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mmarby Sjostad하마비 허스타드에서는 자연환경 요소인 수변과 녹지로의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계획하였습니다 .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 지구 중심에 수변 공간이 있고 , 단지와 단지 사이에 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 기존 자연자원을 철저히 보존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 공장들이 빠져나간 대지에 녹지를 조성하고 이 녹지들을 동부의 기존 산림지역까지 연결하면서 체계적인 녹지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하마비 시에서의 물의 사용은 지역 내 처리를 원칙으로 합니다 . 빗물은 대지로 스며들거나 인근 수로로 유입하고 빗물수로는 인근 스요스타스라테른 공원으로 흘러 작은 도랑들을 통해 주변 빌딩과 안뜰로 유입됩니다 . 화장실 하수만이 하수처리장으로 유입돼 처리되고 있으며 , 대부분 자체정화시설에서 처리된 후 인근 바다로 유입됩니다 . 도시 안에 해수를 정화한 물을 이용하여 비오톱 ( 생물 서식 공간 ) 을 형성하였습니다 . 이런 하마비시의 녹지체계와 수체계는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 하마비시가 멋진 경관을 가지게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차량 보유를 가구당 1.5 대로 제한하고 , 바이오 연료를 이용하는 버스가 다니고 바이오 연료사용 차량을 이용한 car pool 제도를 통해 에너지 사용 및 CO2 배출을 억제합니다 . 지역주민 및 근로자가 경량철도 , 페리 및 카풀 등 대중 교통 수단을 80% 까지 이용토록 교통정책을 추진 중입니다 . 하마비 허스타드의 남쪽과 북쪽 사이를 운행하는 페리는 스톡홀름시에서 운영하며 무료로 제공됩니다 . 하마비시에서는 자전거 사용도 장려합니다 . 자전거 전용 도로 및 자전거 보관소 등 자전거 이용과 관련한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 있는 것이 하마비시의 또 다른 장점입니다 . 가소성 폐기물은 소각 처리하며 , 여타 폐기물은 바이오 가스 등 바이오 연료로 전환하여 , 지역난방 및 전력생산에 사용됩니다 . 또 , 처리된 폐수로부터 획득한 열은 지역 냉난방으로 전환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파트 외부에 부착된 집광판을 통해 수집한 태양에너지는 전력 생산 및 온수 생산에 사용됩니다 . 그 덕분에 도시 내에 사용되는 에너지의 20% 를 태양열 에너지를 통해 조달하고 있습니다 . 또한 , 도시내 모든 주택의 단열효과의 효율성을 위해 집 내부의 벽두께 , 유리 재질 등에 대한 기준도 세세하게 마련해 엄격히 규제하고 있습니다 . 하마비 시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에너지 , 폐기물 , 물순환 과정 전반에 대한 자체 자원순환모델을 만들고 , 직접 건축물을 통해 실험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거주민들의 만족도 평가와 철저한 비용 효과 분석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발전을 해 왔다는 점입니다 . 그리고 환경 인포메이션센터를 설치하여 환경에 대한 교육 및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 하마비시 홈페이지에서는 하마비시의 환경과 관련한 주요 지점이 표시된 환경지도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 여러 나라에서 하마비시를 지속가능한 도시의 모범답안으로 보고 있는데 , 우리나라도 새만금지구 개발 사업 중 22% 를 차지하는 생태환경용지 조성계획에서 하마비 허스타드의 수변공간을 벤치마킹 사례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 하마비시의 에너지 절감 기본 목표치는 50% 이며 , 현재 30~40% 수준이어 점진적으로 감축을 진행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 현재도 계속적으로 개발이 진행중이며 , 전체 완성은 2017 년 예정입니다 . 더 발전할 하마비시의 모습과 우리도 이런 도시를 갖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nameOfApplication=Show}
고대 4대 문명과 . 7대 불가사의 .4대 문명 목차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정리4대 문명의 위치이 집 트 문 명나일 강 하류의 비옥한 토지에서 이집트 문명은 이루졌다. 이집트는 지리적 위치가 폐쇄적이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비해 정치·문화적 색채가 단조롭다. 이집트는 사막과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외부의 침입없이 2000년 동안 고유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헤로도투스'의 말처럼 '나일 강의 선물'이라 할 만큼 나일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집트는 나일강과 주변의 기름진 토양을 바탕으로 일찍 농경이 발달하였다.이 집 트 문 명해마다 격게 되는 나일강의 범람은 상류의 비옥한 퇴적물을 운반하는 작용을 하였으므로 나일 강변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나일 강의 홍수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진흙 속에 묻어 버렸다. 이런 홍수는 규칙적으로 일어나서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농사의 시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 이런 나일 강의 범람 때문에 태양력·기하학·건축술·천문학이 발달.이 집 트 문 명함 족(Ham)이 40여 개의 도시 국가(Nomos)를 세웠다가 (B.C 4000년경), B.C 3500 년 경에는 상·하 두 왕국으로 통합되었고, B.C 3000년경에는 통일 왕국이 성립되었다. 통일 왕조 수립 후 26왕조가 흥망하였는데, 크게 대략 3개의 시대로 나눌 수 있다. B.C 1700년경 중왕국 시대에 힉소소의 지배를 한 때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몰아내고 시리아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B.C 525년에 페르시아의 의해 망하였다.이 집 트 문 명★ 구왕국 (기원전 2900~2270) ☞ 구왕국은 제1왕조로부터 제 6 왕조까지 이어짐. ☞ 문화가 싹틀 전조의 시기이고 문화의 기초적형태인 종교와 문자와 예술의 특색이 그 성격을 갖추던 시기. ★ 제1과도기 (기원전 2270~2100) ☞ 구왕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됨. ☞ 봉건제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이고 , 멤피스에 왕의 권위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시기라고 볼수 있음. 물상은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는 파라오로 구현된 군주의 완전한 이미지. ☞ 스핑크스는 '교살자'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이며 원래 이집트어로는 '살아 있는 형상'이라는 의미를 가짐. ☞ 이집트를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는 고대인들이 꿈꾸던 피조물중 가장 힘세고 완벽한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구성된 신화적인 동물을 숭배하였는데, 이 중에서 기자에 위치한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사람의 얼굴이 결합된 형태로 남아 있다.이 집 트 문 명미이라 ☞ 이집트 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분리되어 이 세상을 돌아와 자신의 몸에 다시 찾아온다고 믿었음. ☞ 죽은 후에도 영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몸을 썩지 않게 보존하고자 시체를 미아라로 만듬. ☞ 몸은 천연 방부 소금으로 썩지 않도록 처리한 후 붕대를 감아 보존하였으며, 영혼이 되돌아왔을 때 자기 몸을 못 알아볼까 봐 얼굴의 모습을 담은 마스크를 미이라 머리에 꼭 씌워 놓음.이 집 트 문 명사회 ☞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라 불리웠고, 태양의 신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토목 사업에 농민과 노예를 동원하였음. 귀족들은 소수의 관료와 신관으로서 왕에게서 넓은 토지를 받아 그 세력이 강해하였고, 평민의 대부분은 부자유 농민이며 공납과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음. 종교 ☞ 이집트는 오리엔트의 다른 나라처럼 다신교를 믿었으며 신들의 수는 매우 많음. 이 중 태양신인 라(Ra)와 나일 강, 저승의 신인 오시리스가 가장 숭배됨.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와 세트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신화를 통하여 이집트인의 강한 내세의 신앙과 부활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가 있음. ☞ 이집트인들은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영혼 불멸을 믿어 미이라를 만들어 시체를 보존했고, '사자의 서'를 기록하여 내세의 심판에 대비하였다.이 집 트 문 명미술 ☞ 파라미드나 신전의 축조 및 그 장식이 미술의 주류를 이룸. 특히 열주(列柱) 양식은 조각, 그림, 공예품과 함께 솜씨가 뛰어남. 과학 기술 ☞ 소포타미아 문명함무라비 법전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 왕(재위 BC 1792∼BC 1750)이 그의 만년인 BC 1750년경 제정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성문법 복수주의 이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 후세의 쐐기문자법(바빌론법 ·아시리아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높이 2.25m의 원기둥 형의 섬록암에 쐐기 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기둥 상부에는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을 받는 장면이 새겨져 있음. 그 밑에는 282조로 된 법전이 잘 정비된 체제를 갖추어 새겨져 있는데, 수메르 고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며, 이슬람의 율법에 큰 영향을 끼친 듯함.메소포타미아 문명쐐기문자 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설형 문자)를 사용. 이것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뾰족한 갈대 펜으로 글씨를 새기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자인데 표음 문자로 발전.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다.메소포타미아 문명사회 ☞ 메소포타미아는 셈(Sem)족의 문명. 특히, 수메르 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다. 종교 ☞ 현세적 다신교로서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음. 점성술도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 문학 ☞ 수메르인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메소포타미아 문명과학 ☞ 점성술, 천문학, 태음력, 7요제, 60진법, 24시간, 360도 등이 나타났다. 문자 ☞ 수메르 인은 쐐기 문자를 사용. 이것은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표음 문자로 발전.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됨. 건축 ☞ 궁전과 신전 건축에 아치(arch)와 둥근 천장(dome)이 사용. 이 지역은 돌이 매우 귀했음.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건축하였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여 물을 끌어오기 위한 커다란 수로도 건설.인 더 스 문 명인더스문명의 역사 B.C.2500 ∼ B.C.1변화하여, 곡물 경작에 이상이 생겨 멸망했다는 설. ③ 외적의 침입. 가장 유력한 설. 실제로 아리아족이 인도에 들어온 시기와 인더스 문명이 멸망한 시기가 비슷해서 신빙성을 인정 받은 설. 하지만 외적의 침입으로 그 큰 문명이 한 번에 망했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이고, 학자에 따라서는 인더스 문명의 멸망시기와 아리아족이 인도에 들어온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함.인 더 스 문 명④ 황폐화 여름이 지난 10월 말쯤 모헨조다로와 하랍파 그리고 그외의 몇 몇 유적지들을 둘러보면, 거의 사막에 가까울 정도의 황무지임. 강물은 다 말라 비틀어져 있고 기온은 한여름이 아닌데도 50도 안팎임. 현재는 사막이지만, 당시엔 이렇지 않았다는 것. 사막의 확장으로 인해 토지는 황폐화되고, 강물은 마르고, 숲은 사라지고, 날은 더워지고, 농사는 더 이상 지을 수은 없고 , 그들이 가꾸고 꿈꾸던 땅의 풍요로움이 깨지는 날, 그들은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인 더 스 문 명황 하 문 명중국 황하강 중류, 하류 지역에서 발생한 문명. 종래는 문명을 미개의 상대적인 말로 이해하고, 문자의 발명과 도시의 성립 등에 중점을 두어, 황하 문명의 연도도 청동기 시대 이후로 보는 것이 보통. 그러나 문명을 문화의 가치 체계를 떠받치는 물질적·기술적 기초라고 정의할 경우, 황하 문명의 연대 범위는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가 나타난 은나라, 철기가 거의 완전히 보급된 전한시대까지라고 할 수 있음. 양쯔강은 신석기 시대에는 현재보다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소가 산재하여 삼림이 무성한 상태였음. 이에 반하여 황하강 유역은 대륙성 기후로 건조한 데다가 비옥한 황토가 퇴적하여 황토 지대를 형성하였음.황 하 문 명황허강 유역의 신석기 문화는 양사오 문화와 그로부터 발생한 룽산 문화 두가지로 구분됨. 양사오 문화 B.C4000 ∼ B.C 2000년 경이며, 칠무늬 토기를 만들어 썼음. 대표적인 곳이 허난성의 양사오이므로 이 문화를 양사오 문화라 함.(황하였음.세계7대 불가사의 목차쿠푸왕의 대피라밋 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 신전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울솔로스 영묘 로도스 항구의 거상구 7대 불가사의의 위치쿠푸왕의 대피라밋피라미드 건설당시 이집트인은 수레나 말을 이용한 운반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지레나 굴림대를 제외하면 오로지 인력에만 의지하여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수백명의 사람이 채석장에서 움반해온 무거운 석재를 건설현장까지 운반하였다. 어쨋든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조물이 지금부터 4,800년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평균 2.5톤의 돌을 230만개나 250만개 쌓아올리면 그 무게가 엄청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무거운 건조물은 상당히 탄탄한 기초위에 세우지 않으면 세월이 흐르면 토대가 무너지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그 건조물도 붕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800년의 기간동안 장엄함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다. 진정 세기의 신비이며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대 바빌론의 공중정원바벨 공중정원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위대한 군주 네브카드네자르2세의 걸작중 한가지 이다. 공중정원이라고 해서 진짜 하늘에 떠있는 정원이 아니다.다만 평지에 흙을 쌓아 만들어 작은 산모양의 노대와 비슷하게 보이는 이곳에 풀과 꽃, 과일나무등을 많이 심어 놓아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마치 하늘에 떠있는 정원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바벨탑이나 공중정원의 흔적은 볼 수 없지만 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 까지 남아있다올림피아의 제우스 상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에는 뛰어난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많았었다.아테네 화가 카르미데스의 아들인 페이디아스도 그중 한 사람이다.기원전 490년경에 태어난 그는 그리스 조각의 고전기를 대표하는 거장으로서, 그가 조각한 것이라고 입증할 만한 작품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장식된 조각들을 통해서 그 작풍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는 아테네의 파르테노스상(象)과 올림피아의제우}
종묘의 건축적의미와 가치종묘의 건축적 의미와 가치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난 직접 답사를 가는 것 만큼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없다고 본다. 종묘의 메인 건물인 정전과 영녕전을 보고 제일 처음 느낀 첫 번째는 무언가.. 같은 형식의 반복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가 조사해본 결과 경복궁의 근정전 같은 건축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묘는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제례건축의 곳이다. 이 곳은 모신 신위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건물에 계속하여 증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실제로 몇 차례에 걸쳐 기존의 건축측면에 이어 증축하였다. 때문에 그 시대의 다른 건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공간형식을 갖게 된 것 같다. 또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중국에서는 조선과는 다르게 또 다른 신위를 모시게 위한 방법으로 별묘제라는 방식을 택하였다. 별묘제란 완성된 건축의 형식으로 종묘를 건축하고 다른 신위를 모시기 위해서 증축이 아닌 다른 곳에 또 다른 건축을 하는 형식이다. 기본적으로 종묘는 한국 건축의 일반적 특성인 비대칭적인 대칭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배치는 개별적으로 대칭을 벗어난 구성이자만 전체적으로는 대칭에 기분을 두고 있다. 전전 동서월량을 보면, 전체적으로 남북축을 중심으로 대칭적 배치를 하고 있다. 동월랑은 틔여져 있으나 서월랑은 벽으로 막혀 있어 대칭 속의 비대칭을 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정전과 영녕전 건물의 기단과 처마와 지붕은 위계에 따라 높이를 달리한다. 신실과 좌우 협실, 그리고 동서 월랑 지붕, 처마와 기단 윗면의 높이는 신실, 협실, 월랑의 순으로 낮아져 있고, 기둥 지름과 높이도 마찬가지로 신실, 협실, 월랑으로 가면서 작고 낮게 되어 있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이며 장식 없이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만 설정되어 있고 지상으로부터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이 다르게 하여 감실이 있는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하여 준다. ↖정전두 번째로는 정전과 영녕전이 서로 크기만 다른 같은 스타일의 건물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종묘에 답사를 가서 정전을 먼저 보고 다른 곳을 둘러보다가 영녕전을 발견하였는데, 정전과 똑같이 생겨서 처음에는 길을 잘못 찾아온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였다. 다시 한번 전체적으로 훑어 보고 크기와 주변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야 이곳이 정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은 분명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느낌면에서 무언가 다른 것 같았다. 정전의 경우는 보자 마자 무언가 웅장하고, 영녕전의 경우에는 날렵한 느낌을 주었다. 정전의 지붕은 한 개의 큰 지붕 아래 방들이 모여있는 형식이고 영녕전은 중심부에서부터 측면부로 가면서 점점 낮아지는 지붕 아래 방들이 모여있었다. 정전의 구역과 영녕전의 구역이 약간 다른점이 있다면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다는 것이다. 두 건물 주변을 두르고 있는 담장들은 건물이 가벼워 보이지 않고 장엄하고 위엄있게 해준다. 건물을 벗어나면 그 주변에는 화초나 나무들이 많이 구성되어 있는데 정작 정전과 영녕전 안에는 화초나 나무가 없었다. 그 이유는 신위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건물이 들어선 담 안에는 나무나 화초를 일체 심지 않은 반면, 그 주변에는 특별히 선택된 나무들만 심었다. 시선이 밖으로 트이지 않게 앞으로는 가산을 만들고, 사방 주변으로는 울창하나 유현한 숲을 조성하여, 묘정에서만 공간이 하늘로 통하게 하여 하늘이 내린 기운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거기에 신기가 충만하게 머물도록 하였다. 묘정 월대에 서면 마치 구름 위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자아내는 것도 여기에 이러한 영적인 힘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영녕전세 번째로는 종묘의 정문을 지나자 마자 내 눈앞에 놓여져 있는 어로가 내 눈을 사로 잡았다. 어로 위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 위를 걷지는 못하였지만 아무 것도 없는 일단 길보다 더 격식이 있어 보였다. 종묘건축의 중심인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진 감실까지 제례자가 접근하기 위해서는 외부->담->정문->어로->어숙실->동문->묘정->툇간->실내 어둠의 공간->감실 등 여러 겹의 통로와 영역을 지나 도달해야 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이 곳에 가려고 제관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도, 돌아가서도 안 된다. 이를 반영하듯 어로에는 거친 박석을 깔아 느리게 걷도록 유도하였고, 종묘 정문에서 시작되어 어숙실, 정전, 영녕전까지 이르는 어로는 지름길로 가듯, 곧바로 내닫는 듯, 담과 평행을 이루지 않아 긴장감을 이루는 배치를 형성 하고 있다.마지막으로 종묘를 답사하고 여러 자료를 조사하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종묘의 모든 건물 위에는 하얀 돌이 올라가 있고 그 하얀 돌 위에는 자그마한 석상들이 올라가 있는데 석상의 형식은 정전과 영녕전 서로 달랐다. 석상의 형식이 다른 이유와 하얀 돌의 명칭과 석상의 명칭을 알아내지 못한 점이 정말 아쉬웠고 학교에 아는 선배 및 동기들에게서도 알아낼 수없어서 교수님께 직접 전화를 해서 여쭤보려 했으나 교수님의 번호를 알아내지 못하여 결국 이렇게 레포트를 끝내게 되어 너무 아쉬웠다. 또 한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하여 머리에 건축적인 지식도 많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엄청난 건축 양식들을 보고서 이건 어떤 형식이고 이건 명칭이 무엇이고 한번에 딱딱 튀어나오지 않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런 말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보고 있어도 지식이 없어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지금부터라도 채워나가고 싶다는 강한 목표를 세우는 하나의 큰 동기 부여가 된 좋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