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운동(1) 청교도 운동의 기원청교도 운동은 영국 교회 개혁 운동의 결실로, 서구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청교도 운동이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시작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왜냐하면 메리 여왕의 박해로 대륙으로 피신하였던 많은 개혁자들이 엘리자베스의 통치와 함께 귀국하여 개혁 운동을 전개한 것을 그 기원으로 보기 때문이다.대륙으로 피신하였던 800여명의 개혁자 가운데 230여 명이 제네바에 머물렀다. 그들은 귀국하면서 영국을 칼빈의 제네바처럼 개혁하고자 하였다. 영국의 성공회를 전복하는 것보다 그 안에 있으면서 개혁하려고 하였고,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무오한 규칙으로 믿고, 성경대로 가정, 교회, 국가를 개혁하려고 하여 1560년 이후 이들에게 성경만을 주장하는 고지식한 사람들(Precisians), 또는 청교도(Puritan)라는 별명이 붙여졌다.(2) 교회 정치 개혁의 주도자 토마스 카트라이트1570년대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 안에 남아있는 로마 천주교회의 잔재를 제거함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왕권을 교회에서 회복하고자 하였다. 엘리자베스의 통치 기간에 청교도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사람이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이다. 카트라이트는 영국 교회의 신학과 교회 정부 형태를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사도행전을 강의하는 가운데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 정치 형태가 교황 정치나 감독 정치가 아니라 장로 정치라는 것을 발견하여 계급 구조적인 감독 정치를 배격하고 회중에 의하여 선택된 장로가 다스리는 장로 정치로의 환원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도행전에 계시된 장로 정치의 원리가 지역 교회의 자율(autonomy), 교직자와 교직자 사이의 평등(equality), 지역 교회 사이의 연합(unity)이라고 보았다.카트라이트의 장로 정치 사상은 그의 동료 월터 트래버스(Walter Travers)와 함께 작성한 『교회 권징론』(Ecclesiastical Discipline)에 나타난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의 구성이 회중으로부터 당회로, 당회에서 노회로 올라가는 상향적인 구조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총회는 노회를, 노회는 지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천주교회에서처럼 교회와 교회 사이에는 상하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교직자는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평등하며, 지역 교회는 연합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카트라이트의 영향으로 1583년부터 장로 정치 사상은 영국 청교도 가운데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3) 윌리엄 퍼킨스와 윌리엄 에인스카트라이트의 개혁 사상을 발전시켜서 영국 청교도 운동의 초석을 다진이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이다. 퍼킨스는 타락전 예정론을 주장하였고, 양심에 관한 특수한 사례에 일반 윤리의 원리를 적용하는 결의론술(the art of casuistry)을 도입하여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회심에 대한 강조는 나중에 슈페너(Philip Spener)의 경건주의와 웨슬레(John Wesley)와 같은 부흥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퍼킨스는 교회 개혁이 경건 훈련과 목회적 양육을 통하여 가능하며, 교회 개혁을 통하여 사회의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저술한 『기독교 가정』(Christian Oeconomy)이라는 책에서, 가정의 개혁이 교회와 사회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가정이 인간의 정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가정의 목적은 서로 도와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소명을 이루도록 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남편은 아내의 필요를 따라 돕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며 도움으로 가정을 이루며, 부모는 자녀를 영과 육으로 보호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며, 말씀과 기도 가운데 양육할 사명이 있다. 이와 같이 상호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퍼킨스는 『소명론』을 통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고유한 은사를 주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고 보아,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찾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퍼킨스의 소명 사상은 현대 자본주의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퍼킨스의 신학을 이어받아 영국 청교도 운동을 발전시킨 사람은 윌리엄 에인스(William Ames, 1576~1633)이다. 에임스는 1623년에 영구고가 뉴잉글랜드 청교도의 기본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Sacred Thelolgy)를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에임스는 『신학의 정수』에서 신학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으로 나누었다. 그는 인식의 근원을 성경으로 보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읫 kfa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는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인 교리를 설명한 후, 그것을 어떻게 삶의 현장에 적용할 것인지를 밝혔다. 곧 그는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에임스는 퍼킨스처럼 양심을 기능으로 보지 안혹, 실천적 판단 행위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하므로, 특히 재정 문제에서 양심적일 것을 강조하였다. 부당한 고리 대금을 정죄했으나, 대출시 따르는 모든 형태의 이자나 소득을 금하지는 않았다. 대부에서 발생하는 이자는 채무자의 사업에서의 성패에 따라 책정되어야 하며, 은행업은 기본적으로 직업이라기 보다는 이웃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여 이자 증식을 인정하였다.(4) 분리주의적 청교도 운동1603년 엘리자베스가 자녀 없이 사망하고 장로교인에게 교육을 받았던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가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1603년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비롯한 1000명의 목사들이 교회 개혁을 위한 청원을 올리자, 제임스는 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햄턴 코트(Hampton Coutr)에 회의를 소집하였다.제임스 왕이 장로교도의 수중에서 자라났다고 하지만, 그는 장로 정치보다는 감독 정치를 선호하였다. 그는 햄턴 코트에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감독주의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참석자들이 장로주의를 선호하는 주장을 내세우자, 회의를 정회시켰다. 그는 교회 개혁에 대한 모든 요청을 거부하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 하나만 허락하였다. 이것이 바로 1611년 출판된 흠정역 성경이다. 제임스 왕은 이때부터 왕권의 사도적 계승과 왕권신수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1604년 로마 천주교회와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스페인과 평화조약을 맺는 등 반개혁적인 입장을 천명하였다.청교도들은 교회 개혁에 대한 청원이 왕에 의해 거부되자, 교회개혁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칼빈주의 신학 전통에 서 있어서 영국 교회 안에 교회의 표지가 있는 한 떠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교회의 표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은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운의 분리주의 사상은 17세기 초반 분리주의적 청교도들, 곧 윌리엄 브류스터(William Brewster),와 윌리엄 브래포드(William Bradford)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들은 교권으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세울 것을 추구하여 1606년 스크루비(Scrooby) 지역에 영국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회를 세웠다. 이 일로 박해가 가해지자, 그들은 1608년 도피처를 찾아 네덜란드로 이민하였으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또 다른 고통을 주었다. 이러한 당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바로 신대륙으로의 이민이었다.(5) 신대륙으로의 이민1618년부터 영국에서의 박해가 둔화되자, 분리주의자들은 영국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면서 신대륙으로의 이민을 계획하였다.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곳에서 자유롭게 신앙 생활하기 위해 미국의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정하고 이민을 준비했다. 마침내 1620년 11월 11일 신대륙에 도착하였으나 도착한 곳은 처음 목표인 버지니아가 아니라 뉴잉글랜드의 케이프 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