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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화보고서)장보고, 법화원
    1. 장보고는 누구인가우리 역사에서 바다는 어떤 의미를 가진 대상이었을까. 이를 실제적 또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장보고라 할 수 있다. 한때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 그의 해양활동사와 외교교섭사를 알려면 먼저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해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당시 국제관계는 당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중해권의 경제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이라는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치질서가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경제교류 역시 각 지역 간 소극적인 단위를 뛰어넘어 국가 간의 경제교류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 오가는 환류 시스템에서 문제를 드러냈다. 당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동아시아의 교역망은 한쪽이 뚫려 있었고 발해로 인하여 육로를 통한 교역을 할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즉 열린 길은 해로뿐이어서 물류망을 장악하고, 해양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한편 일본의 내부 사정도 장보고가 등장하는 데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당시 일본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당나라를 교섭이라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발달된 해양문화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세기에 이르면 신라 정부와 일본의 관계가 험악해져 일본은 신라 정부의 공식적인 도움이 아닌 민간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외부 세계와 연결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장보고의 등장과 활동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었다.발해의 움직임 또한 장보고의 활약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당시 발해는 당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매우 활발하게 교역하였는데 장사 규모나 물량 면에서 엄청났다고 한다. 발해의 상인들은 신라 상인들, 특히 장보고 선단과도 만나 교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당시 동아시아세계에서는 교역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해상능력을 가지고 있던 발해인과 신라인들의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이를 통하여 해상무역권을 나누어 갖고 국부를 축적한 한편 바다에서 은밀하게 만나 정치의 단절을 민간교역으로 메워 나가는 역할도신당서」「선종기」에는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황해, 당의 동부 연안에서는 약탈이 주로 신라인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828년 10월 ‘신라 노비’ 매매금지령이 발령된 것으로 보더라도 신라 양민에 대한 노예 매매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해상에서의 이러한 상황으로 각국의 정부를 대신해서 무장력을 갖춘 해상 관리자가 나타나 해적을 퇴치하여 바다를 평정하고, 교역로를 보호해 주어야 했다. 특히 신라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정은 장보고의 등장을 자연스럽게 했다.)장보고의 청해 군영 설치 건의를 왕이 흔쾌히 승낙하고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한 것도 그래서 가능했다. 신라의 내부 상황을 보면 왕위계승을 둘러싼 귀족 간의 항쟁으로 연일 내전의 상태에 빠져들었고, 착취와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대귀족 항쟁이 시작됐을 때였다. 신라는 하대에 들어서자 총체적으로 난맥상을 드러냈는데, 785년에서 809년까지 24년간 5명의 왕이 집권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은 백성의 생활에 궁핍함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정국이 혼란에 빠져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학계의 정설로는 장보고는 810년에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김언승이 난을 일으켜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으로 등극한 것이 809년이다. 장보고가 중국으로 건너간 동기는 국내의 사정이 얽힌 것으로 보고 있다. 동아시아 최초로 해상질서를 확립시켜 사실상 ‘상인군주’로 군림한 장보고의 사례를 이제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해양력이 국가 흥망성쇠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의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발견한다면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2. 장보고의 내력과 무역활동장보고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국내외의 몇 자료를 근거로 추정해낼 수 있다. 문성왕의 차비(왕비)로 장보고의 딸이 추천되었을 때 조정의 신료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란 점을 들어 반대 하였다. 따라서 그의 출생지는 해도라는 섬 혹은 해안인 것으로 보인다.두목의기한에 시달리다가 죽느니 고향에서 죽는 것이 장수의 길이다” 라고 하고 당 문종3년(833) 회남에서 해상북로를 따라 신라로 돌아와 고향으로 갔는데 그곳이 바로 청해진이다.또 안동 「장씨대동보」 「장씨연원보감」에 따르면 장보고는 801년 완도 정좌리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백익이다. 그는 원래 당나라 절강성 소주부 용흥에서 태어나 신라를 왕래하는 상인 이었으나 청해(완도)에 정착하여 어부 생활을 하면서 장보고를 얻었다. 장보고의 고향, 즉 출생지가 청해진이라는 관점은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물론 이설도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으로 있던 김성호는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에서 오래 전부터 중국에는 백제의 유민이 다수 살고 있었으며 장보고는 바로 이 재중교민(在中僑民) 출신이라는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한다.학계의 정설을 따르면 장보고는 814년에 중국 강회 지방으로 건너가 무령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산동반도 고구려 유민 이사도 일기의 치청번진이 약 반세기 동안 반독립적 소국을 이뤘는데 당 중앙정부에서는 지방의 여러 번진들에게 이를 정벌토록 하였는데 무령군은 그 주력부대의 하나였다. 무술에 뛰어난 장보고는 치청 정벌에 공을 세워 소장의 지위에까지 올랐다.정벌이 끝나고 장보고는 819년 무령군 소장직을 그만두고 해양무역업을 구상하였다. 산동반도의 연해지역과 양주에서 북상하는 운하의 주변지역에는 재당 신라인들이 도시에는 신라방을, 농어촌에는 신라촌을 각각 형성하여 여러 방면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선단의 구성원으로 조직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장보고 선단은 824년 일본의 규슈에까지 내왕하고 그들의 해상사업을 성장시키는 등 위세를 떨쳤다.장보고선단이 동아시아 해상무역에 종사함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하나의 요소는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재산을 모을 수 있도록 기원할 사찰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아직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바다를 내왕하는 불교인들은 용왕이나 신불에 열심히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용왕신앙과 같은 해양불하여 진을 설치하였다. 782년 패강진을 대곡성에, 흥덕왕 3년(828)에 청해진을 설치하였고, 다음 해에 당성진을 설치하는 등 여러 개의 진이 설치되었다. 진을 설치한 목적에는 군사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해적을 제거하는 측면도 있었고, 해상세력의 발호를 막고,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해양진출이라는 목적도 담겨 있었다.장보고로 하여금 청해진을 설치하게 한 것은 지방 해상세력의 발호를 무릅쓴 것이지만 장보고 세력을 제거한 후 해상세력이 다시 재기하여 발호한 것은 청해진 세력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이렇게 역동적인 국제환경과 신라 내부의 절실한 필요성에 의하여 장보고는 해양과 관련된 전권을 부여받은 것이다.장보고는 군사 1만 명과 함께 청해진에 본거지를 차리고 해상왕국을 건설해 나갔다. 장보고의 ‘대사’ 직책은 신라에는 전례가 없던 관직으로 출신이 미약한 그가 골품제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 사회에서 정상적인 관직은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관직을 이용해서 군사조직, 상인조직, 행정조직을 복합적으로 관할할 수 있었다.장보고는 국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항해권의 거점도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고, 조직적으로 역할분담을 시키면서 군사력을 동원, 신라 정부와 국적이 다른 민간 상인조직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본거지를 군항이며 자유무역항으로 만든 청해진에 두어 재당 신라인과 본국신라인을 동시에 관리하고 역할분담을 조정할 수 있었다. 제조업, 상업, 운송업, 삼각중계무역, 보세 가공업, 문화교류, 이데올로기의 전달 등을 해양이라는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유기적으로 운영하였다.)장보고는 구수, 자단, 침향 등 고가품을 구입하여 신라 귀족들에게 팔았다. 일본을 직접 방문하였고, 현재의 후쿠오카 일대에 지점을 설치하고 회역사라는 무역선을 보내어 사무역은 물론 공무역까지도 시도하였다. 장보고는 신라 정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자기의 무역선을 통해 통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무역은 장보고 사후에도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는데, 일본 정부문화를 수출하였고 교역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였다.장보고는 무장력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상권을 장악하면서, 신앙으로 결속력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시키면서 신라인의 저력을 동아지중해에 실현시켰다. 그러나 장보고의 해양 질서장악은 신라 내부의 사정과 국제질서의 변모에 의해 끝내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42대 흥덕왕이 죽자 희강왕은 사촌동생인 김균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김명은 희강왕이 자결을 하게하고, 민애왕이 되었다. 장보고는 이러한 왕위쟁탈전에 참여하여 정연에게 5000여 군사를 주어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였다. 그 결과 장보고는 감의군사라는 벼슬을 받고 일약 신라중앙정치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4개월 만에 죽자 그의 아들이 문성왕으로 등극하였다.지배계급들은 중앙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지방호족세력의 등장을 두려워했다. 특히 장보고가 지도하는 해상세력의 출현을 원하지 않았기에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851년 문성왕은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지금의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신라는 장보고 사후 해양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위축된 지방 군소세력들이 다시 재기하였다. 군소세력, 해양세력들은 점차 군사적으로 성장하고, 결국에는 강력한 지방세력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이 후삼국 시대를 여는 역할을 하였고, 신라 사회를 해체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3. 장보고와 해양불교?법화원장보고는 법화원을 세워 신앙조직 속에서 흩어져 있는 교민들을 하나로 묶고, 고국을 떠나 안정을 희구하는 그들 간의 정신적인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다. 장보고 선단의 도움을 받아 구법 순례하던 일본 천태종 승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적산 법화원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산에는 절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적산 법화원이다. 본래 장보고가 처음 세운 것이다. 오랫동안 장전을 가지고 있어 식량에 충당하고 있다. 그 장전은 1년에 500석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남쪽과 북쪽에는 바위봉우리가 솟아있고 물은 법화원 마다.
    인문/어학| 2010.11.18| 5페이지| 1,500원| 조회(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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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육신논쟁- 유응부와 김문기
    사육신(死六臣) - 유응부와 김문기‘사육신’ 논쟁의 출발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사육신묘에는 현재 여섯이 아닌 일곱 개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원래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가 있었지만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사육신에 대한 논란으로 비화됐다. 사육신 중 무신이었던 유응부를 김문기로 바꾸어야 한다는 탄원에 대해 국사편찬위원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도 함께 만들어 7개의 묘가 조성되어 모셔지고 있다.물론 “사육신의 구성을 변경한 바는 없다”는 단서는 달았지만 이 논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특히 일부 학자들과 충북 옥천군, 김녕 김씨 문중을 중심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 역사학도로서도 관심이 클 수밖에 없는 논쟁이다.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우리에게 상식처럼 여겨지는 사육신은 세조 2년(1456)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사형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일컫는다.이들 중 유응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집현전 학자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들은 세종의 자문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문종과 밤늦게까지 학문을 나누었다고 한다. 유응부 또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아 2품직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문중이 병중에 있을 때 집현전 제신들을 불러 당시 세자였던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 부탁한 일화도 관심을 끈다.어찌 보면 이들이 단종 복위를 주동한 것은 세종과 문종에게 입한 은총을 보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세조는 단종 3년(1455) 선위를 통해 왕이 되었지만 이는 표면상의 명분일 뿐, 실제로는 폭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세조는 계유정난(단종1년, 1453)을 통해 정권의 주도자인 김종서, 황보인을 제거한 뒤 벼슬아치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이들을 대거 죽였다. 심지어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문종?세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마저 이 사건에 연루시켜 강화도 유배 끝에 다.한국 현대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에 의해 내려졌던 국난극복 훈?포장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다. 이렇듯 왕위 찬탈을 도모한 계유정난에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세조는 정난공신이란 훈호를 내린 것이다(‘정난’은 국가의 위난을 평정한다는 뜻). 선위를 받으면 으레 종주국으로서 명에 이 사실을 알리고 왕위승습을 인정받는 절차가 있었다. 단종이 이때 전한 주문문의 내용이 인상적이다.“자신이 유년으로 즉위하여 모든 정무를 신료들에게 위임했기 때문에, 간신들이 모역하여 화기가 절박했으므로 숙부인 수양대군이 즉시 국난을 평정했다.” “흉도가 아직도 잔재하여 인심이 어려운데, 공덕이 있어 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는 숙부 수양대군에게 군국대사를 권습케 해달라….”이렇게 해서 세조 2년 명 황제의 조칙을 받게 되었는데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 복위거사의 실행은 세조2년 6월 창덕궁에서 열린 명나라 사신 초대연에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은 유응부가 임금이 거둥할 때 옆에서 호위하는 별운검이 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한명회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을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 고 판단, 창덕궁 연회장이 협소하니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이고 별운검을 취소시키고 세자도 참석시키지 않았다.이때 유응부의 행동은 훗날의 사육신 논쟁에 걸맞게 적극성을 띤다. 그는 무관들과 함께 비록 별운검은 취소됐을지라도 계획대로 당일 거사하여 세조와 한명회를 죽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관이자 복위거사의 주도자인 성삼문이 거사의 실패를 우려하여 이를 말리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거사에 확신이 없어진 김질은 장인인 정찬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정창손은 거사계획을 세조에게 밀고했다.이로써 단종복위 거사는 실패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17명이 투옥되어 국문을 받은 끝에 모두 처형되었다. 사흘 동안 효수되었으며 토막을 낸 몸은 끔찍하게도 소금에 절여 8도에 나누어 보내졌다. 처형된 인물 중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가 사육신으로 기록되 국사편찬위원회가 “초창기의 기록된 것으로 사료된다”고 밝힌 근거가 됐을 것이다. 효수된 후 버려졌던 머리는 김시습이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까지 전해지는 사육신의 묘이다.한편, 단종복위 거사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보면 남효온의 육신전에 있는 내용과 실록의 내용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져온 사육신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다. 당시 공식기록인 실록은 이들을 반역죄인으로 적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던가. 정난공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이것을 정당화하는 역사기록을 남긴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세조실록은 육신의 거사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성삼문은 성질이 조급하여 승진을 바라고 있는데 임금이 직접 보이는 과거에서 일등을 했으나 오랫동안 제학과 참의직에 머물러 있어서 불만을 품었고 그 아버지 성승은 의주목사로 있을 때 사람을 죽여서 파직당하고 토지를 몰수당했으며, 안평대군과 교분이 두터웠다. 박팽년은 사위 영응군이 근성대군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유배된 여파가 자신에게 미칠까 늘 두려워하였고, 하위지는 일찍이 임금에게 견책받은 일을 원망을 품고 있었으며, 이개와 유성원은 벼슬이 낮아 진출을 생각하고 있었다.’이어지는 글은 지금 논쟁의 중심인물로 삼고 있는 김문기 관련 기록이다.‘김문기는 박팽년의 족친이 되었고 또 친밀히 사귀고 있었으므로 박팽년, 성삼문에게 “그대들은 권내에서 성사만 하오. 나는 박에서 병졸을 거느리고 있으니 뒷일을 수습하겠다” 고 했다.’세조실록은 이들이 개인적인 욕망과 감정 때문에 국가에 반역행동을 했다고 기재했고, 앞서 지적한 이유에서처럼 육신의 절의에 대한 평가는 찾아볼 수 없다.반면 남효온의 육신전에서는 육신들이 세조의 모진 고문에 불복하고 당당히 항변한 자세를 부각시키고, 끝까지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으며 세조의 녹을 먹지 않고 청렴결백한 지조를 끝까지 지켰음을 기록하였다. 충(忠)을 파자(破字)하면 '한 가운데 마음(中心)'이라는 육신전’의 언급 그대로이다.‘김문, 논리와 반박김문기를 사육신이라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는 모두 실록과 육신전의 기록 중 상이한 내용이 있어 비롯된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육신전에서 남효온이 김문기를 유응부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말하고 싶어할지 모른다.실제로 이보다 강한 근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8일자를 보면 주동자 몇 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왕을 시해하려한 동기를 밝히는 부분에서 거론된 이름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여섯 사람이다. 이를 근거로 이 여섯 사람이 세조 때 인정된 사육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견 이해는 간다.하지만 문제의 기록에서는 거론된 이름들을 사육신으로 명명하지 않았다. ‘사육신’이라는 명칭 자체가 남효온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이 명칭이 처음 왕조실록에 등장한 것은 인종 원년(1545) 4월 5일의 기사이다. 또 숙종 때 사육신과 생육신을 절의의 모범으로 삼아 국가에서 이를 표창해야 한다는 건의가 받아들여서 당시 복위거사를 꾀했던 모든 인물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하였는데, 어정배식록을 보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사육신이라는 명칭으로 편정되어 있다.지금 다루는 김문기는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과 함께 삼중신의 한분으로 모셔져 있다. ‘불복’의 다른 논거도 있다. 논쟁의 초점은 또다시 육신전이다.육신전을 보면 유응부가 함길도절제사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유응부는 실제로 함길도절제사를 역임한 적이 없는 반면 김문기는 함길도절제사를 역임한 사실이 있으니 바꾸어 썼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하지만 남효온이 관직명을 잘못 적는 등의 사례가 없지 않고 또 유응부가 세종 31년 6월 1일 경원절제사로 임명되었다는 기사를 함길도 지방의 경원절제사로 확대해석한 가능성도 있다.따라서 이 역시 절대적인 오인의 증거로 보기에는 어렵다. 사실, 재상이라는 명칭도 육신전의 기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책에는 유응부가 재상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무관의 종 2품이었던 동지중추원사 유응부는 재상으로 일컬을 수직 문관이자 정치품인 공주판서인 김문기만이 재상으로 일컬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 또한 유응부와 김문기를 오인하여 바꾸어 썼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2품 이상의 문·무관을 재상이라고 통칭한 예는 왕조실록에서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세조실록 내에도 유응부를 재상이라 칭한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김문기가 공초에 ‘불복’한 것을 유응부가 불복한 것으로 바꾸어 썼다는 주장도 논란거리이다. 세조실록의 기사 중 6월 2일 자의 기사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공초에 승복했으나 다만 김문기만은 공초에 승복하지 않았다.’(餘皆服招, 惟文起不服)고 나온다. 육신전에서는 유응부의 불복을 찾아볼 수 있다. 유응부는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인정하고 세조에게 ‘복위거사 이외의 다른 일은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고 하여 살갗을 벗기고 달군 쇠로 지지는 작철형의 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고 했다. 유응부는 혐의를 인정하였으므로 유응부의 불복은 신문에 굴복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하지만 김문기의 불복은 혐의 자체를 부인한 것일 수도 있고 정당한 일이라고 버틴 것으로 볼 수도 있다.보다 그럴듯한 주장은 더 있다. 세조실록에는 김문기만 불복했다고 나와 있어 육신전에 나오는 유응부의 불복은 김문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조실록에서 ‘박팽년은 이미 공초에 승복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등의 기사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미뤄 세조실록에서의 불복과 육신전에서의 불복이 다른 상황에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기에 따라 세조실록에서의 불복은 공초에 불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또 육신전의 유응부 기사와 세조실록의 유응부에 대한 기사가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김문기와 유응부를 혼동하여 썼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다. 유응부의 편에 선 학자들은 육신전, 정조 15년 편찬한 어정배식록 등을 근거로 대응하고 있다. 어정배식록에서 김문기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다”고 묘사되어 김문기가 사육신에는 포함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근거로 내다.
    인문/어학| 2010.11.18| 6페이지| 1,500원| 조회(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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