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운동의 전개과 목 명 :교 수 명 :학 과 :학 번 :성 명 :제 출 일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2. 사회주의 운동의 전개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3 · 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국내에 유입되던 1920년대. 이른바 문화정치라 불리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특히 당시는 半봉건적 형태의 경제 구조와 세계적인 조류인 마르크스주의가 만나 더욱 사회주의 사상이 빛을 발하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에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 창립 되었고, 이에 점차적으로 세력을 확장,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상하이파의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공산당은 자파세력의 확산을 위해 나름의 활동을 펼쳤고, 코민테른과의 연결 또한 시도하였다.그 사이 국내에서도 합법적인 형태의 사회주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는 在日 留學生들의 영향이 컸다. 이를 이용하여 3?1운동 이후의 시대적 상황과 照應하여 植民地 解放運動의 대안적 이념체계로서 당시의 일부 知識人과 靑年學生層에 수용된 것이 社會主義 思想인 것이다.그렇다면, 지금부터 사회주의의 국내로의 유입에 대해 알아보고,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필두로 섰던 조선공산당의 창립과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그들이 행했던 운동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Ⅱ. 본론1.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국내에서 사회주의가 수용되는 1920년대는 소련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한 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이식(移植)되는 단계에 해당한다.사회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국내에 전파한 것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던 학생층으로 이들은 계몽적이고 상호부조적인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新思想硏究(社會主義思想), 勞動問題硏究에 집중하였으나 실천운동에는 아직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在 東京 韓人學生들의 思想運動은 1921年初 부터 점차로 표면화되어 갔다.) 특히 1916년 김철수 ? 장덕수 등 일본유학생들이 결성한 ‘신아동맹당그룹’(反帝運動團體)은 1920년 6월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고 파악한 이르쿠츠크파들은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한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적대적인 세력이 된다고 인식하였다.특히 그들은 민족단체들과의 협정에 관하여 상하이파와 크게 구별되었다. 첫째, 그들은 민족혁명단체와의 정치적 제휴를 결코 상설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으로 한정하였다. 이는 민족 단체와의 협정을 전혀 맺지 않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둘째, 일시적인 협정도 ‘진정으로 혁명적인 민족단체’)로 엄격히 한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르쿠츠크파들은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정치적 제휴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고, 외교론자들과 실력양성론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상하이 임시정부는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민족혁명단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또한 이르쿠츠크파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협정하는데 대해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3가지 정도로 축약할 수 있겠다. 첫째, 임시정부의 성향이 부르주아 민주주주의 유형을 국가라는 점인데,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란 부르주아지만을 위한 자유일 뿐, 본질적으로 그들만의 독재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둘째, 이시정부의 구성이 부르주아지 및 한말 관료지배층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셋째, 임시정부의 정책이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의존적이라는 점으로, 외교론자들이 일본이 아닌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게 한국을 새롭게 예속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자들이라 파악했다. 그러므로 이르쿠츠크파로 위시하는 비상해파 사회주의자들은 개량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고립화정책을 통해 통일전선 내에서 공산당의 주도권을 보장받으려 했다.2) 상하이파 고려공산당① 혁명노선 및 국가 건설론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역시 반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또한 그들의 혁명노선과 국가 건설론은 1920년 코민테른 제 2차 당대회에서 레닌이 발표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와 노선을 같이하였다.레닌은 선진국과 후진국을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서기세에 압도된 일제는 군국주의적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 라는 회유책을 내세웠고, 이에 조선민중들의 욕구가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합법적 청년운동의 기세를 타고 자연발생적으로 조직되어진 청년회는 동일한 규율과 유대를 위하여 청년운동계의 전국적 연합기관을 요구하였고, 조직된 단체가 바로 조선청년회연합회였다.연합회에서는 조선인의 각 청년단체의 연합과 각지 청년단체의 조직과 발달을 목적으로 하고 각 청년단체의 친목, 회합, 풍기개량, 야학개최 들을 사업으로 하였으며, 민족주의계 인사와 사회주의계 인물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각 청년단체 중 하나가 바로 서울청년회였다.지방분권적 연합의 조직체인 연합회 안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지역적 기관의 필요를 느낀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와 하께 1921년 1월 서울지역에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그러나 각지의 청년단체를 포괄하고 있었던 이질적 이념의 결합체로서의 연합회는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 운동의 분리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에 서울청년회와 이들을 동조하던 18개 지방단체가 연합회에서 탈퇴를 선언, 좌파세력중심의 족자적인 세력을 지향하게 되었다.이후 그들은 청년운동단체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과 사상운동을 함께 진행한다는 뜻을 띠게 되었는데, 이는 무산계급해방을 위한 전위적 조직으로 그 성격을 변화시킨 것으로, 그 강령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一. 우리는 조선의 해방을 기함.一. 우리는 무산계급에 필요한 이익에 합치되는 사회질서의실현을 기함一. 우리는 무산계급에 필요한 지식의 흡수에 노력함.등 계급적인 색채를 명확히 하였다.이러한 서울청년회는 국내 민족주의와의 분리를 통해 형성된 국내 사회주의 사상단체로, 사기공산당 사건과 김윤식사회장 사건을 계기로 단체내의 문화운동세력을 배제, 해외사회주의세력에 대한 불신감을 지니게 되었다. 청년연합단체에서 주도권 행사를 목적으로 형성되었던 지역적 청년단체인 서울 청년회는 각 부문을 지도하는 사상단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2) 북성회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일공산제도 실현을 목적으로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김재봉, 원우관, 신백우, 김약수, 이봉수를 간부로 선정하였으며, 서울 청년회를 제외한 조선노동연맹과 북성회, 꼬르뷰로 국내부 책임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지하당조직인 꼬르뷰로 국내부는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와 대중운동의 지도를 수행할 합법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꼬르뷰로의 표현단체(연구단체)로 1923년 7월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4년 11월 실천단체인 ‘화요회’를 창설하였다.1925년 4월 창립되는 조선 공산당의 모체가 되어 화요회는 해외 꼬르뷰로 세력과 무산자동맹회, 북풍회의 지도세력이 결합된 꼬르뷰로 국내부가 全조선 사회주의자를 통합하여 국내에서 당을 건설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울청년회는 해외 사회중의 인사들의 국내활동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그 결과 서울청년회를 제외한 국내 무산자동맹회, 노동연맹회 세력과 在日 北星會 세력이 꼬르뷰로 국내부를 구성하게 되었다.3) 조선공산당① 제 1 · 2차 조선공산당1925년 4월 일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창당대회는 일경의 눈을 돌리기 위해 표면적으로 전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면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창립대회이자, 1차당대회였다.조선공산당의 조직구조는 1921년 5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목표는 국내에 공산주의를 전파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내의 자본주의 체계를 불식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는 것으로, 일본을 몰아내기위한 투쟁은 부르조아 -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포함 -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승리 및 “국내에 계급없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김재봉의 보고에 의하면 국내의 대부분의 주요도시에 29개의 세포조직이 산재해 있었으며, 초기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 정치적 망명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들은 혁명투쟁에 있어서 취약함과 미숙함이 드러났고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업적을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에 때때로 사회주의의 근본적 요소인 노동 서울 계 조직에 구하게 된 것은 주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그 후 김철수는 1926년 12월 6일에 당대회를 열어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 간부를 선출한 뒤에 자신은 당의 위임에 따라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고자 모스크바로 떠났다. 안광천이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시기는 1926년 12월6일부터 다음해 9월20일경까지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 시기의 조선공산당 조직은 국내외를 통해 적지 않은 확대를 보았다. 강원도를 제외한 각도에 2-3 또는 5명의 도 간부를 확보하였고 200여명의 국내 당원과 400여명의 해외(만주)당원을 확보하였다. 또 만주에는 종래의 총국을 부활시켰고 그 밖에도 상해부와 일본부의 활동을 부활시켰다.제 2차조공사건에 연좌되었다가 8개월 뒤 출옥한 김세연을 상경시켜 그를 후계 책임비서로 정하고 후계간부를 조직케 하였고, 이에 김세연은 곧 도쿄에 았는 대중신문사(大聚新聞社) 기자 최익한(崔益輪)을 초청하여 선전부장으로 선임하고, 양명을 고문으로 하여 임시부서를 정한 뒤 서울 청년회계의 소장파를 모아 당 조직을 확정지었다. 그 후 1928년 1월 5일부터 5일간 경성부근에서 대회를 열어 중앙 및 지방 간부를 선임할 예정이었으나 사전에 검거된다.3차당 결성에 앞서 일월회(一月會)회원들은 “방향전환론”을 제기하면서 후에 정우회선언으로 알려진 선언을 발표한 것은 1926년 11월 15일이었다. 이것은 초기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민족문제가 사회 운동론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된 것을 뜻하는데, 마침내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방향전환논쟁을 통해서 민족해방운동을 당면과제로 채택한 것이다. 이들은 민족해방운동을 풀어 나가기 위한 새로운 방향으로 계급투쟁을 대중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소규모의 경제투쟁으로부터 광범위한 공개정치투쟁으로 전환하려 하였으며, 이 투쟁 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일본에서의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상황과 아울러 중국에서의 공산주의자의
서양사 고전읽기 REPORT플라톤의 『공화국(Polateia)』플라톤의 『공화국(Polateia)』과 목 명 :교 수 명 :학 과 :학 번 :성 명 :제 출 일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시대적 배경2. 사상적 배경3.『공화국(Polateia)』의 내용4. 플라톤이 생각하는 理想國家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공화국(Polateia)』은 플라톤의 수많은 저서들 중 하나로, 그의 이상주의적인 시각을 현실 정치세계로 옮겨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이 책의 저자인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0세에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연구에 전념하였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 이후 정계 진출의 뜻을 버리게 된다. BC 387년 아테네의 서쪽에 아카데메이아라는 학교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연구와 저술에 전념한다. 이때 저술한 여러 작품들 중의 하나가 바로 『공화국(Polateia)』이다. 그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이자, 더 나아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진일보하여 독창적으로 체계화 하였다.이러한 배경을 지닌 플라톤의 『공화국(Polateia)』은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 아데이만코스, 글라우콘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공화국(Polateia)』의 1권외에 2권~10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제 1권의 경우 나머지 아홉 권보다도 먼저 쓴 것이므로 따로 초기에 속하는 대화편)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실제 이 부분에서 ‘正義’가 논의되고 논박되는 방식도, 그리고 그에 대한 定意가 실패로 끝나는 것도 다른 초기 대화편들의 경우와도 같은 방식이다. 또한 이 제 1권이 저술된 시기는 380~370년대로 추정되는데, 플라톤이 367년 시라쿠사에 초청을 받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이 대화편에서 언급한 哲人治者의 사상이 그곳의 참주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인 소크라테스의 처형을 겪게 된다(BC 399년).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아테네 명문가 출신으로서 가졌던 정치 입문의 꿈을 버리고 철학자로서의 길을 택하게 된다.2. 사상적 배경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그의 사상을 접하고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과두정치(귀족정치)와 민주정치를 반복하는 혼란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고 이는 젊은 플라톤에게 큰 충격을 준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소피스트들이 그리스의 지성계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홀로 절대적 진리의 존재와 그에 대한 추구를 주장했고 플라톤은 이를 이어받아 구체, 풍부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체계를 정립한다. 플라톤의 저서는 26-7편에 이르는 대화편으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는데, 초기는 소크라테스를 이어받아 윤리적 개념들의 정의를 주로 하였고, 중기는 이데아의 존재와 인식의 문제가 바른 삶과 국가경영의 문제와 결부되어 펼쳐졌으며, 후기에는 이데아 이론의 반성적 작업 및 재구성, 이데아들끼리의 결합에관련된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나아가서 그를 발판으로 실천의 문제에 대한 접근을 꾀했다.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번영을 누렸던 아테네의 황금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기울기 시작하고 민주정치의 폐단이 눈에 띄게 드러난 시기였다. 응당 가치기준이 혼란해지고 도덕이 실종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철학의 참된 정의와 최선의 정부형태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플라톤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는 그의 직접적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함께 플라톤의 주된 비판 대상이 된 소피스트들(프로타고라스가 대표격), 전단계의 철학자들로서 세계를 끊임없는 변화로 본 헤라클레이토스와 세계를 단 하나의 불변의 존재로 본 파르메니데스 등이 있다.플라톤의 사상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현상세계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립상태로 본 헤라클레이토스와 형는 단지 거래에 있어서 공정하고 정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함에 대한 관심이며, 권위 있는 자에 대한 복종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2가지 관점이 삶에 대한 초월적인 규범이 될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正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한다. 정의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善 자체임을 증명하게 된다. 부유함이 좋은 것이라는 논의 가운데, 그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유추를 통해 정의라는 이상적인 공동의 부를 생각해 내었는데, 그 안에서 개인과 국가의 정의는 분리되고 유지될 수 있음을 밝힌다.[제 2권] - 정의와 국가의 등장트라시마코스의 뒤를 이어 글라우코스와 아데이만코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 있어서 논박하는 역할을 넘겨받는다. 글라우콘은 먼저 ‘좋은 것’을 분석하여 자체가 좋은 것과 자체뿐만이 아니라,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자체가 좋지는 않지만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의 3가지로 나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을 그 자체가 좋은 것이고, 결과도 좋은 것으로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결과를 바라보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으로부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었고, 소크라테스로부터 정의가 부정의보다 우월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듣고자 한다.이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개인의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음을 밝히고, 큰 규모의 것에서부터 찾아들어가는 것이 더 용이하다 판단, 이를 찾기 위해 나라(polis)를 이론상으로 수립해 본다. 성향에 따른 분업의 효용성으로 등장한 ‘국가’는 ‘최소 필요국가’에서 ‘호사스런 국가’로 확대되면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에 영토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결국 동일한 현상을 겪는 타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게 된다. 이에 나라를 지키고 다스릴 수호자들이 필요하게 되고, 이들이 수행하는 일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일보다 더 중요하여 전문성을 요하므로, 이에 적합한 성향의 아이들을나라를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각기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함으로써 실현가능하다고 규정한다.[제 5권] -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앞장에서 논의된 이상적인 국가와 인간상을 뒤이어 나쁜 나라와 나쁜 인간상이 논의되는 듯 했으나, 논지를 벗어나 여성의 공유와 같은 문제들과 자녀의 교육, 그리고 사적인 삶을 포기한 공적인 삶의 형태가 제시되어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내의 공유는 곧 남편의 공유를 의미하므로, 모든 면에서 남녀의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강조되었다. 결국 ‘공유(koinonia)’의 문제는 ‘공동 관여(koinonia)’의 문제로 귀착되어, 교육면에서도 국가수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음으로 이것에 대한 제도화 가능성과 유익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와 같은 체제의 최대 장점이 소유 문제나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된 공유 의식과 ‘공감상태’임이 언급된다.또한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현실적인 통치권과 참된 지혜는 동일인들에 의해 통합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서 배척받을 주장이므로,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특정한 철학자가 아닌, 참된 철학자가 추구해야하는 것을 정의하고자 한다.[제 6권] - 통치자의 자질과 선의 이데아에 이어, 철학자들의 성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철학은 유능한 자들을 무능하게 만들므로 무익한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훌륭한 인재들을 주변인들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통해 그들을 철학과 격리시켜 무능한 인간으로 전락시키므로, 망명자나 위대한 혼을 지녔으되 극소한 나라에 태어나 국사에 무관심한 사람, 몸이 허약해 현실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사람, 또는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 등이 겨우 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철학적 자질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들이 허명을 좇아 철학을 하여, 진다. 명예제, 과두제, 민주제, 참주제가 각각의 인간상을 통해 상세히 논의 되었다. 현실적인 4가지 정체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철학자에 의해서 통치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의 타락의 단계에서 나타난 정체라고 정의하였는데,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지상(至上)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명예제와 과두제다. 이 정체는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富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나고 만다.플라톤은 4가지 정체의 유형과 그에 따른 인간의 자질을 유추적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그러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나타난 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인간의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통해 극대화되어가는 것으로 보여준다.[제 9권] - 참주적인 인간과 좋은 것에 대한 정의은 참주 정체에 관한 언급으로 끝나고, 정작 참주적 인간에 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 9권은 참주적인 인간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먼저 그런 인간이 어떻게 해서 탄생되며 그가 보이는 행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묘사하였다. 이어혀진다.
서양현대사 REPORTAdolf Hitler과 목 명 :교 수 명 :학 과 :학 번 :성 명 :제 출 일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히틀러의 일생2. 정치적인 면에서의 옹호3. 경제적인 면에서의 옹호4. 히틀러의 정신분석5. 홀로코스트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히틀러와 같은 인물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일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 분위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에의 패배로, 갑작스럽게 의회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모하게 되고, 독일 국민들 스스로는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1차 대전의 패배와 베르사유 조약 이후, 승전국으로부터 지속적인 법적제재를 받아온 독일은 군사적으로 무장 해제되었고, 경제적으로 파산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이러한 상황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항하는 애국적인 투쟁은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여겨졌으며, 합리적 타협을 통해 승전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가들은 허약하다고 비판받거나 심지어 배신자라고 낙인이 찍히는 당시 독일의 특수한 사회적 분위기는 뒷날 히틀러의 공격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권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짧은 평화와 안정도 1929년 세계 경제 공항과 더불어 다시 불안과 무질서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고, 당시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뿐 아니라 지식인들까지도 강력하고 위대한 ‘민족 지도자’에 대해 열망했다. 이러한 열망은 게르만 신화와 영웅 설화 등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모습과 결합이 되었고, 실제로 세계 경제 공항 이후 히틀러는 남다른 연설 능력으로 전국 무대에서 활동하는 정치가로 부상하며 강력한 민족 지도자를 열망하는 독일 국민들의 기대와 지지를 한 몸에 받게 된다.현재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사건을 바라볼 때에는 편중적인 시각보다는 양쪽에서 복합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히틀러를 옹호하는 편에서의 시각으로 당시 독일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을 바라보고, 히틀러의 심리, 가장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히틀러가 연단 위에서 증오와 복수만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히틀러가 당의 독재자로 부상한 것은 1921년 7월 29일 나치당의 임시당대회에서였다.그는 드렉슬러 등 옛 당간부들의 운동방침에 대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 드렉슬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당의 총서기가 됨으로써 당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당위원회를 무력화하고 당내 독재체제를 확립했는데, 당시 그는 정계와 재계의 유력자들과 교류하면서 자금을 조달했고 학생과 군부관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이때부터 히틀러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그는 동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도자'(Fuhrer : 나중의 총통)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당 기관지인 를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나중의 유명한 나치 지도자가 된 로젠베르크, 헤스, 괴링, 슈트라이허 등이 집결했다. 특히 1921년 이후 나치당의 당세는 급속히 확장되었는데, 특히 바이에른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왕당파가 나치를 보호했다.1923년 1월 프랑스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에서는 이에 대한 수동적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심각한 물가상승현상이 초래되었다. 좌파에서 우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독일인이 소극적 저항에 동조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투쟁과 베를린의 민주공화정부에 대한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나치당 내에도 반프랑스 투쟁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히틀러도 이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대한 민주공화정부의 소극적 태도를 공격했다. 결국 독일정부는 프랑스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중지하고 독일 경제의 재건을 도모하기로 결정했으나 이 결정에 반대한 극우파는 공화정의 타도를 외친다. 바이에른에 있는 대한 복수를 할 것이다"라고 증언하여 군 간부와 독일 지배세력의 호의를 얻었다. 곧이어 독일 금융자본가의 중심 인물 샤흐트도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2) 히틀러의 정권획득1930년 가을 이후 히틀러의 대중적 인기와 연설력에 힘입어 나치당의 당세는 크게 신장되었다. 히틀러는 1932년 3월 13일의 대통령선거에서 31.1%, 4월 11일의 결선투표에서는 36.8%의 지지를 얻었으나, 힌덴부르크에게 패배했다. 같은 해 7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를 했고 히틀러는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파펜의 연립내각에서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했다.1932년 11월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를 득표하여 당세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독일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했고, 1933년 1월 그는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1933년 2월 그는 육·해군 수뇌부와 회담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인했고, 이후 자본가들의 지지도 확보했다. 또한 같은 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네덜란드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알려짐)을 이용하여 공산당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적들에게 대대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933년 3월 5일 이러한 상황 속에 실시된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득표했다. 이로써 히틀러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고, 군수공업의 발전을과 공공투자를 통해 독일의 경제를 꽃피우게 된다.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총통으로 취임했다. 자급자족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그리고 중하계급 출신 청년들의 지배기구로의 충원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인기는 올라갔다. 히틀러가 나타나면 독일 국민은 열광하며 그를 환영한 것이다.3) 히틀러의 외교 정책히틀러는 눈부신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에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 1933년 사이 23% 정도 인하되었는데도 1933~1934년 사이 투자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공공투자 때문이었다. 1933~1938년 사이 이루어진 총투자의 45%는 공공투자가 차지(사회보험 포함)했는데, 그들이 행한 투자는 군수였고, 당시 유럽의 전역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한 자구책으로 군수사업을 증강하였으므로, 이는 독일이 전쟁 대비용으로만 생산했다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1933년 집권 직후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독일 경제의 흐름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 민간소비의 증가로, 그 원인은 확대된 고용창출 특별 지출이었다. 이는 경기회복의 촉매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4년 이후 정부는 무역정책에서 외국산 원료 수입을 통제하게 되면서 간접적으로 소비재 생산을 억제 시켰고, 공공투자를 확충해갔으며, 특히 군수와 유관한 자본재 산업이 경제를 주도하게끔 했다. 1928년을 지수 100으로 할 때 직물생산 지수가 32년 79.2에서 38년에 107이었음에 반하여 강철 생산 지수는 32년에 39.3에서 38년에 162.2를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사실상 국가가 시장을 대체하여 독일의 경제를 발달시키게 된 것이다.4. 히틀러의 정신분석1) 인본주의 이론-히틀러의 문제 상황들ㄱ. 어린 시절 강압적인 부친부친의 지배적인 성격으로 히틀러는 자아 형성 시기에 ‘긍정적 존중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못했다. 히틀러는 부친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부친의 의도에 따라 행동을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정신적 문제를 일으키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ㄴ. 철저하게 혼자였던 오랜 생활그는 친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올바른 정신건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외부의 긍정적 존중 등의 사회적 욕구들이 충족되지 못한 것이며, 이는 자아 정체감 형성 등에 문제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다.- 히틀러의 이상행동ㄱ. 과대망상히틀러는 자신이 독일의 새 구원자이자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건할 인물로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믿었다.) 이는 부친해 고안된 유형의 증거들이다.이렇게 히틀러라는 개인은 아주 나약하고 유약한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 감싸줘야만 할 힘없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과연 히틀러 개인에 의해 악랄한 사건들이 벌어진 것일까? 아니면 여타 다른 요인들이 작동한 것일까? 다음 홀로코스트에 대해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5. 홀로코스트당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적인 색채가 팽배해 있었다. 그러므로 비단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대인을 축출하려는 몽상을 현실화 한 것이 ‘독일’일 뿐, 그러한 상상은 20세기 초 유럽각지에서 등장했다. 이러한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다음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너희들은 유대인인 상태에서는 우리가 함께 살 권리가 없다.’중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그 다음에 등장한 세속 세계의 지배자들은 선언했다.‘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마침내 독일 나치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그렇다면, 과연 당시의 유럽에서는 어떠한 논리들에 의해서 이러한 사건들이 펼쳐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들과 히틀러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1) 사회적 배경히틀러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와 학살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유럽사회에 사회적 진화론과 인종주의가 큰 힘을 발휘했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강한 존재들만이 살아남고 약한 존재는 도태되어 버린다는 피상적인 사회 진화론은 부유한 자들에게 유용한 논리였으며 또 이런 생각은 인종주의와도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했다. 이처럼 사회적 진화론과 인종주의는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중요한 사조나 철학적 사상은 아니었지만 유럽 사회 곳곳에 퍼져 있던 일반적인 인식이자 분위기였다. 인종주의의 대표자였던 ‘인간종족의 불평등론(1853~1855)’을 지은 고비노(Gobineau)나 체임벌린(H. S. Chamberline)의 인종주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 종족 중 가장 우수한 종족은
[제 1권] - 정의란 무엇인가정의에 관한 2가지 반대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케팔로스와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관습적인 도덕성을 대변하면서 정의는 단지 거래에 있어서 공정하고 정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함에 대한 관심이며, 권위 있는 자에 대한 복종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2가지 관점이 삶에 대한 초월적인 규범이 될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正義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시작한다. 정의는 외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善 자체임을 증명하게 된다. 부유함이 좋은 것이라는 논의 가운데, 그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유추를 통해 정의라는 이상적인 공동의 부를 생각해 내었는데, 그 안에서 개인과 국가의 정의는 분리되고 유지될 수 있음을 밝힌다.[제 2권] - 정의와 국가의 등장트라시마코스의 뒤를 이어 글라우코스와 아데이만코스가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 있어서 논박하는 역할을 넘겨받는다. 글라우콘은 먼저 ‘좋은 것’을 분석하여 자체가 좋은 것과 자체뿐만이 아니라, 결과 때문에 좋은 것, 그리고 자체가 좋지는 않지만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의 3가지로 나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을 그 자체가 좋은 것이고, 결과도 좋은 것으로 정의를 내린다. 그러나 글라우콘은 사람들이 결과를 바라보고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여, 이것으로부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었고, 소크라테스로부터 정의가 부정의보다 우월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듣고자 한다.이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개인의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음을 밝히고, 큰 규모의 것에서부터 찾아들어가는 것이 더 용이하다 판단, 이를 찾기 위해 나라(polis)를 이론상으로 수립해 본다. 성향에 따른 분업의 효용성으로 등장한 ‘국가’는 ‘최소 필요국가’에서 ‘호사스런 국가’로 확대되면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이에 영토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결국 동일한 현상을 겪는 타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게 된다. 이에 나라를 지키고 다스릴 수호자들이 필요하게 되고, 이들이 수행하는 일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일보다 더 중요하여 전문성을 요하므로, 이에 적합한 성향의 아이들을 선발해서 교육하는 일이 중대한 문제로 제기된다.이러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치는 교육은 ‘詩歌’로, 감수성이 예민한 순진무구한 시기의 아이들에 대한 시가교육은 그 내용이 바람직해야만 한다. 그래서 시가의 내용, 특히 신들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시인들이 지켜야 할 규범에 관한 언급을 하게 된다.[제 3권] - 수호자들을 위한 교육과 그들의 역할시가가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시가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교육에 관하여 화법, 모방, 서술방식, 가사와 선법, 지휘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가 교육에 이어서 체육 교육 역시 영혼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지적하여, 시가와 체육을 통해 신체와 지혜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시행한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거친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 앞서 설명한 수호자 계급으로 선발한다. 이때, 수호자 계급을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조자, 협조자, 전사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서 지혜로운 통치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논의한다.한편, 이렇게 선발된 자들의 성향을 무시한 신분 이동을 막기 위하여 건국신화를 짓는데, 그러한 수호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행복한 특권적인 생활이 아니라, 공동 주거에서 영위하게 되는 통제된 공동생활이다.[제 4권] - 지혜와 용기, 그리고 절제아데이만토스가 ‘수호자들로 선발된 자들이 특혜는커녕 오히려 엄격히 통제된 공동생활을 하도록 강요당하므로, 결코 행복한 생활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하자, 소크라테스는 이 나라의 수립 목적을 다시 상기시킨다. 시민 전체의 최대의 행복과 정의의 실현이 바로 그 목적이다. 그런데 완벽하게 훌륭한 나라, 즉 ‘아름다운(훌륭한) 나라(kallipolis)’에서는 정의뿐만 아니라 지혜·용기·절제의 존재도 강조, 이것들이 어떤 집단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정의한다. 즉 지혜는 소수인 통치자들에게, 용기는 넓은 의미의 수호자들에게, 절제는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정의는 이 나라를 구성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함으로써 실현가능하다는 결론으로 그 의미를 규정한다.[제 5권] -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앞장에서 논의된 이상적인 국가와 인간상을 뒤이어 나쁜 나라와 나쁜 인간상이 논의되는 듯 했으나, 논지를 벗어나 여성의 공유와 같은 문제들과 자녀의 교육, 그리고 사적인 삶을 포기한 공적인 삶의 형태가 제시되어 사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내의 공유는 곧 남편의 공유를 의미하므로, 모든 면에서 남녀의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강조되었다. 결국 ‘공유(koinonia)’의 문제는 ‘공동 관여(koinonia)’의 문제로 귀착되어, 교육면에서도 국가수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음으로 이것에 대한 제도화 가능성과 유익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와 같은 체제의 최대 장점이 소유 문제나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된 공유 의식과 ‘공감상태’임이 언급된다.또한 불행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즉, 현실적인 통치권과 참된 지혜는 동일인들에 의해 통합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에게서 배척받을 주장이므로,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특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참된 철학자는 어떤 것을 추구해야만 하는지를 정의하고자 한다.[제 6권] - 통치자의 자질과 선의 이데아에 이어, 철학자들의 성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가 않다. 철학은 유능한 자들을 무능하게 만들므로 무익한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훌륭한 인재들을 주변인들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통해 그들을 철학과 격리시켜 무능한 인간으로 전락시키므로, 망명자나 위대한 혼을 지녔으되 극소한 나라에 태어나 국사에 무관심한 사람, 몸이 허약해 현실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사람, 또는 소크라테스처럼 영적인 계시를 받은 사람 등이 겨우 철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철학적 자질을 갖추지도 못한 사람들이 허명을 좇아 철학을 하여, 철학에 오명을 안겼고, 이에 사람들의 시선이 고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가에서 철학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수가 없으므로, 제도적인 교육을 통해서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과 과정과 함께 '가장 큰(중요한) 배움'으로서 '善의 이데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된다. 이 선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이른바 '태양의 비유'를 하게 되고, 이 인식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단계의 앎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을 하기 위해 이른바 '선분(線分)의 비유'를 하게 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지적 대상들에 상응하는 인식 주관의 지적인 상태들에 대한 언급도 동시에 하게 된다.[제 7권] - 동굴의 비유에서 ‘태양의 비유’와 ‘선분의 비유’를 통해서 시도된 ‘선의 이데아’와 앎의 대상들 및 앎의 단계들에 대한 도식적 설명 대신에 제 7권에서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좀 더 실감나는 입체적 설명을 하게 된다. 동굴 안은 가시적인 현상의 세계를, 동굴 밖은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실재의 세계를 각기 비유한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실재들을 인식하는 것인데, 이 인식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비 교육의 단계가 필요하고, 따라서 이를 위한 교과들이 제시된다. 이 예비 교육이 끝난 다음에야 변증법에 대한 집중적인 단련을 거치게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변의 오용과 관련된 위험성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런 단련을 거친 다음에는 오랜 세월 동안의 실무적인 경험을 쌓게 한다. 이제 그동안의 교육 과정을 밟게 하는 각 단계의 연령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쉰 살이 된 적격자들로 하여금 통치를 위한 본을 갖도록 하기 위해 ‘선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 마침내 철인 치자들의 확보 가능성이 보이게 된다.[제 8권] - 타락한 국가의 형태와 인간형에서의 주제를 이어 받아 앞 장과 함께 4가지 정치 체제와 그에 따른 인간형이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 명예제, 과두제, 민주제, 참주제가 각각의 인간상을 통해 상세히 논의 되었다. 현실적인 4가지 정체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철학자에 의해서 통치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제도)의 타락의 단계에서 나타난 정체라고 정의하였는데,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고 하였다.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지상(至上)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명예제와 과두제다. 이 정체는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富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나고 만다.
호모속의 진화Subject :Major :Prof :Student No. :Name :Date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인류기원에 대한 개요(1) 호미니드란?(2) 인류와 유인원(3) 오스트랄로피테쿠스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②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2. 호모속(屬)의 진화(1)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handy man)(2) 호모 에렉투스(古人, Homo erectus)(2-1) 베이징 원인(北京原人, Sinanthropus pekinensis)(3) 호모 사피엔스(新人, Homo sapiens)(3-1) 옛 호모 사피엔스(Archaic Homo sapiens)(3-2)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ans neanderthalensis)(4)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4-1) 크로마뇽인(Cro-Magnon人)(5) 석기 제작 방법① 아슐리안 기법② 르발루아 기법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인류가 언제, 어떻게, 왜 등장하였는가?’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고 연구하려한다. 그렇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게 된 것이며, 종교계에서 하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것은 형이상학적 차원의 문제임과 동시에 실제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규명을 요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해는 화석인류를 통한 생물학적 연구에 한정되어있고, 고고학과 인류학에서 자체적으로 인류 진화에 대한 연구 방법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구에 밑바탕이 될, 현존하는 화석인류들의 양이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정되어 있는 연구방법론의 범위 안에서라도 우리는 인류의 발자취와문화의 발전 양상 과정에 대해 연구해 나가야 하며, 이에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고인류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1. 인류기원에 대한 요점정리(1) 호미니드란?화석인류와 현생인류를 포함하여 이 새로운 계구되는 씨앗이나 열매 혹은 나무뿌리와 같은 식물성 섬유질의 식품을 주로 섭취하였기 때문에 턱과 어금니가 발달, 강고한 외형을 갖게 된 반면, 아프리카누스는 로부스투스보다 잡식성의 식생활을 누렸기 때문에 이러한 발달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2. 호모속(屬)의 진화5-8백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는 플라이스토세의 시작인 2백여만년 전에 아프리카 이외 지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호모속)의 확산에는 더욱 진화된 직립보행과 환경적 능력, 두뇌 용량의 증가, 도구사용의 발달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1)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handy man)250만년 전부터 170만년 전 사이에 존재한 고인류 화석으로, 두개골 용량은 530~800㏄이며,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의 여러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중요한 화석은 동아프리카의 오모지역과 터카나 호수 동쪽지역에 위치한 쿠비포라 등지에서 발견되었다.①호모 하빌리스의 발견호모 하빌리스의 화석은, 1959년 올드바이 협곡에서 루이스 리키의 아들인 조나단이 두개골 부분과 턱 및 손뼈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964년 루이스 루키는 이 화석들을 인류속(genus Homo)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믿고,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handy man)라고 명명하였고, 1968년까지 모두 4개의 호모 하빌리스 화석을 발견하였는데 이 화석이 호모 하빌리스, 즉 호모속이라는 주장은 그 당시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인류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개골 용량이 700㏄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클라크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2년 터카나 호수에서 KNM ER-1470으로 알려진 머리뼈의 발견으로 루이스 리키의 주장이 인정되었다.②호모 하빌리스의 특징호모 하빌리스의 형질적 특징을 살펴보면, 이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비해 머리 표면의 크기가 팽창되었고 두개골은 마르고 차단되었으며 이마는 그리 튀어나오지 않았다. 둥근 아치형의 윤곽은 낮고 편평하기보다는졌다. 턱은 조금 튀어나왔으며, 미궁골이 있었다. 앞이마는 낮고 평평하다. 위에서 볼 때 호모 에렉투스의 머리뼈는 넓적하며, 머리뼈 최대너비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의 경우 머리 위쪽에 최대너비가 있는데 비해, 호모에렉투스는 귓구멍 높이에 최대너비가 위치한다. 정수리뼈 또는 두개골은 다른 것에 비하여 얇다. 그 표면에 있는 주름무늬는 머리 근육 위쪽의 경계에 뒤를 향하여 아래쪽으로 굽은 모양이다. 두개골은 비교적 폭이 넓으며, 후두골의 뼈나 두개골 뒤의 구조는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다. 목 근육은 결부되어 있다. 또, 턱 자체가 깊고, 매우 튼튼하다. 호모 에렉투스의 안면 치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것보다 다소 크지만, 호모 하빌리스의 치아보다 크기가 줄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바로 음식물 섭취의 과정에서 구강부가 받게 되는 스트레스 양의 감소, 즉 턱 및 치아 운동량의 현격한 감소를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식물성보다는 씹기 쉬운 동물성 단백질을 더 섭취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터카나 호수가에서 발견된 소년의 골격으로 초기의 호모 에렉투스의 개체가 키가 크고 강건하며 억센 근육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사지뼈는 호모 사피엔스와 비슷하며, 루시 같은 A.아파렌시스나 H.하빌리스처럼 팔이 길지는 않다. 전체 몸 크기로 볼 때, 호모 에렉투스는 호모 하빌리스보다 크며 거의 현대인류와 비슷한 크기이고, 골반과 대퇴골의 상단부분은 현대인간의 형태와는 다소 다르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단계부터는 거의 완성된 직립보행의 특징이 나타난다.성별차(性別差)로 인한 동종이형(同種異型)은 이전에 비해 크게 축소되어 여성의 크기가 증가했다. 화석에서 뇌껍질과 사지의 긴뼈가 전보다 두꺼워지고, 관절부분은 보다 확장·강화되었으며, 근육이 붙어 있던 흔적이 자주 관찰된다. 따라서 보다 많은 힘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④호모 에렉투스인들의 생활이들은 주로 수렵생활을 하였으며 체계적인 사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체계적인 사냥이 가능했던 것은 뇌용량의 증가 때문일 것이인류 화석이다. 이 새로운 종은 인도네시아, 중국, 아프리카, 유럽 등 구대륙 각지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들이 등장한 최초의 시기는 40~25만년전 즈음으로,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는 후기의 호모 에렉투스와 상당한 시간 동안 공존하였다. 이들 양 집단 사이에는 실상 화석의 형태나 문화내용에 있어서 그리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플라이스토세 중기의 호모 속을 위의 두 종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이며 결과론적인 분류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호모 에렉투스의 진화경향을 계승하며 일정한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종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①호모 사피엔스의 특징플라이스토세 중기 말의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에렉투스와 비교하여 두개골의 용량과 형태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안면부의 형태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치아의 구조는 호모 에렉투스와 유사하며, 사피엔스의 화석은 두개골 상단의 융기부(sagital keel)의 크기와 두개골의 두께가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미궁골의 융기정도는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그리 줄어들지 않은 편이다. 이러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과 치아의 특징은, 두뇌 각부 크기의 차별적 증가와 앞니 부위의 집중적 사용 및 어금니·작은 어금니 부위의 중요성 감소라는 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고, 사냥도구의 발달과 이러한 도구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발달 및 그 기술을 활용하여 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체 특정부위의 집중적·반복적 사용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미궁골과 비강부의 발달은 석기제작에 요구되는 근육운동을 지지하기 위한 필연적 결과로 해석된다.②호모사피엔스와 석기문화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석기문화는 매우 세련되게 발전하며 다양해지고 아슐리안 문화의 최후 단계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도구는 점차 고정화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여 종류가 다양해지고 형태가 정제화 되어지며 기술형태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표석기들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들은과정에서 뛰어난 적응능력을 키웠고, 그로 인하여 구대륙의 전역을 그들의 활동지로 삼았다. 우선 많은 유적들이 당시 대륙빙하 가장자리의 매우 추운 기후지대의 개활지(open-land)와 같이 높은 해발고도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옛 사피엔스가 동굴과 같은 자연적 보호처가 없더라도 극권적 환경하에서 충분히 생활을 유지하여 나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그들이 높은 고도와 산간지역의 생활에도 충분한 적응력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끝으로 저위도 지역에서는 칼람보 폭포(Kalambo Falls) 유적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사바나지대 뿐 만 아니라 열대우림지역도 인류의 서식처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적응력은 석기 및 기타 도구제작 능력의 고도화와 새로운 종류의 도구 개발, 추운 기후 하에서도 생활이 가능한 주거구조의 개발 및 이러한 기술적 진화에 힘입은 수렵채집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3-2)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Homo sapians neanderthalensis)플라이스토세 말기 초에 유럽으로부터 중동,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을 포함한 제한된 지역에 존재하였던 초기 호모사피엔스의 일종으로 13만 5천년 전에 처음으로 진화하여 3만5천년 전에 사라졌다. 1856년 러셀도르프 근처의 네안데르탈 계곡에서 발견된 이래로,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전개되어 왔는데, 네안데르탈이라는 용어는 초기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 등장 이전까지의 갱신세 후기의 모든 호모사피엔스집단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형질적 특징이 각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고 기존에 네안데르탈인은 제한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다른 호모로 인식하여 이를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로 부르자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①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의 발견 및 연구1856년 라인강 하류 삼강주 뒤셀(Dussel)지역에 퍼져 있는 네안더(Neander)석회암 계곡에서 골제채취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