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들어가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이 책은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 자들과의 오랜세월 계속되어온 싸움의 역사책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일들이 甲論乙駁(갑론을박)에 지나지 않는 일들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논쟁 속에서 오늘날 좀 더 검증된 신앙의 조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하여 명확한 구원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본 론 -제1장 문제의 근원문제의 근원을 살펴보면 스코틀랜드 신학자인 존 "랍비" 던컨(John 'Rabbi' Duncan)박사에 의하면 알미니안주의는 구원 역사의 반은 하나님의 일이고 반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구원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일이요 동시에 또한 전체가 사람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문제에 대하여 근 400년간이나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라고 하겠다. 먼저 알미니안들의 예정론에 대한 진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1.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첫번째 절대적 계획은 그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파괴하시며, 친히 복종하심으로 상실된 구원을 회복시키시고, 그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전달하여 주시는 중보자와 구속자와 구세주와 제사장과 왕으로 삼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2. 하나님의 두번째 정확하고도 절대적인 작정은 그 작정 안에서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끝까지 인내한 그러한 회개한 자들과 믿는 자들이 구원을 성취시키시되, 그러나 회개치 아니하며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은 죄와 진노 아래 방치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을 파멸에 떨어뜨리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3. 하나님의 세 번째 작정은 그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충족하면서도 유효한 방법으로 회개와 믿음을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집행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집행이 ①신적지혜(이 지혜에 의하여 하나님은 무엇이 만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은 거부한다.알미니안주의자들은 1610년 알미니우스가 죽은 후 5개의 신앙조항을 작성한다.①선택과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은 예지된 신앙과 불신앙에 따라 결정된다. ②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화목케 하셨다. 그러나. 신자 외에는 아무도 실제로 죄사함을 향유하지는 못한다." ③성령에 의한 중생은 구원에 있어 필수적이다. ④은혜는 거절될 수 있다. ⑤신자의 궁극적 인내는 부정될 수도 없고, 또 적극적으로 긍정될 수도 없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어떤 이들에 의해 만인구원설적으로 해석되었다. 셋째 항은 전적타락이라는 철저한 견해가 아니라 덜 철저한 견해로 많이 완화되었다.이에 반하여 도르트회의는 알미니안의 주장과 정반대 였다.①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다. ②그리스도의 죽음이 全인류의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기는 하지만, 구속은 사실상 택한 자, 즉 구원받기로 정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 ③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④하나님의 부르심은 효과적이며 따라서 그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⑤선택되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구원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버림받을 수 없다.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죄의 본질은 교만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신앙이었다. 이점은 루터와 맥을 같이하였다. 타락한 인간의 神지식은 부패하였고, 그 삶은 비정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알미니우스는 또한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더욱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인 항론파에서는 전적타락의 교리를 거론하지 않았고 또 확실하게 부인하지도 않았다. 또한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교리에서 멀어져 갔다. 칼빈은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원치않는 인간 惡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셨다. 칼빈은 이 때문에 인간이면서도 선을 행할 수 있음을 통해 타를 순화시켰다. 때문에 이 교리는 조건적이 되었고,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위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마음대로 조작하는 것이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은 무엇이나 성취하시고 이것은 그의 전능하심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그 섭리에 합당한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과 하나님의 은혜와의 협력이 구원의 수단이 된다고 하는 개념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며 신자의 상태와 소망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제2장 사상적 지류들먼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를 살펴 보면 존 낙스(John Knox, 1505-1572)에 의해 칼빈주의가 스코틀랜드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1559년에 낙스에 의해 쓰여진 「예정론에 관한 논고」가 1560년에 제네바에서 출간되었다. 그 부제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론에 반대하는 재세례파와 반대 세력에 의해 저술된 수많은 신성모독적 문헌들에 대한 답변"인데 이 책에서 낙스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죄 없는 행동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주장하고, 구원을 오직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 돌리고 있다. 1560년에는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이 나와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그것을 대체할 때까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유일한 표준이 되었다. 이어 1616년 에버딘 회의(the Assembly of Aberdeen)에서 고안된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초에 아일랜드 교회는 일련의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점차 수많은 목사들이 알미니안주의를 마음속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독립교회 목사인 페어번은 이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단지 칼빈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고교회파 정책이 왕권, 사제권 신수설 개념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비타협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신학 아래 있는 것보다는 조건적인 신학 아래있는 것이 처신에 더 용이하기 때문에 후 예정설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확신에 의해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양쪽을 모두 공격하였으며, 그는 하나님의 예정 계획이 택자들에게만 관계가 있고, 유기된 자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견해와 맞서 싸웠다. 그는 새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말미암는데 택자들은 그 성령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완전하게 받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카메론의 동료였던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타락적 예정설을 굳게 견지하였다. 그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을 기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내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위한것이라 주장되었다. 러더포드는 만인구원설에 치우치는 알미니안주의의 경향을 참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본질상 만인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목적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만인을 위해서 죽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제한 속죄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존 브라운(John Brown)이 반율법주의 논쟁에 참가했다. 세부적인 면에서는 각자가 서로 상이성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러더포드, 박스터, 오웬은 굳게 단결하여 성약신학을 주장하였다. 여기서는 성약신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이제 반율법주의 논쟁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것은 신약시대까지 올라간다. 재세례파들이 반율법주의를 가르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은혜아래 있으며, 따라서 율법이 자신들을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한다. 17세기 미국에서도 이 논쟁은 앤 허치슨 부인(Mrs. ann hutchinson, 1591-1643) 을 중심으로하여 일어났다. 잉글랜드에서는 토비아스 크리스프(Tobias Crisp, 1600-1643)가 반율법주의의 대제사장으로 간주되는 인물로서 반율법주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방탕을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최대의 적이며 복음의 권능과 순수성의 최대의 파괴자"라고 맹렬히 비난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영원전부터 의롭다함을 받았다고진정한 회심자"로 인하여 의무와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해리스는 휘트필드와 모라비안 신도인 존 케닉(John Cennick)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휘트필드와 웨슬리의 사이의 불화를 막아보려고 노력했던 자였다. 그는 그의 글들을 통해 보건대 경험적 칼빈주의자였다.이 저자는 이들의 주된 관심이 된 교리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기에 휘트필드와 웨슬리를 중심적으로 다루었다. 1735년 회심이후로부터 휘트필드의 칼빈주의가 조직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밝게하여 주셨으며 또 그의 값없는 은혜를 알게하여 주셨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필연성을 깨닫게하여 주셨다"고 하였다. 휘트필드와 웨슬리의 논쟁은 편지나 글들을 통해 계속된다.1742년 해리스와 로우랜드가 서로 갈라지게 된다. 이 분리는 신학적 문제와 함께 개성의 차이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면상 논쟁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것이었는데, 해리스는 신자는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한 참 신자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로우랜드는 휘트필드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점차로 로우랜드는 권위적으로 되어갔고 해리스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경솔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조오지 이어스(George Eayrs)는 웨슬리의 5가지 보편적 원리를 말하였다. 그것은 1)모든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2)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3)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 4)모든 사람은 그들의 구원을 선포하여야만 한다. 5)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가운데 거룩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휘트필드가 1770년 사망한 후 웨슬리는 다시 열렬한 국교도 칼빈주의자인 어거스터스 톱레이디(Augustus Montague Toplady, 1740-1778)의 견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769년 「알미니안주의의 공격으로부터 그 진실성이 입증된 잉글랜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