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키 혁명전체적인 개관볼셰비키 혁명은 그 연구 주제가 한 마디로 광대하다. 그 혁명의 기간부터 시작해서, 이 기간 안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여려 혁명의 종류와 성격, 혁명 기간안의 혁명을 이끌어나간 사상적 흐름의 변화, 러시아의 정체 사회적인 배경과 그 사회 안의 여러 가지 정치 및 혁명조직, 왕족, 귀족, 농촌과 농민을 혁명기반과 대상으로 하는 나로드니키, 같은 뿌리지만 다른 멘셰비키, 볼셰비키의 탄생 배경 성장과정, 레닌이라는 인물 연구, 혁명 과정동안 진행되는 각 혁명세력 간의 이해관계, 각 혁명 그룹안의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이해관계 변화, 혁명 후에 일어난 반혁명 등 하나하나가 큰 연구 주제이다.그렇기에 필자는 볼셰비키 혁명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 중에서 포괄적으로 러시아 전체 혁명을 시기적으로 살펴보고 그 속에서 레닌의 영향력에 중점을 두고 글을 전개해 나갈 생각이다.역사적으로 많은 혁명이 완수되어 왔지만, 볼셰비키 혁명만큼 한 개인의 영향력이 막대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보고서에 레닌이 스위스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어떠한 진행 과정을 거치며 러시아 혁명의 종지부를 찍었는지 레닌의 개인사를 다루면서 이와 동시에 러시아 혁명의 전체적 상황을 살펴 볼 것이다.볼셰비키 혁명의 시기는 전체적으로 간단하게 개괄한 뒤에 자세하게는 격동의 1917년 시기를 전후해서 다룰 것이다. 2월 혁명부터 시작해서 4월 태제와 7월 위기, 10월 쿠데타와 소비에트 국가의 설립과 그 후의 반혁명의 완전 소탕까지 다룰 것이다.볼셰비키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과 역사관의 유형필자는 볼셰비키 혁명을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관점 중에서 포괄적으로 러시아 전체 혁명을 시기적인 틀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레닌의 영향력에 중점을 두고 글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앞에서 밝힌바 있다. 그와 함께 한 가지 고려해야할 사실은 또한 지금까지 역사관은 대부분 영웅주의 역사관으로 한 개인 혹은 특정 그룹의 사건과 전개 과정에 의해 선도되고 변화된 역사관이 그 주류였다면, 풀뿌리황에의 적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무엇보다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가혹성과 대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비민주적 엘리트주의, 인위적 폭력론 등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후에 그 외연을 확대하여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 과정을 밟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실제로 마르크스에게서 혁명운동을 정당화하는 신화를 취하였으나, 혁명의 전략 ·전술은 오히려 그의 활동무대였던 러시아의 암울한 사회와 무정부주의자 M.A.바쿠닌으로부터 습득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러시아의 국제적 상황- 이 당시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독일이 세계 제1차 대전을 일으켜 영국과 프랑스와 손을 잡아 연합국과의 동맹상황이었다. 러시아 혁명에 독일과의 전쟁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은 러시아와의 전투를 위한 동부전선에 약 천만 명가량의 인원을 투입했었고 그것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레닌이 러시아 혁명으로 독일과 휴전을 기대하여 레닌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러시아 민중의 상황-노동자 계급-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 노동자들은 차르와 그의 내각의 무능과 독일과의 무리한 전쟁에 의해 공장이 가동을 멈춰 도시 주변을 배회하거나 거리로 내쫓기게 된다.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을 전파하며, 자본가를 대항한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한때 레닌과 레닌의 아내인 크루프스카야가 또한 이런 일들을 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노동자계층에 미비하지만 마르크스의 혁명사상이 전파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역량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다.농민-당시 러시아 사람 열 가운데 여덟이 농민이었다. 2월 혁명과 10월 쿠데타가 일어난 지역이 바로 도시지역인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기 때문에 농민에 대한 배경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있지만, 혁명과 쿠데타의 분수령이 된 이들이 바로 차르의 군대조직 안에 대부분의 병련의 소요사태가 발생했을 때 러시아 내각은 그것을 가까스로 진압하지만, 이로 인해 국가 행정은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특히 경찰국이 분해되고 있었다. 경찰국장이 사직되어 후임이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특별과는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해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대 세력은 정부의 법령을 무시한 채 집회와 시위를 사실상 마음대로 열기에 이르렀고, 언론에 대한 군대의 검열도 중단됐다. 그런데도 내무부는 무사태평으로 러시아 2월 혁명을 앞당기고 있었다.4.군대 병사들의 배신차르의 무능함속에 시위 군중들은 더욱더 대규모의 시위와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하지만, 차르는 무능했으나 당시 소요사태가 일어나는 수도에는 시위를 충분히 진압할 만한 수의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시위자의 숫자는 약 20만 명에 다랬다. 하지만 이 당시 수도의 경찰 및 군대의 병력은 결코 적지 않았다. 약 16만 명의 군.경이 있었다. 후에 나오지만 차르에겐 안타깝게도 이들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위 군중들에게 동정적이었다.장교들이 시위 군중들을 향한 발포명령을 내렸을 때, 병사들은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 군중들에게 자신은 군중들의 편임을 알리며 총을 나눠주기 시작했다.병사들이 차르의 편에서 시위 군중들의 편으로 돌아섰을 때, 혁명은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월 혁명은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묘사될 수도 있겠으나, 농민 출신 병사들의 반란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이때부터 차리즘 정부는 수도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2월 혁명의 특징시위를 이끄는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수한 민중 자발적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의 일련의 과정동안 볼셰비키 당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수행해 내지 못했다.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있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여서 거의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이고, 몇몇 지도자들은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병사들과 시위 군중들이 연계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혁명이 성공하리로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민중의 혁명역량을 간과했던 것이다.또한 역사가담하여 연합정부가 된다.볼셰비키-레닌에 의해 독자적인 혁명노선을 지향하며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단계다. 4월 테제에 나오는 그의 분리주의와 반전론, 과격한 혁명노선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었지만, 그의 확신과 신념에서 나오는 강한 열정으로 볼셰비키는 말 그대로 오직 레닌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리고 레닌은 오직 자신만을 따르는 볼셰비키와 하나 되어 혁명의 과업들을 착실하게 수행해 나간다. 물과 물고기의 만남이었다. 레닌의 모든 뜻과 원칙이 곧 볼셰비키의 모든 뜻과 원칙이 된다.소비에트-현재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러시아의 실제적인 권력기관이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그밖에 많은 노동자와 농민 병사의 대표들이 모여서 러시아의 모든 정치행정을 통괄하고 있다. 특정한 권력자들에 의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러시아를 이끌어가는 정치기관이라기 보다는 정치기관 배후에 있는 권력 그 자체라 봐야 할 것이다. 소비에트를 장악하는 정치집단이 곧 러시아를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당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그다음이 멘셰비키, 젤 소수당이 볼셰비키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는 내부 당내 파쟁과 이론투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고,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 이론을 교조적으로 따르고 있었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아래, 자신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러시아의 권력 장악을 전혀 시도하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바보 같이 산업발달이 느려 부르주아가 너무나 약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길 기다린 것이다. 이들의 어리석은 교조주의는 소수였던 볼셰비키에게는 큰 기회였으며 또한 볼셰비키는 레닌의 인도 아래 혁명과업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군부-러시아의 군인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군대는 이미 2월 혁명을 인해 모든 권력을 임시정부에 엄밀히 말하면 소비에트에 빼앗기고 말았다. 2월 혁명과 소비에트의 지령으로 군대 안에 농민 병사들의 권한은 크게 향상되어 병사와 장 보조금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독일에 대한 반감이 높은 민중들은 혁명의 수호자였던 레닌을 의심하게 되고 볼셰비키는 와해되며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하게 된다. 이에 임정은 힘을 회복하게 된다. 임정은 눈엣 가시 같던 레닌과 볼셰비키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볼셰비키 당을 중요한 구성원으로 여겼으며 만약 임정이 볼셰비키를 없애버리는 정치적 액션을 취하는 것은 소비에트 세력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정은 또 다른 권력집단인 왕당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군대를 신경 쓰게 된다. 7월 위기를 임정의 명을 받은 군대가 진압하긴 했지만, 군대 또한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다시금 경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임정은 군대를 신경 쓰면서 동시에 소비에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기에 볼셰비키를 없앨 수 없었다. 이로써 볼셰비키는 큰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코르닐로프의 쿠데타우파 등의 왕당파는 임정의 케렌스키가 볼셰비키를 완전히 궤멸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수주의 왕정복고론자 들은 우파의 구세주로 코르닐로프를 내새웠k다. 군부의 최고사령관인 코르닐로프는 볼셰비키를 격멸하며 동시에 임정의 답답한 처신을 한탄했다. 그는 러시아의 올바른 권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임정의 케렌스키에게 자신의 권한을 대폭강화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바로 군권과 동시에 러시아의 경제권도 요구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권력의 흐름이 볼셰비키가 아닌 임정과 군부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군부와 임정의 사이도 그렇게 좋진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요구에 임정은 격노하면서 이것을 거부했고, 이에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게 된다. 볼셰비키가 약화된 틈에 군부와 임정이 싸우게 된 것이다. 케렌스키는 바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에 도움을 요청한다.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진압한다.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결정적으로 케렌스키의 지지기반을 악화시킨다. 케렌스키는 보수주의자와 부르주아 계급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