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중세는 게르만족이 원시 기독교에 감화되어 수도원 교육의 금욕주의와 스콜라 철학이 교육 내용과 실제가 구현된 시기로 유럽의 종교계는 물론 학문계까지도 기독교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신의 본질 내지는 증명의 문제와 신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과학적 방법이나 교육에 있어서의 관찰과 실험의 의사까지도 결핍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기고 간 합리적 철학은 유럽의 학문계를 풍미하여 그 영향을 받지 않은 학자가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의 계시 진리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대립해 있는 두 세력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그 나름대로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가리켜 스콜라철학, 기독교적 실재론, 또 그의 이름을 따서 토미즘(Thomism)이라고도 한다. 아퀴나스는 신앙만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이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두 노선, 즉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고 절충시키는 과정에서 자기 사상을 정립하였던 것이다.Ⅱ. 본론1. 토마스 아퀴나스(Th. Aquinas, 1225-1274)의 생애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1225년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지점인 아퀴노의 마을 근처에 로카세카에 축조된 산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란돌포는 아퀴나스의 영주였으며 자신의 아들이 언젠가는 고위 성직자에 이르기를 기대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출신의 귀부인으로서 1243년경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1255년경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에 아퀴노가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로카세카 산성의 분위기는 전란의 거친 분위기와 귀족 생활의 우아함이 뒤섞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5살 때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 9년 동안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의 생활환경은 산성에서 부모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뀐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의박했음을 깨달은 토마스는 세속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라지 않아 이전부터 초대를 받고 있었던 거기에서 가까운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 수도원에는 토마스가 그 생애의 마지막 10여일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객실이 보존되어 있다. 토마스는 일요일에 대수도원장(테오바르도) 손으로부터 성체를 영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1274년 3월 7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토마스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이후 그는 1323년에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897년에는 그의 사상이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에 의해 카톨릭 교회의 공식학설로 인정되었다.2. 중세의 교육1) 시대적 상황중세는 고대문화의 몰락으로부터 시작하여 15세기 말엽까지를 가리키는 시기이다. 중세는 다른 시대와는 달리 학문이 경시되고, 기독교라는 종교가 팽배했지만, 봉건제도와 장원제도 등을 기초로 중세 특유의 문화가 확립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초기에는 민족 이동 직후의 혼란과 무질서 상태로 찬란한 로마문화가 파괴되고 상대적으로 비잔틴, 이슬람세계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으나 10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안정세를 보이고 발전해 나간다. 특히 11세기 후반에는 카톨릭 교회의 이슬람교회에 대한 성전으로 행해진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 문명에 기초하고 있던 농업 경제 체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지고 오는 큰 역할을 한다. 교역의 증대, 전문적인 수공업의 부활, 도시의 발달 등은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을 탄생시키고 도시에서는 새로운 지적 각성으로 중세 대학이 성립되었으며 여러 경제 생활상에 필요한 시민학교도 속출하였다.2) 교육적 상황이 시기의 교육적 상황은 종교 생활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았고 학문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다 11세기부터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서 벗어나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하고 학문과 교육도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시민학교와 대학도 발생하였다.교육이념, 교육내용들을 기독교적 삶과 교육의 이상으로 통일되었다1세까지의 종자기로 구분되는 단계별 교육을 받았다. 시동기는 봉건귀족의 7,8세 된 아이가 아버지의 주군이나 친척의 상위귀족의 궁정에 가서 기거하며 예비 기사로서의 교육과 훈련, 예의범절을 배우는 시기였다. 영내의 간단한 일, 부인의 시중으로부터 예의범절, 악기연주, 노래 등 비군사적인 재능을 닦는다. 종자기에는 무사의 신분으로 주군에게 봉사하면 말의 사육에서 무술연마까지 기사의 7예(말타기, 수영, 투창, 검술, 수렵, 장기, 시작)와 궁정문화의 전반의 수업을 받았다. 기사 교육에는 기사의 말인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과 음유시인의 노래 및 음악 외의 지적요소는 없다. 21세가 되면 기사임명식을 통해 완전한 기사가 된다. 이 때 기사도의 종교적인 면도 중요하게 여겨지며 주군에 충성, 교회를 보호하고 부녀자와 약한 자를 보호하며 관용과 친절을 베풀 것을 지켜야할 내용 등으로 규정한다.기사도로서 후세에 전해진 덕들은 신사교육의 지표로 오랫동안 존중되었다. 그러한 중세풍의 사치스럽고 인위적이며 세속적인 기사도는 당대에 풍미했던 금욕주의와 수도원의 내세적 이상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했다.(3) 11세기 이후의 시민교육상업과 도시경제가 성장한 11세기에는 도시민은 새로운 계급으로 형성되었다. 대체로 상인과 수공업자로서 각각 조합을 형성하였고 이를 통해 경제 활동과 생산에 종사하였다. 도시민들은 봉건영주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자유로운 신분이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기존의 성직자나 기사계급과는 다른 교육을 필요로 했다. 이에 의해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수순한 개인 사업이었다. 학교는 크게 부유층의 자제들이 다니는 라틴어 학교와 직업에 필요한 교육을 하는 조합학교가 있다. 라틴어 학교는 주로 자유도시의 지배계급의 자제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시민의원의 자질을 교육시키는 의원학교, 공중학교가 있다. 조합학교는 세속적인 성격과 보통교육이 성격을 가지고 실무를 위한 직업교육 준비학교로 읽기, 쓰기, 셈하기, 상업상의 회계와 산술을 가르쳤다. 이들 학교는 모국어의 기발전되어 나오는 것이 물음이 되고 이 물음이 다시 토론이 된다.강독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이며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스콜라주의는 이 강독을 제도화하고 확장시켰다. 이것은 논리적인 설명을 위해 문법적인 분석에서 심도 있게 나아간다. 이러한 강독은 현재 강의라는 것이 강독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강독자가 자신이 준비한 교재를 학생들 앞에서 또는 함께 읽어가며 설명하는 형식이다. 물음은 강독에서 좀 더 높은 수준의 교수 방식으로 물음이 등장하는 경우는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또는 한 문제에 대해 다른 답이 나올 경우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토론을 하게 된다. 토론은 교수의 주재 아래 열린다. 토론은 다른 학과 학생들에게도 공개된다. 이때 교수는 토론자가 아니고 문학사가 답변자의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토론의 연습과정을 겪는 것이다. 학부생들에게는 질문을 던질 자격이 반드시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교수는 토론 후에 토론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의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규정하고 서술한다. 석사에게는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자유토론은 일 년에 2번 정도 열리는 토론 형식으로 지금의 학회 발표회와 유사하다고 한다. 이때 주제는 임의의 청자의 요구에 따르는 임의의 주제에 대한 토론으로 아주 다양한 내용을 다루게 되었다.(6) 스콜라 방식스콜라는 학교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인 schola에서 유래한다. 스콜라주의는 11세기 중반에서 15세기 중반까지 유럽이 그리스도교적인 대학교에서 있었던 논의를 결정했고 그리스와 로마 철학을 그리스도교적 종교적 지식과 결합시켜 정돈된 체계를 마련하고자 했던 학문적 경향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인간의 이성의 도움으로 초자연적인 신의 계시를 이해하려고 했던 움직임이었다. 즉 스콜라 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보다는 고대에 이미 획득된 지식을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일치시키려는 것이다.스콜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문법이다. 언어의 규칙인 문법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낱말, 개념, 존재 등이었다. 문법 이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질료와 형상은 다시금 가능성과 현실성의 관계로 설명된다. 제일질료는 형상을 떠맡을 가능성의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하면 제일질료는 “실체적 형상에 의해서 현실화되어야 할 순수한 가능성”이며, 각각의 형상은 그 질료에 대해서, “가능성에 대한 현실성의 관계”, 즉 “질료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이다.질료란 일종의 가능태이다. 예를 들어, 공기가 불꽃으로 변한다면, 이는 공기가 불꽃으로 변할 가능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 공기와 불꽃에 공통적으로 있는 질료는 확실히 상호 변할 수 있는 것들의 능력이다. 그러나 불꽃의 가능태가 공기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공기는 공기의 형상을 가지고 있고 또 동시에 가능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질료란 어떤 형상과 결합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고 또한 주어진 형상과 분리되어서도 동일한 질료일 수 없는 것이다.이처럼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적 철학 방법을 빌어 이성과 신앙을 구별하는 동시에 조화하기 위한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와 형상의 불가분의 관계와 감각적 실재와 비감각적 실재의 세계를 동시에 인정했듯이 아퀴나스는 이성과 신앙의 세계를 동시에 인정하였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를 소유한 불완전한 감각적 실재로부터 형상만을 갖고 있는 순수 형상인 비감각적 실재에 도달하게 되는 우주 질서에 의해서 물질보다는 정신의 세계를 보다 우월하게 생각한 것처럼 아퀴나스는 이 논리를 이용하여 인간의 이성보다는 신앙의 세계가 보다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따라서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에서 신앙과 이성은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계시가, 계시에 이르기까지의 앞 단계는 이성이 개척하는 보충 보완의 관계이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가 아퀴나스에 이르러서는 ‘알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고,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만 한다.’로 변화되어 마침내 신앙과 이성의 구별과 조화가 동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