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개설반민특위 민족정기의 좌절(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1. 서론일제 식민지배 36년의 암울한 역사를 딛고 감격스러운 광복을 맞이한 우리민족의 최대의 과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우리민족의 건강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일체의 반민족적 식민지 잔재를 이 땅에서 올바르게 청산하고 이 바탕위에 온 국민이 열망하고 꿈꾸는 나라를 세우는 일은 역사의 당위였다. 그러기위해서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제일 먼저 시작해야 했을 일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동조하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했던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방만 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만 같았던 꿈은 콧대 높은 점령군의 모습으로 남한에 진주하게 된 미군정의 현상유지 정책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미군은 한국을 군사적 ? 전략적 고려에 의하여 통치하면서 식민잔재의 청산이나 민주화 개혁을 등한히 한 채 모든 정책을 대소 전략적인 차원에서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의 소리는 묵살되었고, 과거의 반민족 행위자들은 권력을 다시 잡게 되었다. 이렇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처단은 실행되지 못한 채 남한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2. 본론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되기 이전부터 남한의 정부는 실질적인 나라의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반역자, 밀정, 주구 등 미군정하에서 미온적으로 미루어졌던 반민족적 행위자들의 처벌에 대한 논의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국회에서 처음 민족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한 법 제정의 발의가 나온 것은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에서였다. 이렇게 발의된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1948년 9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141명 중 가 103, 부 6으로 통과되었고, 이 법에 따라 국회는 친일파의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서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재판부를 국회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특별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는 김상덕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부의원장으로는 김상돈 의원이 선임되었다. 이렇게 구성된 특별 조사 위원회는 중앙사무국을 설치하고 조사관을 임명하고, 지방에는 도지부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친일파 조사와, 검거를 시작하였다.)이렇게 관계 각 기관의 조직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 6일 발간된 『친일파 군상들』이란 고발서적을 참고로 민족반역자 일람표를 작성하고 조선비행기 공업회사를 경영하고 대의당 간부였던 박흥식을 검거로 행동을 개시하여 반민족행위 혐의자의 체포에 나섰다.) 반민특위의 행동개시와 함께 수많은 친일적 분자들이 체포되었고, 그와 함께 위기감을 느낀 친일파의 대응과 반격도 거세져만 갔다.반민법은 그 제정과정에서부터 친일파 저명 인사들의 반대 움직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들의 의해서 반민법을 반대하는 대규모 국민대회가 열리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반민특위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의 암살계획까지 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미 국가의 고위 관직과 요직을 차지한 친일세력 속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갔다. 반민특위에 대한 정신적 물리적 탄압은 친일악질경찰 노덕술을 체포하면서부터 표면위로 들어나기 시작했다.그동안 반민법과 특위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고 있던 이승만은 노덕술이 검거되자 “노덕술은 경찰의 공로자이니 즉시 석방할 것”)을 국회에 요구하였고, 그것이 국회에 의해 거부되자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반민법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담긴 담화를 발표 하였고, 그것은 친일파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히 전개되었고, 그런던 어느날, 1949년 5월 18일 국회내 소장파 의원 중 이문원, 최해규, 이귀수 등 3명이 경찰에 의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국회 푸락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국회를 공격할 좋은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고, 국회의 특조위는 위축되게 되었다.국회푸락치 사건으로 국회를 공격할 구실을 얻은 친일세력들은 특위의 조사연행 활동을 비난하는 극성스런 데모를 잇단 열었고, 데모대는 특위의 해산을 주장하며,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 공격하였다. 그들은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하며 시위규모를 점점 늘려 반민특위를 압박했다. 그러나 특위는 자체의 특경대원들을 독려하면서 폭력화하는 시위 군중을 해산하며, 이러한 사태의 배후조종자를 밝혀내어 6월 4일 그를 체포한다. 그 사람은 바로 서울시경사찰과장 최운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시경 사찰경찰들은 집단적인 항의 표시로 시경국장 앞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소동을 벌였고, 결국 윤기병은 당시 내무차관인 장경근에게 특위특경대의 해산을 허락받고 특위를 습격하기에 이른다. 1949년 6월 6일 현직 고위 경찰간부가 헌법기관인 반민특위의 위원들을 습격 체포하는 등 무법, 공포의 테러 폭행 난동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윤기병의 지휘 아래 40여명의 행동대원들은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 경찰대를 포위하고, 대원의 무장해제와 동시에 무기, 서류, 등 모든 장비를 압수하고 특윈 직원 등 35명을 각서에 분산 감금해 버렸다.이같은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일어나자, 국회 본의회에서는 대통령의 출석을 요청하였으나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 이때 정부 측에서 국무총리 이범석의 답변이 있은 뒤 장경근 내무차관의 특경대의 행동을 규탄하는 듯 한 해명은 국회의원들을 격양케 하였고 이승만의 대통령의 특경대 해산이 자신의 명령이었다는 내용의 회견은 이승만 정부와 국회와의 사이를 더욱 더 멀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49년 8월 31일로 앞당기는 반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김상덕 위원장 등 전원이 반민특위를 사퇴하면서 사실상 특위는 붕괴되고 말았다. 특위가 취급한 총 건수는 682건에 달하지만, 처형을 받은 사람의수는 7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올바른 민족정기의 고양은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