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사반의 십자가』는 원작(原作)과 개작(改作)이 있다. 작가 김동리는 개작 에서 작가의식을 보다 명료하고 뚜렷하게 드러낸다. 원작에 드러난 은유적 수사(修辭)를 제거하고 환유적 수사(修辭)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사반의 행 동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하지만 수사적 표현은 이면성(裏面性)을 갖는다. 환유적 수사 속에 은유 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주제의식으로 확대될 경우 실존성과 도덕성은 양가적 의미를 띤다. 소설의 기능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문학성과 교훈성은 양가적 의미를 통해 복합적 양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수사적 이면성은 작 가의 의도적 접근을 봉쇄하여 작품은 작가의 통제 밖에서 움직이는 생물 로서 존재하게 되고 비로소 생체정치적인 역동성을 발휘한다.『사반의 십자가』는 원작과 개작 모두 기독교 계열의 소설이 지향해야 할 미래성을 담고 있다. 이는 문학성과 교훈성의 절묘한 조화라는 장점도 있 지만 수사적 기술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한 선례가 되기도 한다.문학은 수사적 이면성 속에서 실존성과 도덕성을 발견한다. 이면적 양태 는 낭만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정치성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떠 한 모습으로 나타나든 간에 수사적 기술은 소설의 문학성과 교훈성을 심 도 있게 볼 수 있는 도구이자 관점이 된다. 은유와 환유의 수사적 상관성 을 통해 기독교 계열의 소설의 지향점을 타진하고 나아가 문학의 진정한 기능까지 재고(再考)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주제어 : 은유적 수사, 환유적 수사, 실존성, 도덕성, 문학성, 교훈성, 기독교 계열 소설Ⅰ. 서론『사반의 십자가』는 1957년에 내놓은 원작(原作)과 1982년에 재출간한 개작(改作)이 있다. 작가가 개작하여 재출간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작가의 세계관이 변모함에 따라 창작 심리나 주제의식에 변화가 온 것일 수도 있고 메시아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이 개작의 과정 속 에 반영되어 첨삭(添削)된 것일 수도 있다.
문학은 사회 구조적 맥락 속에서 정치성과 도덕성을 배태한다. 작가는 자신의 정치성을 통해 사회적 현안을 개인의 이야기로 육화(肉化)할 수 있고 주제의식이 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경험을 이상적 담론으로 의결한다. 정치성이 없는 도덕성 은 경도되기 어려우며 도덕성이 없는 정치성은 지속성이 떨어진다.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은 정치성과 도덕성을 심미적으로 표현한다. 수사적 이면 성 속에서 정치성과 도덕성을 끌어올리며 이상적 담론을 함의한다. 『대륙』을 반 식민주의 저항을 넘어 개인이 갖는 경험과 서사 차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문학의 진정한 기능을 섭렵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성찰하고 능동적으로 시대적 요청에 응전할 때 보다 나은 상상적 공동체나 국가적 지향점 을 도모할 수 있어서이다. 『대륙』은 작품과 콘텍스트 중 어느 쪽에 방점을 찍어야 문학의 진정한 기능을 재고해 볼 수 있을지를 가늠케 한다. 작가는 시대의식을 가 지고 사회적 현안을 바라보지만 그에 대한 막중한 부담은 지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만든 작중 인물을 방목(放牧)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성과 도덕성을 일 정 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모든 출발점을 자신에게서 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주체적인 삶인 동시에 근 대적 사고와 행복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품 속에서 작가가 심 어놓은 문제의식과 해법을 동의하거나 반목한다. 이것은 독자 비평의 심미적 기 능이자 주도적 읽기 방식이다. 따라서 『대륙』을 콘텍스트의 입장에서 제한하기보 다 작품 안에서 인물 간 층위를 이해할 때 문학의 효용적 기능 또한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성과 도덕성의 조화를 꾀하는 동시에 문학성을 정치성으 로 이해하려는 시대의식에 관한 고민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의 성정(性情)을 대하 는 본질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문학으로의 고찰인 것이다.키워드 : 정치성, 도덕성, 문학성, 시대의식, 근대적 사고, 심미적 기능, 철학적 고찰
박경리의『토지』연구-사랑과 실존에 관한 주제를 중심으로 -성용구-차 례-Ⅰ. 서론Ⅱ. 실존의 3단계에 따른 사랑의 유형Ⅲ. 사랑의 지속성과 창조적 결실Ⅳ. 실존적 사랑과 욕망Ⅴ. 결론박경리의『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랑과 실존성은 사랑하는 방법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갖게 한다. 사랑하는 방법은 살아가는 방법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지 가르쳐 준다. 사랑과 실존성이 갖는 깊은 연동성은 미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실존으로의 단계를 대변해 준다. 앤서니 기든스의 열정적 사랑이 탐미적인 사랑으로 성숙치 못한 현상에 집착한 사랑이라면 키에르케고르의 심미적 단계 역시 낭만적 의지와 책임 의식과는 동떨어진 1차적 실존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토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용과 공월선과의 사랑은 1차적 실존성을 넘어선 성숙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낭만적 사랑이 갖는 지속성을 보임과 동시에 임이네가 낳은 홍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함으로써 한 단계 도약한 종교적 실존단계에서의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상현을 향한 기화의 사랑과 오가다를 향한 인실의 사랑 역시 생명보다 중한 것을 창조해내고 견디어냄으로써 보다 성숙한 사랑과 실존적 단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그밖에 인물들이 보여준 사랑과 실존성은 합류적 사랑과 종교적 실존성을 갖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해관계에 따른 욕망이거나 개인의 정욕에 가까웠다. 이러한 모습은 심미적 단계에는 머물러 있으나 열정적 사랑이 갖고 있는 쌍방향적 유대관계가 부재하고 있음을 볼 때에 매우 낮은 단계로의 실존성과 미성숙한 사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사랑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이 갖는 지속성과 실존이 갖는 영원에 대한 희구성 때문이다. 아무리 합류적 사랑을 한다고 해도 그 안에는 열정적 사랑과 낭만적 사랑이 병존해 있으며 아무리 윤리적 실존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도 인간의 실존성은적 사랑이 인간의 욕망과 열의를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 파괴성으로의 부정적 측면과 함께 종교적이라고 할 만큼 희생적인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키르케고르의 심미적 단계는 감성적 측면에서는 유사한 면이 있지만 주체적 선택 차원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다만 앤서니 기든스는 낭만적 사랑이 서사 관념으로의 성찰성을 가지고 있고, 즉각적인 매혹이 낭만적 사랑의 일부가 되려면 열정적 사랑의 성적이고 에로틱한 강박충돌과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키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적 실존성은 최소한 낭만적 사랑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키르케고르의 심미적 단계가 감성적 충동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윤리적 단계는 개인의 의지와 책임 의식으로 구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심미적 단계와 윤리적 단계 모두 절망이라는 실존적 상황을 완벽하게 극복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존적 한계는 정도만 다를 뿐 모든 단계에 선재적(先在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낭만적 사랑 속에 영원이라는 것이 깃들어 있어서 도덕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랑은 사랑을 고귀하게 만들어 주고 단순한 감성으로 타락하는 것을 구해준다고 말한다, 진정한 영원이야말로 사랑을 제일 먼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진정한 영원을 낳기 위해서는 의지의 결정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우리는 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사랑 역시 선택에 따라 그 유형이 결정된다. 기든스의 열정적 사랑과 낭만적 사랑 및 합류적 사랑은 실존적 차원에서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면에서 실존성을 갖지만 그 어떤 사랑도 완벽한 실존성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불안감에 빠지고 선택을 할 경우 후회스러움을 갖는다.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실존성을 갖지만 여전히 결핍으로의 갈등을 겪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인간과 윤리적 인간의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윤리적인에 빠진 임이네를 거두어 들였으며 용이를 임이네의 남편으로서 인정함과 동시에 용이와 임이네 사이에 생긴 이홍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홍이를 향한 월선이의 내리 사랑은 어른이 된 홍이의 기억 속에도 간절한 그리움과 고마움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러한 마음은 김두수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가만있자아. 공노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아아 알 만하군. 월선인가 그 무당딸이""아저씨!"홍의 낯빛이 달라져 있었다."왜 그러나?""제 앞에서 그래도 되는 겁니까?""뭘?""명색이 자식인데 자식 앞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이웃 아이이름 부르듯 그래도 되는 겁니까?""그거야.""김두수 씨 어머니하고 나이 차이도 많지 않을 건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김두수를 노려본다.태생적으로 볼 때에 홍이는 월선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홍이는 생모 임이네보다 양모 월선이를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결실을 넘어 합류적 사랑의 창조성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사랑의 보편성을 일구어냈다는 차원에서 종교적 단계에 근접해 있다.사랑에 의한 창조적 결실은 유인실과 오가다 지로에서도 나타난다.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이 개인의 장벽을 넘어선 창조적 결실이라면 인실과 오가다의 사랑은 국가와 이념을 넘어선 초국가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인실은 일본사람인 오가다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오가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조찬하에게 아이의 양육을 부탁한다."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 것이 없어요."생명보다 중한 것,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찬하는 안다. 조국에 헌신할 것을 맹서한 여자가 그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는 뜻이 더욱 깊다는 것을. 그 럼에도 불구하고 찬하는"이제는 그 사람한테 받으십시오."하고 말했던 것이다."제가 설명해야만 아시겠습니까? 하기는 선생님이내가 나쁜 놈이지. 내가… 구제받을 수 없는 놈이야."상현은 기화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비운다."기화.""네.""빈털터리, 한 달의 생활도 책임질 수 없는 나 같은 사내를 뭣 땜에 이러는 거지?""의지하는 거지요.""무슨 능력이 있어서 날 의지하누.""돈만 있으면 능력이 있는 건가요? 돈은 저도 쓸 만큼은 벌고 있어요.""그러니까 사내가 병신이 되는 거지.""서방님?""음.""다음에 쓰는 소설에는 신여성이 나오겠지요?""뭐라구?"기화를 뻔히 쳐다보는데 상현의 눈빛이 흔들린다. 얼마 전에 상현이 발표한, 《헐벗은 마무 밑 에서》란 긴 제목의 소설은 타락하여 친구의 부모한테까지 버림받은 지식청년과, 소꿉동무였던 기생과의 사랑을 쓴 것인데, 그 기생은 기화가 모델이다. 기화는 양품점에서 만난 명희를 두고 상 현의 마음을 타진한 것이다.기화는 상현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상현은 기화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기화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현 역시 기화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므로 상현의 마음 또한 기화에게 의지하고 있는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므로 심정적인 이해관계의 접점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기화의 마음은 상현의 마음과 다소 달랐다. 기화는 상현이 자신을 떠날 수도 있음을 감지하였다. 기생이라는 신분에서 마음을 주는 행위는 상당 부분 제약을 갖는다. 기화는 상현 외에 의지할 사람을 찾기 힘들었지만 상현은 명희의 등장으로 다른 의지할 곳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상현이가 갖고 있던 마음의 고향은 기화와 명희도 아닌 서희였다. 그 마음은 그의 자존심으로 인해 실천적 의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상현의 마음은 분명 서희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상현이 갖고 있는 사랑의 진정성은 의심 받을 소지가 있다. 그의 사랑은 낭만적 사랑의 '지속성'뿐만 아니라 종교적 단계로의 '창조성' 에서도 파국적 형세로 나타난다.그는 애초부터 명희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아니했다. 자아, 네가 좋아하는 물건을 나는 이렇게 버린다. 잉여상태에서 오는, 유희, 용하는 유희가 완벽하게 진행될 것을 믿었다. 강한 자극 을 즐기려 했었다. 그런데 심각할 것도 없는 장난이 자신을 송두리째 뽑아 내동댕이치는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조용하의 욕망은 김두수처럼 일방적이지는 않았으나 그에 못지않은 심리적 병리 현상에 가까웠다. 그것은 임이네가 가지려 했던 돈에 대한 집착과 같은 심리로써 동생 조찬하에게 느끼는 열등의식과 함께 생겨난 병적 심리의 발로(發露)라고 볼 수 있다. 삶의 본질에서부터 멀어진 심미적 단계는 낭만적 사랑과 합류적 사랑뿐만 아니라, 열정적 사랑 또한 불식시키고 만다. 물론 삶의 본질을 실존적 완성 차원에서 경험적으로 옮기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삶의 본질을 천착한다는 종교적 단계에서도 여전히 심미적 속성과 윤리적 속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존의 복합적 양상은 사랑과 욕망의 병존을 의미하며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이 결핍의 상태에서 실존적 채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핍은 존재론적인 양상에 따른 문제이며 인간의 경험적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즉, 인간이 결핍된 상황에 있다고 해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완전으로의 충족이라기보다 결핍의 이면적 모습이자 긍정적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결핍은 부재라고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긍정과 희망으로 가기 위한 성찰적 반성의 가속성(加速性)을 이끈다. 인간의 욕망이 실존성을 획득하면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낭만적 지속성과 함께 종교적 창조성을 가지면 더 큰 비전과 영속성(永續性)을 희구(希求)하게 되는 것이다.실존성을 찾은 사랑은 삶의 실존성뿐만 아니라 희망으로의 나아가기 위한 주요 동력이 된다. 하지만 실존성을 찾지 못한 욕망은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만다. 배설자는 곤도와의 추잡한 정사를 펼치면서 자신이 그간 살아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