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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방정교회의 창조론
    I. 들어가며동방 교회 신학/ 송 성 진 prof. 창조론/ 200531061 M. Div 4/6 임 우 형‘뿌리’를 보고 싶은 것이 동서를 막론한 철학의 주제가 아니었던가! 서양은 이를 위해 늘 ‘그 자체’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사유의 길을, 동양은 늘 사귐의 그물망 인정하고 체득하는 도덕의 길을 발전시켜왔다.사람됨의 뿌리를 어찌 보고 싶지 않겠는가? 사람이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산다는 명제에서 뿌리의 방향을 밝히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이 하늘을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게 하는가? 왜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지시되는가? 이러한 물음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대답되어져 왔다. 이러한 대답 중 한 가지가 창조론의 신학이다.나는 특별히 동방 신학의 창조론에서, 사람이 하늘과 상응할 수 있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창조의 까닭, 창조 이전 신의 영역, 창조의 힘, 창조의 결과 등을 사유해 보았다. 정교회 전통에서 창조에 관한 소중한 유산들은 우리에게 영성이 가능한 이유를 어떻게 논의하고 있는지 고찰해보자.II. 머물며1. 신과 무1) 어두움 속의 신신에 대해서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해 온 것이 신학의 과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알다시피, 신에 대한 앎의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길은 지식의 길이고 둘째의 길은 연합의 길이다. 지식의 길을 긍정 신학이라 칭하고, 연합의 길을 부정 신학이라 부른다. 서방 교회는 긍정의 길을 발전시켜왔고, 동방 교회는 연합의 길을 발전시켜왔다. 물론 두 길 모두를 서로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그러했다. 서방 교회는 신에 대해 사람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말해야 하고, 전해야 한다는 언어적 당위를 고수하였다. 이에 반해 동방 교회는 신에 대해 사람이 알 수 없음에 깊은 깨달은 후 언어적 시도를 버렸다. 이로써 동방 교회는 성상(Icon)을 더 즐겨 사용했다. 따라서 서방 교회는 언어를 사제들이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며, 폭력을 행사하였다. 동방 기하자. 우리는 신이 자신 안에 절대무의 공간을 내어주었다고 말하던지, 어두움 속에 있는 신 앞에 절대무의 영역이 던져져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절대무는 신과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창조의 주체인 신의 대상으로서, 피조물로서 존재한다. 다만 절대무의 공간이 바로 ‘있음’의 공간 즉 창조 세계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3) 신과 무이제 신과 무를 동일시하는 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이 논의는 피조 세계를 유의 세계로 보고, 신의 영역을 무의 세계로 보려는 것이다. 마치 부정신학과 흡사하나, 부정신학은 무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무지와 연합에 강조가 있으나, 동양적인 신학은 유의 세계 앞에 존재하는 무의 영역을 신의 거주지로 여긴다. 더 나아가 이 무가 곧 유를 낳는 원인이다.둘이 아니라면 즉 무다. 상대가 없으면 절대다. 절대는 무다. 상대적 유, 상대적 무도 아닌 것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무로 여기면 상대 세계의 종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 [다석어록], 168쪽.위의 글은 다석 류영모 선생의 말이다. 상대적 유란, 긍정을 부정하는 것이요, 상대적 무란 부정도 부정하는 것이다. 그 후에 만나는 것이 하나님이다. 여기까지는 부정신학의 길과 일치한다. 하지만, 11세기 주돈이가 태극이 곧 무극이라고 풀이했던 것처럼 류영모는 신을 무로 환원시켰다. 모든 있음의 밑바탕이 무라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빈탕’이다. 이 무가 류영모에게는 모든 있음의 근거이며, 원인이다.‘없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이를 적절히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무를 기반으로 쌓은 류영모학은 결국 모두 무로 환원되기 때문에, 학문적 성과가 애를 쓴 만큼 결실을 거두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이것을 유학의 ‘몸틀잡기’라는 실천으로 해결하고 있으나, 신학적 이론으로는 모순에 봉착하는 비판 없는 전통의 답습이다.정교회 신학은 무와 신 사이에 적절한 긴장 관계를 갖고 있다. 없음의 영역은 바로 신의 영역과 다른 공간이다. 그러므로 무와 신을 동일시하rom nothing 이 아니라 creation upon nothing 이다.3) 비존재에서 삼위일체로신은 드러나지 않음에서 절대무의 공간으로 침투하면서 드러났다. 비존재에서 존재자로 나타난 것이다. 절대무 공간 밖의 신이 어떠한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존재자인지도 알 수 없고, 신의 그 어떠한 속성도 알 수 없다.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모른다는 것뿐이다. 신의 영역은 절대 무지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신은 비존재이다. 비존재인 신이 사랑을 의지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즉 절대무의 공간을 내어주는 순간부터, 신은 사랑 의지로 드러난다. 사랑 의지인 신이 절대무의 공간 속에 침투하는 순간 신은 삼위일체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정교회 신학에서 “부정 신학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 유일하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다.” 라는 명제가 도출되는 것이다.삼위일체는 있음 일반이 절대무의 공간에서 처음 만나는 신의 모습이다. 있음은 신을 삼위일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있음 일반은 절대무의 공간- 물론 지금 있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밖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신에 대한 최고의 계시는 삼위일체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존재자이다. 즉 절대무의 공간에 신이 침투할 때, 자신의 모습을 있음의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다. 있음의 방식이 아니라면, 절대무 안에 있는 어떠한 있음도 신을 알 수 없기에, 이미 사랑의 의지로 있음을 채우기로 결정한 신은 당연히 자신도 있음으로 존재한다.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다가, 드러낼 때, 있음을 선택하였다. 본디 신은 있음과 없음으로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절대무의 공간의 침투하기 전에 신 존재 방식은 그렇다면 있음이 아니었다는 것인가? 바로 그러하다. 신은 유무의 존재방식이 아니다. 다만 ‘안식’ 으로 표할 수 있겠다. 여기서 안식은 존재자의 안식이 아니다. 사랑의 의지의 안식이다. 신은 절대무의 공간에 자신. 또한 ‘관계 맺음’은 ‘내어줌’ 없이 불가능하다.따라서 위의 3가지 본성은 존재자 모두에게 적용된다. 실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세 가지 본성을 모든 있음에 부여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음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있음으로 존재하셨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내에 벌써 이 세 본성을 가지셨다고 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본성은 어느 것이 먼저 우선 되는 본성이 아니다. 세 속성은 서로 속한다. 세 속성은 각각 서로의 바탕이 된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속성의 우선순위를 정해보려는 노력을 해보라! 주관적인 억지 부림이 아니라면 무엇이 더 근원적인지 찾아내기를 포기하게 된다. 이 때문에 삼위도 서로 속해있다. 다음 소주제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자.3) 각 위의 두드러짐위에서 언급한 존재자의 세 가지 본성 ‘드러남’, ‘관계함’, ‘내어줌’ 은 아주 흥미롭게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각 사역에 대응된다. 이 말을 설명하기 전에 전제를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성부께서는 위의 3가지 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시고, 성자, 성령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부만, 성자만, 성령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은 아무 것도 없다. 삼위 하나님은 ‘자신만의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아니시다.하지만 여기서는 조금 더 분석해서 성부, 성자, 성령이 구분 가능한 이유를 현상적으로 보여주고자 함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 각각이 세 가지 본성 중 두드러지게 가지고 있음으로 세 위는 구분할 수 있다. 성부는 ‘드러남’을 담당한다. 쉽사리 비유컨대 성부 하나님은 신의 얼굴이다. 그러므로 유일신론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에게는 늘 성부만이 그들에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성부가 ‘드러남’으로 자신을 두드러지게 표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보기 원한다면, 성부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이 기도할 때, 모든 위에게 기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를 고찰하지 않은 어리석음의 결과이라고 안타,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는 사귐을 통해 자연스레 발한다.2) 영광의 옷사귐으로 인한 에너지에 이름을 붙여줄 차례이다. 이 에너지는 삼위의 사귐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있음이 창조된다는 것은 existenz 즉 하나님 밖에 실존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 사귐으로 인한 에너지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이니, 하나님 앞에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에너지가 사귐으로 인한 것이니, 창조된 것이 아니냐? 라는 물음은 괜시리 던져보는 지적일 뿐이다.사귐으로 인해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사귐 에너지)는 다름 아닌 신의 영광이다. 영광이란 겉 모양색을 의미한다. 세 위격의 사귐을 통하여 원으로 연결된 세 위의 겉 모양색은 바로 영광이다. 그러므로 사귐 에너지의 이름은 곧 영광이다. 선지자 이사야 글 6:1~3에서, 신의 옷자락이 다름 아닌 영광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 영광은 사람과 구별된 빛이다. 다른 표현으로 사람이 빨래함으로 도무지 희게 할 수 없는 빛이다. 그러므로 영광으로 옷 입은 주님과 연합을 이루는 것은 사람의 결단과 노력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하나님 은혜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이 영광의 역동성은 ‘드러남’, ‘관계함’, ‘내어줌’ 을 통한 무한한 위격 사이의 사귐으로 보장받는다. 영광은 단순한 옷이 아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옷처럼, 온 땅을 덮어 버리는 옷이다. 그러므로 신의 옷의 섬유가 바로 영광이다. 신은 영광으로 옷 입으셨기에, 그 옷을 투과하여 신의 알몸을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영광이 반투명이기 때문이 아니다. 영광 자체에서 이미, 무한한 사귐을 발견하기 때문에, 신의 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귐이 곧 에너지를 만들고, 게다가 사귐은 신의 몸을 만들기 때문이다.동방 교회 신학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에 참여하는 것이지, 신의 본질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명제는 참으로 합당하다. 이 명제를 인간이 신으로 가까이 감의 한계 지움으로 뜻이다.
    인문/어학| 2009.06.26| 12페이지| 2,0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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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이트헤드의 신개념 신화적 소고
    백대가리와 나르시스과정신학에 대한 신화적 소고과목: 신론담당: 서창원 prof.이름: 임우형학번: 200531061과정: M. Div 5/6제출일: 2007. 6. 27.이 글을존경과 사랑을 담아아버지께 바친다.ContentsI. 들어가기II. 풀어내기제1장. 새로움의 욕구1절 새로움2절 하고자함3절 실용성제2장. 느낌의 옷1절 개념적 느낌2절 물리적 느낌3절 자기 원인(Causa sui)제3장. 두 극의 물1절 개념적 물2절 물리적 물3절 빠져죽은 신III. 나가기prologue요하임 가스케(Joachim Gasquet)의 에서 과정 철학적 세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 세계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거대한 나르시스이다”(p45) 과정철학적 세계는 나르시시즘이다. 세계는 곧 신의 원초적 본성과 귀결적 본성의 통합성이다. 과정철학 내 신성에 관한 논의 속에서 나는 과정신학이 거대한 나르시스임을 인지했다. 이 소박한 실마리를 가지고,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신의 속성들을 나르시스 신화와 연결지어봄이 이 소고의 내용이다. 이를 통해 글이 목적하는 바는 과정철학을 더 나르시스로 이해하여, 그 깊이를 피부에 와 닿도록 하기 위함이다. 철학적 개념들을 물질적 심상으로 환원하여 살펴봄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뭉쿨하게 하기 충분하다.개념어를 개념어로 풀어내는 것은 그 뒤에 이야기를 전면으로 내놓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를 통해 무한 상상력을 펼쳐낸다. 상상력의 작업을 거친 후에 내밀해진 이미지들이야말로 개념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메타포를 통한 상상력을 추구하고 함이 아니라, 현상학적 분석을 통한 느낌 잡아내기이다. 느낌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거침없는 상상이 요구된다. 개념적 느낌이든, 물질적 느낌이든, 느낌은 존재자 사이에서 현실적 계기가 비시간적으로 촉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글쓰기 방식은 현상학적 상상력을 통한다.신-말하기 즉 신학의 기초 작업은 신을 대상화시키는 것이다. 신을 대상화시키지 않고, 로고스로 표할 수 없기 보편자들의 보편자이다. 즉 신은 사랑, 의지, 성스러움, 자존, 불멸, 영원, 전능 등이기 이전에 창조성이다. 이것은 ‘물의 사유’이다. 왜냐하면 물의 이미지는 정신분석이 거의 좀처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물로부터 보다 물질적이고 깊은 몽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존재가 보다 깊숙이 참가하고, 우리의 상상력이 보다 가까이 창조 행위를 꿈꾸기 때문인 것이다.)궁극적인 형이상학의 원리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있으므로 또 하나의 새로운 것이 나타는, 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전진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범주가 일자, 다자, 동일성, 창조성, 다양성 등의 개념들이 있지만, 모든 범주를 모아들이는 ‘모이라’(운명)) 은 단연코‘창조성’이다. 왜냐하면 창조성은 새로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창조성 때문에 일자가 다자로 가능하고, 다자를 일자로 모아들임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이접에서 연접으로의 전진을 위해 나르시스는 물가에 도달한다. 자신의 얼굴과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분명 이접이지만, 물을 통해 점차로 연접으로 나아간다. 물이란 바로 창조성이다. 그래서 물은 언제나 위기에 처해 있다. 물은 점차로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고 깊어져 스스로 물질화된다.) 그러므로 창조성을 말하는 과정철학은 결국 물질화 과정을 겪어 나감을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절 하고자함- 존재자의 본질창조성은 새로운 것을 낳고자 한다. 새로운 것이 곧 선한 것이거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새로운 것은 ‘새롭다’라는 자체 안에 그것이 해악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양성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결국 선한 것을 낳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흙탕물 속에서, 진주가 캐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낳고자 함’은 부모가 자식을 낳고자 함이다. 낳을 때,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도 있지만, 혹 건강치 못한 아이가 빛을 볼 수도 있다. 낳음의 결과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은 아니다. 허나, 낳음 결과의 복합과 결합은 선을 유도한다. 즉 소위 말하는 대의 유행을 모르는 신이다. 손수 흙으로 사람을 빚어내는 신은 수준이 떨어지는 신이다. ‘손 안대고 코 풀 수 있는 신’이 진보된 신이다.) 그래서 이왕이면 말 한마디면 창조 가능한 신이 매력적인 신이다. 더 나아가 말도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창조 가능한 신이 더 위대하다. 이러한 발상이 서구전통신학에서 논의되어 왔는데, 이 모두 실용성을 바탕하고 있다. 신은 비시간적이나, 실용성 앞에서 시간적이 된다. 본디 창조란 시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드리지 않고, 세계를 창조한 신은 자신의 초월성에 스스로 도취된다.) 이것이 신의 만족이며, 이 만족은 실용성을 충족시킴에서 온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하고 있다.)나르시스의 얼굴 비추어 봄이 실용성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해석하기 나름이다. 나르시스는 새로움의 욕구를 물을 통한 자신의 얼굴 발견으로 해결하고 있다. 나르시스가 이 거대하고도 놀라운 발견, 요즘에는 이것을 자아-정체성 발견이라고 정신분석학에서 떠든다지. 이 발견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인가? 그가 에코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는가? 아니다 그는 다만 물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새로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르시스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했다. 노력이 필요한 새로움은 실용성을 기준 삼아 볼 때, 올바른 것도 아니며, 착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새로움은 바로 죄악이며, 나타나서는 안 될 새로움이다. 그것은 단지 다양성을 위해서만 봉사할 뿐,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제2장. 느낌의 옷‘느낌’은 긍정적 파악을 의미한다.) 쉽사리 본질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의 실마리가 바로 느낌이다. 개별자들이 군들로 묶일 수 있는 것이 그 종의 본질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이 때의 느낌을 말한다. 이 느낌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을 만나고, 그 사물들을 유와 종 개념으로 구분하고, 명제와 범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느낌은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 사이에 위치하여, 우리에게 합생을 이해하게 해주는 합의라는 방식)으로 해결함이 실용주의에서 거론하는 마지막 방법인데, 결국 이 또한 정도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물리적 느낌을 해결하는 방법은 먼저 개념적 느낌으로 나아가야 함이다. 물리적 느낌에서 머문다면, 구체성을 이야기하므로 피부에 와 닿는다는 칭찬이 따를지는 몰라도,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어서, 모든 개별자를 포과할 수 없어 비수를 꼽아버리는 폭력적 신 개념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보편적인 개념적인 느낌으로 나아가야 한다.신에 관한 개념적 느낌으로 나아감에 우주적인 세계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아가지 않음이 더 낳다. 잘못된 개념적 느낌은 제각기의 물리적 느낌보다 수많은 존재자를 해치는 기제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전능, 불멸, 전지, 불변, 자존 등이다.) 이러한 개념적 느낌은 개인의 물리적 느낌을 무리하게 확장한 결과이다. 이제 과정신학이 내세우는 개념적 느낌은 무엇인가? 첫째 모른다는 의미에서 성스러움. 둘째, 마음이다. 신성의 성스러움과 마음성)을 과정철학은 이야기하고 있다. 성스러움은 원초적 본성이라 하고 마음성은 결과적 본성이라 한다.물에 비추인 나르시스의 이미지가 바로 물리적 느낌이다. 이 물리적 느낌은 전체 샘물에 비해 너무 협소하여, 전체 물의 개념적 느낌을 나타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나르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리적 느낌에 착념한다. 왜냐하면, 그는 물리적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의 샘물의 실용성을 삼았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의 이미지는 나르시스의 얼굴을 기반삼아 있지만, 물의 물성 즉 순응적 느낌에 달려있다. 물의 표면은 개념적 느낌이요, 깊어져 이미지를 비추는 협소한 부분은 물리적 느낌이다. 모든 개념적 느낌은 물리적 느낌을 드러나게 해주는 주체적 결단을 보여주었다. 즉 윗물의 결단이 아랫물의 결단을 낳았다. 아랫물의 느낌은 윗물을 거쳐 나르시스의 원초적 얼굴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3절 자기 원인(Causa sui)전통적인 자기 원인 개념을 화이트헤드는 느낌이론을 통해 합생은 반드시 신 죽음을 낳는다. 이제 세계 속에도 신이 없다. 왜냐하면 신이 세계 속에 빠져 죽어버렸기 때문이다.)1절 물리적 물정신분석학이 자기 자신의 영상이나 잔잔한 물에 비치는 얼굴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나르시스의 표시로 보이도록 결정한 것은 안이한 신화학의 단순한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자연적인 경험의 심리학적 역할에 대한 참다운 예견이었다. 사실 인간의 얼굴은 데 쓰이는 도구인 것이다. 얼마나 얼굴이 실용적인가! 이 눈길, 즉 매혹의 모든 도구를 사람은 준비하고, 날카롭게 하며 닦는 것이다.)먼저 물의 거울의 효용성을 이해하여 보자. 물은 우리의 이미지를 자연화하여 내면적인 명상의 오만함에 약간의 순진함과 자연스러움을 되돌려주는 데 쓰이는 것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비치는 물 앞에서, 나르시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계속되는 것’또 그것이 완성되지 않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의 꿈의 요소 가운데 하나, 즉 물리적 느낌 속에 깊이 들어가려는 꿈을 지닌 욕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물체(objects)와 함께 사람은 깊게 꿈꾸는 것이 아니다. 깊이 꿈꾸기 위해서는 물질(matieres)과 함께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앞에서 거론한 바 나르시스는 샘의 물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샘물의 물리적 느낌을 통해서 나르시스는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지루함으로 인해 너의 테두리 속에 얼어붙은 차디찬 물, 몇 번인가, 그리고 몇 시간 동안인가, 갖가지의 꿈으로 눈물 지으며 깊은 구덩이의 네 수면에서, 조각난 내 추억을 찾아 헤매다, 아득한 그림자처럼 나는 네 속에 있었다.. 하지만 두렵구나! 저녁이면 네 엄숙한 샘물 속에 비굴한 내 꿈의 적나라한 모습을 나는 알았다.)나르시스는 숨겨진 샘이나 숲 깊숙이 들어간다. 거기에서만, 그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이중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즉 화이트헤드의 양극성을 느낀다. 즉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향해서 팔을 내뻗고 손을 담그며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말을 거는 것이다. 메.
    인문/어학| 2009.06.26| 17페이지| 2,0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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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위일체론 역사적 흐름에 따른 정리
    2006 여성신학 세미나/ 김 정 숙 prof. 삼위일체론: M. Div 4/6 임 우 형? 들어가며기독론이 신학의 내용적 중심이라면 삼위일체론은 모든 기독교적인 신학과 교리의 내용을 그 안에 포함하는 형식적 원리이다.) 삼위일체론은 교회가 만들어낸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초대 기독교인 공동체의 하나님 체험에 근거한 아주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교리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 신성을 둘러싼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곧 성부와 성자가 동일 본질이면 과연 성부와 성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존재론적 관점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묻게 됨에 따라 삼위일체 신학은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체험이란 원래적 맥락에서 벗어나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의 내적 관계를 묻는 추상적인 탐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그리하여 삼위일체론 탐구는 구원의 역사와 철저히 단절되어, 하나님의 내적 비밀에 대한 사변적인 탐구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칼 라너(Karl Rahner)의 “ 비록 삼위일체론을 정통이라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 실제 생활에서 거의 예외 없는 유일신론자들이다.” 라는 한탄을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전통적인 교부들의 삼위일체로부터 현대 삼위일체 연구를 간략하게 살펴서, 여성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으로 모아들이고자하는 것이다.제 1 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1. 오리겐(Origen)- 초기 종속론성자는 성부의 아들이시다. 입양된 아들이 아니라, 낳아진 아들이다. 성부는 'ο θεο? 이고 성자는 단지 θεο? 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오리겐은 동등성을 부인한다. 동시에 오리겐은 성자가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음”을 동시에 부정한다. 따라서 성자는 성부와 위격이 다른 하나님이시다. 성령 역시 피조 되지 않은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한 위격이다.하지만, 오리겐의 삼위일체는 동등한 위격이 성부로부터 낳아진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와 다른 위격일 뿐 아니라, 동일본질도 아니다.성령은 성자의 첫 번째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은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고,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된다.가이샤라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로 대표되는 유사 아리우스주의는 성자의 피조성은 철회했으나, 동일본질을 유사본질로 설명했다.)3.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two essence, one substance성자께서 아버지의 ου?σια (본질)의 γεννημα(소생)이심을 주장)하면서, 'ομοουσιο? (동일본질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구별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성부로부터(ε?κ) 성자를 통하여(δια) 성령 안에서(ε?ν) 성취되는 단 하나의 은혜가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니케아를 뛰어넘었다.4. 가이샤라의 대 바실(Basil of Caesarea) -위격과 본질의 구분바실은 위격('υποστασι?)과 본질(ου?σια)의 용어를 분명히 구분하면서 ‘세 위격 내에 한 본질’을 공식화하였다.) (μια ου?σια ε?ν τρισιν 'υποστασεσιν) 이로써 두 캅바도키아 교부들과 후대 신학자들에게 삼위일체 논의를 전개할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바실은 성령의 동일본질성과 인격성을 강조하였다.) 성령은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주어 성화시키는 분이시다.)5.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위격 상호간의 관계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아버지의 비기원성 그리고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의 기원에 근거하여, 아버지의 특성은 비출생( α?γεννησια)으로 아들의 특성을 출생(γεννησι?)으로, 또 성령의 특성을 출래(ε?κπορευσι? , ε?κπεμψι? 발출)로 표기하였다.) 이것은 위격 상호간의 관계설정에 있어 획기적인 공헌이다. 또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일체성 즉 α와 υποσασι?가 라틴사람들에게는 구분 불가능하므로,) 라틴식으로 persona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ουσια의 번역어로 essentia가 합당하고, substantia는 적당하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substantia는 υποστασι?의 라틴식 번역표기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삼위로 출발하지 않고, 일체로부터 삼위를 사유했다.) 따라서 그는 “傳有”(Appropriation 보냄, 할당) 를 통해 삼위의 관계를 규정한다.) 전유는 삼위 각각의 독특한 특성을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Fillioque) 나온다는 이중출래설을 지지했다.)제 2 부 현대 삼위일체의 동향1. 구원에 대한 삼위일체론1) 개인적 인간 구원현대 삼위일체론은 내적 신비에 대한 탐구가 아닌 삼위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교회의 진술로 이해한다. 독일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발터 카스퍼(Walter Kasper), 미국의 여성신학자 캐서린 라커그나(Catherine Lacugna), 독일의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등이 예이다. 이러한 전환의 공헌은 현대의 탁월한 두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와 칼 라너에게 돌릴 수 있다. 모두 구원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삼위일체를 이해한다.2) 사회적 구원- 자유와 평등-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삼위일체론에서 자유와 평등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찾는다.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남미의 해방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가 그러하다. 보프는 사귐 속에 존재하는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것은 공동체적 삶에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3) 생태계 회복개인의 구원, 사회적 구원을 넘어서,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근거를 삼위일체론에서 찾는다. 미국의 여성 신학자 셀리 맥페이그(Sallie Mc Fague)는 20세기 신학의 세 번째 단계인 생태계 신학 또는 생명 신학은 해방의 범위를 자연계 전체로 확장시킨 것이라고 말한다.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파니카 외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Wolfhart Pannenberg), 개빈 드코스타 (Gavin D‘Costa) 등을 들 수 있다.3. 유신론과 무신론의 극복으로서의 삼위일체론지금까지의 유신론적 내 신개념은 지배적, 가부장적, 여성 억압적 사회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결국 이러한 신 이해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억누르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무신론의 도전을 초래하게 되었다.)전통적 유신론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와 동시에 무신론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면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는 움직임도 있다.4. 동방교회 삼위일체- 사귐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사귐’ 개념이 관계가 더욱 중요시해진 이때 각광을 받고 있다. 전유라는 방식으로 삼위를 설명하며, 한 본질을 더 강조했던 서방교회의 전통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동방 교회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한 본질로 출발하는 것보다 세 위격으로 출발하는 것이 보다 성서적인 이해이며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잘 설명한다고 보고 있다.5. 삼위일체론과 성 문제아버지, 아들, 영이란 표현이 성 차별적인가? 그렇다면 표현을 바꾸어야하는가? 하는 물음에 여러 대답이 있다. 첫째는 전혀 차별적이지 않다. 둘째, 차별적이니, 여성적 상징으로 대체시켜야 한다.) 셋째, 차별적이니, 양성적 상징으로 대체시켜야 한다.) 넷째 차별적이니, 성과 관련 없는 인격적 상징으로 대체해야 한다. 다섯째, 차별적이니, 아애 비인격적인 상징으로 대체해야 한다.제 3 부 여성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캐서린 모우리 라커그나(Catherine Mowry Lacugna)의 “ 우리와 친교를 맺으시는 하나님”엘리자베스 존슨(Elizabeth A. Johnson)“ 삼위일체 상징을 다시 노래하라”)1.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이콘15세기 초 러시아의 안드레이 루블료프(Адрей люблёв)가 그린 이콘은 삼위일체를 표현한다. 그들은 원모양으로 배열되었으나, 그 원은 닫혀 있지 않다. 자기폐쇄적인 하 삼위일체론의 비관계성유사 아리우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보다 못한 중재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논박하면서, 캅바도키아 3대교부들은 위격과 본질을 구분했다. 더 나아가 위격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본질이 위격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신적 기원이 공유된다고 말함으로써 종속론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였다.)그러나 라틴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하나의 본질로부터 삼위일체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자기폐쇄적인 삼위일체의 위격들이 나뉘지 않은 하나의 행위 안에서 피조물과 접촉한다는 개념을 낳았다.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자기 원인”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파악했다.)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피조물은 건너지 못할 심연의 강으로 분리된다. 라틴 형이상학은 친교보다 존재요, 그리스 철학은 존재보다 친교를 강조했다. 나는 어거스틴을 버리고 캅파도키아 교두들의 삼위일체교리를 채택해야한다고 생각한다.3. 완전히 동등한 상호 관계적 삼위일체실체존재론에는 폭력을 거부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즉 다른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 자율성이라든가 자기헌신보다는 자기소유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방신학은 관계맺음이 하나님의 특징이라고 가정했지만, 서방신학은 자존성을 가정했다. 동방 신학적 삼위일체론을 통해 살펴보면, 첫째 개인으로 있는 인격은 불완전하다. 둘째 한 사람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가르침이다. 셋째, 위계적이며 종속적인 것을 반박한다.4. 보완신학의 이단성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남자에게 여자가 종속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곤 했다. 보완신학은 사회적 성역할들이 미리 정해졌다는 생물학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나, 위계질서가 다르다고 말한다.) 오히려 여성이 이 질서 내에 있기에 존엄성을 보장받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이단인 종속론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5. 상징의 힘여성신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배것이다.
    인문/어학| 2009.06.26| 6페이지| 2,000원| 조회(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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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로스와 프쉬케>로 살펴본 성령론
    I. 들어가며2006 여성신학 세미나/김정숙 prof. M. Div 4/6 200531061 임 우 형신학은 보이지 않는 실재를 논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해 나간다. 현상학자들은 현상으로 포착되지 않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심지어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신학을 신랄히 비판한다. 그 후, 논의 가능한 영역에서만 신학의 자리를 부여했다.) 이러한 과정은 한편으로는 사람의 유한성을 언급하는 정직한 태도로서 발전해 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사유를 제거하는 사유의 뼈대만 남아버리는 빈약함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오히려 요즘 신학은 신비주의 영성을 더 강조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한국사회는 기능적인 성령을 충분히 맛보았다. 이제는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성령을 맛보아야 할 차례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종교 성직자들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외치고 있음을 주목해 본다. 이 때,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떠한 성령론을 내세워야 하는가? 아이든 위슨 토저( Aiden Wilson Tozer) 의 금욕 결벽주의 성령론이 쉽사리 우리 사상을 파고들고 있다. 이 성령론이 얼마나 남성적이며, 미국의 카우보이적 인지를 두말할 나위도 없다.나는 이 글을 통해 기본적으로 성령의 자리가 성서 번역을 통해서 얼마나 뼈다귀만 남게 되었는지를, 게다가 이 과정이 여성을 배제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또한 프쉬케 신화를 분석함으로 프쉬케의 모습과 우리 안에 흔한 기능적인 성령론을 비교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 성령론이 얼마나 졸렬한지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본디 자리는 어디인가를 살펴본다. 삼위일체 논쟁에서, 성령의 자리 확보하는 카바도키아 삼대 교부들의 처절한 노력과 프쉬케 신화의 최후의 장식을 견주어 봄으로 여성신학적인 성령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다.II. 머물며1. 언어적 접근이 소 주제에서는 구약 성서 “루아흐”가 헬라스 세계에 편입되면서, 어떻게 번역되었고, 이했다.) 대부분은 루아흐가 프뉴마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프뉴마 이외에 다른 개념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루아흐와 프뉴마는 질적으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루아흐는 신적인 본질임에 비해, 프뉴마는 자연적인 물질이다. 이러한 번역으로 성령의 자리는 인간의 감각에 의해 포섭 가능한 현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프뉴마를 바라보는 헬라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생명력으로 루아흐를 여겼을 것이다. 루아흐는 더 이상 신의 숨이 아니다. 프뉴마로 인해 루아흐의 뜻이 축소된 것이다. 프뉴마 개념으로는 더 이상 인격적인 성령은 커녕, 신의 거룩성은 저 멀리 떠나갔다.2) 프뉴마에서 프쉬케로프뉴마 개념은 헬라스 세계에서 한 번 더 변화를 겪는다. 마치 플라톤이 언급하는 세계의 영혼이 데미우르고스를 낳는 것처럼 말이다. 전 우주의 생명력인 프뉴마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뜻에서 프쉬케라는 한 가지 뜻으로 고정되기 시작한다. 즉 사람, 생물, 무생물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힘으로 그 뜻이 축소되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프쉬케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런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함께 보기로 하자.아리스텔레스(αριστοτελε?)는 그의 저작 [περι ψυχη](프쉬케에 관하여)에서 프쉬케의 뜻을 아주 자세히 정의 내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철학자들의 “영” 개념부터 프쉬케 개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프쉬케는 무슨 뜻인지를 밝히고 잇다. 이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 당시 헬라스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프쉬케의 뜻을 아주 적절하게 알 수 있다. 프쉬케를 영혼이라고 번역하겠다. 우리말로는 “넋”이 좋겟다.프쉬케는 생물들의 제일원리이다. 프쉬케을 갖는 것(εμψυχον)과 프쉬케을 갖지 않는 것(αψυχον)과 관련하여 영혼에 대한 정의는 두 가지 접근이 있는데, 바로 운동과 감각이다. 데모크리토스(δεμοκριτο?)는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영혼이라고 말하며, 영혼도 운동하는 것들 가운데 속한다고 가정했을 비인격으로 바꾼 것은 약탈과 도적질을 일삼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유 가능한 물질이어야만 한다. 이 물질을 제 것으로 완전히 시키기 위한 내재성이 프쉬케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프쉬케 신화를 심층 분석함으로 성령론의 축소의 원형을 보게 될 것이다.2. 프쉬케와 성령 비교 분석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쉬케는 에로스와의 사랑을 이룸으로서, 모든 여성들의 지향점이 된다. 신의 피가 섞이지 않고, 신이 되는 신화는 프쉬케와 헤라클레스로 한정된다.) 프쉬케 이야기 전체는 신과의 사랑을 희생을 통해서 이루는 뜻을 담고 있다. 신은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프쉬케에게는 보이지 않는 신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성부이다. 프쉬케는 에로스를 형상을 나타나게 한다. 바로 성령이다. 드러난 에로스는 성자이다. 성자를 드러나게 한 대가로, 성령은 고행을 시작한다. 이 고행의 끝은 다시금 성부와의 일체이다. 이 소주제의 목적은 프쉬케를 성령과 빗대어 보려함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성령론이 얼마나 졸렬한지 게다가 이 성령론이 얼마나, 여성-죽이기인지를 드러낼 것이다.#1. 신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아름다움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의 황금 사과 이야기에서, 승리를 굳혔다. 이 이야기가 주는 통찰은 신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 사상에서는 신의 아름다움은 거룩함으로 표현된다. 즉 성스러움이 신의 본성이며, 이 본성이 곧 아름다움이며, 길이며, 진리이다. 하지만, 헬라 사상은 신의 아름다운은 사람의 척도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신 3명이 아름다움을 인정받기 위해서 비겁한 남자에게 선물 공세하는 장면은 여신들을 처량하게 느끼게끔 만들기 까지 한다. 신이라도 여신이면 인간 남자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 대결에서 승리를 얻은 아프로디테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회의한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아름다운 인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프쉬케의 아름다움을 질투한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인 에로스를 시켜, 프쉬케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리도록 시킨다. 자신이 직로스는 델피에 있는 아폴론에게 날아간다. 아폴론은 theia를 죽이고, 신탁의 신으로도 역할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거짓 신탁을 부탁한다. 프쉬케의 아버지가 신탁을 받으러 올 때, ‘프쉬케는 괴물과 결혼할 운명’이라고 거짓을 말해달라고 한다. 아폴론은 거절했으나, 다프네 사건으로 협박하는 에로스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프쉬케의 혼인을 아버지 마음대로 받아오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미녀와 야수]가 나온 것이다. 비를 피하려다가 야수를 만난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야수에게 보내기로 승낙하는 것이다. 딸에 대한 결정권을 아버지가 갖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특히 비겁한 아버지의 빠져나갈 구멍으로 딸을 내어놓는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딸을 사랑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정당화시키나, 실상 딸을 사랑했었다기 보다는 언제든, 필요하면 내어줄 용이로 키웠던 것이다. 마치 가축을 필요할 때, 먹으려고 잘 살찌우는 것처럼 말이다.)프쉬케의 아버지는 신의 뜻임에 대해서 거역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주장한다. 문제는 이 신의 뜻이 거짓된 것이라는 데 있다. 더욱이 헤르메스술을 발휘해 볼 여지도 없는 독단적인 신탁이다. 이해할 수 없고 상식적이지 않은 신으로부터 응답이다. 이러한 신의 뜻앞에 사람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운명일 뿐 아니라, 신이 염두에 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겸허한 받아들임을 가능케 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바로 프쉬케로부터 온다. 어거스틴의 [신국론] 제 6 부에서, 바보같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받아들임의 영이다.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넉넉히 녹아내어 하나로 아우름을 지향하는 성령.#5. 순종의 프쉬케와 보이지 않는 에로스아버지가 받아온 신탁을 프쉬케는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홀로 괴물의 성으로 향한다. 괴물의 성에 도착한 그녀는 호화롭고 장엄한 풍경을 보게 된다. 프쉬케는 그곳 그 이전까지 우리는 괴물 신을 따랐으나, 이 후로는 사랑의 아버지를 따른다.#8. 죽음의 강을 건넜으나,프쉬케는 남편을 찾아 수많은 고행을 자청한다. 즉 자신의 의심에 대한 체벌을 달게 받기로 한 것이다. 다시 에로스와 결합하기 위한 최후의 과제는 죽음의 강(스틱스의 강)을 건너, 하데스와 함께 있는 페르세포네에게 상자를 하나 받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프쉬케는 죽음의 강을 건너, 상자를 받아 오는 중, 결코 상자를 열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한 채, 호기심이 발동하여, 상자를 열게 된다. 판도라처럼. 그 상자에는 잠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프쉬케는 이제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와 같이.희생은 여성의 의심의 대가이다. 인내하고, 감내하고 모든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은 여성의 운명이기 이전에, 잘못에 대한 대가이다. 창세기 신화에서 보이듯이, 여성의 고통은 불순종에 대한 결과이다. 이 잘못을 되돌리기 위한 험난한 고행이 시작된다. 결국 죽음을 넘어서는 고행까지 이르게 된다. 페르세포네는 지하의 여왕이면서 동시에 데미테르의 딸이다. 이 뜻은 죽음의 건너, 생명을 만났다는 뜻이다.) 모든 만물의 생명력에게 상자를 받아오는 것이다. 문제는 프쉬케가 오는 도중 상자를 열었으니, 생명력이 발현되지 못하고, 영원한 잠재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의심도 문제지만, 여자의 호기심 역시 문제이다. 남편을 못 믿는 죄가 가장 큰 죄이고, 그 다음은 쓸데없는 호기심이다. 여성은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는 잡담, 호기심을 실존으로 나감을 막는 부정적인 것들로 기술하고 있다. 죽음 건넜으나, 호기심 때문에 다시금, 영원한 잠의 늪으로 들어갔다.이 고행을 가능케 하는 이는 누구인가? 인간 본성을 거스리는 고행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령밖에는 없다. 죽음의 강을 건너 부활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외에 다름이 아니다. 남편을 찾아가는 프쉬케의 모든 여정은 그리스도인의 성령의 이끄심과 동일하다.#9. 전적인 에로스의 구원 - 기쁨잠이든 프쉬케를 보고, 에로스는된다.)
    인문/어학| 2009.06.26| 15페이지| 2,500원| 조회(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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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중 `결단 이후의 후회`에 관하여
    2006 봄학기 종교철학 결단 뒤 후회 연구/ 임우형I. 들어가며하이데거는 그의 저술 에서 실존으로나아가게 해주는 3가지 방법 중 기분을 들고 있다. 에도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된다는 말이 있다.) 3이라는 수는 만물을 의미한다. 둘은 음양을 말하며, 하나는 무극을 의미한다. 에서 실존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 기분, 말, 이해 3가지만은 아니다. 진리, 양심과 같은 것 역시 실존으로 서게 해준다. 하지만, 진리는 말에 양심은 이해로 환원시키고, 3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기분이란 마음에 관한 연구이다. 기분 중에서 현존재의 근본기분을 염려로 꼽고 있다. 살아가기에 대한 염려를 마음 졸임이라고 부르자. 마음조리는 이유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임으로부터 시작된다. 염려는 현존재의 근본기분이지만, 불안은 죽음의 부름을 인식함으로 드러난다. 불안 앞에서 본래적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을 요청받게 된다. 문지방과 같은 불안은 우리에게 본래적인 삶과 비본래적인 삶 사이에 서게 한다. 결단한 이후에 반드시 본래적인 삶만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본디 비본래와 본래는 섞여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결단 이후에 후회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보통 결단한 이후에는 후회가 없어야 한다. 본래적인 삶으로 이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적 삶이 더욱 우리를 후회스럽게 만든다. 왜냐하면 과거의 비본래적 삶이 망각되지 않고, 그 흔적을 본래적 삶속에서도 멍에로 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결단 이후의 아주 독특한 후회함에 관해서 숙고해야 한다. 이 글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이다.II. 머물면서제 1 장 기분의 고유성포스트- 모던니즘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철학적 영역에서의 포스트 모던니즘은 후기구조주의로 나타났다. 하이데거의 기분에 대한 연구는 포스트-모던니즘 철학에 기분의 고유성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따라서 불안 역시 저마다 고유한 것이다. 저마다 불안을 달리 경험하기에 결단의 방향도 저마다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촉각이 더 발달하여, 간지러움을 더 타는 사람도 있다. 시선의 문제를 벗어나면 더 명확하게 감각기관들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위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감각의 고유성이다.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것이 고유함으로 저마다 그때마다 감각은 고유한 것이다. 고유하다는 말은 특별함이나 독특함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특별하고, 독특해도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유함이란 독특함과 특별함을 넘어서, 유일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식 표현으로 “ 아무도 나에게만 지워진 존재의 부름을 대신 질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고유함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떠맡을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고유함을 잃어버리면 내가 사라지는, 본질과 같은 것이다. 고유함을 잃어버렸다 해서, 생물학적 죽음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바로 대중의 익명성과 같은 것이다. 최근 월드컵에서 보여준 대중적 마당놀이 문화는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 라는 로고를 통해서 개인의 고유성을 집단의 정체성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커다란 광기를 범했다고 나는 판단한다.감각의 고유성은 기분의 고유성으로 이어진다. 감각이란 외부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인데, 이것이 고유하다면, 저마다 그때마다 다른 인식으로 이어지고, 다른 인식은 마땅히 다른 기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감각의 고유성이 기분의 고유성을 담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세계가 다르면 세계와 소통하는 기분도 다르다. 세계-내-존재인 현존재는 열어 밝혀진 만큼만 그 현존재의 세계이므로, 더 좁은 세계, 더 넓은 세계, 세계 밖의 세계 이러한 말들이 의미가 있어진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언급하는 “니 별로 돌아가!” 혹은 “ 니 세계는 너무 독특해!” 아니면 “ 너만의 세계에 빠져있어!” 등등의 문장들은 사람들의 세계가 저마다 얼마나 고유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들이다.기분의 고유함은 현존재의 근본기분인 염려(마음 졸임)를 느낌에도 고유함을 국의 흑인인권운동을 처음 촉발시킨 로자 파크스에게 “ 그 날 당신은 왜 백인 전용 좌석인 앞자리에 앉았나요?” 로자 파크스는 사회 변혁을 꾀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진 않았다. 그녀의 동기는 아주 단순했다. “피곤했거든요.”하지만 이 일상적인 불안이 결단이후에는 용기로 탈바꿈된다. “거기 계속 앉아 있으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겠소.”“ 그렇게 하세요. 내가 사십 년 넘게 스스로를 가두었던 감옥에 비하면, 돌과 철망으로 만들어진 당신네 감옥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나는 이제 막 인종차별이라는 제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감옥에서 빠져 나온 걸요.” 로자 파크스는 피곤함으로 다가온 불안 기분을 통하여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에 빠져드는 것에서 문득 결단으로 나올 수 있음이 또한 우리에게 발견되어 지는 것이다.우리는 3절을 통해서 불안 기분의 각기 고유함을 통해 결단의 방향성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제 1 장 글쓰기 목표는 기분의 고유성을 기술하고자 함이었다. 이 기분의 고유성이 결단의 방향을 지음으로써, 후회의 원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기분이 후회의 원인을 각기 달리 말해 준다는 것이다. 제 2 장에서는 후회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하고, 후회의 원인 중에 결단 이후에 후회함의 원인을 더욱 말할 것이다. 결단 이후의 후회에 관한 논의는 아주 독특한 영역이다.제 2 장 후회의 까닭결단 이후의 후회의 문제에 관해서 논의하려한다. 결단의 부재로 인한 후회는 제거하고, 결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회스러움에 대한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다. 결단으로 인해 본래적 삶에로 방향을 전환했기에, 존재 가능성이 닫혀진 영역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끝내 존재 가능성의 전적인 닫힘을 부인하기에, 더욱이 후회가 부각되는 것이다. 존재 가능성의 열어둠을 후회의 원인으로 보고 이 글을 전개하려는 것이다.제 1 절 후회를 뉘우침으로 설명사람은 살면서 자신이 살아온 날들 또는 과거를 돌이켜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지난 일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확인 존재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게 해준 이가 바로 불안이다. 즉 불안이 현존재를 뒷간으로 보내게 해주는 것이다. 문지방인 불안은 이로써 현존재에게 ‘구린 뒤’를 청산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을 본래적 삶에서 비본래적 삶으로 결단하게 해주는 근본기분일 뿐 아니라, 그 결단 이전에 비본래적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하여, 뉘우침을 권면하는 기분이다.불안으로 인한 뉘우침은 비유하자면, 배속에 있는 구린 것들을 밖으로 쏟아내는 작업과 같다. 이 추하고, 용납할 수 없는 찌꺼기들을 눔으로써 뉘우치는 것이다. 이 때의 불안은 정확하지 않은 인식을 가져다 준다. 흔히 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 표현할 수는 없지만, 왠지 불안해!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어!” 등으로 표현된다. 이 말에서 우리는 정확한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불안이 뉘우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짚어낼 수 있다. 사람들이 뉘우치는 이유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기투 이후의 결단 이전의 과정으로만 볼 수가 없는 까닭이 또 여기에 있다. 뉘우침의 이유는 불안 자체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안의 이유를 죽음에의 염려로 본다. 죽음을 직시한 사람은 뉘우침이 인식의 결과이나, 막연한 죽음과의 조우는 인식 없는 뉘우침으로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하튼 불안이 뉘우침을 강요함에는 분명하다.우리는 이제 결단 이후에 뉘우침에 대해서 직접적인 거론을 해야 할 때가 왔다. 하이데거는 결단 이후에는 후회가 없다 하였다. 그 이유는 이 결단이 사르트르의 선택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결단은 양심이 소생하는 일이다. 결단하기 이전에는 양심이 없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양심의 개념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내적 도덕적 판단 기분’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양심은 ‘아무도 담당할 수 없는 나만이 질 수 있는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즉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결단 이후의 삶에는 더 이상 후회적이 결단 이후의 후회의 원인이다. 양심이 생겨, 결단 이후의 존재의 부름에만 응답하면서 삶을 짊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결단 이후 삶의 흔적조차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이 흔적이 후회스러운 것이다. 결단 이전에는 이 흔적은 흔적이 아니었고, 가장 생생한 삶이었다. 이 생생했던 삶이 흔적이 된 이유는 결단했기 때문이다. 흔적에 연연하는 사람은 없다. 흔적은 흔적일 뿐이다. 문제는 연연해하지는 않지만, 그 흔적이 얼마만큼 비본래적이었지를 명확히 깨닫게 된다. 이 때문에 결단 이후에 후회가 가능해진다.그러므로 결단 이전의 후회는 불안으로 인한 것이고, 결단 이후의 후회는 죽음으로 인한 것이다. 죽음 이후 옛 사람의 삶이 그리 후회스러울 수 없더라는 것이다. 결단 이후의 삶이 후회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이전 삶이 후회스러운 것이 결단 이후의 삶이다. 비본래적 삶 속에 남겨진 흔적이 결단 이후의 후회의 까닭이자, 뉘우침의 내용과 정도를 결정한다. 따라서 진정한 뉘우침은 결단 이후에 가능해진다. 결단 이전의 뉘우침은 배탈로 인한 뉘우침이라면 결단 이후의 뉘우침은 누어진 똥을 보고, 무엇을 먹었는가를 확인하는 뉘우침이다.제 3 장 후회와 시간후회라는 기분이 시간에 따라 어떠한 존재론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후회가 아니라, 기획투사와 성찰로 인한 사유의 흐름에 관한 시간이 기준이 된 후회이다. 따라서 사유의 흐름이 후회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숙고해볼 것이다.제 1 절 뒤쪽으로 뉘우침위에서 나는 ‘사람들의 후회’가 단지‘과거에로만’향해 있다고 말한 분위기를 보였다. 이 말은, 뉘우침의 말놀이로써 말해 본다면, 자신들의 ‘구린 뒤’를 ‘뒤쪽에다 뉘우친다’고 말할 수 있다. 짧게 말해, ‘뒤쪽-뉘우치기’는 앞뒤가 뒤바뀌게도, ‘구린 뒤’자체를 망각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뉘우치기’이다. ‘뒤쪽-뉘우치기’에서 사람들은 결코 자신의 ‘뒤’를 되돌아보는 것은 아니다. ‘뒤쪽- 뉘우치기’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자기와 다른 사람이다.
    인문/어학| 2009.06.26| 13페이지| 2,500원| 조회(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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