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한국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일본의 소프트뱅크라는 기업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 이다.소프트뱅크는 소프트뱅크 주식회사는 1981년 9월 3일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고속 인터넷, 전자 상거래, 파이낸스, 기술 관련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기업이다. 또한 5조 규모의 이익을 내며 소프트뱅크의 리더 손정의 에게 일본 재계 순위 5위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준 기업이다. 그렇다면 이 소프트뱅크를 설립한 손정의란 인물은 과연 어떤사람일까.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디지털 시대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도 막역한 사이인,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리더 중 한 명이2001년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했다. 2004년엔 재팬텔레콤(현 소프트뱅크텔레콤), 2006년에는 일본 3위 이동통신업체 보다폰KK(현 소프트뱅크 모바일)를 1조7500억 엔(18조원)에 인수해 산업 판도를 뒤집었다.Ⅱ. 본 론1. 손정의의 일생손정의는 재일교포 3세로 그의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였다. 손정의 집안은 80가구정도가 무리지어서 사는 무허가판자촌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다. 손정의가 태어낫을때도 돼지를 길러서 생계를 유지해야할 정도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아버지 손삼헌이 생선판매점으로 성공을 거둔 이후 파칭코와 부동산 사업으로 큰 돈을 벌게 된다. 덕분에 손정의는 다른 재일교포와 다르게 풍족하게 살게 된다. 하지만 손정의는 어린시절부터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였다. 유치원시절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아이가 큰 소리로 조센징이라고 놀리고는 큰 돌을 던진적도 있다 한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최대한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노력햇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미국연수를 가기 위해 공항에서 출국심사를 하는 중에 자신이 재일 교포임을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친구들은 내국인 심사를 하엿는데 자신만 외국인 심사를 통해서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손정의에게 미국은 신세계였다. 그가 방문한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엇고 거기에서는 일본인인지 미국인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문화와 버클리 대학에 반한 손정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한다. 미국으로 유학을 온 손정의는 영어를 위해 영어학원에 다녔다. 학원에는 일본인들이 꽤 있었고 그들끼리 그룹을 모아서 다녓지만 손정의는 빠른 시간안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일부러 일본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철저히 영어로 살았다. 손정의는 7개월 정도 영어를 배운뒤 정식으로 4년 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이 너무 쉬웠던 그는 교장에게 직접 찾아가 3학년으로 학년을 올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하룻밤만에 3학년이 되었고 4일이 지나자 3학년의 교과서를 다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4학년으로 올려달라고 했다. 교장은 이번에도 손정의가 원하는대로 4학년으로 올려주었고 또 일주일이 지나자 손정의는 대학으로 보내달라고 교장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교장이어도 이것은 무리한 부탁이었고 대신 손정의는 검정고시를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는 합격을 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가 고등학교 입학후 검정고시를 합격하게 될 때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2주였다. 그는 대학에서부터 이미 미래를 볼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과학잡지 일렉트로닉스에 인텔이 발매한 8080 컴퓨터 칩이 실리게 된 것을 보고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컴퓨터가 세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손정의는 인텔의 컴퓨터 칩이 찍힌 사진을 배게 밑에 두고 낮에는 가방에 넣고 다닐정도로 컴퓨터에 흥분하게 된다. 마이크로컴퓨터칩 사진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손정의는 언젠가는 컴퓨터 업계에 진출한다는 각오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된다. 소프트 뱅크 창업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버클리 대학 경제학부 재학 시 마이크로칩을 이용한 번역기를 개발했으며, 1980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유니손 월드라는 사업체를 설립하였다. 공부를 마치면 귀국하겠다는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귀국했으며, 1년 6개월간 사업구상을 한 뒤 1981년 9월 종합소프트웨어 유통업체인 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2. 손정의 성공의 비결(1) 설득의 힘손정의의 역사를 보면 그의 성공에는 설득의 힘이 있엇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멋대로 학년을 올려달라고 할 때 교장은 황당했지만 손정의의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검정고시를 볼 때 역시 손정의는 자신이 외국인이니 사전을 마음것 사용하고 시험시간도 제약이 없어야한다고 요구하였는데 처음에는 담당자가 황당해 했지만 손정의는 이역시 금방 납득시켰다. 모더 교수 역시 손정의가 망상증 환자라고 생각했지만 동양에서온 학생에 불과한 손정의 말에 설득 당하였고 함께 음성인식 번역기를 만들기로 한다. 손정의의 설득력은 음성인식 번역기를 판매할 때 역시 다시한번 발휘된다 처음 손정의가 일본에 음성인식 번역기를 팔기 위해서 기업과 접촉할대는 아무런 경력이 없었기 때문에 문전 박대를 당했다. 손정의는 회사의 고위급을 만나서 직접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회사의 고위급은 다른 사람보다 선견지명이 있어서 자신의 제품을 높게 평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위급 인사를 만나야 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손정의는 묘안을 짜내는데 그는 샤프전자와 일을 가장많이한 변리사 사무실을 알아 내고는 그쪽에 전화를 걸어서 함께 일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샤프전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고 사사끼 전무라는 답을 듣게 된다. 손정의는 사사끼 전무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데 특허 사무실은 이미 손정의와 함께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사사끼 전무를 만나게 된다. 사사끼 전무는 손정의를 보자마자 매료되고 그날 손정의의 설득에 넘어간 그는 음성인식 번역기의 개발을 도와주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의 후원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훗날에 손정의가 사업을 하게 되자 사사끼 전무는 자신의 집까지 저당잡히며 보증을 서줄정도르 손정의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또한 일본에서 소프트 뱅크를 경영할 때에도 손정의의 설득의 힘은 발휘된다. 현재 소프트 뱅크는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그당시에는 소프트웨어를 유통하는 업체였다. 그런데 이 소프트 뱅크라는 이름은 일본의 한 은행에서 융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영업사원이 같은 은행인줄알고 회사를 방문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소프트 뱅크 직원은 그 은행의 영업 담당자에게 회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이를 인연으로 손정의는 그 은행의 지점장인 미키야 마사유키를 만나게 된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시피 손정의는 직접 누군가를 만나기만 하면 상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지점장은 가벼운 마음으로 손정의를 만났지만 손정의가 이야기하는 미래 비전에 끌려버린 나머지 제대로된 영업 보고서도 없는 신생회사였던 소프트 뱅크에 보증인도 없는 조건으로 1억엔을 최고 좋은 조건으로 융자 받게 된다. 이대 융자받은 돈은 소프트 뱅크가 일본에서 최고의 소프트 웨어 유통점으로 성장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다.(2) 선견지명과 과감함손정의는 선견지명과 과감함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이미 IT 산업이 미래에 주요 산업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여러 모험들을 햇다. 일본에 돌아왔서 소프트 뱅크를 설립했을때도 중간 중간에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졌다. 우선 미국의 IT 컨퍼런스인 컴덱스를 인수하면서 이를 미국 사회를 보는 지도나 나침반이라고 정의했다. 처음에 무모해보였던 일이지만 그는 남다른 감각으로 야후의 부상을 알아채렸고 야후재팬을 만들어 한 단계 도약 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 사업 부진으로 철수하는 보다폰을 인수해서 소프트뱅크를 만든 것 또한 남다른 모험이다. 연이어 아이폰을 일본 시장에 출시하면서 기득권을 타파하고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했다. 이 과정에서 재무적 어려움 등을 감수하면서 소비자에게 제대로 된 가치를 주는데 주력하였다. 내가 손정의에게 가장 배우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과감함 이다. 나는 생각을 많이 하긴 하지만 이를 실전으로 옮긴 경우가 거의 없다. 바로 잘 못되는 것이 두려워서이다. 하지만 손정의는 그러한 두려움 보다 그 일을 성취 했을 때 오는 성취감을 먼저 생각하고 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이는 아버지의 특별한 교육법 때문이기도 했다. 이른바 천재 교육법인데 손정의의 아버지는 너는 타고난 천재이니 무엇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다할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은 그는 어느덧 아버지의 말에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무슨일을 하던지 자신감이 넘칠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무모한 도전을 하고 이를 성취하는데 묘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과감함, 도전정신이 현재의 그를 있게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목 차Ⅰ 서 론2Ⅱ 본 론1. 일본 교육의 역사22. 일본의 교육제도33. 일본 교육의 문제74. 일본 교육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회문제95. 해결을 위한 노력11Ⅲ 결 론12Ⅳ 참 고 문 헌13Ⅰ. 서 론최근 일본교육에 대하여 세계 각국, 특히 바로 이웃에 있는 우리의 경우를 포함해서 많은 나라들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교육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교육 자체가 일본의 경제적인 성공에 대한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교육정책의 입안자들은 일종의 개혁구상의 기준으로서, 현장의 교육실천가들은 이른바 ‘열린교육’의 지향, 그리고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의 철폐라는 목적 의식 속에서 일본 교육의 개혁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제도 아래서 생겨나는 문제점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이미 우리나라에서 ‘왕따’로 알려진 ‘이지메’현상과‘학급 붕괴’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밖에도 우리나라에서 겪고있는 것과 비슷한 문제점들이 발견되곤 한다. 본 논문에서는 일본의 교육제도와 일본 교육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알아 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일본교육의 역사일본 교육의 기본적인 성격은 1860년대 말과 194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두 가지의 변혁조치로서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일본은 1868년 서부 일본의 무사들이 도쿠가와 바쿠후를 타도하고, 천황에게 공권력과 통치력을 부활시켜 줌으로써 성취된 소위 메이지유신으로 시작하였다. 일본을 근대화하는데 있어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들은 구미 선진국에서 우수하고 능률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학습하려고 하였다. 미국에서는 상업의 방법과 초등교육을, 프랑스에서는 법률과 교원양성을, 독일에서는 육군?의학?고등교육제도를, 그리고 영국에서는 외국 무역과 해군에 대해서 학습하였다. 일본에서 최초로 근대적 학교제도가 확립된 것은 1872년(명치 5년)의 학제 반포에 의해서였다. 이 학제의 조직 운영방식은 프랑스의 것을 모형으로 하였다. 학제 반포 10년 로 되어 있는데, 환경을 통하여 실시하는 교육, 놀이를 통한 종합지도, 개개인의 특성에 부응하는 학습지도라고 할 수 있다. 건강, 사회, 자연, 언어, 음악과 율동, 회화 제작의 6가지 영역으로 구성되어 매 학년의 교육일수는 220일 이상, 하루 교육시간은 4시간 정도이다. 유아교육은 지성 중심의 학습보다는 유아들의 체험이나 주체적인 활동을 살려서 유치원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최근 일본의 유치원 교육은 학력사회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지니고 있다. 이미 소학교 2~3학년 정도의 수월성을 추구하는 영재교육을 목표로 하는 유치원도 사립유치원을 중심으로 성행하고 있다. 이른바 입시 학부모들의 극성으로 일부 사립유치원의 경쟁률은 치열하다. 또 하나는 일본의 전통적인 심신수련교육을 유치원 단계부터 실시하고 있다는 점이다.2) 초등교육(소학교 교육)일본의 초등학교인 소학교는 만6세부터 12세까지의 아동들이 다니는 6년제 의무교육단계의 학교이다. 유치원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 소학교 취학 아동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제1차 베이비붐 때 태어난 아동들이 성장하여 2세를 낳는 제2차 베이비붐 세대에서 핵가족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학교의 구체적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① 학교 내외의 사회 생활의 경험에 기초하여, 인간 상호관계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와 협 동, 자유 및 자주정신을 배양② 향토 및 국가의 현상과 전통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더 나아가서 국제 협조 의 정신을 배양③ 일상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및 산업 등에 대해 기초적인 이해와 기능을 배양④ 일상 생활에 필요한 국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배양⑤ 일상 생활에 필요한 수량적인 관게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처리하는 능력 배양⑥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관찰학 처리하는 능력을 배양⑦ 건강하고 안정하고 행복한 생활에 필요한 습관을 배양하고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도 모⑧ 생활을 명랑하고 풍부하게 하는 음악, 미술 및 문예하지 못하고 중퇴한 학생들이 그에 대한 대안학교로서 새롭게 부각하는 정시제 학교, 즉 ‘단위제 고등학교’를 선호하는 현상에서도 비롯하고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기관을 과정별로 분류하면, 보통과정과 전문과정, 종합학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보통과정은 우리 나라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대학 진학 준비과정이며, 전문과정은 전통적으로 수산, 농업, 공업, 상업, 가정, 간호 과정 등으로서 최근에는 국제과, 정보처리과 등으로 세분화하는 경향이 있다. 종합학과는 1990년대 이후 새로이 정착한 과정으로서 보통과정과 전문과정을 단위학교에서 병행하여 교육하는 학교로서, 새로운 학교모델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의 고등학교 진학률은 1997년 통신제 과정을 제외하고도 95.9%로서 준 의무교육화의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96년 전국의 고등학교 5,496개 학교 중에서 국·공립이 76.1%, 사립이 23.9%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국·공립학교가 대다수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학생·학부모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유리한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사립학교를 선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을 탈피하기 위한 학교교육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상 사립학교들의 특성화 교육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부성에서 정하는 학습지도 요령이 국·공립학교에만 적용되고 사립학교는 자율적인 학교경영방식을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에 대학입시준비체제와 관련하여 사립학교의 인기는 앞으로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5) 대학 교육학교교육법에 따르면 "대학은 학술의 중심으로서 넓은 지식을 받는 것과 더불어 깊은 전문의 학예를 교수연구하고, 지적 도덕적 및 응용적 능력을 전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일본의 대학은 단지 전문학과의 학술적인 연구에 취하지 않고 보다 넓은 교양을 공부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서의 소양을 육성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고 있고 전후의 고등교육에서는 보여지지 않는 특색을 나타활을 원만히 적응할 수 있도록 예비 지식도 교육하는 곳이다.전문 학교는 학과에 따라 1~3년 학제이지만 통상 2년제가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적으로 문부성에서 지정한 8개 분야로 나뉘어 있는데, 공업, 농업, 의료, 위생, 교육?사회복지, 상업실무, 가정, 문화?교양 등이며 최근 들어서는 방송?광고, 패션, 디자인, 통역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3. 일본 교육의 문제점1) 학력주의적인 병폐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식 교육개혁을 바탕으로 해서 그 이전의 교육체제를 민주주의적인 원칙의 교육체제로 정비하였다. 이후 수십년 동안 지속적인 경제성장, 사회·문화의 발전과 함께 일본사회의 의식 구조 역시 크게 변화해 왔다. 이와 같이 사회 전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학생들의 교육환경도 크게 변화하였다. 경제수준의 상승, 고학력을 지향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현재까지도 학생들은 입시 위주의 교육에 시달리고 여유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다음의 에서 보는 바와 같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은 1990년 일본 NHK 방송사에서 발표한 ‘국민 생활시간 조사’ 중에서 일본 문부성 백서에 제시되었던 학생 생활 부분에 대한 조사 결과이다. 이 표에 따르면, 학생들은 학교 교과활동과 방과후 특별활동 이외에도 학원수강 등 사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상적인 사회체험 활동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고, 가족과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TV 매체를 선호하는 등 극히 개인주의적인 생활습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입시 위주의 교육체제로 인해서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사교육 활동, 그리고 가족·지역사회와의 대화가 단절된 교육환경이 대체적인 특징임을 알 수 있다.현재 일본의 학생들은 과도한 학원수강 등 사교육활동으로 인해서 생활체험·자연체험·놀이문화의 기회가 아주 부족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인해서 이 똑같은 교육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 수학 교과서는 미국 교과서보다 수준이 높기는 하지만, 고교의 경우 평균 이상의 학생만이 교사의 설명을 이해한다. 또 한 미국에서 몇 년씩 살다온 학생도 같은 반 학생들과 똑같은 영어 수업을 받으며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이처럼 획일적이고 폐쇄적이며 교사 중심적이고 융통성 없는 일본의 교육관행으로 인해서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나 창의성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학원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4. 일본 교육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회 문제(1)폭주족과 교내폭력위와 같은 문제점들은 일본이 갖고 있던 사회적 문제들과 더불어 점점 부풀어만 갔다. 그 첫 번째로 나타났던 것이 폭주족과 교내폭력이었다. 폭주족 문화는 미국에서 건너온 것인데 1970년대 폭주족 문화가 유입되자 전국적으로 퍼져서 조직화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폭주족들은 단순히 소음을 내며 경주를 하는 등의 형태였으나 점차 조직화 되면서 세력을 확대하게 되었고 일반 차량 운전자를 폭행하고 각 집단간의 폭력 사태가 만연하게 되었다.일본 사람들의 전반전인 특징은 어디를 가나 굉장히 조용하다는 것이다. 전철에서나, 도심지에서나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없다. 이러한 폭주족들이 굉음을 내고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조롭고 조용한 사회에 대한 반항의 행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폭주족들을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가 10대 후반의 저연령층에 중서민층 계층인 것을 보면 이들의 행위가 지배계층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이와 더불어 교내폭력도 크게 증가하였다. 일본 교내 폭력의 실태는 우리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본 만화책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한때 우리 나라에서 만화책 내용을 본따서 동급생을 폭행하였다고 논란이 되기도 했던 ‘로쿠데나시 블루스’라는 만화에서는 학교끼리 패싸움을 벌인다던지 각목이나 체인으로 사람을 폭행하는 장면을 많이 것이다.
목 차Ⅰ 서 론2Ⅱ 본 론1. 엔고란?22. 슈퍼엔고 엔화강세의 이유33. 엔화 강세의 현황64.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75.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86. 엔화 강세의 대책127. 일본 기업들의 엔고 대응 전략148. 엔고의 전망189. 일본 경제의 취약성과 전망2010. 최근 엔화 초강세의 대응과 시사점21Ⅲ 결 론24※ 참 고 문 헌25Ⅰ. 서 론일본과 우리나라와 관계는 가까우면서 멀게 느껴진다. 특히 경제무역분야에서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에 따른 엔화 강세의 영향은 지대하다. 국제 외환시장에선 엔화가 15년만의 최고치인 달러당 84엔대까지 치솟기도 했다. 미국의 경기침체나 유럽의 재정위기 등 글로벌 경기회복에 대한 우려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 엔화 강세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원자재를 수입하는 국내 업체들도 환율 흐름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엔화 강세로 일본 경제가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추세로 가면 1995년 최고치였던 79엔까지 상승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도쿄 주식시장은 지난 3월 말과 비교할 때 16.6%의 약세를 기록해 주요 20개국 가운데 가장 하락 폭이 컸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간 나오토 총리는 엔화 강세에 대한 걱정을 나타냈다. 이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엔화 강세를 용인할 수 없다는 방침을 수립했다. 간 나오토 총리는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와 만나 엔 강세 현상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하지만 가파르게 진행하고 있는 ‘엔고’를 막을 구체적인 정책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가지고 있나. 외환시장 개입 효과는 거의 없다고 본다. 지금 엔화 가치가 이렇게 높은 것은 수요 부진에 따른 경기 침체 때문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집권 당시 기업 구조조정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자리가 줄고 실업자가 늘었다. 소득이 없으니 소비가 줄어든 것은 당연하다. 대출 프로그램을 실시한 후 2010년 3월 유럽발 재정위기 촉발로 대출한도를 20조 엔으로 추가 확대한 후 이번이 세번째 유동성 공급 조치였다. 하지만 2004년 1/4분기 이후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외환시장 개입은 중단된 상태였다.그러나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필요하다면 외환시장 개입을 비롯한 '과감한(bold)' 조치를 취할 것이며, 일본기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엔고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취할 것이다."라고 발언하였고(2010. 9. 8. Bloomberg) 또한 노다 재무상은 "중국은 일본 국채를 매입할 수 있는 반면, 일본은 중국 국채로 외환보유액을 운용할 수 없는데 이는 '비정상적(unnatural)'인 상황"이라고 발언 (2010. 9. 8. WSJ)한 바 있다.엔/달러 환율이 급락할 경우 일본정부는 그동안 취하지 않았던 외환시장 개입을 단행해 환율 급락을 억제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2010년 9월 16일 일본 정부가 전격적으로 6년 만에 외환시장에 개입했다. 엔고 현상을 막고자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 9월 16일 하루 동안 2조엔을 투입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998년 4월에도 2조6000억엔을 외환시장에 투입한 바 있으나 당시에는 엔화 약세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점에서 엔화 강세에 대한 개입 규모로는 9월 16일의 개입이 사상 최대 규모였다.2010년 10월 29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재무상은 "필요하다면 정부가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는 우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앞으로도 외환시장에 계속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2010년 11월 2일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은 11월 2일 오전 각료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최근의 엔고에 대해 "지난 주말부터 어제 아침까지 엔화가 한방향으로 움직였다"며, "계속 관심을 가지고 시장 동향을 예의주시 하면서 필요할 때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3. 엔화강세의 현황(2010년 9월 17일 기준으로 엔화는 85.80엔을 이 과거처럼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을 지속적으로 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엔화시장의 규모가 크고 국제적 공조 없이 단독으로 개입해서 환율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의 경제 및 환율의 디커플링(탈동조화) 측면에서 봐도 일본의 외환시장 개입이 원/달러 환율이나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엔화 환율이 원화환율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 디커플링이 지속되고 있어 원화 환율이나 한국 경제가 받는 충격은 없을 것이다.4) 원자재, 조선업계, 전자부품 수입업체 불리함기존 엔화대출 중소기업이나 일본 부품 수입 중소기업의 자금사정 악화 가능성은 은행에 부정적이다. 핵심소재 및 장비에 대한 일본산 제품 의존률이 큰 전자업체들이다. 엔화강세가 지속될 경우 원가구조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 원화 환산 외화차입금도 늘면서 재무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 환율 효과는 워낙 복합적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 가지 통화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엔화만 놓고 보자면 엔화를 지불하고 사오는 원자재나 장비에 있어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터치폰의 부품인 터치스크린(TSP)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엔고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핵심 소재인 ITO 필름을 일본에서 대부분 사오고 있다. 엔고가 계속되면 조달 비용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원자재인 후판의 상당 부분을 일본산으로 충당하고 있는 조선업계도 마찬가지다. 후판 수입가격 협상엔 일부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국내 조선사들은 일본 철강사와 3분기 후판 가격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일본 철강사들에게는 엔고 현상이 후판가격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다.기본적으로 엔화가 아닌 달러로 후판가격을 결제하기 때문에 엔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엔고 현상이 계속되면 달러로 책정되는 후판 가격에도 일본 철강사들의 입장이 제한적이나마 반영될 수밖에 없어 우려 된다. 여기에 엔화대출을 받은 국내기업의 원화 이자부담도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5) 전자업계 등이후의 급격한 엔고를 극복한 데 이어 1990년대 중반에는 1달러 당 79엔까지 급상승한 엔고에도 견디고 이제 서서히 장기불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기업들은 어떠한 노력으로 엔고에 대응할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장기간에 걸쳐 실시되어 왔던 일본기업의 엔고 극복 전략에는 여러 가지 패턴이 있다. 세부전략에 관해서는 그때그때 차이가 있었으나 일본기업의 전략은 대체적으로생산시스템의 혁신을 통한 원가절감 노력, 해외생산이전 가속화, 고부가가치화로 인한 가격인상, 환율의 변동 리스크 절감, 내수시장 개척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1)생산시스템의 혁신을 통한 원가절감 노력엔고는 일본 제품의 가격을 인상시키는 압력이기 때문에 일본기업은 생산시스템을 혁신하면서 원가절감에 주력해 왔다.1980년대 후반의 엔고 시기에는 산업용 로봇을 대거 도입하여 원가 절감에 나서는 일본기업이 많았다. 혼다자동차의 경우 1987년 에 900명에 달하던 현장 근로자로 구성된 생산라인을 16명으로 감축할 수 있는 자동화 라인을 구축했다.한편 1990년대의 엔고기에 일본기업은 완전한 자동화 생산 라인보다도 인간을 활용한 유연한 생산시스템을 지향했다. 로봇에만 전면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생산라인이 경직되고 다품종소량생산에 유연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벨트컨베어를 철거하고 조립 라인에서의 중간 재고를 줄이면서 생산품종 교체시의 시간적 손실을 줄일 수 있는 셀(세포) 방식의 생산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는 획일적인 대량생산체제를 혁신해 고부가가치 제품생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장기불황기에도 계속 호조를 보인 도요타의 생산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이루어졌다. 사실 일본의 거대 전자회사 등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기업의 경우조차도 도요타자동차의 생산성과는 격차가 컸기 때문에 도요타 생산방식을 배우면서 원가를 줄일 수 있는 일본기업들이 많았던 것이다.캐논의 경우 지난 1995년에 현 미타라이 사장 취임 후 4년간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2)해외생산이전 가속화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은 주로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 중심으로 생산거점을 이동하였다. 이는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하여 제품의 제조원가를 절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일본 제조업의 업종별 직접투자 추이 조사에 의하면 1980년부터 1984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NIES제국에 대한 직접투자는 연간 7억400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플라자 합의에 이루어진 1985년부터 1989년에 걸쳐서는 연간 25역4000만 달러로 늘어났고 1990년부터 1991년에 걸쳐서는 27억2600만 달러까지 증가했는데, 이는 주로 급격한 엔고 진전에 따른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추세에 기인하는 것이다.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은 주로 인건비가 저렴한 동남아 중심으로 생산거점을 이동하였다. 이는 생산거점을 해외로 이전하여 제품의 제조원가를 절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ASEAN 제국에 대한 투자도 1980년에서 1984년까지는 10역9100만 달러, 1985년부터 1989년에는 13억6600만 달러, 1990년부터 1991년에는 무려 31억3800만 달러에 달했다.엔고로 아시아지역에 대한 투자 진출이 증가하고 있는 한편, 구미지역도 1985년부터 1989년 사이에 175억4000만 달러, 1990년부터 1991년까지는 230억7000만 달러, 구주지역은 1985년부터 1989년 기간 중 71억7900만 달러, 1990년부터 1991년에는 47억 3300만 달러로 이 지역에 대한 진출도 활발히 이루어 졌다.또한 일본 국내생산을 포기하고 생산기지 자체를 해외로 적극 이전하였다. 예를 들면 신메이 전기는 동남아로 생산거점을 100% 이전했으며 AV업체인 아이와는 해외생산비율이 77%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고 일본의 구본사가 해외본자의 자회사가 되는 극단적인 사례도 등장하였다. 그 예로 야호한(Yaohan)백화점의 경우 그룹의 본사를 홍콩으로 이전하고 일본의 본사는 홍콩본사의 자회사로 편입되었다.현재 달러약세로 인해 일본의 기업들은 달다.
Ⅰ. 서 론현대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도덕성에 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었다. 현재 도덕성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이론들에 의해 정리되어 있으며 윤리 혹은 도덕에 관해 딱 떨어지는 정의 또한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 되었다.현대인은 최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이러한 노력은 좋은 방향으로는 건전한 취미나 여가활동으로 나타나지만 나쁜 방향으로는 마약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일까?이렇게 사람들이 좋은 방법이든 좋지않은 방법이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본다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자신있게 주장하며 등장한 윤리 사상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가장 이상적 윤리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공리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며 공리주의가 가진 장점을 부각시키며 공리주의가 가질수 있는 단점에 대해 반론을 하는식으로 나아가 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공리주의의 형성 배경1) 사회 사상적 배경공리주의는 18C~19C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형성된 윤리 이론이다. 공리주의는 쾌락 그 자체를 유일한 선으로 여기고 행위의 유쾌한 결과를 도덕률의 기준으로 삼는 목적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이전의 개인적 쾌락주의를 극복하고 사회 전체의 쾌락 또는 행복을 도모하려는 사회적 쾌락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는 일찍이 흄(D. Hume, 1711-1776)에서부터 싹이 보이기 시작하여 벤담(J. Bentham, 1748-1832)에 이르러 그 이론적 체계가 갖춰지게 되었으며 밀(J. S. Mill, 1806~1873)에 의해 수정됨으로써 더욱 발전된 공리주의의 모습을 확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리주의 사상은 19세기 영국에 있어서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행위의 준거가 되었다.2)윤리 사상적 배경흄과 벤담에 의하여 성립된 공리주의 는 옳은 행위란 최소한의 고통과 더불어 최대한의 쾌락 혹은 행복을 얻는 것이라는 공리(utility)의 원리에 토대를 두고있다. 공리주의의 발전을 확립한 밀의 저서 ‘공리주의’에서 공리주의의 주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최대한 행복하고 풍요롭게 되는 상황에 대한 비전을 품고 있으며, 그런 비전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즉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결정할 때, 어떤 행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지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 이다. 도덕은 우리에게 그러한 관점에서 최선의 것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2.공리주의의 전개1) 벤담의 공리주의 (양적 공리주의)벤담의 공리주의는 효용과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는 이론이다. 도덕윤리이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입법이나 정책의 판단기준으로도 작용한다.벤담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고통(pain)과 쾌락(pleasure)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또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고통과 쾌락뿐이다.” 더 나아가 인간에 있어서 선악의 기준은 바로 이 쾌락과 고통에 따라 결정되며, 인간 행위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그 행위의 결과로서 산출되는 고통과 쾌락의 양에 의해서 가름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행위의 가치판단의 근거를 설정하였다. 따라서 공리성의 원리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는 인류에 대한 고통과 쾌락의 지배 또는 인류의 고통과 쾌락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고 이를 모든 사상체계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벤담에게 행복이란 다름 아닌 쾌락이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므로 개개인의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과 연결되며, 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과 입법의 원리로 제시했다. 그리고 모든 쾌락이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한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측정 할 수 있는 계산법(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다산성, 순수성, 범위)까지 제시하였다.그러므로 사회 전체 부를 증대시키는 부르주아의 활동은 장려되고 전체의 이익의 합계를 감소시킬 수 있는 평등적 가치는 부정된다. 또한 부르주아 경제활동의 자유를 제약하여 전체의 쾌락을 감소시키는 국가의 행위도 공리를 저버리는 비합리적 행위가 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양적 행복의 극대화가 개인의 사명이고, 개인의 쾌락의 합은 전체 사회의 이익 즉 공리로 이어진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사결정에 정의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이 없다. 대신에 화폐라는 척도로 측정된 쾌락의 증대는 합리적 선택, 감소는 비합리적 선택이 된다.2) 밀의 공리주의 (질적 공리주의)전체의 쾌락이 증대 되었다고 해서 쾌락의 개인적 분포가 균등해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벤담과 같이 극단적 경제적 자유 확대를 통해 공리를 추구하다 보면 소유 불평등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불평등의 한계점에서 발생한 것은 다름 아닌 혁명이었다. 이 당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주의에 수정을 가한 것이 밀이다. 밀은 20세기 초반 영국의 사회입법, 다시 말해 사회 복지 제도를 사회주의적 입장이 아닌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낸다.밀은 벤담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으로 보면서도, 쾌락의 양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그 질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이 더 수준 높은 쾌락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적으로 높고 고상한 쾌락을 더 추구한다.그는 개인 간의 질적 차이가 존재함으로 사회적 쾌락의 총계는 사회제도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빈곤계층의 지원을 통해 증대되는 쾌락의 질은 상위계층의 부의 증대로 인해 발생하는 쾌락의 질보다 커 결과적으로 전체 사회 쾌락의 수준을 증대시키고 이것이 공리주의의 원칙에 더욱 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러한 논리의 귀결이다. 그러나 밀의 주장이 평등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변함없이 자유였다. 쾌락의 질적 차이는 더 확대된 자유를 누리기 위한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3.공리주의의 장점공리주의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그리고 대차대조표처럼 행위의 선택 기준 또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효율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리주의자는 동물 권리론의 선구자이다. 행복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 모두가 공리주의 이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결과주의 윤리론에 속하기 때문에 정당한 예외 상황에 유연한 대처가 가능하며 시대상황이나 문화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점이다. 즉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최대다수에게 최대행복이 돌아가는 결과를 선택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도덕적 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4.공리주의의 입장 옹호공리주의는 여러 강점을 지닌 이상적인 윤리관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한계점이 윤리학자들에게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비판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보며 공리주의의 입장을 옹호해 보도록 하겠다.? 비도덕적인 행위마저 정당화할 수 있다.일부 성원을 노예로 만들면서 더 많은 부를 누리는 사회가 나을까 아니면 조금 가난하더라도 노예가 없는 사회가 나을까? '노예 체제'에 대한 도덕적 선입견을 배제한다면,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이런 문제도 결과를 계산해서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노예 체제가 노예 없는 사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산출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노예 체제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이처럼 아주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산출해 내기 위해서라면, 아마도 공리주의자들은 공개 처형이나 노예 제도와 독재 체제마저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그러나 이는 현실적이지 못한 예이며 심한 비약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공리주의적 사고를 지니더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방법이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될 수 있다.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산출하게끔 행위 해야만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갈 행복의 총량만을 계산하기 때문에 소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 이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일부 구성원들이 해를 보아도 좋다는 것으로 왜곡될 우려가 크다.
목 차Ⅰ 서 론1Ⅱ 본 론21. 역사속의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22.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성격43.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업적64.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리더쉽105.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공통점과 차이점136.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현대적 조명14Ⅲ 결 론151. 나의 생각152. 맺 음 말16※ 참 고 문 헌17Ⅰ. 서 론“중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역사인물은 누구인가?” 중국에서 이런 설문을 해보면 거의 언제나 진시황과 마오쩌둥 두 사람이 1, 2위를 다툰다. 마오쩌둥은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을 만들었고, 진시황은 그 중국 자체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마치 유럽처럼 여러 나라로 나뉜 채로 발전해 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일본에도 중국과 같은 전국시대(센고쿠 시대)가 있었다. 이러한 전국시대 에서 세 사람의 호걸이 등장하는데 바로 오다 노부나가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일본역사에서 이 세 사람은 일본인들의 최고 영웅으로, 각자의 개성과 삶이 대비가 많이 되어, 지금도 일본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인물들로 사랑을 받고 있다.일본의 통일과정에서의 이 세 사람의 행동을 묘사한 유명한 글이 있다.'오다(織田) 가 쌀을 찧어도요토미(豊臣) 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힘 안 들이고 먹은 것은 도쿠가와(家康)'즉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는 것 처럼오다 노부나가 가 일본통일의 기반을 닦지 않았다면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를 것이다. 국가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전국을 통일한 위대한 업적을 가진 두 영웅을 한번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Ⅱ. 본 론1. 역사속의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1)두 영웅이 나온 시대적 배경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와 그와 유사한 일본의 센고쿠 시대(??時代) 이 두 영웅이 나오게 된 시대이기도 하다.치 막부를 재건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나갔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은 아시카가 요시나키는 쇼군의 자리에 올랐고 노부나가에게 답례로 부장군에 임명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천하통일에 관심을 집중하였기에 부장군이라는 벼슬은 보잘 것없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부나가는 쇼군 요시아키에게 니조 성을 지어주고 황족과 막부 권력자들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쇼군 요시아키를 이용하여 지방의 다이묘들을 모두 자신의 세력하에 두고자 하였다.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전국의 다이묘들과 전쟁은 계속되었다. 1570년 4월 아사이씨와 아사쿠라씨의 연합군과 전투에서 벌였지만 이들을 정벌하지 못했고 그해 9월에는 이시야마의 난공불락의 성이지 사찰인 혼간지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대패를 당했다. 1572년 교토 진출을 노리는 다케다 신겐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여세를 몰아 아시이씨와 아사쿠라씨도 정벌하여 모두 자결하게 하였다. 이때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쇼군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이세의 나가시마 전투에서 철포를 앞세워 승리하였고, 대패를 경험했던 이시야마 혼간지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대부분 다이묘를 정벌한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2. 진시황과 오다노부나가의 성격1)두사람의 성격(1)진시황의 성격진시황은 사람됨이 몹시 잔인하고 냉혹했다고 한다. 그를 폄하하기 위한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도, 모든 기록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라 실제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한편으로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으며,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국내에 머물던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했지만, 후일 승상이 되어 천하통일의 일등공신 역할을 할 이사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고 반론을 올리자 곧바로 취소하며 전보다 더 외국의 인재를 중시했다. 한비자의단을 가리지 않았으며. 말 한마디로 천하를 움직일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을 가졌다고 생각된다.3.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의 업적1) 진시황의 업적(1) 군현제도군현제도는 이사의 건의로 실시되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주 왕실이라는 정신적ㆍ이념적 중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제도적으로’ 그 봉건적 질서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군현제도 였다.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을 설치하였다. 각 군에는 수(지사), 위(군대의 사령관), 감(감찰관)을 파견하였으며, 군현의 장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다. 군수는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중앙의 명령에 의해 이동하였다. 잦은 임지의 이동은 지방관이 한 지방에 정착해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군현제는 황제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 권력구조를 이루게 하였으며, 전대의 정치를 주도하였던 봉건체제 대신 이후 2천년 이상 중국은 군현제)를 운영하게 되었다.(2) 동문(同文) - 문자의 통일진시황은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제정했는데, 그 중에서도 누구의 생각에나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동문(同文;문(文)을 같이 하는 것)' 즉 문자를 하나로 통일시킨 것이다. 전국시대의 7웅은 각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었다. 그 근본은 은나라의 갑골문자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글자 체가 달랐고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시황제는 진나라의 소전이란 글자의 형태를 천하의 문자로 정하고, 나머지 문자들을 폐지시켰다. 그 폐지된 문자를 육국문자 라고 부른다.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국토통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참된 뜻으로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3) 치도(馳道) 와 동궤(同軌)- 도로 관리 와 바퀴 폭의 통일진의 군현제는 대륙의 통일이라는 영토적인 광역성을 보완하기 위해 도로의 건설을 필수적으로 수반하였다. 먼 지방의 군(郡)들은 총 7,500km가 넘는 도로망을 통해 수도와 연결되었다. 이 도로는 2세기 뒤에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굴지의 기업 미쓰이물산의 전신이 되었다. 몇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일본기업들은 대부분 바로 이 에도시대에 구축된 셈인 것이다. 이러한 에도시대가 도래할 수 있도록 전국을 통일한(실제로 완벽한 통일은 생전에 하지 못하였지만) 오다 노부나가를 일본인들은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여러 잔혹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인에게 영웅으로 남아있을수 있는 것이다.일본의 전국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였으며 이 시대를 를 종결하지 않는 이상, 쉼 없는 전쟁과 가난, 처참한 민생이 끝없이 계속 됐을 것 임을 생각한다면, 오다 노부나가가 과연 개인의 명예를 위해 전쟁을 한 것인지, 지긋지긋한 살육의 전쟁을 일본내에서 몰아내기 위해 칼을 든 것인지 알수는 없으나 결론적으로 그의 업적은 일본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2) 전쟁의 발전그는 적군보다 뛰어난 무기를 사용하기 위하여 당시의 타 다이묘들이 칼과 활에 의한 공격법을 고수하던 것에 반해 오다는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으로 부터 받은 화승총을 도입, 화승총 전문 부대를 편제하였다. 이 화승총을 이용해 1575년, 나가시노 전투 에서 당시 최강이라는 타케다신 진영의 기갑부대를 화승총을 이용해 제압 하였다. 또한 그는 화승총 재장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병사를 3열로 세워 쉼없이 발포 할수 있도록 훈련시켰으며 이 전쟁은 일본내 현대식 전투의 시작이 되었다.)또한 그는 직업군인제도를 시행하여 전투력이 뛰어난 상비군을 상시 보유함으로써 인원은 적으나 정예 부대를 육성하였다. 당시에는 일반 병사들은 농민 출신으로 전쟁이 나면 소집이 되어 군인으로 전투에 참여하고, 전투가 끝나거나 농사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징병제였다. 그는 적군이 많은 경우 전투를 피했다가, 봄이나 가을 농번기가 되어 적군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기습공격을 하여 간단하게 승리하였다.(3) 경제적 업적오다 노부나가는 당시 수요과 공급에 의한 가격결정의 원리, 장기적 시장의 변수킬로그램 가깝게 무게가 나가는 많은 서류를 처리했고 신하들에게도 매일 많은 일거리를 주었다고 한다.2) 오다 노부나가의 리더쉽(1) 노부나가의 인재 등용법오다 노부나가는 독단적이고 비정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나,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섬세한 배려도 했다. 물론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현대사회에도 통용될 수 있는 인재 등용 방법을 실행한 것이다. 먼저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하였다. A그룹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부하, B그룹은 말하면 즉시 이해하는 부하, C그룹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하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을 이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그 유형에 맞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끈 우수한 관리자였다.먼저 A그룹에 해당하는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있다. 이들은 떠돌이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중요시하는 정보를 수집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났다. 또한 떠돌이의 유동정신과 전국시대 주권 하강 현상을 천하통일에 대의명분으로 삼으려던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는 하부계층의 인물들을 잘 포섭하게 하는 역할을 미츠히데에게는 적장을 회유하여 아군으로 만드는 역할을 주었다. 두 사람 다 노부나가가 요구한 조건을 충족시켰으므로, 떠돌이 신분에서 노부나가의 양팔로 도약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B그룹에 속한 인물들은 주로 '주군이 주군답지 않다고 해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식의 고풍스러운 무사도를 지켜나가는 부하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에다 도시이에, 시바타 가츠이에 등이 있다. 능력주의로 부장을 등용하는 노부나가에 의해 떠돌이 출신인 A그룹의 히데요시, 미츠히데를 시기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B그룹의 이들은 출세경쟁이 격렬한 노부나가의 군문에서 중화제 역할을 했다. 그 중 도시이에는 불평을 일삼는 동료들을 설득하는 한편, 노부나가를 위해 좀더 분발하자는 식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즉, B그룹의 무사들은 충성과 의리의 대명사 같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