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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를 통해 본 미국역사-포카혼타스 평가A+최고예요
    목차Ⅰ 포카혼타스 줄거리와 주요 등장인물1. 줄거리‥‥‥‥‥‥‥‥‥‥‥‥‥‥‥‥‥‥‥‥‥‥‥‥‥‥‥‥‥‥‥‥‥‥ 22. 주요 등장인물‥‥‥‥‥‥‥‥‥‥‥‥‥‥‥‥‥‥‥‥‥‥‥‥‥‥‥‥‥‥‥3Ⅱ 포카혼타스의 역사적 배경‥‥‥‥‥‥‥‥‥‥‥‥‥‥‥‥‥‥‥‥‥‥‥‥‥‥ 4Ⅲ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1. 긍정적 시각① 인디언과 서양인의 시각 차이에 대한 설명‥‥‥‥‥‥‥‥‥‥‥52. 긍정적 시각② 인디언과 서양인, 서로 바라보는 시각차‥‥‥‥‥‥‥‥‥‥‥‥53. 부정적 시각① 각색이 아닌 왜곡‥‥‥‥‥‥‥‥‥‥‥‥‥‥‥‥‥‥‥‥‥‥ 64. 부정적 시각② 영화는 왜 왜곡을 한 것일까?‥‥‥‥‥‥‥‥‥‥‥‥‥‥‥‥‥6※참고문헌Ⅰ 포카혼타스 줄거리와 주요 등장인물1. 줄거리17C초 영국의 선장 존 스미스와 존 맷클리프 제독이 황금을 찾아 아메리카 대륙 버지니아로 모험을 떠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버지니아에는 원주민인 알골킨 언어 부족 연합체가 살고 있으며 이들을 이끈 추장은 포와탄이다. 그리고 추장의 딸이 포카혼타스다.포와탄 추장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마을로 돌아와 딸에게 부족의 용맹한 전사인 코쿰과의 혼인을 맺으려 한다. 하지만 포카혼타스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져 400살 먹은 정령인 버드나무 할머니를 찾아간다.이때 존 스미스와 존 맷클리프가 이끄는 영국의 개척자 들이 버지니아에 도착한다.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심취 해 있던 존 스미스는 채굴광 부근의 숲속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원주민 추장 딸 포카혼타스와 만나 사랑에 빠 진다.둘의 관계와는 달리 원주민과 영국에서 온 개척자들 사 이는 결코 평온치 못했다. 결국 양측은 서로를 ‘야만인’ 이라 지칭하며 전쟁을 선포한다. 이를 막기 위해 포카혼타스는 스미스에게 자신과 함께 추장인 아버지를 만나서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광경을 원주민 코쿰과 선원 중 한명인 토마스가 목격한다. 코쿰은 둘의 키스장면을 목격하고 광분해 스미스를 죽이려 하고 이에 토마스는 코쿰독과 선원들에게 전달되어 양쪽의 전투의지만 커지게 됐다.포와탄 추장은 코쿰의 죽음에 분노해 아침이 밝으면 존 스미스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아침이 밝아 존 스미스를 죽임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하려는 순간 포카혼타스는 추장인 아버지에게 존 스미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전쟁을 막으려한다. 이에 포와탄 추장은 “어린 딸의 입에서 지혜의 말이 나오는구나. 우린 마음에 증오를 담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포카혼타스는 용기와 이해를 말하고 있다. 이 순간부터 그 어떤 살상도 내가 먼저 시작한지 않으리”라며 스미스를 살리고 전쟁을 중지하겠다는 선언을 한다.하지만 황금에 눈이 먼 존 맷클리프는 이에 반대하며 추장을 향해 총을 쏘지만 존 스미스가 몸을 날려 추장을 구한다. 결국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의 희생을 통해 원주민과 개척자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총에 맞은 존 스미스는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떠나야 한다. 그는 포카혼타스에게 자신과 함께 영국으로 가길 청하지만 그녀는 부족과 함께 남겠다고 한다. 이별은 하게 되지만 포카혼타스의 “무슨 일이 있든 전 항상 당신과 함께 해요. 영원히”라는 마지막 말처럼 둘의 사랑은 끝나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2. 주요 등장인물포카혼타스: 버지니아 원주민 부족 추장의 딸. 영국인 개척자 존 스미스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힘을 통해 자신의 부족과 개척자 영국인 의 전투를 막아낸다. 개성이 강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 물이다.존 스미스: 모험심 많은 영국 개척자의 선장. 신대륙에서 만난 포카혼타스 에 신비한 매력에 빠져 사랑에 빠진다. 포카혼타스를 통해 인디 언이 야만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고 추장의 목숨을 살리는 희생을 통해 전투를 막아낸다.포와탄: 원주민 부족 추장으로 포카혼타스의 아버지. 딸에게는 인자하고 부 족민에게는 능력있는 지도자. 부족을 지키기 위해 영국인 개척자들 과 전투를 선포하지만 딸과 존 스미스의 사랑과 희생에 감동을 받 고 평화를 선언한다.존 맷클리프: 영국 제독. 영국인 개척자 총괄 책임는 인물이다.Ⅱ 포카혼타스의 역사적 배경포카혼타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1606년 영국와 제임스 1세는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게 아메리카 대륙에 영국의 영구 식민지 건설하는 사업에 대한 칙허를 내줬다. 이에 영국인들은 1607년 대성향을 건너 원주민 포하탄(POWHATAN)족이 살고 있던 지금의 버지니아주 치사피크(CHESAPEAK)만으로 침입했고 제임스타운을 건설했다.당시 포하탄족은 지금의 워싱턴DC로부터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영토로 갖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땅을 찾아온 영국 손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었다. 첫해 겨울에 그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잠자리와 음식물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그들이 베푼 환대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인들의 우월성에 대한 당연한 대접으로 자만하고 감사할 줄 몰랐다고 한다.영국인의 선장 존 스미스는 그 다음 해 포하탄의 수장과 그 부족전원에게 영국의 왕실에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개척자들에게 식료품을 정기적으로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포하탄족은 영국인이 좋은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국인이 자신들을 노예로 만들어 노예 시장에 데려다 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1608년 영국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침략적인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존 스미스는 무력을 동원해 강변 촌락으로 나가 곡물을 강탈했다. 이에 분노한 포하탄 족은 스미스에게 앞으로 식료품의 제공은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너희들은 장사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땅을 빼앗고 우리 부족을 정복하려 온것이므로 가지고 온 모든 모기를 버려야 한다. 우리 부족을 협박하지 말 아야 한다.)스미스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그리고 식민지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는데 더 많은 농토가 필요하다고 포하탄의 소유농지를 요구했다. 이 대립은 영국인과 포하탄 부족간의 무력충돌을 가져오게 된다.포하탄족은 오만한 존 스미스를 체포 감금한 다음 중죄를 의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언이 없다.이들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지도 못하고 같이 공존할 수도 없었던 영국인들은 인디언을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 애드먼드 모건은 초창기 버지니아의 역사를 담은 『미국의 노예제도와 미국의 자유』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인디언은 영국인보다 뛰어난 산사람들이어서 뒤를 쫒기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평화를 가장해 그들을 정착하게 만들고 원하는 곳 어이든 옥수수를 심으라고한 다음, 수확 직전에 습격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옥수수를 불태우는 방법을 택했다‥‥. 대학살이 발생한 지 2,3년 만에 영국인들은 그날의 죽음을 몇 배로 되갚아 줬다.)결국 포하탄은 1644년경 영국침략자에 의해 땅도 문화도 다 잃고 지금까지 그 실지(失地)를 회복 못하고 있다.Ⅲ 영화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1. 긍정적 시각① 인디언과 서양인의 시각 차이에 대한 설명영화의 중반에 포카혼타스가 인디언과 서양인이 갖는 인식의 차이에 대한 부분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날 무식한 야만인으로 생각하죠. 여행을 많이 했으니 그럴 만도 할 거에요. 그래도 난 이해가 안돼요. 야만인 쪽이 나라면 어떻게 당신이 모르는 것이 이토록 많은 거죠?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땅을 소유할 수 있는 거라 하지만 그건 땅을 죽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 뿐. 하지만 난 생명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름이 있는 바위와 나무와 동물을 알아요. 당신은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생긴 사람만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생명이란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을 거예요. 달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았나요? 야생 고양이에게 왜 우느냐고 물어 봤어요? 산의 목소리와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나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요? 숲속의 오솔길을 따라 마음껏 달려봐요. 태양 빛을 듬뿍 받아 무르익은 과일을 먹어봐요. 한 번만이라도 얼마짜리인가 생각지 말고 그냥 주위의 풍요로움을 즐겨보세요. 비바람과 흐르는 강은. 무화과나무는 언제까지 자랄까요? 잘라버리면 영원히 알 수 없죠. 그리고 달을 향해 울부짖는 늑대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요. 피부색이 희든 구리빛이든 우린 산의 목소리와 함께 노래 부를 수 있어야해요.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있어야 해요. 아무리 땅을 가진다 해도 바람의 색깔을 칠할 수 없으면 그건 가진게 아니에요.이 노래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인디언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을 느낄 수 있다.2. 긍정적 시각② 인디언과 서양인, 서로 바라보는 시각영화 전반적인 대사를 통해 당시 인디언과 서양인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먼저 개척자로 등장하는 영국인이 인디언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영국 제독 존 맷클리프는 버지니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치고 잔인한 인디언이 온다 해도 우릴 막을 자는 없다.” 그리고 선원 토마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난 금을 많이 캘거에요. 그래서 큰집을 지어야죠. 인디언이 방해하면 전부 죽여 버릴 거예요.” 존 스미스 선장은 포카혼타스와의 첫 만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린 수많은 야만인들의 생활을 개선해 줬어요.” 존 맷클리프 제독은 인디언과 전투를 앞두고 “그런 야만인은 씨를 말려야 해.” 대사를 종합해 보면 서양인은 인디언을 ‘잔인하고 포악한 야만인이며 방해가 된다면 씨를 말려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인디언은 서양인을 어떻게 인식할까? 비교적으로 많진 않지만 인디언 주술사에 의한 점괘에 꽤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우리와 다릅니다. 몸에서 빛이 나는 이 짐승은 불과 천둥이 뿜어져 나오는 무기를 갖고 있어요. 이들은 굶주린 늑대처럼 땅을 갈취하며 이들이 가는 길엔 모든 게 황폐해 집니다.” 또한 전투를 앞둔 의식에서 인디언들은 노래를 부른다. “이것이 우리가 걱정하던 일 백색 얼굴은 악마다. 놈들이 느끼는 건 탐욕 뿐. 희뿌연 살갖 아래엔 공허함만이 들어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
    인문/어학| 2010.11.02| 7페이지| 1,000원| 조회(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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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로학의 특징과 현대적 의의
    황로학(黃老學)목차Ⅰ 황로학과 그 등장배경Ⅱ 황로학파의 시대적 문제의식과 해결방안1. 시대적 문제의식2. 해결방안Ⅲ 황로학의 변화양상1. 전기 황로학의 외적지향-무위정치론2. 후기의 내적모색-양생론Ⅳ 황로학의 의의Ⅴ 황로학의 현대적 의의Ⅰ 황로학과 그 등장배경진 제국이 강압 통치로 인해 3대 15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중국 천하가 다시 천하 대란의 혼란기에 진입하게 되자, 그 뒤를 이어 한나라가 다시 천하 통일의 대업을 계승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중국 천하는 진한대에 이르러 최초의 통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통일은 이후 문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화폐의 통일 등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는 사회? 문화? 경제의 통일 및 사상의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도가 사상도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선진 시대의 도가 사상은 노자와 장자로 대표된다. 노자가 사상을 창시했다면 장자는 대체로 노자 사상을 충실하게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장의 선진 도가 사상은 대략 전국 말기 이후 새로운 형태로 변화 발전된다. 노자와 장자의 제자 및 그 후학들이 그들 스승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부분적인 변화를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노자와 장자의 근본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의 처한 시대 상황에 합당하게 일부 요소들을 변형 발전시켰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 문헌들로 「장자」중의 이른바 황로 학파의 일부 저작들, 「황제사경黃帝四經」, 「갈관자?冠子」, 「문자文字」, 그리고「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노장 사상을 계승하고 있으나 노장 사상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성들도 지니고 있다. 노자와 장자가 유가 및 법가 등의 제가에 대해 주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면, 이들 황로학 저작들은 제가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그것들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태도를 취하였다. 이들의 학문적 경향을 통상 ‘황로도가’,이하여 어떻게 하나로 통합시킬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학술적으로는 다양한 주의주장을 내세우던 이전의 제자백가를 어떻게 하나의 사상 체계로 융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2. 해결방안① ‘백가쟁명’에서 ‘백가합류’로문제의식에서 보았듯이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황로 학자들은 종합적이고 개방적인 사유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통일시대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도 부합된다. 흔히 선진 시대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이것은 이 시대에 다양한 사상가 혹은 학파들이 상호 경쟁적으로 다투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백가쟁명’의 상황이 전국 말 천하 통일이 무르익을 무렵에는 ‘백가합류百家合流’의 추세로 변모한다. 전국 말에 이르러 시대적 분위기가 통일을 지향하게 되자, 여러 사상 학파들도 상호 비난이나 배척보다는 상호 융합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국 말에는 이른바 “유가와 묵가를 겸하고 명가와 법가를 합하는” 이른바 ‘잡가雜家’들이 출현한다. 예컨대 순자는 원시 유가를 바탕으로 하여 도가? 법가? 명가? 묵가 등의 제가사상을 겹섭하였으며, 한비韓非는 법가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도가 및 유묵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순자」및 「한비자」이다.그런데 당시 이러한 ‘백가합류’의 실질적 주체는 도가였다. 왜냐하면 도가의 핵심 개념은 ‘도’인데, ‘도’는 모든 사물의 근원 즉 우주 만물의 통일적 존재 근거라는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노자」28장의 ‘박산위기樸散爲器’가 상징하듯이,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다양성인 사물은 모두 최초의 근원자 ‘박’ 혹은 ‘도’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도’는 다양한 현상의 통일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때문에 도가는 그 어떤 학파보다도 제가의 다양한 사상적 요소들을 하나로 융화 종합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도가 문헌 즉 황로학의 저작들로부터 기존의 원시도가와의 명백히 구별되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유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손님이 배를 타고 가다가 강 가운데서 칼을 빠트리자 급히 돛대에 표시를 하고서, 저녁 무렵 배가 강가 얕은 곳에 닿았을 때 그 칼을 찾는 것과 같다. 이런 자는 사물의 이치를 매우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무릇 한 귀퉁이의 자취를 좆기나 할 뿐, 천지에 말미암아 노닐 줄 모르면 그 미혹됨이 그보다 클 수는 없다.선진 시대의 제자백가들은 모두 자기네 사상만이 천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천하를 주류하면서 뭇 제후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유세한 것이나, 상앙이나 한비가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몸을 망친 것들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이 같은 인식에 근거하여 그들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개방적이고 종합적 사유를 전개한다. 이때 ‘백가합류’ 혹은 ‘제가의 종합’에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도가 사상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유가? 법가 등 제가의 장점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또 이를 「회남자」에서 낚시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도道를 낚싯대로, 덕德을 낚싯줄로, 예악禮樂을 낚시바늘로, 인의仁義를 떡밥으로 삼아 강에 던지고 바다를 누빈다면 무수히 많은 만물 중 어느 것인들 낚아 올리지 못하겠는가.낚시에서 가장 근간은 낚싯대와 낚싯줄이다. 또 낚시를 하고자 하면 낚싯대와 낚싯줄 외에도 낚시바늘과 떡밥 등이 필요하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결코 고기를 낚아 올리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세상에서 도와 덕이 근간이 되며, 그와 동시에 예악과 인의와 같은 사회 질서도 아울러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도와 덕은 도가의 기본 요소들이고, 예악과 인의는 유가의 기본 요소들이다. 따라서 이 예문에서 「회남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삶에는 도가적 원리뿐만 아니라 유가적 원리들 또한 불가결한 요소들이며, 이들이 모두 갖추어져야만 ‘대용大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리를 확대하면 중요한 것은 유가뿐만 아니라 법가 등 기타의 사상며, 사事가 도래하면 제어하고 물物이 이르면 반응할 뿐이다”라거나 “군주의 통치술은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며, 고요히 부도하여 법도를 하나로 하여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군주의 무위 통치술을 강조하였다.한편 그들은 이처럼 군주가 무위해야 하는 근거를 원시 도가와 마찬가지로 천지자연에서 찾는다. 인간세의 이상적 통치자는 자연 질서를 본받아야 하며, 그것은 바로 무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씨춘추」에서는 “하늘은 형체가 없으나 만물은 이것으로써 이루어지고, 지극한 정기精氣는 형상이 없으나 만물은 이것으로써 변화된다. 위대한 성인도 일삼는 바가 없으나 뭇 백관은 각자 공능을 다한다. 이것은 이른바 가르침 없는 가르침이며 말없는 다스림이다”라고 말하며, 「회남자」또한 “천하를 일부로 도모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이다. 서리와 눈과 비와 이슬은 만물을 죽이고 살리나, 하늘은 거기에 대해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히려 하늘은 귀하게 여겨진다”라고 말하여 천지자연에 나타나는 제 현상으로부터 무위 정치의 타당성을 논증한다. 요컨대 원시 도가가 자연 법칙에서 인간사의 준칙을 발견했듯이, 황로학자들 역시 존재 법칙(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당위 규범을 이끌어 내었다. 이런 점에서 황로학은 원시 도가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황로학의 무위 사상은 원시 도가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다. 황로 학자들의 ‘무위’개념과 원시 도가의 ‘무위’ 개념 사이에는 그 구체적 내용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원시 도가 중 노자의 무위 사상은 주로 이른바 ‘법자연法自然’으로 규정될 수 있다. 「노자」25장의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에서 보듯이,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연을 본받아 삶을 영위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장자의 무위는 ‘소요逍遙무위’로 규정될 수 있다. 장자는 노자의 ‘법자연’의 무위를 계승하면서도 ‘소요무위’라는 독특한 무위관을 제시하고 결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치에 따른다” 및 “자연의 형세를 밀고 간다”와 같은 말은 ‘법자연’의 ‘무위’를 의미하고, “일을 실행한다” 및 “공업을 세운다”와 같은 말은 인간의 능동적인 행위 즉 ‘유위’를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로학의 ‘무위’는 원시 도가의 무위와 달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②무위정치론황로학의 ‘무위’는 그들의 무위정치론에서 구체적으로 “군주는 무위하고, 신하는 유위한다”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여씨춘추」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찾아 볼 수 있다.옛날의 왕은 그 행하는 바는 적었고 객관적 형세에 따르는 바가 많았다. 따르는 것은 군주의 통치술이고 몸소 행하는 것은 신하의 길이다. 몸소 행하면 어지럽고 따르면 고용하다. 겨울에 따라 추위를 행하고 여름에 따라서 더위를 행한다면 군주는 무엇을 일삼겠는가? 그러므로 군주의 길은 무지無知 무위無爲하여도 신하의 유지有知 유위有爲보다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다이 예문에서 보듯이 군주의 길은 ‘무위’로 규정되고 신하의 길은 ‘유위’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때의 ‘무위’의 방식은 ‘따른다’로 설명된다. 즉, ‘군주는 무위한다’고 할 때의 군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주는 주어진 상황 혹은 자연적 형세를 잘 살펴서 그러한 상황과 형세에 따라서 거기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존재로 설명되고 있다. 다만 여기서 통치 업무의 실질적 담당자는 신하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신하는 군주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몸소 수행하는 자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도를 얻은 군주는 객관적 형세에 따를 뿐 직접 행하지 않으며, 독책할 뿐 일일이 가르치지 않는다.………… 신하는 앞서 먼저 떠벌리지 않고 신하의 일을 빼앗지 않는다”고 한다.2. 후기의 내적모색-양생론한 제국 초기의 휴양생식기와 이른바 ‘문경지치’의 태평세를 거치면서 정권이 안정되고 중앙정부를 위협하는 지방세력들이 약화되자 점차 정책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있다.
    인문/어학| 2010.11.02| 5페이지| 1,000원| 조회(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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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 영유권과 신(新) 한일 어업협정 이 후 우리의 대응
    목 차Ⅰ 서 론 2Ⅱ 고(古)문헌을 통해 본 독도의 영유권21. 한국의 고문헌을 통해 본 독도의 영유권32. 일본의 고문헌을 통해 본 독도의 영유권5Ⅲ 국제법상 인정된 한국의 영토 ‘독도’51.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52.‘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63.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SCAPIN)74.‘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과‘연합국의 구 일본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9Ⅳ 손상된 독도 영유권101. UN해양법협약과 일본의 독도기선 EEZ 획정102. UN해양법협약에 따른 한국의 울릉도기선 EEZ 획정 선포 12Ⅴ 결론13참고문헌15Ⅰ 서론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명백한 대한민국의 ‘고유한 영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나라 일본은 우리 땅 독도에 대한 영토 야욕을 버리지 않고, 백주 대낮에 강도짓을 하듯 아직까지도 독도 넘보기에 여념이 없다. 103년 전 도근현(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편입했다는 억지부터 2008년 ‘다케시마의 날’제정까지 일본의 독도영유권 침탈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도가 한국의 영토라는 데 의심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이 대응이 아닌 논리적으로 어떻게 독도가 우리의 영토인지 아는 사람은 적다. 이런 가운데 국제사회에 독도 영유권문제에 대한 일본의 홍보와 선전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이 방심하는 사이 국제사회는 일본의 편향적인 주장과 논리에 설득될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일찍이 기당 이한기) 선생은 “아무리 명명백백한 자기의 영토라고 하더라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국제법적 주장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영토를 지킬 수 없는 것이 지금의 국제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영토 침탈을 기도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모습이 21세기에 들어서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막연히 우리 땅이라는 안이한 인식만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실제 신(新)한일 어업협정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곧 왜인이 말하는 바의 송도(松島)이다.즉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옛 우산국의 영토인데, 이 중에서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임을 『여지지』라는 지리서를 인용하여 명백히 밝히고 있다.일제가 대한제국의 ‘독도’를 종래 다른 나라가 점유한 형적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1월 28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일본 내각회의 결정을 하고 1906년 3월 말부터는 일본이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침탈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증보문헌비고』를 발간하고 ‘독도’가 ‘무주지’가 아님을 항의했다. 즉 대한제국은 『증보문헌비고』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한국영토임을 기록하여 lf제의 독도 침탈 시도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동시에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이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증명하여 밝힌 것이다.2. 일본의 고문헌을 통해 본 독도의 영유권일본이 현재까지 공개 발표한 고문헌들에는 ‘독도’를 일본영토로 기록한 것이 없다. 도리어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 고문헌들에서 ‘독도’를 모두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조선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다.)1)『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은주시청합기』에 울릉도와 독도가 언급된 본문을 보자.「隱州在北海中故云隱岐島.(은주는 북해에 있어서, 은기도(오키섬)라 불린다.)從是, 南至雲州美穗關三十五里. 辰史至泊州赤(石+奇)浦四十里, 未申至石州溫泉津五十八里, 自子至卯, 無可往地. (여기서 남으로 가면 운주미수관까지 35리, 진사방향으로 박주적기포까지 40리, 미신방향으로 석주온천진까지 58리가 되며, 자방향과 묘방향 사이에는 갈 수 있는 땅이 없다.)戌亥間行二日一夜有松島, 又一日程有竹島. (술방향과 해방향 사이로 이틀낮 하루밤을 가면 송도가 있고 또 하루 낮 길에 죽도가 있다.)俗言磯竹島多竹魚海鹿. (세간에서는 이를 기죽도라고도 하는데, 대나무, 물고기, 해록이 많다.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 엄숙한 의무이다.”항복문서의 서명(1945.9.2): “1947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미국ㆍ중국ㆍ영국의 정부수뇌에 의해 발표되고 그 후 소련에 의해 지지된 선언에 제시한 제조항을 수락한다. … 우리는 이후 일본 정부와 그 승계자가 포츠담선언의 규정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We, … hereby accept the provisions in the declaration issued by the heads of the Governments of the United States, China, and Great Britain 26 July 1945 at Potsdam, and subsequently to by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We hereby undertake for the Emperor,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ir successors to carry out the provisions of the Potsdam Declaration in good faith, …위의 선언과 문서들 중에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연합국이 공동으로 전후처리의 기본방침 내지 방향을 천명한 일방적 (공동)선언이다. 일왕의 무조건항복 선언 역시 대내적으로는 명령이요 지시로서 정부와 군부를 기속할 수는 있지만, 대외적ㆍ국제적으로는 국가방침을 발표한 일방적 선언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내지 신사협정(Gentlemen's Agreement)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의 취지와 내용을 담은 1945년 9월 2일자의 마지막 문서는 그 성질이 앞의 것들과 다르다. 일본의 항복문서는 더글라스 맥아더 연합국최고사령관을 위시한 연합국(전승국) 대표와 일본(패전국) 대표 간에 조인된 쌍무협정이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의 세 문서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지만, 마지막의 항복문서가 법적 구속력을 가짐으로써 명백히 선포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4.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과 ‘연합국의 구 일본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1)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욕1951년 9월 8일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은 “일본국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의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는 SCAPIN 677호와는 달리 독도가 일본의 영유권 포기 대상으로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된 것은 일본 정부가 당시 연합국최고사령부 외교국장 겸 대일 정치고문이었던 윌리엄 시볼드(William Joseph Sebald)를 내세워 집요하게 대미 로비를 한 결과임은 잘 알려져 있다.결과적으로 일본 측은 이 대일평화조약에서 독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사라진 것을 기화로 삼아 다케시마는 일본 영토로 계속 유보되게 되었고, 이로써 한국의 독도 영유권은 부정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대일평화조약에 한국 영토로 명시되지 않은 도서는 곧 일본령이 된다는 논법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주장은 곧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이 ‘망라적 열거주의’(exhaustive enumeration)를 취했다는 것인데, 이는 그 어디에도 법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부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평화조약에서는 일본에 점령당했던(그 결과 한국에 귀속?반환되어야 할) 한반도 근해의 수천 개 섬들의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으므로 대표적(주요)인 도서만 명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만일 일본식의 논리대로라면, 대일평화조약에 이름을 적시하지 않은 수천 개의 한국 섬들은 조약 문면상 명칭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일본 영토라는 것이 되는데, 이 같은 해석이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대일평화조약 제2조 (a)항은 ‘예시적 열거주의’(illustrative enumeration)를 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2) 연합국의 구 일본영토처리에 관한 합의서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은 독도에서 철수하고 독도에 부착한 시설물을 즉각 철수하라”고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성명했으며, 주일본 한국대사를 외무성에 불러 이를 강경하게 요구하였다.일본 국회는 최종적으로 1996년 5월 유엔 해양법협약을 채택하여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설정키로 결정했으며 동해 쪽의 일본 EEZ기점을 ‘독도’로 취하기로 결정하였다.)2. UN협약에 따른 한국의 울릉도기선 EEZ 획정 선포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기선 EEZ를 강력히 부정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독도는 신해양법 121조 3항에 의해서도 EEZ의 기점이 될 수 있으니 독도를 한국 EEZ의 기선으로 취하여 한국 EEZ를 선포할 것을 요구하는 독도학회 등의 건의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를 통해 당국에 전달되었다.한편 대한민국 외무부는 일부 해양법 전문가의 자문에 의거한 것이라고 하면서 독도는 무인도로서 신해양법 '121조 3항'에 의거해 EEZ의 기선이 될 수 없다고 해석되므로 독도 기선을 포기하고 울릉도를 한국 EEZ의 기선으로 선포하자는 안을 제출하였다.당시 최고정책권자는 고민을 했는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일이 천연되다가, 결국 외무부의 안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한국 외무부는 1997년 7월 대한민국의 EEZ 기선을 울릉도로 취하고, 울릉도와 일본 은기도 사이의 중간선을 한·일 EEZ의 획정선으로 제의한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 EEZ의 기선으로 취한다고 발표한지 1년 2개월 후의 일이었다.한국 외무부가 독도 기선을 포기하고 울릉도 기선을 취한 이유는 무엇인가? 외무부 책임자가 이를 설명한 적은 없는 것 같고, 이렇게 되도록 자문한 자문교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첫째는 유엔 신해양법 제121조 3항의 금지조항이 독도 기선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신해양법 제12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제121조섬제도1. 섬이라 함은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밀물일 때에도 수면위에 있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왔다.
    사회과학| 2010.11.02| 15페이지| 1,000원|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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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대 중동 외교- 자원외교를 중심으로
    목차Ⅰ 서론Ⅱ 중동(Middle East)의 일반적 개념과 중요성1. 중동(Middle East)의 일반적 개념2. 중동(Middle East)의 중요성Ⅲ 한국의 대 중동외교의 역사1. 할슈타인 정책 하(下)의 외교2. 석유위기 이 후 외교3. 냉전 이 후 외교Ⅳ 대 중동외교의 중요성-자원외교를 중심으로1. 현대 국제사회에서 에너지 중요성2. 한국의 중동에너지 의존 심화Ⅴ 중동 자원외교의 강화1. 중동 자원 외교 강화 방안Ⅵ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중동은 고대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페르시아 문명의 발상지이고 그리스-로마문명과 중세의 비잔틴문명, 이슬람문명을 활짝 꽃피우게 한 인류문명사의 중심무대이다,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었다. 현대에도 에너지 자원의 중심으로써 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어왔다.역사적으로 한-중동 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1957년 한-터키 국교 수립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대중동 석유외교는 1973년 10월 OPEC 석유장관들이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중동의 석유는 우리에게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외교현안이 되었다.여기서는 한국의 중동외교의 역사와 미래의 중동 자원외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그 강화방안에 대해 모색해보았다.Ⅱ 중동(Middle East)의 일반적 개념과 역사적 배경1. 일반적 개념중동(中東)은 동지중해부터 페르시아 만까지의 영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서아시아로 불리기도 하나, 중동은 북아프리카의 국가들까지도 포함한다. 어디까지가 중동이라는 정확한 경계선은 없지만 중동이라는 말은 보통 근동(近東)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며, 극동(極東)이라는 말과는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다. 중동(Middle East)이라는 용어는 1900년대에 들어서 영국에 의하여 사용되었다.중동 지역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죽 중동 지역은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의 중심지였다. 또한 중동은 세계의 주요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fred Thayer Mahan에 의해 사용됨으로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영국과 러시아 제국이 중앙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불려진 시기이다. Mahan은 이 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중심인 페르시아 만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수에즈 운하와 페르시아만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중동(Middle East)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러한 Mahan의 주장은 영국이 인도를 향한 러시아의 야욕을 저지하고 인도를 통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Mahan은 1902년 9월에 영국의 National Review지에 기고한 '페르시아만과 국제 관계(The Persian Gulf and International Relations)'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중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중동에 속하는 국가로는 이라크, 이란,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예멘,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키프로스,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웨스트 뱅크 ,이집트며 넓게는 아래 국가들도 중동에 포함된다.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리비아, 수단, 모로코, 서사하라, 튀니지, 알제리, 모리타니, 소말리아, 지부티, 에리트레아, 코모로 등이다.)그림1)중동(Middle East) 지도2. 중동(Middle East)의 중요성체질적인 불안전성을 지닌 중동은 '두 위기 지대' 에서 이미 2차대전 후에 8차례에 걸친 분쟁을 경험하고 있다. 두 위기 지대란 폐르시아만과, 수에즈가 있는 곳으로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이며 중동은 전략적 지리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세계강대국들의 세력경쟁의 장이며 아울러 지역 국가 간에도 세력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났다.국제 사회에서 중동?이슬람지역의 중요성은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풍부한 문화유산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세계적인 주요 종교 모두 이 지역에서 발생하여 세계종교의 근원지이며 인류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왔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분단환경에서 한국의 외교방향이 설정되었다.1. 할슈타인 정책 하(下)의 외교1950년대와 1960년대는 한국은 북한과 외교관계를 가지는 국가를 적성국가로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 일변도외교정책인 할슈타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소련과 동구권의 긴밀한 외교관계를 가진 국가는 사회주의 적성국가로 여행까지도 규제하여 왔다.) 이런 할슈타인 정책은 그 당시 한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이 당시 중동의 국가들은 친소국가들로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할슈타인 원칙과 미국의 정책에 따른 친 이스라엘 외교를 펼쳤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갈등관계인 모든 중동국가들은 한국의 친미-이스라엘 정책을 경계해 왔었다. 또한 중동국가들은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동맹의 가입을 반대하였으며 북한을 회원국으로 가입시킨 것이다.물론 이 시기에 이집트(1962년 5월), 요르단(1962년 7월), 모로코(1962년 9월), 이란(1967년), 튀니지(1969년)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는 형식상의 외교관계였으며 실질적인 교류는 힘들었다.2. 석유파동 이 후 외교1973년 일어난 석유파동) 이 벌어지고 한국의 대 중동외교는 비동맹외교수준에서 친 아랍정책으로 전환하는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발전시켰다. 석유를 얻기 위하여 친 아랍정책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중동은 한국의 이익사활지대가 되었다.한국은 1970년도에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11년 뒤인 1981년에 대사급 외교관계로 발전하였다. 1972년에는 걸프국가인 쿠웨이트에 통상대표부를 설치하였으며 1974년에는 카타르?오만, 1976년에는 수단?바레인과 수교하였다.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과는 기존의 외교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양국에 한국대사관을 설치하였다. 1980년 최규하 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방문하며 친 아랍정책인 아랍의 대외를 지지하고 경제협력확대를 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해결국면에 접어들면서 아랍-이스라엘 관계조정을 계속하여 팔레스타인 원조국제회의 에 참여하여 원조를 하고, 이외 중동지역 평화관련 지원에 적극 참여를 하고 있다.경제적으로는 걸프전쟁으로 철수한 국내 건설업계의 재진출로 총 해외건설공사수주의 50%에 달하는 점유율을 보였다.Ⅳ 현대 중동외교의 중요성-자원외교를 중심으로1. 현대국제사회에서 에너지의 중요성국제사회에서 에너지는 이미 안보 차원으로 생각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높아진 상태다. 또한 미래 에너지 확보를 위해 자칫 전쟁으로까지 치달아 에너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은 지배적이다.이렇듯 현재국제사회에서는 에너지 확보의 움직임이 매우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경우 1995년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이후, 1997년까지 15개국 29건의 원유 관련 사업을 획득했다. 중국은 2006년 11월 아프리카 14개국 정상들을 베이징으로 초대하여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베이징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중국이 아프리카의 지지자라고 선언했다. 연 9% 이상의 성장을 하고 있는 중국은 원유의 수요가 급증했고, 그원유 공급지를 아프리카로 결정하여 적극적인 대 아프리카 외교를 추진 중이다.일본 역시 최근 들어 엔화 강세를 발판으로 일본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꾀하기 시작했고, 원유 수입권 확보 및 관련 프로젝트 계약을 잇달아 성사시켰다. 지난 1월 ‘신일본석유’는 파푸아뉴기니와 유전개발 프로젝트 계약을 맺었다. 일본 최대 유전개발 기업인 인펙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호주에서 원유 수입권을 확보했다. 인펙스와 신일본석유는 컨소시엄을 구성, 이라크 남부 유전개발 사업 입찰에 참가하고 있다.한국과 같이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7%에 달하는 국가의 경우 에너지 자원의 확보는 그 나라의 안보에 매우 중요하다.2. 한국의 중동에너지 의존 심화2004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중동지역은 세계 원유매장량의 69.3%, 생산량의 36.2%, 수출량의 44.2%를 차지하고 있고, 구하고 우리나라의 중동으로부터 원유 수입 비율이 82%가 된다는 것은 1973년 1차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원유수입의 다변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구분2**************************72008.4원유수입액(억 달러)213.7191.7231299426559.6603약 270도입물량(백만배럴)859791805830 에너지 수입액945억불(국내 총 수입액의 27%, GDP의 10%에 해당)세계 5위 원유 수입국603억불세계 2위의 LNG 수입국127억불에너지 수입의존도97%에너지 소비세계 10위 중국미국한국중동산40%24%80~82%아프리카산30%25%4%Ⅴ 중동 자원 외교의 강화1. 중동 자원 외교 강화 방안1) 비산유 아랍이슬람국가 지원과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최근 한국의 정부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는 2005년에는 7억 5천만 달러, 2006년에는 4억 5천만달러로 2004년 미국 197억달러, 일본 89억달러에 비해 많은 낮은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은 GNI의 0.07%에 불과한 ODA 비율을 2015년에는 0.25%까지 증대할 예정이다.일본이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에 ODA를 집중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이들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은 ODA를 제공함으로써 부드러운 외교를 할 필요가 있다.석유를 갖지 못하는 아랍-아프리카 국가들에 ODA 제공을 통해 석유를 가진 아랍-아프리카 국가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다.또한 세계화, 지구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에너지 수요를 예측하고 공동 대처하기 위한 정책공조 체제를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특히 한-중-일은 석유에너지가 절대 부족한 석유에너지 대소비국이다. 이들 나라가 공조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2)문화외교의 증대문화외교, 즉 부드러운 외교를 통한 한-중동 석유 부국 간 선린관계 구축은 석유외교에도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외교는 상호의존성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
    사회과학| 2010.11.02| 8페이지| 1,000원| 조회(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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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신민족주의-공자재조명과 80후(바링허우)세대를 중심으로
    목차Ⅰ 서론1. 연구목적2. 연구방법Ⅱ 중국 외교 정책의 변화1. 냉전시기와 반패권외교2. 개혁개방정책과 도광양회(韜光養晦)3. 중국위협론과 화평굴기(和平?起)Ⅲ 21C 공자의 부활1. 중국 정부의 ‘공자’ 재조명2. 새로운 통치이념으로써의 유교3. 유교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Ⅳ 중국의 신인류. ‘바링허우’1. 바링허우는 누구인가?2. 신민족주의의 핵심. 바링허우3. 바링허우 무기, 인터넷Ⅴ 중화사상과 동북공정, 그리고 우리의 대처1. 점점 길어지고 있는 만리장성2. 중화주의차원에서 살펴본 동북공정3. 동북공정의 숨겨진 내막과 추진 의도4. 우리의 대응Ⅵ 결론※참고문헌Ⅰ 서론1. 연구목적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당 11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이 개혁개방정책을 표명한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성장은 실로 엄청나다. 중국의 GDP는 개혁개방 당시 1,473억 달러로 전 세계에 1.8%에 불과했던 것이 2007년에는 전 세계 GDP의 6%에 달하는 3조 2,801억 달러에 육박했다.) 이는 독일을 제치고 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이 GDP규모 세계 3위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2010년에는 일본을 능가하고 2050년에는 미국을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의 경제력 성장은 단순히 경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 라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과 역할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잘 증명하는 것이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개념으로 미국과 중국 중심의 국제사회의 재편을 이야기한 ‘G2시대’ 혹은 ‘CHIAMERICA'다. 또한 이보다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독주가 끝나고 중국의 시대, 즉 ‘팍스시니카’) 시대가 도래 한다고 이야기 될 정도로 중국의 성장은 무섭다.이런 움직임은 단순히 국제사회 논의로 끝나지 않고 있다. 바로 중국의 대외정책의 변화 및 국내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과거 개혁개방의 시작된 이 후 중국의 외교정책은 빛을 감추고 밖에 비치 표방하면서 반소-반미 국제 통일전선을 구축해 보려고 하였다.)중간지대론이란 모택동이 이야기한 것으로 미국이 지배하는 제 1세계와 소련이 지배하는 제 2세계 이외에 제 3세계라는 방대한 중간지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중간지대에는 미-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수많은 3세계 국가들이 있고 중국이 이들과 연대하여 미-소 제국주의에 저항해 통일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반소-반미 국제 통일전선 정책은 취약한 점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중국과 제 3세계 국가들이 반패권주의를 강조하더라도 미-소의 위협으로부터 중국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며, 국내 발전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적기 때문이다.따라서 중국은 1969년 소련과의 국경충돌을 경험하면서 소련의 위협과 팽창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베트남전 패배로 위기에 몰린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안보를 모색하려고 하였다.)즉, 냉전 시기 중국은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미-소 양국 중 어디가 중국 안보에 위협적인가 하는 판단에 따라 외교정책을 펼쳐왔다.2. 개혁개방정책과 도광양회(韜光養晦)1970년대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실패와 모택동의 사망으로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한다. 바로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3중전회에서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개혁?개방파들은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가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고 최대의 목표라고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상해방과 체제개혁, 그리고 문호대개방의 역사적 노선전환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모든 역량을 경제발전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따라서 중국의 대외정책도 지속적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평화적인 국제환경을 조성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과의 교역을 통해 선진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여 중국 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려는데 초점을 두었다.또한 국내 정치 변화와 더불어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의 등장으로 냉전시대의 양극화된 질서가 와해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중국은 소련과 1989년 중?소 국교 정상화를 실현함으로, 베이징에서 200명이 참가한 대규모 공자 토론회도 열렸다. 이에 앞서 중국사회과학원은 2005년 6월 유교주의 연구소인 유교연구중심을 설립했다. 3개월 뒤 인민대는 공자 사상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국학원을 세웠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공자 사상이 국학으로 격상된 순간이다. 인민대는 1937년 세워진 이 후 사회주의 이념을 연구하는 학문적 메카였다. 공자의 이름을 빌린 연구소나 학과는 이후 2007년까지 18개 대학에서 개설됐다.중국 사람들이 『논어』등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유교유행도 조성됐다. 중국 중앙방송은 2006년 10월 프로그램에서 베이징사범대 위단 교수를 초빙해 『논어』강의를 방송했다. 위단 교수의 강의는 프로그램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화제를 뿌렸다. 또 방송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위단 교수의 강의 내용을 묶은 책 『논어심득論語心得』은 1개월 뒤 초판이 발매된 이후 무려 40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는 베스트셀러로 우뚝 섰다.)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제작된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포스터탄신 2천560주년을 맞은 2009년에는 공자(孔子)를 재조명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중국에서 잇따라 제작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기념해 제작되는 한강 감독의 TV드라마 '공자'는 제작비가 6천만 위안(100억여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1억 위안(18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 '공자' 역시 제작되었다.중국사회 내에서의 공자의 화려한 부활에 가장 흥미로운 점은 중심에 공산당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이 공자를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후 '반동'으로 치부했고 1960-70년대 문화혁명 당시 봉건주의 사상의 대표 인물로 낙인찍어 사당까지 폐쇄하였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에 의해 버려졌던 공자를 다시 부활시킨 이유는 무엇인가?2. 새로운 통치이념으로서의 유교영화 ‘춘추전국시대:공자’를 보면 노(魯)나라를 떠나 천하 유랑을 시작한 공자가 위나라 영공(靈公)을 새롭게 부상하는 이유가 단지 외동으로 태어나 ‘소황제’, ‘소공주’라고 불렸기 때문이 아니다. 바링허우 세대는 그 전 세대들과 확실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중요하다는 것이다.첫 번째, 바링허우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된 이 후 태어난 첫 세대라는 점이다. 따라서 급속한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며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모르는 첫 세대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은 그들의 소비문화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LG경제 연구소에서 연구한 바에 따르면 “대학생과 직장 초년생으로 구성된 바링허우 세대들은 이미 중국에서 왕성한 소비 집단으로 떠올랐으며 이들은 머지않아 중국의 핵심적인 소비계층으로 떠올라 중국의 거대한 소비시장을 이끌 것 이다”라고 전망했다.두 번째, 그들은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다양한 세계적인 문화를 접했으며 유학 경험으로 외국 문물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따라서 이들은 기성세대들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생활방식을 가지고 중국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심계층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문학과 경제 분야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문학에서 궈징밍(郭敬明), 리 샤샤(李)로 대표되는 80후 작가들은 기존 전통 작가들과는 달리 대담함과 솔직함 그리고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기성 문단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또한 경제분야에서도 80후의 활약은 대단하다. 대표적으로 다이즈캉(戴志康) 캉성스지(康盛世?) CEO, 리상(李想) PCPOP CEO를 들 수 있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바링허우 CEO들이 있는데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모두 인터넷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세 번째, 바링허우는 사회참여의식과 비판의식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중국의 기성세대들은 이들이 외동으로 자랐기 때문에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라고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2008년 쓰촨성 대지진과 베이징 올림픽에서 젊은 청년들이 보여준 봉사의식은 이런 걱정을 한 번에 날려주었다. 두 사건의 중심에는 모두 바링허우가 있었다. 또한 이들은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건 등을 통해 비판의식을 상실한 기 바링허우들의 목소리가 얼만큼의 영향력이 있는 것일까? 최근 중국전매대학 인터넷여론연구소가 '2009년 중국 인터넷여론 지수보고'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사회비리 폭로와 여론 형성 등 측면에서 인터넷의 영향력이 이미 확대됐으며 앞으로도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실제 지난해 2월에는 윈난(雲南)성 성도 쿤밍(昆明) 교도소에서 재소자의 의문사 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술래잡기'를 하다 사고로 숨졌다고 발표해 네티즌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술래잡기'란 말은 '얼토당토않은 오리발'을 의미하는 유행어로 삽시간에 퍼졌으며 법원은 결국 진상조사에 나서 그가 구치소 수감자에게 맞아 사망한 사실을 밝혀냈다.이렇듯 4억명에 육박하는 중국의 네티즌은 특히 부패사건, 부동산문제, 취업, 호적, 양로보험, 식품안전, 의료보험, 교통안전 등에 관심이 많아 자신의 블로그와 게시판 등에 각종 폭로성 글과 의견을 올려 영향력을 높이고 있다.이와 더불어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앞두고 네티즌과 온라인 대화를 하고 전인대 대표단이 수차례 네티즌과 만나는 등 인터넷 정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네티즌의 주를 이루고 있는 바링허우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앞으로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발휘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Ⅴ 중화사상과 동북공정, 그리고 우리의 대처앞에서 살펴 본 내용과 같이 중국 내부에서는 공자 재조명과 바링허우를 통해 강력한 민족주의적 중화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는 현재 중국이 취하고 있는 외교정책인 ‘화평굴기’를 뛰어 넘어 강력한 자국 이익 중심의 외교가 추진 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려주는 것이다.결국 중국의 이런 민족주의적 중화주의 움직임은 그 주변나라, 그 중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대한민국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벌어진 ‘동북공정’ 역시 이런 맥락으로서 이해하고 우리 나름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1. 점점 길어지고 있는 만리장성2009년 늘어난 만리장성 지도중국 국가 문물국과 국가 측량국은 지난진다.
    사회과학| 2010.11.02| 15페이지| 1,500원| 조회(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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