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화쟁사상과 한국 불교에의 영향어린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에서 원효대사의 해골물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어젯밤에 먹었던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달고 달았던 약수가 더러운 물로 바뀌어 버렸다는 그 이야기이다. 바로 여기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했다는 원효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항상 새로운 힘을 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원효의 가르침은 항상 나를 믿고, 내 의지를 믿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원효에 대해 알게 되면서 궁금한 것이 있었다. 원효는 분명 스님인데 어떻게 아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번에 원효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그가 스스로 파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꼭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원효의 삶 속에서 그의 사상 모두에 함께 나타나는 ‘화쟁’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화쟁 사상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화?통일의 세계관 이듯이 원효의 삶 또한 어느 것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원효의 대표적인 사상인 화쟁사상은 조화의 세계관이다.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고집하지 않고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등의 여러 경전을 두루 읽었다. 이처럼 여러 경전들을 읽은 후에는 이를 바탕으로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당시의 신라 불교계는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중관사상은 불교 본래의 공 사상에서 유래된 사상으로 모든 것의 참은 없다는 부정을 말하는 사상이고, 유식사상은 모든 것은 존재라 하여 긍정을 말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두 사상은 불교의 교리들 중 각각 하나였지만, 그 내용이 매우 달라기 때문에 서로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대립 속에서 원효는 각각의 것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림으로써 조화를 말하였다. 원융회통의 논리와 모든 것의 극치는 같다 라고 말하면서 중관과 유식을 대립이 아닌 조화 가능한 것으로 본 것이다. 원효는 중관과 유식의 논쟁을 화해시키면서 공이나 유에 대한 집착 모두 버려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그 자체 집착이 없으면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집착을 버리라는 원효의 관점은 불교 본래의 교리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를 다시 깨우쳐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 같다.원효의 화쟁사상은 이후 한국 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화쟁을 통한 조화의 논리는 고려시대로 그대로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예로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겸수,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쌍수 등의 불교계 통합운동이다. 고려시대에는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교종과 참선을 통한 수양을 중시하는 선종이 대립했었는데, 위의 두 사람은 이러한 대립을 원효의 화쟁을 바탕으로 조화시키고자 했다. 교종과 선종의 각각에서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림으로써, 또한 두 종파가 결국 하나의 목표를 지향한다는 점을 앞세워 불교계 통합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만약 원효의 화쟁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의천과 지눌의 불교계통합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화정신은 불교계를 넘어 조선에서는 종교계 통합운동으로까지 이어졌고 현재에도 그 의미가 있다. 현대는 다원화 사회이고 그 만큼 각계각층의 주장도 많다. 그리고 그 중의 많은 부분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이 더욱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삼국유사의 단군기록을 통해 본 한국사상의 내용과 그 문제점단군신화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 최초의 책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의 일연이라는 스님이 지은 책이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기원전 2333년 이니까, 고조선이 세워진지 3000년도 더 지난 후에 지어진 책인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지어낸 이야기라고 보는 것도 맞지 않을 것 같다. 신화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홍수 이야기에 대해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 중에 비슷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은 후 신화나 전설이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단군신화의 내용도 어느 정도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 같다.단군신화의 내용은 ‘하늘의 임금인 환인은 그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 보냈다.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 등과 함께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서 곡식, 목숨, 질병, 형벌, 선악 등 360여가 일을 맡아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간청하자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 하였으나 호랑이는 견디지 못했고, 곰은 삼칠일(21일)동안 인내하고 근신하여 마침내 사람여자로 변하였다. 이에 곰은 웅녀가 되었는데 아무도 자신과 혼인하는 사람이 없자 환웅에게 아이를 갖기를 원하였다.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고, 웅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 이런 내용이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나온다. 이후 우리민족은 단군신화를 우리민족 최초의 건국신화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 내용의 특징을 한국사상의 특징으로 여기게 되었다.삼국유사의 기록 속에 나타난 단군신화의 내용적 특징은 크게 네 가지 이다. 하나는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이다.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여 인간 세계를 내려왔다는 점과,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을 그 지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신 중심인 기독교의 창세기 신화와는 구별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상의 특징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사상의 특징 중에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두 번째는 천인합일사상이다. 하늘의 임금의 아들인 환웅과 땅으로부터 온 웅녀 사이에서 인간인 단군이 태어났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이 인간과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자연친화적인 사상은 동양사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단군신화에서처럼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모습은 동양사상내에서도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조화의 정신이다. 하늘의 임금의 아들인 환웅과 땅의 동물인 곰이 변한 웅녀의 혼인은 하늘과 땅이 결합하여 단군왕검이라는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사유에서 더 나아가 이 속에서 천, 지, 인의 결합과 조화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정신은 삼국시대 원효의 화쟁사상, 고려시대 의천과 지눌의 불교통합운동으로 계승되어 온 것으로, 인본주의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한국사상의 특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는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이다. 기독교의 창세기 신화에 나오는 여자와 뱀의 갈등,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와 그 아버지의 싸움 등과 같은 서양의 신화와는 달리 우리의 단군신화에는 갈등의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아버지인 하늘의 임금 환인이 아들인 환웅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환웅을 인간세상으로 내려가게 허락하였다는 점은 갈등과 싸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오히려 자신보다도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 생각난다.위에 있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신화의 내용이다. 고등학교 때 윤리와 사상교과서에서는 위의 4가지에 더하여 홍익인간을 별도의 사상적 특징으로 다루고 있어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사상적 특징을 5가지로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홍익인간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가장 큰 특징인 인본주의에 포함되는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특징을 4가지로 정리하였다.이러한 단군신화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가장 큰 궁금점은 바로 마지막 4번째의 내용이다. 지극히 평화적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이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단순히 우리 단군신화는 평화적인 내용이고 서양의 그리스신화, 기독교의 창세기 신화는 평화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문제가 있는거 같다. 왠지 우리의 것만 좋다고 말하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왠지 평화적이라기보다는 경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곰은 승리해서 웅녀가 되었고, 호랑이는 도중에 포기해버렸다는 내용에서도 승자와 패자로 구분하고 있는 거 같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단군신화가 반드시 평화적이라고 고집할 수 는 없을 거 같다는 느낌을 계속 갖게 한다.그리고 인간중심이라는 인본주의도 약간은 의심이 든다. 홍익인간의 내용,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 가지고 인본주의라고 하는 거 같은데 단군신화의 주인공은 환웅이다. 환웅이 사람들을 다스리고, 웅녀도 환웅에게 와서 사람이 되었고, 결국 환웅이랑 결혼했다. 그런데 환웅은 하늘의 임금의 아들이지 사람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늘의 뜻대로 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 같다.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은 하지만 사람들 중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진리란 일반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항상 참되고 올바른 지식을 말한다. 철학에서는 보통 이러한 의미의 진리를 다루지만, 시간과 공간에 한해서는 그 제약이 있는 현실세계에 관한 지식도 진리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더 나이가 시간과 공간이 한정되는 것은 물론, 참과 거짓이 명확히 구분이 안 되는, 단지 상대적인 진리를 내세우는 학설도 있다.진리와 비슷한 말로 사실이란 용어가 있는데, 진리란 말은 경험세계와 비경험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에 두루 쓰이는 반면, 사실이란 말은 경험세계 한정하여 쓰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진실이란 말은 사실과 비슷하게 쓰이면서 주로 사람의 심리적 사실을 나타내는데 쓰인다.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에서는 주로 진리라는 용어가 쓰인다.우리는 주변에서 ‘그것은 진리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고, 많은 종교단체에서는 절대자의 말씀을 진리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철학이나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무엇은 진리이다’란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수긍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진리검증을 요청받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고,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과학적 진리일 경우 객관적 진리검증이 가능하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형이상학적, 종교적 진리는 객관적 검증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러나 철학은 모든 진리의 검증에 도전한다. 철학은 과학뿐만 아니라 그 외의 모든 영역에까지 해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해답에 모든 이가 만족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보다 나은 답을 제시해 나가는 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철학에서의 진리추구는 현실세계의 경험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으므로 인식론의 기본입장 중에서 불가지론을 택해서는 진리로 나아갈 수가 없다.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존재에 대해서도 그 인식을 인정하는 가지론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지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대응설과 진리정합설(일관설) 등이 상대주의적 진리설로서 실용주의 진리설이 있다.진리대응설(The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진리대응설은 대응설, 모사설, 진리모사설, 일치설, 진리일치설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진리대응설은 우리의 인식은 외부세계의 사물인 대상이 마음에 그대로 비추어짐으로써 성립한다는 그리스의 모사설을 계승하는 것으로 인간의 믿음, 인식, 판단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판별문제는 그러한 믿음, 인식, 판단들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참된 진술(=지식)이라면 그 진술과 일치하는 객관적 사실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대응설은 인식론의 실재론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고, 지식획득론 중에서 경험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진리대응설에 의하면 우리 내부의 관념(=지식)들은 우리 외부의 실체(=사실)에 의하여 진리가 밝혀진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한강에서는 물고기가 잡힌다.’ 라는 진술은 직접 한강에 나가 낚시를 해 보면 그 진술에 대한 사실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물에 물고기가 걸렸다면 그 진술은 참이 될 것이다. 만약 물고기가 안 잡혔다면 그 진술은 거짓이거나, 잡힌다는 것이 입증될 때 까지 참인 진술이 될 수 없다. 이렇듯 이 학설은 우리가 관찰, 검증, 실험할 수 있는 진술에만 적용할 수 있고 그 밖의 진술은 진리검증을 할 수 없거나, 진리검증이 유보된다. ‘내일 서울에 비가 온다.’ 라는 진술은 내일이 되면 진리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관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경험하게 되는 진리검증방법이며, 우리의 상식은 물론 대부분의 과학적 지식도 대응설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진리대응설의 문제점진리대응설이 ‘어떤 한 진술은 그 진술에 대응하는 사실의 존재여부로 진술의 참과 거짓을 판단한다.’ 라는 의미를 가질 때, 그 사실이란 것을 과연 올바로 알 수 있는 대상인가가 문제된다. 즉 인식론적 회의론이 제기하는 실체(=사실)에 대한 불가지론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느냐는든 진술은 인간 내부의 관념을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관념이 어떻게 외부의 실체(=사실)와 완전하게 대응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둘째,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기관이 어떻게 외부의 실체(=사실)에 대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알아 낼 수 있는가? 셋째, 수학이나 과학의 법칙에 완전히 대응하는 사실이 있는가? 예를 들어, 2+3=5와 정확히 일치하는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즉 2개의 사과와 3개의 사과를 합하면 5개가 되지만 그들 각각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각각 다르다. 이러한 비판들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이 대상을 그대로 모사하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감각은 정말 거울과 같이 대상을 언제나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비판적이고 감각적 모사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반성해 보아도 우리의 감각이 늘 거울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라는 단서야 붙겠지만, 그러나 내 감각 기관의 생리적 상태, 조명, 대상의 위치 등등 모든 것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인간의 감각 기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실례로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냄새 맡는 데 있어서 개에 비해 뒤떨어진다. 소리를 듣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현미경이나 망원경, 보청기 등 여러 보조 기구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래도 우리 감각의 파악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우리의 감각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정합설[The coherence theory of truth]정합설은 진리일관설, 명증설, 통일설 등으로 불리고 있다. 새로 가진 지식이 기존의 지식 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들어맞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의해서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을 정합설이라고 한다. 정합적이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모순 없이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정합설은 철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우리 정신의 명석하고 창의적인 활동에 의하여 자명한미 받아들이고 있는 언어체계와 논리체계 속에서 다른 명제들과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자명한 개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대응설이 진리판단의 기준을 외부의 대상에 두는 외재적 진리개념이라면, 정합설은 진리판단 기준을 우리 내부의 관념에 두는 내재적 진리개념이다. 이 학설은 합리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데,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이 정합설에 가까운 주장을 하였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공리?규칙 논리적 공리?규칙 등은 우리의 이성이 명석하고 자명하게 판단함으로써 얻어지며, 그것들이 바로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수학적, 논리적 진리이외에 과학적, 물리적 진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하였는데 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불분명하고 일시적인 지식이긴 하나 그것이 이성에 의해 명석판명하게 개념적 지식으로 바뀌면서 경험적 과학지식도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정합설의 문제점정합설의 문제점으로는 첫째, 이성에 의한 명석하고 명백한 판단은 어떤 객관적 근거로 명석하고 명백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어떠한 명제가 그 체계속의 다른 명제들과 모순을 일으켰을 때, 무엇을 참이고, 거짓이라고 할 것인가? 이는 또다시 주관적인 판단의 문제가 된다. 또한 정합설은 감각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형식 과학에만 적용되고, 사실 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우선 판단이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정합할 때 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기존의 판단 체계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 체계와 정합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반드시 그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 일의 판단에 이를 것이다. 그러면 이 제 일의 판단의 진리성은 그 이전의 기존 판단 체계와의 정합에서 구해질 수 없고, 이와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 그 진리성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정합설은 그 안에 정합설이 아닌 다른 원리를 내uth]미국의 실용주의는 이제까지의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고찰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 그리하여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에만 참이라고 본다. 원래 실용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 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시킨 것이다. 실험 과학의 명제는 이론적으로 아무리 하자가 없더라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는 것이다. 가령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이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 생각하고 따라갔더니 과연 인가가 나왔다고 해 볼 때 이 사람의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하는 생각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져 예상한 결과에 도달함으로써 진리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관념, 생각은 그 자체로서는 생각에 그치고, 즉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행동을 통해서 실제 생활에 적용되어 유용하면 그때 비로소 진리로 되고, 유용하지 못하면 거짓으로 되는 것이다.이것은 진리를 오로지 이론적인 영역 내에서만 논의하고 있는 앞의 두 진리론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시각이다. 즉, 실용주의는 진리론을 인간의 행동, 실천과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으며, 진리론을 현실 생활계에 밀착시키고 있다. 또한 실용주의 진리관은 각기 일면적이기만 한 대응설과 정합설을 종합하기도 한다. 위에서 든 소 발자국의 예에서 '소 발자국을 따라가면 인가가 나오리라'는 관념은 실제로 우리를 그 발자국을 따라가는 행동으로 이끌어 간다. 이때 실용주의자들은 관념이 이렇게 행동을 인도해 가는 과정이 아무런 지장이나 모순도 없고 순탄하게 진행되면 그것은 '정합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한 대로 인가가 발견되는 것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 내지 대응'이며 이 일치가 바로 유용, 유효라고 한다. 이렇게 고전적인 두 진리론은다.
향기로운 봄 냄새가 세상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런 봄기운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두근거림과 비슷한 설렘을 가져오게 한다. 그래서 사랑에 관련된 플라톤의 「향연」을 읽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책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소년들과의 사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4대 성인이신 소크라테스께서 동성애에 대해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였다. 그는 인간이 사랑하게 된 원인을 옛 인간의 모습에서 찾았다. 인간은 원래 팔과 다리가 각각 네 개씩 있었고, 머리가 둘이었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서 반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맨다고 한다. 이 때 에로스가 이 쪼개진 조각을 이어지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로 쪼개놓았는데도 인간이 또 신에게 노여움을 준다면 신은 또 쪼개어 한발로 돌아다니게 될 것이라는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경건한 것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여기서 단순하게 반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은 신체적인 것을 넘어 선의 이데아와 완전히 하나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플라톤이 정말 존경스러웠다.아리스토파네스의 의견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연구 불변의 진리를 찾아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불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우주생성론 중에서 ‘데미우르고스’라는 것이 나온다. 그리스어로 제작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제작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데아를 알고, 물질의 특성을 인식해야 하는 유한한 능력의 제작자이다. 즉, 창조해놓고 한가로이 노는 신이 아니라, 최상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노력하는 신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 속에서 무규정적인 대상을 보편적인 개념을 통해 진정한 존재로, 영원불변한 존재로 규정한다. 이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했다. 에로스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도 질문했듯 에로스는 특정 대상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 만약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결국 에로스는 완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한 미추의 중간적 개념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어떤 것을 생산하고자 한다. 아름다움이란 영원하고자 하는 욕망, 현실에서 영향을 떨치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만나 자손을 낳고자 하는 욕망, 아름다운 예술과 음악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런 것이다. 이러한 생산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은 죽음과 늙음을 이겨내고 불멸, 불사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불멸성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모든 생명체는 열정과 사랑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정신은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하여 끝없이 현실을 개혁하길 욕망하고 노력하는 상태이다. 에로스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그것을 이데아의 세계로까지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