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주의와 서사 연극• 극장주의 이론우리가 앞에서 본 상징주의 연극은 사실주의에 대한 최초의 도전자였으나 공연의 방식에 있어서는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재현적이다. 상징주의는 그 소재를 일상생활에서 취하지 않고 상상의 세계에서 얻어오지만 그 세계를 표현하는데 극장이나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사실주의나 상징주의는 모든 환각주의의 연극이다. 다만 사실주의는 ‘현실의 환각’을 무대 위에 재현하려 했던데 비하여 상징주의는 ‘주관적 비전의 환각’을 무대 위에 재현해 보이려 했다. 그런데 상징주의에 뒤이어 등장한 표현주의는 상징주의처럼 주관주의의 연극이지만 환각주의적 표현방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표현주의는 친숙한 일상적 현실을 왜곡하여 표현함으로써 현실을 낯설게 보이게 하고 현실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드러내 보인다. 그렇지만 표현주의는 표현의 수단에 있어서 극장성을 고의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상징주의=소재>상상의 세계, 극장,관객 의식X사실주의=소재>일상, 극장, 관객 의식X표현주의=낯설게 보이기, 극장, 관객 의식 X : 환각주의란, 연극이 아니라 실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관객으로 하여금 일으키는 것, 고로 이곳이 현실로 착각하게 만들어 극장임을 강조하지 않는 것임)그러나 극장주의는 극장 무대와 관객의 현존성을 강조하고 이것들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의식하게 함으로써 연극의 내용 못지 않게 전달되는 방식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형식주의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극장주의 연극의 대표적 연출가라고 할 수 있는 마이어홀드(1874~1940)의 초기 극장주의 수법의 공연작품인 몰리에르의 Don Juan을 예로 들어보자면 이 공연은 시종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마이어홀드는 앞 무대를 객석 깊숙이 파고 들어가도록 했고 면막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종 객석의 등을 켜 두었으며 흑인 소년들이 등장하여 소품과 가구들을 나르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촛불을 불어 끄기도 하고 연극의 시작과 휴게 시간 등을 알리는 종을 쳤다. 그리고 두 사람의 프롬프터가 무대 양끝에 시종 나와 앉아 있었다. 이 밖의 표현기법에 있어서 현실을 변형, 왜곡 또는 생략하는 등 양식화의 수법들은 표현주의나 그 밖의 반사실주의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극장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 연극을 관람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데 있다. 극장주의자들은 관객이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극장 무대란 연극예술의 수단 또는 매체일 뿐이므로 이 매체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용하는데 역점을 두어야지 매체를 은폐하려는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장주의자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일이 현실 곧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집요하게 일깨워 주려고 애쓴다.“애당초 관객이 연극을 보러 가는 것 자체가 ‘보여주려고 꾸며낸 것을 보러 가는 것이지 진짜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니다.”이 같은 극장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사실주의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연주 소리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연주 도중에 굳이 피아노 뚜껑을 열고 속에 들어있는 피아노 줄을 들여다 볼 필요까지는 없다. 예술 작품의 목적은 감상에 있는 것이지 감상행위 자체를 의식해야 할 필요는 없다. 지나치게 의도적인 극장성의 노출은 그 자체에 주의를 모으게 함으로써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연극무대의 표현은 가급적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러나 극장주의 연극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프로씨니엄 극장 양식을 배척하고 사실적인 무대 장치 대신 양식화된 무대 장치를 사용하며 관객을 향하여 직접 말을 거는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고 기회만 있으면 연극 속에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려 든다. 이 같은 극장주의의 수법을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알기 쉽게 사용한 극작가를 꼽으라면 와일더(1897~1975)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 극작가로서 오닐 다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극장주의적 기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하여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한 와일더의 대표작은 Our Town(1938)이다. 이 극에는 막도 없고 무대 장치도 없다. 관객들이 극장에 들어서면 텅빈 무대를 대하게 된다. 마치 공연이 없는 날 관객이 잘못 찾아온 것 같이 느껴진다. 개막시간이 되면 입에 파이프를 문 무대 감독이 등장하여 관객에게 직접 말한다.“이 연극의 제목은 우리 읍내 입니다. 이 작품은 쏜튼 와일더씨가 썼습니다. 아무개 제작에 아무개 연출입니다. 출연진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이 연극의 무대가 되는 곳은 매사추세츠주 경계에 위치한 뉴햄프셔주의 그로버스 코너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위도 42도 40분, 경도 70도 37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서두를 꺼낸 무대 감독은 이어서 이 마을의 생김새를 자세히 묘사한 뒤에 지극히 평범한 이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의 생활을 보여 준다. 배우들은 몇 개의 대도구 외에 아무 것도 없는 무대에 등장하여 마임같은 동작으로 그들의 일상생활을 재현해 보인다. 이렇다 할 사건도 이렇다 할 주인공도 없는 이 연극에서 그나마 관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에밀리라는 한 소녀가 조지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출산을 하다가 죽어서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과정인데 관객의 주의를 모을만한 커다란 사건이나 어떤 연극적 장식이 일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상적 행위 하나 하나를 거리를 두고 관찰하게 되고 인생에서 차지하는 그것들의 의미를 씹어보게 된다.이 같은 의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작가는 끝막에서 무덤에 묻힌 에밀리로 하여금 잠시 동안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다. 12살의 생일날로 되돌아 간 에밀리는 잠시 그 안에서 다시 살 뿐 아니라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과 다른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평범한 하루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에서 잠시 삶으로 되돌아 온 에밀리에게는 그 순간들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이 그토록 빨리 스쳐 지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에밀리는 마침내 과거의 방문을 단념하고 만다.와일더가 이 작품에서 사용한 극장주의 수법은 인생에서 자그마한 일상생활의 순간들이 소중함을 깨우치려는 작가의 의도와 유기적인 조화를 이룸으로써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극장주의는 연극무대를 현실의 환각을 창출해 내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무대로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막도 사용하지 않고 사실적 장치나 도구도 기피하며 조명기구나 무대 시설물들을 은폐하지 않고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시종 자기네들이 극장 안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행위 속에 감정적으로 빨려 드는 대신에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극장주의는 서사연극과 그 기본적인 미학적 입장을 같이하는 셈인데 와일더의 극장주의 사용의 의도는 서사연극에서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있다.이 같이 극장주의를 단순히 연극적 수법으로서가 아니라 철학적 비전으로 추구한 극작가로서 대표적 인물은 이탈리아의 피란델로(1867~1936)였다. 연극 배우들을 무대 위에 등장 시켜 그들이 배우로서 현실의 삶을 사는 모습과 극중인물로서 연기하는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현실과 환각을 대비해 보여준다. 피란델로의 의도는 이 같은 수법을 통하여 궁극의 진리는 알 수 없으며 모든 진리란 상대적이라는 그의 철학적 견해를 전달하려는 데 있었다.(피란델로 설명, 이건 각자 읽어보시길) (요기까지 keep)이 같이 와일더나 피란델로에게 있어서 극장주의는 그들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편리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으로 고안되고 활용되어졌으나 한편에서 극장주의는 사실주의에 대한 전면적 대안으로서 극단적인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극장주의도 결국은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다만 “극장성의 목적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려는 것이다. 곧 ‘예술의 리얼리티’를 무대 위에 실현하려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와는 달리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리얼리티의 추구에 있어서 양자는 일치한다. 따라서 “사실주의와 극장주의 사이의 갈등은 완전한 허구는 아니더라도 주로 이론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극장주의는 사실주의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사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극장주의의 본령은 환각주의를 깨뜨리는 데에 있는데 환각주의가 선행하지 않는다면 깨뜨릴 대상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극장성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극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주의 이전의 모든 연극은 공연방식에 있어서 제시주의적이었다. 르네쌍스부터 연극이 실내 극장으로 들어오면서 무대장치에서부터 환각주의적인 태도가 시작되기는 했으나 배우의 연기는 여전히 제시주의적이어서 모든 대사와 동작을 직접 관객을 향하여 던졌다. 사실주의에 이르러 환각주의가 절정에 달하면서 제시주의의 극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비극장화의 노력이 기울여졌고 극장주의는 대두는 연극을 다시 재극장화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사실주의와 극장주의는 상충적인 관계라기보다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천적으로 보더라도 사실주의는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의 반사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상당부분 양식화되었고 극장주의는 출발부터 사실주의를 상당 부분 기반으로 삼았다. 따라서 오늘날의 연극에 있어서는 사실주의와 극장주의를 확연히 구별하기도 힘들며 구분자체가 무의미해졌다고 할 수 있다.
독도의 가치어장으로서의 독도의 가치독도주변해역이 풍성한 황금어장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한류와 남쪽에서 북상하는 대마난류계의 흐름들이 교차하는 해역인 독도주변해역은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 하기 때문에 좋은 어장을 형성한다. 어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는 회유성 어족인 연어, 송어, 대구를 비롯해 명태, 꽁치, 오징어, 상어가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오징어잡이 철인 겨울이면 오징어 집어등의 맑은 불빛이 독도 주변 해역의 밤을 하얗게 밝히곤 한다. 또한 해저암초에는 다시마,미역, 소라, 전복등의 해양동물과 해조류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어 어민들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며, 특히 독도의 해조식생이 남해안이나 제주도와 다른 북반구의 아열대지역이나 지중해 식생형으로 볼 수 있기에, 별도의 독립생태계 지역으로 분할할 수 있을 정도로 특유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동해의 중심수역에 위치하고 있는 독도의 주변해역은 청정수역으로서 명태와 오징어를 비롯한 각종 어류가 풍부하게 서식하고 있는 어자원의 보고인 동시에 조업어선의 피난 내지 휴식처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다. 독도의 어장은 연안어장과 대화퇴어장으로 양분되며, 오징어를 비롯한 풍부한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특히 오징어의 경우 국내전체 어획량 중에서 독도연안과 대화퇴 어장의 어획고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유자망 어업으로 잡는 가오리, 열어, 광어 등 잡어 어획고와 홍게, 새우를 대상으로 하는 통발어선의 어획고도 연간 수백억원대에 이르고 있다.군사적으로 독도의 가치독도의 군사적 가치 및 해양 과학적 가치1905년 노일전쟁의 최후를 장식한 이른바 ‘동해의 대해전’에서 독도의 군사적 가치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한국령 독도를 일본령 다케시마로 대명하여 시마네현 은기도의 소관으로 1905년 2월 15일에 일본내무성의 결정으로 독도를 강제적으로 일본령으로 편입하였으며, 독도에 망루를 준공하였기에 러시아 함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 지질학적으로 보면 독도는 동해의 해저로부터 해저의 지각활동에 의해 솟구친 용암이 오랜 세월동안 굳어지면서 생긴 화산성 해산이다. 몇십만년의 세월이 흐르며 바닷물에 의해 침식작용과 바람에 의한 풍화작용을 거듭하며 원래 부드러운 성질의 돌이 천천히 깎여 들어갔다. 이러한 해식작용의 결과로 해식애들이 만들어 졌으며, 서도의 북쪽과 서쪽해안은 파식대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질구조를 갖는 독도는 지질학적으로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 독도는 해저 밑바닥에서 형성된 벼개용암과 급격한 냉각으로 깨어진 부스러기인 파쇄각력암이 쌓여 올라오다가 해수면 근처에서 폭발적인 분출을 일으켜 물위로 솟다가 대기와 접촉할 때 생기는 암석인 조면암, 안삼암, 관입암 등으로 구성된 ‘암석학의 보고’라고 한다. 해저산이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드문 예이며, 또한 오랜세월 동안 파식 및 침강작용에 의해 원래의 모양을 간직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독도는 해저산의 진화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세계적인 지질유적이라고 한다.독도의 지하자원으로서의 가치독도주변 해역에 천연 가스층이 존재한다‘하이드레이트’란 메탄이 주성분인 천연가스가 얼음처럼 고체화된 상태로서, 기존 천연가스의 매장량보다 수십배 많은데다가 그 자체가 훌륭한 에너지 자원이면서도 석유자원이 묻혀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시자원이라고도 한다. 러시아 과학원 연구소에서 제공한 동해의 ‘하이드레이트층’의 분포추정 지도나 석유발견지도의 경향을 보았을 때 독도주변해역 해양석유자원의 보유가능성은 매우 명확하다고 하며, 그 경제적인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한다. 독도 주변해역의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정부는 분명 상기해야 할 것이며, 결코 독도주변해역의 경제적 가치와 무관하지 않을 일본적부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의미깊게 상기해야 할 필요성이 재기된다.외교쟁점화의 발단Ⅰ. 서론일본은 그동안 개개인의 정치인들에 의해, 혹은 극우단체들의 성명 등으로, ‘망언’수준의 독도 영유권 주장 발언을 계속해 왔다. 2008년에는 일본 ‘정부’에 의한 직접적 움직임며, 지난 참여정부는 이러한 국민들의 감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동안의 일명 ‘조용한 외교’에서 탈피하여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천명하였다. 국제정치학의 전통적 힘의 관계 분석으로만 독도의 영유권 분쟁은, 구체적으로 상세한 해결책을 내놓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힘의 대결을 통해 독도문제를 현재 시점에서 해결할 여지는 적기 때문이다. 독도문제를 두고 양국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도문제의 해결 영역은, 국제제도이며 더 자세히는 국제해양법 질서 속에서 풀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가 국제제도를 중심으로 점점 국제 문제 해결의 명분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독도 문제를 집요하게 국제재판소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독도는 이미 분명한 한국의 영토이므로 분쟁상황이 아니며 이에 따라 이를 국제재판소로 끌고 갈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과연 일본은 왜 이 문제를 국제재판소로 가져가려 하고, 한국은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국제법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 과연 한국이 지향해야 할 독도 영유권 분쟁의 관리 방안이 무엇인지 제시해 보겠다. 무력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한 독도문제의 해결은 결국 국제법 질서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Ⅱ.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한 국제법적 분석1. 섬의 지위국제법상 섬이라 함은, 「만조시 수면 위에 있고, 바다로 둘러싸인 자연적으로 형성된 육지지역」이다. 따라서 인공섬이나, 대형 선박은 자연적이지 않으므로 섬의 정의에서 위배된다. 이에, 독도는 일단 섬의 지위로 인정될 수 있다. 「민간거주 또는 독자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암석은 배타적 경제수역 또는 대륙붕을 가질 수 없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섬은 그 스스로 영해, 접속수역, EEZ, 대륙붕을 갖지만 민간 거주나 독자적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암석’은 영해 이외의 접속수역만을 갖게 된다. '인간의 거주' 조건을 더 보면, 이에 대한 어떠한 유권적 해석도 존재하지 않으나 "인간의 거주를 지탱할 수 우 넓어 대륙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거나 섬이 본토에 가까이 근접해 있는 경우 또는 국가 간 합의가 있는 경우에는 섬의 완전한 효과가 인정되며 중복 수역시에는 중간선, 등거리선 원칙이 적용된다.2) 섬이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하는 경우 : 양국이 육지영토 경계선 부근이나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중간선 부근에 위치하는 섬으로 양국 간의 영유권 분쟁이 있는 섬의 경우나 폐쇄해나 반폐쇄해 같은 좁은 수역의 중간선이나 인접국간 등거리선 설정시 그 너머에 위치하는 조그만 섬들의 경우이다.3) 섬이 부분적 효과를 갖는 경우 : 섬의 크기나 인구, 위치 등을 고려하게 되는데 본국 영토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섬의 중요성에 비추어 완전한 효과를 인정하기에는 형평상의 문제가 있는 섬의 경우나 약간의 주민이 거주하는 섬으로 문제의 수역 중앙부에 위치하는 섬 및 상당수가 거주하는 중요한 섬이나 본국 영토와는 격리되어 있고 타국 영토에 가까이 위치하는 섬의 경우이다. 부분적 섬의 효과는 3/4, 1/4, 1/2 효과로 나타나며 1977년 영국-프랑스 대륙붕 경계사건에서는 영국령 군도가 프랑스에 인접해 있었는데, 중재결과 12해리 영해만 인정되었다.일본과 한국은 아직 배타적 경제수역과 대륙붕 획정이 확실히 되지 않았다. 다만 지난 참여정부에서 울릉도를 기점으로 해서 200해리 EEZ를 주장했던 것에서 독도를 기점으로 EEZ를 주장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만약 우리 스스로 독도를 완전한 섬의 효과를 주장하지 않고, 섬이 해양경계획정에서 스스로 독도를 ZERO EFFECT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도같이 멀리 위치한 그 해당 섬이 영유권 분쟁의 섬으로 스스로 인정해 버릴 수 있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3. 섬의 영유권 문제섬의 효과 문제는 영유권 문제와는 100%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 해양경계획정시의 그 섬이 지닐 수 있는 효과와 관련한 문제였다.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영유권과 관련한 국제법적 시각을 정리해 볼 것이다.1) 영유권과 관련한 국제법에서의 큰 줄기전통 국제법상 영토 권원에 요한 영토권원의 파악 근거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는 영토 권원의 안정성, 즉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본국들의 영토 유지의 안정성을 위한 것으로, 과도한 영토분쟁으로 국제평화의 해악을 가져오는 것은 막기 위한 국제법의 태도이다. 따라서 식민지본국과 신생독립국들의 영토분쟁에서는 국제재판소에서 신생독립국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2) 영토권원에 관한 전통 국제법상의 원칙영토권원에 대한 전통 국제법상의 원칙은 자연작용, 선점, 시효, 할양과 병합, 정복 등을 들 수 있다.① 자연작용자연작용에 의한 영토변경은 강의 진로가 점진적으로 이동하여 충적 퇴적물이 형성되어 영토가 추가로 생기는 ‘점진적 증가’와 강 진로의 급작스런 변경이나 화산활동에 의해 새로운 영토가 생기는 ‘급격한 전위’에 따라 그 논의가 구분된다. 이러한 자연 작용에 의해 영토가 확장된 경우에 국가는 공식적인 선점행위를 요하지 않고 그 주권이 자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으로 추정된다.② 선점선점이란 국가가 무주지를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무주지에는 처음부터 국가에게 귀속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고 다른 국가가 유기한 경우도 있다. 유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객관적 조건 이외에 당해지역을 버린다는 심리적·주관적 요건이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명확하게’ 확인되어야 한다. 또한 무주지에 대한 선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유의사와 실효적 지배가 필요하다.③ 시효 ☆시효란 타국의 영토 일부를 시간이 지나 취득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시효는 영유의사와 실효적 지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선점과 비슷하지만 선점보다 더욱 엄격한 실효적 지배를 요구한다. 1911년 미국과 멕시코간의 Chamizal사건에서는 시효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점유가 방해받지 않고 차단되지 않고. 이의제기를 받지 않았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따라서 영토 탈환 시에 무력충돌이 예상될 경우에는 평온하지 않은 지배로 간주한다. 일본의 계속적인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 불인정은 한국의 이 시효 행사를 방해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꾸준한 이다.
작곡: 주세페 베르디(G. Verdi, 1813-1901)대본: 위고(V.M. Hugo)의 희곡 을 바탕으로 피아베(F.M. Piave)가 씀 (이탈리아어)등장인물: 만토바(Mantova)의 공작리골레토(Rigoletto 그의 총신으로 광대)질다(Gilda 리골레토의 딸)조반나(Giovanna 질다의 가정교사)스파라푸칠레(Sparafucile 전문 암살자)막달레나(Maddalena 스파라푸칠레의 누이)몬테로네 백작(Monterone)체프라노 백작(Ceprano)체르라노 백작 부인보르사(Borsa)마룰로(Marullo)배경: 16세기 이탈리아의 만토바초연: 1851. 3. 11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개요:리골레토의 탄생배경리골레토의 작품성리골레토 줄거리리골레토 등장인물 분석감상평∴ 리골레토의 탄생배경리골레토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베르디의 17번째 작품인 리골레토는, 그 뒤에 연달아 발표된 , 와 더불어 그의 작품 세계에서 예술적 절정을 이룬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오페라사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18세기의 보편성이 후퇴하고 민족적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과 음악과 연극이 좀더 밀접해진다는 점이다. 18세기 말까지 오페라를 주도해왔던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였고 그것은 주로 연극보다 성악에 치우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지만, 오페라에서 세력을 잃은 곳은 이탈리아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권을 잃으면서도 민족 오페라적 성격으로 훌륭하게 변모하였다. 19세기 초 이탈리아 오페라들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독일 오페라들이 환상적인 세계를 다룬 것과는 대조적으로 본래의 특성인 리얼리즘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탈리아의 전통적 발성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는 이전 거장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베르디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경계 안에서 그의 명성을 얻도록 해준 것이라면 는 유럽으로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가 발표된 1851년은 베르디에게 있어서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을 고한 해이고 이탈리아의 전통이 세계적으로 다시 새롭게 부각된 해라고 말할 수 있다.베르디는 1849년 무렵에 위고가 쓴 을 알게 되었는데, 그 희곡의 격렬한 주제는 그의 어두운 본성에 즉각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원작인 은 수난을 겪은 바 있었다. 정신없이 환락을 추구하는 방탕한 군주(프랑수아 1세)를 비롯해서 곱사등이 익살광대와 살인청부업자 및 매춘부가 등장해서 저주와 유괴와 암살 등의 살벌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이 연극 속의 왕실은 문자 그대로 방탕과 타락의 온상으로 묘사되었다. 연극이 공서양속을 해치는 부도덕성에 차 있다는 것이 프랑스 당국이 공연을 금지한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 그것은 단지 구실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정치적인 것으로, 프랑스 군주를 너무 노골적으로 좋지 않게 묘사한 것이 그들의 비위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위고는 당국의 조치에 대항해서 자유로운 언론의 권리를 옹호하는 소송을 제기해서 사회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게 파리에서 위고의 연극이 당했던 재난은 베니스에서도 일어났다. 베르디가 '방탕한 왕'에서 주제를 빌려와 쓴 도 검열로 인해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베르디는 이 오페라의 제목을 원래 라고 붙일 작정이었다. 이 제목에 대해 당시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검열 당국은 치사한 트집을 잡았다. 오스트리아 군정의 검열관들이 베르디와 충돌한 부분은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었는데, 검열관의 눈에는 절대 권력자가 방탕한 인간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는 것으로 여겼다. 더구나 검열 강국은 뚜쟁이 노릇을 하는 꼽추가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결단코 허락할 수 없는 일로 못박았다. 추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전까지의 관습을 깨는 것으로 어딘가 '혁명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열관의 통제를 받고 분노한 베르디가 베네치아와의 계약을 끊으려는 단계에 이르자 이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인상을 주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 검열 당국은 사건배경과 제목, 등장인물의 이름만 바꾸도록 하는 선으로 대폭 후퇴했다. 그리하여 베르디는 배경을 16세기의 파리에서 같은 시대 이탈리아의 만토바로 바꾸고 오페라의 제목을 에서 로바꾸는 것과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이탈리아 사람으로 바꾸는 것으로 양보해주기로 했다. 그런 것은 바꾸어도 오페라를 통해 보여주려는 효과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골레토의 작품성이리하여 1851년 3월 11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막을 올린 는 초연에 성공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온 이탈리아와 전 유럽의 도시로 급속히 퍼져 나갔으며 종내에 전세계를 정복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대본의 기초가 된 희곡을 쓴 빅토르 위고의 강한 반발로 6년 동안이나 그 초연이 지연되기도 했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가 고집을 꺾고 오페라를 봤을 때 그는 "내가 연극에서도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네 사람이 동시에 감정을 표현하도록 할 수 있었다면 똑같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을 텐데"하며 4중창에 대해 느낀 매력을 피력했다.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창작 시기에서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지만 당시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류에서 볼 땐 상당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전통적 오페라를 기반으로 풍부한 성악적인 선율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화성과 관현악법을 사용해서 기분과 분위기의 전달에서 절묘한 효과를 거두고 있으며, '콘서트 오페라'스타일 보다는 '음악극'적인 측면이 구식 이탈이아 오페라에서 보다 훨씬 잘 나타난다. '서곡'부분에서도 도식적인 종래 스타일 대신 오페라의 주제인 '저주'의 테마가 관현악적 표현으로 제시 되는데, 이것은 오페라 전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오페라는 관객들에게 강한 도덕적 열정을 휘저어 놓는 힘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특징이 아마도 오늘날까지 이 오페라를 지속적인 사랑을 받는 레퍼토리로 장착시키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리골레토 줄거리리골레토의 줄거리는 솔직히 단순한 편이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만토바의 공작는 많은 여자를 희롱한다. 그리고 리골레토는 그의 어릿광대이다. 어느 연회 도중 만토바에게 딸을 농락당한 몬테로네가 나타나서 공작을 저주하며 대항하는데 리골레토는 그를 조롱한다. 이에 몬테로네는 리골레토를 저주하고 너도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놀란 리골레토는 자신의 딸 질다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질다에게 몸조심할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골레토를 엿보던 만토바는 질다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내 그녀에게 접근한다. 순진한 처녀 질다는 공작과 사랑에 빠지고 말게된다. 그러나 달콤한 시간은 금새 사라지고 리골레토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질다는 납치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두카의 부하들로써 만토바는 모르는 사이 벌어졌던 일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집에 감금되어 있던 질다는 결국 모든 사실을 알게되고 거짓된 사랑에 상처를 입고 만다. 이에 리골레토는 공작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다. 리골레토는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에게 공작을 살해할 것을 부탁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여동생 막달레나는 공작을 유혹했고 그는 쉽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만토바에게 마음을 뺏겨 오빠에게 부탁을 했고 스파라푸칠레는 자정에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공작대신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때 공작이 다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도 공작을 사랑하는 질다는 숨어서 이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고 그녀는 공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는 폭풍우가 치는 자정 공작대신 자객의 칼을 맞고 죽고 만다. 리골레토는 공작의 시체를 찾으러 왔지만 그는 죽어가는 딸 질다를 발견하게되고 몬테로네의 저주를 상기하며 오열한다.∴ 리골레토 등장인물 분석? 리골레토리골레토는 허름하고 흉칙한 외모를 가진 자신에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무시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공작 앞에서 비위를 맞추고 다른이들을 조롱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리골레토를 비웃으며 겉으로만 그를 반긴다. 리골레토는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자신의 흉물과 다름 없는 성격을 지녔다. 그의 이런 성격이 그의 인생에 비극을 초래했을 지라도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한 부성애는 여느 아버지보다 강하고, 돈독하다? 질다변두리의 어두 침침한 집에서 홀로 아버지를 기다리는 질다는 어쩌면 이 외로움을 못 이겨 공작의 유혹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공작에게 순결을 뺏긴걸 알고 방에간 리골레토가 무기력하게 당할 때 이런 아버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부녀간의 정이 담긴 노래에서 아버지에 대한 효성과 순종적인 딸로서의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질다는 아버지의 걱정대로 만토바공작을 사랑해버렸고, 또 그녀는 만토바공작이 다른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것을 보고 바람둥이 임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죽을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이것이 사랑앞에서 헌신적인 그녀의 성격을 알수있게 하였다.
‘뜻대로 생각하세요’ 작품에 대한 분석으로 작가인 루이기 피란델로의 생애와 작품관에 대한 조사, 작품의 전반적 시대 배경-실존주의 극과 부조리 극에 대한 정의와 차이점, 작품의 등장 인물 분석을 본론으로 나의 느낀 점을 정리 해 보았다.* 작가분석루이기 피란델로 [1867.6.28~1936.12.10]이탈리아의 극작가·소설가·단편작가.염세적인 작풍의 시인으로 출발하여 7편의 장편소설과 246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다. 희곡에서 극중극을 창안하여 근대 희곡의 중요한 혁신자가 되었으며, 1934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유황 광산주의 아들로 태어나 시칠리아의 수도인 팔레르모로 갔다가, 1887년 로마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고전 문학교수와 논쟁을 벌인 뒤, 이듬해 독일의 본대학교에 편입해 1891년 아그리젠토 방언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894년 아버지의 동업자인 부유한 유황 광산주의 딸 안토니에타 포르툴라노와 결혼했다. 아내가 가져온 결혼지참금 덕분에 경제적으로 독립해 로마에서 살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미 조수에 카르두치가 확립한 시 형식에 경의를 표한 첫 시집 〈유쾌한 파멸〉(1889)을 출판했고, 이어서 〈제아의 부활절> 을 비롯한 시집들과, 괴테의 〈로마 비가〉를 번역한 〈로마 비가〉가 출판되었다.그러나 초기에 발표한 중요한 작품은 원고료도 받지 않고 잡지에 기고한 단편소설들이었다.1903년에 산사태가 일어나는 바람에 아내와 아버지가 투자한 유황 광산이 폐쇄되었다.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피란델로는 로마의 사범대학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생계를 꾸려나가야만 했다. 경제적 재난이 낳은 또 하나의 결과로 아내가 피해망상증에 걸렸다. 이 병증은 남편에 대한 광적인 질투로 나타났다. 그의 고통은 1919년 아내가 요양원에 수용된 뒤에야 끝이 났다. 초기 단편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그의 가장 독특한 주제, 즉 '변화무쌍한 인간성 내부 세계에 대한 탐구'를 마지막으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쓰라린 경험이었다.피란델로의 초기 서술 양식은 19세기말에 활동한 뛰어난 이탈리아 소설가들인 루이지 카푸아나와 조반니 베르가의 베리스모(사실주의)에서 유래한다. 〈사랑 없는 사랑〉(1894)·〈삶과 죽음의 장난〉(1902~03) 같은 초기 단편집 제목은 초기 장편소설 〈추방자〉(1901)·〈차례〉(1902)에서도 엿보이는 그의 사실주의의 뒤틀린 성격을 암시한다.피란델로는 흔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3번째 장편소설 〈마티아 파스칼〉(1904)을 통해 비로소 성공을 거두었다. 이 주인공이 직면하는 장애는 외적 상황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에 그의 전형적인 주제를 다루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소설은 나중에 등장 인물의 잠재의식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피란델로는 프랑스의 실험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가 쓴
‘인도주의’에 총 쏘다니…국제사회 비난 빗발가자지구에 인도적 물자를 지원하려던 국제구호선단을 31일 새벽 공해상에서 기습 공격한 이스라엘에 대해 국제사회의 비난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구호선단을 주도한 터키는 이스라엘 자국 대사를 소환한 데 이어 즉각적인 유엔안보리 긴급이사회 소집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자국민이 구호선단에 참여했던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스웨덴, 이집트, 덴마크 등 6개국도 이스라엘 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강력하게 항의하고 참사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유럽 연합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하며 이스라엘에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는 한편 27개 회원국 대사급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유엔은 국제수역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폭력행사를 규탄했다. 그러나 친이스라엘인 미국과 영국만은 유감을 표명하는 수준에 그쳤다.중동에서 이스라엘과 유일하게 우호관계였지만 자국민 9명이 숨진 터키는 “공해상에서 일어난 명백한 국제법 위반행위는 양국 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스라엘 비난의 선봉에 섰다. 수만명의 터키 국민들도 이스라엘 대사관과 영사관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이번 사건을 학살이라고 간주한다”며 사흘간의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국경 검문소의 이스라엘군을 향해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벌였고, 중동국가들에서도 반이스라엘 시위가 줄을 이었다. 시리아의 대통령과 레바논의 총리는 “이번 사태가 중동 지역에서 새 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국제 인권활동가 등을 태운 6척의 구호선단은 30일 오후 키프로스를 출발해 31일 오후 가자항에 입항할 예정이었다. 구호선박에 197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메어리드 코리건매과이어와 유럽의회 의원들도 승선해 있었다. 이스라엘 국방부 대변인은 일부 활동가들이 권총을 쏘고, 칼과 쇠막대 등으로 저항해 군인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발포했다며 당시의 비디오를 공개했다. 그러나 ‘자유 가자운동’의 대변인은 “군인들이 배에 올라타 살해했다. 희생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인도적 구호물자를 가지고 가던 비무장 민간 구호요원들이었다. 비무장 민간 구호요원을, 그것도 공해상에서 살해한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무법적 폭거를 규탄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국제사회의 망나니 노릇을 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을 통해 점령한 아랍 영토를 반환하지 않은 것은 물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안에 이스라엘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행위도 중단하지 않고 있다. 또 걸핏하면 안보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팔레스타인 지역인 가자지구를 봉쇄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4년 가까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봉쇄돼 감옥에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친팔레스타인계 국제인권조직이 국제구호선을 띄운 것도 가자지구 봉쇄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스라엘 점령정책에 대한 비판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최근 유엔 통계를 보면 4년 가까운 봉쇄로 가자인들의 70%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고 75%가 식량원조에 의존하며 60%는 매일 물을 공급받지도 못한다. 이스라엘은 봉쇄를 통해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의 뿌리를 뽑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팔레스타인은 물론 중동지역 전역에서 반이스라엘 감정만 강화시키고 있다. 당장 시리아와 레바논은 전쟁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무법행위를 계속하는 데는 국제사회의 책임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이 유대인 로비세력에 사로잡혀 이스라엘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로비의 힘을 믿는 이스라엘은 연간 수십억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의 부통령 방문에 맞춰 정착촌 확대 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뻔뻔스럽다. 이번 사건 역시 국제사회의 비난 따윈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태도의 산물이다. 국제사회는 더이상 말로만 비판하는 시늉을 하다 끝내선 안 된다. 단순한 만행 규탄으로는 안 되며, 이번 사태의 일차 원인인 가자지구 봉쇄를 풀도록 이스라엘을 압박해야 한다. 그러려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들이 이스라엘 일변 말했다. EU 이사회 상임의장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대해 놀라움과 함께 비난의 뜻을 표한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 밤 긴급 모임을 가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2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즉각적이고 공정하며, 신뢰할 수 있고 투명한 조사”를 요구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이스라엘은 이 같은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에 대해 “구호선박에 타고 있던 구호 활동가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해 발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배 안에 있던 흉기라며 새총·나무방망이·쇠파이프·칼 등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스라엘군이 촬영·공개한 동영상엔 구호 활동가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갑판 밖으로 떠미는 모습이 찍혀 있다.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1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의 전화 통화 때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잣대에 유감을 표했다”고 덧붙였다.◆이집트 “가자지구 국경 개방”=이스라엘은 이번 사건으로 몇 안 되는 중동 내 우군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이집트는 1일 가자지구에 인도적 구호품을 전할 수 있도록 라파의 국경 통과소를 개방했다. 이곳은 이스라엘을 거치지 않고 가자지구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지상 접근로다. 그간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정책에 협력해 라파 국경을 막아 왔다. 환자 수송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월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구호 선박 공격을 강하게 비난한 뒤 국경 개방을 선언했다. 중동 평화의 균형추 역할을 하던 터키가 이스라엘과 등을 돌리게 된 것도 큰 문제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지만 정교분리 원칙을 지키며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터키는 이스라엘에서 무기를 수입했고, 이스라엘 관광객은 터키 관광산업의 주 수입원이었다. 하지만 총격사건 이후 터키는 완전히 ‘반(反) 이스라엘’로 시행해 왔다. 육상과 해상의 모든 통로를 틀어막는 등 가자지구 내 150만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사실상의 고사(枯死) 작전이었다. 2008년 12월에는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공격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 1400여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숨지게 했다. 이번 사건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강압적 봉쇄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특히 이번 사건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6척의 구호선에는 40여 개국 출신 600여 명의 시민운동가들이 타고 있었다. 사망자 대다수는 터키인이었다. 유엔이 즉각 안보리 긴급회의를 소집한 것은 이번 사건의 국제적 파장 때문일 것이다. 관련국들의 격앙된 감정이 새로운 중동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 큰 사태로 발전하지 않도록 각국은 자제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진상 규명이다. 이스라엘은 자위권을 내세워 책임을 떠넘기기만 할 게 아니라 진상 규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중동분쟁을 막는 근본적 대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협상을 통한 평화 정착이다. 이스라엘은 강압적 봉쇄정책을 완화하는 등 협상의 여건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 이스라엘에 쏟아지는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이스라엘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중앙일보참고 : http://joins.com1차세계대전 중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에 새 국가를 세워주노라, 했지만 전승하자 없던일 처럼 되버렸습니다. 이때는 시민사회이고, 자본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날로 커져갑니다. 그래서 시오니스트(가나안 땅에 유대인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강경주의자)들이 많아집니다. 마침 독일이 유럽에서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단행했고,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들은 미국에서도 놀라운 속도로 정착했고, 경제주류를 장악해나갔습니다.세계2차 대전은 미국의 힘으로 영국, 유럽등이 해방된 전쟁입니다. 전쟁 이후 시오니스트들이 가나안땅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로 합니다.여러차례 팔레스타인 합의가 진행됬지만, 현재까지도 크고 작은 테러와 공격, 보복 등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문제가 되는 곳은 팔레스타인 중에서도 가자지구인데요.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남서단에 있는 영토로 원래 이집트 영토로 이스라엘 건국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가장 몰려들었던 곳입니다. 중심도시는 가자이구요.여러차례중동전쟁이벌어지면서 이스라엘에 함락되기도했지만, 번번히 평화협정을 통해서 가자지구 만큼은 이집트 영토가 됬구요.그렇지만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가자지구를 완전 점령하는 바람에 이곳에 마지막으로 정착한 팔레스타인 민족 마저도 난민이 될 신세에 처합니다.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합니다. 그리고 주변 아랍국들도 지원을 해줍니다. 특히 이집트는 가자지구와 국경을 맞대고 있거든요. 결국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이스라엘간의 자치협정이 체결되고, 가나지구는 자치구가 됩니다. 이 공로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지도자와, 현재 이스라엘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게됩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자치정부는 경제위기를 자초하는 등 민심을 잃어 96년부터는 하마스등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추구하는 단체들이 부각받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여러차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가자지구에서 보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현실에 고통받던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꿈꾸게 되고 2006년 마침내 대이스라엘 투쟁을 추구하는 하마스가 총선에서 압승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제제가 잇따랐고, 이집트 마저도 이에 굴복해 국경을 봉쇄하는 등 가자지구는 경제난에 허덕이게 됩니다. 결국 하마스의 무장투쟁노선에 따라 가자지구, 이스라엘 곳곳에 로켓탄이 떨어지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폭탄테러가 나게 됩니다. 이후 2006년 이스라엘군은 친팔레스타인 성향의 다른 아랍 정당, 헤즈볼라와의 전쟁을 겪기도 합니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 뿌리를 두고 요르단 등 아랍 등지에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