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절 원시공동체(原始共同體)사회의 교환무역(交換貿易)원시공동사회(原始共同社會)는 원래 생산수단의 공유에 기초한 공동노동과 그 결과에 대한 공동의 분배를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고립된 개인은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나 생산용구가 개량되어 노동생산성이 높아지자 개인적 노동이 중시되어, 원시적 협업형식이 점차 붕괴하게 되었다. 원시공동사회 안에 사유가 일반화하게 되자 잉여발생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교환의 기회가 늘어나고 교환형식도 점점 변화되었다.1. 이집트 무역(貿易) (Egyptian Old kingdom)아프리카 대륙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흘러가는 나일 강은 약 6,700km의 길이로서 이 강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문화를 창출한 곳이다. 고대 나일지방은 B. C 4000년경부터 점차 국가를 형성하여 3000년 동안의 왕조(王朝)시대(時代)에 문화발전을 가져오게 한 것도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나일 강변에는 파피루스가 자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파피루스에서 종이를 만들고 수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섬유로 그물과 로프를 만들어 저 유명한 피라미드의 돌을 쌓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또 이집트는 비가 오지 않아서 관개(灌漑)농업이 발달하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거대한 농경(農耕)사회로서 농업을 중심으로 한 관리경제였다.상업무역은 오래 전부터 상당한 발전상을 보였다. 고왕조시대의 벽화에 그려진 시장에서의 물물교환(物物交換)의 모습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왕조시대에 있어서는 최초의 물물교환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화폐는 주조되지 않았다.고대는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연경제였으나 점차 화폐경제로 이행해 갔다.수입품을 보면 상아를 비롯하여 금,은,루비,소,말등이 북쪽의 소아시아, 에게해, 바빌로니아로부터 동,청석, 은 등이 수입되었는데 이 가운데 금속이 가장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한편, 수출품으로써는 이집트에서 곡물, 면화,삼백, 면포, 도자기 등이며 특히 단검, 목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 등이 중요한 수출로서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해 건설된 곳이다.이 밖의 당시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는 북구의 호박(湖泊)이 있었다. 북해?발틱해안의 호박은 중앙유럽을 가로질러 지중해로 운반되어 선사시대의 중앙 유럽을 에게문명에 접촉시킴으로써 문명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3. 희랍의 무역희랍은 동서에 걸쳐 길게 지중해의 중앙에 1,425개의 섬으로 구성된 발칸반도의 첨단에 위치했으며 B. C.5백년 경부터 해양국을 번영을 이룩하였다. 그 조건으로 첫째, 에게해에 임하여 항만적지가 많았고 둘째, 수도 코린트는 무역?시민정책에 있어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였고 항로 역시 초기항해술에 적합한 연안이 많았다. 셋째, 공기가 맑고 안개가 적을 뿐만 아니라 에게海에는 규칙적인 해풍이 불고 있어서 희랍 최고의 배는 B. C. 800년경이다.희랍 무역형태의 특징은 자기선박소유자, 또는 조합형성에 의한 호박소유자, 이 밖에 선박용선의 상인까지 출현하여 상인의 호장이 되어 도자기, 포도주, 올리브유를 적재하여 항해하고 판매하면서 다른 상품을 구입하는 등 소위 선주?선장?상인의 일인삼역으로 오늘날의 하정기선활동과 유사한 항해를 하였던 것이다.B. C. 500년의 희랍도시인 아테네에서 해상무역이 왕성했다. 수출품으로는 딸기,벌꿀,올리브유,도자기,대리석,직물, 이 밖에 각종 공예품과 금속류였는데 이 중 금?은 집기류는 중요 수출품이었다.희랍 무역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개무역의 현저한 발전과 화폐경제의 보급이다. 그리고 희랍인은 주화의 창조자로서 희랍최대의 발명품인 은화(銀貨)제조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화폐라는 새로운 부의 형태가 창조되어 화폐를 저장하거나 대부하는 일이 성행되어 이에 따라 화폐경제가 성립되었던 것이다.4. 로마의 무역(貿易)기원 전 3세기경에 시작한 로마의 이탈리아 반도로의 확장시대 중 반 이상은 전쟁을 치우었던 해(년)이었다. 이 영토확장기에 상업과 금융업이 번영하였고 갑자기 출세한 유산자가 나타남과 동시에 자작농층의 몰락, 노예제 대농장(라티푼디움)의 형성이 진행되었다. 상업화가 노예제하고 마호메트교의 사라센제국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회교 문화를 전개했다.8세기부터 시작된 국토 회복 운동에 의해 15세기 말에 이르러 겨우 이슬람인을 국토에서 구축,15~16세기에는 서인도 제도, 멕시코, 필리핀 등 해외에 진출하고 커다란 무역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8. 고대무역의 특징첫째. 상품구성면에서 볼 때, 노예소유자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킬 사치품 등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보석, 귀금속, 상아, 고급직물, 향신료 등)둘째, 유럽에서는 지중해 동쪽 해상을 무대로 했고 그 후 인도무역이 이루러졌다. 로마시대에는 동방무역이 더욱 빈번해지고 중국무역도 활발히 전개됐다.셋째, 중개무역으로 생산적 국민과 직접과 관계가 없는 고대상업도시에 자리잡은 중개상인들의 독자적인 활동이었다.넷째, 상업자본은 어디든지 약탈제조를 창설했다.다섯째, 국제무역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교환관계는 상당히 발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는 상품생산의 발달을 촉진하지는 못했다.여섯째, 식민지경영은 불가결의 조건 이었다 당시의 교통기관의 미비를 보완하고 국제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었다는 점이다.중세시대무역1. 지중해시대 해상무역지중해 해운은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아말피 같은 이태리 도시와 자라, 라구사 기타 달마치아 해안의 라틴 도시 그리고 프랑스의 마르세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같은 수십 개의 항구 도시들이 성쇠의 과정 속에 활발하게 되었다.이시기에 소규모였던 무역량은 서유럽과 중유럽이 발전함에 따라 무역과 부의 축적이 빠르게 전개되었다.로마제국의 해상무역1. 로마황금시대와 지중해의 평화로마에 의한 천하통일은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무역상인이나 선주들에게도 오래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때까지 이들을 끝없이 괴롭히던 전쟁, 해적 등 약탈자 없이 각자가 자기의 업무를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선복에 대한 수요도 급증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수도를 위엄 있게 건설하기 위하여 많은 건축자재가 필요하였고, 로마 귀족과 시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만족시키는 길은 해상2.오아시스길중앙아시아의 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도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실크로드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이전에는 초원로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3.바닷길기원후 후한은 서아시아와의 교류에 관심을 나타냈고 전성기에 접어든 로마제국이 남해로를 통한 도서 교역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의 시장에는 중국, 인도, 동남아 각지의 특산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로마의 항해사 히파루스가 로마의 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 로테네로부터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향하는 직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로마의 동방 원거를 계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비로소 중국에서 인도로 반출된 비단이 인도 서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에 운송되기 시작하였다.5대지선남북을 연결하는 길로 지선이라 부르고 있지만 문명 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그 노선 또한 대단히 복잡하다. 중세에 있어서의 남북로는 다음과 같은 5개로 나눌 수 있다.1.마역로남북로의 맨 동쪽에 있는 길로 초원로의 동쪽 끝인 막북의 오르혼 강 유역에서 카라코룸을 지나 장안이나 유주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다시 화남을 그대로 뻗어 항주나 광주에 닿아서 바닷길과 접한다. 북방 유민족과 한민족 간의 동아시아 쟁탈을 위한 싸움 길이었다.2. 라마로북쪽 끝은 준가리아 분지에서 시작해서 인도 갠지스 강 어구에 있는 디무라리프데까지 이어진다. 이길은 기원후 5세기부터 토욕혼에 의해 이용되다가 7~9세기부터는 티벳이 이 길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길을 따라 티벳에서 발생한 라마교가 북상하여 멀리 몽골에까지 전파되었다.3. 불타로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인더스강 유역을 따라 중인도 서해안의 바루가자까지 줄곧 남하하는 길이다. 이길은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 문명교류와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인민봉기가 일어났다.2. 사회와 경제의 변동A. 흑사병의 영향흑사병의 직접적인 피해는 우선 인구감소였다. 물론 인구감소는 흑사병이전부터 시작한 것으로, 흑사병은 이런 사태의 전개를 더욱 악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흑사병의 창궐은 경제의 마비와 교란을 초래하였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도시를 탈출하고 생산이 放棄되어 물자의 공급이 두절되고 가격이 폭등과 폭락을 거듭했다B. 농촌과 농업구조의 변동15세기에 이르러 경제주체들의 완만한 적응이 이루어졌다. 단순생필품, 특히 곡가가 폭락함으로써, 영주나 농민들은 다른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농업의 전문화가 등장. 즉 축산, 목양, 과수재배, 포도재배, 염료작물재배와 같은 상업적 농업의 경향이 나타나고, 이런 경향의 발달이 심화되었다.영국의 양모생산, 프랑스의 포도재배, 북구의 낙농업 등이 이런 발전의 결과였다. 한편 이와 같은 농업생산의 전문화, 상업화는 여러 지역간의 교역을 촉진하게 되었다.C. 도시경제와 상업도시경제는 원래의 생산체제가 탄력적이므로 흑사병을 비롯한 이 시기의 경제변동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도시의 제조업은 가격의 변동에 직면하여 생산량을 조절하여 대응하였고, 임금의 상승으로 인한 고비용을 농촌의 노동력을 유인하여 해소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정에서 도시의 인구는 비교적 신속히 회복되었다중상주의 이전의 한국무역Ⅰ. 고조선(한국 무역의 생성)Ⅱ. 삼국시대Ⅲ. 실크로드Ⅳ. 통일신라 장보고의 해상무역1. 서론고대무역에 관해 배우고 공부하면서 과거 우리나라의 무역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점이 아쉬워 한국 고대무역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처럼 국가간의 이동이 자유로운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 국가내에서도 이동을 할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역이 존재하였다는 점은 무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우리 역사에서 대외교역이 나타나는 시기는 이미 고조선 단계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역은 고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국가의 주도로 조공무역이 이루어지면서 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무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