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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스피스센터에서 의료사회복지사의 역할과 개입방법 평가B괜찮아요
    의료사회사업론 과제호스피스센터에서 의료사회복지사의 역할과 개입방법에 대해 논하시오.1. 의료사회복지사란?의료사회복지사는 환자와 그 가족을 둘러싼 심리적 문제와 생활문제(의료비, 생활비)에 대해, 또는 각종 사회자원(복지기관, 시설, 사회복지제도, 사회보장 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소개하여 이들 문제를 해결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의료팀과 협력하여 환자와 가족이 마음 놓고 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의 보건의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첫째, 경제적 문제해결, 조정원조, 둘째, 요양 중의 심리적 · 사회적 문제해결, 조정원조, 셋째, 진찰, 진료 원조, 넷째, 퇴원(사회 복귀) 원조, 다섯째, 지역활동의 다섯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의료와 복지연대를 도모하는 일을 병원 등 관리자의 감독하에서 맡고 있다. 의료사회복지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95년 영국에서이며, 이어 1905년에 미국에서 나타났다. 일본에서의 발족은 영미 양국보다 상당히 늦은 1919년에 이츠미바시자선병원(현 미쓰이기념병원)에 두 사람의 부인 상담원을 배치하면서 설립된 후 1925년에 도쿄 시 요양소 안에 사회부와 결핵 상담소가 개설되었다.2. 호스피스란?호스피스라는 말은 라틴어 hospes(손님)에서 유래한다. 호스피스는 중세기에 성지순례자들이 하룻밤을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전쟁 당시 많은 부상자를 호스피스에서 수용하여 수녀들이 치료하였고 부상자들이 이곳에서 임종하게 되면서 호스피스는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안식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현재 호스피스는 임종 환자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며 환자의 가족까지 돌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환자가 사망한 후 가족구성원들이 느끼는 충격이 더욱 심각할 수 있기 때문에 사망 후 1년까지 지속적으로 보살펴준다.한국에서는 강릉의 갈바리병원에서 1978년 6월에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1982년 4월 서울의 강남성모병원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어, 대부분의 가톨릭계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특히 1995년에는 국내 최초로 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이 세계보건기구(WHO) 호스피스 협력센터로 지정되었다.호스피스는, 죽음이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완화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므로, 암 환자의 치료에도 의학적 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3. 호스피스 센터 內 에서의 의료사회복지사의 역할과 개입방법호스피스센터는 특수한 곳인 만큼, 자격을 갖춘 여러 직종의 팀원이 모여 긴밀하게 협동하는 곳이다. 일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의료진이나 사회복지사의 개입 없이 자원봉사자, 성직자가 환우를 찾아가 위로하고 도와드리는 정도로 호스피스 활동을 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한 실례이다. 호스피스 팀원 중 의료사회복지사는 환자와 가족을 가까이 하면서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정보, 숙련된 기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환우를 위한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 호스피스 센터의 사회복지사가 가져야할 태도는 다음과 같다.1) 대상자의 다양한 가치와 윤리에 대해 개방적이다.2) 어떤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와 윤리를 최우선으로 한다.3) 대상자와 가족에게 가장 합리적이고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4) 목표를 구체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보건의료의 수준에서 대상자와 협력하여 일 한다.5) 환우와 그 가족의 욕구의 문제에 대한 개별성과 독특성을 인정한다.6) 환우와 가족의 욕구의 문제는 변화할 수 있으므로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다.7) 대상자와 가족의 다양한 욕구를 인정하고 비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돌봄을 제공한다.8) 도움과정에 대상자와 가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격려한다.9) 대상자와 가족의 사생활에 대한 비밀을 보장한다.10) 질병과 죽음이 대상자와 가족의 인생전반에서 성장의 기회가 될 수있다고 믿는다.11) 진실말하기의 윤리적 원리에 입각하여, 정보를 공유할 때 대상자가
    사회과학| 2019.11.02| 3페이지| 1,000원| 조회(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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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강가정의 개념 평가B괜찮아요
    건강가정의 개념1. 건강가정이란?건강가정은 단지 질병이 없고 허약한 상태가 아닌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온전히 양호한 상태의 가정을 말하며, 가정원 개개인의 건강한 발달을 도모하고 가정원 간의 상호작용이 원만하여 집단으로서의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친족, 사회 체계와도 원활한 상호작용을 이루면서 생활해가는 체계이다.헌법에서는 모든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정하고 있으며, 개인의 건강은 건강한 가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의 건강은 건강한 가정과 건강한 사회의 지표로써 중요하며, 개인의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적 기능을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2. 건강가정의 필요성우리나라 가정은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가정환경이 변화하며 가정의 구조와 기능 면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낮은 결혼율과 높은 이혼율, OECD국가 중 꼴지를 기록하는 출산율, 노인인구 급증에 따른 고령화 문제로 인한 부양문제 등의 여러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만큼 가정의 안정성은 크게 위협받고 있다.이러한 가정문제와 해체의 증가는 모두 사회와 국가의 부담이 되고있는 실정이다.가정은 성적 기능, 재생산의 기능, 경제적 기능, 교육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능 없이는 존속, 유지될 수 없다. 특히 인간 소외현상이 심화 되고 있는 현 사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건전한 성장을 위해서는 건강한 가정은 필수적이다.3. 건강가정의 특성건강가정이 되려면 협동, 인내, 타협, 공동체 유대감, 존중, 원만한 상호환경, 일과 가정의 조화, 휴가 및 여가, 건강한 시민의식, 열린대화, 경제적 안정, 합리적 지원관리 등의 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또한 건강한 가족의 강점으로는 가족원들의 개별적인 자원과 잠재력의 발달을 북돋우며, 가족생활이 가족원들에게 매우 만족스럽고 충만하도록 하는 힘과 역동적 요소들로 규정하였다.커랜은 건강가족의 속성으로 1) 잘 되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준다. 2) 서로 긍정적이며 협조적이다. 3) 타인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는다. 4) 놀이와 유머에 대한 감각이 있다. 5) 공동적인 책임의식을 갖는다. 6)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을 가르친다. 7) 의식과 전통을 존중하는 가족관념을 가지고 있다. 8) 구성원들 간에 균형잡힌 상호작용이 있다. 9) 공통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다. 10) 서로의 개인생활을 존중해 준다. 11) 타인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12) 가족들이 같이 식사하는 시간과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갖는다. 13) 여가시간을 같이 즐긴다. 14) 문제가 생기면 이웃끼리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다. 으로 정의하였다.4. 건강가정의 형성건강한 가정이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족원들의 의식적인 노력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건강가정을 유도하기 위한 국가의 법적, 정책적 가족서비스를 강화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아동복지법을 국가책임으로 규정한 것이나, 건강가정기본법을 용어정리와 더불어 국민의 권리와 의무로 삼는 것이다.
    사회과학| 2019.11.02| 2페이지| 1,000원| 조회(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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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동복지 발달에 대한 외국과 한국의 변천과정 비교
    아동복지론 과제아동복지의 발달에 대하여 외국과 한국의 변천 과정을 비교하여 설명하시오.1. 서론아동의 정의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아동은 축복의 대상이라고 생각되어 지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아동의 출생을 저주로 보아 아동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곳도 있다. 아동에 관한 사회적인 관심과 이를 위한 복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형태는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다.아동이 독립적 존재로 인정되고 사회적인 보호를 받아야되는 인식이 생긴 것은 근대 부터이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의 아동은 존재성을 인정받지 못한 성인의 축소판으로만 여겨져 왔고 빈곤, 유기, 방임은 일상적인 일이였으며 많은 국가에서 용인되온 슬픈 역사이다.아동에 대한 복지와 인식은 각각의 국가의 역사적인 사실, 사회, 경제, 가치와 사상 등과 밀접한 관련되어 있어서 각 나라별 아동복지의 발달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각 국가별, 시대별 사회상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가깝고도 먼나라인 일본과 한국의 아동복지는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그리고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본인의 의견을 반영하여 살펴보자.2. 본론2-1) 일본의 아동복지 발달사전통사회에서 일본의 복지는 친족 간 상호 도움을 통해 이루어졌고, 친족이 없는 경우 지역 내에서 상부상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근대사회에 접어드는 메이지시대에 빈민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고 이에 따른 복지법 제정과 시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1) , 의 제정국가주도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아동복지는 메이지시대에 정부가 과 3명 이상 자녀를 출산한 빈곤가정에 쌀을 지급하는 을 제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전국적 규모의 구제책이 필요해짐에 따라 1874년 공적 구빈법인 이 제정되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사회복지법으로 그 내용은 근친 및 공동체에 의한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하되, 어려운 자 특히 13세 미만의 고아는 국가가 구제한다는 법령이었다. 메이지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법은 1900년의 이다. 이는 과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시설보호를 법적으의 가세로 활발한 아동복지사업이 전개되었다. 또한 아동복지에 대한 접근도 종전의 민간차원에서 국가차원으로 발달하였다. 1872년에는 학제가 공포되고, 1886년에는 정부차원에서 를 인준하여 전국의 빈곤아동을 위한 학교가 보급되었다. 또한 메이지시대의 대표적 탁아시설로 1900년에 도쿄에 ‘후타바보육원’, 1909년에 오사카에 ‘아이센보육원’이 설립되었다.(김세곤, 2001)(2) 과 의 제정쇼와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양한 사회사업법규가 공포되었는데, 이 폐지되고 이 제정되었으며, 이 폐지되고 이 제정되었다.1929년에 제정된 은 일본 구빈법사상 처음으로 빈곤자의 보호를 공공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에서는 구호기관, 구호내용, 구호방법, 구호비 분담 부분을 분명하게 명시하였고, 구호대상을 빈곤자와 생활불능자(65세 이상의 노쇠자, 13세 이하의 유아, 임산부, 질병· 상병· 심신장애로 노무에 지장이 있는 자)로 한정하여 집행하였다. 또한 1933년 제정된 은 14세 미만의 아동으로 불량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위험이 있는 자를 소년보호원에 입소시킴으로써 아동을 보호하는 내용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것이다. 그 외에도 14세 미만의 학대받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제정되었으며, 1937년에는 이, 1938년에는 이 제정되었다(현정환, 2003).(3) 과 의 제정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한 상황에서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1946년에는 기존의 등을 통합한 이 제정되었다. 전후 일본에서는 수많은 기아와 고아들이 발생했으며, 정부에서는 이들의 구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당시 경제적 여력에 한계가 있어 민간차원에서 구호사업을 주도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보호아동을 포함한 모든 아동의 건전한 발달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의 책임을 명시하기 위해 1947년 이 제정되었다. 또한 1947년에는 이 제정되어 특수학급이 설치됨에 따라 특수교육이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어서 1949년에는 , 1950년에는이 제정됨으로서 일본 기본 복지법의 체계를하기 위해 아동의 후견인뿐 아니라 중앙과 지방정부의 책임을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제정 이후에도 아동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되풀이되어 1951년 이 제정, 공포되었다(최진희, 2005). 은 의 기본원칙을 반영하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으로 전문 및 3개 원칙과 12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 제정되면서 보육소는 비로소 법적 기관으로 인가를 받게 되어 1949년부터 보육소 운영비에 대한 정부 보조가 시행되었으며, 보육사업은 오늘날 일본 아동복지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4) 다양한 아동복지법의 제정과 시행1950년대 중반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민간차원에서의 학동보육 운동이 시작되었고, 1963년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학동보육 예산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경제성장과 함께 아동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법이 제정되었는데, 1964년에는 , 1965년에는 과 등이 제정되었다. 1971년에는 이 제정되었으며, 1991년 개정에서는 첫째 자녀부터로 확대되었다. 지급기간이나 지급액수는 제정 이후 다소의 변화가 있었으나 2007년 개정법부터는 3세 미만의 아동에게는 출생순위에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1만 엔을 아동수당으로 지급하였다(이상희? 하승수? 이혜원, 2008).현재 일본의 아동복지제도는 요보호아동중심의 선별적 복지에서 전체아동을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소자화’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1994년 정부차원에서 육아지원사회의 구축을 목표로 엔젤플랜을 실시하였으며(김세곤, 2001), 그 외에도 아동수당의 확대지급이나 학대받는 아동을 위한 대책으로 아동상담제도를 확장하는 등 다양한 복지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을 기본법으로 하여 몇 가지 특별법으로 구성된 법률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유교문화적 전통으로 인하여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공적 친권개입에 관한 태도에서도 우리나라와 유사한 점이 있다(이혜원, 2006).2-2) 한국의 아동복지 발달사(1) 전통사회의 아동복지사업(1-1) 삼국시대삼국사기에 의8년)에 아동을 포함하여 재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관곡을 배급하였다.(1-2) 고려시대불교의 영향으로 자비사상에 입각하여 사찰 위주의 위탁형태의 보호가 이루어졌다. 병란과 흉년으로 기아, 고아, 빈곤 아동 등을 사찰에서 수용, 양육하여 승려 또는 사역승으로 양성하는 일이 성행하였다.(1-3) 조선시대고아와 기아 및 빈곤 아동에 대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헌종2년(1661년)이후로는 한성부의 유기아에 대한 관부의 허가제에 의한 민간수양이 실시되었고 10세에 이르면 양육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아이를 사역할 권리를 주었다. 숙종22년(1696년) 수양임시사목이 제정되어 흉년에 일시보호를 실시하였으며 정조(1783년) ‘자율전칙’제정 유기 및 부랑결식아동 보호하였다.전통사회에서는 아동은 가계계승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국가는 고아와 기아 및 빈곤아동의 보호를 수양제도로 개입하였으며, 민간차원에서도 이를 장려하였다.(2) 근대의 아동복지(조선조 말엽~광복이전까지)근대적 아동복지사업으로는 조선말 경인 고종 25년(1883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명동성당에 최초의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인천천주교회 부속 고아원 이 두 번째로 설립 되었다.-1905년 이필화에 의해 경성고아원 설립으로 근대적 아동복지사업 시작-1855년 근대적 육아사업으로 프랑스 신부 메스트로에 의한 고아구제사업-1880년 프랑스 신부 Jean Blanc가 한양에 양로원과 고아원을 처음으로 개설-1921년 총독부 제생원이라는 수용시설 설립, 각종 구호사업 지휘, 감독-1930년 각 지방 보육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설립-1939년 전국 60개 시설설치-1944년 조선구호령 제정(3) 현대의 아동복지(해방이후의 아동복지)(3-1) 사회구호적 차원에서 아동복지(1945~1960년)광복이후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전쟁고아, 기아 및 부랑아의 발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국가 및 국내·외의 민간단체는 아동보호시설 설립하여 응급구호를 실시하였다.-1947년 과도정부령 제14호‘미성년자 노동보호법’공포 : 12금지-1950년 아동· 청소년보호사업 수용시설중심으로 급속히 증가-1960년도 아동복지시설은 전체 사회복지시설 592개소의 약 80%차지이 시기는 전쟁고아에 대한 국외입양사업이 아동복지의 주요사업이었으며, 이러한 아동복지사업은 1970년대까지 외국의 원조기관에 의해 추진되었다.-1960년 이전까지의 아동복지사업은 국가책임의 원칙이나 전문화된 서비스가 아닌민간과 해외원조에 의존하여 빈곤계층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사회구호적 형태로 운영되었다.-1959년 아동복지시설 운영재원(3-2) 잔여적 아동복지 정책기(1960년 이후~1980년)요보호아동을 대상으로 한 선별주의적 아동복지사업을 진행하였다.-생활보호법(1961년), 아동복리법(1961년)의 제정으로 요보호아동에 대한 국가책임의원칙이 법제화되어 아동복지사업이 실시되었다. 아동복지 시설의 수와 수용아동인구는 1960년대에도 계속 증가하였고 1967년 568개소 시설에 수용아동인구가 65,212명이나 되었으며 1970년대부터 국가보조가 증가되었다.-국외입양을 위해 고아입양특례법(1961년) 제정하였다.입양특례법(1976년) 기아 또는 결손· 결함가정의아동 등 요보호아동의 시설보호를억제하고 국내 건전가정에 입양하여 건전하게 양육되도록 하였다.(4) 통합적 아동복지정책의 모색기(1980년대~)(4-1)1980년대전체아동을 위한 보편주의적 아동복지사업이 시작되었다.-1981년 아동복지법으로 개정됨으로써 보호대상이 요보호아동으로부터 18세 미만의전체아동으로 확대되어 서비스가 전문화되고 다양화되었다.-1979년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서울에 ‘아동학대고발센터’개설하여 아동학대에 대한사회적 관심을 촉구하였다.-1985년 서울 시립아동상담소가 ‘아동권익보호신고소’개설하였다.-1989년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발족하여 전국 9개시도 지역사회복지관 내에 아동학대신고센터를 개설하였다.-1989년 아동복지법 시행령 개정되어 새마을 유아원을 아동복지시설인 탁아시설로환원, 가정탁아제도를 마련하였다.(부서 : 내무부에서 보건사회부로 바뀌었다.)-다.
    사회과학| 2019.11.02| 6페이지| 1,000원| 조회(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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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정선거운동에 대한 고찰
    선거와 참여정치론 Report 4회부정선거운동에 대한 고찰목차Ⅰ. 서론Ⅱ. 본론1. 부정선거의 정의2. 대표적 부정선거운동3. 우리나라의 부정선거운동 사례① 부정선거의 시작, 3.15부정선거②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부정선거③ A 국회의원의 불법전화홍보운영 사건Ⅲ. 결론Ⅰ. 서론정동영 국회의원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일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10번!!”, “7시다!! 진짜 이제부터다!! 퇴근길 직장인들 손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다!! 인증샷 쫄지 마세요!!”등의 글과 “만일 과태료가 나오면 민주당이 다 부담하기로 오늘 결정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는 선거법을 위반한 불법일까, 아니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합법적인 글일까. 또 한 사례가 있다. 이 사례 역시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 때 벌어진 일인데, 박원순 후보의 대변인이 재보궐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26일 오후, “오후 4시 현재 박빙이지만 박원순후보가 밀리는 비상상황”, “전 지역에 긴급 투표독려 메시지를 보내라.” 라고 투표를 독려하는 브리핑을 열었다고 한다. 이 역시 선거법을 위반한 부정선거운동일까? 답은 하나다. 두 사건 모두 부정선거로 간주되어 정동영 국회의원은 서울지검에서 수사 중이며,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는 현재 고발당한 상태이다.얼마 전 치루어진 10.26 재보궐 선거는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걸린 만큼 많은 이슈를 낳았고, 역시나 부정선거로 선관위와 검찰은 홍역을 앓았다. 이번에 부정선거에 걸린 건수는 총 87건으로 위의 두 후보를 비롯하여 116명을 단속하였다.) 부정선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고 그 수법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부정선거신고자의 포상금은 최고 1억으로 책정되어 있고, 선관위나 기타 부처에서는 부정선거의 근절을 위해 힘쓰고 있는 추세이다. 그리고 부정선거를 막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은 각종 선거 때마다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 선거법이 개정되고 내용이 상이하여 유권자는 물론 정당이나 후보자 까지 선거법의 내용을 모른채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부작용이 많아면 다시 선거를 치르는 등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는 모두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선거문화는 그 나라의 정치수준을 말하여 준다. 대선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불법, 탈법 선거운동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길이 아직은 요원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하지만 선거운동은 토시하나 차이로 부정선거냐 합법이냐로 결정되기도 하고 법이 굉장히 복잡하고 헷갈리게 되어있어 대놓고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미묘한 문제도 굉장히 많이 있다. 선거 때마다 항상 불거지는 부정선거. 이에 대해 알아보겠다.Ⅱ. 본론1. 부정선거의 정의부정선거는 선거범죄라고도 일컫어 지는데 선거범죄는 선거법을 위반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선거범죄의 종류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서는 선거범죄로 매수 및 이해유도죄(230~233조), 당선무효유도죄(234조), 방송·신문 등의 불법이용을 위한 매수죄(235조), 선거의 자유방해죄(237~239조), 벽보 기타 선전시설 등에 대한 방해죄(240조), 투표의 비밀침해죄(241조), 투표·개표의 간섭 및 방해죄(242조), 투표함 등에 관한 죄(243조), 선거사무관리관계자나 시설 등에 대한 폭행·교란죄(244조), 투표소 등에서의 무기휴대죄(245조), 다수인의 선거방해죄(246조), 사위등재(詐僞登載)·허위날인죄(247조), 사위투표죄(248조), 투표위조 또는 증감죄(249조), 허위사실공표죄(250조), 후보자비방죄(251조), 방송·신문 등 부정이용죄(252조), 성명 등의 허위표시죄(253조), 선거운동기간 위반죄(254조), 부정선거운동죄(255조), 각종 제한규정위반죄(256조), 기부행위의 금지제한 등 위반죄(257조), 선거비용부정지출 등의 죄(258조), 선거범죄선동죄(259조)를 규정하고 있다. 그 밖에 형법상의 선거방해죄(128조)도 선거범죄에 속한다.선거범죄는 선거결과를 조기 확정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소시효를 비교적 짧게 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공직선거 동용 소품은 사용, 3인 이상(후보자와 함께 있을 때는 6인 이상)이 무리를 지어 거리를 행진하거나 다수의 선거구민에게 인사하는 행위, 그리고 잇달아 소리를 지르는 행위를 부정선거로 간주하여 처벌하고 있다.)2. 대표적 부정선거운동특히 우리나라에서 많이 일어나는 5대 선거범죄이면서 대표적 선거악습인 후진국형 선거범죄는 1) 공천헌금 등 불법 정치자금 수수, 2) 매수 및 향응제공, 3) 비방 흑색선전, 4) 공무원의 조직적인 선거개입, 5) 대규모 부정선거운동 조직 설치·운영이다.) 현재 이러한 부정선거운동들은 선관위에서 집중단속을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선거법을 몰라서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선거법 설명회 등 선거관계자에 대한 교육과 언론매체 등 각종 계기를 통한 대국민 계도와 홍보로 적극적인 예방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그리고 이번 10.26 재보궐 선거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 부정선거운동은 후보비방·허위사실공표가 29명(25%)으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서 인쇄물 배부·게시(22명·19%), 사전선거운동(12명·10.3%),금품향응사범(9명·7.8%) 등으로 집계됐다. 기타 사범으로는 44명이 적발 되었다. 기타 유형은 현수막·벽보 훼손, 선거의 자유방해, 허위 부재자신고 등이다. 선관위에서 5대 선거범죄를 집중 단속하고, 부정선거 신고 포상금으로 최고 1억을 보상하는 등의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지만 아직까지 근절되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또한 요즘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SNS선거운동인데, SNS 선거운동이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두고 굉장히 말이 많다. 이번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박원순 후보가 SNS를 활용하여 당선에 큰 힘이 된 만큼 앞으로 정치권에서 SNS활용은 굉장히 활성화 될 터인데 익명성과 그 파급력으로 인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이 SNS를 활용한 선거운동의 합법/불법을 제대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SNS의 글 45건을 부정선거 행위 사례로 적발하였지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무제한의 정보를 퍼나를 수 있는 SNS의 속성을 근절해야 한다.3. 부정선거운동의 사례① 부정선거의 시작. 3.15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정권에 의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이다. 이승만 정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고,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행위를 저질렀다.조기 선거와 강행으로 인해 당시 민주당의 후보였던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서거하고 단독후보가 된 이승만 정부는 선거를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후보 등록기간이 지나서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이승만은 단독후보가 되고 만다.당시 3.15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유령유권자 조작, 4할 사전투표,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인사의 살상, 투표권 강탈, 3~5인조 공개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여기서 3~5인조 공개투표는 비밀투표의 의미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행위로써, 민주당 참관인이 도처에서 축출당하고 대리투표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 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에 대한 불신이 4년 전보다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4배 이상의 득표로 인해 국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 시위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4월 25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②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부정선거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때와 내용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선거의 양상은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참패한 민주정 실패, 장기집권음모가 있다. 6공화국국의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는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은 김대중과 여러 세력이 합쳐서 만든 민주당에게 승리하기 위하여 여러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당시 저질렀던 부정선거에는 행정령과 관권이 총 동원 한 66건의 개입이 있었으며 공안세력에 의한 공작선거였다. 또한 부재자투표는 대부분 부정투표였고 향응, 금품살포 59건, 불법홍보물배포 68건의 탈법 선거가 자행 되었었다. 또한 특정종교단체 및 특정재벌회사가 선거에 개입하는 등의 불법운동이 일어났었다.)결국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이 149석(지역구 116, 전국구 33), 민주당이 97석(지역구 75, 전국구 22), 통일국민당이 31석(지역구 24, 전국구 7)을 차지하였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1석 차이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야당과 무소속의 약진이 두드러졌었던 선거였다. 결국 다음 대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되고 노태우는 비자금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③ A 국회의원의 불법전화홍보운영 사건2011년 4월, A 정치인 후보측이 부정선거운동을 했다는 익명의 제보로 착수된 이 사건의 발단은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의 과열 양상 때문이다. 국회의원 재보선은 제한된 선거이지만 전국적 관심을 끌어내기 때문에 상당히 이슈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재보궐선거는 여야 정당이 당적인 측면에서 모든 인력을 집중 동원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그래서 상당한 정치인들이 부담을 느끼는데, 특히 4.27 강원도지사 보궐선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엄기영 후보는 부정선거운동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겠다.사건은 이렇다. 22일 강릉의 한 펜션에서 30여명의 전화홍보원이 휴대폰을 이용하여 유권자들을 상대로 A국회의원 후보지지 호소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펜션 안에는 ‘안녕하세요. OO당 A국회의원 선거사무실입니다. A국회의원 후보지지 꼭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의 안내 문구가 적힌 문건이 발견되었다. 또한 식사 및 일당 지급 등에 대한 의심을 받고 있어 공직선거다.
    사회과학| 2011.12.10| 6페이지| 1,000원| 조회(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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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안 카를로스 1세
    목차Ⅰ. 서론Ⅱ. 본론1.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생애2. 후안 카를로스 1세와 민주화3.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이모저모4. 후안 카를로스 1세와 한국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스페인은 축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열광하며 축구에 집중하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실력도 매우 뛰어난데, 항상 월드컵이 열릴 때면 스페인은 이변이 없는 한 항상 4강안에 안착하고,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는 우승을 일구어 내었다. 축구 강국인 만큼 뛰어난 프로리그팀도 많은데, 그 중 주목해야 할 팀은 레알 마드리드이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이야기를 쓸 인물인 스페인의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직접 레알 마드리드에게 이름을 선사하였기 때문이다. 왕의 형용사는 스페인어로 Real(영어의 Royal)이고 이걸 스페인 식으로 읽으면 레알이 된다. 레알은 ‘왕실의 인정을 받은 훌륭한 팀’의 뜻으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사용을 허락해준, 아주 명예로운 호칭이라 할 수 있다.한 나라의 국왕이면서 이렇듯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얼마 전에는 위대한 스페인인 50인중 1위에 선정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럽왕실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왕 후안 카를로스 1세. 그는 누구일까Ⅱ. 본론1.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생애후안 카를로스는 1938년 1월 5일 생으로 본명은 후안 카를로스 알폰소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이보르본도스시칠리아스(스페인어: Juan Carlos Alfonso Victor Maria de Borbon y Borbon-Dos Sicilias)이다.1931년 왕위에서 쫓겨나 망명한 알폰소 13세의 손자로 태어난 그는, 1931년 스페인에 프랑코 장군에 의한 공화제 정권이 들어서면서 할아버지인 알폰소 13세를 비롯한 스페인 왕가 일족이 로마에 망명에 있을 때에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마리아 메르세데스 백작부인의 장남으로 로마에서 태어났다.사진 1 : 후안 카를로스 국왕1948년 당시 스페인의 총통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설득으로 삼군을 모두 수학하고 271명 중 3등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그리고 그가 사관학교 생도였을 때 그는 비행사 자격으로 후안 세바스챤 호의 실전예비훈련항해에 참가하였다. 1960년, 1년 동안 카를로스는 대학에서 헌법, 국제법, 경제, 세무학을 공부하였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등 다방면의 외국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962년 5월 14일에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그의 먼 친척뻘이 되는 그리스의 마지막 왕인 콘스탄티누스 2세의 누이동생인 소피아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 두 동갑내기 왕족은 61년 영국의 켄트공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현재까지도 매우 금슬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결혼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사르수엘라 궁에서 살게 된 부부는 1963년 첫 딸 엘레나를 낳고, 2년 뒤에 둘째 딸 크리스티나를 낳았다. 68년에는 왕위를 이을 왕자인 펠리페가 태어나 왕실의 경사였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69년 드디어 프랑코는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국회에서 후계자에게 국가원수에 충성하고 국민 운동의 원칙과 그 밖의 국가의 모든 본법을 지킨다는 선서를 정식으로 하게 된다.)이 때 부터 후안 카를로스는 왕의 후계자로써의 공식적인 활동들을 시작하게 된다.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중국 등 많은 나라를 공식 방문하며 국정을 도와갔는데 그러나 그의 생부인 돈 후안이 후안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안 카를로스가 스페인에서 생활하면서부터 돈 후안이 머던 에스토릴에서는 발표 되었지만 스페인에서는 공표되지 않았던 성명서에서 스페인의 미래의 왕을 선정하는 데 스페인 국민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았다고 돈 후안은 프랑코를 맹렬히 비난하였다.사진 2 : 프랑코와 후안 카를로스 1세1975년 11월, 36년간 독재정치를 하던 프랑코가 사망하면서 11월 22일에 후안 카를로스는 정식으로 스페인 국왕으로 취임을 하였다. 카를로스 국왕은 종전에 그가 갖고 있던 “프랑코의 점령했다. 이 우익 극렬분자들이 국회를 점령하고 있을 때에 공모자인 발렌시아 지방의 보슈장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차와 장갑차를 출동시켰고, 또 다른 공모자인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장군은 그의 귀족적 배경을 무기로 군총통수권자인 국왕을 설득시켜 반 시간 내에 쿠데타를 성공시키고자 하였다.그러나 카를로스 국왕은 침착하게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의 군 수뇌부들에게 평정을 유지할 것을 명령하고 각 지방 사단장으로 구성된 군사평의회는 “헌법에 위반되는 행동은 모두 단속하며, 질서 회복에 노력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와중에 국왕은 각 지역 사령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충성을 맹세 받았다.그리고 24일 새벽 1시 14분, 카를로스 국왕은 군복차림으로 TV앞에 서서 국민들에게 “헌법으로 정해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나는 군사평의회와 경찰당국에 명령했습니다. 나는 스페인을 버리지 않습니다. 최후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따라서 반란자는 나를 총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는 결연한 자세를 보였고 국왕의 단호함에 기가 꺾인 반란군들은 곧 항복함으로써 쿠데타는 마무리 되었다.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없었더라면 쿠데타는 성공하여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프랑코의 독재시대로 다시 되돌렸을 것이다. 카를로스 국왕은 이를 계기로 스페인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전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고, 의회에서도 왕당파, 공화당파를 가리지 않고 젊은 자신들의 군주를 민주주의의 구세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신속히 반항 세력을 회유하여 투항시켰던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게 되었으며 신실하고 모범적인 공무 수행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20세기 군주 중 한 사람이 되었다.우리나라가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을 통해 젊은이들의 피를 바치고 어렵게 민주화를 이룩하였다면, 스페인은 현명한 군주의 올바른 판단으로 말미암아 민주화를 손쉽게 이룩하였다. 이를 통해 한 나라의 통치자의 노선과 선택이 매우 중요함을 깨달을 수 뮌헨 올림픽에서는 요트선수로 출전하여 우승한 적도 있으며 그 아버지의 피를 받았는지 딸인 크리스티나 공주는 88년 서울올림픽에, 펠리페왕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요트선수로 참가한 요트 왕실이다.세 번째로는 태권도이다. 카를로스 국왕은 우리나라의 고유 무술인 태권도에도 비상한 관심을 보였는데, 황태자에서 국왕으로 즉위당시에 스페인 궁을 예방했던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나의 취미는 뱃놀이와 한국의 태권도를 수련하는 것’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이는 흔한 인사치례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조광희 사범이 해외사범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가 칠 년 동안이나 카를로스 국왕을 지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왕실경호대 역시 태권도는 필수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태권도가 IOC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게끔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현재 스페인에는 이러한 카를로스 국왕의 관심 덕분인지 스페인태권도협회가 존재하며 2007년 세계태권도선수권 대회에서는 종합 2위, 유럽품새태권도대회에서는 종합 1위를 차지하는 등 그 인기가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문화면 에서는 자신의 나라 언어인 스페인어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카를로스 국왕은 현재 세계 스페인어연구기구의 명예의장이며 스페인어를 세계 각국으로 전파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1993년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로얄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도 하였다.1992년에는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에 대규모 도시 공원을 조성하여 ‘후안 카를로스 1세 공원’이라고 명명하여 국민들이 여러 가지 야외활동과 다채로운 행사를 열 수 있게끔 만들었다. 현재 이공원은 공원 전체에 걸쳐 조성된 풍부한 녹지에 다양한 종류의 동물군을 서식하게 만들어 학생들의 자연 학습 장소로 매우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 마드리드 자치지역에 위치한 공립학교는 카를로스 국왕의 이름을 따 후안 카를로스 국왕 대학교도 존재한다. 이 학교는 1996년에 설립하였으며 2009년을 기준으로 학생 수는 1만 722명이다. 또한 아르코 국제현다. 파시스트보다는 오히려 뱀이 더 인간에 가깝다'라고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스페인 총리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가 아스나르 전 총리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지만 차베스는 이에 아랑곳 않고 계속 스페인을 비난하는 발언을 계속하자 카를로스 국왕은 차베스 대통령에게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스페인어: ¿Por que no te callas?, "포르케 노 테 카야스")라고 일갈하였다. 이 발언은 얼마 안 가 스페인 전역에서 이동전화의 벨소리로도 유행하였다. 또한 스페인의 한 의류 제작자는 그의 말을 인쇄한 티셔츠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국민들이 카를로스 국왕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사진 4 : 1만 페세타 지폐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유로화 이전에 스페인은 통화 단위가 페세타(Peseta)화였다. 주화 11종류, 지폐 8종류로 이루어졌으며 1만 페세타에는 색깔은 보라색 이였으며 앞면의 도안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초상과 스페인 왕궁 모습을 사용하고 스페인 왕실문장을 보조문양으로 사용하였다.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카를로스 국왕이 당시 큰 단위의 지폐에 등장한 것은 당연한 듯하다.4. 후안 카를로스 1세와 한국카를로스 국왕은 한국을 매우 사랑 한다. 2011년 7월에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방한 중인 트리니다드 히메네스 스페인 외교장관을 접견하여 한-EU FTA를 논의하였다. 스페인 외교장관으로는 처음 아시아 국가를 방문한 히메네스 장관은 접견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담은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의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그 내용은 “한국을 형제국가로 여기고 있다. 건강 문제로 방한이 연기되어 안타깝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다. 이를 보며 카를로스 국왕이 한국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스페인 왕실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6년 문민정부 시절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에는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딸인 크리스티나 공주가 요트선수로 참여하여 스페인 왕실이 방한하것이다.
    사회과학| 2011.10.27| 9페이지| 1,500원| 조회(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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