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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교과서 내의 한국 고대사 관련 서술
    일본 교과서 내의 한국사 서술-고대사 왜곡을 중심으로-우리가 흔히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리킬 때 쓰는 말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있다. 같은 동아시아권이라는 지리적 인접성이나 수없이 오고가는 문화적 교류, 국제사회에서의 관계 등으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하여 36년간 식민통치를 했던 암흑과도 같은 시기, 그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자행되었던 조선에 대한 만행, 그리고 현재에 와서도 한국을 옛 식민지로 인식, 한국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거나, 자신들의 옛 잘못에 대해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는 태도를 가진 일부 일본인을 보자면 먼 나라라고 밖에 볼 수 없다.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왔는데, 서로가 서로의 대외적 역사에 대해 매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요한 부분 또한 많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편향된 역사 서술은 한일관계사의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역사 교과서에 편향된, 아니 왜곡된 역사를 마구잡이로 써 내려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의 교과서에서 이러한 왜곡된 서술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라는 것은 모름지기 미래를 이끌어나갈 재목인 청소년들을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그러한 교과서에 객관적 사실로 볼 수 없는 왜곡된 사실을 서술하고 기록하여 실어놓는다는 것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역사교육이라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후세들에게 민족이념을 충전시키는 토양이자, 민족의 진로를 구축하는 원동력이다. 과거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제대로 직시하여 반성하고, 과거에 배울 점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재창조하여 현재에 적용 시킬 수 있다. 역사교육은 역사에 대한 판단을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교육은 잘못된 역사 인식을 머리에 심을 것이다.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인의 역사관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의 교과서를 합격시켜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일본의 교과서 파동은 1950년대에 처음으로 일어났다. 1953년, 일본에게 재군비와 자위대 창설을 가져다 준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을 계기로 일본의 우익세력은 좌익세력 견제 차원에서, 2차 세계대전 전의 일본을 비교적 진솔하게 서술한 교과서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문부성에서 교과서 조사관 제도가 신설되는 등 검정이 강화됐고, 교과서에서 일본의 역사에 '일본은 가해자다.'라는 사실은 자취를 감췄다.이후 1980년대에 교과서 파동이 한 번 더 일어나게 된다. 1950년대의 교과서 파동이 그래도 국제적 문제로 번지지 않았다면, 두 번째 파동인 1980년대의 사건은 국제적인 외교적 문제까지 일어나게 된다. 1982년, 일본의 문부성에서 교과서를 내는 출판사들에게 일본의 '침략'→'진출', '탄압'→'진압', '출병'→'파견'으로 바꿔 표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한국과 중국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외교 분쟁으로까지 번진 이때의 파동은 결국 '근린조항')이란 검정기준을 신설하면서 정리가 됐고 그 이후에도 교과서가 4차례 수정과정을 거쳐 문제가 된 부분들이 변경되었다.그렇다면 새역모를 비롯한 일본 우익 측에서는 왜 이러한 역사교과서 파동을 일으킨 것일까?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는 과거의 ‘아시아 탈피(脫亞入歐)’에서 다시 아시아를 탈피, 즉 탈아친미(脫亞親美)의 노선을 보여주는 것, 두 번째는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 세 번째는 일본의 우월감 부각, 주변국가의 열등감을 강조하는 것, 네 번째는 일본의 전후 상처의 회복, 다섯 번째는 이상으로 해야 할 선진국의 문화, 여섯 번째는 자신과 독립심의 회복, 마지막으로는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것이다.)2. 일본 교과서에서 왜곡한 한국의 역사 - 고대사를 중심으로이렇게 일본에서는 우익들을 중심으로 일본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역사가 있으면 덮어버리고 미화하는 한편, 주변국의 역사 이 지역의 일부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으나 신라는 562년에 가라제국(加羅諸國)의 주요부를 영유했다. (32쪽)日本書籍● 조선 남부는 마한, 변한, 진한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4세기 중엽 마한으로부터 백제, 진한으로부터 신라가 일어나고 대방군(帶方郡)도 멸망했다. 그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만은 소국이 분립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야마토 지역은 이 지역에 침입, 백제와 연결하여 신라를 누르고 고구려와 싸웠다. 이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에 씌어져 있다. (22쪽)自由書房● 4세기 중엽, 야마토 정권이 거의 국토를 통일하고 조선 반도에도 세력을 뻗침과 동시에 조선반도에서의 지위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자주 중국 남조에 조공을 했다. 그러나 곧 조선반도의 여러 민족 사이에도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 통일국가 형성의 기운이 강해지자 우리나라는 발판을 잃고 말지만 이 동안에 백제 등을 통해 동아시아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다. (21쪽)● 조선반도의 우수한 기술과 철자원을 구하고 있던 4세기 후반, 가라(임나)라고 불리는 구 변한제국에 세력을 뻗치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와 싸웠다. (23쪽)● 6세기 초에 오토모(大伴) 씨가 조선 정책에 실패하여 조선반도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급속히 흔들리고, 562년 가라제국(伽羅諸國)은 마침내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30쪽)● (쇼토쿠) 태자는 처음에 신라에 대군을 보내어 가라의 회복을 꾀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31쪽)第一學習社● 512년 백제는 가라제국의 서부(임나 4현)에 대한 지배를 일본에게 승인토록 했지만 당시 오무라지(大連)로서 야마토 정권의 중심에 있던 오토모 가나무라(大伴金村)는 백제에서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받아 실각하였다. (29쪽)● 이 때문에 가라제국에의 신라의 영향력이 커지고, 562년 가라제국은 신라에 병합되어 야마토 정권은 조선반도에서의 발판을 잃었다. (32쪽)淸水書院● 오랫동안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신라도 6세기 이후 급속히 국가체제본 교과서의 내용대로라면 진보된 선진문명과 기술을 가졌고 정치적 활동이 보다 활발한 국가가 후진된 국가의 침략을 200년간이나 당했다는 결과가 된다. 그것도 험난한 현해탄 건너 대군을 이동시켜 광대한 지역과 인간을 지배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식민지 통치기관을 유지하였다는 비상식적인 불가사의에 함입(陷入)하게 된다.임나일본부의 설치문제에 관하여는 반수의 교과서가 그러한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부의 실체가 어쨌든 간에 현대세계에 생을 향유하고 현대적 감각으로 사물을 파악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현재의 피교육자들이 임나일본부를 조선총독부와 같은 식민지 통치기관으로 연상할 것인데 과연 일본부가 한반도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조선총독부과 같은 것인지 엄밀한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또 하나 언급해야 할 일은 일본 학계의 견해대로 562년에 임나일본부가 소멸되었다고 하면 663년 백제 부흥 운동군을 도와 한반도에 출동한 일본군의 백강전투(白江戰鬪))를 가지고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고 방언(放言)함도 앞뒤 모순이 있다. 이러한 교과서의 서술도 의도적 과잉표현인 것이다.우리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다만 임나라는 지명이 존재하였음은 각종 사료를 통하여 확인되는 바이며, 또한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삼국사기 기록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듯이 삼국시대에 한반도 남해안 지역에서 일본과의 전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광대한 지역이 오랜 시일에 걸쳐 일본부와 같은 통치기관을 통하여 지배되었다는 사실은 인정치 않고 있다. 이렇듯 임나일본부설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나 결국은 고대에 일본에 의한 한반도 지배의 역사가 있었다는 주장을 국민의식에 심어주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본다.)이러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든 것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신묘년 기사와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인데, 일본 교과서에서는 근거를 내세우면서도 근거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해버고 있다.東京書籍 - 高校新纂日本史B● (칠지도의 사진을 실은 다음) 나라의 이소노카미신궁에 전해지고 있는 칠지도의 명문에 따르면, 이 칼은 백제 왕이 왜 왕에게 보내기 위해 569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23쪽)實敎出版 - 高校日本史B● 칠지도의 명문에 따르면, 백제 왕이 왜 왕에게 증정했다. (23쪽)다른 교과서에서도 꼭 같은 논지로 칠지도와 광개토대왕 비문을 한 묶음으로 하여 편집해 놓았다. 학자들 간에는 역사관이 다를 수 있고 문장의 개성이 있을 법한데 교과서 집필 학자들이 의논이라도 한 듯 꼭 같은 모양새이다. 교과서 검정과정에서 이러한 요지로 다듬은 것이 아닌지 의아스럽다. 한마디로 칠지도와 광개토대왕 비문을 한 세트로 내세워 '칠지도 명문에 백제가 왜 왕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비문에도 왜국이 고구려와 전쟁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왜국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한국 남부를 지배했다는 증거이다.'라고 우기려는 것이다.)그러나 해석을 시작하면 말이 다르다. 칠지도 양면에 새겨져 있는 명문은 "태□ 4년 □월 16일 병오날 정양에 백련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마땅히 모든 군사를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候王)에게 보낸다 .□□□□ 만듦.(앞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 왕세자 성음이 기이하게 태어남으로써, 왜 왕 지(旨)에게 만들어 주는 것이므로 후세에 전하여 보아라." 라고 해석 할 수 있다.그러나 1873년부터 5년간 이소노카미신궁의 궁사(宮司, 주지)였던 간세이유(管政友)가 평소에 봐왔던 칠지도의 명문을 교활하게 변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평소에 역사 연구가로서 약 100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대부분 한국사를 변조한 내용들이었으며, 역사변조 뿐 아니라 문화정보 수집 스파이 역할과 문화재 수탈 임무도 수행했다고 하는데, '데라우치 컬렉션')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간세이유가 변조한 후 태정관 편수관이었던 호시노 히사시(星野恒)는 앞의 "泰□" 연호의 빈자리를 시(始)로 추정하고, '한가.
    인문/어학| 2011.08.02| 9페이지| 1,000원| 조회(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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