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目 次 -Ⅰ. 序論 ‥‥‥‥‥‥‥‥‥‥‥‥‥‥‥‥‥‥‥‥1. 운동을 시작하기 前2. 나의 운동 방법1) 수영2) 달리기Ⅱ. 本論 ‥‥‥‥‥‥‥‥‥‥‥‥‥‥‥‥‥‥‥‥1. Karvonen 공식과 나의 수치 값2. 운동일지1) 수영2) 달리기3) 나의 심박동 변화(표)Ⅲ. 結論 ‥‥‥‥‥‥‥‥‥‥‥‥‥‥‥‥‥‥‥‥운동을 시작한 後Ⅰ. 서론1. 운동을 시작하기 전의 상황 : 여자라면 뒤따르는 다이어트. 나는 오직 살을 빼고 날씬한 몸매를 갖기 위한 다이어트를 위해 운동을 해왔다. 규칙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항상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빨리 걷기를 하였으며 살을 빼기 위해 식사를 거르는 일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폭식하게 되자 체중은 절대 빠지지 않을거라는 듯 항상 그 숫자를 가리켰다.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레포트지만 다시 한번 이번 기회에 운동은 꾸준히 해야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며 다이어트가 아닌 나의 몸, 나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며 열심히 운동을 해볼 것이다.2. 나의 운동 방법1) 수영1. 유산소운동 지구력과 폐활량을 키워준다.2. 체중이 무겁거나 관절이 안 좋은 사람이 뛰거나 걷는 운동을 하면 관절이나 다리에 무리가 있는데 수영은 이러한 무리 없이 운동이 가능하다.3. 열랑의 소비: 물에 있으면 체온조절과 삼투압 조절 때문에 많은 열량이 소모4. 많은 운동량 : 물의 저항 때문에 조금만 해도 엄청난 운동효과를 볼 수 있다.수영은 폐기능 폐기능을 활발하게 촉진 혈압은 심장의 수축으로 인해 혈액이 흐를 때 혈관벽에 작용하여 생기는 압력으로서의 운동부하의 강도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수영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안정된 혈압을 유지하고 있다. 수영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그 형태나 기능에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장거리 달리기와 수영 등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운동종목의 선수의 심장의 좌심실이 커지는 등 일반인에 비해 무겁고 튼튼한 심장을 보유하게 된다. 따라서 지구성 활동으로서의 수영은 신체조직에 필요한 높은 산소수용 능달리기가 가장 적절하다. 달리기를 하면 온몸의 혈액순환이 좋아져 장딴지 정맥의 울혈로 발생하는 정맥류도 예방할 수 있다.8. 뇌의 노화방지·우울증 치료 : 발에 닿는 자극이 뇌를 활발히 해 세포를 활성화한다. 달리기를 한 지 30분쯤 지나면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져 어디까지라도 달리고 싶은 상태가 되는데 이를 「러닝하이」라고 한다. 달리기를 하면 베타 엔돌핀이란 물질의 농도가 높아져 스트레스 해소와 기분전환에 큰 도움을 준다.■ 달리는 방법달리기 전 준비운동을 통해 관절과 근육의 긴장을 풀고, 심장에도 서서히 부담을 주도록 한다. 달리기를 마친 후에도 똑같이 마무리 운동이 필요하다. 준비·정리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의 피로회복이 늦고, 심장에도 무리를 줄 수 있다.천천히 달려라마라톤처럼 오래 달리는 운동에서 전문선수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스피드를 내는 것은 금물이다. 특히 평소 운동량이 적은 사람들이 무리해 빨리 달리면 완주는커녕 달리는 중간에 예기치않은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심장기능을 100% 발휘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도 2~3㎞ 이상 달릴 수 없지만, 50% 수준에서는 마라톤 풀 코스를 뛸 수 있다.즐거운 마음으로달리기가 좋은 운동이지만, 한 가지 단점을 꼽으라면 단조로워서 자칫하면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리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리기의 좋은 점을 마음 속으로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달리거나 때로는 대회에 참가해 완주하거나 자신의 기록을 재보는 것도 달리기의 묘미를 살리는 방법이다.Ⅱ. 본론파란색 : 운동한 날짜월화수목금토4/29(레포트 시작)4/305/1(수영)5/25/35/4(달리기)5/5(달리기)5/65/7(달리기)5/85/9(달리기)5/105/11(딜리기)5/125/13(수영,달리기)5/14(수영)5/15(수영)5/16(수영)5/175/18(딜리기)5/195/20(수영)5/21(수영)5/22(달리기)5/235/24(수영)5/255/26(달리기)5/27(레포트 제출일)Karvo심도 들었다. 그리고 호흡을 배웠는데 물에 얼굴을 담고 숨을 참고 규칙적으로 뱉어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러다 또 다시 발차기 동작. 아까처럼 뒤로 누워 앞으로 발차기하기에 이어 몸을 뒤로하여 뒤로 발차기 하는 동작이 이어졌다. 너무 힘들어 숨이 가쁘게 차 올랐고 휴대폰을 갖고 들어올 수 없기에 강사가 이모님과 대화할 때 후배에게 15초를 쟤달라고 하여 맥박수를 쟤보았다. 맥박수는 180회. 운동 첫날, 본격적인 수영은 하지 않았지만 발차기의 후유증으로 평지를 걸을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계단을 올라갈 때는 다리가 알 베긴 것 처럼 당겼다. 역시 운동의 길은 멀고도 험한 여정과 다름 없다 생각했다.5월 4일운동실시시간운동하기 전심장박동 수운동한 후심장박동운동시간운동방법컨디션특이사항pm 8시~8시 40분68회160회50분걷기+달리기60%달리기 첫날운동장 5바퀴오늘은 수영 수업이 없는 날. 수영이 월요일 휴무, 화수목금토로 이루어져있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수영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그래서 교수님의 운동이 달리기 위주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생각났고 그동안 하던 빨리 걷기 운동과 달리기를 병행하자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은 코 앞이 유등천이라 ‘수침교-가장교-태평교-유등교-도마교-유등철교-버드네다리-복수교-사정교‘ 왕복 루트로 운동했는데 좀 더 면밀한 측정을 위해 유평 초등학교의 운동장을 택했다. 비가 왔던 터라 흙이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라 운동장을 따라 있는 하수도 철판 위를 걸었다. 한바퀴를 기준으로 천천히 걷는 데 약 3분정도 걸렸고 빨리 걸으니 2분이 약간 넘었다. 천천히 걸을 때의 심장 박동수는 쟤기 전의 68회아 별반 다를 것 것 없었고 빨리 걷기는 116회가 나왔다. 운동은 최소 20~30분간 지속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이 떠올라 20분간 빨리 걷기를 유지하다가 0.6%의 컨디션으로 달렸다.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30초. 걷기보다는 달리기가 현저히 단시간의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8~9주는 곤욕이다. 초급반이기 때문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수영을 지속적으로 해야하는데 그만 생리가 시작한 것. 워낙 불규칙적이라 그냥 느낌으로 할 때 됐다 싶으면 생리가 시작하는데 이번 달은 예상치 못한 날짜에 시작하고 말았다. 첫날이라 양은 그닥 많지 않았지만 수영장을 갈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운동은 해야 하기 때문에 유평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았다. 생리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도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컨디션이 좋아 0.8%로 달려보았다. 0.6%의 컨디션으로 한바퀴 달렸을 때 걸리는 시간은 약 1분 30초인데 0.8%로 빨리 달리니까 거의 1분이 걸렸다. 그런데 역시나 난 빨리 달리기에는 취약한 가 보다. 한바퀴만 달려도 숨이 가쁘게 차올라 쟤보니 바로 188회, 172회의 치수를 훨씬 넘어버렸다.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심장박동수가 평균보다 높지 않으면 한번의 호흡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이 떠올라 나는 운동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5월 9일운동실시시간운동하기 전심장박동 수운동한 후심장박동운동시간운동방법컨디션특이사항pm 9시9시 52분68회180회약 52분달리기80%전날 어버이날로 인해 폭식전날 어버이날이었던 지라 부모님께 드릴 음식을 만들면서 그만 폭식을 해버리고 말았다. 김밥, 주먹밥, 부침개를 만들었는데 모두 고열량 음식이었지만 맛을 보기 위해 먹었고 운동도 하지 못했다. 생리 기간 중이라 오늘도 역시 수영은 무리였기에 쌓인 지방을 태우자는 일념으로 평소보다도 더 집중하여 0.8% 로 달렸다. 목표를 이루자는 다짐으로 달리니 처음엔 한바퀴만 돌아도 숨 넘어갈 듯 헉헉거렸는데 두바퀴까지 많은 무리 없이 돌 수 있었다. 땀이 나자 괜스레 지방이 태워지는 느낌이 들어 목표치까지 달성했지만 빨리 걷기로 다섯바퀴 더 돌며 마무리 운동까지 확실히 마쳤다.5월 11일운동실시시간운동하기 전심장박동 수운동한 후심장박동운동시간운동방법컨디션특이사항am7시 30분~8시 30분69회184회60분달리기+근력80%헬스장다이어 숨이 차오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부표를 잡고 팔 돌리기까지 배웠는데 오늘 하루 종일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어깨를 쓰다 보니 팔을 들면 어깨가 무거워지듯 통증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수업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맥박수가 142회를 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나는 학교에 돌아와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다시 유평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수영한 탓에 살짝 몸이 지친 듯 하여 0.6%로 조절하여 달렸고 결국 목표량을 채울 수 있었다.●2주차 : 첫째주보다 덜 힘들다. 운동의 강도를 세게 높여도 다리가 당기거나 지치지 않음.5월 14일운동실시시간운동하기 전심장박동 수운동한 후심장박동운동시간운동방법컨디션특이사항6시 30분~7시 20분67회176회50분수영80%오늘 수영 수업은 부표를 잡지 않고 팔을 돌리며 25m 왕복하기였는데 아무래도 부표가 없다보니 왼팔을 돌리고 오른 팔을 돌릴 때 머리를 확 젖혀 호흡해야하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아 숨이 계속 차오르고 몸이 물 속으로 점점 잠겼다. 두세번 팔을 휘저으면 호흡을 제대로 못해 숨이 차올라 결국 물에 뜬 몸을 세워 쉬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또 팔을 돌릴 때 어깨를 사용해 팔을 쭉 핀채 돌려야 하는데 나는 계속 굽어서 돌리고 물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으로 팔을 올려야 하는 데 그것도 잘 하지 못했다. 오늘 수업은 말 그대로 완전히 최악이었다. 뒤쳐졌던 수업을 잘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일주일 이상을 자유형 기본기를 배웠는데 그 부분을 배우지 못해 기본기가 많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다른 사람 뿐만 아니라 후배도 곧잘 하는 것을 보며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상 오기가 있어 20분에 수업이 끝난 후에도 다음 7시 반 타임 사람들이 올 때까지 약 십분간 혼자 나머지 공부를 강행했다. 처음엔 부표를 잡고 발차기를 하며 25m 왕복 두바퀴. 그리고 쉬어간 지 언정 부표를 잡지 않고 자유형 한바퀴. 돌아와서 맥박수를 쟤보니 0.8% 수를 넘은 치수가 다.
전쟁사 ?북진통일 논쟁?Ⅰ. 序論우리나라의 역사 중 가장 뼈아픈 비극으로 기록되어있는 한국전쟁. 시대적 암흑기인 일제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외교, 무력항쟁, 애국계몽 등 다양한 노선으로 끊임없이 독립을 부르짖던 결과,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휩쓸려 광복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서로 다른 경로의 이데올로기로 하나의 민족이 두 갈래로 갈라져 서로 칼끝을 겨눠야했던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한국전쟁이다.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체제를 달리하는 두 분단국가가 수립됨으로써 냉전체제의 최전방이 되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두 개의 정부는 ‘민족 이익보다 각자의 국가이익을 우선하는' 국가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남북한의 두 분단국가 수립은 분단자체가 그러했듯이 모든 한국인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어지는 1950년대 냉전으로 분단체제가 남과 북에서 성립된 것이다.우리나라는 현재 독일과 베트남, 예맨의 통일 후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반갑지 않은 수식어를 달고 있다. 한 민족, 한 뿌리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던 한 핏줄이 지금은 무력과 마음의 장벽을 쌓아 총구와 견제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애석한 현실이다. 전쟁의 참상은 현재까지도 ‘분단’이라는 극심한 후유증과 함께 감정의 골은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이산가족의 비통한 슬픔과 자원낭비, 정치적 견제, 지리적 제한, 또 다시 전쟁이 반복될 수 있는 위기감 등 많은 폐해가 있는 가운데 무력으로나마 한반도가 통일이 되었다면 분단으로 인해 반복되는 아픔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생으로 무고한 시민을 비극의 그늘로 보내며 이뤄낸 무력 통일은 과연 올바른 일이었을까? 한국전쟁 다시 연합국의 북진작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승만 정권 당시 강력히 주장한 북진정책에 대해 대한민국과 미국은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었는지, 과연 북진정책은 당시 통일을 위한 최선의 정책이었는지 알아보았다.Ⅱ. 本論1. 북진작전1) 북진작전의 경과와 영향1-1) 계획수UN으로서 새로운 침략행위를 없애고 국제적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것이 UN의 목표인데 이러한 UN 본연의 권능을 무시하고 침략행위를 계속한 북한을 38°선 이북으로만 격퇴시킨다면, 그들은 결국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재침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차제에 그들의 잔존능력마저 제거하기 위해서는 38°선을 돌파하고, 헌법상 고유의 국경선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이룩한다면 한국은 물론이요,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소련을 제외한 회원국가들이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따라서 UN으로서는 정치적으로 38°선 돌파문제와 한국의 통일문제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UN 안보리에서는 미국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안에 대해 비공산국가로서 반대한 나라는 인도 한 나라 뿐이었는데 유독 인도가 반대한 표면적인 이유는 중공을 승인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똑같이 중공을 승인하고 있던 영국에서는 9월 26일 Jebb 영국 대표가 "이 기회에 38°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UN 관리하의 전한국의 선거나 통일 한국의 실현도 불가능하다."라는 태도를 표명하고 38°선 돌파를 승인하는 결의안을 기초하여 7개국(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네덜란드, 노르웨이, 브라질, 쿠바, 파키스탄)의 지지를 얻어 8개국 공동결의안에 서명을 얻게 되었다. 자유진영측의 제안은 그때마다 소련이 거부권을 남용함으로써 묵살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소련측의 방해와 거부권을 피하여 8개국 공동결의안은 9월 29일 총회에 상정되었다.이 때의 제안설명에서 필리핀의 Romulo 대표는 "6월 27일 안보리가 결의한 그 지역인 'The Area'의 'The'를 ‘전한국’이라고 해석하면서 유엔군의 38°선 돌파의 권한은 이 결의안의 채택을 기다릴 필요조차 없이 안보리의 결의로 인정이 되어 있다. 때문에 본 안은 한국에 있어서 군사적 부문에 대하여 제한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북진을 기정사실화 하였다.총회에 상정된 결의안의 주요내용을 살펴 보면,UN은 전한국에 걸쳐 안전한 상태를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한°선에 전개하여 10월 9일 일제히 38°선을 돌파, 진격을 개시하였다.가. 동부전선 : 동부전선의 한국군 제1군단(한국군 2개사단 배속)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북한군 3개사단의 패잔병들을 격퇴하면서 하루 평균 26km씩 전진하는 놀라운 속도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당시 동부전선에 전개한 한국군의 보급사정은 대단히 좋지 못하여 군화의 보충보급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은 오직 통일의 일념으로 발에 헝겊을 감고 앞을 다투어 진격할 정도였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0월 9일 신고산을 점령한 한국군 수도사단은 남행열차에 적재된 각종 소총 8,000정과 전차 4대를 비롯한 많은 무기와 의약품 등을 노획하였다. 10월 10일 한국군 제1군단은 동해안 최대의 군사적 요충지인 원산을 탈취하고, 17일에는 함흥과 흥남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10월 20일에 원산으로 상륙할 예정이던 미 제10군단은 영흥만에 부설된 기뢰작업에 많은 시일이 소요되어 10월 26일에야 원산항에 상륙할 수 있었으며, 미 제7사단은 29일에 역시 한국군이 이미 점령한 이원에 상륙하였다.나. 중부전선 : 중부전선의 한국군 제2군단(한국군 3개사단 배속)은 10월 6∼9일 사이에 북진을 개시하였다. 제8사단은 철원.평강을 거쳐 곡산으로 진출하였으며, 제6사단은 화천.회양.원산으로 진격한 다음 이곳에서 미 제1군단과 연결임무를 부여받고, 최초 미 제10군단이 기동하도록 되어 있었던 원산-평양 축선을 따라 서진하다가 양덕에서 다시 북쪽으로 진출방향을 전환하여 10월 20일에는 성천을 탈환하였다.한편, 육군본부는 10월 16일 원주에서 제3군단을 창설하여 제11사단과 10월 8일에 재창설된 제5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함으로써 한국군은 3개군단, 8개사단으로 증강되었으며, 10월 25일과 11월 7일에는 제9사단과 제2사단이 창설되었다. 그 후 제3군단은 미 제9군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서울.춘천.인제.양양지구에서 출몰중인 북한 비정규군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다. 서부전선 :작전명령 제4호는 10월 20일부로 유효하였다. )하였으며, 10월 24일에는 이 한계선조차 철폐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지상군 부대들이 가용한 최대한의 전투력을 동원하여 한.만 국경선으로 진격하게 하였다.이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1일부터 총진격을 전개한 끝에, 10월 26일에는 박천.태천.운산.온정.희천.이원까지 진출하였다.그리고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마침내 한.만 국경선상의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 때가 '50년 10월 26일 14시 15분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하루 앞선 10월 25일 한국군 제1사단은 운산 북쪽에서 중공군 한 명을 최초로 사로잡은 데 이어, 다음날에는 한국군 제2군단 정면에 수 미상의 중공군이 출현하여 치열한 교전을 치르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출현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2. 북진통일 논쟁2-1) 50년대 통일논의의 전개과정1948년 남과 북에 들어선 두 정권은 전세계저인 냉전체제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대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국내적으로는 북진통일을 주장했으며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주도아래 유엔에서 결의한바 있는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의 원칙을 주장하였다.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도 평화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보다는 그것을 이용한 남한 혁명화에 몰두하였다.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남한을 무력통일하겠다는 북한 지도부의 도발에 의해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민족 내부의 적대감과 주변강대국의 냉전을 더욱 격화시킨 채 휴전으로 종결되었다.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으며 민족내부의 일체감을 파괴하면서 증오만을 심어놓았다. 전쟁이 RMx나자 남한에서는 반공주의가 만연하였고 북한에서는 반미?반남한 정서가 들끓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통일’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결국 통일은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남북한통일을 추구하여 미군 즉시 철수와 남북협상을 통한 총선거, 북한 주둔 중공군 철수상실이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다.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한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북진통일론이 본격적으로 주장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특히 휴전타결 시점부터였다.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재개된 직후부터 유엔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남한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고 공표하여 위기를 조성하였다. 특히 이와 같은 긴장상태는 미국이 남한 정부의 의사를 묵살하고 5월 25일 휴전회담에서 한국인 송환불원 포로를 휴전과 동시에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인계한다는 제안을 제출하자 더욱 증폭되었다. 휴전반대운동은 전국각지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동원하였고 국회 내의 야당정치세력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이것은 당시 많은 국민들이 기존의 분단을 유지하는 휴전체제를 반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 체제가 자신의 치명적 위기상황에 북진통일론을 이용하여 대항세력의 압력을 완화시켰을 뿐 아니라 대중동원에 성공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이승만 정권의 반공담론을 표현하는 구호인 북진통일론은 대내적으로 반공분위기를 이용하여 대항세력의 저항을 제거하고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적화통일에 대응하여 냉전체제의 공고화에 반대하고 열전을 조장하려는 담론이었다.2) 제 2단계 : 휴전이 기정사실화되고 국제정세가 양 진영사이의 공존이 정착되는 방향으로 가자 북진통일론은 그 허구성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북진통일론은 유엔과 서방진영의 통일론과 배치되어 우방국과 갈등을 야기시키고 보수세력 내부에서도 심각한 갈등과 균열을 불러일으켰다. 북진통일론의 한계는 이미 1955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3) 제 3단계 : 냉전의 공고화로 인해 북진통일의 현실성이 사라진 1950년대 후반까지도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무리한 권력강화에 대해 반대세력의 결집이 급속이 진전되었기 때문에 반공독재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한다.한민당의 후신인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