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중세 전성기라고 불리는 1050년부터 1300년까지의 시기는 서유럽이 처음으로 그 동안의 후진성에서 탈피하여 세계 최대 세력 중의 하나로 부상하는 시대였다. 1050년경의 서유럽은 아직 모든 면에서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세계보다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1300년경에 이르러 서유럽은 두 경쟁 세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전 세계를 놓고 볼 때, 오직 중국만이 정치?경제?문화적인 면에서 서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을 뿐이다.)그렇다면 유럽 중세의 급격한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중세 전성기에 유럽이 크게 진보하게 된 이유는 많지만, 중세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몇 가지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 하나가 유럽이 900년에서 1050년까지 이미 발전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바이킹?헝가리인?무슬림의 파괴적인 침공이 그친 뒤, 그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외적의 침입 위협이 줄어들자, 서유럽은 전보다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됐으며 경제생활의 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자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달성되었고 이것이 최초의 “농업혁명”이라는 것을 가져왔다. 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발전되니 그 결과 풍부한 식량과 경제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발전을 위한 걸음마가 시작되었다. 급속한 인구증가와 도시들이 크게 증가하자 이를 “도시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시에 서유럽의 정치도 좀 더 안정을 찾게 되어 오늘날의 근대 국민 국가의 바탕이 되었다.중세 상업의 부흥의 계기에는 유리한 여건으로 인한 농업혁명의 전제 하에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농업혁명에는 농업기술, 경작지역 이동, 기후조건, 삼포제 등의 실시가 포함된다. 중세 상업의 발판을 마련한 이것들에 대해 조사하여 보도록 하고, 중세 상업이 도시의 발생과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또한 그 의의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겠다.본론1050년 이전의 농업은 서유럽의 농민들이 호미조차 가지고 있지 못한 형편 이였다. 카롤링 왕조 시대에는 농업 된 것이다.이러한 중세 농업 혁명의 전제 조건을 들어보자면 첫째, 경작 지역의 이동과 둘째, 한층 개선된 기후조건, 셋째, 유리한 여건과 농업 기술의 결합과 기술의 혁신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서술한 농업혁명의 전제조건은 대부분 11세기 중반 이전에 나타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 문명의 중심이 지중해로부터 북대서양 지역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인데, 남부 잉글랜드에서 우랄 산맥에 이르는 북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면적이 광대하며 습하고 매우 비옥한 충적 평야였다. 로마인들은 이 땅의 경작을 위한 적합한 농기구나 농사법을 사용하지 못하였던 터라 북유럽의 경작에 손을 대지 않고 지역의 일부만을 다스렸다. 후에 카롤링 왕조시대 즈음하여 큰 관심이 모아졌지만 카롤링 시대의 평화기간이 길지 않아서 발전을 지속시킬 수 없게 되었다.또 다른 전제 조건으로는 기후의 개선을 들 수 있다. 건조한 기후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북유럽에서는 매우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기후사학자들에 의하면 대략 700~1200년경 사이에 서유럽의 기후가 “성장 최적 조건”을 유지했다는 것으로 평균 기온이 이전보다 따뜻해졌다는 사실을 충분한 근거로 확신하고 있다.마지막 조건인 유리한 여건과 농업기술의 결합을 들 수 있다. 외적의 침입이 줄어들고 좋은 기후가 계속적으로 이어짐에 따라 농업 확대를 하여 조금 더 이윤을 추구하고 싶은 영주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더 큰 투자를 위한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문에 농기구를 장만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농업기술의 개발에서 중요했던 것은 쟁기의 사용인데, 로마시대의 부드러운 대지에서는 가벼운 쟁기가 사용되었지만 습한 대서양의 토지를 갈기 위해서는 무거운 쟁기가 필요했다.무거운 쟁기가 개발되면서 작업이 불가능했던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등 큰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무거운 쟁기가 없었다면 북유럽의 집약농업과 그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묻혀버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무거운 쟁거에 비하면 삼포제를 도입한 중세는 휴한지를 1/3로 줄였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기술발전에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이밖에도 헝겊을 덧댄 어깨띠가 처음 사용되어 말을 힘들여 끌어도 숨쉬는 것에 지장이 없게 되었다. 또한 편자와 멍에가 만들어져 여러 마리의 말들을 한꺼번에 끌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신속한 작업과 더 오랜 시간동안 일 할 수 있게 되었다.이러한 모든 변화의 결과로 농업 생산량이 엄청나게 증대했다. 경작 면적이 넓어지면서 분명히 더 많은 농작물이 재배되었지만 식량 증산은 더욱 효율적인 농경 방법이 도입됨으로써 극대화 되었다. 그리고 곡물이 전보다 더 많이 수확되었지만 도정 시간은 전보다 훨씬 단축되었다. 방아는 40명의 노동력에 해당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규칙적으로 안정된 식량 공급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농업 혁명의 결과로 유럽 역사의 발전에 지대한 결과를 초래했다. 먼저 그것은 좀 더 많은 토지가 곡물 재배 이외의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중세 전성기가 진행되면서 농업의 다양화와 전문화가 크게 이루어졌다. 목양을 위해, 포도?면화재배를 위해 광대한 토지가 목적마다 다르게 나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은 도시의 성장을 자극하고 지원했다. 농업의 경기체제의 활성화로 인구의 급속한 증가를 끌어내어 도시의 성장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게끔 하였다.중세 상업의 부흥 원인에 대해서 너무 길게 서술하지 않았나 싶지만 상업의 부흥의 원인을 자세히 알고가야 부흥 이후의 배경상황도 이어지기 때문에 필자는 최대한 요약적으로 설명하여 보았다. 즉, 농업혁명의 결과로 인구가 증가하고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농기구가 발달하자, 모든 사람들이 농업에만 종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고 일부가 도시로 이주하여 새로운 생활방식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인과관계에 의해 끌고 오고 싶었던 것이다.혁명의 그 밖에 결과로는 영주들의 수입을 증대시켜 귀족계급의 화려하수 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우를 받으며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집을 소유하지도 못했으며 결혼을 하여 자식을 가질 순 있지만 오히려 악조건을 계승시키는 쪽에서 보면 실로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이러한 비참한 생활조건에 식단이 개선되어 건강을 찾게 되었으며 또한 영주들은 농노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유리한 조건을 제시해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농노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었다. 자유노동을 이용하는 새로운 지역에는 도망 온 농노 -1년하고 하루가 지나면 농노는 그의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는 농노가 늘어나게 되었다.- 들이 몰려들었고, 그곳은 농민들에게 부역 대신 고정된 지대를 요구하는 새로운 제도의 시범 지역이 되었다. 농도들은 자신들의 잉여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을 만큼의 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이러한 결과들로 인해 13세기를 지나면서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노제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생산하는 자유농민이 되었다.농업혁명과 농노해방, 그리고 세련된 귀족 생활은 상업의 부활과 도시의 발생에 깊은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서 부활된 상업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방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교역이었다.초기 농노와 자유농민은 여분의 곡물이나 달걀 꾸러미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상품이 점점 전문화되면서 포도주와 면직물 등을 배에 실어 보내게 되었다. 육상이나 수송 또한 운송수단으로 필요했는데 도로 건설 기술의 향상과 말?노새의 이용으로 수월하게 처리될 수 있었다.이들은 지중해를 근거리 및 원격지 해상 무역의 통로로서 폭넓게 이용했다. 1050년~1300년 사이에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의 상당 부분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무슬림이 패배하면서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한 과거 비잔틴에 속했던 해역을 독점하기 시작했을 들 수 있다. 상업의 부활은 새로운 대금 결제 방식과 새로운 상업적 기법의 발달을 필요로 했다.) 서유럽에서 주화가 유통수단으로서 오랜 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약 400년 만에 화폐 경제로 복귀했다는 사실이 주목할 점이다. 전통적인 장원은 거의 자급자족 이였고, 그 밖의 필요 품목들은 물물교환을 통해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장의 성장과 발달로 주화의 필요가 불가피하게 되자 초기 소액면의 주화만 사용되었다가, 서유럽에서 사치품 교역이 성행하게 되면서 화폐 단위는 급속히 커지게 되었다. 그 결과 13세기에 이르러 피렌체 및 베네치아 등의 이탈리아 국가들에서는 금화도 주조되었다.무역을 활성화시킨 것은 화폐 경제와 신용 장치의 확대만이 아니었다. 도시의 급속한 성장도 교역의 촉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부사학자들이 개간된 농촌 공동체를 도시의 범주에 포함시키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중세 도시의 발달도 주변 농촌의 생산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주변 농촌의 생산력이 향상된 결과, 잉여 생산물이 생기게 되었고, 이렇게 생신 잉여 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수도원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듦으로써 도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 농촌이 지속적으로 곡물 공급을 해주어야했다. 즉, 도시가 단순한 밀집한 주거지역을 넘어 상공업을 바탕으로 경제적 원천을 삼는 도시가 되려면 상공업자들의 지지기반인 곡물을 주변 농촌이 계속적으로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농촌과의 관계를 떠나서 원격지 무역도 도시의 성장에 숨을 불어넣은 요인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 기원과 경제적 활력을 인근지역의 번영과 부에 입각하고 있다. 도시 인근 지역이 도시에 잉여 생산품과 원료를 제공하여 인구를 유입시켰기 때문이다.중세 도시의 특징은 상업의 부활을 바탕으로 형성된 상업도시라는 데에 있다. 상업으로 발전 된 중세 도시에는 이익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