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나폴레옹의 생애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태어난 보나파르트는 8남매 중 둘째였다. 열 살 때에 브리엔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후 파리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789년에 그는 코르시카로 돌아왔으나 독립파의 지도자인 파올리의 의심을 사게 되어 가족과 함께 다시 파리로 되돌아왔다. 1793년, 산악파에 가담한 그는 툴룽 항을 영국으로부터 탈환했다. 그는 24세에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후 혐의를 받기로 했으나 그는 그에게 1795년 10월 5일에 발생한 왕당파의 봉기를 진압하는 일을 맡긴 국민공회 의원 바라스 덕분에 온전 하룻 이었다. 왕당파 진압에 성공한 뒤 바라스는 그에게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직을 맡겼는데, 그 후부터 그의 영광을 시작되었다.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와 나폴레옹은 총재정부를 쿠데타로 쓰러트리고 새로이 통령정부를 수립하였고, 얼마 후 황제로 등극하였다.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행정 조직과 재정의 개혁, 종교정책, 나폴레옹 법전 편찬, 교육제도의 재정비등을 통하여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주변국으로 원정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유럽전역에 걸쳐 그 세력을 떨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2 . 나폴레옹의 업적18세기 유럽에서는 두 가지 큰 혁명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이었고, 또 하나는 프랑스 혁명이 이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은 그 때까지 이어지던 유럽 정치의 흐름을 크게 변화시킨 것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혁명이 한참 진행될 때였다. 포병 장교였던 그는 먼저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뒤이어 혁명의 영향이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위협하던 유럽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물리쳤다. 그의 군대가 가는 곳 엔 승리만이 뒤따라 결국 온 유럽이 나폴레옹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우리가 나폴레옹을 영웅이라 하는 것은 많은 전쟁에서 이기고 넓은 땅을 지배했기 때문에 만은 아니다. 오히려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나타내 준다. 어떤 사람은 '세계정신'이라고 찬양하였고, 어떤 사람은 '천재적 군사 독재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평이야 어떻든 그의 활약은 세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이 위대한 이유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폴레옹은 남보다 더 노력하였고, 결국 프랑스 황제가 되어 온 유럽을 호령하게 되어 위인이 되었다. 그럼 여기서 나폴레옹이 어떠한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첫째, 군사적 측면에서의 업적이 컸다. 혁명이후 프랑스는 이념대립과 외세의 침입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이 와중에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로 파병된다. 그는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알프스산맥을 건너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수도인 빈을 점령했다. 프랑스에 항복한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지오 조약을 체결하고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넘겨준다. 이 승리로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인기는 높아지게 되었다.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할 때, 외세의 침입을 막지 못한다면 국가 존립에 커다란 위험이 될 수 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무찌름으로써 외세의 개입을 철저히 차단시켜 혁명이후의 국내정세도 점차 안정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둘째, 학술적인 측면에서 그가 남긴 영향이 컸다. 혁명정부는 영국과 인도의 길목을 차단시킬 목적으로 1798년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파병한다. 하지만, 사실은 나폴레옹의 인기상승을 두려워한 혁명정부가 그를 국민적 관심에서 떨어뜨려놓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나폴레옹은 카이로에 입성해 피라미드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때 그와 대동한 180명의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유적과 자연환경에 대해 연구를 한다. 이 시기에 발견된 로제타석이 고대 이집트 문명을 밝혀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돌은 나중에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이 완벽하게 해석을 한다. 나폴레옹은 본래 엄청난 독서광이었다. 아마 이집트 문명에 대해서도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을 대동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로제타석은 훗날 근대 이집트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하다.셋째, 그는 혁명이후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혁명정부의 탄압을 받던 로마가톨릭 교회와 정치 및 종교 조약을 맺어 국내의 종교 간 대립을 완화 시켰다. 또한 왕당파나 자코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선별해 정치적인 대립을 없애는데도 주력했다.넷째, 내정적인 면에서 그가 끼친 영향이 크다. 세금과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힘썼다. 1800년에는 프랑스 은행을 설립하여 재정적인 안정을 도모했다. 특히 1804년에 제정한 나폴레옹 법전은 세계 최초의 민법전으로 ‘만민의 법앞에서의 평등’,‘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등 근대적인 가치관을 도입했다. 이는 훗날 전세계의 법률체제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다섯째, 그는 파리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파리 시내에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했으며, 공공시설과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특히, 그가 건설을 명령했던 개선문과 에펠탑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상징물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외에도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고, 교량을 정비하기도 했다.혁명이후의 파리는 아마도 많이 황폐해지지 않았나 싶다. 나폴레옹은 도시의 미관을 다시 정비하고 공공시설들을 정비하여 시민들의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집권을 하였지만, 그것은 그의 인기를 시기한 혁명정부의 압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전 국민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반발을 사지도 않았다.물론, 대륙봉쇄령의 실패와 지나친 정복욕으로 인해 유럽을 전쟁터로 만든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결과적으로 패했기 때문에 그토록 혹독하게 평가가 내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세를 보고 파악해 봤을 때 혼란을 수습하고 내치를 안정시켰으며,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는 그의 모습은 최고의 찬사를 받아도 결코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단순히 전쟁광, 독재자로서 폄하되기에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3 . 나폴레옹이 유럽에 끼친 영향나폴레옹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무엇보다도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과인 인류의 숭고한, 평등 자유 박애라는 3대혁명정신을 세계적으로 나폴레옹이 전파 보급하였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로선 정변이 발생한 것이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은 나폴레옹의 진격으로 수천 년 유지되어온 무자비하고 불평등한 봉건신분체제가 순식간에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적 철학자인 칸트, 헤겔조차도 나폴레옹의 침략을 인류해방이자 세계사의 발전이라며 크게 환영하고 지지한 것만으로도 나폴레옹의 공적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한줌도 안되는 당시의 지배계층인 귀족과 종교인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고 억압받고 박해받은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 농민 노예들이 자유로운 인간으로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기적에 가까운 쾌거였다. 나폴레옹이 휩쓸고 지나간 나라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힘없이 당하고만 살아온 약자들이 처음 맛보는 경이롭고 위대한 순간 이였다. 나폴레옹은 헤겔이 말 한대로 시대정신을 대변한 신적 영웅 이었다. 농민 노동자 노예가 오랫동안 물건이나 도구처럼 취급을 받다가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세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자유로운 주권을 획득,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나폴레옹에 힘입은 바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