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치대학살유태인은 가톨릭 이라는 유럽사회에서 유일하게 선민사상을 가지고서는 유대교라는 집단을 이루어 이교도 인식을 톡톡히 했다. 거기다가유대인들은 대접 못 받을 거라면 돈이라도 벌자는 인식에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대 부업에 종사했었고이들은 백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함으로써 수많은 부를 축적했다. 이에 이미 소수층이라고 불리기에는 유럽사회에서 너무 많은 측면을 차지해버렸다. 때문에 히틀러로서는 이들이 독일인들로부터 가져갔던 모든 부를 회수함으로써 재정을 충당하려는 이유도 있었거니와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우수하고 나머지 민족은 전부 필요 없는 민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무엇보다도 히틀러가 나치대학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이유는 독일 민중의 구심점을 하나로 빠르게 모으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본래 '적'을 앞둔 상황에서 집단은 단결하는 법이니 말이다.2. 독일 입장에서 본 나치대학살의 배경홀로코스트 못지 않은 학살 사건이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치대학살이 대량학살의 대명사로 남아 있는 것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쟁의 와중에서도 거의 모든 국가기관을 총동원하여 과학적인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600만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실제로 죽은 사람은 150만 ~ 200만이며, 그들 모두가 유태인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숫자조작이 이루어진 것은 전후의 이야기로서 숫자야 어떻든 수백만의 유태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①왜 이렇게 많은 유태인을 히틀러가 학살했는지에 대해서는 단지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태주의" 때문이라고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히틀러는 현실적인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그 당시 연합국 언론의 말처럼 미친 사람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이러한 히틀러의 권력 장악이 가능했던 이유로, 1차대전의 패배와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분노, 그리고 경제공황이 제시되곤 한다. 이때의 히틀러는 그 충격과 분노, 굴욕감을 결집하여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이루어 분노와 굴욕의 에 약발이 떨어지면 지지가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이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의 충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유태인 탄압이 강화되는 것도, 학살이 점점 강도를 높여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내세운 논리에 대한 지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논리를 확대해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끝내 게토로 분리, 특정 지역으로 이주, 강제수용소 수감 등의 방법으로는 유태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은 그들에게 최종적으로 남은 해결책은 학살밖에 없었던 것이다.④그럼 반 유태주의가 히틀러만 가진 것일까? 히틀러가 처음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반 유태주의의 전통은 유구하다. 그 전통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왜 독일 국민들과 히틀러의 부하들이 겉으로 드러난 탄압과 숨겨진 학살에 동조했는지는 설명이 된다. 유럽인들의 반 유태주의 전통은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도 잘 표출된다. 거기서 악덕 고리대금업자로는 나오는 샤일록이 바로 유태인이다.⑤유럽에서 반 유태주의의 전통이 생긴 이유는 크게 3가지이다.첫째, 종교상의 문제이다. 유태교와 기독교 간의 교리 상의 차이이다. 유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생활사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태인들의 폐쇄적인 생활 태도에 있다. 그들은 탈무드만을 읽으며 그들의 고유 생활방식을 지독스레 고집한다. 기독교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배타적인 공동생활을 한다. 셋째, 유태인들은 지역마다 경제를 장악해왔다. 나라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유태인들은 대 부업에 종사 하였고 이들은 백인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함으로써 수많은 부를 축적했다. 소수층이라고 불리기에는 유럽사회에서 너무 많은 측면을 차지해버린 유태인을 히틀러는견제하게 되는 것이었다.⑥반 유태주의 전통은 독일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우크라이나나 러시아에서도 독일 못지 않게 학살을 감행한 국가들 중 하나이다. 거의 대부분의 유럽국가에 크고 작은 반 유태주의가 광범위하 대중적 지지를 받아 히틀러는 ‘대중독재자’가 되었다. 또한 히틀러는 당 집회에서 기본주제별로 문제점을 정리하여 청중에게 호소함으로써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청중을 매혹시키며 대중이 지닌 고귀한 감정에 호소하여 전 독일인의 결집, 국내외 압력으로부터 독일 국민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 및 조화,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안정 및 향상, 용병제도의 폐지와 국민군의 창설, 독일 국민의 강인함과 능력에 대한 신뢰, 자유라는 대 이상에 대한 빛나는 희망 등을 역설했다.근거3. 유태인 학살을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면으로 제일 먼저 꼽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스탈린이 유태인은 더 많이 죽였다. 히틀러가 게르만족 우월주의를 내세웠다면서 인종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한 사람치고, 루즈벨트가 인디언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무지하다. 또한 히틀러가 비밀경찰을 운영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비난하지만, 처칠은 아일랜드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모인 아일랜드 민중을 향해 탱크를 동원하여 기관총을 난사시킨 인물이다.→따라서 도토리 키재기인 당시 연합국 지도자들이 히틀러를 희생양 삼아서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게 하는 의도가 있다.근거4. 민족의 통일성은 절대적 권위를 부여 받은 지도자에게서 그 화신을 찾을 수 있다. 지도자 아래에서 당은 민족의 가장 위대한 요소를 찾아내야 하며,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 즉 히틀러는 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 사회적 다원주의와 민족생존권의 확보, 민족공동체 사상, 의회정치와 계급투쟁에 대한 반대 등을 피력했다. 히틀러에 의하면 나치즘의 주된 적은 이미 붕괴 직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르크스주의(여기에는 민주사회주의도 포함됨)였다. 히틀러 그는 그당시 연합국 언론의 말처럼 미친사람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히틀러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했고, 채식주의자였으며 개인생활은 검소했다. 오랫동안 결혼하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는 정상적인 체질의 소유자 동안에 대량으로 죽었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외에도 주요한 나치스의 죄목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히틀러가 유대인의 학살을 직접적으로 지시했다거나,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조차 유대인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견해라고 한다.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독일공군 총사령관이자, 게쉬타포의 창설자,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이었던 괴링은 유태인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했다. 많은 국방군(정규군) 및 나치당의 고위 간부들 중에서도 유태인 학살을 몰랐다고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정말로 몰랐을까, 아니면 알았어도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괴링은 유태인 학살을 전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전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괴링은 1934년 이후에는 독일공군에만 매달렸고, 비밀경찰 게쉬타포에는 손을 떼었다. 게쉬타포를 지휘하면서 비밀경찰의 대명사로 게쉬타포의 악명을 드높인 자는 SS(친위대) 국가지도자 Heinrich Himler. 히믈러는 원래 SS와는 상관이 없이 괴링의 사설경찰이나 다름없던 게쉬타포에 SS를 파견하여 점차 게쉬타포와 SS의 구분을 없애가면서 국가기관화하였다.이 SS가 유태인학살을 전담하였는데, SS 및 게쉬타포의 철칙 중에는 "알 필요없는 자에게는 알리지 말며, 알 필요가 없는 일에는 관심도 갖지 말라"라는 것이 있다. 괴링은 이에 해당한다.나치당 초기 멤버인 괴링은 물론 유태인 탄압을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괴링은 1차대전때 리히트호벤전투기편대 소속이었던 유태인을 보호한 적이 있다. 이유는 그의 전우였기 때문이라는 것), 학살은 몰랐다는 괴링의 증언은 진실성이 있다.또한자기국가에 이민족이 들어와서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를 고스란히 지키며 동화되지도 않는데 원래 국민들보다 더 잘 살고 부를 독점하고 있다면? 내가독일 입장이었더라도 청소했을 것이다.더욱 이상한 점은 유럽인들이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에야 히틀러가 유태인학살을 한 악마츠에서 죽었다는 400만을 포함해서 60년대까지는 800만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이후 600만으로 하향 조정 되었다. 왜? 또한 95년 2월 자 뉴스 위크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는 여섯 개나 되는 나치의 학살 수용소중 가장 큰 것에 불과했을 뿐이고, 사실 그곳이 최악이었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다.이어서 이 기사는, ' 과장되고 꾸며낸 이야기 많다. 아우슈비츠에 처음 수용된 사람들은 정치범. 사망자도 400만명 아닌 110만∼150만'라고 제목을 달았다. 초기 수용자들은 폴란드인들로서 카톨릭신자였고, 그 이후 독소전이 전개되면서 소련군 포로들이 끌려들어왔다. 이어서 들어온 자들이 유태인들이었던 것이다. 원래 유태인이라는 인종은 로마제국에 의해 추방된 이후 지금까지 2000여년을 나라없이 떠돌면서 유럽에서는 철저히 박해 받아왔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시민들에 의해 유태인 학살이 있었고,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도 유태인 학살이 있었다. 러시아 혁명에 유태인들이 대거 가담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이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0여년 동안 정착하여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 못지 않은 방식으로 학살하며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하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그들은 나치의 유태인학살을 빌미삼아 서구 세계의 보호와 묵인 하에 팔레스타인 민족을 나치가 했던 방식으로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조금의 주저도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방패막을 나치의 유태인학살로 돌려 서구의 눈을 감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했다.근거7. 히틀러라는 방패뒤에 숨은 진정한 전쟁광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태평양 전쟁이 끝 나기 9일전 1945년 8 월 6일에 B-29폭격기로부터 TNT 20,000톤의 위력을 가진 U-235가 든 폭탄이 히로시마의 오타강 위쪽 도심에 떨어졌다. 0.6초후 직경 180미터의 온도 300,00도의 불덩이가 섬광과 같이 나타났다.지열은 곧바로 6,000도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