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port(프랑스 파리)목차Ⅰ. 개 관Ⅱ. 파리의 역사Ⅲ. 파리의 특징1. 파리의 자연?인문환경⑴ 기 후⑵ 인 구⑶ 민 족⑷ 언 어⑸ 종 교⑹ 화 폐⑺ 교 통Ⅳ. 파리 여행하기1. 파리 최고의 전망⑴ 파리의 세느강(Seine River)⑵ 에펠탑(La Tour Eiffel)⑶ 노트르담 대성당 (Notre-Dame de Paris)⑷ 루브르박물관 (Musee National du Louvre)⑸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⑹ 퐁네프 (Pont Neuf)⑺ 개선문(Arc de Triomphe)⑻ 샹젤리제 거리(Champs-lysees)⑼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2. 파리에서 쇼핑하기⑴ 백화점⑵ 벼룩시장3. 파리의 축제⑴ 5월 축제(Traditional May Festival)⑵ 6월 쇼팽 페스티벌(Chopin Festival)⑶ 7월 프랑스 혁명기념 축제(Fete Natinale De La Revolution Francaise)⑷ 리도쇼4. 미식의 나라 프랑스 - 파리의 맛⑴ 파리의 빵⑵ 파리의 크레페⑶ 파리의 해산물 요리Ⅴ. 결 언낭만·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파리(Paris)Ⅰ. 개 관한국의 배낭여행객들은 주로 유럽을 선호한다. 건축물이라 던지 예술작품이 많고 볼거리도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국경이 근접해 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구경하는 곳은 파리와 로마라고 한다. 로마는 고대 로마제국의 발상지로 엄청난 고대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라면 파리는 어째서 사람들이 많이 찾게 되는 것일까? 예술과 낭만의 도시인 파리는 고대의 문화, 중세의 문화, 근대?현대 그리고 미래의 문화가 함께 숨 쉬는 곳이다. 많은 건축물들이 이 도시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말해주는 한편 다양한 쇼핑 공간들은 삶의 화려함을 느끼게 해준다.거리와 지하철의 악사, 행위 예술가들을 관광 중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볼 에 대항하였다. 로마시대보다 작은 규모로 유지되던 파리는 메로빙왕조와 카롤링왕조를 거치면서 다시 주요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클로비스는 508년 파리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필립쁘 오귀스뜨의 치하에서 파리의 영토는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시테 섬을 중심으로 우안에 상업 및 주거지가 들어섰고, 좌안에 대학지구가 형성되었다. 13세기부터는 모든 왕국의 공공기관들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1370년경에 지어진 성벽은 세느 강의 북쪽부분이 새롭게 파리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파리의 경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오늘날과 같은 파리의 경계는 1841년 성벽을 지으면서 확정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오스만의 파리도시개조계획은 중세적인 파리의 도시구조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농촌지역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가속화되었고, 산업혁명기 서구 공업도시는 환경을 파괴하였으므로 인구가 과밀한 지역의 위생 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스만은 이런 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첫째로 교통망을 조직하고, 둘째로 도로망 이외에도 물을 계속 흐르게 하고 하수구를 설치하며, 가로수를 심어 청결한 도시를 만들고, 셋째로 여러 시설을 지었다. 시청과 구청들?도서관?교회?극장?공공시장 등을 전 도시에 고르게 분포시켰으며, 파리의 구를 20개로 정하기로 하였다.Ⅲ. 파리의 특징1. 파리의 자연?인문환경⑴ 기 후유럽의 서쪽 끝에 위치한 프랑스는 다양하고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북서쪽은 대서양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따뜻하며 동쪽은 겨울에는 매우 서늘하고 여름에는 폭풍우를 동방하기도 한다. 남부지방은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뜨겁고 가끔 사나운 바람을 동반하지만 겨울은 대체로 온화하다. 파리의 연평균기온은 10℃, 1월 평균기온 3℃, 7월 평균기온 19℃로 생활하기에 적당하다. 강우일수는 연평균 189일, 강수량은 600mm이다.⑵ 인 구세계의 다른 나라 수도와 비교하여 몹시 좁은 편에 속하지만 둘레 에 오를리 공항, 북쪽에 르부르제 공항, 북동쪽에 샤를 드골 공항이 있다. 철도는 종합역이 없고 6개의 종착역과 4개의 교외선 종점이 있다. 각 역의 주변은 1968년부터 실시된 새 도시계획에 따라 부도심이 되었다. 르아브르에서 오는 화물을 하역하는 하항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독일·벨기에·지중해를 잇는 운하도 발달되어 있다. 1939년 이후 시내에는 노면전차가 없어지고 1900년에 건설된 지하철은 16개 주요 노선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으며, 요금이 싸고 빨라 평일에는 매일 500만 명이 이용한다. 또 고속특급 지하철망이 교외까지 뻗어 있다. 버스는 300여 개의 노선이 있으며 장거리 운행도 하고 있다. 시 외곽을 순환고속도로가 둘러싸고 있으며, 간선국도와 연결되어 있다. 국영철도망을 고속열차가 파리∼리옹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로 운행된다.Ⅳ. 파리 여행하기1. 파리 최고의 전망⑴ 파리의 세느강(Seine River)길이 776km, 부르고뉴?상파뉴?일드프랑스?노르망디 등을 거쳐 영국해협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프랑스에서 3번째로 긴 강이다. 파리의 세느강은 퐁네프, 퐁디에나, 퐁뎅쟁발리드, 퐁마리, 퐁쉴리, 파세렐르 솔페리노를 비롯한 30여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세느강은 마치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그 하류의 에펠탑 사이의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꿰기라도 하듯이 파리의 거리를 따라 흐른다.⑵ 에펠탑(La Tour Eiffel)에펠탑은 프랑스 혁명 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열린 파리 국제 박람회에 선을 보이기 위하여 1889년에 완공된 임시 구조물이었다. 1909년경 잠시 해체될 위기에 놓였었으나, 지금은 에펠탑이 없는 Paris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상징적인 구조물로 자리 메김 하였다. 에펠탑은 기존 건축물의 룰을 과감히 탈피한 새로운 형태로 구축되었으며, 당대의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에펠탑을 보기위해 파리를 찾는 사람만도 3백만이 넘으며 연간 6 백만 이상의 최대의 미술관이며 세계 구석구석의 미술품과 걸작들을 총망라 해 놓아 지구촌 미술관이라 할 수도 있다.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면 모두 이 곳을 찾는다. 박물관 입구는 유리 피라미드로 되어 있는데 그 옆의 분수대에서는 관광에 지친 여행객들이 발을 담그며 쉬기도 한다. 300 여년이란 갖은 풍파와 증축, 개축을 겪어 온 루브르 궁전은 전시품들과 함께 그 건축 양식만으로도 매력적이다.⑸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콩코르드광장에서 루브르궁정까지 이어지는 대정원으로서, 동부는 지난날의 궁전 터이고 서부는 유명한 조원가 르노트르가 설계한 프랑스식 정원이다. 튈르리는 기과공장이라는 미로 기와 공장이 있던 자리에 궁전을 만들었다. 궁전은 파괴되고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훌륭한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루브르 미술관의 모습이 보인다.⑹ 퐁네프 (Pont Neuf)16세기 후반에 건설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영화 ‘퐁네프의 연인’의 배경 장소이다. 시테 섬의 가장 서쪽에서 파리의 남북을 잇는다. 1600년경 지어진 퐁네프는 개통된 지 400년 이 지난 다리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⑺ 개선문(Arc de Triomphe)에펠탑과 함께 파리 시민의 자랑이자 이 도시의 상징인 개선문이 있는 광장의 본래 이름은 이곳에 이르는 전철 역명에서 나타나듯이 에뜨왈 광장이다. 에뜨왈이란 이름은 불어로 별이라는 뜻이며 광장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 폭이 120m나 되는 포쉬(FOCH)거리 같은 12개의 거리가 직선으로 뻗어 있어 별이라는 의미의 광장이 탄생한 것이다. 이 광장의 중심부에 있는 개선문은 루브르궁의 까루젤 개선문을 확대시켜 놓은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1806년 나폴레옹 장군의 명령에 의하여 건축가 샬그랭에 의하여 높이 50m, 폭 45m의 크기로 건축되었으나 나폴레옹은 이 건축물이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내부에는 개선문의 역사와 관계된 문서들이 보관된 박물관이 있고 둥근 아치형의 문 아래에는 무명용사의 세워져 있다.콩코르드 광장은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로 파리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광장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루이 15세 광장이었고 1792년에는 레볼뤼시옹 광장이었다가 지금의 이름이 확정된 것은 1830년이다. 테뢰르 통치하에는 이 광장의 84,000㎡에 달하는 넓이의 광장이 교수형 장소로 이용되어,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를 포함한 1119명의 사람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다. 그 이후에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개칭되었다. 이 광장은 1755년에서 1775년 사이에 앙쥬 자크 가브리엘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난간으로 둘러쌓인 도랑으로 만들어진 8각형으로 설계되었으며 프랑스의 대표적 8개 도시를 상징하는 8개의 동상이 광장을 장식하고 있다. 동쪽은 튈르리 공원에 이어지고 북쪽은 루아얄가를 통해서 마드렌 성당과 마주하며, 서쪽은 샹젤리제거리와 통하고 남쪽에는 세느강에 걸린 콩코르드교가 있다.2. 파리에서 쇼핑하기전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 파리에서는 저렴한 쇼핑을 위해서 벼룩시장이나 바겐세일 기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벼룩시장에서는 청바지부터 고가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으며, 바겐세일 기간을 1-2월 및 바캉스를 앞둔 7월경으로서 이 기간에는 20-30% 할인된 가격으로 쇼핑할 수 있다.⑴ 백화점파리의 중심에 위치한 프랑스의 대표적은 쁘렝땅 백화점. 패션과 명품쇼핑의 본거지로, 3000개에 달하는 브랜드와 다양한 상품들이 3개 동, 총 27층의 매장에 마련되어있다. 쁘렝땅은 해마다 쇼윈도의 테마가 있어 파리 시민들도 구경삼하 한번쯤 아이들과 찾는다고 한다.⑵ 벼룩시장파리만의 독특한 물건을 구입하고 싶다면 반드시 벼룩시장을 가보아야 할 것이다. 벼룩시장은 네 곳에서 서는데 약간씩 다른 특징들이 있다. 가장 규모가 크고 굵직한 물건이 많은 시장은 로지에르 근처에 서는 생껭이다.그리고 의류나 특이한 생활용품들이 많은 곳은 몽뜨레일 벼룩시장이 있다. 이외에 규모가 작고 정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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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페인팅 (action painting)목 차 액션페인팅 [ action painting] 이란 ? 작가소개 작품경향 무의식 드리핑 기법 올 오버 페인팅 ( all over painting) 작품소개액션페인팅 [ action painting] 이란 ? 행위를 통한 순간적 우연의 효과를 추구 - 자유롭고 율동적인 선으로 인해 비정형적이고 우연적인 형태를 나타냄 단순한 색 보다는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 제 2 차 세계대전 후 뉴욕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 회화 형식적인 면은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 1948 년 베네치아 등에서 개최된 P. 구겐하임의 소장품전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 1952 년 비평가 H. 로젠버그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 . 1960 년을 정점으로 액션 페인팅은 대가들이 점차 죽음을 맞이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되고 , 이는 60~70 년대의 ‘ 색면파 ’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대표적 작가로는 잭슨 폴록이 있다 .작가소개 잭슨 폴록 ( Jackson Pollock 1912~1956) 잭슨 폴록은 2 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술계 중심이 옮겨지던 시기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이다 . 이전의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도했다 . 그는 캔버스를 벽에 세우는 대신 바닥에 눕혀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마음껏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 그 안에서 느끼는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폴록은 기쁨이나 슬픔 , 놀람 , 분노 등을 표현했다 . 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 잭슨 폴록의 추상 미술은 형태가 없다 . 형태가 이미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 다만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고 중요시 되는 이유는 작품 제작의 방법적인 측면에 있다 . 적어도 그는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를 새로운 조형언어로 그려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뉴욕파라고도 불리는 추상표현주의는 40 년대에 뉴욕에서 출발했는데 1950 년대에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 그리고 이 운동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치는 중대하다 .폴록은 드립페인팅을 통해 주제의 중심에 서서 계획되고 정리된 작품이 아니라 거미줄같이 얽혀버린 심리적 미로를 표현했다 .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 뜨리거나 들이 붓는 ‘ 드리핑 기법 ' 이 대표적인 예이다 . 하지만 잭슨 폴록이 현대 미술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던 이유는 단지 ‘ 드리핑 기법 ' 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 세련되지 못한 리얼리즘과 모디니즘을 해방시키며 ‘추상표현주의 ' 를 이끌었던 그는 회화의 중심을 파리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 1948 년에 폴록은 뿌리기 그림들을 최초로 전시한다 . 이 그림은 커다란 화폭을 바닥에 깔고 그 주위를 걸어다니면서 깡통의 물감을 붓거나 막대기에 묻힌 물감을 떨어드리는 것이다 . 화면의 자국들은 화가의 움직임 , 여러방향에서 화면을 향해 다가와서 팔과 손목의 행위의 기록을 의미한다 . 이것은 어떤 시간에 행해진 행위 전체의 정지화면이다 . 신화기의 자기정체성의 불안함과 난폭함이 유희적이고 율동적인 우아함을 유발한다 . 그는 작업중의 자신의 행위를 무의식적 이라고 했으며 자동기술적인 면을 반영한다 . 그의 인생은 음주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얼룩져 갔다 . 만찬의 식탁을 뒤엎기 일쑤였고 , 바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일도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 그리고 결국은 44 세에 술취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한 화가로 남고 말았다 . 대표작으로는 서부로가는길 , 남성과여성 , 넘버 31작품경향 초기 - 물감 반죽의 새로운 물질성 탐구 - 내용면에서 치밀한 상징성 부여 → 화가의 밑바닥에 내재된 무의식적 잠재의식의 표출 말기 - 구상과 추상 사이의 선택하지 못하는 회의 , 우유부단 : 그의 내면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분열 , 혼란의 표현무의식 프로이드 ( 정신분석학자 ) 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 작게는 무의식에 전의식을 포함시켜 의식 , 전의식 , 무의식 으로 구분하였다 . - 의식 이란 자기 내부와 외부에서 오는 지각을 감지하는 생활의 영역이다 . - 전의식 은 의식처럼 쉽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 정신을 집중하면 떠올릴 수 있는 생각과 기억들의 영역이다 . - 무의식 의 내용은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욕망과 후천적으로 생긴 것들 , 그러한 것들 중에서 자각할 수 없는 것들이 모인 영역이다 . 프로이트는 이러한 인간의 정신구조를 빙산의 일각에 비유했다 . ‘ 일각’에 해당되는 부분은 의식이며 , 물 밑에 잠겨있는 부분이 무의식 , 그 사이를 구분 짓는 물의 표면이 전의식이 되는 것이다 . 프로이드는 그것을 ‘개인의 성격을 구성하는 요소’ 로 설명하였다 . 그것은 이드 ( 원초아 ), 자아 , 초자아이다 . 이드는 쉽게 본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 본능과 이드가 같은 것은 아니다 . 프로이트는 “본능은 이드를 통해 심리적 표현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를 가장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먼저 , 운동장과 운동장을 비추는 조명을 생각해보자 . 조명에 동력을 공급하는 것은 이드 ( 원초아 ) 이다 . 그리고 조명이 비춰야 할 곳을 결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초자아이다 . 또한 이드로부터 얻은 동력으로 초자아가 가리키는 곳에 빛을 비출 수 있게 조명을 이리 저리 움직이는 것은 자아이다 . 그리고 , 그렇게 해서 조명이 비춰진 가장 환한 부분이 의식이다 . 조명이 비춰진 조그만 동그라미의 가장자리는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는 전의식이다 . 조명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운동장의 대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 바로 이 부분이 무의식 이 된다 .드리핑 기법 1947 년에서 1950 년 사이 잭슨폴록은 그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 시기에 드리핑 이라는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 드리핑기법은 작가가 작품을 제작할 때 붓이나 나이프 등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캔버스 위에 떨어뜨리거나 부어버리는 회화기법의 하나를 말한다 . 잭슨폴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 잭슨폴록은 유화물감을 버리고 공업용 왁스인 듀코 에나멜 물감 등의 유동적 물질들을 사용하였고 보다 더 자율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 20 세기 초부터 중요한 회화의 이면에는 행위의 문제가 늘 강조되며 논란이 되어 왔다 . 이러한 행위 중심적 방법으로 작업에 임함으로써 작가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계는 변화 된다 . 이 관계는 더 이상 화폭 바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림 그리는 작가감정의 움직임을 통해 화면에 곧바로 나타나게 된다 . 이러한 감정적 요소는 폴록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된다 .폴록은 이젤을 넘어 액자 회화를 넘어서려는 의도로 올 오버의 표현을 하게 된다 . 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공간적 시도가 시작된 것이었으며 실험해왔던 선이 새로운 단계를 접어들어 형체의 서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에 걸지 않고 마루바닥에 펼쳐 놓고 공업용 에나멜리아 상업용 페인트를 가지고 뿌리고 흘리는 기법과 마른 붓 , 막대기 작은 삽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림 작업을 했다 . 이 때부터 폴록은 붓으로 물감을 칠하지 않고 캔버스에 에나멜 물감이나 알루미늄 물감을 떨어트려서 우연히 묻어 나오는 물감의 기법을 사용했다 . 또한 이 그림에서는 물감뿐만 아니라 여러 도구들을 한꺼번에 함께 사용했다 .올 오버 페인팅 ( all over painting) 잭슨폴록은 40 년대말 자동적인 드리핑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1948 년부터 1951 년까지 자신의 가장 성숙한 작품인 올 오버 페인팅을 제작하게 된다 . 올 오버 (Allover) 란 , 그려진 화면의 특정한 초점 또는 중심부가 없이 화면 전체가 고루 평등한 평면으로 처리되고 있는 회화를 말한다 .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아 두고 작업을 하였는데 , 전체적인 윤곽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지는 회화는 시간적인 지속을 유지케 하는 순간 부분의 결합이 그 결합의 관계를 넘어서 동질적이면서 올 오버의 전체가 되는 것으로써 그것은 시각이 달라졌다는 문제가 있다 .서부로 가는길 , 1934~1935남성과여성 , 1942넘버 31, 1950 년암이리 , 1943달 여인 , 1942푸른 깃대 , 1953파시파에 , 1943넘버 8, 1949열쇠 , 1946부활절과 토템 , 1953{nameOfApplication=Show}
목 차Ⅰ. 종교의 발생과 전개Ⅱ. 종교의 종류1. 불교2. 기독교3. 이슬람교4. 유대교5. 힌두교6. 그 외 종교들Ⅲ. 종교가 미치는 영향력Ⅳ. 나의생각Ⅰ. 종교의 발생과 전개종교의 기원은 원시시대의 자연숭배, 주물(呪物)을 숭배하는 페티시즘(fetishism;物神崇拜), 자연계의 모든 생물·무생물에 영혼이 있다고 보는 애니미즘(animism;精靈信仰), 인간과 동·식물의 친연관계를 설정하는 토테미즘(totemism), 샤먼(shaman;呪術師)이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욕망을 성취시켜 준다고 생각하는 샤머니즘(shamanism), 마나(mana)라는 초자연적 힘을 믿는 마나이즘(manaism) 등에서 초기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원시종교 형태는 사람의 인지발달(認知發達)과 함께 교의가 체계화되고 의식이 정비되면서 점차 고등종교로 발전하였다. 특히 원시종교일수록 지배계층의 정치수단과 깊이 관련되어 왕이나 지배자를 신 그 자체로 동일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지적 정체(停滯)를 벗어나려는 혁신운동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즉 BC 9세기∼BC 6세기 사이에 인도에서 생긴 우파니샤드철학과 BC 8세기∼BC 7세기 사이의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 BC 6세기∼BC 5세기의 중국에서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노자(老子)·장자(莊子) 등 제자백가의 사상전개와 BC 6세기 이후 그리스의 탈레스·소크라테스·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의 발생전개 등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고등종교의 발생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세계종교라 일컬어지는 불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이 발생하여 계몽사상·과학발전·인간주의 대두와 연계되면서 현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Ⅱ. 종교의 종류1. 불교불교라는 말은 부처(석가모니)가 설한 교법이라는 뜻과 부처가 되기 위한 교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불이란 각성한 사람, 즉 각자라는 산스크리트 팔리어의 보통명사로, 고대 인도에서 널리 쓰이던 말인데 뒤에는 특히 석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불교는 석가 생전에 이미며,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다른 여러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①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불타가 후에 이상화되고 확대되어 절대, 무한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창조자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②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③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을 배척하고 관용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한다.④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⑤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하다.⑥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⑦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을 이상의 경지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 그 교의는 석가의 정각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8만 4000의 법문(法門)이라 일컫듯이 오랜 역사 동안에 교의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불(佛)도 본래는 석가 자체를 가리켰으나 그의 입적 후 불신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 2신, 3신 등의 논, 또는 과거불, 미래불, 또는 타방세계의 불, 보살(菩薩) 등의 설이 나와 다신교적으로 되었다.2. 기독교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어 갈릴리 지방에서 설교하시고 따르는 자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시작 되었다. 기독교의 교파로는 로라가톨릭교회, 정교회, 개신교, 루터교, 장로교, 오순절교, 성결교, 성결교, 콥트교 등 세계적으로 2만여개가 있으면 한국에는 200~250여여 개 있다. 장로교는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개신교 교파이다. 종교개혁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도 한다. 성서의라는 교리)을 믿는다는 것이다. 특히 나사렛 예수는 삼위 가운데 제2위의 육체적 현현(顯現)이시다.3. 이슬람교이슬람교는 세계 인구의 20%가 믿고있는 종교입니다. 이슬람력 12월 7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메카로 신도가 모여들며 장관을 이루곤 하죠. 사실 이슬람교도 그 기원은 유대교에서 시작됩니다.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을 모체로 탄생한 종교이지만, 두 종교는 구약성경에서 제시하는 여호와의 예언자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크리스트교는 예수를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였고, 니케아 공의회 등 수많은 종교논쟁을 거쳐 예수를 신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의 목적이였죠.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예언자로만 인정할 뿐,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최후의 예언자가 아니며, 최후의 예언자는 마호메트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슬람교의 논리는 을 확립한 중세 교회의 입장에서는 악마의 종교요, 이단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세 시대 서유럽보다 이슬람의 세력이 훨씬 강했다는 것이 서유럽 세계의 한계점이였습니다.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중세유럽의 팽창기에 이슬람으로 진출한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지요.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셈계의 아립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메카, 메디나 등에서 대상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이들 아라비아 민족은 정치적 통일도, 종교적 통일도 없는 다신교의 유목사회였죠. 그런데 6C 후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비잔틴 제국이 약해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파르티아를 대신하여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양 국가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동방, 서방의 상인들은 사막길을 이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든 상인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무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교역로의 중심지가 바로 입니다. 메카에는 수많은 국가의 상인과 수많은 종교들이 난립하였고, 무하마드는 장사를 하면서 이러한 수많은 종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유대교, 크리스트교의 영향으로 610년경 이슬람치명적인 사상이였습니다. 상인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죽이려고 했고, 무하마드는 622년 70여인의 신자들과 메디나로 이주하는데, 이를 라고 하며 이슬람교의 원년이 됩니다. 무하마드는 630년 무슬림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 메카를 점령한 뒤 다신교 사회였던 메카의 우상들을 모조리 부셔버렸습니다. 그리고 무하마드의 입으로부터 신의 계시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랍어로 적힌 이슬람의 경전 의 기원입니다. 코란은 이슬람신인 알라에 대한 절대 복종을 최고의 교의로 합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와가 이라는 점과 상통합니다. 알라신은 단순히 신앙의 신이 아닙니다. 알라는 세속의 모든 정치, 사회, 문화, 전쟁방식에 걸친 신자의 생활체계로 자리잡게 됩니다.4. 유대교천지만물의 창조자인 유일신(야훼)을 신봉하면서, 스스로 신의 선민임을 자처하며 메시아(구세주)의 도래 및 그의 지상천국 건설을 믿는 유대인의 종교이다.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통 유대교라고 하면 바빌론 포로(BC 586~BC 536)이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발달한 유대인의 고유 종교를 통칭한다. BC 2000년대 말에 사울과 다윗 왕 으로부터 시작된 고대 이스라엘 왕조는 BC 6세기 초 신 바빌로니아에 의하여 멸망하고, 그 당시 전 국토는 괴멸적 타격을 입고 초토화되었으며, 지배층, 지식층, 기술자 다수가 포로로서 바빌론으로 연행(바빌론 유수)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종교사에도 큰 오점을 남겼으며, 그 후의 유대교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키로스 2세)의 메소포타미아 정복으로 반세기에 걸친 바빌론 포로기(期)에 종지부를찍었고, 포로민을 해방하였다. 그들 일부가, 야훼신이 그들 조상에게 주기로 약속하였다는 땅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 복구. 문서학자인 에즈라의 지도 아래 선민 사상적 유일신 신앙을 종교적 이념으로 하는 민족 집단으로서 그들의 역사 재개. 이 시기에 과거의 역사가 신학적으로 검토, 반성되고, 그에 따라 전승(傳承)이 재평가되고 베다적 의례가 중시된 시기이다. 9세기 이후에 여러 힌두의 종파가 출현하여 힌두교는 점점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브라흐만교는 자이나교,불교 등에 의해 도전받고 있던 베다의 권위와 아리아족의 문화와 비(非)아리아 문화사이의 융합을 위해 비(非)아리아계통의 대중적인 신앙요소들을 흡수합으로써 대중에 기반을 둔 포괄적인 종교형태로 변모하게 된다.힌두교는 업(業)과 윤회(輪廻) 사상이라는 공통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업’이란 인간이 한 행위의 성질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상태가 되는 힘이다. 이 업이라는 힘(業力)을 원인으로 하여 그 사람에게 즐겁거나 괴로운 결과를 낳게 한다. 인간은 살면서 시시각각 새로운 행위를 하므로 살아있는 동안 늘 새로운 업을 짓게 되고, 그 결과로 영혼은 이곳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수없는 반복적 삶을 살게 된다. 이와 같이 업에 얽매여 끝없는 반복을 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인도에서의 윤회 관념은 두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6. 그 외 종교들유교 : 유교의 유(儒)자는 공자 스스로 써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유교'는 공자가 이름지은 것이아니다. 공자의학파에 '유'자를 처음 붙인것은 그의 반대파였던 묵자(墨子:BC468~376)였다. '유'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비를 기원하는 사람' 으로 부잣집을 찾아다니며 중요한 생활의식인 제사를 대신 지내 주는 사람들이다. 복잡한 제사 의식을 꿰뚫고 있는 전문 제사 대행업자와 같아서 묵자는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공자학파에 유자를 쓴 것이다.공자도 이 직업을 가진 적이 있고, 부끄럽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공자가 창시한 유교는중국 문화사에서 첫 사상 체계를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동북 아시아인들의 정신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도교 : 도교란 중국의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중국의 종교이다. 도교 수행자의 목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도교 수행방법 중의 하나인 신선술(神仙術)이다. 도교 수행자는 신선술을 제외하고
Report(샤갈)목차1. 샤갈 [Chagall, Marc, 1887.7.7~1985.3.28]2. 시대의 빛과 색을 담아- 모더니즘의 소용돌이를 해치며- 시대의 빛과 색을 담아- 빨강, 파랑, 노랑- 샤갈 그리고 마티스와 피카소3. 주요작품-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서커스1. 샤갈 [Chagall, Marc, 1887.7.7~1985.3.28]프랑스의 화가.러시아의 비테프스크 출생.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드파리 최대의 화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1907년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미술학교에 다닌 후, 1910년 파리로 나와 A.모딜리아니와 F.레제 등을 배출한 아틀리에 '라 뤼슈'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큐비즘기법을 익혔다. 1911년 앙데팡당전(展)에 첫 출품, 괴이하고 환상적이며 특이한 화풍으로 전위파화가와 시인들을 놀라게 하였다.1911년 베를린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성공한 후 그해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하였으나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잇달아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모국에 머물면서 미술단체의 요직을 맡았다. 고향에 미술학교를 열고, 1919년 모스크바의 국립유대극장의 벽화장식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맞지 않아 1922년 베를린, 1923년에는 파리로 돌아왔다.이때부터는 유화 외에도 화상(畵商) 폴라즈의 의뢰에 따라 많은 판화를 제작하여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작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환상적인 작풍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나치스의 유대인 박해가 점차 격화되자 1941년 도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지냈다. 1947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50년부터는 남프랑스의 방스에 영주의 터전을 잡았다.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에서 판화상을 받았으며, 유화·판화·벽화(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 파리오페라극장의 천장화 등)·스테인드 글라스·조각·도기(陶器) 제작을 비롯하여 무대 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초기 작풍은 큐비즘의 ie》(1965)주요작품 《손가락이 7개인 자화상》 《바이올린 연주자》 《서커스》2. 시대의 빛과 색을 담아샤갈은 대중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그런 친숙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전지면 많은 이들은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이미지로부터 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작품에 주된 모티브로 등장하는 꽃, 연인, 신랑, 신부, 동물, 마을 그리고 마을의 사람들 같은 일상의 소재들에서 찾아진다. 사람들의 생활상을 주된 모티브로 그린 작가가 비단 샤갈뿐 만 아니지만 그가 유난히 우리의 기억 속에 정감 있는 작가로 다가오는 이유는 동일한 소재에 대한 표현 방식과 능력에서 다른 화가들과 확연한 차이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이런 점이 바로 샤갈의 독창성과 작가적인 역량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요소이다.샤갈의 작품이 지니는 표현의 독창성은 입체파적인 형상의 처리에 근간을 둔 양식보다는 초 현식적이면서도 서술적인 화면구도 처리방식과 그런 구조적인 배치 관계를 자신 만의 것으로 소화해낸 탁월한 색채의 사용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작품에 내재된 구조적, 색채적 표현방법과 양식의 일관성은 샤갈이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는 시기부터 사망하기 까지 집념어린 노력과 발전을 통해 꾸준히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양태적 식별을 용이하게 해 주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그 만의 화풍이 작가의 대중적 인지도를 증폭시켜 준 요소라고 여겨진다.작가로서의 샤갈 작품의 기본 틀은 그의 나이 20대 후반이던 1910년대에 만들어졌다. 놀라운 것은 이 시기에 구축된 그의 조형양식은 샤갈의 전 생애를 통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발전하는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1910년대의 샤갈 작품양식이 고스란히 1980년대 작품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시대사조나 변화에 흔들림이 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회화의 세계를 향해 부단히 정진해 온 작가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자신의 조형 양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다양한 소재와 빛과 색채의 찬란한 구사를 통해 광 삶의 모습과 시대 정신을 마치 자신의 그림일기를 써 내려가듯이 차곡차곡 그려냄으로써 화가로써의 사명을 다한 20세기의 드문 그래서 더욱 독보적인 화가로써 여겨지고 있다.모더니즘의 소용돌이를 해치며1910년 샤갈이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 첫발을 내딛을 무렵 파리는 근대 미술사의 양대 혁명이라 일컫는 색체와 형태 혁명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직후였다. 야수주의에 의한 색체 혁명과 입체주의에 의한 형태 혁명이 조형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알리는 때에 샤갈은 서구 모더니즘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시대조류를 쫓아가거나 휩쓸리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답습해온 러시아 유대인 전통과 서구미술의 모더니즘사이에서 과감하고도 의도적인 충돌을 통해 개성을 찾아나간다.샤갈 작품의 양식적, 색채적인 틀은 이 시기에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4년에서 1908년 사이에 일어났던 야수파 운동은 그에게 색체에 눈을 뜨게 한 동시에 색의 사용에서 자연의 색을 모방하는 전통적인 굴레를 벗어나게 만들어 준 해방구 였다면 1907년 피카소가 몽마르뜨의 낡은 화실 바또 라브와르에서 제작한 기념비적인 작품 을 통해 르네상스 이래 수백년간 서구 미술의 구조적 원칙을 지배한 원근법을 무너뜨린 양식의 혁명은 샤갈 그린의 구도적 표현에 날개를 달아 준 격이 된 것이다. 야수파와 입체파 작가들이 모티브의 사용에 있어 여전히 전통적 경직성에 갇혀 풍경이나 누드 또는 정물에 치중하고 있는 동안 샤갈은 이들 소재에만 국한 되지 않고 꿈과 전설, 추억과 상상의 세계와 같은 초 현실적인 모티브를 통해 보다 폭넓은 소재의 표현영역을 연구했다.이 같은 모티브는 1920년대 초 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샤갈을 초현실주의 선구자 격으로 숭양하는 요소로 여겨지도 했다. 작품 과 는 야수주의의 색채적 요소와 입체주의의 양식적 요소를 종합한 초기파리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젊은 샤갈이 시대의 흐름에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4년간 파리 체류를 통해 모더니즘을 경험한 샤갈은 제 1차 대전의 발발로 로운 프랑스 생활에서 누리던 생활의 안정과 무관하지 않다. 꽃을 소재로 한 최초의 작품도 이 시기에 등장하는데 그만큼 그의 생활에 평화가 찾아들었음을 얘기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누리는 행복만큼이나 작품의 소재들도 그의 삶의 모습과 직결된 듯한, 사랑에 빠진 연인들, 해지는 모티브의 표현을 위해 두꺼운 칠을 벗겨버린 샤갈의 풍경화에서는 러시아 시기 작품에서 보여 지는 검은 색의 사용을 완전히 배제하기에 이르렀고 조국 러시아의 가난한 유대인 생활을 표현하는데 즐겨 써오던 무거운 회색 톤마저 배제하는 색채화가로써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샤갈의 대표적인 색이라 할 수 있는 빨강색과 파랑색들은 꽃과 연인과 서커스의 광대와 창밖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더 한층 깊이와 부드러움이 스며들어 있는 정제된 색깔로 자리매김을 해간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이 대중에게 친숙해진 이미지인 삶의 긍정적인 주제와 모티브의 등장에는 새로운 장을 열어준 시기라고 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색채화가로서의 샤갈의 작품은 2차 대전 이후의 작품에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유대인 학살의 전조를 알리는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은 샤갈에게 프랑스에서 그가 누려오던 10년간의 행복을 종식시키는 험난한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겪어 온 그에게 또 하나의 시대적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샤갈이 성서를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면서부터 이다. 작품 는 이러한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화면의 전면에 놓은 꽃병에는 아직도 삶의 기쁨이 남아있는 듯, 하지만 등을 돌린 채 누운 창백한 누드와 회색빛으로 물들은 그의 고향 비테프스크 마을의 풍경이 주는 우울함은 이전에 그린 화려한 꽃과 평화스러운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암울한 시대에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희망을 담은 색깔이 등장하는 것도 이 시기의 성서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가 1937년부터 10년에 걸쳐 제작한 3단 폭의 그림샤갈의 작품에 나타나는 주된 색은 파랑과 빨강이다. 다양한 소대에 폭 넓게 사용된 이 두가지 색이 갖는 의미는 작가에게 특별한 색처럼 여겨진다. 샤갈은 일생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고 그에 대한 열망을 그려낸 작가이다. 평화는 자유와 우애가 수반되어야만 가능하다. 파랑은 바로 그런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유대인으로서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인 숭배의 색이다. 샤갈의 파랑 색은 194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파랑 일색의 모노크롬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그림들이 증가하면서 아예 작품전체를 파란 톤으로 처리한 작품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단색으로 처리 된 파랑색의 사용은 1964년에 뉴욕 유엔 본부에 제작한 라고 명명한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이다 1979년 완성한 시카고 아트 인스티투트의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샤갈의 초기 러시아 시기 작품에서부터 단골 색으로 사용되어 온 빨강은 그가 프랑스에 오면서부터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그리거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하는 작품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색상이다. 그만큼 유대인으로서 샤갈은 동적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고 심지어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였으면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까지 표명할 만큼 유대인으로서의 숙명적인 삶으로부터 지닌 의지는 강했다. 그의 빨강은 성서 작품에 보여 지듯이 강한 메시지의 전달의 탁월한 색이며 삶에 대한 애착을 담고 있는 인간의 색인 동시에 땅과 흙이 색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빨강과 파랑에 이어 녹색과 노랑이 샤갈의 작품에 즐겨 쓰는 색상들이다.작가는 이 네 가지 색의 병용을 통해 삶의 기쁨과 희망과 평화를 화폭에 담아 시대의 아픔을 뛰어넘는 작가의 이야기, 신을 향한 경배와 인간의 구원적인 삶을 노래했다.샤갈 그리고 마티스와 피카소샤갈에게 색은 어떤 개념일까?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샤갈과 더불어 한 세기를 풍미한 스페인 태생의 화가 피카소와 그의 색에 관한 한 청송을 마다하지 않았던 또 한사람의 색채화가 마티스의 색에 대한 개념적 비교를 통해 간략이 살펴볼 수 있다. 샤갈 했다.
목차Ⅰ. 사실주의 미술이란?Ⅱ. 작가소개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 1819-1877)Ⅲ. 작품소개ⅰ. 화가의 아틀리에ⅱ. 오르낭의 매장ⅲ. 세느 강변의 아가씨들ⅳ. 미역감는 여인들ⅴ. 마을 처녀들ⅵ. 파이프를 문 자화상ⅶ. 오르낭의 식사 후 휴식ⅷ. 전원의 연인들ⅸ. 보리를 까부르는 여인들ⅹ. 시용의 성Ⅰ. 사실주의 미술이란?사실주의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5년 쿠르베가 당시의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보였다. 사실주의미술[寫實主義美術, realistic art]은 실제하는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天使)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즉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E.졸라나 콩쿠르 형제의 예술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신의 발현이다.미술에서 사실주의는 미술사의 유파, 그리고 예술, 철학적 관점에서 특정한 세계관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미술비평 또는 미술사적 용어이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쿠르베와 도미에, 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쿠르베는 그의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꼴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뚱하고 저속한 모습으로 기존 사회에 대하여 항의했으며 밀레는 육체노동의 찬양을 그리며 화면에서 귀족을 밀어내고 농부들을 서사시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미에는 부르조아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조아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조아적 관습과 예절의 뒤에 숨겨진 그 모든 위선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단 사회적인 배려에 의해 결정되었음은 사실이다. 이때는 풍경화 조차도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하나가 되었다. 즉 낭만파 풍경화는 아직도 하나의 독립된 세계이었기에 일상생활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어떤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대상을 그린 것이다.Ⅱ. 작가소개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 1819-1877)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프랑스 화가로 프랑tm 콩테의 오르낭 출생이다.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 공부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브장송의 데생학교와 파리 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하며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을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950년의 작품《오르낭의 장례식》은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을 최악의 추악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혹평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과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화가의 작업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쿠르베는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 당하자 자신의 이상과 회화를 표명하기 위해 몽테뉴가에 손수 집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개인전이 되었다. 그는 감정이나 상상력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란 그 시대의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 믿고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릴 것을 주장하였다. "나는 천사는 그리지 않는다 그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에", "리얼리즘(사실적)의 세계에는 쇼킹한 것이라고는 없다"라는 쿠르베의 말은 그의 이상과 작품경향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쿠르베는 그의 작품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1850년대 중반부터는 도버해협 연안의 바다풍경과 꽃, 과실 등의 정물, 60년대 후반에는 관능적인 여인 등의 현실적 주제를 정확한 기법으로 그려내어 1867년 알마다리에서 가진 개인전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1세 동상 파괴 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1875년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스위스로 망명하였다가 2년후인 1877년 12월31일 라투르드 페일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 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낭만주의, 아카데미즘에 대한 투쟁이었던 그의 사실주의는 시각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인상주의의 선구가 되었고 독일, 벨기에, 러시아 등의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Ⅲ. 작품소개ⅰ. 화가의 아틀리에1854-55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풍부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여인, 쿠르베가 제작 중인 풍경화, 등을 돌린 소녀, 사냥꾼 옆에 있는 사냥개 등이 힘찬 실재감을 발휘한다. 쿠르베 자신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사회의 갖가지 비참함을 나타내는 인사들의 그룹, 오른쪽에는 친구들인 철학자, 작가, 시인들이 배치되었다. 진정한 생명화가 되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화면 중앙을 제외한 양쪽 부분은 검은 색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다.ⅱ. 오르낭의 매장1849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한 농부의 죽음을 계기로 소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을 실물 크기로 그렸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전통 역사화의 경향을 소박하고 진실성이 담겨진 사실의 재현으로 당대 미술계에 큰 논란이 되었다. 신과 영웅들의 전유물이었던 존엄성을 쿠르베는 40여 명이 넘는 대중들에게 부여하면서 예술적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ⅲ. 세느 강변의 아가씨들1856-57년, 캔버스 유채 파리, 프티팔레 미술관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지만 처녀가 세느 강변에 누워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그의 뛰어난 모사력이 입증되었고, 등장인물들의 자세와 표정, 당대의 유행 복장 등 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ⅳ. 미역감는 여인들1853년, 캔버스 유채. 몽펠리에 파브르미술관1853년 살롱에 출품된 쿠르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작품이다. 전시회장을 방문한나폴레옹 3세까지도 이 작품 앞에서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승마용 채찍으로 화면을 내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들라크르와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힘찬 양감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ⅴ. 마을 처녀들1851년, 캔버스에 유채 54×66cm 시티 아트갤러리쿠르베가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 유럽은 대부분 농촌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문맹자였고 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쿠르베는 이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사회성 있는 발언을 시도하려고 했다. 도시에서 온 세 여인들이 소를 돌보고 있는 시골 소녀들에게 자선금을 주고 있는 장면이다.ⅵ. 파이프를 문 자화상1846년, 캔버스 유채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ⅶ. 오르낭의 식사 후 휴식고향 마을 오르낭을 무대로 한 과 같이 극히 평범한 시골 생활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식사 후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과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사람. 식후의 휴식의 한 때가 아무런 꾸밈 이나 연출도 없이 극히 담담하게 포착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방 분위기 속에 탁월한 광선 처리로 부각되고 있는 인물들은 렘브란트의 어둠 속에 떠오르는 인물들을 연상하는 바가 있다. 당시 유행하던 전원화(田園畵)나 농민화에서 보는 의도적인 풍경의 삽입이나 인물 배치의 작위성에 비해 이 그림에선 전연 그런 요소를 찾아볼 수 없음이 특징이다. 바로 쿠르베의 시각이 방향이 확립되어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