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Ⅰ. 서론1. 월남전쟁의 개요2. 월남전쟁의 진행 및 결과Ⅱ. 본론 (월남에 개입했던 미국 대통령들)1. 트루만2. 아이젠하워3. 케네디4. 죤슨5. 닉슨Ⅲ. 결론- 맺음말Ⅰ. 서론1. 월남전쟁의 개요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북베트남이 독립의 쟁취를 위해 프랑스와 치룬 제1차 전쟁(1946~1954년), 미국의 비호를 받는 남베트남과 치른 제2차 전쟁(1960~1975년)으로 구분되며 제2차 전쟁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전장이 되어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2. 월남전쟁의 진행 및 결과- 일어나게 된 배경우리나라도 그랬지만 중국이 강성대국일 때 주변국들은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중국과 접한 베트남은 위태로움 속에서 버티거나, 아니면 예전처럼 중국황실에 조공을 바쳐가며 종속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베트남은 유럽열강들의 팽창정책에 의해프랑스의 식민통치아래 놓이고 말았다. 2차 대전 중인 1940년 일본군이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게 되고 1945년 3월9일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된다. 이렇듯 베트남은 오랜 침략과 투쟁의 비극적 역사를 거쳤다. 월남전쟁의 발생 배경은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19세기 후반에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점,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패망으로 식민지 지배를 벗어날 때 세계열강의 이기주의에 의해 남북 분단의 설움을 당해야 했고 동족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미국(美國)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베트남 국민들은 프랑스 군편에 우호적이었던 남베트남 지도자들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독선적인 지배체재와 부패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반식민 독립을 위하여 프랑스와 싸운 호찌민(胡志明, Ho Chi Minh,1890~1968)을 존경하기 시작했고 이 결과는 베트남 전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지역은 1883년 프랑스의 식민다.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베트남전쟁이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인 중화민국,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타이, 뉴질랜드 등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의 협상 끝에 베트남전쟁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미국의 키신저는 북베트남에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 피폐한 북베트남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남베트남·북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등이 서명했다.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과 방위조약을 체결, 남베트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약속했다. 미군이 철수하지만 북베트남이나 해방전선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기로 했다. 미군은 철수하면서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무기를 월남에 양도했다. 1973년 1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봄에 사이공 정부의 외국 지원군들이 철수했다.휴전협상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과 해방전선측은 남베트남군과 곳곳에서 충돌했다.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의 정계가 소용돌이쳐서, 다시 베트남에 개입하지 못할 것을 확신한 북베트남은 무력통일을 북베트남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남베트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정오가 지나서 북베트남 국기가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9일 간의 남베트남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사이공이 함락된 직후 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남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이는 사실상 북베트남의 괴뢰정권이었다. 1976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에 합의하여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세워졌다.이 제 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전쟁)으로 남베트남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8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캄보디아 민간인 사망자도 70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라오스 민간인 사망자 수도 50,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군 사망자는 대략 6만여 명이다.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고엽제)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Ⅱ. 본론 (월남에 개입했던 미국 대통령들)1. 트루만대통령트루만(Truman)대통령의 인도지나에 대한 인식은 1945년~1952년 사이에 크게 변하였다. 트루만은 1945년 불란서와 호찌민(Ho Chi Minh)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트루만은 호지명을 동정했다. 그는 전쟁이 불란서의 문제로 불란서가 식민적 야망 때문에 받아야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만약 인도지나의 전쟁이 식민전쟁 이였다면 당연히 미국이 불란서를 부정해야하지만 루즈벨트 다음 대통령 때에도 역시 미국의 정책을 유지하였다.(인도지나를 국제 식민통치 형태하에 두자고 주장) 트루만 대통령과 미국지도층 인식이 바뀌어 불란서를 지지할 때는 인도지나 내의 외부발전에 기초를 두었다. 1948년 미국의 세계적 역할에 대한 개념이 크게 바뀌었다. 즉, 베를린에서 그리이스로 또 체코슬로바키아로 동서 양 진영 사이의 분열이 구체화 되어졌고 굳어져 갔다. 동서의 분열er Dulles) 국무장관은 중공이 한국에서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했던 것과 같이 인도지나에서도 불란서에 맞서는 호지명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한 개입을 미리 막기 위하여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는 1953년 불란서에 미국의 군사원조를 5억불로 증가시켰다. 1954년에는 이 원조가 10억불에 달했고 미국은 인도지나 전쟁 비용의 반 이상을 감당하고 있었다.중공과 호찌민과의 관계를 가장 잘 분석한 인도지나지역의 르 몽드 (Le Monde)지 종군기자 로버트 길레인(Robert Guillain)은 “중공은 매우 단순한 하나의 원칙 즉 세력의 균형이 불란서 쪽으로 영원히 기울지는 않는다는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라고 했다.그래서 한국전 발발 이후 불란서가 더 많은 미국의 원조를 받았을 때 중공은 대충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그들의 원조를 증가시켰다.1954년 중반의 제네바 회의와 몇주 후 동남아 조약기구(SEATO)가 형성됨으로써 인도지나 지역에 불란서의 군사적 활동은 끝나고 미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월남에 대한 협정으로 북위 17°선에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을 설정하였다. 월맹군은 17°선 북쪽에 재집결하고 불란서 동맹군은 남쪽에 재집결하기로 되었다. 이 분계선은 군사적 의미만 가지기로 하고, 2년 후에 중립 3대국인 케나다, 인도, 폴란드로 구성된 국제 조절 위원회의 감독하에 총선을 통하여 월남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기로 되어 있었다. 호지명은 1956년 총선에서 전 월남을 쟁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받아 들일만 했으며, 미국은 제네바 협의안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네바 회의 끝에 가서 미국은 단독으로 안정을 방해하는 위협이나 무력의 사용을 억제하겠다고 서약하고 또 큰 관심을 가지고 모든 협정 위반을 감시하겠다고 덧붙였다.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제네바 협정에서 벗어나 아시아에서 더 이상 공산화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다른 해결책을 추구하기로 했다. 그 해결책은 SEATO의 창설이었다. 마닐라에서 조약이 체결된 날에 8개 조인국들은미국내에 대 비정규전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특수 부대가 창설 되고 대통령의 특별한 호의를 받았다. 케네디 임기중 미국의 개입을 가속화 시킨 가장 중대한 사건은 로스토우-테일러의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는 케네디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로스토우와 테일러는 8,000명의 전투부대를 투입시킬 것을 건의하였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월남을 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케네디는 보고서에 자신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비합리적 개입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의 능력을 믿는다고 표명했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함으로써 그는 월남에서의 철수를 휠씬 어렵게 만들었다.케네디와 군사 고문단은 많은 월맹 병사들이 국가를 위해서 죽는 것은 그들의 임무라고 한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는 월맹군은 가짜 군대이고 월남이 합법적인 정규군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테일러과 로스토우는 보고서에서 월남은 한국과 같다고 했다. 그들은 중요한 차이점 즉 한국은 군복을 착용한 적군이 정식으로 국경을 넘어 침략한 재래식 전쟁을 치뤘지만 월남은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사실상 전선이 없는 정글지대를 이용하여 게릴라들이 실시하는 정치투쟁이라는 차이를 깨닫지 못했다.4. 죤슨대통령죤슨대통령의 대 월남 정책은 자기 기만과 오해가 너무나 방대하여 국가적 대재난이 되었다. 월남과 월맹에 무자비한 폭격과 50만 이상의 미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죤슨의 자만, 완고함, 자존심이 그의 대통령직을 망쳐 놓았고 미국 국민을 정신적 내란으로 분열시켰다. 그는 좀 더 폭격을 많이 하고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함으로써 적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적을 잘못 인식하였고, 미국 국민을 잘못 인도하였고 결국은 자신을 기만하게 되었다.죤맥노튼은 남부 월남에서의 미국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우선순위에 따라 설명하였다.70%- 미국 패배의 수치를 피하는 것20%- 남부 월남의
목 차1. 서경천도론2. 도선의 후계자 묘청3.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4. 개경파의 역공5. 묘청의 반란6. 맺음말- 서경천도론의 등장이자겸과 척준경의 변란으로 왕권이 뿌리째 흔들리고 사회 기강마저 무너지는 등 고려는 인종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북방에서는 요가 멸망하고 북송이 몰락하는 가운데 새로운 신흥세력으로 여진족이 세운 금이 발흥하고 있었다. 금의 등장으로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다시 한 번 파란을 예고하게 되고 이러한 대내외적 혼란속에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에 의해 ‘한국 역사상 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았던 묘청의 난과 서경천도론이 대두하였다.인종대에 와서 이자겸난의 시련을 겪고, 아울러 복잡한 대외관계의 중압감에 시달리며 20세의 성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이자겸난으로 스산해진 개경(開京)을 벗어나고 싶었던 만큼, 무겁게 긴장을 자아내는 국제관계의 틀도 깨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10여 년 만에 상하가 뒤바뀐 고려와 금과의 관계가 불만스러웠지만, 또한 해로를 통해 고려를 거쳐 금과 교섭하여 포로가 된 두 황제를 귀환시키려는 남송의 집요한 접근도 인종으로서는 참기 어려웠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서경에 순행하여 유신을 표방하게 되었을 때, 그는 낭만적이고 현실도피적인 대외정책이 담긴 서경천도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묘청난의 최대 이슈였던 서경 천도 운동은 풍수와 도참사상을 바탕으로 한 수도 이전 운동이었다. 풍수 도참은 통일신라 말기를 거쳐 고려 일대를 풍미한 사상인데 불교 못지않게 고려왕조에 끼친 영향 또한 대단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덕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곳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진다는 이른바 ‘지덕쇠왕설(知德衰旺設)’은 고려 태조 이후부터 거의 모든 고려왕이 신봉했던 풍수론이었다.사실, 내용만 따지고 본다면 지덕쇠왕설은 단순한 미신에 불과한 것 같지만, 보수적이고 무기력한 구세력의 근거지 개경을 떠나 새로운 국가질서를 확립하고 싶어 한 왕과 신세력들에게는 더할 나위비롯된 것이기도 했다.-도선의 후계자 묘청(妙淸 ? ~ 1135)묘청(妙淸 ? ~ 1135)은 고려 중기의 승려이다.원래 묘청은 서경의 승려로서 정심(淨心)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인종 10년,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개성의 정궁을 재건하기 위해서 기초공사를 할 때 묘청은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이라는 병가압승의 술책을 부리면서 이런 말을 했다.“이 법은 선사 도선이 강정화에게 전해준 것인데 강정화가 다시 나에게 전하였고, 나는 뒤늦게야 백수한을 만나서 그에게 전해주게 된 것이니,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술법이다.”그리고는 비술을 자랑하며 자신의 계보를 늘어놓았다고 전한다.백수한은 천문관리였다. 묘청을 사사하여 음양비술로써 세인을 현혹시켰다. 그러나 강정화는 어떤 기록에도 전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묘청의 계보는 정확하지가 않다.음양대가로 알려진 묘청은 왕실에 접근시킨 사람은 서경 출신의 문신 정지상이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으로 인종대에 언관직을 맡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1127년에는 척준경을 탄핵하여 추방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경연에서 고전 강의를 도맡을 정도로 실력파였던 정지상은 시문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날리는 등 본래 묘청과 같은 음양가와는 비교도 되지 않던 인물이었다.그런 그가 정치의 혁신과 서경 천도 운동에는 크게 공명한 바 있었는지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하기도 하고 내시낭중 김안과 함께 서경 천도를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했다. 명망있는 문진 정지상이 서경 천도론을 들고 나오자 대신 문공인과 임경청, 근신 홍이서와 이중부 등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묘청을 극찬하고 심지어는 인종에게 그를 위한 상소문까지 올리기도 했다.“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성인이니, 국가의 일은 무엇이나 그 두 사람에게 물어 본 뒤에 행하시옵고, 그들이 요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 주셔야 정사가 바로 잡히고 일이 성취될 것입니다.”이들은 상소문과 함께 백관의지지 서명까지도 받아거둥하고 묘청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3월 상안전에 도량을 베풀고 ‘유신 정교’를 선포했다. 이때 인종이 선포한 정교는 대개 산천신에게 제사하고, 검약을 실천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여 국가의 안녕과 태평을 도모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고전적 정치이념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묘청에 의해 입안되었으니 이른바 유신 정교는 서경파의 천도 운동을 알리는 예고편이었다.-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묘청은 만약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와 이웃 36개국이 신하가 되어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하여 수도를 옮길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시시각각으로 고려에 압박을 가해오는 금나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으로, 천도만 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라는 묘청의 주장은 다소 허황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의 자주성 회복이라는 긍정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일면 수긍되는 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선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1107년 여진과의 전쟁으로 승리를 거둔 고려는 윤관으로 하여금 9성을 설치하게 하여 이를 영원히 고려의 영토로 삼으려 했으나 여진의 계속적인 공격과 애원의 강온작전과 국내의 여론에 밀려 결국 고려는 9성을 돌려주었다. 이후 여진은 이를 근거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여 1115년에는 금제국을 건설하였고, 1122년에는 요를 멸망시켰다. 이후 인종 연간은 금나라의 침략을 방어하지 못한 송이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가는 과정이었다. 금은 1127년 송나라 수도를 공략하여 송황제와 종실,귀족등 3천명을 붙잡아 갔으며, 하북, 산동, 산서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에 송은 양자강 남쪽으로 쫓겨가 고종에 의해 남송이 건립되었다. 그이후로도 금은 계속 남송과 싸웠고, 남송은 1141년 굴욕적인 투항조약을 맺었다. 이렇듯 송에대한 공격과 병행하여 금나라는 고려에도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였다.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송의 수도 변경을 압박하던 금은 고려에게 형제관계 요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군신관계로 사대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는 분개하였으나,서 보면, 금과의 대결관계가 점차 소멸되어 감에 따라 반금 세력인 묘청파의 위치가 약화되고 , 현실체제에 안주하는 보수세력의 득세를 가져오게 되었다. 묘청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인종에게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 정벌 문제를 주청했다. 그야말로 자주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 엄청나고 파격적인 주청을 나약한 문신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생존의 위험이 너무 컸다. 이 주청은 고려 조정에 정치적 대립을 일으켰다. 더구나 금국 정벌은 그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 비추어보아 불가능한 일이었다. 묘청의 반대파들은 실현성 없는 황당무계한 주청에 등을 돌렸다. 묘청의 칭제건원, 금국 정벌 주장은 고려 조정에서 퇴조의 기미를 보였다. 이에 묘청 일파는 서경 천도를 서둘렀다.주요인물지지기반외교정책국가전통이념서경파묘청, 백수한정지상, 홍이서지방출신신진관료자주적외교정책칭제건원금국정벌고구려계승불교 및 풍수지리설개경파김부식, 문공인문벌귀족사대외교 주장금나라 인정신라계승유교이념→ 서경파와 개경파의 비교-개경파의 역공인종도 처음부터 묘청 일파의 비술이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이자겸 일파에게 모진 시련을 당하여 개경 땅이 싫어진 참이라 묘청의 주장에 현혹된 것이었다. 유신들의 거듭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계속해서 서경 대화궁의 지덕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그런 이유 때문에 인종은 임원후가 묘청 일파를 잡아 죽이라고 극간했어도 물리치고 그해 묘청 일파의 말대로 옛것을 혁신하여 새것을 세우는 이른바 ‘혁구정신(革舊鼎新)’의 정치를 천명했던 것이다.묘청 일파는 개경파의 반대로 왕의 서경행이 계속해서 좌절되자 인종의 어의(御衣)라도 보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인종을 서경으로 모셔오기가 어려워지자 어의만이라도 우선 갖다 놓고 보자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인종의 어의가 도착하자 묘청은 어의를 궁궐에 안치하고 마치 왕이 앉아 있는 양 꾸몄다.이런 식으로 묘청 일파의 서경 천도 운동이 집요하게 계속되자 마침내 시어사 문공유가 직문하성 이중과 함께 반대상소년 1월에 묘청을 삼중대총지루각원사에 임명하고 붉은 가사 옷을 주더니 뒤이어 2월에는 다시 서경의 신궁으로 행차하였다. 인종의 서경 행에도 불구하고 묘청 일파의 계획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왕의 행차가 마천정에 이르렀을 때 친종장군 김용의 말에 무엇에 놀란 듯 급히 치달려 어가를 앞질러 하마터면 김용이 말에서 떨어져 죽을 뻔 하는 등 이상한 이변들이 꼬리를 물고 발상하였다. 게다가 인종이 신하들과 함께 대동강 가에서 배를 타고 물놀이를 하였는데 별안간 폭풍이 휘몰아쳐 배의 장막이 찢기고 술상이 엎어지는 일도 일어났다. 이렇듯 서경에서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인종은 그만 낙심하여 보름 만에 개경으로 되돌아와 버렸다.인종이 개경으로 되돌아간 이후에도 천재지변은 그치지 않았다. 3월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하늘에선 별똥도 떨어졌다. 4월에는 때 아닌 서리가 내렸으며 또 큰 비와 우레 때문에 인명과 농작물의 피해가 막심했고 그해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마저 들어 인종은 급기야 기우제까지 지냈다. 기상이변이 계속되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파들은 본격적으로 인종의 서경 행을 저지하고 나서고 인종도 마침내 서경 거둥을 포기하고 말았다.인종이 개경 유신들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자 그동안 왕을 의지했던 묘청일파는 점차 폐색이 짙어졌다. 결국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서경파들은 새로운 반격을 시도하게 되고 그것은 곧장 반란으로 이어졌다.-묘청의 반란인종 13년(1135) 정월, 묘청은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은 분사시랑 조광과 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조창언, 안중영 등과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왕의 조서를 날조하여 서경 부유수 최자와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잡아 가두고, 또 가짜 승선 김신을 파견하여 서북면병마사 이중병과 그의 부하들을 포박하여 서경의 소금창고에 가두었다. 또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서경에 와 있던 개경 출신들을 모두 구속조치했다. 이어서 묘청은 군사를 요충지대인 절령(자비령)으로 파견하여 통로를 차단하는 한편, 서북면 내에 있는 모.
contents1) 대만의 역사2) 대만의 원주민- 원주민의 생활- 대만의 원주민 역사- 대만 원주민과 역대 식민 정권과의 관계- 광복 후의 원주민들의 시련3) 대만의 역사와 원주민의 대한 생각1) 대만의 역사3세기 중엽 중국의 기록문헌《임해수토지(臨海水土志)》에 따르면 한족이 타이완섬을 최초로 발견하였다고 전한다. 7세기 초 수(隋)나라 때부터 한족(漢族)이 타이완을 정찰정략(偵察征略) 시도하였으며, 원(元)은 1360년 펑후섬에 처음으로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명대(明代)에 이르자 한족의 도래가 증가하고 동시에 서구의 열강도 타이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590년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mosa)라고 명명하였다. 한족이 대만으로 이주해 오기 이전 대만에는 동남 아시아계 원주민들이 몇 개의 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세기 무렵부터 대만은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는다.네덜란드는 타이완 남부의 한족을 누르고, 일찍이 1624년 안핑[安平:臺南市]에 제란디아성(城)을 구축하였다. 에스파냐도 1626년 지룽[基隆] 지방의 서랴오섬[社寮島]에 산살바도르성을, 다시 3년 후에는 단수이항[淡水港]에 산토도밍고성을 각각 축조하고 타이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642년에 에스파냐를 구축하고 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1661년 명의 유신 정성공(鄭成功)이 부하를 이끌고 타이난[臺南]에 상륙하여 제란디아성을 점령해서 네덜란드인을 항복시키고 이곳을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1683년 6월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청(淸)은 타이완에 진격하여 정군을 무조건 항복시켰으므로 정(鄭)의 타이완 지배는 불과 3대, 23년으로 끝났다. 다음해인 1684년 청은 타이완을 푸젠성에 예속시키고 타이난에 타이완부(府)를 설치하였다.그 후 대륙으로부터 이민이 격증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신천지를 개척하고 1885년 타이완은 하나의 성으로 독립하였다. 청일전쟁(회 및 총통 아래 입법원(국회), 행정원(내각),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의 5권 분립제를 택하고 있다.국민당 지배정치를 펴온 타이완 정부는 1949년 이래 계속 실시된 계엄령을 1987년 7월 해제하였으며, 1988년 1월 13일 총통 장징궈[蔣經國]가 사망한 후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의 입법원 선거에서 야당세력이 예상외의 의석수를 차지함으로써 집권 국민당에 타격을 주었다. 1991년에는 타이완 수비사령부를 해체하고 진먼섬 계엄을 종식하였으며, 1992년에는 사상경찰제 및 타이완 경비사령부를 폐지하였다. 1993년 11월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 1994년 7월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던 총통직선제 개헌안 승인을 거쳐, 1996년 3월 총통 리덩후이가 최초의 직선총통이자 제9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3월 야당인 민진당(民進黨)의 후보 천수이볜[陳水扁]이 롄잔을 꺾고 총통으로 선출되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민당 체제가 중단되었다. 2001년 12월 1일 제5기 입법위원 선거 결과 민진당이 제1당으로 도약하였으며 그 후 2004년 3월 20일 총통선거에서 천수이볜 총통이 50.12%의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하였다. 이때 야당은 3월 19일의 천수이볜 총통 피격 사건으로 국가안전체제가 발동되어 군인과 경찰의 투표권이 박탈당했다는 것을 이유로 당선 및 선거무효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최고법원에서 모두 기각 패소하였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야당(국민당, 신민당, 신당)이 입법원내 과반수(113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민진당 89석, 국민당 79석, 친민당 34석, 태련 12석, 신당 1석, 기타 10석)되고 이에 2005년 6월 7일 국민대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어, 입법위원수 1/2 감축, 소선거구제 채택, 헌법 개정안의 국민투표 실시, 국민회의 해산 등 헌법 개정 내용이 확정되었다. 국민대회는 동대회를 마지민이다. 평지에 사는 사람은 [평지족], 해발500m이상 살던 사람을[산지족]이라고 칭한다. 평지족은 크게 8개족로 나누며, 중국 청조 이후에 이주해온 남방 한족(대만 역사 참조)에 의해 한족화 되어서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9개 산지족은 아직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대만의 원주민하며 이들 산지족을 칭한다.원주민은 원시종교, 즉 자연현상, 동물, 사물, 조상 혼 등을 섬기며, 부족 춤, 부족 제사 등의 생활 전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다. 500m이상에서의 생활이기에 현재까지 현대식 문화, 교통, 경제, 교육에 많은 혜택이 돌아가지 않으며, 지리상의 환경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 들이 있다. 또한 대다수의 원주민들의 교육률이 낮으며,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는 족(族)이 많지 않아 대만인들로부터 무시와 소외를 당하기도 한다.- 대만의 원주민 역사20세기 말, 대만의 총 인구는 2100만 명 그 중 원주민은 겨우 35만으로 총 인구수의 1.7%에 불과했다. 고증이 가능한 역사유적으로 추산해 볼 때, 대만 원주민은 대만이라는 섬에서 적어도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록 대략 13세기에 바다를 사이에 둔 중국인과 미약하나마 접촉이 있었긴 하지만 엄격해서 말하자면 1624년과 1626년 네덜란드와 스페인이 각각 대만을 침입해 그들의 식민지 거점을 마련하기 전까지 대만원주민은 계속해서 대만도의 유일한 주인으로 그 어떤 특정한 정권에도 예속됨이 없이 각기 독특한 사회문화제도를 발전시키며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해 왔다.대만 원주민은 대만 전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그 중 현재 이미 완전히 한족(漢族)에 동화된 평포족은 대부분이 대만의 서부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그들의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있으며 정부에 의해 원주민이라고 인정된 대부분은 고산지역, 대만의 동부 평원 및 대만 동남방에 위치한 난서도(蘭嶼島)에 주거하고 있다.초기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하여 볼 때, 이미 한족화된 평포족은 대체적으로 9개의 종족으로 구성 태아족(泰雅族; Tayal), 배만족(排灣族; Paywan), 포농족(布農族; Bunun), 비남족(卑南族; Puyma), 추족(鄒族; Tsou), 노개족(魯凱族; Rukay), 새하족(賽夏族; Saisyat) 및 난서도에 사는 야미족(雅美族; Yami)이다.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정부의 인증표준이 비록 인류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삼고 있긴 하지만 최근 10년 동안 종족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어, 종족에 대한 칭호와 분류 방식에 대해 원주민 사회의 의견이 정부측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주민의 엘리트들은 주로 태아족에서 다시 구분되어 나온 새덕극족(새덕극족 또는 태로각족이라 불리운다)이며, 현재 248명밖에 남지 않은 일월담 덕화사의 소족(邵族)은 과거에 인구가 지나치게 적다는 이유로, 정부는 이들은 한족화되어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원주민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그들은 자신들의 박탈당한 종족 신분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 역시 여전히 자신들만의 종족,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이 외에 난서도의 원주민 야미족(雅美族)에 대한 호칭은 학자들의 잘못된 호칭으로, 그들의 정확한 종족명은 달오족(達悟族)이다. 사실상, 줄곧 완전히 한족화된 곳으로 여겨졌던 평포족도 원주민 운동의 자극을 받아 서서히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부가 원래의 종족 신분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만 원주민과 역대 식민 정권과의 관계1624년 이후, 대만 원주민과 역대 식민 정권과의 관계 및 국가체제 내에서의 원주민의 역사적 지위는 아래와 같다.네덜란드와 스페인 정권이 그 우세한 물질적 역량과 종교전파라는 열기를 이용해 미래의 원주민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4백여 년간 대만 원주민이 식민 정권 통치의 압박을 받은 역사의 시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이어 중국 한족인 정성공 왕조, 만청정부, 일본 제국주의, 국민당 정권이 계속해서 대만에 들어옴으로써 원주민은 서서히 주인의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네덜란드와 스페 차지하게 되니, 이 때 중국을 통치한 왕조는 이미 비 한족인 원주민-만주족이 건립한 청 정부였다.한족 정성공과 만청정부 식민 통치시기에 중국의 한인들은 많은 수가 대만으로 옮겨와 우위에 선 인구수와 문명기술을 이용하여 원주민에게 속해 있던 토지와 자원을 얻어 서부평원과 일부 고산지역을 침입했다. 토지를 보호하고 종족의 생존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원주민과 한족 사이에는 무수한 충돌과 싸움이 벌어졌다. 원주민의 전통적인 활동영역이 처음으로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고산지역과 동부평원은 원주민이 장악한 지역으로 완전히 독립적인 자주적 권력을 행사하였다.대만 원주민의 전통적인 정치, 경제, 문화 및 사회제도는 일본제국 식민지시기에 이르러 점차 변혁이 일어난다. 1895년 패전한 만청정부와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여 만청정부의 판도에서 대만을 일본에게 양도하게 되니 원주민 사회는 처음으로 국가라는 체제 안으로 귀속되어 외래 민족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일본 식민 정부는 현대화된 자본주의 경영 방식으로 대만의 모든 자원을 약탈하였습니다. 원주민 주거 영역의 풍부한 원시림, 광산자원, 물, 관광 등의 자원을 얻기 위해 대만총독부는 여러 차례의 군사 토벌 행동을 발동하여 원주민의 생존 공간을 소위 [蕃人所要地;이민족의 땅] 내로 압축시키고 이 외의 토지는 모두 일본 식민정부와 자본가들의 소유가 되었다.최후로 남은 토지에 대해서도 원주민은 사용권만이 인정될 뿐,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식민정부의 원주민을 동화시키기 위해 원주민들이 일본 성씨와 일본어 학습, 일본인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일 것을 격려했다. 정치, 경제, 문화와 군사 각 방면에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이며 철저한 통제 하에 대만 원주민의 사회제도는 서서히 붕괴되었고 더욱이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역시 종족의 운명을 주지할 만한 용기와 의식을 상실한 것이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일본은 대만 및 팽호도의 식민 통치권을 포기하고 현재의 정부, 즉, 중화민국.
· 오례(五禮)의 개념오례(왕례)란 왕권을 강화하려고 만든 왕실의 5가지 의례이다. 5가지 의례에는 길례(吉禮), 흉례(凶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를 말한다. 먼저 길례는 크게 큰 제사인 대사 중간급 제사인 중사 그리고 작은 제사인 소사로 나뉜다. 흉례는 왕실의 상장에 관련된 의식과 산릉의 제사, 시호와 책보를 올리는 의식이다. 왕이나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등 이 죽을 경우 국장을 치르게 되고 왕과 왕비가 죽으면 5개월 장을 치르고 궁 안에서 3년 상을 치른 뒤 종묘에 신주를 봉안한다. 빈례는 외교와 관련되는 국가 잔치를 말한다. 군례는 임금이 사단에 나아가 활쏘기 군대의 출정, 개선, 대열, 강무 등 과 관련된 의례이다. 군례의 안에서 왕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다. 가례는 왕실의 경사스러운 일로써 왕자·공주의 결혼식, 왕세자빈의 책봉, 궁중에서의 양로연 등 이 있다. 이러한 예는 인간들의 사회관계와 정치질서를 규정한다는 의미가 있어 유교적 정치이념을 표방했던 중세시대에서는 중요시되었다. 오례는 그 원형이 중국의 경전인 주례(周禮)이고, 중국의 한 대에서 진을 거쳐 당대에 이르러 크게 강조되었다. 당나라는 개원례(開元禮)를 오례로 구성했고 중국의 역대왕조와 우리나라의 고려·조선 왕조에서도 강조되었다.고려 때의 길례는 천·지·인 등에 관한 제례이다. 이 제례는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나타난 신과의 대화를 제례로 재현한 것이며, 현실세계에서 국가권력의 실체가 제례를 통해 주인으로 나타나는 점을 반영한다. 고려 이전에 있던 종교적 내용에 준하는 모든 제례를 여기에 통합했다. 길례의 주제자(主祭者)는 고려의 왕으로 고려왕실이 가지고 있던 정치권력의 권위와 대의명분이 강조된다. 길례의 항목은 원구(圓丘) · 방택(方澤) · 사직(社稷) · 태묘(太廟) · 적전(籍田) · 선잠(先蠶) · 문선왕묘(文宣王廟) · 풍사(風師) · 우사(雨師) · 영성(靈星) · 마조(馬祖) · 선목(先牧) · 뇌신(雷神) · 마사(馬社) · 마보(馬步) · 사한(司寒) · 제주현문선왕묘(諸州縣文宣王廟) · 대부사서인제례(大夫士庶人祭禮)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조선이 들어서자 이 항목 중에서 원구제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기 때문에 폐지된다.고려의 흉례는 중국 당나라와 항목이 비슷하게 되어있다. 이 예제는 사망자의 애도를 위한 것인 동시에 왕권이나 국가체제 안에서의 사회질서라는 분명한 목적의지가 담겨진 오복제(五服制)와 여러 신하의 상제가 항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왕의 사망 시 의례는 전부 빠진다. 항목으로 국휼(國恤 )· 진위의(陳慰儀) · 부태묘의(附太廟儀) · 상국상(上國喪) · 백관기가(百官忌暇) · 제신상(諸臣喪) ·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 등이 있다. 조선의 흉례에서는 태조의 승하를 계기로 시행되었는데 중국왕실과 차등을 두고 내적으로 사대부의 의례와도 차이를 둔다.고려의 군례는 군대에 대한 예제로 군의 최고통치권자가 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항목으로 견장출정의(遣將出征儀) · 사천의(師遷儀) · 구일월식의(救日月食儀) · 동계대난의(冬季大儺儀) 등이었다. 여기서 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강무(講武) · 수전(狩田) · 사례(射禮) 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은 태종대에 강무 등의 의례를 작성했고, 취각령(吹角令)과 같이 긴급사태 발생 시 군사의 명령체계 전달을 연습하는 항목이나 대사례(大射禮) 등을 보강했다. 에는 군의 출정에 관한 사항을 모두 뺐다.고려의 빈례는 왕과 제후와의 만남을 위한 예이다. 고려왕조에서는 국제관계의 예제가 반영되었다. 그런데 빈례항목은 매우 빈약해 총 5개인데, 그중에서 3개항목이 중국 명나라와의 관계이다. 이런 점은 에 조선 초기에 남아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빈례의 특징은 명나라를 제외한 북조와의 의전에서 고려왕이 사신과 대면시 남면(南面)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위치를 유지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사대명분론에 입각해 운영하고 그밖에 왜(倭)등과는 교린관계로 처리했다.고려의 가례는 가장 많은 의례를 나타내고 있는데 왕실과 관료사이, 중앙관료와 지방관료 사이에서 행하는 의전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주로 당서(唐書)에 나타난 황실중심의 권력구조와 왕자·신하와의 관계를 의전으로 소화했던 것을 모방하여 제정했다. 그러나 가례 끝에 연등회와 팔관회를 넣은 것은 만민과 친해야 한다는 주례의 가례이념에 충실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존중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가례에 향음주례(鄕飮酒禮)가 빠졌다는 사실은 고려에서 유교문화 수용의 범위가 왕실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항목은 총 55개이다. 조선시대에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없어지고, 대신 향음주례 · 개성부급주현양로연의(開城府及州縣養老宴儀) · 문무과영친의(文武科榮親儀) 등이 새로 편입되었다. 전반적으로 에서 서례가 따로 편집되고 보다 상세한 의례운영을 위한 도설과 설명이 들어간다.
정화의 해외원정환관출신 정화대 항해를 이끈 정화(1371~1434)는 1371년(홍무4)에 윈난성 꾼양 이슬람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성은 마씨이고 자는 삼보이다. 1382년 윈난 지방이 명나라에 정복당한 후, 그는 환관이 되었다고 한다.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환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두 가지 유력한 설이 있다. 하나는 피정복민 가운데 우름다운 소년을 뽑아 환관으로 삼는 것은 중국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던 관례로, 정화도 명군에 의해 윈난이 정복당했을 때 포로로 잡혀 환관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런가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는 생활고에 허덕거려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으로서 연왕 주체를 모시게 되었다는 설이다.어쨌든 그는 겨우 12살의 나이에 환관이 되어 궁정에서 연왕이라 불리던 영락제를 섬기게 되었다. 연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조카 혜제를 몰아내던 정난의 변(1399~1402)때, 정화는 연왕을 도와 무공을 세워 연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연왕은 영락제(1403~1424)로 즉위하자, 그를 내관감의 장관인 태감으로 임명(1404 영락2년)하였다. 이 때에 그는 황제로부터 정씨의 성을 하사 받아 마침내 정화가 되었으니 그의 나이 34세 때의 일이었다. 중국에서 황제가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환관에게 성을 하사하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로 이것은 정난의 변에서 그의 공이 얼마나 컸었나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자바 섬에서 아프리카 동안까지 7차의 대 원정정화의 남해원정은 1405년 제 1차 원정을 시작으로 1433년까지 약30년 간 전후 7차에 걸쳐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졌다. 정화의 대함대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섬, 자바 섬에서 인도연안의 캘리컷, 실론 섬, 페르시아 만, 아라비아 반도에 진출하였고, 또한 일부는 메카와 아프리카 동안까지 이르렀다.그 가운데 대선 62척과 27800여명의 병사가 참여한 1차 원정이 그 규모에서 가장 큰 원정이었다. 이 때 나침반 항해지도 등을 갖추고 참파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등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방문했다. 4차 원정 때부터 페르시아 만을 거쳐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원정하였다. 정화 함대가 찾아 간 여러 지역의 지배자들이 그 위압에 눌리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었다. 정화 함대와 함께 명나라를 찾아 온 아프리카 동해안 마린디 사절은 기린을 공물로 바치었다. 기린은 목이 긴 초식동물을 일컫는 소말리아어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기린하면 고대 시가에 노래하던 가공의 동물로서, 이 세상의 성인이 나타나 천자가 되어 태평성대의 정치를 실현할 때 비로소 출현한다는 상서로운 전설상의 동물로 알려져 왔고 누구도 본 사람이 없었다. 목이 길며 이상하게 생긴 현지어의 동음인 기린이 나타나자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되었다. 기린이 북경에 도착하자 영락제는 유교에서 가장 이상으로 여기는 전설의 시대가 도래하였다하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정화는 원정 지역의 저항 세력을 굴복시키고, 현지 내전에 개입하기도 하는 등 그 명성을 크게 떨쳤다. 그러하기에 타이, 자바, 수마트라 등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삼보묘가 건설되기도했다.원정의 목적은 국위 선양과 교역 촉진정화의 대 원정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먼저 경제적 번영을 들 수 있다. 국초 주원장 태조의 농업 진흥책이 성공을 거두고 생산력이 증대하여 영락제 시대는 국고가 충실하였다. 이러한 충실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영락제는 몽골, 베트남을 비롯한 적극적인 대외 원정을 꾀하여 국위를 선양시킬 수 있었다. 거기에 더욱 원정을 뒷받침 한 중요한 요건은 명 초 뛰어난 조선술이다. 명초는 송 원시대 이래의 조선업이 잘 계승 발전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거대한 함선을 만들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나침반의 사용, 별의 위치를 측정하여 항해 지점을 확인하는 항해 기술 등이 뛰어나 원양항해를 가능하게 하였다.영락제가 정화로 하여금 약 30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대 원정을 단행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명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조공관계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 곧 국위를 과시하여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게 하자는 것이 영락제의 기본 방침이었다. 종조국이라 해서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 군신관계를 맺고 그 나라에 무역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정화의 남해 원정은 국위를 선양하여 조공국가를 많이 형성하고 그것에 의해 교역을 촉진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국가적인 목적 외에 정난의 변 때 사라진 조카 건문제의 행방을 찾아내어 후환을 없애려는 목적이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것은 그만큼 영락제의 뇌리에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를 건문제의 존재가 항상 염려되고 있었던 데서 나온 해석 일 것이다.원정을 이끌었던 정화는 키가 180cm가 넘는 당당한 체구이고,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말이 유창하였다. 이슬람교도이면서 불교에도 귀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점이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교섭에 가장 적합했다.제6차 원정(1421)이후 영락제는 정화를 팔렘방의 사절로 보내었는데, 정화의 귀국을 보지 못하고 그는 죽었다. 다음의 홍희제는 원정을 중지하고, 대신 정화와 그 원정대에 참여한 병사에게 남경의 수비를 맡게 하였는데 그 결과 명에 조공하는 것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다음의 선덕제에 이르러 정화의 남해 원정이 재개되었지만, 그 때 정화의 나이 이미 60살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정화는 친히 멀리 페르시아 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이르러 멕카에 분견대를 파견하고 성지를 순례하고 오도록 하였으나, 그 후 1년 뒤에 그는 생을 마쳤다.정화 남해원정의 영향 및 의의정화의 남해 원정은 여러 면에서 후세에 영향을 주었다. 먼저 정화의 남해 원정 결과 중국은 30여 개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되었고, 또한 빈번한 조공 무역을 통하여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해외로 나간 중국 상품으로는 도자기 비단이 주를 이루었고, 중국으로 들어 온 것은 후추 용연향 진주 산호 등을 비롯하여 기린 사자 표범 타조 서역의 말 등 진기한 짐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양적으로 많은 것은 후추였다.정화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15세기를 통하여 중국의 문명이 서방으로 흘러 들어가 서아시아 사회에 영향을 미치었다. 중국산 도자기가 서아시아의 도자기 기술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융단의 아랍 식 기하학 문양에 중국풍토의 용봉무늬가 가미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아시아의 항해 기술, 여러 가지 진귀한 동식물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특히 정화의 남해원정은 중국인들의 시야를 넓히는 데오 크게 공헌하였다. 남해의 지리게 관한 서적이 편찬되고 지리적 지식이 크게 보급되었다. 정화가 남긴 항해도 와 침위도는 세계 해양지리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정화를 수행하던 부관들이 남긴 기행문은 여러 지역의 풍토 인정 산수 산물 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곧 마환의 영애승람 비신의 성차승람, 공진의 서양번국지 등은 남해에 대한 지리적 지식을 높여 주었을 뿐 아니라 중국 항해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그리고 정화의 남해원정은 동남아시아로의 중국인의 진출을 자극하였다. 정화의 시대에 자바, 팔렘방 등의 화교 사회가 이미 성립되었으며 명 제국은 사라졌어도 그 후 동남아시아에 이주하는 중국인들이 늘어 화교진출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화교들이다.15세기 초에 활발히 전개된 명의 대 항해 활동은, 해외 무역할동을 금지한 명의 대외정책, 유교 관리의 해외 원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 그리고 시민 계급의 성장 결여 등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지만, 정화가 환관으로서 대항해 시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자리에 올라, 대 원정으로 국위를 선양하고 동서 문화 교류에 이바지하였다는 사실은 정화를 세계 항해사에 뚜렷한 한 획을 그은 인물로 만들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마테오리치유럽 상인에 의해 중국 무역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을 때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활발히 진출하였다.
목 차Ⅰ. 의종의 즉위Ⅱ. 의종의 측근세력 구성1. 내시2. 문신3. 기타Ⅲ.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의종의 즉위의종(毅宗, 1127~1173년), (재위기간: 1146~1170년)의종(毅宗)은 인종과 그의 부인 공예왕후 임씨 사이의 맏아들로 1127년 4월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睍), 자는 일승(日升)이다. 1143년(인종 21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146년 2월 정묘일에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고려 제 18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이때의 정국의 동향을 보면 인종대 후반 정국운영을 주도하던 문벌귀족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겪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하여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의 독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의종은 즉위 후 김부식의 세력의 견제 속에서도 일부 귀족들과 외척을 우대하는 한편 측근세력 육성에 힘쓴다. 그 측근세력은 문벌귀족에서 구하기보다 반대로 가문의 기반이 없는 사람들을 찾거나 환관이나 내시들을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키워 나간다.Ⅱ. 의종의 측근세력 구성1. 내시(內侍)먼저 의종대는 왕의 측근으로 내시 직에 있거나 내시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내시는 승선이나 대간등과 같이 특정한 관직에 구애되지 않으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보좌하고 돕는 위치에 있어, 국왕은 제도적으로 구애를 덜 받으면 동시에 측근으로 내시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내시의 기능과 활동의 강화를 통해 자신의 지지세력 내지는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의종은 자신이 필요한 인물이나 추천받은 인물을 내시로 임명하면서 자신의 측근을 늘려갈 수 있었다.)의종의 측근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당시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 인물은 환관출신의 내시 정함(鄭?)이다. 그는 의종 유모의 남편으로 왕이 어릴 때부터 정성껏 보호해 준 인물이었다. 의종은 즉위 후 서두공봉관 정함에게 좋은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서두공봉관은 액정국에 속한 종7품의 관직인데, 액정국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며 대궐 문의 열쇠궐에 들어와, 의종의 유모와 결혼하였고, 그로 인해 의종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그는 의종 5년에 내전숭반 직에 있었는데 이 역시 종7품의 액정국에 속한 관직이었다. 이 당시 의종이 왕비 왕씨를 위하여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정함이 서대를 띠고 있었다. 이는 정함의 관직에 맞는 복장이 아니므로 대간의 비난을 받아 빼앗겼지만, 의종은 다시 그에게 서대를 돌려주었다. 이처럼 의종은 집과 서대를 주면서 정함을 총애하고 있었는데, 그의 신분이나 관직을 넘어선 것이었다.게다가 의종은 정함이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내시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의 내시 임명은 당시로는 파격적인 인사이므로 국왕은 대간들과 여러 번 부딪치게 된다. 고려시대 환관은 내궁이나 내궁의 직임을 가질 뿐이고, 조정 관원으로는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함은 신체적으로나 법적으로 조정의 관원이 될 수 없는 처지였음을 알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종은 정함을 권지합문지후로 삼으려 하였다.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왕은 “경들이 짐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짐은 먹는 것이 달지 않고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며) 고신서명을 부탁하거나, “만얀 서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여서 젓을 담글 것이다”라고) 위협하면서까지 정함에게 이 관직을 제수하고자 했다. 합문은 고려시대 조회 때의 각종 행사절차와 예식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합문지후는 비록 정7품에 불과하지만 조관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인물의 천거나 시정의 득실에 관해 상소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액정국의 벼슬과 합문의 관직은 그 지위가 다르고, 환관으로 임명된 전례가 없었기에 대간이 정함의 임명에 반대했던 것이다.정함은 자신이 권지합문지후가 되는데 대간의 반대에 부딪치자 앙심을 품고는 대간들이 의종의 동생인 대녕후 경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모함을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으나 의종은 대녕후로 인해 왕위에 오르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대간들을 귀양을 보내거나 유배를 시켰다.결국 정함은 여러 차례 대간의 간쟁에도 불구 등을 천거하고 끌어들여 우익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환관 출신의 내시나 관노 출신의 내시가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행위를 하게 되었다.영의(榮儀)는 점을 통해 의종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출신 역시 관직을 갖는데 문제가 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영의는 왕의 환심을 얻기 위해 무리한 일을 벌였다. 그는 “나라의 기업이 오래가고 못가는 것이나, 임금의 수명이 길고 짧은 것은 기도를 근실하게 했는가 못했는가에 달려있다”고 하여, 왕을 미혹하였다. 또한 왕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바를 알면 기도를 통해 재앙을 물리쳐 줄듯이 하여 법회를 열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의종의 동생들에 대한 의심을 이용하여 익양후의 집을 빼앗아 별궁을 창설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을 통해 왕의 총애를 얻었던 것이다. 어사중승 고영부, 시어사 한유정, 최규심 등이 그를 내쫓을 것을 청했지만, 왕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은 오히려 영의의 편에서 기도의 공을 찬양하고 영의를 보호하였다.영의 역시 총애를 이용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다. 그가 순시할 때 수령과 숭도들이 그의 가혹함을 두려워하여 다투어서 뇌물을 주었다고 하니, 이로서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영의는 무신의 난이 일어난 후 정중부 등에 의해 피살된다. 이처럼 정함이나 영의와 같이 신분상 결격사유가 있는 인물이나 자신에게 충성할 사람들을 내시로 임명하였다. 이들은 당시 대간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지만,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세를 누리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왕에게 충성하고 있었다.2. 문신문신 중에도 의종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나 문신들에 대한 총애는 절차상 합법적이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비단은 내시나 환관들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았다. 당시 의종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권세를 가진 인물은 김존중(金存中)이다.김존중이 용궁군 사람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당시의 유력한 문벌귀족 가문의 출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학문에 힘써 과거에 등제하였고 시문에 능한김존중은 고위직으로 승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가 정함과 친밀함을 가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듯하다. 즉 김존중은 왕의 측근인 정함을 통해 자신이 출세할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둘은 이미 의종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알고 있었지만, 김존중 자신이 기존의 문벌귀족에 비해 낮은 신분이었기에 의도적으로 정함과 가까이 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의종의 즉위한 후에는 김존중은 내시가 되었다.의종의 즉위 초 정습명의 보필을 받고 있었는데, 그가 왕에게 ‘아는 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직언하자, 비록 그의 도움으로 왕이 되긴 했지만 의종은 그를 꺼려하였다.) 이를 알고 정함과 김존중이 밤낮으로 정습명을 비난하였다. 정습명이 병으로 죽자 정함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우승선으로 발탁되었다. 결국 정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김존중은 정함의 덕에 의해 승진하였고, 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을 것이다.김존중은 정함과 함께 대녕후 경의 공모하여 정서를 유배시키게 만든다. 이 일로 인해 김존중은 더욱 사랑을 받게 되어 후에는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김존중은 정함과 결탁하여 천단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자는 승진시키고 동조하지 않는 자는 배척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 형제와 친척들도 역시 권세를 믿고 교만 방자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그는 의종 10년 46세로 죽기까지 비록 재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전주권을 행사하였고, 재상도 오히려 그의 뜻에 합해야 할 처지가 되었던 것을 볼 때, 그의 권세는 관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가문의 배경이 없던 정함과 김존중 등의 활약으로 기존의 문벌귀족 사회는 변화되게 되었다.최유칭도 의종의 사랑을 받은 인물로 보인다. 그는 수주최씨 최자성의 아들로 추정되므로 다른 측근들에 비해 가문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의종 초에 어사잡단(종5품)이 되었고, 후에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수태보 판상서이부사에 이르렀다. 그 역시 요직에 앉아 권력을 차지하고 자기에게 아부하)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그의 직위는 좌산기상시(정3품)였지만, 그 권세는 그 이상이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던 인물로 묘사 되고 있다. 그럼에도 의종이 오히려 문극겸을 좌천시킨 것은 의종이 최유칭을 총해했음을 알려준다. 그가 무신란에 살해될 정도로 당시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았던 것을 보면 측근으로 부정적인 면이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외에 의종대 말기 왕의 사랑을 받았던 문신들로 승선 임종식, 기거주 한뢰, 지어사대사 이복기 등이 보인다. 그들이 의종의 행차한 곳에 따라다니며 더불어 시를 읊은 것을 볼 때, 시문에 능한 인물들이었고, 이들 역시 내시나 환관출신의 측근들과 달리 법제적 합법성을 띠었다. 이중 이복기는 김존중의 사위였다. 그가 왕에게 사사로이 의복, 보물, 과실 등을 바치자, 왕은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에 있어서 또 누가 그대보다 더한자 있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감격하고 있었다. 왕은 자신이 총애했던 김존중의 사위라는 것과 그의 충성스런 행위로 이복기를 총해하였다고 짐작된다. 승선 임종식과 기거주 한뢰 등은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은총만 믿고 무사를 멸시하는 행위까지 하였다)고 하니, 그들에 대한 왕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무신란이 일어난 도화선을 제공한 인물들로 비난받았고, 난 중에 무신에 의해 살해되었다.문신 측근들도 최유칭을 제외하면 고위직에 있어서가 아니라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관직을 초월한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다.3. 기타환관 백선연은 남경의 환관출신으로 총애를 받았다. 의종이 남경으로 갔을 때 마음에 들어 양자로 삼았는데, 왕의 침전에 자주 출입하면서 제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백선연은 왕이 좋아하는 여인 무비와 추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종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 있던 것은 신분가 행동 면에서 당시의 기존세력들에게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면 의종은 이들을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임금의 나이 수에 맞춰 부처를 만들고 관음보살 화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