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과거제에 관하여목차Ⅰ. 서론Ⅱ. 본론1. 과거제의 도입배경2. 과거제의 변천3. 무과시4. 승과와 음서제① 승과② 음서제Ⅲ. 결론Ⅰ. 서론과거제도科擧制度의 과거란 과목에 따라 선비를 거용擧用하는 관리등용시험으로서, 인재를 뽑기 위해 실시하는 국가가 공인하는 시험 절차를 의미한다. 이러한 과거제도는 587년 중국 수隋나라 시대 문제(文帝, 581~604) 때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과거제도는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서 당시의 귀족세력, 즉 신권이 강했던 시기에 문제가 천자天子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방법으로 귀족가문에 의한 관리세습제를 타파하고 개혁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수나라 대에는 여전히 귀족가문 자제로서 관리가 되는 사람이 더 많았으므로 과거제도가 주도적 인재 선발방식은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의 과거제도는 송宋나라 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우리나라에서의 관리등용을 위한 시험제도는 신라新羅 원성왕(元聖王, 785~798) 4년(788) 때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그 시초이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에서 공부하던 육두품의 자제들 사이에서의 관리선발기준인 독서삼품과는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유명무실화되었다. 신라에서의 또 다른 인재등용의 방편으로는 세간에 잘 알려진 화랑제도가 있었는데 이것 또한 과거제도와 유사하게 운용되었다.그러나 좀 더 엄격한 의미에서의 과거제도,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과거제도는 고려高麗 광종(光宗, 949~975) 대에 당唐나라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후에 조선朝鮮시대까지 계승되었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도입배경과 변천과정, 불교국가 고려에서 승려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승과,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도 가문의 후광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음서에 대해 본문에서 살펴볼 것이다.Ⅱ. 본론1. 과거제의 도입배경고려 태조 왕건(王建, 918~943)은 호족출신으로 다른 호족들을 규합하면서 후삼국을 재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태조의 호족 규하였다.나. 명경과 - 유교경전에 대한 시험으로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 예기禮記 등에서 출제되었으며 명경업明經業, 생원과生員科라고도 하였다.다. 잡과 - 잡업雜業이라고도 하며 전문기술, 의학 등에 대한 시험으로 종류는 명법업明法業, 명산업明算業, 의업醫業, 주금업呪?業, 복업卜業, 지리업地理業 등이 있었다.위 세 가지의 시험에서 제술과와 명경과가 가장 우대되었다. 제술과 명경과 사이에서도 제술과를 중시하여 명경과보다 제술과에서 관료로 선발되는 인원이 더 많았다. 잡과의 경우 고려 정치·사회체계가 안정되면서 점차 약화되었으나, 시험은 계속 진행되었다.과거응시에 가능한 신분은 현재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외관상으로는 천민을 제외한 양인 신분이면 응시가 가능했으며 주로 국학생國學生, 향공鄕貢이 응시하였다. 초기 과거합격자는 주로 중앙교육기관에 배치되었다. 성종(成宗, 981~997) 대에 이르러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과거급제자들이 중앙관은 물론 지방관으로도 파견되었다. 문종(文宗, 1046~1083) 대에는 율령과 문물제도가 정비되면서 과거급제자가 지방관을 거치도록 하는 절차를 의무화하였다.중기에 이르러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문물제도의 정비와 사회 안정으로 인해 응시자가 급증하면서 예비고시와 최종고시로 분화되었다. 아울러 최종고시에서는 복시覆試가 실시되었다.예비고시로 국자감시가 있었는데, 국자감시는 성균시成均試·남궁시南宮試·감시監試·사마시司馬試 등으로도 불렸다. 국자감시는 향공시, 개경시開京試. 서경시西京試의 합격자들이 응시할 수 있었다. 서경시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서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서경은 고려 태조 때부터 개경과 함께 중시하던 지역이었다. 서경에도 중앙교육기관을 두어 교육수준이 높았다. 서경에서도 국자감시와 동등한 진사를 선발하는 자격고시가 있었으나 어떠한 과거시험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서경시는 서경 유수留守의 주관하에 시행되었다. 앞서 말한 향공시, 개경시, 서경시에 합격하고 국자감시에 합격해야만 최종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최종고시는 예부禮뜻하며 이 글에 등장하는 최충(崔?, 984~1068)은 사학십이도 중 가장 유명한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창시자였다. 사학십이도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과거 합격률이 높았기 때문에 과거를 준비하는 자들이 사학으로 몰려 관학官學이 위축되었다. 최충을 비롯한 사학십이도 창시자들은 모두 지공거출신으로 이때부터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를 스승격인 좌주座主, 이들 지공거가 주관하던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자들을 제자격인 문생門生이라하는 좌주-문생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그들만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고려 말까지 중앙 정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인종(仁宗, 1122~1146) 대에 이르면 이자겸(李資謙, ?~1126)과 같은 외척이 득세하면서 왕이 주관하는 복시가 폐지되었다. 이는 왕권약화와 더불어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자겸과 같은 외척을 축출한 이후에도 복시가 회복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문벌귀족들이 이를 악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했기 때문이다.무신난(1170)이후 무신들이 집권함으로서 문벌귀족이 몰락했고 문신들의 위상도 추락하였다. 하지만 무신집권기에도 과거시험은 계속 진행되었다. 특히 최씨 무신 정권은 문한관을 중시하여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인재 일부를 휘하의 문한관으로 뽑아 보좌토록하고 이들을 후에 고위관직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현실은 과거에 급제한 지식인들로 하여금 경학經學보다는 외교문서 작성에 필요한 작문을 숭상하게 하였다. 이들은 이른바 글을 잘짓는 자질을 향상시키기에 급급하여 학구적이 아닌 경박한 문풍文風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았다.고려 후기 원元간섭기에 이르면 국가의 힘은 약화될 대로 약화되었으나, 과거를 통한 좌주와 문생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뭉쳐졌으며 과거제도도 이들을 중심으로 비교적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려 중기부터 복시가 없었기 때문에 후기에 이르면 좌주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좌주-문생관계는 부자父子관계로, 동년급제자들은 형제로 비견될 만큼 끈끈해졌다. 이러한 관계는 왕권강화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공민왕(恭愍王, 夢周, 1337~1392) 등 신예 성리학자들을 교관으로 삼아 경서經書를 전공별로 나누어 강좌와 강의와 토론을 겸한 교육을 실시하여 성리학을 중흥시켰다. 이러한 교육제도와 학풍의 전환은 뒤에 치러진 과거에 영향을 주었다. 공민왕 17년(1368) 신돈은 기존 과거 시행을 금지하고 왕이 주관하는 친시親試를 시행함으로써 과거 좌주·문생간의 유대관계를 끊고 왕과 과거합격자 간 새로운 좌주·문생관계를 형성하여 왕에게 충성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편하였다. 과거시험내용 또한 시부 중심에서 경학중심으로 바뀌었다. 다음해에는 원의 회시제도를 도입하였다 과거제의 순서를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로 개편하여 과거 급제자들을 위한 연회를 금지함으로서 군현의 불필요한 재정지출을 막았다.신돈과 공민왕 사후 우왕(禑王, 1374~1388) 2년(1375)에 이르러 공민왕 대에 집중적으로 육성한 신진세력들이 권문세가權門勢家들에 의해 밀려나고 과거제도 역시 공민왕 17년 이전으로 돌려놓았다. 향시-전시-회시가 폐지되었으며 시험관을 지공거 중심으로 시험 출제를 경학 대신 시부 중심으로 다시금 바뀌었다. 하지만 신진세력이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재위: 1392~1398) 등 신흥무인세력과 연합하여 위화도회군을 통해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 1388~1389)이 옹립되면서 과거제도를 다시금 공민왕17년 이후의 과거제로 되돌려놓았다. 이는 후에 조선의 과거제까지 이어졌다.공민왕대와 창왕대의 과거 개혁은 전국적인 인재수용을 위해 철저한 향시 실시, 3단계 시험과 최종고시인 전시에서 왕권 개입, 사관의 수적증가와 좌주·문생의 연결고리 및 연회 금지로 요약된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명칭만 바뀌었을 뿐 과거제의 틀은 그대로 존속되었다.3. 무과시과거제가 도입된 초기에는 무과시武科試는 없었다. 예종 4년(1109)에 이르러 무과시가 처음 실시하였다. 고려시대 무과시는 예종 4년(1109)을 기점으로 인종 11년(1133)까지 24년간 실시되었으나. 결국 숭문언무(崇文堰武 간에 교리에 대한 논의도 있었음은 무신정권 초에 열린 총림회의 방문에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이처럼 태조가 실시했던 불교계를 위한 회유 의미의 행사는 다수 있었지만 승과가 제도화되기 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렸다. 그러다 승과가 실시된 뚜렷한 최초의 기록은 원공국사圓空國師 지종(智宗, 930∼1018)의 비문이다.“현덕 초에 광종대왕이 왕위에 올라 불교를 숭상하고 깊은 산의 승려를 모아 식견을 펴게 한 다음 탁월한 승을 뽑아 합격을 명시하였다.”지종이 승과에 급제한 다음 중국으로 떠난 시기가 959년 이므로 승과가 일반 과거보다 먼저 실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으로 승과를 확인할 수는 없으며 더불어 승과 실시 횟수도 정확히 알 수는 없고 짐작만 할 뿐이다. 대략적으로 인용문 등을 통해 3년에 1번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일반 과거 제도와 마찬가지로 유동적으로 운용되었다.승과의 절차는 예비고시의 성격을 띠는 성복선成福選을 치르고 최종고시에 해당하는 대선大選을 합격하면 최하위 승계인 대덕大德을 제수받고 주지로 등용이 되는 것이다. 성복선은 일반 과거의 국자감시이고 대선은 예부시에 대비되며 종파宗派마다 명칭이 다르지만 대체로 대선은 일반적인 승과의 최종고시 명칭이다. 대선은 선석, 선불장, 선과, 국시, 승선, 현과, 선장 등으로 불리기도 하나 결국 고승을 선발하는 본래의 의미는 일맥상통한다. 교종에서는 그렇게 부르고 선종은 취석을 예비고시로 선선을 최종고시로 부른다. 선선 또한 선태선, 태종선, 조계종선, 구산선, 오교대선 그리고 종증선으로 부르지만 교종과 마찬가지로 고승을 선발하는 의미이다. 추가적으로 장원에 해당하는 합격자는 괴과魁科라고 불리며 명확히 구분되었다.승과 실시 장소는 종파에 따라 달랐는데 선종선은 광명사光明寺에서 교종선은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되었다. 이례적으로 봉은사奉恩寺와 미륵사彌勒寺에서 실시된 경우도 있다.② 음서제음서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고려시대의 귀족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귀족을 문벌귀족이어졌다.
묵자墨子는 반전反戰평화주의자인가?1. 묵자의 묵가墨家는 군사 집단인가 학파學派인가?춘추전국시대 이전 주周의 천자와 봉건 영주들 모두가 각자의 군사적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세습적 전사들로서 당시의 군사조직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 봉건 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들 전투 전문가들은 그들의 직위와 직함을 상실하여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를 고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봉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 계층의 사람들이 사士 또는 무사武士라 알려졌다. 그리고 이들 두 용어는 "기사 수행자" 또는 협사俠士라 번역될 수 있다. 이들 혐사에 관하여 사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그들의 말은 언제나 신의가 있고,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신속 과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고, 자신들의 몸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위협을 막기 위해 뛰어 들곤 하였다."묵자사상의 대부분은 사와 무사, 두 용어에서 나타나듯이 직업에 관한 윤리관의 확대이다. 중국사에 있어서 유儒와 사 또는 혐사는 다 같이 귀족의 집안에 예속된 전문가들 출신이었고, 그래서 그들 스스로도 상류 계층의 일원들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유는 계속하여 주로 상류 또는 중간 계급의 출신들이었으나, 사는 이에 반하여 하층 계급으로부터 보충되었다. 묵가 구성원을 대부분이 이러한 하층 계급출신이다. 고대에는 의식이나 음악과 같은 사회적 행사는 모두가 전적으로 귀족을 위한 것이었다. 평민의 의식, 음악과 같은 행사는 실제적 효용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치였다. 묵자와 묵가가 전통적 제도와 이러한 제도의 합리화를 꾀한 공자孔子와 유가儒家들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였다. 이러한 비판이 그들 자신의 사회적 계층의 직업적 윤리, 즉 사의 윤리와 더불어 묵가철학의 핵심을 이룬다.묵자와 그의 제자들이 사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는 풍부하다. 『묵자』에서는 물론, 당시의 다른 저서들을 통해 보더라도 묵가가 군사적 행위가 가능한 엄격한 규율을 가진 조직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묵가들의 조직의 지도자는 거자鉅子라고 불렀으며, 거자는 조직의 성원에 대한 생살권을 가지고 있었다. 묵자는 그의 조직의 최초의 "거자"였으며, 초楚가 송宋을 침공했을 때 송을 군사적으로 방위하기 위하여 실제로 제자들을 지휘하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묵가집단을 전통적인 무사·협사집단으로 볼 수 있으나. 묵자와 그의 제자들은 두 가지 면에서 통상적 협사들과는 달랐다. 첫째, 무사들은 봉건군주들에게 총애를 받고, 자기 수고의 대가를 받기만 한다면 어떤 전쟁에도 참가할 준비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묵자와 그 제자들은 공격적 전쟁을 완강히 반대하였고, 자기 방어를 위해서만 싸우기로 합심하였다. 둘째, 통념적인 사는 오로지 자기의 직업윤리에 따라서 행동하였지만, 묵자는 이 직업윤리를 잘 다듬어 거기에 합리적인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처럼 묵자의 묵가는 전형적인 군사집단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묵자와 묵가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실용·절제·평화주의적 학파라고 국한시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제자백가의 여러 학파 중 병가兵家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전쟁에 참전한 학파였고, 묵자 또한 그의 저서를 통해 후학들에게 공성전攻城戰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 전략의 한 부분인 공성전을 가르쳐 전쟁에 참전시키면서도 반전反戰평화를 강조한 묵자,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묵자가 주장한 반전평화는 무엇이며, 왜 그는 반전평화와 상반되는 공성기술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는가?2. 묵자의 반전평화론과 공성기술을 가르친 이유묵자는 자신의 저서 『묵자』「비공편非攻篇」에서 어느 편에서 보다 많은 예화를 열거해 가면서 반전평화를 주장했다. 비공편의 일부를 통해 살펴보면, 묵자는 공격전쟁을 반대하는 논리를 펴기에 앞서 당시의 일반적 관념인 상투화된 사고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묵자는 비공편에서 먼저 기존의 잘못된 관념을 깨뜨리고 있다.“지금 여기 한 사람이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서 복숭아를 훔쳤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고 위정자는 그를 잡아 벌할 것이다. 남을 해치고 자기를 이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남의 개, 돼지, 닭을 훔친 사람은 그 불의함이 복숭아를 훔친 사람보다 더 심하다. 남을 해친 정도가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더욱 많이 해치면 그 불인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남의 마구간에 들어가 말이나 소를 훔친 자는 그 불의함이 개, 돼지나 닭을 훔친 자보다 더욱 심하다. 남을 해친 정도가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남을 해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불인도 그만큼 심하게 되고 죄도 무거워 지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옷을 뺏거나 창이나 칼을 뺏는 자는 그 불의함이 말이나 소를 훔친자보다 더 심하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천하의 군자들이 모두 그것의 옳지 못함을 아고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불의하고 부른다.“ 그러나 열 명, 백 명을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을 살인하는 전쟁에 대해서는 비난 할 줄 모르고 그것을 칭송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다.묵자의 비공론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관념체계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시대는 이름 그대로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다.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하였다. 전쟁은 수천 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는 최대의 죄악일 뿐이라 하였다. 단 한 줌의 의로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전쟁이라고 보았다. 그는 비공편의 결론으로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면 힘을 합하여 소국을 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제후국들이 서로 교상리交相利의 평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상리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묵자는 이익을 부차적이고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유가적 관점에서 탈피하여 이익을 나누는 것이 의로운 것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로서로 이익을 나누자는 것이 교상리적 관점이다. 묵자는 교상리적 평화구조를 만들어내야만 전쟁의 파괴를 막고, 신의와 명성을 얻고, 천하에 끼치는 엄청난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국가간의 교상리의 구조라는 것이다.묵자의 비공편이 갖는 의미는 전쟁에 관한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반젼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차별적인 인명살상과 재정피해를 막고 궁극적으로 묵자사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겸애兼愛를 실현하는 것이 묵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반전평화사상은 당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에게 환영받을만한 사상이었으나,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던 각 국 군주들에게는 소 귀에 경읽기와 같았다. 이들 군주들이 관심을 보였던 것은 묵가의 공성기술이었다. 묵자는 『묵자』에 「비성문편備成門篇」에서 「잡수편雜守篇」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분량의 공성기술에 대한 내용을 수록했다. 묵가집단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성기술과 장비들을 발전시켰다. 영토의 확장도 중요했으나 영토를 수호하는 일도 중요했던만큼 군주들은 묵자와 묵가집단의 공성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묵자와 묵가집단은 자신들의 공성기술을 주로 강대국의 침공을 받는 약소국을 지키는데 사용하였다. 전형적인 수비기술인 공성기술연마를 통해 강대국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서 묵자의 가르침인 비공을 실현하는 것이 묵가집단의 사명이었다. 또한 이들은 성을 수비하면서 침입해오는 적들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고 살상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성에 근접할 수 없도록 당시 성벽 위를 공략하기 위해 사용된 무기인 운제雲梯를 밀쳐내는 도구와 청동으로 제작한 거울을 사용해 빛을 반사하여 적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등 그들의 공성기술을 사용했다. 이 또한 인력의 중요성과 겸애를 강조한 묵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들 묵가집단은 적들의 침입으로부터 공성에 실패할 경우 항복하거나 최후의 저항이 아닌 집단자살을 택하는 극단성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초나라에 망명하여 재상이 된 오자병법吳子兵法의 저자 오기吳起와 그의 세력이 초의 귀족들에게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오기를 추종했던 양성공陽城公의 저항에 묵가집단이 개입하였다. 묵가집단은 원래 국가내란에는 개입하지않았으나, 당시 묵가집단의 거자로 초나라에 방문한 맹승孟勝이 묵자의 사상에 심취해있던 양성공이 반역자로 몰려 제거되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기에 양성공의 기반인 양성을 지키는데 협조하기로 하였다. 맹승은 초나라에 상주 중인 182명의 묵도를 이끌고 양성공을 체포하러 온 초나라군대에 맞서 양성공의 군대와 함께 공성전을 수행하였다. 수적열세와 더불어 적에 대한 살상을 금지한 묵자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키며 공성전을 수행한 맹승의 묵가집단은 공성에 실패하였다. 맹승은 공성전에 앞서 송나라에 있던 묵도 인양자因襄子에게 거자직을 물려주고 공성실패 이후 182명의 묵도들과 집단자살을 택했다.집단자살을 택하면서까지 전쟁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지킨 묵가집단, 이들의 행위는 옳은 것이며 이들에게 비공, 겸애, 살상금지 등을 가르치면서도 공성기술을 가르쳐 묵가집단을 전쟁에 개입하도록 유도한 묵자는 진정한 반전평화주의자라 할 수 있을까?3) 묵자는 반전평화주의자인가?묵자는 비공론을 내세워 각 국가간의 전쟁을 막고 평화도모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다른 제자백과와 달리 언변과 학문적 가르침으로만 비공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을 통해 전쟁억제에 앞장섰다. 묵자가 송나라에 머무를 때 초나라의 공수반公輸般이라는 자가 성을 공략하기 위한 운제를 개발하여 송나라를 침략하려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묵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초나라로 가서 공수반과 초왕을 만나 그들을 설득했다.
민주주의와 현대사회 과제1. 바라다트의 정의바라다트(L. P. Baradat)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태도의 스펙트럼을 크게 급진, 자유(진보), 온건, 보수, 반동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간략히 정리하면 급진주의는 현실변혁을 꿈꾸며 글자 그대로 급진적이다. 자유주의(진보주의)는 현 체제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현 체제를 옹호하며,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지향한다. 온건주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사회 변화를 수용한다. 보수주의는 현실에 안주하며 변화를 거부한다. 반동주의는 현 상황에서 복고주의로의 회귀를 꿈꾼다.2. 바라다트의 정의에 따른 대한민국 정당 분류바라다트의 정의에 따라 대한민국 정당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현재 국회의원 의석수 158석(지역구 131석, 비례대표 27석)으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여당 새누리당은 보수주의에 가깝다. 대통령과 과반수 이상 의석수를 확보한 새누리당은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으며, 현 체제 유지와 기득권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15년 예산 편성 방향을 토대로 보면 크게 복지확대, 경제활성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대통령 임기 중에 개헌도 계획중인 것으로 보아 보수주의임에도 상당히 개혁적이다.국회의원 의석수 130석(지역구 109석, 비례 21석)으로 제 1야당을 구성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은 온건주의에 가깝다. 제 1야당이나 여당인 새누리당이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야당의 가장 큰 역할인 견제를 완벽히 수행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들은 현 체제를 수용하면서 훗날 여당으로의 도약을 위해 민심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한 사항인 대북관계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국회의원 의석수 5석(지역구 1석, 비례 4석)을 확보하고 있는 정의당은 자유주의(진보주의)에 가깝다. 이들은 현재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어 개혁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개혁을 하되 현 체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생긴지 얼마 안된 정당이어서 당원확보 등 세력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국회의원 의석수 5석(지역구 4석, 비례 1석)을 확보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바라다트의 정의로 분류하기 가장 어렵다. 정당 명칭을 보면 진보주의(자유주의)로 볼 수 있으나, 그들의 행보를 보면 급진주의와 같다. 그들은 현 체제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정책을 보면 현 정권의 정책들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상당히 적대적이고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정의당보다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만, 친북성향으로 인해 소수의 지지층만을 확보하고 있다.3. 보수와 진보에 따른 대한민국 정당 분류보수와 진보라는 구분은 프랑스에서 탄생한 것으로 그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민공회시기이다. 대한민국 정당을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보수, 정의당과 통합진보당은 진보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정의당은 보수, 진보에서 조금 더 세분화하자면 중도에 가깝다. 현 여당인 새누리당과 과거 여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은 현 체제 틀 안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기에 보수이다. 정의당은 현 체제의 틀을 유지하나, 사회 전반적인 개혁에 대해 낙관적인 모습도 지니고 있기에 중도에 가깝다. 통합진보당은 현 체제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기에 그나마 진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4. 대한민국 정당들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새누리당은 복지, 경제 분야에 치중하며 여당, 과반수 이상의 의석수를 보유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권을 잡기 전 대통령선거 때 국민들에게 내세운 증세없는 정권 공약을 정권 획득 이후 주민세, 자동차세 등 여러 세금을 증세함으로써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국민들의 큰 반발을 야기하고 있으나, 대한민국에서 이들을 대체할 정당이 현재로서는 전무후무하기에 당분간 계속 막대한 힘을 지닌 여당으로 군림할 것이다.새정치민주연합은 제 1야당으로서 여당인 새누리당을 견제하며, 차후 정권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민심 확보를 위한 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며 새누리당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대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가장 민감한 사항인 대북관계에 대해 온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서 이러한 마인드를 버리지 않는 이상 정권획득은 힘들 것이다.정의당은 생긴지 얼마 안된 정당이다보니 세력이 미흡하다. 그들의 행보에 대해 조금 더 지켜봐야하나, 국민들의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고 행동한다면 추후 원내교섭단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통합진보당은 대한민국에 가장 해가될 정당이다. 이들에게 국가 안보란 없다. 이들의 행보를 보면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 혼란에 휩싸이길 바라는 것 같다. 이들 정당 명칭에 쓰인 진보라는 단어는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을 지지하는 국민들부터 반성하고 깨달아야 한다. 과거 베트남 전쟁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통합진보당은 대한민국의 분열에 앞장설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건 전쟁의 승패를 떠나 토사구팽 혹은 반역자 숙청 밖에 없을 것이다. 종북주의 성향을 버리든 정당을 해체하든 양자택일해야 할 것이다.5. 보수와 진보에 대한 나의 생각내가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기준은 힘 즉, 권력의 유무이다. 권력자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이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變革)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의 권력 안에서 피권력자들을 효율적 통치를 위해, 선심성으로 피권력자들의 변혁 요구 중 자신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의 변화만을 추구한다. 이외에 자신들의 권력에 해가되는 것들은 가차없이 제거한다. 이를 통해 권력자들은 보수화된다. 권력자들과 이들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나타내며,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일부 피권력자들은 사회에서 진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이들은 권력자들에 대항하며 사회 전반적인 변혁을 요구한다.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 보수가 승리할 경우, 보수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는 한편 또다시 진보가 표출한 불만, 변혁 내용 중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수용하여 민심의 이동을 막는다. 패배한 진보는 자신들의 실패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또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새로운 진보 세력으로 거듭난다.
정약용과 서학사상에 관하여 - 천주교를 중심으로목차Ⅰ. 서론Ⅱ. 본론1. 서학의 유입2. 정약용의 생애와 서학사상 - 천주교를 중심으로3. 천주교와 관련된 정약용의 주요 이론⑴ 천(天)과 상제(上帝)⑵ 심(心), 성(性), 혼(魂)Ⅲ. 결론Ⅰ. 서론정치, 사회적 문제가 다양해지고 커질수록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개혁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현 정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안을 내놓는다. 이러한 개혁안은 주로 정치, 사회적 문제가 적었던 과거의 어느 시점 즉, 역사를 밑바탕에 두거나 외부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다. 조선후기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적으로 붕당(朋黨)간의 대립과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反성리학적 사상은 모두 배척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동요되고 있었다. 상층부를 장악하던 양반은 권력을 가진 권반, 권력에 밀려나 향촌에 내려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향반, 변화된 사회에 적응못하고 도태된 잔반 등으로 나뉘어졌다. 광작과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일부 상민들이 납속, 공명책, 양반의 족보를 구매함으로서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중인, 서얼들은 납속, 공명첩, 소청·벽서운동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노비들의 경우 군공이나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도망의 방법으로 신분을 바꿨다.이에 많은 개혁가들이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실학자들이다. 이들은 크게 중상학파(重商學派). 중농학파(重農學派)로 나누어진다. 중상학파는 18세기 후반 북학파(北學派)를 중심으로 하며, 상공업의 발달을 중시하였다.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박제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들은 농업에 기초한 유교적 이상국가론에서 벗어나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 혁신 등 부국강병을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용후생(利用厚生)학파로도 불리운다.중농학파는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성호학파(星湖學派)를 중심으로 하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이익였다. 조선이 개국 당시부터 정확한 역법의 이정에 몰두한 이유는 제왕학의 교재인 『서경(書經)』「요전(堯典)」의 맨 처음에 명시되어있는데, 역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정확한 농시를 제공하는 것이 제왕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조선왕조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국왕의 임무로 인식되어졌다.이러한 이유는 청에 비록 반감이 많았으나, 정치적으로 필요한 선진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중국 즉, 청밖에 없었다.조선정부의 청국을 통한 서학의 수용 노력이 역법을 넘어 수용의 범위가 확대되고 본격화된 것은 정조 때였다. 정조의 서양역법에 대한 인식도 역대 국왕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천주교 서적의 국내 유입은 철저히 금지시키고 있었지만 서기 관계 서적에 대해서는 계속 수입을 추진하였다. 예를 들어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서호수(徐浩修, 1736~1799)를 시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청대에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총 권수 1만 권, 목록 40권. 천문(天文)을 기록한 역상휘편(曆象彙篇), 지리·풍속의 방여휘편(方輿彙篇), 제왕·백관의 기록인 명륜휘편(明倫彙篇), 의학·종교 등의 박물휘편(博物彙篇), 문학 등의 이학휘편(理學彙篇), 과거·음악·군사 등의 기록인 경제휘편 등의 6휘편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다시 32전(典) 6,109부(部)로 세분하여 각 부는 휘고(彙考)·총론·도표·열전(列傳)·예문(藝文)·선구(選句)·기사(紀事)·잡록(雜錄) 등으로 구분한 실로 방대한 서적이었다.5,022권을 구입해 오게 했던 조치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정조의 개방적인 태도는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그의 경세관에 바탕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기반이었던 성리학적 질서는 버리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서학의 종교적 측면인 천주교에 대해서 유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를 막기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한 예로 뒤에서 언급하겠으나 정조 15년(1791)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하자 정조는 대내에 있는 모든 서학서를 모조리 불태웠다. 여하(丁載遠, 1730~1792)와 어머니은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 넷째아들로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출생하였다. 정재원에 대해 조금 언급하자면 영조 38년(1762)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으며, 영조 43년(1767)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가 연천현감(漣川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영조 46년(1770) 이후에는 한동안 벼슬을 하지 않다가, 정조 원년(1776) 화순현감(和順縣監)을 지내고 정조 4년(1780)에는 예천군수(醴泉郡守)를, 정조 14년(1790)에는 진주 목사(晋州 牧使)를 지냈다.정약용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였다. 한 예로 7세 때부터 한시를 짓기 시작하여 10세 때자신이 지은 시들을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16세 때인 정조 2년(1777)에 인척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을 따라 이익이 저술한 책들을 읽으면서 성호학파의 학풍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서기를 접하고 익히기 시작했다. 22세 때인 정조 7년(1783) 초시에 합격하였다. 23세 때인 정조 8년(1784) 인척이었던 이벽(李檗, 1754~1785)을 통해 서학의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이벽으로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칠극(七克)』 간단히 요약하면 천주실의는 마테오 리치(Ricci,M., 利瑪竇)가 한자로 저술한 서학서이며, 칠극은 예수회 신부 판토하(Pantoja, D., 龐迪我)가 지은 일종의 심신 수양서이다.등의 천주교 관련 서적을 받아 읽었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한시기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조 3년(1779) 주어사(走漁寺)에서 이벽이 주관한 천주교 교리에 관한 강학(講學)에 당시 18세였던 정약용이 참석했는가 안했는가가 주요 논점이다. 당시에 참석했다면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한 시점은 이때가 될 것이나 확실하지 않아 본인은 정약용이 처음 천주교 관련 서적을 접한 정조 8년(1784)을 기점으로 삼았다. 개인적 견해로 절에서 천주교에 대해 논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이와 더불어 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웅변으로 설명하는 것을 듣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였으니, 그 본원인 심술(心術)의 바탕에 있어서는 대체로 기름이 퍼짐에 물이 오염되고 부리가 견고함에 가지가 얽히는 것과 같은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한번 이와 같이 되었으니 이는 바로 맹자(孟子) 문하에 묵자(墨者)인 격이며 정자(程子) 문하에 선파(禪派)인 격으로 큰 바탕이 이지러졌으며 본령이 그릇된 것으로, 그 빠졌던 정도의 천심이나 변했던 정도의 지속은 논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내가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겠다.’고 하였으니, 신 또한 올바른 것을 얻고서 죽으려 합니다.신이 이 책을 얻어다 본 것은 대체로 약관의 초기였습니다. 이때에는 원래 일종의 풍기(風氣)가 있었는데, 천문(天文)·역상(曆象) 분야, 농정(農政)·수리(水利)에 관한 기구, 측량하고 실험하는 방법 등에 대하여 잘 말하는 자가 있었으며, 유속(流俗)에서 서로 전하면서 해박하다고 했으므로 신이 어린 나이에 마음속으로 이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조급하고 경솔하여 무릇 어렵고 교묘한 데 속하는 글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탐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찌꺼기나 비슷한 것마저 얻은 바가 없이, 도리어 생사(生死)에 관한 설에 얽히고 남을 이기려 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경계에 쏠리고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에 미혹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나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문원(文垣)의 기이한 구경거리나 되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과 담론하면서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배격을 당하면 그의 문견(聞見)이 적고 비루한가 의심하였으니, 그 근본 뜻을 캐어보면 대체로 이문(異聞)을 넓히려는 것이었습니다. ...........(생략)애당초 그것에 물이 들었던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은 일이었으며 지식이 조금 성장해서는 문득 적이나 원수로 여겨, 알기를 이미 분명하게 하고 분변하기를 더욱 엄중히 하여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군부(君父)에實錄』, 「純祖 2券」, 1年,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위와 같이 정약전과 정약용은 사형을 면하였으며, 그해 2월 이승훈, 정약종 등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정약전은 신지도(薪智島)로, 정약용은 장기(長)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그해 9월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 백서의 내용은 천주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국가를 청의 지배 속에 넣게 하려는 계략이나 서양의 군함을 불러들여 국가를 위협하기를 청하는 것으로써 이는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역모에 해당하는 중죄였다.가 발각되면서 황사영이 체포되자 친척이었던 정약용도 다시금 잡혀갔으나. 그해 12월 정약용은 다시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약 18년간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동안 유교경전의 방대한 주석과 더불어 경세론의 저술에 몰두하였다. 57세 떄인 순조 18년(1818), 유배에서 풀려나 헌종(憲宗, 1834~1849) 2년(1836)에 사망하기까지 고향에서 경세론과 경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모시강의(毛詩講義)』,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례사전(喪禮四箋)』,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등이 있으며 대부분 유배기간과 귀향생활동안 편찬한 것이다.정약용이 유배기간, 귀향생활동안 과거를 참회하며 다시금 천주교로 회심(回心)하고 사망직전까지 신앙생활을 이어갔다고 하나 이 사실도 학계간 의견이 분분하다.3. 서학과 관련된 정약용의 주요 이론⑴ 천(天)과 상제(上帝)정약용의『중용강의(中庸講義)』는 자신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이벽과 『중용』에 관해 토론한 것을 작성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조선후기의 근간인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정약용의 경학의 기반인 사천학(事天學)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이 담겨있다. 이는 『천주실의』등 예수회의 보유론(補儒論) 보유론, 간단히 설명하자면 예수회가 중국에 선교하면서, 중국 학문의 근간인 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