서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성인이 된 고종은 본격적인 본인의 친정을 선언하였다. 이 선포는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고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민 왕후였다. 아버지 앞에서 우유부단했던 고종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민 왕후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한 이후부터는 고종의 아내이자 정치적 조력자로서 고종을 항상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왕후의 친족인 여흥 민씨가 고종의 최측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으를 실행할 지식이 부족한 생태에서 모든 조약들이 강대국의 논리 앞에 속수무책으로 체결되었고, 결국 조선에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조약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편전쟁 이후 무너져가던 청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만큼은 지키기 위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게 되었다.1) 민씨 정권의 개혁과 청의 내정간섭근왕세력을 업은 고종과 민 왕후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조선은 점차 그간 닫혀있던 문을 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성사시키고, 변화하는 국내외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해외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 중 2차 수신사로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은 청나라의 외교관 황쭌센으로부터 『朝鮮策略』을 가지고 오게 된다.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 내용의 『朝鮮策略』은 아시아로 세력 확장을 모색하던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의견을 담고 있는데, 당시 국경문제로 러시아와 대립 구도에 놓여있던 청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청은 서양 열강들에게 조선과의 조약을 맺도록 알선을 자처함으로써, 조선이 華夷秩序에 의한 동아시아의 정세를 버리지 못하고 고종과 민 왕후가 외교관계에 있어 청나라의 영향을 무시 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주었다.민씨 정권은 1880년 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함으로서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고종은 기존의 의정부체제와 함께 2원적인 정치운영을 하여 정국운영을 보다 유리하게 하고자 했다. 한편 그 주요직에는 민 왕후의 주도로 민영익, 민태호, 민겸호, 등 민씨 세력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민씨 세력은 이들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모방하여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는데, 5군영의 구식군대를 2영으로 축소하고,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를 편성하였다. 하지만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던 구식군인들은 1882년 壬午軍亂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계에 물러났던 대원군은 군란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다시 재집권할 수 있었고, 위기에 몰린 민 왕후는 충청도로 피신을 가야만 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민씨 세력은 청을 개입하도진 고종과 민 왕후는 일본이 개입된 것을 알고 또 다시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청의 공격으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갑신정변을 빌미로 조선과 한성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였고 더불어 청과의 텐진조약을 통해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두고 청과 대립하기 시작했다.청과 일본 간의 대립 속에서 청의 힘을 얻은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 친정파가 국정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데, 고종과 민 왕후는 청의 지나친 간섭을 견제하고자 점차 반청적인 정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민 왕후는 김윤식, 어윤중 등 친청파 관료들을 축출하고 민응식, 민영환 등 민씨 세력을 고위 관직에 기용하였다. 한편 1885년 궁내의 사무를 담당하는 內務府를 궁 안에 설치하여 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국정 전반에 대한 업무를 고종의 측근들로 하여금 총괄하도록 하였다.2) 민 왕후의 引俄政策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해 청과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자, 민 왕후는 청·일을 배제한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夷以制夷의 인아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민 왕후가 지목한 나라가 러시아였는데, 러시아 역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진정책을 위해선 조선과의 수교가 절실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 텐진 주재 러시아영사 웨베르가 내한하였고, 조선정부는 그해에 한·러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조선의 인아정책은 러시아와 대립 중이던 여러 열강으로부터 반대 받게 되었는데, 특히 영국은 조선의 巨文島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한편 청은 본국으로 끌고 온 흥성대원군을 귀국시켜 민씨 정권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노쇠하고 정치적 기반이 무너진 상태였던 대원군은 더 이상 특별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대원군의 귀국은 청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영국함대의 거문도 점령으로 인한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자국본대한 자체적인 통제가 불가능해진 조선 정부는 군사적 원조가 가능했던 청에 원군을 요청하고 말았다. 하지만 청의 파병은 텐진조약을 구실로 한 일본군의 침입을 야기하였고,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민씨 정권은 일본의 철병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왕궁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나서 민씨 정권을 축출하였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정권을 수립하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을 다시 정계에 세워 정권의 허수아비 역할을 시켰으며, 개혁기구로서 軍國機務處가 설치하고 친일 개화파가 주도한 甲午改革이 단행되었다.한편 일본은 조선에 파견된 청군과의 전투를 감행함으로써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은 내무대신 이노우에를 조선공사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하였다. 이노우에가 공사로 부임한 직후 일본은 이용가치가 떨어진 흥선대원군은 정계에서 다시금 쫓아냈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는 그 대신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망명정객 박영효와 서광범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친일세력이 주도한 갑오개혁은 조선 최초의 근대개혁이라는 의미를 가졌음에도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좌절되고 말았다.한편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배권을 승인 받고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획득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말미암아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등 서구 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받게 되었다. 또한 민 왕후 역시 러시아와의 연계를 끊지 않고 지속적으로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박정양, 안경수, 서광범, 이완용, 이범진 등을 축으로 하는 반일·친러의 정동파가 정권 내에서 형성되었고 일본을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민 왕후의 반일정책은 일본에게는 크나큰 장애가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러시아와의 대결에 시간이 필요했던 더욱 필요했던 일본은 민 왕후로 인이다.
高麗 惠宗代의 왕위계승 문제目 次1. 머리말2. 惠宗의 즉위 배경과 정치기반3. 定宗의 정치기반4. 王規의 왕위쟁탈 모의5. 맺음말1. 머리말高麗 太祖의 맏아들인 惠宗 王武는 그가 10세였던 태조 4년(921)에 正胤(太子)으로 책봉되면서 일찍이 차기 국왕으로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母系였던 羅州 吳氏는 豪族聯合으로 형성된 고려 정권 내에서 뚜렷한 권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러한 출신 배경은 곧 혜종 즉위 이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 번져나갔다.당시 왕위계승 문제에 개입된 주요 인물로는 크게 王規, 朴述熙, 王堯(定宗)·王昭(光宗) 형제, 그리고 王式廉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왕규는 태조와 혜종 양대에 걸쳐 納妃한 廣州 지역의 유력 호족으로, 혜종을 암살하고 왕의 이복동생이자 자신의 外孫인 廣州院君을 옹립시키고자 했다. 그에 반해 박술희는 ?城郡 출신의 인물로, 태조의 유지를 이어받아 혜종의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그로인해 왕규와 박술희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로 지내왔다. 그러나 혜종이 3년도 채 못 되어 죽고 定宗 王堯가 즉위하면서 이들은 곧 정종에 의해 정치적으로 숙청되고 만다.정종은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였다. 또한 그의 모계인 忠州 劉氏는 나주 오씨와 달리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든든한 정치기반이 되었다. 한편 태조의 從弟였던 왕식렴은 西京에 주둔하며 북방개척에 앞장섰던 왕실세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서경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나갔고, 정종 즉위 과정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왕규를 제압함으로써 정종의 든든한 후원세력이 되었다.이렇듯 당시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고려왕조의 불안정한 왕권에서 비롯된 권력투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혜종대의 왕위계승 문제를 단순히 왕실 내부의 갈등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 후삼국을 거쳐 새 통일왕조를 건설한 고려사회의 변화양상까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시기는 신라의 骨品制가 무너지고 다양한 지방 세력이 새롭게 중앙권력으로가 왕위를 계승할 덕성을 가지었음을 알았으나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해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낡은 옷상자에 ?黃袍를 덮어 王后에게 주었다. 后는 이것을 大匡 朴述熙에게 보였더니 朴述熙는 太祖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惠宗을) 正胤으로 세울 것을 청하였다.A에 따르면 혜종의 外家는 그 신분이 미천하여 태자 책봉 과정에서도 박술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더군다나 A에서는 태조가 장화왕후의 천한 신분 때문에 임신마저 원치 않았다. 물론 과장된 측면도 있겠으나 이를 통해 당시 나주 오씨가 骨品에 기초한 신분구조상에서 그 세력기반이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오씨 집단은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남해안의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부를 지닌 호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우선 서남해안은 신라말 淸海鎭의 설치를 계기로 羅·唐·日 삼국을 잇는 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나주 오씨 역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장화왕후의 祖父인 富?의 이름을 통해서도 이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세력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즉, 富?의 富는 富裕함을 의미하고 ?은 史讀에서 흔히 音譯하는 인명의 接尾語와 같은 音價를 갖는다. 따라서 富?은 富者라는 의미를 지난다고 할 수 있다.한편 이들 오씨 세력은 고려 건국 이전 태조가 弓裔의 휘하 장군으로써 나주지역을 공략할 당시에 태조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태조 역시 해상세력 출신으로 자신과 유사한 사회·경제적 배경의 해상세력을 포섭하는 것이 고려건국의 기틀을 다지는데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이 강력한 해상세력이 고려를 창건한 사회·경제적 세력의 一翼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태조가 혜종을 그의 정통후계자로 선정했던 것과 중대한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태조가 이른 시기부터 태자 책봉을 서둘렀던 것은 무엇보다 초기 고려왕조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고려왕조는 호족연합을 통해 건국된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관계를 평화적으로 박술희를 단순히 武人勢力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박술희가 軍功을 세워 태조의 충신이 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는 군사적으로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혜종의 후견인이 되기 전까지 뚜렷한 정치적 행보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에게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적 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혜종과 박술희는 서로에게 부족한 군사력과 정치적 권한을 상호보완해주는 존재로서 상호간에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한편 태조는 정치·군사적으로 혜종의 세력을 보강해주기 위해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감행하기도 했다. 우선 태조는 혜종이 태자로 책봉됨과 동시에 첫 번째 태자비로 兵部令 林曦의 딸인 義和王后 林氏를 선택했다. 임희는 鎭川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고려왕조 성립과 더불어 병부령에 임명된 실권자로서 박술희와 더불어 혜종의 군사적 지원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태조는 같은 진천 출신의 林明弼을 徇軍部令에 임명함으로써 진천 세력이 군사권을 장악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혜종의 군사적 기반을 갖춰주고 아울러 반대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후 혜종은 왕규의 딸 後廣州院夫人 王氏와도 혼인을 맺었다. 왕규는 태조대 이미 최고 관부인 廣評省의 侍郞의 요직에 있으면서 太祖功臣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태조에게 두 딸을 바친 바 혜종과도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강력한 외척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왕규는 태조 20년(937) 後晋 황제의 즉위 축하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왕규는 당시 외교사신으로 파견 될 만큼 유교적 소양이 높은 관료화된 호족 세력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왕규는 廉相 및 朴守文과 함께 태조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宰臣 중 한명으로 태조가 죽자 遺命을 내외에 선포하는 등 태조 재위 동안에 정책 실무를 담당한 중요 인물이라 할 수 있다.이렇듯 혜종은 박술희와 같은 무신집단과 더불어 진천·광주 등의 호족세력들을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대표적인 관갔다. 이러한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의 확대는 후에 요·소 형제가 왕위에 오르는데 가장 큰 정치기반이 되었다.그 외에도 요·소 형제를 지원했던 또 다른 대표적 인물로는 平州 출신 朴守卿이 있다. 박수경은 정종 즉위할 당시 내부의 여러 어려움을 정리한 공로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주 박씨는 본래 경주에 살고 있었지만 지방관으로 신라 景德王 7년(748)에 평주로 이동한 일족이었다. 그들은 浿江鎭 지역의 군사적 조직을 통하여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여 일찍이 궁예의 중요한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이후 태조에게 妃를 셋이나 혼인시킬 만큼 정치적으로 크게 부상했다. 더욱이 태조 5년(922)에는 朴質榮을 비롯한 평산 박씨 세력에 대한 서경으로의 사민정책이 실시되면서 이들은 서경 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곧 이러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정종은 즉위 당시 이 패강진 세력을 통하여 서경세력과도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王規의 왕위쟁탈 모의태조가 재위 26년(943)만에 죽자 혜종은 정윤으로 책봉된 지 20여 년 만에 마침내 고려 2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준비과정을 통해 안정적일 것 같았던 혜종의 왕권은 재위 2년(945)만에 왕규의 참소를 계기를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혜종은 병환으로 죽어버리고 만다. 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高麗史』왕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D-1. 王規는 廣州사람으로 太祖를 섬겨 大匡 벼슬을 했다. 태조가 왕규의 두 딸을 후궁에 받아들여서 하나는 열다섯째 왕비로, 다른 하나는 열여섯째 왕비로 삼았는데 그 중 열여섯째 왕비가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廣州院君이다.D-2. 惠宗 2년(945)에 왕규는 왕의 아우 堯와 昭가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참소하였으나 혜종은 그것이 허위임을 알고 그들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司天供奉 崔知夢이 왕에게 말하기를“流星이 紫微垣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혜종은 왕규가 요?소를 모해하려는 징조로에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우선 깊은 잠을 자고 있던 혜종이 자객을 일격에 죽여 놓고도 이를 덮어두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혜종의 후견인인 박술희도 건재한 상태에서 왕규 본인이 직접 암살을 시도하러 궁궐을 난입한다거나, 최지몽에 의해 적발되었음에도 그를 꾸짖기만 할 뿐 그냥 물러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이에 대하여 하현강은 당시 혜종이 왕규를 응징할 만한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이 같은 기이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왕규의 혜종 암살 시도는 어디까지나 사료상의 내용일 뿐, 이를 실재 있었던 사건으로 보기에는 의심되는 점이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혜종이 과연 자신의 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왕규의 죄를 묻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또한 왕규 역시 진정 혜종을 시해하고자 했다면 왕이 침실을 옮겼다고 그냥 물러설 수 있었을지 의구심이 든다. 무리를 이끌고 왕의 침전에까지 난입했다는 것은 자칫 일족이 멸할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규의 모반 계획은 정종이 즉위하고도 또한번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E. 己酉日에 왕규가 역모를 꾸미다가 잡혀 죽었다.F. 己酉日에 왕규가 대광 박술희를 죽였다. 술희는 성품이 용감하여 나이 18세에 弓裔의 衛士가 되었으며, 후에 태조를 섬겨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遺命을 받아 혜종을 보좌하였다. 혜종이 병환이 나자, 드디어 왕규와 서로 미워해서 군사 백여 명을 데리고 다녔는데, 왕이 그가 딴마음을 품었는가 의심하여 갑곶으로 귀양보냈더니, 왕규가 이어 임금의 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E에 따르면 두 번에 걸쳐서 혜종의 암살을 기도했던 왕규는 정종이 즉위한 다음날에 또 한번 모반하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 역시 잘 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무렵 왕규는 신변상 자유스러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D-4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정종은 혜종이 죽기 전에 이미 왕식렴과 內應하여 서경의 군대를 개성에 끌어들였고, 그 후 왕규는니다.
神文王의 왕권강화와 達句伐 천도 문제目 次1. 머리말2. 신라 왕위계승의 변화와 중대사회의 성립3. 金欽突의 亂과 신문왕의 왕권강화4. 달구벌 천도 문제5. 맺음말1. 머리말660년 百濟의 멸망과 함께 본격화된 신라의 삼국통일은 武烈王系의 왕위계승권 장악과 더불어 전제왕권의 강화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급속도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신라사회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내적 역량의 집약이 가능한 새로운 중대사회가 성립되었고, 마침내 그 힘을 기반으로 신라는 삼국통일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물론 통일 과정에서 唐의 역할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바, 그로인해 민족적 관점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끌어들인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비판을 받아오기도 했다.하지만 이와 같은 비판 속에서도 통일 직후 신라가 보여준 정치적 행보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새롭게 편입된 영토와 종족을 빠른 속도로 통합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고, 羅唐戰爭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통일사회의 자주성을 확보해 나갔다. 특히 삼국통일 이후 체제정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神文王은 金欽突의 亂으로 대변되는 眞骨貴族의 반발을 제압하고, 왕권을 제도적으로 확립시킴으로써 중대 신라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문왕 역시 오랫동안 수도 慶州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중앙 귀족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는데, 이는 신문왕대에 추진되었던 달구벌 천도의 실패를 통해 단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비록 자료가 부족하여 달구벌 천도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본시 수도란 한 국가의 정치ㆍ경제ㆍ문화적 중심지로서 수도 이전은 다양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동반하는 매우 중대한 사업 중에 하나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문왕은 천도를 통하여 중앙 귀족세력의 在地的 기반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정치세력을 새롭게 확보함으로써 왕권강화의 마침표를 찍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천도 계획이 무산됨으로써 신문왕의 왕권강화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는 중앙과 지방의은 銅輪系의 眞平王으로 이어지고 진지왕계는 왕위계승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하지만 진지왕의 아들 金龍春은 진평왕의 딸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왕실측근으로 일정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록 진지왕이 폐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평왕이 진지왕계를 정치적으로 포섭했던 것은 당시 불안정했던 왕권을 혈연적 기반을 통해 강화하기 위한 왕실의 조치라 생각된다. 한편 김용춘의 아들 金春秋는 가야왕족인 金庾信 누이와의 혼인을 통해 기존의 귀족세력과 대비되는 새로운 왕실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이들 신세력에 반기를 품고 발생한 ?曇의 亂을 진압함으로써 김춘추 세력은 眞德女王의 측근이 되어 왕권강화를 위한 체제 정비를 단행하였다. 우선 親唐政策을 통해 대외관계를 안정화 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궁성수비대인 侍衛府, 왕명을 집행하는 執事部, 그리고 형률사무를 담당하는 佐理方府 등 새로운 부서들이 신설되었다.그 결과 진덕여왕 사후 김춘추는 廢王의 후손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上大等 閼川의 추천을 통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신라의 왕위계승권은 동륜계에서 진지왕계로 복귀되었고, 기존의 성골출신에서 진골출신의 왕족이 왕위를 계승하는 새로운 중대사회가 성립되었다.한편 문무왕은 삼국통일 과정에서 왕권을 위협하는 반대세력들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지위를 공고히 해나갔다. 대표적으로 문무왕 2년(662) 大幢摠管 眞珠와 南川州摠管 眞欽이 국사를 소홀히 한다는 모호한 이유로 처형되었으며, 문무왕 10년(670)에는 패전을 빌미로 衆臣 義官 達官 興元 등 여러 귀족들이 파면되기도 했다. 그러나 귀족세력에 대한 숙청은 일련의 역모 사건을 통해 그 불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문무왕 사후 왕실외척까지 가담한 대대적인 모반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야만 했다.3. 金欽突의 亂과 신문왕의 왕권강화정치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은 신문왕 즉위 직후 발생한 김흠돌의 난에 의해서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김흠돌은 신문왕이 태자로 있던 시절 8월 16일에는 교서를 내려 그들을 참수한 이유를 발표했다. 이후 8월 28일에는 兵部令 軍官이 역모 계획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숙청과 더불어 신문왕은 3년 뒤 김흠돌의 소생인 왕비를 출궁시키고, 奈勿 麻立干의 8대손이며 무열왕의 사위인 金欽運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나『삼국사기』에서는 왕비책봉 과정을 매우 세세하게 다루고 있어 신문왕의 재혼이 당시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일길찬 金欽運의 작은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기로 하고, 우선 이찬 文穎과 파진찬 三光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智常을 보내 納采하게 하였는데, 예물로 보내는 비단이 15수레이고 쌀, 술, 기름, 꿀, 간장, 된장, 포, 젓갈이 1백3십5수레였으며, 벼가 1백5십 수레였다. 5월 7일, 이찬 文穎과 愷元을 金欽運의 집에 보내 책봉하여 夫人으로 삼았다. 그날 묘시에 파진찬 大常ㆍ孫文, 아찬 坐耶ㆍ吉叔 등을 보내 각각 그들의 아내와 梁ㆍ沙梁 2部의 여자 각 30명과 함께 부인을 맞아오도록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곁에서 시종하는 관원들과 부녀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왕궁의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왔다.”(『삼국사기』제8권 신라본기, 제8, 신문왕 3년)더욱이 왕비책봉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愷元과 三光은 각기 무열왕계와 김유신계 인물로 확인되며, 신문왕대에도 이들 양 세력이 정치적으로 규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문왕은 귀족세력과의 외척관계를 청산하고, 혼인정책을 통한 왕실세력 규합과 왕권강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 신문왕은 제도 개편을 통해서도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우선 신문왕 원년(681)에 시위부를 총괄하는 시위감 대신 6명의 장군을 둠으로써 왕실 호위를 강화하였다. 또한 진평왕대 설치된 誓幢을 발전시켜 九誓幢으로 정비함으로써 왕실직속의 중앙군을 조직하였다. 특히 구서당의 구성원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피정복민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중앙정었다. 각 소경들은 복속지역에 대한 통제 및 동남으로 치우진 수도 경주의 지리적 한계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國原小京과 南原小京에는 각기 대가야와 고구려 유민들이 이주하여 살았던 곳으로, 이로 볼 때 오소경 제도는 복속민을 원주거지에서 벗어나게 하여 이들의 세력형성을 통제했던 것으로 보인다.어쨌거나 신문왕의 왕권강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관리제도에 대한 정비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신문왕 2년(682) 4월에는 位和府令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하였고, 6월에는 國學을 세워 인재육성을 모색하였다. 인재육성은 종래의 정치실무자인 귀족들을 견제하고 왕 중심의 새로운 관료조직을 만들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특히 국학은 유교적 王道思想에 입각한 인재육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기관으로 신라사회가 중대로 넘어가면서 기존의 불교적 통치논리를 대신해 유학적 지배체제를 지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더 나아가 신문왕은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에도 제약을 두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신문왕 7년(687) 文ㆍ武관리들을 위한 官僚田 지급이 실시되었고, 2년 뒤에는 기존의 수조권인 祿邑을 폐지하는 대신 歲租를 차등 있게 지급함으로써 관료전과 세조를 보편화하였다. 기존의 녹읍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뿐만 아니라 그 토지에 딸린 노동력까지도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에 반해 관료전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 허용될 뿐,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했다. 따라서 녹읍의 폐지와 관료전의 지급은 귀족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국가가 장악하고, 이들의 특권을 제약하여 왕권을 강화하려했던 조치라 할 수 있다.4. 달구벌 천도 문제상술한 바와 같이 신문왕은 귀족세력에 대한 숙청과 제도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달구벌로의 천도를 시도함으로써 왕권강화의 마침표를 찍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문왕은 오랫동안 진골귀족의 재지기반이었던 경주에서 벗어나 왕권을 보다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왕이 새로운 수으로도 경주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경주 김씨 족단과도 밀접한 달구벌을 새 수도로 결정했던 것이다.하지만『삼국사기』에는 “신문왕 9년(689)에 도읍을 달구벌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했다”하여 천도 계획이 무산된 것으로 나온다. 더군다나 천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들이 없는 상태라 어떤 내부적 마찰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파악하기가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신문왕의 개혁들이 성공했던 것에 반해 천도 계획만이 실패했다는 것은 천도 문제가 그 이전과 차원이 다른 귀족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으로 신문왕대의 왕권이 귀족의 전통적 기반을 박탈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삼국통일이 이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중앙을 대신해 정권을 지탱해줄만한 지방 세력이 형성되지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계획은 너무 섣부른 시도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달구벌 천도의 실패는 무열왕계가 추진해왔던 왕권강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신문왕 이후 신라 중대사회가 황금기를 맞이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수도 집중화에 따른 중앙과 지방의 차별과 골품제에 따른 신분질서가 고착화되면서 사회 내부의 갈등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또한 신문왕 사후 귀족세력이 다시금 대두되면서 경덕왕대 이르러서는 녹읍제가 부활되기도 했다. 결국 신문왕대에 정점을 찍었던 왕권은 시간이 흘러 점차 약화되어 갔고, 혜공왕 4년(768) 金大恭의 난을 시작으로 진골 귀족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혜공왕을 끝으로 무열왕계의 왕위 계승이 끊어지면서 신라 중대사회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5. 맺음말이상으로 신라 중대사회의 성립에 따른 신문왕의 전제왕권 강화와 그 한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상술한 바와 같이 신라 중대사회의 성립은 곧 무열왕계의 왕위계승권 장악과 더불어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정치권력이 재편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 되었다.
한국사 검정 교과서 논쟁의 검토목 차1. 머리말2. 교과서 검정제의 등장 배경과 문제점3. 우편향 교과서의 문제점4. 진보·보수진영의 대립과 검정제의 개선방안5. 맺음말1. 머리말1948년 건국 이래 대한민국 사회는 반공과 독재, 그리고 경제개발이라는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이와 동시에 민주주의 시민의식이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특히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독재정권이 물러나게 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민주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이러한 민주화 바람은 사회 다방면으로 퍼져나가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역사 교육계에서는 과거사 문제를 바르게 잡고 민주의식의 함양을 위한 제도적 개혁이 수차례 단행되어 왔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중심의 국정 교과서제를 대신해 자율성을 강조한 검정 교과서제가 채택되기도 했다.그러나 민주화의 과잉에 따른 각계각층의 다양한 가치관이 난립하는 상황 속에서 채택된 검정제는 오히려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을 촉발시키는 결과만을 낳게 되었다. 그 결과 최근 왜곡과 오류가 심한 우편향의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 받게 되면서 이를 둘러싼 진보 및 보수 진영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문제로 까지 확대되면서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보수 인사들은 검정 교과서의 문제를 지적하여 국정 교과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어, 과거 독재정권이 주도한 국가주의적 역사교육이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커지고 있다.한편 교육부는 문제의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한 검정 교과서 8종 전체에 대한 전면적 수정·보완을 지시하여 사태를 서둘러 매듭지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부의 방침에 대해서도 진보와 보수 세력이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어 교과서 문제가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본서에서는 현행 교과서 검정제의 채택 배경과 그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는 바, 이를 통해 현재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교학사 검정 교과서의 문제점과 그 해결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교 국정 교과서에 더욱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민간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교과서에 반영되기는 실질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심지어 교과서의 내용 구성에서부터 판형, 색도, 쪽수에 이르기까지의 세부사항조차도 교육부가 통제하였다. 더욱이 1970년대 유신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움으로써,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강조된 국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역사 교과서는 국정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었고, 집필과 발행에 관한 권한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었다. 서술방식에 있어서도 지나치게 지배층 위주의 역사를 강조한다거나 다양한 학설과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정설처럼 논지를 굳혀버리는 등, 1970년대 이후 국정제 역사 교과서는 획일적인 역사관을 심는데 주력하는 형태를 보였다.하지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전사회적으로 민주의식이 강조되면서 기존의 국정 교과서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역사교육이 국가권력에 의해 일방적인 이념에 치우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정 교과서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97년 7차 교육과정에서는 검정제가 부분적으로 부활하여 국정 교과서인 ‘국사’와 더불어 검정 교과서인 ‘한국근현대사’가 교육과정에 함께 채택되었다. 이러한 검정제의 부활은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을 계기로 국어, 도덕, 역사 교과서에 대한 전면적인 검정제로 확대되었고, 현재는 한국사 검정 교과서가 필수 교과목으로 채택이 된 상태이다. 이에 지난 8월 30일 교학사 교과서를 포함해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고, 내년부터 고교 현장에서 사용될 예정이다.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교과서 검정의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아래 2011년부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대신해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부의 위임을 받아 검정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이 발견됨에 따라 부실 검정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인력 부분에 대해 살펴보자면 2011년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검정심의회위원이원으로만 검정이 실시되는 등 재정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따랐다.특히나 교학사 교과서의 경우 검정을 통과된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역사 왜곡과 오류가 심각한 것으로 밝혀져 일각에서는 검정 철회마저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교육부는 검정 교과서 전체에 대한 전면적 수정·보완을 지시함으로써 그 문제를 뒤늦게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 우편향 교과서의 문제점현재 교학사 교과서는 다른 7종의 검정 교과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실오류와 표절 의혹을 안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의 필자는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 이명희 공주대 교수, 그리고 4명의 고교 교사 등 모두 6명이다. 이들은 이른바 뉴라이트라 불리는 보수우익 세력으로서 기존의 역사 교과서들이 지나치게 좌편향임을 비판하고 국가주의적인 역사관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있다.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뉴라이트 집단은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종북 좌파 정권으로 규정하여 보수여당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과거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출판된 근현대사 검정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며 교과서 개편을 주장해왔다. 그리하여 교과서포럼이라는 뉴라이트 단체에서는 우편향의 ‘대안 교과서’를 집필하여 교과서에 대한 이념문제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대안 교과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주도했다고 보는 지배층의 역사만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만을 따져 독재와 친일까지도 합리화하는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령 대안 교과서에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근간으로 일제의 지배를 합리화하고 있으며, 제주 4·3 사건을 좌파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또한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의 성공을 부각시키면서 이승만·박정희 독재 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편 뉴라이트는 1948년 정부수립과 반공사상을 강조함으로써 광복절 대신 건국절을 기념해야 한다는 억지 주장까지 펼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독립 운동가들이 온사를 다룸에 있어서 이승만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반면, 김구, 안창호 윤봉길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가 미약하다 못해 배제된 경우도 허다하다. 이승만에 대한 맹목적인 평가는 정부수립 과정 서술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라는 주관적인 평이 들어가는가 하면, “광복 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다”라는, 교과서 서술 방식으로는 유례없는 표현이 들어가기도 했다. ‘단독 정부 수립활동과 좌익의 방해’라는 소항목에서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자세히 소개하며, 절대 공산주의 국가는 불가하니 현실적으로 분단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으며 좌익이 이를 방해했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반면 이승만이 탄압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해서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등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편파적이다.한편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서술에서는 “쿠데타”라는 편수용어를 쓰면서도, 긍정적 서술로 일관했다. 그리하여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면서 쿠데타를 긍정할 만한 편향적 사실관계만 열거했다. 또한 1972년 10월 유신에 대해서도 “자유 민주주의 정도에서 벗어난 비상 체제인 동시에 독재였다”고 명시하면서도, 이를 “북한의 남한 공산화 시도로 인한 긴박한 분위기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하는 등 불가피성을 강조해 독재의 심각성을 희석시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그 밖에도 교학사 교과서는 역사 성향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단순한 사실관계에 대한 왜곡까지도 심각한 수준이다. 가령 1922년 조선총독부가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면서 한국어 교육을 필수화한 것으로 서술했지만, 사실 총독부가 교육령으로 필수화 한 것은 일본어였지 한국어가 절대 아니었다. 또한 1948년 7월 17일 공표된 헌법 전문의 경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서술했으나 제헌 헌법 어디에도 '임시정부'라는 단어를 찾아 볼 될 교과서가 정확하게 쓰여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을 제고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일 뿐이라며 반박하고 있다.이러한 이념적 갈등 상황 속에서 교학사 교과서 집필을 담당한 이명희 교수는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개최한 '근현대 역사교실'의 초청 강연에서 “(한국 문화의 헤게모니를 좌파가 잠식한) 현 국면 유지 시, 10년 내에 (좌파에 의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전복이 가능하다”며 역설했다. 이 같은 발언은 곧 좌파 척결과 우파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교과서 문제를 학술적 차원이 아닌 이념 논쟁으로까지 확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편 교학사를 제외한 7종의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은 교육부가 내놓은 수정·보완 권고안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교과서 수정안 제시하고 있어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장기활 될 것으로 보인다.더군다나 일부 보수인사들은 현행 검정제도의 문제를 들어 국정 교과서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어 현행 검정제에 대한 비판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나 국정제는 모든 결정을 중앙에서 독점하는 것이기에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에 어긋난다. 또한 국정 교과서가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진보인가 보수인가와는 관계없이 역사 교육이 집권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도구화될 위험이 크다. 더 나아가 교과서 개발을 국가권력이 독점한다면 학문과 사상의 창의적인 발전을 저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역사 교육을 받는 학생들까지도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결국 현행 교과서 검정제가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지 않고 본래의 목적, 즉 학문성과 교육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정제로의 회귀가 아닌, 검정 시행상의 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교학사 교과서와 같이 사실관계에 대한 오류부터 줄이고 그 질적 수준을 높이려면 검정과정의 열악한 여건을 전면적으로 개선해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검정위원은 역사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인력,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