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디스크 - 추간판 탈출증에 대처하는 방법레포트를 쓰게 된 계기군대를 전역한 이후에 허리가 급격하게 안 좋아진 것을 느낀 후로는, 병원에 자주 갔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디스크 초기 증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MRI를 찍을 것을 추천했지만, 따로 다니진 않고 혼자 운동해서 어느 정도로 아픈 것은 해결을 하였습니다. 이 레포트에 쓸 주제는 ‘허리디스크 - 추간판 탈출증’을 쓰려고 합니다. 저의 군생활을 힘들게 한 존재였고, 많은 젊은 층의 사람들이 허리디스크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써보게 되었습니다. 자료는 인터넷과 논문 등에서 참조를 하였습니다.허리디스크(추간판 탈출증)의 정의추간판은 척추골 사이에 존재하는 관절연골의 일종으로 척추의 움직임과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작용을 담당하, 섬유륜과 수핵으로 구성되었다. 섬유륜은 추간판의 외부를 양파껍질처럼 둥글게 원형으로 싸고 있는 질긴 섬유조직이며, 추간판의 중심 부분에 위치한 젤라틴 성분의 조직인 수핵이 존재한다. 또한 외상이나 퇴행성 변화 등에 의해 섬유륜이 찢어지거나 파열되면 내부의 수핵이 밖으로 밀려나와 주위 조직, 특히 척추신경을 압박하면서 통증 등의 증상을 유발하는데 이것을 “추간판 탈출증”이라고 한다.진행단계는 3단계로 분류가 가능하다.① 1단계 : 추간판이 돌출 또는 팽윤된 상태, 섬유륜(섬유테)의 외부는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 고 있으나 수핵이 파열된 섬유륜(섬유테) 속으로 밀고 나온 상태② 2단계 : 추간판이 탈출된 상태, 섬유륜(섬유테)의 외부까지 파열되어 수핵이 섬유륜(섬유 테) 바깥으로 밀려나온 상태③ 3단계 : 추간판이 부골화된 상태, 즉 탈출된 수핵이 추간판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상태 요부신전 강화운동이 수술 방법에 따른 요추추간판 탈출증 환자의 요부 근력과 심부 및 천층 근육면적에 미치는 영향, 김경태,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 體育學科 2010.8허리디스크의 원인추락이나 척추의 굴신운동, 구부정한 자세해서 반복적으로 물건 들어올리기, 진동하는 기계를 작동하는 일, 심한 육체적 노동, 격렬한 운동, 허약한 복부와 등 근육 등이 있으며, 척추의 퇴행성 변화는 다른 근골격계와는 달리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부터 나타난다. 추간(척추 사이의)판이 노화됨에 따라 추간판의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섬유륜에 원심성의 균열(circumferential fissure)과 방사성 파열(radial tear)이 발생하게 되는데, 특히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옆으로 옮겨 놓으려고 하면 과다 굴곡된 상태에서 압박력과 염전력을 받아 추간판 중앙의 수핵은 더 이상 섬유륜에 쌓여있지 못하고 방사성 균열 사이로 비집고 나와 추간판 탈출증을 유발하게 된다.허리디스크의 분류1) 위치에 따른 분류추간판 탈출증은 탈출된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데, 중심성 수핵 탈출증(Central midline herniation), 추간공내 탈출증(Foraminal herniation), 후외측성 수핵 탈출증(Posterolateral herniation), 극외측 탈출증(Far lateral herniation)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각의 증상적 특징은 다르다.2) 레벨에 따른 분류추간판 탈출증의 병명에는 탈출된 레벨이 이용되는데 네 번째 요추와 다섯 번째 요추사이의 추간판에서 탈출이 일어났다면 “제4~5요추추간판 탈출증”이라고 진단명을 붙인다. 요추의 구조 및 운동성에 의하여 제 4~5요추간과 제5요추~제1천추 간에서 약 90~95%의 요추추간판 탈출증이 발생하고 나머지가 그 외에서 발생하는데 제 1~2요추와 제 2~3요추 사이에서는 외상 없이는 잘 발생하지 않고 중심성 탈출증인 경우 신경근이 아닌 척수를 압박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정밀 검사를 실시하여 다른 원인에 의한 신경압박 여부를 감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팽윤 추간판(Bulging disc) 탈출증, 돌출 추간판(Protruded disc) 탈출증, 탈출 추간판(Extruded disc) 탈출증, 부골화된 추간판(Sequestrated disc) 탈출증 등이 있다.허리디스크의 증상요추부 추간판 탈출증 환자의 가장 두드러진 증상은 요통과 함께 다리가 아프고 저린 방사통이다. 탈출된 추간판이 신경근을 자극하게 되어 신경근이 분포하는 다리에 감각 이상이 초래된다. 제5 요추 신경근이 자극되면 안쪽 발등에 감각 이상을 호소하고, 제1 천추 신경근이 자극되면 발등의 외측에 감각 이상을 호소한다. 대개 감각 저하나 무감각을 호소하지만 통각 과민으로도 나타난다. 근력 또한 약해져서 제5 신경근 이환 때에는 족부 신전근이 쇠약해지고 이 때는 발 뒤꿈치로 걷는 것이 어려워진다.드문 경우이나, 돌출된 수핵이 크고 중앙에 위치한 경우 대소변 기능이나 성기능 장애 및 하지 마비가 올 수 있다.허리디스크의 진단추간판 탈출증을 진단하기 위한 대표적인 검사는 하지 직거상 검사(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운 자세에서 무릎을 펴고 통증이 느껴지는 쪽 다리를 천천히 올려 고관절이 90도 될 때까지 들어올리는 검사)이다. 바로 누운 후 무릎을 편 채로 다리를 서서히 올려 보았을 때, 다리 뒤로 전기가 흐르듯이 뻗치는 통증이 발생하여 정상 쪽에 비하여 아픈 다리를 올릴 수 없으면 양성이다. 이 외에도 다리의 감각이나 근력이 떨어지며, 심부 건 반사에 이상이 초래되어 슬개 건 반사나 아킬레스 건 반사가 소실된다.허리디스크의 검사방법① 단순 방사선 검사-요추 만곡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검사한다. 추간판 탈출증을 진단할 만한 소견은 찾을 수 없으나 다른 진단을 감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검사이다.② CT검사-신경과 디스크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신경이 눌려진 모습 확인가능하다.③ MRI검사-뼈와 신경, 디스크를 완전히 구분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가장 진단적인 가치가 높지 만 모두에게 시행하는 검사는 아니다. 우선 보전적 치료를 실시하고 진단이 확실하 지 않을 경우나 수술이 필요할 때 정밀 검사를 시행한다.④ 척수강 조영술(Myelogram)-척추의 지주막하 부위와 척추관을 보여줌으로써 이 부위의 이상을 진단 할 수 있는 검사이다. 요추천자를 통해 조영제를 척추관에 주입하여 척수의 모양을 알아보기 위 해 촬영하는 특수한 X선 검사이다.허리디스크의 경과/합병증추간판 탈출증에 의한 요통 및 방사통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치료의 방법에 상관없이 대부분 저절로 좋아지며, 이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염증 반응이 소실되고 수핵의 수분이 흡수되어 수핵의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또한 신경근을 계속적으로 누르고 있으면 신경근의 길이가 길어지는 생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증상이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환자를 편안하게 지내게 하는가가 치료의 근간이 된다.급성 증상이 사라지고 나면 복근 운동을 통한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수술적 치료는 통증이 너무 심하여 조절이 힘든 경우에만 시행한다는 개념이 중요하다. 극히 소수의 추간판 탈출증 환자에서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고 알려져 있다.허리디스크의 치료추간판 탈출증 수술환자의 경우 수술 2~3일 후 부터는 하지의 신장 및 근력운동이 가능하고, 수술 1주일 후에는 굴곡운동 및 척추배근의 신장운동을 할 수 있으며, 4~5주 후 부터는 신전 운동이 가능하여, 회복에 긍적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퇴행성 요부질환에 대해 치료에서 체간의 근육이나 인대의 단련으로 추간판이나 후방관절의 반복적인 미세손상을 방지함으로서 요추의 퇴행성 변화의 진전을 막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안정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복근을 강화하고, 복부근, 둔부근, 배근 등과 신전근과 하지근 등의 균형있는 발달과 유연성 증진으로 척추의 중립적 자세를 확립하는게 중요하다.요통을 완화시키기 위한 운동은 요구 굴곡 및 신전운동, 스트레칭 운동, 에어로빅, 요가 등 다양한 운동 들이 적용되고 있다. 최근에 임상에서는 등장성 운동, 등척성 운동, 등속성 운동 등을 이용한 근력 강화운동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1) 보존적 치료① 진통제 복용- 통증조절을 위해서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제, 근육이완제, 마약성진통제② 골반견인- 추간판공을 넓혀준다③ 열치료④ 경막 외 부신피질 호르몬 주사⑤ 복근 강화 운동⑥ William 체위- 추간판 후면의 간격이 넓어지고 전방요추굴절을 증진시켜 긴장을 감소 시킨다.
-김홍도의 「활쏘기」와 「논갈이」-서론우리그림 읽는 법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그림을 보는 거지, 어떻게 읽지?” 라는 생각으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사실, 언어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말로 소리 내어 발음하다, 그리고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들어갔지만, 읽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수업을 한다고 하셨으니, 그 배경과 설화 등 여러 가지 측면으로 작품을 해석해 나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과제를 하기 위해서 국립중앙박물관, 삼성 리움 등 많은 곳을 가보려고 했으나, 결국은 국립중앙박물관을 가서 작품들을 직접 보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터라,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도 적었으며, 딱히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분야인지라 고지식하고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수업을 듣고 난 후에 보는 그림은 정말 읽는다 라는 느낌으로 보고 온 것 같습니다.저에게 있어서 회화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는 김홍도를 뽑을 수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여러 해학적인 부분과 거침없는 터치로 당대의 모습을 잘 역동적으로 표현해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작가들과는 다르게 감정표현과 상황 설정에 걸맞은 인물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김홍도의 생애와 작품의 특징 등을 쓸 것이고, 결론으로 이 레포트를 마치겠습니다.본문김홍도의 생애1) 전기김홍도의 생애에 있어서 전기는 시대적으로는 영조말기와 정조초기에 해당됩니다. 이때는 정치·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으로 문화전반에 크게 발달했던 시대였습니다. 김홍도가 일찍이 화가로서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시대적 여건에도 크게 힘입었습니다. 기록상 김홍도는 21세기 이전에 이미 화원이 되었고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30대에는 정조가 즉위하여(1776년) 규초각을 중심으로 문화정책을 펼치자 더욱 활발하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김홍도는 이처럼 화원이라는 전문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예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그에 따른 명성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전기의 회화는 주로 초상화와 풍속화, 신선도가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밖에도 궁중행사도나 각종 기록화, 실용화의 제작에도 종사하였습니다.2) 후기후기(40세 이후)에는 안기찰발(安奇察訪)과 연풍현감(延豊縣監)의 두 차례 지방관을 역임하고 많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내적으로 사대부적 의식을 갖게 됩니다. 후기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784년(40세)작 부터 '단원(檀園)'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원(檀園)'이란 주지하듯이 명대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號)입니다. 중인인 김홍도가 이를 자신의 호(號)로 삼은 것은 후기의 새로운 심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산 사경(景), 사신(使臣)을 수행한 중국여행, 용주사 불화(佛畵), 도설 제작 등 중요한 회사(繪事)에 종사하거나 다양한 인생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50대 전반경 김홍도는 가장 황성하게, 또 원숙한 모습으로 창작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쇠퇴해가는 사회 환경 속에서 김홍도도 내적으로 시의(矢意)하고 외적으로 병고와 노쇠, 경제적 빈궁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말년을 빈곤하게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이명기(18~19세기)와 함께 그린 “徐直修肖像” 등을 남기고 순조 16년에서 18년(1816~1818) 사이에 병고로 시달리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제가 가서 보고 온 회화는 김홍도의 「활쏘기」와 「논갈이」입니다. 이 두 작품이 속해있는 「단원풍속화첩」과 김홍도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와 후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정조는 규장각에 자비대령화원 직제를 설치하여 화원들에게 ‘녹취재(祿取才)’라는 시험을 실시하면서 관리하고 후원하며 재교육함으로써 화원의 운영 체제에 획기적 변화를 초래했고 도화 활동의 내용과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녹취재 화제(畵題)로서 ‘속화(俗畵)’를 인물화로부터 따로 떼어 내어 독립시킴으로써 속화, 즉 풍속화의 유행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한 상황에 부응하여 김홍도는 다양한 주제의 풍속화를 그려냈으며 「단원풍속화첩」은 그 결과물의 하나로서 여겨진다. 「단원풍속화첩」은 조선후기 활기차고 건강한 서민들의 삶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절제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선묘로 통일감 있는 화면을 구성하면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풍속화의 회화성을 한 단계 높였다. 이 같은 풍속화첩의 제작 전통은 이후 김득신, 신윤복 등의 후배화가들뿐만 아니라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도 시정(市井)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단원풍속도첩 [檀園風俗圖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라고 합니다. 사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단원풍속화첩」을 보고 난 후 가서 꼭 봐야겠다 라고 다짐하고 갔는데, 전체는 없었고, 그 작품 중 하나인 「활쏘기」와 「논갈이」를 보고 왔습니다.김홍도 풍속화의 특징배경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풍속장면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러 풍속을 다양하게 담고 있으나, 필요한 것 외에는 과감히 생략하여 요약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는 생활의 정감이 배어나고 약동적인 활력이 넘칩니다.풍자성이 돋보이고 에로틱한 장면이 보다 극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또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이 특징적입니다.등장인물의 감정을 절묘하게 포착한 점에서 뛰어납니다. 인물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 점이 특징적인데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발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감정 표현을 주변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표출하였습니다. 인물들의 환호와 안타까움, 그리고 야담법석 가운데서 무관심 등 상황설정의 절묘한 배합이 김홍도 그림의 매력이자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감정표현 및 상황 설정과 더불어 풍속화에 걸맞은 인물묘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같은 시기, 같은 호가라 할지라도 인물의 묘법은 주제에 따라 붓질이 달라진다. 풍속에서는 딱딱하고 각진 철선묘와 정두서미묘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무명옷의 빳빳한 질감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표현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김홍도는 인물의 성격에 걸맞으면서 풍부한 회화적 묘미를 느끼게 할 만큼 묘법의 구사에 뛰어났습니다.이전 풍속화의 주제 및 기법을 수용하여 자기화한 그림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배 화가인 조영석, 강희언의 영향이 보이고, '패문재경직도'에서 착안한 것이 있으며, 사경의 변상도에 나오는 풍속장면도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한국의 풍속화」, 한길아트, 정병모(2009)
1. 결혼문화1) 프랑스의 결혼문화일반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법적인 인정을 받기 위해 구청이나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 신부 측에 두 명씩 참석해(주로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척 혹은 가까운 친구들) 이들 결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구청장이나 시장의 앞에서 결혼 결혼선서를 한 후 반지를 교환하고 혼인 신고서에 사인을 하면 마무리 된다. 법적으로 부부가 된 이들은 가족들과 친지들, 지인들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프랑스의 결혼 전통풍습 중에 특별한 점은 신랑과 신부의 부모님들이 결혼식 초대장을 보낸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자녀의 결혼식에 손님들을 정중하게 초대하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긴다. 결혼식 날짜는 전통적으로 신부 측의 권리이고 주로 토요일에 잡는다. 또 프랑스 국민들은 대부분 가톨릭이므로 주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2) 우리나라와 비교/대조우리나라에선 결혼할 때 신랑이 혼자 먼저 입장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프랑스 결혼식에선 신랑이 신랑의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입장하는 점이 조금 다르다. 그 후에 가족이나 친지 등 초대 손님들이 입장을 하고 신부와 신부아버지가 입장을 하게 된다. 신부의 뒤에는 미래의 아이들을 상징하는 화동들이 면사포를 잡고 뒤따르는데 이 점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손님들이 입장할 때 프랑스에서는 부부의 취향을 고려한 선물 혹은 부부가 받고 싶다고 이야기 한 선물을 꾸러미 안에 들고 입장한다. 또 결혼식이 끝나고 나오는 부부를 향해 쌀을 던져주는데 쌀은 다산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행하여지는 풍습이다.2. 프랑스인들의 결혼 가치관 비교 + 동거우선, 프랑스인들은 다양함을 존중한다. 수많은 외침과 여러 나라들의 연합, 그리고 식민지 활동 등을 포함하여 많은 인종들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있고, 또 그 문화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좋아하며 상대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어떠한 것도 간섭하지 않는 곳이 프랑스라 할 수 있겠다.우리나라의 요즘 세태로는 동거가 가장 큰 논쟁거리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여 같이 살며 서로의 생각과 습관 등을 미리 알아가는 것을 가장 큰 장점으로 삼는 동거는, 양날의 검처럼 많은 장점과 동시에 단점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유교적 가치관 덕분에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한 방에서 있는 것조차 불경시하여 ‘남여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동거라는 개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약간의 전통, 풍습과도 같은 느낌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보고, 배려하는 마음과 상대를 존중하는 법을 깨달으며 결혼으로 가는 과정을 동거라고 여긴다.그러나 요즘 세태에서는 어느 나라건 비슷한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동거를 하던 안하던 간에 결혼을 기피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고 한다. 크게 나누면 2가지 부류가 있는데, 첫 번째로 자신의 인생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연애는 필수라고 생각하지만, 상대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만큼 자신들의 시간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으며, 서로가 힘들어하는 시기에는 상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은 하지만 상대와 나는 별개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거나 결혼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국가에서 정한 틀과 형식적인 절차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을 해도 성이 바뀌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다른데, 예를 들어 James라는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은 성을 James로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여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금전적인 측면으로 보면, 이혼을 하는 과정 중에 재산분할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측면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만 하거나 아예 결혼을 포기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프랑스의 동거를 Concubinage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젊은이들이 결혼 전에 동거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직장인이건 대학생이건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특히 20대 후반까지는 결혼한 커플보다는 동거하는 커플이 더 많을 정도이다. 동거 커플은 제 2차 세계대전 후부터 가족수당의 혜택을 받았다.1970년대 말부터 급속도로 확산된 동거의 주된 원인은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결혼이라는 전통관습에 대한 반발이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꼭 사회적 관습을 통해 확인한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성향과 대립되는 듯하다. 결혼이 결코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될 수 있는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인식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일찍부터 부모로부터 독립하는데, 특히 경제적인 독립을 원한다. 사실 정신적인 독립은 경제적 독립 없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 사회적,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프랑스 젊은이들은 다른 파트너와 함께 힘을 합해 독립을 이루어간다고 할 수 있다. 아파트 주거비용, 자동차 유류비, 휴가비용 등을 동등하게 나누며 함께 사는 것이다 '몸은 하나가 되어도 지갑은 서로 섞지 않는다.'는 표현이 프랑스인들의 동거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동거 커플이 전체 커플 중에 15% 정도에 이르고, 50%에 가까운 아이들이 혼외 관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보면 동거커플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일정한 연령에 한정된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는 민법(515조 8항)에서 '안정성'과 '지속성'이 있는 이성 또는 동성 사이의 동거를 사실혼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동거부부는 직업, 의료, 주택 등과 관련하여 법적으로 결혼한 커플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많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법적인 결혼이 아닌 사실혼의 관계에서 피해를 입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프랑스에서는 PACS(Pacte Civil de Solidarite, 시민연대협약)라는 것을 만들었다. 시민연대계약은 이성이든 동성이든 관계없이 성인인 두 사람 사이에 공동의 삶을 위해 체결되는 계약으로, 1999년 죠스뺑(L.Jospin) 정부에서 통과된 법령이다. 시민연대계약은 동성애자를 포함하여 결혼하지 않은 커플을 둘러싼 법률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간의 자유가 보장되고, 동거와 결혼의 중간단계에 위치하며, 최소한의 법적인 안정성을 보장한다. 결혼과 달리 시민연대계약은 어느 한 편의 요구만으로 계약이 파기될 수 있다. 게다가 동성애자들에게까지 열려있다는 것이 결혼과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이다. 법령이 발표되고 2004년까지 5년여 동안 20만이 넘는 커플이 시민연대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초기의 개념으로부터 실제 적용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시민연대계약은 시청에서 2명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신고하면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재산과 관련해서 결혼한 부부와 같은 체제를 따르는데, 재산세의 경우는 계약과 동시에 곧바로, 소득세는 계약 후 3년 후부터 공동과세대상이 된다. 주택 계약이나 육아휴직 등의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결혼한 부부와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의 계약자들 중에서 계약을 해지한 경우는 12~13%정도이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입장에서 서술을 하자면, 우리나라에 PACS가 있다면 좋은 점이 많이 생기겠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다. 이유 중 가장 큰 점은 시민의식의 부재라고 생각한다.3. 동성애현대 사회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동성애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그의 저서 『성의 역사』에서 근대를 거치면서 국가 권력에 의해 형성된 성에 대한 담론이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했고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써 담론이 변화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를 동성애에 적용해보면 동성애 역시 시대별로 그 담론이 변화해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순전히 개인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의식, 또는 절대적인 지식들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틀에 따라 개인들의 사고가 영향을 받아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면 동성애에 대한 담론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좋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민주주의화 되면서 많은 수의 동성애자들, 그리고 양성애자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권리를 달라고 하였으며, 이성애자들과 같은 혜택을 달라고 하였다. 그들도 같은 사람이고 시민이다. 그렇기에 당연한 것을 왜 지금까지 구분지어 왔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만 하다.
장애인복지론인터뷰나이 : 40대 후반성별 : 남장애명 : 시각장애 1급(약시)인터뷰 시간 : 40분가량장소 :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신흥리 300날짜 : 2009년 11월 18일 수요일대중교통에 대한 불편한 점시각장애인 1급(약시-형체분간가능)이지만, 아는 길은 돌아다니실 수 있다고 하셨다. 시각장애는 1~6급이 있고, 극심한 건 1,2급 정도이다. 아주 안 보이는 전맹도 있고, 약시도 있다고 하셨다. 유형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대부분 97%)인 것이 있다. 안내자 동행 없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다. 보행교육(흰 지팡이 사용하여 이동하도록 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주로 많이 다니는 길을 감각(청각/촉각/후각)을 이용하여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된 대중교통 부분은 철도이다. 기차/전철은 발권 시에 시각장애인용으로 발권 후 안내인동행 가능하다. 시각장애인들이 먼 곳을 다닐 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다. 전철도 출발역에서 도착역까지 안내받는 것이 가능하고, 최소한 출구, 택시까지 배웅을 해준다. 그 밖 교통수단에는 심부름센터(봉고차/승합차) 예약으로 차량지원이 가능하다.(약간의 실비를 낸다. 복지콜제도라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동행 혹은 버스정류장의 경우엔 요즘은 시민들이 승차부터 하차까지 도와주곤 한다.타인의 시선에 대한 것30대 후반까지 사회생활 하셨다. 극심하게 나빠진지는 5~10년 되었음.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질 때, 처음엔 많이 불편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그랬음. 시각 장애가 중증이 되다보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가 힘들어짐. 시선을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선 불편은 많이 해소된 것 같다. 장애라는 것이 예전에 부끄러운 것 이었는데 지금은 사회적인 인식도 바뀌고 교통편도 좋아져서 장애인들이 많이 나와서 타인들에게 장애인이란 존재가 익숙해진 것 같다. 비장애인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첫 번째로, 먼저 다가오는 것 같다. 두 번째로 봉사/서비스에 대한 인식도 많아진 것 같다. 이제는 나를 자꾸 감추려는 것이 없어지고 오히려 나를 드러내고 먼저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요즘은 잘 도와준다.장애가 생기고 나서 피해받고 힘들었던 사건갑자기 시력이 뚝 떨어져서 안보이기 시작하니 먼저 감추고 싶었다. 생활이 굉장히 더 어려워지고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행동도 더듬더듬 가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듯이 가다가 다치기도 했다. 장애의 정도가 심해지면 타인의 의식보단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다. 장애가 더 심해지니 흰 지팡이가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장애가 심해지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안전해 진 것 같다. 왜냐하면 더 많이 긴장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예전 방식처럼 생활하려고 하니 낯 선 환경이 매우 힘들고 장애가 깊어졌다. 예전보단 행동반경이 줄어들긴 했어도 더 보호 받을 수 있는 것 같다.선천적/후천적 장애의 여부 (어떤 경위로 다치게 되었는가?)‘나도 잠정적 장애인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당뇨/고혈압 등으로 하루아침에 장애를 가질 수 있다. 나는 녹내장에 의해 시신경이 말라서 시력이 점점 사라진 후천적 경우다. 장애 중 신기할 것이 없는 것이 후천적인 것이다. 질병에 의한 것으로는 당뇨(혈액 순환 등이 안 되서 시신경 압박으로 망막손상 그리고 시력손상)가 있고, 사고(교통사고 혹은 눈에 직접적인 타격으로 시력상실)로 인한 장애들도 있다. 언제든지 누구든 장애를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잠정적인 장애인이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야함.사회적으로 바라는 점가장 어려운 것은 돈이다. 돈을 얻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하고 일자리를 얻어야하는데, 장애인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는 제도가 있더라고 해도 실질적으로 고용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장애인들은 취업이 잘 안되기에, 스스로 경제적인 능력을 가질 수 없음. 보통은 기초생활 수급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 장애인 고용을 정책적으로 강화를 시켜주길 바란다. 국가적으로 더 많은 일터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경제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요즘 법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이다. 길거리의 장애물들(자동차/오토바이 주차, 집 앞 여러 물건들)을 조금씩 없애고 있다. 길가다 보도블록에 박는 것(차량방지턱) 등을 없애주었으면 한다. 또 버스 음성안내 시스템이 점점 더 확대되길 바란다. 저상버스도 같이 확대 되었으면 한다. 장애인들이 편리하면 비장애인들도 편리하다. 서로 어울려가는 사회구조가 필요한 것 같다. 인도의 경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블록이 있는데,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주차를 하거나 가게 앞에 내놓은 물건들에 불편함을 느낀다. 가게 앞에 내놓은 물건들에 걸려 넘어지면 가게 주인들은 미안해 하기는 커녕 장애인이라고 재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역할전치가 없는 것이고,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제도적으로 인도를 사람만 다니도록 만들었으면 좋겠다.시설에 들어오기 전/후의 달라진 점단체 소속 전엔 혼자 집에서 생활해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시각장애인 협회가 있다라는 것을 몰랐을 땐 점자습득도 힘들었고, 컴퓨터사용법도 몰랐다. 협회를 알고 나서 다른 장애인들에 대해 알고 사회적 제도에 대해 알고,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하여 알고 의식이 바뀌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도 많이 만들어지지만 협회 등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제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압축해서 장애인들에게 정보제공이 가능하다. 장애인들이 몰라서 이용 못하는 부분들이 적어진다. 정보 이용 면에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것 같다.장애생기기 전 사회와 지금 사회의 모습 간의 차이 -편리해지고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제도도 많이 바뀌고. 앞과 중복된 내용이다.시각장애가 생기면 점자공부를 하게 되는데 혼자서 한 것인가 도움인가?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점자교육, 보행교육, 정보화교육을 상반기, 하반기로 나눠서 단계적으로 실시한다. 기관을 통해 얻기도 하고, 시각장애인 학교(특수학교)를 통해 얻기도 한다. 서울에 있는 복지관까지 못 갈 때는 지자체에서 점자교육시간 같은걸 열어서 점자교육을 해줌. 현재 조치원에서 장애인들에게 점자교육과 보행교육을 도와주고 있다.하시고 싶은 말불편한데도 도와달라고 부탁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런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먼저 다가가서 먼저 도와주고 마음을 열고 도움을 주면 장애인들도 마을을 열고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이 편리하게 생각하는 것이 장애인의 경우엔 불편한 경우가 있으니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한다면 조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갖지 않다보니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에게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진솔하게 해라. 장애인들도 같은 사람이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에게 진솔하게 대하여 마음의 지팡이가 돼줘야 한다. 장애인들은 언제나 소외감을 느낀다. 그런 장애인들에게 친절하게, 진솔하게 대해 준다면 얼마나 좋은가. 공공기관에서도 시각장애인이기에 공문서 작성이 어렵다고 대신 작성해 줄 것을 부탁하면 눈을 치켜뜨고 째려본다. 그런 개인적, 국민적 의식을 고쳐야 할 것이다.
고고학에의 초대-미륵사지석탑의 재조명-I. 서론○머리말- 이 과제를 함으로써 문화유산에 대한 상식을 더 할 수 있고, 교양적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유물과 유적에 대한 심층적 탐구를 지향 할 수 있다.○선정이유- 우리는 고구려와 신라만을 보고 자랐다. 백제는 우리의 시야에선 보이지 않는 틀이다. 게다가 백제의 유물도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백제라는 나라의 흔적들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하였고, 고구려는 한 때 중국에 위협을 가할 정도로 큰 나라였다. 백제도 물론 일본에 문화를 전파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가장 먼저 한 국가지만 남아있는 유물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별로 없어서 우리에겐 그다지 친숙하지 못한 국가이다. 미륵사지석탑은 2001년에 해체작업으로 이슈가 되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백제의 유물 중 목탑과 석탑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인 미륵사지석탑으로 백제의 문화와 우리 기상을 조금이나마 알아보겠다.○개요- 이 보고서에서는 미륵사지석탑의 형성배경과 구조, 그리고 백제의 이념을 다룰 것이다.- 복원 전의 미륵사지석탑 -복원 중인 미륵사지석탑(2009/1/13)II. 세부사항 및 현재 상황- 미륵사지석탑의 세부사항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 있는 탑으로, 평면이 4각형인 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어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층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무량수전의 기둥도 배흘림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과 창방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 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 639년에 만들어 졌다. (무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동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지에 소재한 한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제 무왕의 재위기간 중인 639년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백제 석탑의 소위 시원형식(최초의 형식)이라고 불리며,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 석탑 전체의 출발점이라고 여겨진다. (Wikipidia출처, 미륵사지석탑)- 미륵사지석탑의 보수 및 정비탑이 노후화되었고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시멘트로 보수된 부분이 미관상 좋지 않고, 향후 석탑의 붕괴가 우려되어 1999년 4월 국가문화재위회에 의해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되었다. 전라북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륵사지석탑 보수 정비를 위한 준비부터 석탑 해체 보수 정비를 위한 가설덧집 공사 등의 공정을 완료하고, 2001년 10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본격적인 해체 보수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미륵사지석탑 해체 보수 정비 사업은 1998~2007년까지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동양 최대의 석탑이며 국보 제 11호인 점을 감안하여 신중한 해체와 백제 창건 당시 건축기술 등을 조사하기 위한 학술연구 등을 병행하면서 당초 계획보다 늦어져 7년 연장된 2014년까지 완료하기로 국가문화재위원회에 의해 결정되었다.III.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유물과 그 의의2009년 1월 14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정비 중에 심주 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 사리호, 금제사리 봉안기 등 사리장엄이 발견 되었다.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금제사리호도 발견되었다.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2중 구조로 이뤄져 있음을 확인되었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금제 사리봉안기도 발견 되었다. 금제 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는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금제봉안기에는 시주자인 왕후가 백제 8대 귀족성 중 하나인 '사'씨의 딸로 기록돼 있어 선화공주가 미륵사지를 조성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 받았다.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매납 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이 가능해졌으며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미륵사지 동탑-금제사리봉안기-미륵사지전경(가운데 빨간 원안의 탑이 미륵사지 서쪽 탑)-제일 위는 전북 익산 국보 제11호 미륵사지석탑 보수 정비를 위한 해체 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 왼쪽부터 원형함, 금제 사리호, 금제 사리 봉안기. 각종 구슬(앞쪽). 왼쪽아래 사진은 사리공(사리장엄을 안치하는 공간)에서 발견될 당시의 금제 사리호(가운데)와 금제 사리봉 안기. 오른쪽 아래 사진은 제관식(왼쪽 위)과 금제 소형판 등 유물.백제를 대표하는 호국불교의 증거이기도 한 미륵사지석탑은 물론 백제를 대표하는 불교양식이라는 점도 있지만, 현존하는 백제유물 중 탑은 겨우 2개(나머지 한개는 정림사지5층 석탑으로 당나라군 소정방이 백제 정벌 이후에 세웠다고는 하나 석탑에서 정림사지라는 글자가 나오면서 백제 때의 석탑으로 보고 있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의 탑의 양식과 그 시기에 만들어졌던 탑들의 양식도 이 탑으로 짐작할 수 있다. (대다수 우리가 아는 탑들은 통일신라의 것들로 백제의 미륵사지석탑보다 훨씬 이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즉, 백제의 석탑이 신라석탑에 영향을 준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가 남긴 시멘트를 걷어내는 복구작업은 우리에게 일제청산의 의미로도 해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