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델-건축하는 조각-차 례Ⅰ. 서론Ⅱ. 부르델Ⅲ. 부르델과 베토벤Ⅳ. 부르델과 그의 스승, 로댕Ⅴ.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Ⅵ. 맺음말Ⅶ. 참고문헌1. 서론지금도 그렇지만, 처음 현대 미술사 강의를 신청한 이유는, 현대 미술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는 작가도 이름만 아는 사람들뿐이었지, “난 이 작가를 좋아한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가가 없었다.때문에 발표할 작가를 정할 때 많이 고민되었는데, 과가 과이다 보니, 무언인가 관련된 작가를 찾다보니, 부르델이라는 작가로 정하게 되었다.문화재보존학과와 부르델이 무슨 연관이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부르델 이란 작가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고전의 재해석과 고전으로의 복귀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부르델이란 작가를 발표하게 되었다.보존과학이라는 영역이 훼손되거나, 파괴된 문화재의 복구, 또는 이를 방지하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많은 어려움이 있고, 보존처리를 할 때 어쩔 수 없이 처리자의 작품의 재해석이란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이다.2. 부르델근대 조각은 세 개의 큰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 가장 거대한 기둥은 말할 것도 없이 로댕이며, 그보다 좀 늦게 또 하나의 기둥이 병립하는 것처럼 자랐다. 부르델의 믿음직한 끌의 기술이다. 여기에 마이욜의 정밀한 형체를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세 개의 커다란 원동력에 의해 오랫동안 안면에 잠겨 있었던 조각은 뜨거운 숨을 다시 쉬게 되고, 발랄한 에너지로 회춘하여 근대 조각의 산을 이루었던 것이다. 로댕의 예술의 열매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여파는 그 가까이에 부르델을 이끌어 새싹을 발육시켜 조각의 생명을 더욱 새로운 방향에로 신전시켰던 것이다. 모름지기 로댕 없이 부르델은 없었을 것이며, 부르델 없이는 로댕의 예술은 그 명맥을 전승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두 천재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내면의 연결이 내재 가구를 만들었다.동업자들이 이것을 보고 소년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소년의 기술은 이내 향상되어, 이웃에 소문이 자자하여, 이 재주를 인정한 마을의 은행가 라카즈와 문학자 푸비용은 이 소년을 툴루즈의 미술 학교에 넣으려고 장학금을 거두었다. 툴루즈의 학교에서 8년 동안 공부하고, 1884년에는 파리로 나와 파리미술학교에 진학하여 그 당시 이색적인 작가였던 팔기에르의 가르침을 받았다.학창시절 부르델의 아틀리에 옆에 조각가 달루가 있었다. 모든 관설 전람회에 출품을 거부한 달루의 의연한 정신에 부르델은 여러 번 감동했고, 그 기개에 영향도 받았다. 1886년 초 부르델이 미술학교를 퇴학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러한 자극 때문이었을지 모른다.그는 학교를 그만두며 스승인 팔기에르에게 상이나 콩쿨제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거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일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독학으로 조각 작품제작활동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이러한 일은 그의 부모님과 고향의 원조자들에게 실망을 끼쳤으나, 188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거의 모든 전람회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고, 그의 재능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는 이후 죽을 때 까지 45년 동안 이곳에 살았으며, 현재의 부르델 미술관도 그 자리에 지어졌다.그 무렵부터 문인들과의 교제도 시작되었다. 1890년에 오늘날도 몽파르나스 거리 한구석에 레스토랑으로 남아 있는 크로즐리 데 릴라에 조각과 파스텔화, 데생을 진열했을 때 풀 베를레느를 알게 되었고, 장 몰레아스는 그를 위해 롱사르의 시를 낭독해 주었으며, 펠리시앙 샹솔은 그의 데생을 격찬했다. 샹솔의 초상을 만든 것도 이 무렵이다.3. 부르델과 베토벤이윽고 1888년에는 부르델의 움직임에 최초의 전기가 찾아왔다.부르델은 베토벤의 음악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이 감격은 그의 생활과 제작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비상한 자극이었다. 이 천재 앞에 서서 끝없는 공감을 안고 존경과 사모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부르델은 베토벤에게 헌신적인 숭앙을 바치면서 그해부터 베토벤의내면의 고동을 포착하고 발동하는 영혼 자체에 육박해 갔다. 이 정감은 단순히 음악가의 태동뿐 아니라 조각가 자신의 내감이기도 했다. 베토벤을 창조하면서 실은 부르델 자신의 예술적 정념의 폭발이 되기도 했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이와 같은 많은 초상이 되어 차차 불타올랐던 것이다.“음악과 조각, 이것은 같은 것이다. 조각가는 양을 가지고 조형하고, 음악가는 음조를 가지고 작곡한다.”면서 이 두 예술의 교감을 더욱 주장했다. 바람속의 베토벤, 바위에 앉은 베토벤, 눈을 감고 기둥에 기댄 베토벤을 비롯하여 머리와 손, 마스크 등 많은 작품을 통해 베토벤은 정감에 넘친 약동의 형체와 잠재적 명상의 품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베토벤의 많은 상들은 부르델의 예술 발전의 이종표가 되었던 것이다.이와 같은 동감은 다시 신전하여 더욱 거대한 공간에로 도전하는 왕성한 의욕과 연결된다. 1893년에는 처음으로 규모가 큰 기념비를 다루게 된다. 몽토방의 가 그것이다. 억제할 수 없는 로맨틱한 격정은 이 기념비의 구상을 더없이 호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 시형을 보이자마자 대번에 비난에 휩싸여 그 실현도 가망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그때 로댕은 이에 대해 결연히 “이것이야말로 현대 조각의 눈부신 비약이며, 우리들 제작에 일갈을 줄 만한 것이다....”라고 격찬하고,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드디어 여러 사람들을 설득했던 것이다. 부르델이 로댕과 가까이 지내고 협력자로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은 그 기념비를 제작 중이던 1893년부터인데, 그 뒤 15년 동안 부르델은 로댕을 따라다녔다.4. 부르델과 그의 스승, 로댕로댕은 생동감 있는 현실 자체의 인간을 조각하려 하였고, 작업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흔적과 붙임선등을 인위적으로 다듬지 않고 주관성, 자율성을 중요시 하였다. 젊은 시절 파리 에꼴 데 보자르에 지원하였으마, 세 번 낙방 후 장식미술학교를 다녔고, 1864년 예술가의 등용문이었던 살롱에 가 출품거부를 당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후 벨기에 브뤼셀에서 새로운ome)의 조각형식 그리고 이집트의 조각미 추구와 아울러 멀리 나아가서는 전성기의 고딕조각 등을 탐구하는 등 조각에의 엄격한 형식미와 함께 견고한 구축미에 의한 신선한 정취가 넘치는 조각 제작을 통한 고전에의 복귀를 지향하고, 또한 건축적인 요소가 깊숙이 가미된 기념비풍의 조각에 속하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독자성을 서서히 정립하게 된다.스승이며 친구이기도 한 로댕과의 협력은 부르델의 예술의 기초를 결정적으로 견실하게 했다. 그러나 부르델은 이 위대한 협력자 옆에 있으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댕은 무서운 박력을 가지고 그 자신 위에 덮쳐왔다. 그 박진의 압력은 확실히 자기 제작의 골격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으나, 그것만을 의존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단호한 품격을 쌓아야 할 것을 절실히 느꼈다. 부르델은 스승과 협력하면서 또 결연히 자기의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그리고 로댕은 사실적 수법으로 제작된 인물상에 감정을 이입시키기 위하여 등장인물들의 포즈를 강렬하게 과장하여 일부에서는 이러한 로댕의 표현기법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직선적이라는 비판도 뒤따랐다. 요철이 심하게 과장된 근육위에 빛이 부딪칠 때 물결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조각의 표면기법은 당시 대두되던 인상주의의 한 조각적 변용이라는 해석을 하였으나, 로댕 자신은 그러한 빛의 효과를 통해서 조각에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 넣고자 했던 것 같았다.조각가 부르델에게 예술인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한 그의 스승 로댕의 존재는 부르델의 작품생활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에 차지하는 위치는 참으로 대단하였다. 조각가로서 그의 명성도 로댕이라는 출중한 스승을 만나 더욱 빠르고 탄탄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1893부터 1908년까지 수제자이며, 작업의 협력자로 로댕의 곁을 장기간 지키게 된다. 1909년 그는 과감하게 조각에 있어서의 그와의 정체성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자 장장 15년 동안 함께 예술혼(藝術魂)을 불태웠던 그의 스승 로댕의 곁을 과감하게 떠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홀로서기를 해 표현하고자 하였고 이는 곧 현대 미술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이념이기도 하였다.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도는 오랫동안 건축의 지배하에 있던 그 당시의 조각에 근대 예술로서의 독자적 자율성을 부여한 상징적인 의미의 제시와 함께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한 견고한 구축 가운데서도 신선한 정취가 부여된 독자적인 작풍의 확립을 의미하고 있다.로댕의 조수였던 부르델은 스승의 작품을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한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로댕의 작품이 도시적 세련미와 열정으로 충만하였지만, 조각 고유의 특성이라 할 구조적 견고성이나 덩어리가 지니는 힘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부르델이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1900년 “아폴론의 두부”를 기회로 부르델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여기에서 다만 격정적인 동세를 향해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아폴론적인 균정과 절도와 조화와 총화의 시점에 서는 것이다. 지적인 구축에로 냉정한 계산을 해 나간다. “나는 순간적인 파동을 제2로 하고, 구조의 본질을 탐구하여 보편적인 리듬을 찾는다.”라고 말한다. 형체의 종합적인 통일을 주안으로 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1905년에 를, 1906년에 을, 1909년에 의 대 역작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국립미술협회전에서 호평을 받아 이름이 크게 부각되었다. 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괴조를 향해 막 화살을 쏘려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응축된 힘을 보여주고 있다. 바위에 발을 붙인 채 뒤로 몸을 젖히고 있는 긴장된 자세지만 뛰어난 균형 감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동감 넘치는 동작에서 비롯된 팽팽한 근육은 용맹한 남성의 이미지를 잘 나타낸다. 또한 두 다리와 바위 사이의 공간, 팔과 활 사이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시각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5. 그늘을 벗어나..간략하면서도 대담한 헤라클레스 상은 부르델이 커다란 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조각가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와 , 미국 여성 이다.
목 차1. 현미경의 기원1) 현미경의 역사2) 현미경의 용도2. 현미경 사용법1) 현미경의 구조2) 현미경 각부위별 설명3) 사용방법4) 주의 사항5) 초점을 맞추기 힘들때 간단하게 맞추는 방법3. 현미경의 종류1) 실체현미경( 實體顯微鏡, stereoscopic microscope )2) 위상차 현미경 (位相差顯微鏡, phase-contrast microscope )3) 간섭현미경 ( 干涉顯微鏡, interference microscope )4) 주사형 현미경(Scanning Probe Microscope)5) TEM (Transmission electron microscope: 투과 전자 현미경)6) 편광현미경(polarization microscope,偏光顯微鏡)7) 자외선현미경 ( 紫外線顯微鏡, ultraviolet microscope )8) 생물 현미경 (生物顯微鏡,Biological microscope )4. 예전의 현미경1) 1600년대2) 1700년대3) 1800년대1. 현미경의 기원현미경은 인류 탄생 이래 비행기, 전기, TV 발명등과 더불어 인류의 발전에 한 획을 그은 발명품이다.1)현미경의 역사현미경에 관한 기록은 AD 1000년경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렌즈를 사용할 때 부터이다.미세한 사물을 확대하기 위하여 렌즈를 사용하였지만 현재로서는 그 기원을 밝히기에는 기록이 부족하다. 다만 현재의 현미경과 같은 구조를 지닌 현미경 (Multiple lens) 을 발 명한 사람은 1590년대의 네덜란드 사람인 얀센 (Zacharias Jansen) 과 John Lipperhey 이다. 당시의 발명품은 주로 해양탐사를 위해 사용되어 그 형태는 망원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이후에 현미경 기술에 지대한 발전을 미친것이 바로 렌즈의 가공 기술인데 반세기 후의 현미경은 17세기 네덜란드 사람인 레벤후크 (Anthony van Leeuwenhoek :1632~1723) 와 로버트 후크 (Robert Hooke) 에 의해 현재의 현미경의 모태가 되었으며 이들은"짧야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 요한 부분을 차지하고있다. 최근에는 반도체 장비에까지 응용되고 있으며 현미경의 가치를 한단계 더 높였다.이상과 같이 현미경에 관해 간단히 알아보았지만 현미경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미세 영역 을 보고자 하는 열망에 부응하며 의학계와 산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류 최고의 발 명품 이기도 하다. 현미경이 없었다면 미생물, 세포, 박테리아라는 존재도 우리에겐 없었 을 것이고 가전제품에 쓰이는 기판하나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1) 초기 현미경㉠ 얀센의 현미경최초의 현미경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자하리아 얀 센'이 16세기 말에 만든 현미경을 최초의 복합 현미경이라고 주장한다. 그 당시 안경 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고, 광학과 렌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위의 그림이 '자하리아 얀센'과 그의 아버지인 '한스 얀센'이 만든 현미경이다. 이 현미 경은 세 개의 움직일 수 있는 관이 연결되어 있고, 양 끝에 렌즈가 있다. 이 현미 경은 경통을 움직이거나 관찰하려는 물체를 움직여서 초점을 맞춘다. 대략 3배에 서 10배 정도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다.㉡ 레벤후크의 현미경네덜란드인 '안톤 반 레벤후크'(1632 ~ 1723)는 정식 과학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현미경의 디자인과 기능에 대한 실험으로 1680년에 왕립 학회의 이사가 되는 명예를 얻었다.레벤후크는 수백개나 되는 작고 기능이 비슷한 현미경을 만들었다. 현미경 크기는 대 략 길이가 6㎝, 폭이 3㎝정도이다. 몸체는 놋쇠로 된 납작한 판을 붙였다. 그 판에 70 배에서 250배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는 작은 볼록렌즈가 있다.레벤후크의 현미경을 이용하는 것은 간단하다. 손잡이를 잡고 현미경을 눈에 대고 본 다. 현미경에는 관찰 대상을 고정시키는 핀이 있고, 현미경 밑에 있는 두 개의 조절나 사로 조정된다. 하나의 조절나사는 관찰 대상과 렌즈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고, 다른 하나는 관찰 대상의 높이를 조정한다.레벤후크는 현미경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산업체에서도 자체적 으로 R&D(연구개발:Research &Development)를 함께 지니고 있어 굳이 연구, 산업분야 로 구분지을 이유는 없다. 즉 연구가 곧 신약개발, 신제품개발 등으로 바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연구분야로는▣생물학: 생물, 미생물, 균류, 박테리아, 곰팡이등의 관찰, 연구▣의학: 세포, 바이러스, 혈액, 피부조직 연구, 관찰, 검사▣재료학: 금속, 세라믹, 신소재, 반도체 공정(포토마스크, 반도체 칩)▣고고학: 화석, 광석, 출토품등의 균열 상태, 구조 관찰▣환경학: 토양, 수중의 미생물, 수질 검사등이외에도 폭넓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2. 현미경 사용법1) 현미경의 구조2) 현미경 각부위별 설명ⓐ 대안렌즈 : 눈을 통해서 들여다 보는 부분이다. 일반저긍로 대안렌즈의 장착 개수에 따라 단안 현미경, 쌍안 현미경, 삼안 현미경으로 나뉜다. 디지털 카메라나 CCD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는 현미경을 삼안 현미경이라고 한다.ⓑ 경 통 : 대안렌즈와 대물렌즈를 이어주는 부분이다. 현미경은 대안렌즈, 대물렌즈 의 배율, 경통의 길이에 의해 최종적으로 배율이 결정된다.ⓒ 대물렌즈 : 보고자 하는 물체쪽에 있는 렌즈라는 의미로서 대물렌즈라고 불린다. 일 반적으로 대물렌즈는 1개에서 6개까지 장착되어 있으며 리볼버를 이용하여 회전 시키고 관찰자가 배율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다.ⓓ 재 물 대 : 관찰하고자 하는 물체를 고정시키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재물대는 고정 되어 있으나 메커니컬 스테이지는 재물대를 X,Y 축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편리한 장점이 있다.ⓔ 조동나사 : 초점을 맞출 EO 현미경 광학계를 상하로 움직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미동나사에 비해 움직임이 크다.ⓕ 미동나사 : 초점을 맞출 때 현미경 광학계를 상하로 움직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 때 움직임이 조동나사에 비해 작다. 초점을 맞출 때는 움직임이 큰 조동나사로 먼저 조정하고 미세한 초점은 미동나사로 조정한다.ⓖ 반 사 경 : 표본을 밝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조명 장치이다. 근래에는 이리저리 은 대물렌즈의 배율이 5배일 경우 5배의 대물렌즈부터 관찰한다.ⓔ 접안렌즈를 선택한다.ⓓ까지의 모든 작업이 끝났으면 적당한 대안렌즈를 선택한다. 대물렌즈는 고정되어 있으 나 대안렌즈를 통하여 배율을 조절할 수 있다. 대안렌즈는 보통 X10,X15배가 주를 이루 고 있다.현미경의 배율은 접안렌즈와 대물렌즈의 배율을 곱한것이므로 (예: 대안렌즈 20배, 대물 렌즈 10배일경우 총 200배가 된다) 적당한 접안렌즈를 선택하여 접안렌즈부에 꽂는다.ⓕ 관찰한다.단안렌즈의 경우 보통 왼쪽 눈을 사용하여 보며 이는 왼쪽눈으로 관찰하며 오른쪽눈으로 는 관찰한 시료를 스케치하기 위한 것이다. 단안렌즈라고 하더라도 두 눈을 뜨고 관찰한 다. 관찰할 때 대략적인 초점은 조동나사를 이용하여 맞추며 세밀한 초점을 맞출 때에는 미동나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현재는 현미경의 사용용도와 현미경 제조사에 따라 조동 미동나사의 위치가 다른 경우가 많다.4) 주의 사항ⓐ 밝은 곳에서 관찰하되 직사광선은 반드시 피한다.ⓑ 관찰할 때에는 현미경에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는다.ⓒ 렌즈가 더러울 때에는 렌즈 페이퍼로 닦는다.ⓓ 사용 후에는 저배율로 고정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한다ⓔ 현미경은 평평하고 바닥에 진동이 없는 곳에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현미경을 옮길 때에는 광학계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한손으로는 지지 손잡이 (Arm)을 잡고 한손은 현미경 바닥을 받치고 옮긴다.ⓖ 사용후 대물렌즈를 저배율로 돌려 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용후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사용후 대안렌즈 및 현미경 전체를 덮을 수 있는 비닐이나 헝겊등으로 덮어 놓는다.ⓘ 현미경의 생명은 렌즈 이므로 대안렌즈 및 대물렌즈에 흠집이 안나도록 늘 주의를 기울 이며 사용하고 정기적으로 세척을 한다. 세척을 할 때에는 렌즈 전용 세정제를 면봉에 뭍혀서 렌즈를 부드럽게 닦는다.렌즈 전용 세정제를 사용하는 것이 좋으나 없을 경우에는 일반 소독용 알코올을 사용해 도 무방하다ⓙ 대물렌즈의 촛점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대물렌즈를 고배율로 돌리면 대물光軸)이 하나이기 때문에 입체감을 얻을 수 없다.그러나 실체현미경에서는 광축 사이에 약 15°로 벌어진 2개의 광속(光束)에 의해 정립(正立)한 확대상을 만들고, 이것을 각각의 눈으로 봄으로써 입체감을 얻을 수 있다. 배율은 통상 10~30배이며, 경통 중간 부분에 optical zoom lens를 장착하여 배율을 연속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Stereoscopic Zoom Microscopy라고 분리하여 부르기도 한다. 실체현미경을 해부현미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저배율에서 표본을 관찰하면서 해부하기 때문이다.또한 저배율에서 표본의 전체를 보면서 해부해야 하기 때문에 상이 뒤집힐 경우 불편하므로 일반적으로 상이 뒤집히지 않고 정상으로 보인다.2) 위상차 현미경 (位相差顯微鏡, phase-contrast microscope )위상차 현미경은 재료를 고정하거나 염색하지 않고도 재료의 명암이 뚜렷이 나타나 살아 있는 세포를 직접 관찰할 수 있다. 해부 현미경은 배율은 낮으나 상이 거꾸로 보이지 않아 작은 생물들을 해부할 때 사용된다. 보통 광학현미경의 배율은 접안렌즈 배율에 대물렌즈 배율을 곱한 값으로 구한다.가시광선 대신에 전자선을 사용하는 전자현미경에는 세포의 단면을 관찰하기에 좋은 투사 전자현미경과 세포의 입체를 관찰하기에 좋은 주사 전자현미경 두 가지가 있다. 투사 전자현미경은 렌즈 대신에 자석 렌즈를 사용하고, 재료를 촬영하여 사진으로 본다.1935년 네덜란드의 F 제르니케(Zernike, Frits )에 의해서 발명되어 195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3) 간섭현미경 ( 干涉顯微鏡, interference microscope )물체가 빛을 지연시키는 현상을 이용하여, 표본을 투과한 물체광에 광원에서 분리된 간섭광을 겹치게 하여 광파장에 대한 간섭현상으로 투명한 표본에서도 그 구조가 뚜렷이 나타나게하는 원리를 이용, 물체의 미세구조나 요철의 변화, 위상변화등을 관찰하여 정량측정을 하는 현미경이다.4) 주사형 현미경(Scanning P되었다.
한국전쟁1.한국 전쟁의 배경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눈앞에 보이자 연합국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일본과 독일 그리고 식민지에 관하여 회담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처음 논의하게 된 것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이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본격적으로 신탁통치에 대하여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1945년 7월 26일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는 포츠담선언이 이루어졌다. 그 후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전 원자폭탄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되었으나 기쁨도 잠시, 38도선으로 허리를 잘린 한반도는 각각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아래 대립되기 시작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의 파행과 방해공작, 그리고 국제정세에 휘말려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9월 9일 해주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와 발맞추어 중공, 소련, 북한의 무력동맹이 이루어졌으며, 소련과 중공의 야심과 지원을 힘에 얻은 북한은 전투병력의 전진배치와 대남공작을 통하여 전쟁의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주한미군의 철수와 극동방위선에서 전략적 가치가 없으므로 한국을 제외한다는 에치슨선언이 발표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시작이 눈앞에서 다가오고 있었다.2. 한국전쟁의 과정(1950.6.25) 북한군 남침(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섬공중지 결의(6.27) 미국, 극동 해 ·공군의 한국지원 명령(6.28) 한강교 폭파, 서울 실함, 유엔안보리 군사원조 결의(6.29) 맥아더원수, 한강방어선 시찰(7. 5) 미 스미스특수임무부대, 북한군과 최초 접전(7.15) 이승만대통령, 한국군작전지휘권 이양(7.20) 대전 실함(8.1) 미 제8군사령관,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 명령(8.5)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8.16) B-29폭격기, 융단폭격(8.31~9.8) 인민군의 9월 공세(9.15) 인천상륙작전(9.28) 서울 수복(10.1)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10.10) 국군, 원산 탈환(10.19) 국군-유엔군, 평양 탈환(10.24) 유엔군 총공세 개시(10.25) 중공군, 제1차공세 개시(10.26)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11.21)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11.24) 유엔군, 최종공세 개시(12.14~24) 국군 ·유엔군, 흥남철수작전(1951.1.4) 1 ·4후퇴, 서울 피탈(1.14) 국군 ·유엔군, 평택-삼척의 신방어선으로 철수(3.15)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4.12)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6.23)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7.10) 개성에서 휴전회담 개시(10.25) 휴전회담장 판문점으로 이동(10.28)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12.18) 쌍방 포로명단 교환(4.20~26) 부상병 포로교환(6.8) 포로송환문제 타결(6.18) 이승만대통령, 반공포로 석방(7.27) 휴전협정 조인3. 한국전쟁의 교훈첫째, 6·25전쟁은 분명 제2차 세계대전 후냉전구조하에서 치러진 내전과 국제전의 양면성을 지녔으며, 무기 체계면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재래식 전쟁이었고, 지역적으로는 한반도에 국한된 국지전이었다. 또한 내전 관점에서는 총력전이었고 국제전 관점에서는 제한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년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어 약간 변형된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다.둘째, 6·25전쟁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싸움이었다. 공산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하였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싸웠으며 인민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도 한국을 지원하였다. 결과적으로, 유에군과 한국군은 공산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셋째, 6·25전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가와 민족의 파괴와 시련의 과정이었다.
한국박물관의 역사□ 한국 박물관(국립박물관) 연혁1908. 9. 창경궁에 황실박물관 발족1915. 12. 경복궁내 조선총독부 박물관 설립1926. 6. 20. 경주 분관 설치1939. 4. 1. 부여 분관 설치1940. 4. 공주 분관 설치1945. 9. 문교부 소속 국립박물관으로 개편1946. 4. 개성시립박물관을 개성분관으로 흡수 통합1950. 12. 3 국립민족박물관을 남산분관으로 흡수 통합, 국립박물관 발족1953. 10. 본관 경복궁에서 남산분관으로 이전1955. 6. 23. 남산에서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1968. 7. 24 문교부 소속에서 문화공보부로 이전1969. 5. 덕수궁 미술관을 통합 개편1972. 7. 19.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직제 개편1972. 8. 25. 덕수궁에서 경복궁 내로 신축 이전1975. 8. 20. 지방분관을 지방 박물관으로 개편1978. 12. 6. 광주박물관 설립 개관1979. 4. 12. 민속박물관을 중앙박물관 산하로 흡수1984. 11. 2. 진주박물관 설립 개관1986. 8. 21. 구 중앙청을 개수하여 중앙박물관 이전 개관1987. 10. 30. 청주박물관 설립 개관1990. 1. 3. 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 분리, 문화부로 소속1990. 10. 26. 전주박물관 설립 개관1992. 10. 30. 민속박물관 분리 독립직제 개편1993. 3. 6.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가 문화체육부로 통합1993. 8. 6. 부여박물관 신축이전 개관1994. 12. 7. 대구박물관 설립 개관1995. 8. 15.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부문 철거1996. 경복궁 사회교육관 건물을 개수하여 이전1997 국립김해박물관 개관2000 제주박물관 설립 개관2002 춘천박물관 설립 개관2004 공주박물관 신축 이전 개관2005. 10. 28. 용산새박물관 개관□ 국립박물관의 변천●황실박물관(이왕가박물관) : 1908 - 1915●조선총독부박물관(경복궁 내) : 1915 - 1945●국립박물관(경복궁 내) : 1945 - 1955●국립박물국립중앙박물관(구 총독부 건물) : 1986 - 1996●국립중앙박물관(경복궁 내 조선 왕궁역사박물관) : 1996 - 2005. 10●국립중앙박물관(용산 가족공원 내) : 2005. 10. 28 -■ 8?15 광복 이전의 박물관(1908 - 1945) : 민족정신의 수호5000년 역사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지키는 박물관의 역사가 시작됨1) 한국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 - 조선 황실박물관(이왕가박물관)1908년 9월 기울어져 가는 국운 앞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창경궁 내에 황실박물관(이왕가박물관)을 발족시켜 우리나라 박물관의 시초가 되었다.황실박물관은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주로 삼국시대 이후의 불교공예품, 고려자기, 조선시대의 회화, 역사풍속도 등을 수집하여 1909년 11월 창경궁을 공개하면서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그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설립되면서 황실박물관은 1938년 이왕가미술관으로 격하 개칭되었다.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은 조선총독부의 시정 5년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1915년 “시정5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고, 그 해 12월 1일 공진회 개최 당시에 사용되었던 미술관 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총독부박물관을 발족시켰다. 이 때에는 1908년 창경궁에서 발족된 이왕가박물관은 1011년에 덕수궁에 건물을 지어 정착하여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공존하고 이었다. 당시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주로 고적조사에서 출토된 수집품과 매장유물의 국가귀속품, 구입품, 그리고 각 사찰의 기탁품 등을 중심으로 고고, 역사, 미술공예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었다.박물관은 본관 건물 이외에도 수정전(修政殿), 사정전(思政殿), 근정정(勤政殿)과 회랑(廻廊) 등 경복궁의 전각을 이용하여 시대별, 역사적 전시방법으로 전시활동을 하였다.그러나 이 당시의 건물은 구조나 채광 등 박물관으로서의 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放火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아 5천년 역사의 문화유산을 소개하기에는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발족되면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하여 1926년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또 1929년에는 백제의 고도 부여에서도 부여고적보존회가 발족하면서 조선시대 관아였던 백제관을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다가 1939년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시켜 부여분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그리고 1934년에는 공주에서도 공주고적보존회가 발족하여 백제시대의 유물수집과 보존 작업에 착수하게 되어, 1940년 옛 충청 관아였던 선화당을 옮겨 공주읍박물관을 설립하여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에)서 조선총독부박물관 공주분관으로 운영하였다.한편 북한의 개성과 평양에도 1931년과 1933년에 각기 부립(府立)박물관이 세워져 개성에는 고려시대의 유물이, 평양에는 고구려와 낙랑시대의 유물을 주로 진열하였으나 총독부박물관에서 더 많은 진열품을 대여하여 전시하였다.총독부박물관은 총독부의 고적조사과에 속해 있어서 고적조사사업이 총독부박물관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따라서 총독부박물관은 한국의 문화를 순수하게 소개하기 보다는 일제의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었고,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던 고고학적 발굴조사도 중요한 출토유물 자체만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을 뿐, 발굴조사보고서가 작성되어 발표된 사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그 후 총독부박물관은 학무국 고적조사과의 박물관계에 소속되어 관장직도 없는 미미한 존재로 존속되다가 광복 후 국립박물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당시 같은 과에 속해 있던 고적계는 광복 후에 문화재관리국으로 독립하였다.■ 이왕가미술관1938년 덕수궁을 일반에게 공개하면서 석조전(石造殿)에 일본의 근대미술품을 진열하여 상설미술관으로 문을 열고 회화, 조각, 공예품으로 분류하여 전시하였다.그리고 같은 해 3월 새로운 미술관 건물이 준공되면서 창경궁 내에 있던 황실박물관에서 미술품만을 선별하여 이관하고 이왕가미술관을 발족시켰다. 이 미술관은 구조나 시설 면에서도 미술관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946년 3월에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 개관하였으며 1968년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다.■ 국립박물관의 발족과 6.25의 시련 : 1945 - 19551) 국립박물관의 발족일제에 의해 운영되어 왔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마침내 우리 손으로 넘어 왔다. 그 해 9월 11일 초대관장으로 김재원(金載元) 박사가 취임하여 옛 조선총독부박물관을 모태로 하여 12월 3일 마침내 국립박물관이 새롭게 탄생하였다. 그러나 경주와 부여, 공주분관은 관장과 직원들만 한국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이전의 조선총독부박물관 분관 체제가 당분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이 지방박물관들도 광복과 함께 지방 국립박물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에는 1968년 국립박물관에 흡수된 덕수궁 내의 이왕가미술관이 덕수궁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 개관하였고, 그 해 4월 25일 석남 송석하(1904-1948)를 관장으로 하여 남산의 구 총독관저 자리에 국립민족박물관이 발족되어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중심으로 박물관 활동을 개시하였다.2) 국립민족박물관의 흡수(국립박물관 남산분관)1945년 11월 8일에 서울 중구 예장동 2번지 구 시정기념관(왜성대)에서 민속학자 송석하를 관장으로 하여 국립민족박물관(경복궁 집경당)을 창립하여, 1946년 4월 25일 문을 열었다. 전시품은 송석하가 직접 수집한 것과 집경당에 있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민족박물관의 민예품으로 이루어졌는데, 고대에서부터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금속류, 석기류, 목공류, 도자기류, 서화 등 1,000여점이었다. 이와 같이 발족한 민족박물관은 1946년 훈민정음반포기념 도서 전람회와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 축하기념품들을 전시하기도 하였다.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조직법 개편에 따라 1949년 12월 12일 국립민족박물관 직제가 정식으로 마련되었지만,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의1?4 후퇴 때에 국립박물관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3년 환도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경복궁 내의 이전 박물관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남산분관으로 돌아왔다. 그 후 1955년 6월 국립박물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옮기자, 남산 분관에는 연합참모부가 들어서고 민족박물관은 건물마저 없어져 버리고 말았지만, 직제는 1960년대까지 존속하였다(김정학, 김정기 관장).3) 6?25 한국전쟁과 국립박물관의 시련(전화의 극복과 덕수궁시대의 개막)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박물관 전 직원은 문화재의 북송을 저지하고, 9?28 서울 수복 후에는 남산에 있던 민족박물관을 남산분관으로 통합시켜 박물관 활동을 정상적으로 지속시키고자 하였다.그러나 곧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6일 당시 부산공보원장이었던 크네즈씨의 도움으로 미군 화물열차를 이용하여 덕수궁미술관의 중요미술품까지 포함하여 약 2만 여점의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대피시켰고, 1957년 3월과 4월에 3대의 트럭으로 서역벽화와 박물관 도서를 안전하게 옮겼다(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 전쟁의 와중에도 1953년 을 시작으로 등을 열어 박물관이 없는 피난지 부산에서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또 1952년에는〈경주 금척리고분〉을, 1953년에는〈경주 노서리 쌍상총?마총〉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등 전쟁의 와중에도 커다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1953년 서울에 다시 돌아온 후 국립박물관은 남산의 민족박물관 자리에 임시 개관하였다가 6월 23일 덕수궁의 석조전을 수리, 이전하여 국립박물관의 덕수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화를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했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겪으면서 7천여점의 유물이 유실되어 큰 상흔을 남기기도 하였다.덕수궁시절의 박물관은 미국 8개 도시에서 와 〈유럽 5개국 순회전시>등을 통해 전쟁과 가난의 이미지를 씻고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내실을 기하는 국립박물관(1960년대)
◎ 도토기의 복원제도.토기를 복원할 때는 에폭시 수지에 안료와 충진제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때 안료는 복원제의 색감을 원래 도자기의 색감과 비슷하게 하고, 충진제 혼합은 에폭시를 성형하기 쉬운 강도로 낮춰주며 색맞춤에 용이한 기공률과 질감을 갖게 한다. 또한 황변에 강한 충진제를 선정함으로 에폭시의 변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문헌에 나타난 도자기 보존처리 역사우리나라에서의 도토기 수리는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산림경제’ 및 ‘규합총서’ 등에 나타난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수리가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2.1 산림경제(기와와 돌을 붙이는 법)느릅나무의 흰 껍질을 질게 풀처럼 짓찧어 기와와 돌을 붙이는데 사용하면 아주 효력이 있다.백교향진품 1냥, 황랍 각 1전, 향유 1적에 부서진 돌로 색깔이 같은 것을 갈아 찧어 가루로 만들어서 섞어 고약을 만들어서 뜨겁게 하여 붙이는데, 이것이 곡 보석하는 신교이다. 만약 산석이 잘라진 것을 붙이려면 돌가루를 버리고 합분을 더 넣어 섞어 말려서 붙인다.2.2 산림경제(자기 붙이는 법)자기는 계자백에 백반가루를 섞어서 자기를 붙이면 매우 단단하다.2.3 규합총서(사기그릇, 질그릇 붙이는 법)사그릇 깨어진 것을 달걀 흰자위에 백반가루를 섞어 붙이면 좋고 깨어진 사기를 먼저 불에 쬐고, 달걀 흰자위에 석회, 대왐풀가루를 섞어 붙인 후, 노끈으로 동여 불에 쬐어 말리면 뜻대로 쓰되 다만 닭국 담기를 꺼린다.2.4 규합총서(독그릇 붙이는 법)독그릇(도깨그릇)붙이 깨어진데 풀무의 쇠똥을 초에 개어 막으면 좋고, 토란을 반은 설고 반은 익혀 꽤 문지르면 새지 않는다.* 도토기 복원 재료1 유기물 접착제도자기 수리복원에 사용된 유기물 접착제 중 현재까지 성분이 규명된 것은 수십 종에 이르고 있으나 그 성분이 변질 되거나 여러 물질들을 혼합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분분석이 불가능 한 것도 매우 많은 실정이다.①역청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접착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역청이다. 내구성이 좋아서 접착제나 충진제로 쓰이는 역청은 B.C 5000년 경의 수마리아 유물과 같은 고대의 유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역청은 석유의 잔재물로 부터 추출된 것과 소나무 등에서 추출된 것으로 색깔이 어두운 밤색이나 검정색이며 고착되면 제거가 어렵다.②밀랍과 밀랍혼합물고대 이집트와 로마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밀랍과 쉘락혼합물은 브리티시 박물관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노란 밀랍과 아마인유, 갈색물감, 로진을 혼합한 접착제가 러시아 박물관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③동물성 접착제젤라틴 형태의 단백질 접착제인 부레풀이나 동물성 접착제도 아주 오래전부터 도자기 접착에 사용되었다. 아교는 호분이나 내화토 가루를 혼합하여 도자기의 결손부를 복원하는데 사용되었다.2 무기물 접착제무기물 접착제도 도자기 수리복원에 오래전부터 사용되었다. 무기물 접착제는 사용 후 제거하기 힘든 단점이 있으나 석회나 석고 등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까지 매우 인기 있는 접합 복원제로 사용되었다.①점토손상된 부분을 매우거나 가리기 위해 고대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리 흔적을 감추는데 매우 유용하며,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물질이기 때문에 많이 사용되었다. 불에 굽지 않은 점토는 습도에 매우 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으나 동물성 아교나 쉘락 등과의 혼합으로 그 약점을 어느 정도 보완하여 사용하였다.②석고주위에서 구하기 쉽고 경제적이며 작업이 용이하여 근대는 물론 현대에도 도자기 복원재료로 사용되고 있는 물질이다. 경화 후 부피가 약간 커지고 접착력이 없으며 제거가 힘든 단점이 있다.3. 합성수지 접착제3.1 에폭시수지Epo-tek 301은 이액형 구성으로 실온경화 되며, 배합 후 저점도의 맑고 투명한 특징을 가진 Epoxy수지다. 굴절률 1.638~1.540, 혼합후의 점도는 100~200 cPs(23℃)이다. 중량비로 주제와 경화제 비율 4:1로 배합하며, 버팀 강도 81, 최종 유리화 온도 65℃이다. 팽창계수는 5.5며, 버팀 강도 81, 최종 유리화 온도 65 ℃이다. 팽창계수는 5.50x10-5㎝/㎝/C 이며 투과율 97 % 이다.Araldite 103, Araldite 106은 문화재보존용 접합?복원재료로 활용되는 Epoxy 수지 종류로서 여러 가지 충진제를 임의의 비율로 혼합 사용할 수 있으며 경화도중 체적 변화는 없다. 내충격성, 내진동성이 우수하며 양호한 기계적 성질을 가지므로 온도변화에도 안정하다.Araldite 103의 혼합 후 점도는 850~1400 cPs(25 ℃), 비중은 1.2, 인화점은 210 ℃이며, 중량비 100:18로 배합하여 사용한다. Araldite 106의 점도는 30~45, 비중은 1.05, 중량비 100:80으로 배합하여 사용한다.제품명(주제)제품명(경화제)사용 용도비고아랄다이트 AW106아랄다이트 HY837,953석재,목재 접착, 의석, 충진1980년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아랄다이트 AY103아랄다이트 HY956석재,목재 접착, 경화저점도 수지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아랄다이트 SV427아랄다이트 HV427목재충진, 의석인공목재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아랄다이트 XN1023아랄다이트 XN1024목재 충진, 의석80년대 초에는 많이 사용하였으나 90년대부터 사용하지 않는다.아랄다이트 GY252아랄다이트 HY2962목재 강화, 충진80년대 초 사용하였으니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아랄다이트 LY554아랄다이트 HY554목재 충진모형제작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 수리복원용으로 사용한 에폭시수지 종류3.2 안료와 충진제색을 표현할 수 있는 물질은 안료와 염료가 있다.안료는 일반적으로 무기?유기안료로 나뉘는데 물이나 기름, 용제 등의 매체에 녹지 않는 화합물로서 분말상태이다. 염료는 유기물에서 추출한 색소로서 용액 상태의 발색 물질이며 대부분 복잡한 유기성 화학물질이다.그러므로 염료는 수지에 염착하여 투명한 색감을 증가 시키지만 이 투명감은 빛에 노출된다는 뜻으로 색이 쉽게 바래며, 안료와 비교하여 착색력은 우수하지만 내광성, 내열성, 내변색성 등의 화학적 성질이 열등하다. 반면에 안료는 전색제의 도움으로 물체에 고착되거나 분산 되어 착색되므로 발색이 불선명하지만 은폐력이 크고 열과 빛, 용제의 영향을 덜 받는다. 특히 유기 안료보다는 무기안료가 화학적으로 비활성(다른 성분과 쉽게 결합하지 않는 것)이며 산과 알칼리, 그리고 열에 영향을 덜 받으므로 빛과 공기, 습기에 안정하다. 또한 색의 황변, 흑변을 유도하고 다른 안료들의 색감까지 변화시키는 직사광선과 습기, 이산화황, 황화수소와 같은 오염물질에도 잘 견딘다. 그러므로 무기안료 중에서 무색?백색인 것의 대부분이 에폭시에 혼합하는 충진제로 쓰일 수 있다. 도자기 복원에서 충진제는 주로 에폭시 수지의 기계적 강도를 낮추기 위해 사용되며 점성을 증가 시킬 뿐만 아니라 불투명성을 유도하여 광선투과를 막는 역할을 한다.3.3 물감물감의 사전적 의미는“물건에 빛깔을 물들이는 물질”이지만 실제로는 안료나염료를 가공하여 미술 활동에 사용하기 편리하게 만든 고체?반고체의 제품안료를 말한다. 물감은 넓은 의미에서 염료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흙이나 광물에서 채취하거나 인공적으로 만든 유?무기 안료를 전색제(접착제)3)에 개어서 굳힌 것을 말한다. 전색제의 종류는 물, 아교, 고무질, 기름, 수지, 초, 합성수지 등이 있는데, 색료를 굳힐 때 사용하는 전색제의 종류에 따라 물감의 종류가 수채물감, 유화물감, 동양화물감 등과 같이 분류된다.분채, 파스텔, 콘테는 모두 미술용 물감으로 제작된 것이므로 그림을 그리는데 편리하도록 각기 다른 첨가물을 넣고, 다른 제조공정을 거쳐 만들어 졌다. 이들은 모두 무기안료가 주성분이며 순도조절용 안료, 체질안료, 불활성 안료 등을 소량 첨가하여 가공하였으므로 광물안료와 같이 급격하고 예측불가능한 색변화가 없는 것이 장점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안료는 사용목적이 다르고 특성도 틀리다. 그러나 선명도와 색조(tone)의 깊이, 맑음의 정도인 채도를 우선시 하면서 농축도와 순도, 내구성과 내광성을 고려한 공정을 거쳤고, 색조가 다양하므로 광물안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보다 편리하다.분채는 정제된 그대로의 가루물감으로 전색제가 없고증량제로 약간의 체질분말과 다른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때문에 서양화에 쓰이는 드라이 피그먼트(Dry Pigment) 와 유사하다. 파스텔은 가루 안료를 길쭉하게 굳힌 것으로 예로부터 석고 또는 백점토 원료를 첨가해 왔으나 지금은 탈산석회를 쓴다. 입자가 곱고 불투명한 것이 특색이며 소량의 점착제가 가해져 있다. 콘테는프랑스의 화학자이며 화가이기도 했던 창안자 콩테(Nicola-JacquesCont´)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안료분에 납과 기름을 혼합해서 다졌기 때문에 목탄보다 고착성이 있다.3.4 아크릴 수지아크릴수지는 아크릴릭에시드와 메타아크릴릭에시드의 유도체로부터 얻어진 열가소성 수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