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서유럽 중세 세계의 형성과 발달1. 중세의 농촌 사회의 변화중세 초의 장원제는 장원에서 농노의 영주에 대한 부담은 주로 영주 직영지에서 주 부역의 형태였다. 그 관계의 노예적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 중기 이후, 특히 상업의 부활 이후 차츰 부역은 현물, 현금의 지대로 전환(금납화) 되었다. 아울러 영주의 직영지도 해체되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농노제 해체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영주의 지대 요구가 강화되어 농민 조건의 개선이 분명치 않았다.이런 추세와는 예외로 동부 유럽에서는 영주가 농노의 노동통제를 강화하였다.2. 상업의 부활지중해부터 살펴보면, 8세기 이슬람의 팽창과 지중해 무역의 전반적인 퇴조가 있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동방의 물품을 유럽에 중개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1세기 중엽 셀주크 투르크의 대두로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하는 교역로가 이용되었다. 15세기에 몽고지배가 붕괴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대두로 이 루트마저 봉쇄되자 새로운 동방 접근로를 위해 지리상 탐험이 시작되었다.북해무역은 바이킹의 활동과 13~15세기 한자 상권의 발달이 있었다. 남북 무역은 12세기부터 샹파뉴 정기시가 발달하였고 남부 독일의 상업도시들이 발달하였다. 14~15세기에는 한자 무역권이 번영하였다.3. 상업발달의 효과상업이 발달하면서 신용제도가 발달하였다. 또한 상업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 상업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서 영리행위의 정당화로 빈민구제, 고리대업의 유보적인정이 있었다. 당시 고리대금업은 유대인이 대다수 종사하였는 기독교인 고리대금업자가 등장하였고 연옥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4. 도시의 발달도시는 크게 성장도시와 건설도시가 있다. 성장도시는 자연 발생 도시이다. 기존 도시로 런던, 로마, 파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예전부터 수도의 기능을 하던 도시들이 대부분이다. 신도시가 항구, 성채 주변에 형성되었다. 신도시는 상인 집락에서 출발하여 자치공동체를 모색하였다. 또한 신도시에서는 상인길드와 양식이 유행하였고 견고함과 육중함을 느낄 수 있다.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이 유명하다. 12~13세기에는 고딕 양식이 유행하였다. 프랑스식 공법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 세련되고 우아하며 내 외부에 복잡한 장식 묘사가 있었다. 뾰족한 아치와 높은 첨탑이 특징이다. 프랑스의 노틀담 성당, 독일의 쾰른 대성당, 영국의 솔즈베리 성당이 대표적이다.12. 도시와 건축도시에서 건축 사업은 도시 자부심과 경쟁의식이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위 성직자와 영주, 도시 주민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오랜 기간동안 완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스콜라 철학이 중세 교회의 절정기를 표현하듯, 고딕 건축도 절정기의 교회를 상징하였다. 고딕과 스콜라주의는 중세 문화의 상징이다.5강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1. 비잔틴 제국의 시대 구분비잔틴 제국은 영토와 문화적 특징으로 두 시대로 구분가능하다. 전기는 324~610년이다. 서유럽을 제외하고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고, 통치 문화가 라틴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후기는 610~1453년이다. 영토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일부로 위축되고,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적이다.2. 비잔틴 제국의 전기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가 있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때 번영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영토적으로 서유럽을 제외하고 로마 제국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또한 로마법의 집대성으로 로마법을 편찬하였다. 하지만 니카의 반란으로 정치적 위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녹생당과 청색당의 갈등으로 인한 두 당파의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도가 많이 파괴되었고 성당의 신축과 개축공사 착수되었다. 이 과정에서 성 소피아 성당의 개축이 있었다.3. 비잔틴 제국의 후기위축의 주요 원인으로는 동, 남, 북방의 침입 세력이 있었다. 북쪽의 불가리아인, 북쪽의 슬라브인, 남쪽과 동쪽의 이슬람 세력의 대두로 비잔틴 제국은 위기속에 있었다. 영토는 지속적으로 위축되었고, 4차 십자군 원정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잠시 점령되기도 하였곡가가 상승하여 영주에 대한 농민의 협상력이 증대되었다. 부농이 출현하고 농민 사이에 빈부격차가 확대되었다. 그 결과, 농민의 지대 납부가 금납화 되었고 지대의 저하가 나타났다. 귀족의 수입이 감소하였고 농민에 대한 강압, 지대인상에 의존하였다. 또한 농민의 토지 보유권이 강화 되어 상속세, 결혼세등이 페지되었고 보유지의 거래가 허용되었다. 소작료 면제와 임금 상승은 농노제에서 지주 소작제로의 진전으로 이어진다. 14세기 프랑스, 영국에는 반 영주적 반란이 있었다. 이때의 농민 반란은 빈농이 아니라 주로 부농이 중심이 되어 정치권리 요구나 종교개혁 사상에 고취되어 일어났다.4. 도시의 변화도시인구가 감소하면서 교역량이 감소하였다. 상승기회가 막혀있던 직인들과 거의 무산자에 가까운 단순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도시의 부르주아는 국왕권과 협력하였다. 도시의 재력이 집중되면서 대부호가 출현하였다. 특시 금융, 상업 자본가가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특권을 획득하는 고나행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가가 유명하다.5. 백년 전쟁의 원인과 배경전쟁의 직접 원인은 왕위 계승 분쟁이다. 프랑스의 필립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필립6세와 에드워드3세의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하였다. 간접원인으로는 3가지 정도를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영토 문제가 있다. 프랑스의 가스코뉴 획득의지에 대한 영국의 대응이 있었다. 두 번째로,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동맹에 대한 영국의 응징 의지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정적 이해관계가 있다. 프랑드르 지방의 모직물 공업에 관해, 영국의 양모 수출에 대한 프랑스 국왕의 관세가 있었다. 프랑스왕이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플랑드르 백을 지원하자 플랑드르 수공업자들은 영국 왕에 지원 요청을 하였다.6. 백년전쟁의 경과전쟁은 1단계, 소강 휴지기, 2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에서 자원은 프랑스가 우세하였으나 영국이 경무장 보병, 특히 장궁병을 앞세워 군사적 우위를 점하였다. 양 군대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의 전투는 크레시 전투였다. 푸아티에에서는 흑태가문이 황제로 선출되고 스페인의 아라곤 카스티유 가문과 혼인하며 프랑스를 포위한 형국을 나타냈다. 그후 합스부르크 칼 5세가 번창기를 열었다.9. 신학의 위기프란체스코회 박사들, 오캄 등은 이성과 신앙의 균형과 조화라는 스콜라 철학의 존재를 공격 하였다. 신앙의 문제에서 이성의 배제를 주장하였다. 교리의 권위가 도전 받고, 자연과 은총의 균형도 파괴되었다.영국의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의 신학박사이다. 그는 성직자들의 왕에의 복종을 강조하였고, 수도원 운동에 대한 비난을 하였다.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체코에 도입하였다. 로마 교황청이 후스의 가르침을 이단시하고 파문하였다. 그는 그 후 화형 당하였다.교회는 아비농 유수를 통하여 흔들렸고, 대립 교황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교황권이 약화되었다.10. 13~15세기 영국사의 주요 변화에드워드 1~3세의 치하에서 정복왕이 진정한 영국왕으로 변신하였다. 영어를 사용하였고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정복을 통해 잉글랜드의 통일을 지향하였다. 의회의 진화를 통하 상하양원제가 정착되었다.플랜타지넷 왕조가 랑케스터 왕조로 대체되었다. 그후 랑케스터와 요크가의 왕위계승전쟁인 일명 장미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튜더 왕조가 성립되었다.7강 근대의 여명1. 15, 16세기15, 16세기는 중세적 질서의 대안을 찾기 위한 탐색 혹은 여행의 시대이다. 우선 시간 여행에서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수정 혹은 거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르네상스는 고전고대로부터 배우기에 중점을 두었고, 종교개혁은 초기 기독교로의 회구를 주장하였다. 공간 여행은 지리상의 발견이다.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을 발견하며 유럽 경제가 성장하였다. 식민 활동으로 생활공간이 확대되었고 세계적 유통구조가 형성되어 시장 경제, 자본주의 성장이 나타났다.2. 이탈리아 르네상스 배경 혹은 조건우선 도시와 상업의 발달이 중요한 배경이다. 세속적 관심이 증대하였고, 재력의 성장으로 경제력으로 도시의 자긍심을 표현하려는 였다.6. 북유럽의 르네상스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인문주의와 기독교와 결합이다. Christian Humanism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유학, 북 유럽 국가의 이탈리아 개입으로 교류와 접촉이 빈번해져 르네상스가 확산되었다. 고전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적 동기가 결여되었다. 국민국가, 성직자가 교육과 문화를 주도하였다. 그들에게 고대는 초기 기독교세계다. 신약성서와 교부 저술에 관심이 있었다. 대표적인 북구 인문주의자는 에라스무스와 토마스 모어다. 에라스무스는 라틴 산문의 대가로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우신예찬을 저술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현학성과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대중의 무지와 미신, 교황을 풍자하였다. 토마스 모어는 고전주의자로 법률가이다. 유토피아에서 부정한 사회제도를 고발하였다. 이들은 교회를 비판하였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독교 인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그 열정이 분산되고 말았다.7. 종교 개혁의 배경과 원인첫 번째 이유로 교회 자체 내의 모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아비뇽 유수와 교회의 대분열, 여러 교황들, 종교회의 운동을 통하여 교황권의 분열과 쇠퇴가 있었다. 또한 평신도 속의 신앙 운동으로 신비주의와 경건주의가 있다. 이는 신의 은총을 얻기 위한 평신도의 직접적인 신앙 행위들로 고행과 순례, 고립과 명상을 통한 신비주의적 신앙생활이 있다. 이단적 신비주의 운동으로는 영국의 위클리프와 그의 영향을 받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가 있다. 또한 명목론의 영향으로 스콜라 철학은 위기를 맞게 된다. 오캄의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에의해 집대성된 스콜라 철학의 체계에 타격을 가하였다.두 번째는 이유는 각국의 정치적 상황입니다. 왕 혹은 대영주의 정치적 야망이 있었는데 영국은 교황권의 영향에 있으면서도 간섭을 거부하였고 프랑스는 15세기부터 점차 갈리카니즘을 강화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권과 갈등하면서도 대제후에 대해서는 교황권과 타협하였습니다. 이로인해 대제후들은 반교황적 입장이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였습니다.8. 루터의 종교개혁루터는 법학공부를
1)그리스 세계의 쇠퇴1. 기원전4세기 스파르타 패권의 장애요인 3~4가지스파르타 패권의 장애요인으로, 크게 내부 문제와 대외 문제가 있다. 내부 문제를 살펴 보면, 우선 인구가 감소가 급격히 이루어 졌다. 480년경 8,000명이던 인구가 371년 1500명 선으로 감소하였다. 병력의 상당수를 Helot에게 의존하였는데, 그들은 불안한 존재였다. 그리고 동등자들 사이의 경제적 분화가 진전되어 화폐경제와 축재욕이 침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타락과 사회적 혼란이 만연하게 되었다.대외 문제는 우선 페르시아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페르시아 왕의 반감을 사게 되어다. 또한 스파르타는 확장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아테네, 코린트, 아르고스 등의 반 스파르타 연합의 형성을 부추겼다. 왜냐하면, 이러한 확장정책은 그들의 대내외 이익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코린토스 전쟁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테베가 스파르타의 패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였다.2.마케도니아 흥기 요인, 특히 필리포스 2세의 업적마케도니아는 기원전 5세기부터 중앙집중화 경향을 나타냈다. 그후 필리포스는 그리스 세계 내에서 마케도니아 패권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어린 왕인 조카 아민크스이 섭정이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국가와 왕가를 구하기 위해서 그는 마침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내적으로 귀족과 지방호족을 견제하면서 일리리아 인을 평정하였고,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켜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그리하여 즉위한지 20년 만에 마침내 그리스 전체에 패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첫 단게로 중장보병 밀집대를 창설하고 기병집단을 증강시키는 등 군비를 확충하였고, 판가이온 금광을 점령하였다. 다음 단게로 기원전 348년 올린토스를 공략하였다. 이로써 반도의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군의 동원 능력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코른토스 동맹의 결성이 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에서 패권을 확립하였다. 그는 폴리스의 대표들을 코린토스로 소집하서쪽 땅끝까지의 원정을 계획 했다. 이는 헤라클레스의 12과제 가운데 서쪽 땅 끝에 있는 사과 훔쳐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디오니소스가 있다. 그의 모친이 디오니소스 숭배에 심취해 있었다. 그리고 인도 아라비아 원정은 디오니소스의 행적을 모방한 것이다. 인도에서 디오니소스가 세웠다는 Nysa를 방문하고 Clitus가 디오니소스에 대한 제사를 소홀히 한것이 살해 배경이 되었다. 알렉산더의 시신을 모신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가장 성대히 거행했다.4. 헬레니즘 시대 정치사의 큰 흐름 Diadochoi는 후계자들의 시대이다. 일찌감치 왕조적 기틀을 마련하고, 이집트 밖으 제해권과 영토 획득에 성공을 거둔 프톨레마이오스 처럼 순탄한 경우는 드물었다. 안티고노스 가문의 역정은 그 한 전형이었다. 안티고노스는 아시아의 다른 총독들을 압도하며 세력확장에 성공하였으나, 다른 장군들의 공동전선에 패하고 말았다. 안티고노스는 리시마코스를 견제하려는 셀레우코스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따.알렉산드로스의 주요 장군들이 모두 타계했을때 일부 장군들은 왕의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제 알렉산드로스 제국보다는 자신들의 영역에 대한 권리를 더 중시함을 뜻한다. 제국 분할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각자 자기 영역 내에서 통치 기반을 강화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다. 이로서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3 왕조가 로마가 출현할때까지 변함없이 헬레니즘 세계의 정세를 주도하며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전반적인 정세의 안정이 헬레니즘 정치사의 주된 특징이었다.시리아와 마케도니아는 안티오코스3세와 필리포스5세와 같은 왕을 맞아 영토의 수복과 확장읠 꾀하였다. 로마는 이에 개입하여 마케도니아는 4개의 공화국으로 해체 되었고 시리아 역시 세력이 거의 쇠퇴하였다. 그러므로 기원전 160년 이후 헬레니즘 세게에서 로마의 독주를 견제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2) 로마제국의 흥망1. 로마 제국 흥기의 주요 요인로마가 지중해 제국으로 성장이 탄생하였고 팍스로마나를 형성하면서 로마의 번영의 초석을 닦아 두었다.2. 로마 제국 위기의 요인로마 제국의 평화의 충분조건은 외부압력의 부재가 본질적이었다. 위기와 쇠망의 국면을 보면 이 점이 한층 분명해진다. 변경의 위험은 로마의 평화의 마지막 단계인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세부터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여러 논쟁들이 있지만, 만족의 침입이라는 외압설이 중요한 요인이다. 치명타는 결국 4세기 말과 5세기 초에 일어난 두 번째 만족 이동이었다. 유목민족 훈족이 출현하여 그들을 압박하자 대규모로 변경을 넘기 시작하여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주와 정착을 반복하면서, 제국 내 일정한 영토를 차지하고 독립적인 왕국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부 제국의 황제는 위신과 물질적 기반 어느 면에서도 만족 왕국에 대해 우월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동부 제국은 만족의 침입이나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이 거세지 않아 천여년 더 지속할 수 있었다.3) 로마의 기원(기원 전승에 유의)1. 트로이의 멸망과 Aeneas의 탈출과 방랑트로이 왕족인 안키세스와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군에 대항하여 사촌 헥토르에 버금 가는 용맹을 떨쳤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딸 크레우사와 결혼하여 아들 아스카니우스를 낳았다.트로이가 함락되기 전에 아프로디테의 경고를 받아들여 트로이에서 도망쳤다고도 하고, 트로이의 요새를 사수하려는 그의 충정을 존경한 그리스군과 협정을 맺어 트로이를 떠났다고도 한다.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새로운 땅을 찾아 트로이를 떠났다는 이야기가 일반적이고, 나중에 트라키아를 비롯하여 크레타섬·델로스섬·시칠리아섬 등지를 떠돌아다녔다는 전설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떠난 뒤 카르타고에 닿아 그곳의 여왕 디도와 사랑을 나누는 등 7년 동안의 유랑 끝에 이탈리아의 라티움에 상륙하였다. 아이네이아스는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새로운 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하였고 이후 로마제국의 건국 시조로 묘사되었다.2. 하였다. 형의 승리와 도시 성벽의 건설 도중에 동생이 시기하여 성스러운 성벽을 뛰어넘었고 형이 분격하여 동생을 죽였다.4) 로마 공화정1. 공화정의 헌정구조 : 주요 정무기구와 과두제적 속성의 파악로마의 주요 정무기구는 정무관, 원로원, 민회 3가지로 구성되어있다. 정무관은 왕의 정무 집행권을 대행하고, 임기제, 선거제, 동료재, 직권분할 등의 특징이 있다. 각 정무관은 일정 수준의 주요 권한을 보유하였다.정무관이 직권을 보유한다면 원로원은 권위를 보유하였따. 이들은 안건의 예비심의, 정무관에 조언, 국가 재정관리, 정쟁 및 외교 주관등의 기능을 수행 하였다. 구성은 정무관 역임자 가운데 호선제로 선임되었고 대략 300명 정도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연공서열이 존재하였다.민회는 공식집회와 비공식 집회가 있다. 백인조 민회는 고위 정무관 선거 또는 주요 국책사안을 결정하기 위해 Mars광장에 집회하였다. 부족민회는 주로 입법 목적이나 그 외 하급 관직 선거를 목적으로 하였다.과두제적 속성은 우선 절대적인 한명이 아니라 주요 정무기구의 정무관들도 동료제를 택하여 복수로(2인) 유지하였으며, 원로원의 같은 경우 300명의 사람들이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였다는 점이다.2. SPQR의 의미SPQR은 라틴어 문장 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한다. 이 말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부를 이르는 말이었으며,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로 쓰였다. 로마 원로원은 고대 로마의 정치 기관이다. 공화정 시대에 들어서는 실질적인 지배기관으로 부상했으나, 제정기에는 점차 황제의 권력에 밀려 쇠퇴해 갔다. 정원은 원로원이 생기던 당시에는 300명이었으나, 뒤에 카이사르의 통치기에는 900명,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600명으로 정해졌다. 원로원 의원의 임기는 종신이었다.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집정관(consul)은 공화정 시대 최고의 직책이었으며 정원은 2명이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의 시작 당시부터서는 총독을 보좌하였다. 이들의 직무는 주로 재정 업무였다.호민관은 평민의 대표자로 여겨졌기에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였다. 평민의 서약에 따라 누구라도 임기 중인 호민관에 해를 끼치거나 방해하면 죽일 수 있었다. 호민관의 모든 권력은 이 신성불가침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호민관을 해하거나 거부권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행위는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다.군사상의 비상 사태시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이 선출되었다. 이때 원래의 헌정 정부는 해산하고 독재관이 국가의 절대 권력자가 된다. 독재관의 임기가 끝나면 헌정 정부가 복원된다.세금 자료, 병무 자료, 투표인 명부를 작성하는 업무 외에도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을 지명하는 권한과, 품행이 로마 도덕법의 표준에 미달하는 의원들을 원로원에서 제명하는 권한을 획득했다.5) 로마의 팽창전쟁1. 한니발 전쟁의 전개과정 : 발단, 전개, 결말2차포에니 전쟁은 사군툼과 Ebro강 협정의 문제로 발단이 되었다. 사군툼이 한니발의 공격을 받자 Ebro강 협정을 위반했는지를 두고 로마와 카르타고의 외교전이 펼쳐졌다.한니발은 동생 하스드루발에게 스페인을 맡기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였다. 전쟁의 초기는 한니발의 연전연승이었다. 티키누스와 트레비아, 트라시메네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였다. 한니발은 로마로 진군하지 않고 로마 동맹시들의 이탈을 추구하였다.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남부 이탈리아 도시 몇이 이탈하였다. 로마는 이탈리아 밖에서 카르타고의 기반을 약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전쟁 후기에는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전황을 차츰 회복하였다. 이탈리아로 진입하려던 하스드루발의 군대가 메타우루스강에서 대패를 당하였다. 그리고 스키피오가 스페인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마침내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를 침공하였고, 카르타고는 한니발을 소환하였다. 두 영웅은 자마에서 전투를 벌였고 스키피오가 승리하였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밖 모든 영토와 대부분의 선박을 로마에 할양하는 조건과 배상금, 누마디아 왕 인정, 로마승인 없이 전쟁행위 불허의 조건으로 휴전.
프롤로그1453년 5월 28일 투르크 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당시 유럽 인들이 받은 충격과 유럽 전역에 퍼져나간 공포의 파장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슬람 세력은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럽은 여전히 수세적인 위치였다. 십자군 운동 역시 오해해서는 안된다. 무슬림 세력이 금방 재편되자마자 유럽 인들은 재빨리 후퇴해야만 했다. 11세기 이래 서양은 상업 부문에서 저돌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군사 정치 분야에서는 그에 대응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중세 유럽의 만성적 취약성의 원인은 너무도 분명하다. 인구가 많지 않았고, 분열되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의 군사 조직이 효율성과 거리가 멀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그러나 기독교권의 적들이 유럽의 심장부를 강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순간에 갑자기 혁명적 변화가 일어났다. 몇몇 유럽 국가가 연달아 바다에서 성공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한 세기 만에 먼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나중에는 네덜란드와 영국이 전 세게적인 유럽 지배의 기반을 닦았다.13, 14세기의 유럽이 실패한 지점에서 르네상스 유럽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14세기 말 이후 유럽인은 어떻게 머나먼 향신료 제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을 뿐 아니라 모든 주요 해로를 장악하고 해외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 무엇이 유럽인의로 하여금 불안한 수비적 위치에서 대담하고 공격적인 팽창 국면으로의 극적이고 갑작스러운 전환을 가능테 했는가?1장 유럽의 도약1. 초창기의 거대한 대포14세기 초반부터 유럽에서는 전장에서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330년 이후 대포는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초창기 대포는 그 비효율성 때문에 두드러졌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대포가 전장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유럽의 금속 기술자들은 초강력 무기를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초창기 대포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대포의 크기가 급격히 커진 것이다. 루었지만, 전반적으로 에스파냐의 군수 산업은 왕국의 웅대한 제국적 정치의 필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웨덴의 발전과 대조적으로 에스파냐는 민간 기업이 부진한 것이 두드러지며 군수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3. 영국의 혁신, 주철 대포의 등장16세기 초까지만 해도 영국은 보잘것 없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인구는 400만 명에 못미쳤다.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분명 천만 명을 넘었다. 영국의 소규모 인구는 더 많은 1인당 소득이나 더높은 생산성으로 상쇄되지 않았다. 영국은 분명 저발전 국가였다. 14세기와 15세기 영국의 군사 산업이 대륙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대체적으로 사실이다. 영국은 철광석 공급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엇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영국인들은 야금에서 철에 주력하게 되었고 구리 합금 공정보다 철 제련 공정이 기술적으로 더 후진적인 한 기술적으로 계속 불리한 위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많은 대포 제작자들이 프랑스 출신의 포병이었다는 사실은 영국이 제철 분야에서도 더 발전한 대륙의 기술자와 노하우를 수입해야만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헨리8세는 대포 분야에서 영국의 약점을 금방 파악했다. 그는 저지대 국가 남부 제주에 눈길을 돌려 대포를 대량 주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고가 바닥나고 1543년 프랑스와 전쟁이 임박해졌을때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다. 그는 최고의 작업집단을 꾸려 주철 대포를 성공적으로 제작했다. 어째서 영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주철 대포를 생산하는데 갑자기 성공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요인이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기술적 성공의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경제적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포 제작은 16세기 제철업에서 수익성이 가장 높은 분야였다. 영국산 대포는 물론이고 영국의 기술자들도 유럽 전역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4. 영국산 대포, 유럽 시장을 평정하다사실, 주철 대포는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청동 대포보다 열등했다. 크나큰 진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동 대포보다 더 부서지기 쉬웠다. 또한 저지대 국가와 차단시켰다. 네덜란드는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만 했다. 상황의 압력이 거세지자 네덜란드 인들은 자국의 대포 산업을 일으키는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영국인들을 열심히 모방하여 곧 더 저렵한 철제 대포를 주조하는 데도 힘을 쏟게 되었다. 청동 대포는 네덜란드에서 계속 생산되었다. 반면 주철 대포는 철광석과 숯을 얻을 수 있는 해외에서 제작하도록 했다.7. 스웨덴의 맹렬한 추격스웨덴은 탁월한 품질을 자랑하는 구리와 주석, 철광석 등 천연 자원이 풍부했으며 숯을 얻을 수 있는 광대한 삼림 지대와 수력을 끌어올 수 있고 운송에 유리한 강도 여러 군데 있었다. 매우 적극적 역할을 한 곳은 왕실이었다. 스웨덴의 발전 양상은 크게 세국면으로 나뉜다. 첫 번째 국면은 1530년과 1560년 사이로, 주철 대포를 생산하는 여러 공장이 문을 연 시기이다. 두 번째 국면은 1560~1580년으로, 청동 대포를 생산하는 용광로가 등장하고 그 수가 증가한 시기이다. 스웨덴은 대륙에서 몇 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화해온 과정을 몇 십 년 만에 압축적으로 밟아나갔다.당시 생산된 주철 대포가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품질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듯하다. 양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네덜란드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대포를 찾고 있었는지를 안다면 이들이 곧 스웨덴의 발전 양상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 인들의 도래는 스웨덴에 현지의 천연자원을 온전히 가용할 인적 자원과 자본을 가져왔다. 네덜란드의 수요의 특성과 압력은 스웨덴 기술 발전의 패턴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에서 수출되는 연간 물량으로 작은 함대나 적어도 강력한 전대 6새는 무장하고도 남을 정도였다.8. 독일과 러시아의 진입독일은 네덜란드의 대포 수요 덕분에 철제 대포의 생산이 탄력을 받게 된 또 다른 지역이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서부 독일의 생산이 급속히 성장해 1660년대가 되면 스웨덴과의 경쟁이 감지될 만한 수준이었다. 네덜란드는 러시아에 대포 주조소가 들 숙련공들이 종교적 이유나 더 많은 보수, 안정적 여건을 찾아 나라를 떴다. 프랑스 대포 산업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30년 전쟁은 로렌과 샹파뉴 지방의 제조업을 완전히 파괴했다. 자본 부족도 몹시 뼈아팠다. 외국에서 대포를 수입하려는 정부의 성향도 상황을 개선하는 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대포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콜베르야말로 이러한 공급 방식이 가장 불만스러운 사람이었다. 외국산보다 프랑스산을 구입하는 것이 좋다. 국고가 고갈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콜베르의 군수 산업 육성 계획은 국가 전체를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하여 구상되었다. 계획의 가장 심각한 장애 요인은 기술자의 부족이었다. 거대한 민간 회사 설립을 장려했다. 15년에 걸친 노력의 최종 결과는 약간의 성공과 많은 실패가 뒤섞인 것이었다. 콜베르에게 매우 적극적인 협력자들이 많았지만 귀족층은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상황은 1730년대까지 점차 악화되어 프랑스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추세를 역전시켜 군수 산업을 중요한 산업으로 성장시켰다.11. 야포의 발전과 구스타프 아돌프대포 생산과 관련하여 17세기 중반 유럽의 상황은 2세기 전에 지배적이었던 상황과 크게 달라졌다. 유럽의 생산 잠재력이 막대하게 증가하고 유럽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효과적인 주철 대포의 등장이다. 1650년경 스웨덴은 연간 대략 1,500톤에서 2,000톤의 주철 대포를 생산할 수 있었다. 영국은 1,000톤에 약간 못 미치는 수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여타 지역의 총 생산량이 스웨덴과 영국의 생산량 합계를 능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럽의 잠재적 총생산량은 주철 대포 연간 5,000톤에 청동 대포의 생산량 수치를 더해야 한다.17세기초 가죽대포가 등장했다. 다소 심각한 결함 때문에 가죽 대포는 단명했다. 스웨덴 대포 주조소의 기술적 성취가 한 역할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구스타브 아돌프의 성공적 지역 민족들은 대포를 실은 범선으로 완전히 선회하면서 인력 확보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병목 현상을 피하고 훨씬 더 큰 양의 자연적 에너지를 자신들의 뜻대로 동력화할 수 있었다.13. 갤리언선의 탄생, 더 거대한 배에 더 많은 대포를!범선에 실린 포는 처음에 선수루 갑판에 설치되었다. 더 큰 포들은 상갑판에 실려서 현창을 넘어 혹은 현창을 통과해 포탄을 발사했고 더 가벼운 것들은 전갑판 안쪽이나 후갑판에 실렸다. 캐러밸선은 특별한 경우 최대 30~40문까지 대포를 실을 수 있었으나 보통 15문 이상 싣지 않았다.16세기 초 중요한 혁신이 도입되었다. 선루와는 별도로 실제 뱃전에 현창을 뚫어 포가 상갑판이나 전갑판뿐 아니라 주갑판에도 실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대형 전함의 무장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 배들은 기동이 매우 불편했다. 조선공들은 대형 범선의 화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기동성을 개선하고자 애썼고 1550년 직후 이들의 노력은 전설적인 갤리언선, 즉 무장이 튼튼하면서도 민첩하게 기동해서 치명적 전함도 되고 동시에 효율적인 무역선으로 기능할 수 있는 배가 선보임으로써 결실을 보았다. 새로운 유형의 선박을 선호하고 재빨리 이를 채택해 최상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14. 지중해식 해전 전통의 퇴장지중해 지역 사람들은 뒤쳐졌다. 영광스러운 과거의 전통에 매달리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자연환경의 물리적 조건들도 지중해에서 전통주의자들의 견해를 더 뒷받침했다. 새로운 해전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옮겨가지 못한 베네치아는 1616~1619년에 에스파냐를 물리치기 위해 영국과 네덜란드에 의존해야만 했다.에스파냐는 대서양과 지중해 전통을 절반씩 이어받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매우 가볍고 대포로 잘 무장해 에스파냐의 거대한 배들을 갖은 방법으로 괴롭힐 수 있는 배를 만들어냈다. 네덜란드도 같은 노선을 따랐다. 유럽에서 대포와 돛으로 더 철저하게 전환한 나라들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인력의이었다.
중세 대학사학과 2007OOO사학과 2007OOO사학과 2009OOOⅠ. 중세 대학의 기원과 발전1. 대학 출현의 역사적 배경중세 대학은 사실 기독교 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내용은 다분히 기독교적이었으며 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성직자들이었다. 당시의 대학은 교회가 후원을 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 시대를 거쳐 대학은 본격적으로 세속화되었다. 고등교육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소피스트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사학, 피타고라스의 수학, 천문학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고, 수도원에서 가르치는 성경, 신학, 고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세 초인 6~11세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대학교는 중세의 중반인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유럽 도시에서 등장했다. 다소 논란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볼로냐 대학교를 현대적인 의미의 최초의 대학교로 본다.)그렇다면 어떤 배경에서 대학교가 등장할 수 있었나? Grundmann은 순수한 학문적인 열정과 지적 추구를 대학 형성의 요인으로 보고 있으나 A. Cobban, R. Southern, R. Stone은 실제적이고 직업적인 요인을 지적한다. 파리 대학교를 최초의 대학교로 인식하는 S. Ferruolo과 P. Powicke은 교수 길드와 학생 길드의 학문적인 열정과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자기 방어를 대학교 형성의 주된 원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실용적인 목적이나 학문 본연의 목적 모두 대학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현대적 의미의 대학교는 1100년경부터 1300년경의 역동적인 중세 분위기에서 태동될 수 있었다.) 대학교는 십자군 운동의 영향으로 인한 신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 방랑 지식인과 그 추종 세력들의 학습 문화, 성직자, 법률가의 수요 증대로 인해 태동되었다. 즉, 학문을 목적으로 인식한 사회 풍조와 수단으로 인식한 사회 풍조 모두 대학교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이다.특히, 오늘날 대학교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기여한 학문 분야는 법학이었다. 현조합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대학(University)라는 말은 중세의 동업조합을 지칭하는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조합(길드)는 장인이나 상인이 서로간에 지나친 경쟁을 피함으로써 모두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할 목적으로 조직된 길드처럼, 대학도 교수와 학생이 학문활동에서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조합이었다. 즉, 조합으로서의 대학은 오늘날의 거대한 캠퍼스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진리탐구를 위한 학문적 관심을 공유하는 교수와 학생의 학문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합적 성격을 지닌 중세대학은 자율성과 개방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조합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학문조합이라는 점이다.조합으로서 대학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볼로냐 대학처럼 법학 공부를 목적으로 학생조합을 결성하여 만든 학생 중심의 대학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파리 대학처럼 학생과 교수가 대부분 성직자들로서 신학 공부를 목적으로 교수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교수 중심으로 운영한 대학 유형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칼의 대학들은 대개 전자의 전통을, 대부분의 독일과 영국 대학들은 후자의 전통을 따랐고, 프랑스 남부의 대학들은 두 유형을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전통을 만들어 갔다.3. 볼로냐(Bologna) 대학 : 학생 중심의 대학볼로냐는 이탈리아 북부의 교통의 요지로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도시로 발전했다. 볼로냐 대학은 유럽 최초의 대학이라는 명예를 안고 있다. 볼로냐 대학에서는 로마법과 교회법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주축이 되어 가르치고 배웠다는 점이 특이했다. 볼로냐 대학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법학의 등불로 불리는 이르네리우스(Irnerius)라는 학자이다. 로마법과 교회법의 양법 분야에서 탁월한 명성을 획득한 볼로냐의 교육은 법학 전반의 부흥을 가져왔고, 법학의 부흥은 중세 학문의 위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볼로냐 대학의 성공은 건물도 시설당시 파리에는 주교학교(episcopal school), 수도원학교(monastic school) 그리고 사설학교(private school)가 있었다. 주교학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노트르담 대성당학교로 여기서는 주로 신학이 강의되었다. 수도원학교에서는 수도사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사설학교에서는 주로 변증토론, 논리, 문법, 법률, 의학 같은 과목을 가르쳤으나 핵심과목은 신학이었다. 사설 학교 교수들은 생존이 학생의 모집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교수의 지위와 신분이 주교나 수도원 학교보다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교수들은 교수조합을 결성하여 권익을 보호할 필요성이 있었다.당시 파리 대학과 교황청과의 관계는 특별하였다. 파리 대학에는 신학 분야의 탁월한 교수들이 많았고, 교황청은 파리 대학 교수들의 신학이 자신들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대학과 교회 혹은 대학과 도시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대학 편에 섰고, 자연스럽게 대학의 위상은 높아지게 되었다.5. 영국 옥스퍼드(Oxford)와 캠브리지(Cambirdge) 대학 : 칼리지(college)제도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이나 이보다 조금 늦게 세워진 캠브리지 대학은 중세적 전통을 비교적 오래도록 간직학고 계승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이들 대학의 각 칼리지들은 대학 초기부터 지금까지 독자적인 예배당과 각종 의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학기나 절기의 전통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ⅰ) 옥스퍼드(Oxford) 대학옥스퍼드 대학은 파리 대학에서 이룩한 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학문 연구에서 문학을 최우선에 두었고, 파리 대학이 관심을 두었던 모든 지적인 면을 다루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진 구성과 학교 조직은 파리 대학의 유형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옥스퍼드 대학은 고립된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학생들의 단체인 동향단의 활동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도 파리에 비해 신학적으로 중요성이 덜 한 곳이어서살레노는 의학교수진 이외의 교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일반 대학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에 반대하는 정치적 여건으로 인해 14세기 초에 의과 대학은 쇠퇴하게 되었고, 이 대학은 후에 1811년 까지 존속되었지만 14세기 이후의 의과 대학은 그저 명맥만 유지해 왔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이 대학의 전성기 때는 세계의 관심 속에 학생과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살레노는 한때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 볼로냐의 법학과 함께 살레노의 의학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살레노 의학학교는 의학의 이론적 지식보다는 의료활동에서 더 높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다.Ⅱ. 중세 대학의 교과 과정1. 교과분류A. 7 자유 교양 (7 Artes Liberales)의 학문 분류인문학부, 즉 교양학부의 학부생과 졸업생은 상급학부로 진학할 자격이 있었다. 상급학부에서는 법학, 의학, 신학을 배운다. 교양학부에서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고 보편적으로 다뤄지는 학문 분야인 7 자유 교양(7 Artes Liberales)을 배운다. 교양은 7개 학과인 3학 4과로 대표된다. 3학(Trivium)은 문법, 수사, 논리를 포함하며, 4과(Quadrivium)는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을 포함한다. 전자는 언어 관련 학예였고 후자는 실용적인 부분과 연관된 학예였다.3학 4과는 성자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와 카롤루스 왕조 때 다뤄진 학문으로 추정된다. 이 자유 학예는 고대 인도와 이집트까지 그 기원이 소급된다. 형성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아테네에서 이미 기초 교육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음이 발견된다. 바로(Terentius Varro, BC. 116~127)와 마르티아누스(Martinanus Capella)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7 자유 교양이 획정된다. 7 자유 교양은 언어학과 실용적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자유 교양은 중세 초기를 거쳐 고전고대의 학문적인 전통이 붕괴되어 가면서 모든 학문을 뒷받침하는 보편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성서(Divina Pagina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신학은 성경, 법학은 민법대전, 교회법대전, 의학은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아랍인들의 의학저서 등을 중심으로 다뤄졌다. 그런데 토론에 있어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저서가 교회사에서 권위가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의 저서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교회의 가르침들이 학문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토론 후에는 자유 토론(Disputatio Quodilbetalis) 과정이 있었다. ‘신학대전’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도 이런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중세 초에는 성경의 문자 기록을 영해(靈解)하는 것에 중점으로 두었지만 이성을 신학과 변증법적으로 조화하는데 목적을 둔 스콜라 철학에서는 텍스트를 주해하고 이에 대한 문제와 사례를 찾는 것을 중점으로 두었다. 주석, 토론 내용, 질문서 등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스승의 지도 아래 토론함으로써 학문적 능력을 신장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당시 교육의 주된 목적이었다. 문법 토론 중에는 권위서 내용을 암기하고 논리 토론 중에는 3단 논법 형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었다.ⅰ) 강독강독은 앞선 학자들의 사유나 앎을 우리가 읽고 배움으로써 획득하는 일종의 답습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강독은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을 갖게 되고, 가르치는 사람은 강독자라고 일컬어진다. 이런 형태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우리가 현재 강의라고 하는 것이 사실 이 강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강독자가 자신이 준비한 교재를 학생들 앞에서 또는 학생들과 함께 읽어 내려가며 설명하는 형식이 이것이다. 특히, 강독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중점에 둔다. 특히 스콜라 철학은 이 강독을 제도화하고 발전시켰다. 여기서 강독자는 텍스트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문장을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행간의 의미를 밝혀나간다.ⅱ) 질의강독에서 발전된 단계의 교수 방식은 질의(Quaestio)이다. 보통 책을 읽을 때 난해한 부분이 발견되기 마련인데, 이 때 독자는 이해를 돕기 .
페르시아 전쟁학과 20089 ddd학과 20071 ddd학과 20091 ddd1. 각국의 성장 배경①페르시아 전쟁 전 스파르타의 성장과 정치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정복한 후 사회갈등과 농민의 저항이 거세지자 리쿠르고스가 등장해 개혁을 단행한다. 모든 시민들은 이제 부유하건 가난하건 하나의 병영체제 안에서 군인으로서 살아야했다. 절제와 강건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이것은 단순히 억압적인 정책이 아니라 계층 간 합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지배층이었던 헤라클레스가의 후손들은 평등을 표방하면서도 그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고, 빈곤층(농민층)은 무적의 엘리트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동안 거부당했던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물질적 안정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 기원전 540년대 초에는 테게아(평원지역)와 펠로폰네소스 대부분의 도시들을 굴복시키고 패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에 대항하는 세력은 스파르타로부터 북쪽에 있었던 아르고스였다. 스파르타는 기원전 546년 리디아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왕과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도 원조를 해주지 않고 아르고스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결국 스파르타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리디아의 크로이소스왕은 몰락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리디아 왕과 맺은 협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치욕을 경험했고 키루스로부터 “스파르타인이 대체 누구인가?”라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을 당연시 했고, 외교정책의 실패도 스파르타의 편협성을 더욱 고착시킨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에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이오니아 앞바다의 사모스 섬에 해상 원정을 감행했지만 실패하면서 더더욱 위신이 추락했다. 결국 가까운 곳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원정에 병력을 투입했다가 본국에서 헬로트의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고, 동맹국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코린토스 지협의 산악국가가 그들의 조상나라(도리아인)였기 때문에 침략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같은 성씨를 부여 받았다. 데모스로 분할된 아티카는 도시, 해안, 내륙 등 3부로 나뉘었고 각 지역은 다시 10개의 트리투스로 분할되었다. 그리하여 총 30개의 트리투스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30개의 트리투스를 각각 3개씩 통합시켜 부족을 형성하여 총 10개의 부족이 되었다. 즉, 10부족, 3부, 데모스 같이 복잡한 구역 편성으로 인해 다시는 일부 명문가들이 농간을 부리는 행태가 나타나 당파 싸움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민주정을 정착시킨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침입도 잘 극복하였다. 아테네의 혁명은 페르시아에도 알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507년에 옛 참주인 히피아스가 페르시아로 피신했다는 소식까지 아테네에 전해졌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형제인 아르타페르네스가 있는 사르디스로 사절을 파견해 동맹국이 되어 스파르타와 싸워줄 것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이 때 흙과 물을 바치는 굴욕을 감수하고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스파르타의 재침을 대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게 되는 사건이었다.③페르시아 제국의 성장BC 559년 키루스는 열 개 부족을 통일한 후 BC 553년에 메디아의 왕이자 자신의 부왕인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는 키루스를 낳았는데, 3년에 걸친 전쟁 끝에 키루스는 마침내 BC 550년에 메디아를 함락하고 정식으로 페르시아 제국 탄생을 선포했다. 아케메네스(메디아 왕조)가의 키루스가 왕이 되었으므로, 그의 왕조를 아케메네스 왕조라고 불렀다. BC 546년 리디아까지 정복한 키루스는 동쪽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BC 540년에는 동부이란 지역과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리디아를 정복한 후 페르시아 군대는 곧장 바빌론으로 진격하게 된다. 결국 키루스 왕은 바빌론까지 함락시키면서 대제국을 만들었다.후에 캄비세스 왕에 이르러서는 이집트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캄비세스는 에티오피아 원정에 실패한 후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동생과 친누이를 죽이는 등대가 출항하게 된다. 페르시아를 얕보고 있었던 이들은 결국 참패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기원전 497년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난 지 채 2년도 안 되어 반란군들은 거의 바다로 휩쓸려 들어갔다. 진원지였던 밀레토스만 저항을 계속했을 뿐이었다. 운이좋게도 이오니아 함대는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으나 보급품이나 신병을 공급받지 못해 큰 어려움에 봉착한 상태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도자였던 아리스타고라스가 죽고, 페르시아가 반란 초기 이오니아 군에게서 빼앗긴 함대를 어렵사리 재건하여 또 한 번 바다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다. 이오니아인들은 남아 있는 전함을 모조리 끌어모아 미칼레 곶을 돌아 남쪽의 밀레토스와 조그만 섬 라데로 향했다. 페르시아 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이오니아 함대는 순식간에 전열이 흐트러졌고 그들의 지휘관들은 페르시아와 몰래 협상을 하여 자신들의 살 길을 만들어 놓았다. 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고 동맹군을 이탈하는 부대들도 많아졌다. 결국 이들은 패배하게 되었고 이오니아 반란은 진압당한다. 기원전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은 모두 점령당하게 되었다. 아테네는 밀레토스가 페르시아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이 와중에도 스파르타는 페르시아보다는 아르고스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족인 아르고스를 처참히 짓밟았다.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해야 했지만 이 와중에도 스파르타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고 같은 그리스인의 도시를 처참히 짓밟고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물론 페르시아를 포함한 기타 다른 그리스의 도시들에게 스파르타에 도전하는 나라의 말로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고자 한 것이었다.기원전 493년, 아테네는 시시각각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테리스토클레스의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용감하게 대항했던 밀티아데스에 무죄를 선고하고 군사령관으로 선출한다. 결국 주전론으로 여론이 기울게 된 것이다.페르시아는 이런 아테네를 징벌하고자 했다. 아테네에 대한 징벌마라토스의 왕위가 비합법적이라고 신관들이 선언하게 만들었고, 그를 정식으로 폐위하고 레오티키데스를 왕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두 왕은 함께 아이기나로 향했고, 이번에는 아이기나도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그러나 모든 상황은 페르시아에 유리했다. 그리스 전선의 단결력은 매우 취약했다. 클레오메네스는 신관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새어 나가면서 불명예를 안고 도망을 쳤다. 그는 노골적으로 반역을 저지르려 하자, 시민들은 그를 다시 도시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곧 스파르타에서는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고, 레오니다스와 클레옴브로토스가 그를 결박하였다. 레오니다스는 스파르타의 새 왕이 되었다. 이 상황은 페르시아에 전해졌고, 페르시아는 아테네가 고립돼 있는 이 호기를 이용하여 아테네를 공격할 필요성이 있었다. 기원전 490년, 마침내 그리스 침공 명령이 떨어졌다. 마르도니우스가 부상중이여서 아르타페르네스(사르디스 사트라프의 아들) 마티스가 지휘를 맡았다. 그들은 에게 해 섬들을 정복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굴복시키겠다고 하였다.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로 접근 중이라는 소문은 곧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태평하기만 하였다. 페르시아 함대는 밀레토스의 해안을 지나 미칼레 산과 사모스 섬 사이의 해협을 향해나갔다. 그런데 거기서 함대가 돌연 방향을 돌렸다. 페르시아 함대가 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의 아티카를 향한다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의 사령관은 작전을 충격과공포 작전 후 민심을 얻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들은 낙소스를 점령하였다.기원전 490년 7월 말 페르시아 함대는 에우보이아 섬 동단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였다. 닷새간 공격을 하였고, 엿새째 되는날 배신자들이 성문을 열고 도시를 넘겨주었다. 배신자들은 귀족이었다.페르시아 군 선발대는 마라톤 평원을 향해 먼지를 일으키며 나아갔다. 아테네인들은 펜텔리콘 산에서 페르시아 군의 상륙을 알리는 봉홧불을경에 진입하기 전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도시들을 순시하면서 건축 사업을 벌였다.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에 복종의 뜻으로 흙과 물을 바치고 원정군을 대접할 것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크세르크세스의 명대로 흙과 물을 바쳤으나, 스파르타 등 30개 국들은 이를 거부하고 아테네와 연합해서 페르시아 군대에 대항하기로 결의하였다. 아테네는 이미 광산 채굴로 벌어들인 소득으로 함선 200척을 건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군세를 지닌 페르시아 원정 군대는 그리스 본토로 진입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원정군이 먼저 테살리아로 다가오자 테살리아는 그리스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그리스 지원군은 페르시아의 군세에 눌려 본국으로 철수하였고 테살리아는 페르시아에 항복했다. 다급해진 그리스는 아테네와 시라쿠사와 아르고스에게 선박 지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그리스는 결국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500만 이상 되는 원정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치기로 했고 초반부에는 스파르타 군대의 활약으로 잘 막는 듯 보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가 테르모필레 협곡을 돈에 눈이 먼 어느 농부로부터 샛길로 넘는 길을 알게 되어 그 곳을 넘게 되었고, 대부분의 그리스 군대는 테르모필레에서 퇴각했다. 그러나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은 몇몇 스파르타 전사들은 왕 레오니다스와 함께 페르시아군과 분전을 벌이다 모두 전사하게 되었다.그 사이 333척의 그리스 함선은 에우리비아데스의 지휘 아래 에우보이아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교전을 벌였고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테르모필레에서 육군의 전멸 소식을 접한 그리스 함대는 이후 살라미스로 이동한다. 이 사이 페르시아 군대는 델포이 신전이 있는 포키스를 공격했으나 운 좋게도 포키스의 승리로 끝났다. 아테네 함대는 우선 자국으로 돌아가 시민들을 트로이젠, 아이기나, 살라미스로 대피시키도록 했고 그 결과 아크로폴리스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남게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동시에 아테네는 불바다가 되었다.살라미스의 전 그리스 함대는 366척으로 증가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