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제 목 : 박정희의 리더십목 차I. 서 론3Ⅱ. 본 론31 .박정희의 일생31.1 어린 시절의 박정희31.2 군인 박정희31.3 대통령 박정희42. 박정희의 리더십62.1 서독 광부 파견62.2 일본과의 수교72.3 경부고속도로7Ⅲ. 결 론9Ⅰ. 서 론오늘 날의 대한민국은 세계 12위의 무역 강국이며 올림픽과 월드컵, G20 개최 등 세계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다. 그 것도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벋어나고, 6.25 전쟁을 겪은 후 불과 50여년 만에 이뤄낸 결과이기 때문에 세계 각 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은 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이뤄낸 성과임에 틀림이 없다.이 글에서는 박정희의 대통령이었을 시절의 여러 가지 사례를 바탕으로 박정희 리더십의 유형을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 론1. 박정희의 일생1.1 어린 시절의 박정희박정희의 초등학교 시절은 보람찬 것이었다. 그의 가족이 과묵의 원인이었다면, 학교는 그의 자부심을 한껏 키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매번 성적이 일등이었으며 3학년부터는 내리 급장을 지냈다.결국 그는 구미보통학교 졸업생 최초로 명문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는 영광을 안았다. 박정희는 1932년 4월 8일 대구사범 4기로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한 뒤인 1937년 3월 25일 졸업했다. 그가 ‘명문 대구사범’에 합격한 것은 상모리는 물론 구미면 일대의 경사였다. 어머니 백남의는 학비 걱정 때문에 낙방하기를 기도하며 바랬지만, 그는 100명의 합격자 중 51등으로 합격했다.박정희의 초등시절은 체구가 작은 열악한 육체적 상태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학교생활을 보냈으며 급장으로서 그의 활동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급장으로서의 이 같은 면모는 당시의 초등학교가 15-6세에 이르는 청소년들도 다니는 학교였음을 감안하면 주목 받을 만 했다.1.2 군인 박정희1950년대, 한국의 군대는 부패하고 질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알려졌던 인물이 바로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강으니 군대만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속에서도 박정희 장군은 꼿꼿하게 살아왔다. 그가 제 7 사단장으로 있을 때 참모총장으로부터 각 군에 대하여 모포재고량을 조사보고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사단장들은 모두 자기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숫자상으로만 맞는다고 허위보고를 했으나 박 장군은 모자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휴전 이 후 기동연습을 하면서 산의 나무를 베어버리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우리 국군이 해야 할 일은 산의 나무를 베어야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심어야 한다." 고 진언하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처럼 꼿꼿하고 청빈하게 살다 보니 장군이 되어서도 남의 집 셋방으로 전전했던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양식이 떨어져 남의 집으로 쌀을 꾸러 가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절약정신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수돗물 한 방울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자신이 쓰는 화장실의 변기수조에는 벽돌 한 장을 반드시 넣어놓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는 아무리 더워도 집무실에 선풍기나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파리가 날아들어 오면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파리채로 파리를 잡으며 집무를 했다고 하면 얼른 수긍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겨울에 난방을 하는 경우도 비슷했다. 온도계를 걸어 놓고 최저의 난방을 유지하는 것이 철저한 원칙이 되고 있었다.1.3 대통령 박정희박정희 대통령은 통일보다 평화를 더 우위에 놓았다. 그는 1964년 12월9일 서독 방문시 교포들을 만난 자리에서 ‘통일은 꼭 이룩해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력에 의한 통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1969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에서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북한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국토 통일이 민족의 숙원이요, 국가의 至上목표라 하더라도,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수단만은 피해야겠다는 것이 우리의 진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내의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자제를 해온 이유도 바로 여기북한지역에서 남한지역을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도 한번 다녀가면 좋지 않겠는가. 우리는 공산주의 때문에 사는 민족도 아니고 또 남의 나라 민주주의 흉내나 내자고 사는 민족도 아닌 것이므로 무슨 주의니 제도니 하는 것 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남북이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겠는가. 김일성이 온다면 그 신변은 철저히 보장할 용의가 있으며 이념의 꼭두각시가 되어 작두 위에서 춤추는 행위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박정희는 1970년 5월23일 전국 대학생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자신 있는 내실을 기했을 때는 경부 고속도로를 연장하여 판문점에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해 줄 수도 있고, 북한의 능력이 부족하면 백두산, 금강산 개발도 우리가 해 줄 수 있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대북사업을 예언한 듯한 박정희의 비전은 그러나 김일성의 통일전략을 직시한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북한정권에 속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박정희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인내한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의 시간이 길수록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對北 우위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인내에는 한계가 있어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4월25일 기자회견에서 ‘인내와 자제는 반드시 한계가 명백해야 되며, 그 선을 넘었을 때에는 자제하고 인내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오히려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가 된다.’ 고 강조했다. 박정희가 북한의 침략에 대해 강조한 자주국방의 개념은 ‘북한 단독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리 단독의 힘만으로써도 능히 이를 분쇄할 수 있는 자주 국방력을 언제든지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는 연설(1970년 1월1일 신년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주국방 정신을 더 쉽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 자신의 신조를 국가 전략의 대강으로 전환시킨 것이 있는 데 바로 자조-자립-성격을 보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한국의 산업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에 따라 Barber의 유형에서는 ‘적극-긍정형’으로 평가받는다.그러나 그는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했다는 점과 비민주적인 탄압, 그리고 권위주의 형태의 통치방법으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때때로 ‘적극-부정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애초부터 박정희는 쿠데타를 통해 통치권을 장악한 반칙의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데타 콤플렉스를 상쇄하기 위해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지도이념으로 설정하고 ‘하면 된다.’ 는 신념하에 국민을 경제건설의 일터로 동원했다. 그 결과 경제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업적을 쌓을 수 있었으나 동원방식이 억압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리더십은 억압적 속성을 띠게 된다.박정희가 ‘장면 前 정권’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뒤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우선순위로 둔 것은 경제발전으로 경제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주요 경제 정책과 사례들을 통해서 박정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알아보고자 한다.2.1 서독 광부 파견당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외국으로부터 외화를 조달해야했지만 가난한 동양의 작은 나라에 돈을 빌려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때에 박정희의 리더십이 돋보였다. 포기하지 않고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으로 외화를 빌려오기 위해 지속적으로 서독과 협상을 추진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명예를 먹고 사는 군인 출신인 박정희가 낮은 자세로 오직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민을 위해 협상을 통하여 1억 5천만 마르크를 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서독에 담보를 제공해야 했고, 담보를 제공할 만한 것이 없었던 당시의 정부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에 인력을 수출하기로 하고 이들의 월급을 3년간 서독은행에 강제 예치하기로 결정했다. 강제 쿠데타로 정권 집권을 한 박정희였기에 미국의 미움을 받았고, 가난하기까지 했던 나라에게 서독이 엄청난 돈을 제공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박정희의 협상력과 리더십, 대한민국의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2.2 일본과의 수교모든 국민과 정치가들이 반대하고 비난 하였던 일본과의 수교, 하지만 박정희는 일본과의 수교가 가져올 많은 이익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비난을 물리치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성공시켰다.사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라는 것이 지금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안이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말 이것은 국가를 파는 반국가적 행위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생각은 달랐다. 한 때 한반도를 지배하고 우리 민족을 억압했던 일본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을 이용해 우리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국교 정상화 의지를 표방하게 되고, 국교 정상화 합의를 이끌어 냈다. 모든 국민들이 반대를 하고 시위대를 구성하여 매국행위라며 박정희를 비판하고 국교 정상화 반대를 외쳤지만 박정희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분에 집착할 필요가 없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라며 굳은 의지로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박정희는 자신의 결정에 온 국민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을 이해시키고자,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라디오 연설을 통한 국민 설득 이었다(오늘 날의 대국민 담화).“나는 우리 국민 일부 중에 한일 교섭이 굴욕적이니, 저자세이니, 심지어 매국적이라고 까지 극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들의 주장이 정부를 편달하고 교섭하는 정부의 입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이것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박정희는 협상 당시 국내의 반대 여론을 짐작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본과의 협상에서 더 좋은 결과를 이뤄냈다. 국가 내부에서 그 협상에 대해 심한 반대가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