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와 정보-국가정보원 개혁방안-목차Ⅰ. 서론Ⅱ.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사1. 중앙정보부 설립 배경2. 중앙정보부 시기의 사건들3. 안전기획부로의 개칭과 당시 사건들4. 국정원으로의 명칭 변경과 당시 사건들Ⅲ. 국정원 개혁 방안1. 비정치화2. 전문화3. 원내민주화Ⅴ. 결론Ⅰ. 서론냉전 체제가 해체되고 세계화, 민주화의 추세 속에서 국가 안보는 군사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경제, 생태, 사회, 사이버 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중적인 성격을 띠는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국가 안보에 존립 목적을 두는 정보기관은 다중적 안보 위협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나가기 위한 능력을 갖출 것을 필수적으로 요구 받는다. 즉, 탈냉전,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국제 관계의 행위자가 다변화되고 범위가 확장되면서, 주권 국가뿐만 아니라 NGO,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과 같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국가 안보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 또한 국가의 안과 밖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정보화 혁명은 “비밀”의 유출 문제를 야기시키는 한편, 과학기술혁명은 국가 적대 세력의 기술 수준을 향상시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보다 더 경쟁적인 군비 경쟁을 유인하는 양상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국가정보기관의 역할과 능력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우리 나라의 경우 국가정보원이 중앙정보기관으로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정보기관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국가안전 기획부 그리고 중앙정보부에 이르기까지 정권안보, 비밀정치공작, 그리고 각종 의혹, 비리, 권력남용의 온상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으며, 이러한 국민들의 정보기관에 대한 불신은 다변화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정보기관의 효과적인 기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이렇게 탈냉전, 세계화 시대의 다양한 수준에서 발생하고 있는 다중적 위협에 전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가정보원의 능력을 배양해야 하는 필요성이 역시 대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 중앙정보부97년 안기부 미림팀은 대선자금과 관련한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의 대화내용을 3차례에 걸쳐 도청하게 된다. 서울 S호텔에서 이루어진 미팅의 일자와 대화내용은 1997년 4월 7일,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들에 관한 지원방안에 관한 대화이며, 같은 해 9월 9일과 10월 17일에는 여야 대선후보들에 대한 자금지원방안이었다. 결국 MBC 뉴스데스크에서 삼성 그룹이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을 통해 97년 대선에서 약 100억 원의 대선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전, 현직 검사들에게 수 천에서 수 억에 달하는 전달했다는 내용인 삼성 X파일을 보도하면서 이슈화 되었다.이 사건 역시 정보기관이 공권력을 이용하여 도청, 감청을 통해 정계, 재계, 언론계 등의 정보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불법 수집함으로써 정치화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국정원으로의 명칭 변경과 당시 사건들총풍 사건과 북풍 사건각 사건 개요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선거의 판도를 흔들어놓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바로 북풍사건과 총풍 사건이다. 총풍 사건은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당시 이회창 대선 후보의 당선을 위해 북한 측에 판문점에서의 총격을 요구한 사건이다. 한편 북풍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북한의 모든 변수를 뜻하는데, 특히 1997년 당시에 발생했던 오익제 편지 사건, 윤홍준 기자회견 사건, 이석현 의원 명함 사건 등이 북풍 사건의 큰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일련의 사건들 중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오익제 편지 사건이다.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는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10월 당시 김대중 대선 후보에게 편지를 작성했는데, 이를 안기부에서 입수하여 1997년 12월 6일에 공개한 것이 오익제 편지 사건이다. 편지에는 “이북의 여러 인사들도 후광 선생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음을 감지한 바 있다.” “대선에서 필승하시고 다가오는 통일의 그날 반갑게 상면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후광 선생은 당시 김대방위원장의 사망을 이틀 뒤에야 알았을 정도로 정보능력이 부실해졌다. 김정은으로 3대 세습이 이뤄진 뒤 북한체제 과시를 위해 남한을 도발하는 연평도 포격의 징후가 이미 8월에 있었는데도 위험성에 구체적으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가 4개월 뒤인 11월에 사태를 맞았다. 이러한 북한 정권의 동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등의 일련의 사태는 국가 정보 우선 순위 설정에 있어 오류가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소요를 제기하고 소비하는 최고 지도자의 지도력과 국가 안보에 대한 분명한 비전 제시가 요구된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이 매년 의회에 국가 안보에 대한 연차보고서를 제출하고 CIA 국장이 미국정보기관의 연차보고서를 작성한다. 여기서 설정된 국가 정보 우선순위가 실제 정보 수집과 분석의 우선순위로 반영된다.여기에다 대통령 정보 자문 위원회를 설치한다면 대통령의 국가 안보 비전 설정과 정보 소요제기의 효율성을 높여줄 것이다. 미국의 경우 President’s Intelligence Advisory Board(PIAB)라는 대통령 정보 자문 위원회가 있다. 이 기구는 학계, 언론계 등 각계를 망라한 16명의 저명한 애국적인 초당적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이며 이들은 정보 당국자들과 관련 기록에 광범위하게 접근할 수 있다. 1년에 두 번 정도 대통령에게 정보기관의 운영 전반에 관한 평가와 정보 수집, 분석, 예측, 방첩을 비롯한 여러 정보 활동과 관련해 조언을 제공한다. 이 기구는 본래 1956년 1월 Dwight D. Eisenhower에 의해 만들어진 President’s Board of Consultants on Foreign Intelligence Activities(PBCFIA)였다. 이후 John F. Kennedy 대통령 시절 President’s Foreign Intelligence Advisory Board(PFIAB)로 개칭했으나 George W. Bush 대통령 시절 개칭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 산하의 P전파 및 주파수 등 신호정보를 감지할 수 있고, 금강 사업으로 도입된 정찰기는 휴전선부터 금강산까지의 영상 및 음성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김정은 집무실, 당과 군 핵심간부, 주요 군부대 등을 대상으로 대북 감청을 하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운영하는 777부대(일명 쓰리세븐)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현재의 대북정보 수집방식은 다양한 측면에서 이행되고 있으나, 이러한 방식들에는 한계가 존재해왔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현재의 대북정보 수집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대안이 내포하는 한계를 보완하는 방안을 동시에 검토하기로 한다.북한 권력 핵심부에 대한 접근: 북한 정세의 활용북한 권력의 핵심부에 대한 접근을 통해 중요성이 높고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우리나라 국정원은 휴민트의 상당 부분을 탈북자, 조총련계 재일교포, 해외인사 등을 통해 수집한다. 국정원은 탈북자들을 통해 동영상, 사진부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기관지, 군사교범을 획득하고 그 대가로 금전이나 이권을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북한의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주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 권력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중요성이 높은 정보(최고지도자의 동향, 인사이동 등)을 수집하기가 어렵다. 또한 최근 일부 정보제공자들의 북한 관련 정보 조작, 왜곡문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정보의 신뢰성을 더욱 하락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에 있었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사건이다. 2013년 탈북자 출신으로 서울시 탈북자 담당 공무원을 맡고 있던 유우성씨는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제공했다는 혐의로 인해 검찰과 국가정보원에 의해 기소 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문제되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증거 조작 문제였다. 국정원 협조자 중 하나인 김모씨는 중국 당국과 국정원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문제가 된 유우성씨 출입경 기록 입수, 전달과정에 깊숙)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관련 수배자 박종운(朴種雲, 26살, 사회학과 4년 제적)의 소재 파악을 위한 조사를 받던 중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고문으로 숨진다. 당초 경찰은 「책상을 치자 하고 쓰러졌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으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최초 검안의 오연상(吳演相)의 증언과 부검의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사건발생 5일 만인 1월 19일 대공수사단은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조한경과 강진규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고문치사)혐의로 구속됐다. 사건진상의 일부가 공개되자 신민당이 임시국회소집과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는 등 정부 여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는 한편, 재야종교단체들의 규탄성명 발표, 진상규명요구 농성, 각계인사 9천여 명으로 구성된 발족, 등 정국은 고문정권 규탄 및 민주화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김종호 내무부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전격해임, 고문근절대책 수립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발표를 계기로 이 사건이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대공 간부 3명에 의해 축소 조작됐으며,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내연하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폭발했다. 정부는 5월 26일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 등 권력 내 핵심인물에 대한 문책인사를 단행했으나,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어 곧바로 6월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은 5공 몰락의 기폭제가 되었다.당시 구속된 안기부 소속 직원들은 대공수사단 직원의 경우 조직의 특성상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상관이 지시한 대로 행했을 뿐이라며 잘못이 없음을 주장했으나 법원에서는 이에 대해 고문치사와 같이 중대하고도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직무상의 지시명다.
중국의 신세대 농민공은중국 민주화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현대 중국의 사회와 문화-Ⅰ. 들어가며Ⅱ. 중국 신세대 농민공Ⅲ. 한국 6월 항쟁의 주체 : 중산층Ⅳ. 신세대 농민공, 개혁 주체로서의 가능성Ⅴ. 나가며Ⅰ. 들어가며중국 공산주의 혁명은 마르크스의 사회발전의 객관적 법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자본화 된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로 혁명이 일어나야 하였지만 중국 공산주의 혁명은 사회가 자본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 계층이 아닌 ‘농민’이 주도로 하여 혁명을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농민에 대해 “다른 모든 특징을 차치하고 6억의 중국인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들은 가난하고, 둘째 그들은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나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좋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기 원하며, 혁명을 원한다. 얼룩이 없는 깨끗한 백지에는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글자가 쓰일 수 있으며 가장 새롭고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 라며 농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전개해나갔다.후난성 농촌 출신의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고, 태생적으로 농민에 대한 이해와 동질감이 강했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혁명에 가담할 만한 노동자 세력은 상당히 작았고, 국공내전 과전에서 공산당이 대장정을 거치며 주로 만났던 이들이 바로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관심이 농민에게로 맞춰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그 주체 세력으로 농민을 선택하였고, 이러한 선택은 중국 상황에 정확히 맞아떨어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형성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큰 축을 담당한 세력이 농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여전히 중국 내부의 하위 계층을 담당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1957년 발생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농촌 지역에서는 3천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며 이로 인해 모든 중국인은 출생지에서 발급하는 호구에 따라 농민과 도시민으로 구분되어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ㆍ개방 정책을 발표하면서 농업 집단화가 붕괴되고, 도시 단위제가 와해되면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농민들의 대규모 이동 움직임은 1980년대 황허(黃河)의 탁류에 비유돼 '맹류(盲流)'로 불렸고, 90년대부터는 '농민공'으로 일컬어졌다. 도시 호구가 없는 농민공들은 도시에서의 각종 복리후생 혜택을 받지 못하였고,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을 구입하는 데에도 제한을 지녔다.그러나 농민공의 노동력이 점차 국가 경제 성장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1992년 정부는 도시 식량 배급표(粮票)를 없애버리는 조치를 단행하였고, 이후 농민들의 도시유입은 본격적으로 심화된다. 2014년 기준 중국 전역의 농민공은 2억 7395만 명으로 인구 5명 당 1명꼴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농민공의 호구가 농촌이라는 이유로 도시 내에서 차별을 받고 있으며, 농민공의 평균 임금은 농민이라는 호적상의 제약 때문에 도시 노동자의 3분의 1 내지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1인당 GDP가 7,572달러, 한화로 약 840만원을 월 평균 수입으로 계산해보았을 때 약 70만원이 중국의 평균 임금이 된다. 그러나 중국 농민공의 월 평균 수입은 2864위안, 한화로 51만원에 불과하다. 중국의 빈부격차가 나날이 늘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농민공의 임금은 장시간 노동에 비해 상당히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글로벌 시장컨설팅업체 헤이그룹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중국의 임금 격차를 조사해본 결과, 임금 격차 확대 폭은 7.8%로 중국 기업 임원과 말단 직원간의 임금 격차는 12.7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득불평등 수치를 나타내는 지니계수 역시 1995년 0.45에서 2002년 0.55, 2012년 0.73으로 심각한 수준인 형성되는데, 이렇게 형성된 ‘분노’가 사회적 투쟁을 진행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분석해보면 농민공이 겪는 중국 사회 내부의 차별과 무시가 농민공들을 사회적 변혁이라는 길로 끌고 가고 있으며,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신세대 농민공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가장 잘 느끼고 있는 계층이다. 1세대 농민공 보다 임금과 작업 환경 등을 비롯한 전반적인 생활환경이 개선되었지만 도시에서 시민으로 살고 싶은 신세대 농민공들에게 도시는 여전히 그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의 학력과 함께 신세대 농민공들이 원하는 이상 역시 높아졌지만, 현실에서의 농민공들에 대한 처우와 인식은 과거와 별다를 게 없어 이들은 심한 좌절감과 자존감 훼손을 경험하고 있다. 때문에 신세대 농민공들은 단합을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이들의 자존감 회복과 주체 의식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은 신세대 농민공,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려는 시도로 나아가는 것이다.신세대 농민공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농촌에 속하지만 도시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농민공’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당당하게 ‘노동자’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로 그들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획득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세대 농민공들의 이러한 특성은 농민공들의 자원봉사활동 참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신세대 농민공이 개인의 시간을 쪼개 경제적 이득이 없는 ‘자원봉사활동’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비록 그 도시에 호구는 없지만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자원봉사자라는 이름하에 모두가 평등해지면서 농민공이 지닌 사회의 불평등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세대 농민공들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도시의 시민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제도를 넘어 자신들의 윤리적 시민권(자기와 타자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 6월 항쟁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이다.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를 발표하자, 여당인 통일민주당이 주축이 되어 재야 인사와 종교계 및 각 단체와 함께 5월 27일 범야권 연합조직인 (국본)를 발족시킨다. 6월 항쟁의 불길을 당긴 건 87년 1월에 발생한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으로 박종철 군의 사망에 대해 정부가 사실을 은폐, 축소 및 조작한 것이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발표로 인해 드러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확산되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과 민주헌법 쟁취투쟁을 결합시켜 6월 항쟁을 전개한다. 6월 항쟁은 6·29선언이 나오기 까기 약 20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시위의 성격은 처음 호헌철폐에서 독재 타도, 민주 쟁취와 같은 민주화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등장하면서 격화되었다. 그리고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인 29일 시위에서 전두환 정권은 을 발표하며 직선제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한다.2. 중산층의 참여6월 항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는 바로 ‘중산층의 참여’를 꼽을 수 있다. 보통 시위에는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 또는 단체에 관련된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6월 항쟁의 경우, 6월 항쟁의 주체 세력이 아니더라도 6월 항쟁에 동의를 표하며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것이다. 즉 6월 항쟁은 계급, 직업, 종교, 지역에 관계없이 전 국민이 시위대열에 동참한 한국 역사상 초유의 국민적 항쟁이었다. 그렇다면 그 동안의 시위와 달리 직장인들을 비롯한 중산층들의 시위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사업으로 인해 한국은 절대적 빈곤을 벗어났고, 많은 국민들이 물질적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80년대 형성된 중산층은 60년대부터 추진되었던 한국의 경제발전의 혜택으로 만들어진 계층이었다. 국는 정부에서 이들의 요구에 대해 더 이상 무시로 일관하거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중국 정부는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농민공을 통제하기 위해 유화정책들을 제시하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호적 등록제 통일과 임시 거주증 폐지기존의 호적 제도는 농민공이 도시에 가서 일을 한다고 해도 호적은 태어난 곳인 농촌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도시에 거주하고 있어도 국가에서 제공하는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호적 문제는 농민공에 대한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낳았다. 그러나 2014년 도시와 농촌의 호적 등록제를 통일함으로써 농촌 호적을 소도시로 옮기는 것에 대한 제한이 완전히 풀리고, 인구 500만 명 이상의 거대도시를 제외한 중소 도시와 대도시로의 호적 이전은 농민공들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변경 기준이 정해졌다. 비록 거대도시로의 호구 이동에는 제한이 있긴 했지만 호적 등록제 통일은 농민공들도 도시의 호적을 가지고 도시의 시민으로 혜택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경우, 실질적으로 도시에서 집을 구매할 능력이 되지 않고, 농촌에 자신에게 배당된 토지가 남아있어 쉽게 자신들의 호적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농민공으로 남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간단히 말해 2014년 도시와 농촌의 호적 등록제 통일은 실질적으로 농민공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2015년 임시 거주증 폐지와 영구 거주증의 발급은 2014년 호적 개혁안을 보완한 개혁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임시 거주증은 1984년 선전에서 유동인구 관리를 위해 처음으로 시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제도로 호적을 이동시키지 못한 농민공들이 도시에서 일을 하며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이는 단순히 거주를 확인해주는 용도로만 사용되었고, 농민공은 도시의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15년 최근에 임시 거주증 제도를 폐지하고 영구 거주증의 문턱을 낮추면서 현지 호적을 가진 시민과 농민.
전쟁과 평화 인물비교 연구서김대중과 빌리브란트 인물비교 연구: 독일의 통일 성공과 한국의 미래Ⅰ. 연구 목적Ⅱ. 생애 비교연구1. 정치입문 전까지의 김대중과 빌리브란트의 생애2. 김대중과 빌리브란트에게 있어서 위기와 고난3. 김대중과 빌리브란트의 정치적 영광4. 경쟁자와 후계자를 중심으로 본 관련 인물들Ⅲ. 햇볕정책과 동방정책의 비교연구1. 햇볕정책과 동방정책2. 햇볕정책과 동방정책의 비교3. 햇볕정책의 의의와 성과에 대한 고찰Ⅳ. 선택을 중심으로 본김대중과 빌리브란트 인물비교1. 두 인물이 햇볕정책과 동방정책이라는선택을 하게 된 이유2. 김대중이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이유와빌리브란트가 바르샤바 추모비에서 무릎 꿇은 이유3. 김대중이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을적극적으로 수용한 이유와 빌리브란트가 갑작스레사임을 했던 이유4. 김대중이 2차 연평해전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와빌리브란트가 선거유세를 포기해가면서까지 냉전강화에저항한 이유Ⅴ. 결론(結論)Ⅰ. 연구 목적한 인간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알면 된다고 한다. 이 말은 한 사회를 이해하려면 그 공동체가 가진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식민지 지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스포츠에서 한일전이 불러오는 양국 국민들의 열성과 다국적기업의 이윤창출에 있어서 보이는 양국의 대결은 그러한 경험의 반영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식민지 지배 경험을 통해 동아시아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또 일본을 대함에 있어서 감정적 앙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6.25전쟁의 경험일 것이다. 전쟁이 만든 냉전반공주의 체제는 90년대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였고 최근에는 ‘두 개의 남한’이라 불릴 만큼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한편, 한국과 유사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일이다. 독일의 경우 한국과은 사민당의 제국정부에 대한 용인정책에 반발해 사민당을 탈당한 의원 두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모스크바 주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묶여있는 것으로 보고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SAP는 1932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0.2%의 득표를 하여 그 성과가 미미하였다. 반면 이 선거에서 히틀러의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이 37%의 득표를 하여 제국의회에서 230석을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나치당의 탄압으로 SAP는 당 해산을 결정하게 되고 당원들에게 사민당이나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권고한다. 이러한 당의 결정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 집단이 생겨나는데 빌리 브란트도 그 중 한 명이었고 그는 이때부터 위장이름으로서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당국의 억압은 그러한 집단에게까지 미치게 되고 빌리 브란트는 마침내 1933년 노르웨이로 망명하게 된다. 그의 망명과 함께 뤼벡에 남아있던 그의 동지들은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려 무사히 풀려나기도 하였다.2. 김대중과 빌리브란트에게 있어서 위기와 고난(1) 김대중의 위기1) 권위주의적 정부 하에서의 위기와 고난김대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기며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간다.① 김대중이 회고하는 그의 첫 번째 죽음의 늪은 앞서 ‘3) 6.25전쟁 시기의 김대중’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인민군에 의해 죽을 뻔한 일이다. 1950년 6월 15일 김대중은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료를 받기 위해 상경한다. 서울에 머무르는 도중에 6. 25 전쟁이 발발하고, 8월 10일 김대중은 무사히 목포에 도착하지만 집은 이미 김대중이 자본가로서 우익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김대중은 이유 없이 인민군에 체포되어 경찰서 구치소에 수감되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해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총살의 위기에 처한다. 김대중은 수감되어 있는 와중에 기지를 발휘하여 감방에서 탈출한다선언한다. 그리고 1993년 1월 26일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 지내면서 김대중은 세 차례나 독일을 방문하여 동·서독 출신 지도자들과 만난다. 김대중은 그들에게 통일 과정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직접 현장도 보면서 남북통일에 대해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1994년 ‘아시아·태평양 평화재단’을 설립한다. 아태평화재단의 활발한 활동과 김영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하락으로 인해 김대중은 다시 정치 생명을 얻게 되고, 6. 27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인 7월 18일 정계복귀와 국민회의당을 창당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국민회의당은 79석밖에 얻지 못한다. 이 일로 인해 김대중은 김종필과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김대중은 네 번째 대권에 도전하면서 김종필의 자민련과 단일화협상을 진행하여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향후 총리는 김종필로 합의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이회창을 누르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2)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의 행보김대중이 대통령 임기 중 정책 중 가장 큰 업적이라 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다. 2000년 4월 10일, 한국과 북한이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뉴스가 발표된다.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물밑작업을 진행해왔는데 그 중 하나가 3월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발표한 ‘베를린 선언’이다. 김대중은 베를린 선언에서 ‘햇볕정책’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북한을 돕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을 이야기했다. 6월 13일 김대중은 직접 평양으로 갔고, 이를 김정일이 직접 나와 마중하였다. 이 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통일에 대한 내용을 담은 남북공동선언이 채택, 서명되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 아시아평화운동 등 다양한 부분이 고려되어 김대중은 2000년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한국인으로서 첫 노벨상 수상자가 된다.김대중은 IMF를 극복하기 위한 기회에 베를린의 동서를 가르는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고 브란트는 이에 반발해 당시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에게 항의 서신을 보내는 등 적극적 반대 의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행동에 힘입어 1961년 사민당은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을 앞서며 사민당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련(바이에른 기독교 사회연합)과 자민당(독일 자민당)의 득표율이 여전히 높았기에 서독 내에서 기민?기사?자민 연정을 깨지는 못한다.그러나 1966년 자민당은 연정에서 이탈하고 이를 계기로 베너는 사민당과 자민당의 대연정 합의를 이끌어낸다. 이 연정 하에서 브란트는 외무장관직을 수행하게 되고 이후 1969년 서독 수상으로까지 선출된다. 이때부터 베너의 브란트에 대한 압박이 시작된다. 특히, 브란트의 첫 번째 임기말, 브란트는 병으로 입원하고 있었고 때문에 서독 연방정부는 사실상 베너와 헬무트 슈미트가 이끄는 구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브란트의 두 번째 임기 시작 무렵 많은 사람들로부터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비롯한 국외정치에는 성공했으나 국내정치에 소홀하다는 인식을 주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는 여전히 국외정치에 더 치중하였고 이로 인해 그에 대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가 연방의회에서 붙여지기도 하였다. 사민당은 이에 기민당 의원에게 투표 기권을 조건으로 뇌물을 주는데 이것이 공개되면서 사민당은 정치적 타격을 받는다. 그리고 수뢰행위에 베너가 개입되었다는 많은 간접적 증거들이 나왔다. 이에 대해 다수는 브란트가 여기에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1973년 오일쇼크가 찾아와 서독은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고 이를 기회로 헬무트 슈미트는 노골적으로 브란트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압박에 베너도 동참했고 그는 1972년 소련방문을 하면서 ‘정부에 필요한 것은 지도자’라는 내용의 발언을 하여 브란트의 리더십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베너와 헬무트 슈미트는 사민당 내에서 브란트에게 압박을 가해 브란트의 당내 입지는 좁아질대기후를 조성해 준다”는 브란트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브란트 이전 서독에 있어서 통일정책은 아데나워 정부의 ‘힘의 우위’ 정책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이는 서독의 완전 주권회복, 경제재건, 서방과의 결속 강화를 통해 확고한 우위를 확보하여 동독의 붕괴와 소련의 동독포기를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방정책은 아데나워가 기존에 이루어놓은 서방통합에 기초하여 동독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과의 세력균형을 통해 긴장완화 나아가 평화를 이루려는데 있었다.한편, 브란트가 이끌었던 독일 사민당의 주도로 이루어진 동방정책이 사실은 사민당 본연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사민당은 나치시대의 좌절을 통해 대중정당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주의적 가치의 포기를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이룬 바 있듯이, 정권쟁취를 위한 연정을 구상하는데 있어서 자민당이 가지고 있었던 오늘날 잘 알려진 동방정책과 유사한 아이디어를 수용함으로써 연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동방정책이 사민당만의 생각이 아니라 자민당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헬무트 슈미트가 사임한 후 수상으로 취임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동방정책적 기조를 유지하는데도 기여한다. 기민당으로서도 자민당과의 연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민당 소속 인물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고 그러한 선택은 동방정책적 기조 유지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장기간의 일관된 정책적 기조 유지는 이후 독일의 통일에도 일정부분 기여하였다고 하겠다.이제 브란트가 ‘긴장완화를 통한 민주주의 성장’이라는 철학 속에서 추구한 동방정책을 살펴보면 그것은 우선 독일 내에 2국가가 있다는 즉, 1민족 2국가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3년 동서독의 UN동시가입이다. 동방정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독일의 긴장 문제를 유럽차원의 문제, 즉 독일의 긴장완화가 유럽평화와 안보를 위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브란트는 이러한 입장에 따라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모스크바조약, 독?폴란드 불가침조약 등을 체결하고 이를겠다.
갈등 해소와 협력의 길 :여운형과 이츠하크 라빈 인물비교과 목 명 :한국국제정치사담당교수 :제 출 자 :목 차 :Ⅰ. 서론Ⅱ. 생애비교1. 여운형(1) 여운형의 성장기(2) 독립운동가로서의 여운형(3) 해방 이후의 활동과 죽음2. 이츠하크 라빈(1) 이츠하르 라빈의 성장기(2) 정치인으로서의 이츠하크 라빈(3) 이츠하크 라빈의 죽음Ⅲ. 중점 비교 시기 : 좌우합작운동과 라빈의 평화노선1.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2. 이츠하크 라빈의 평화노선3. 여운형과 이츠하크 라빈의 한계Ⅳ. 맺음말Ⅰ. 서론현대 한국 정치에 대한 지적 중 하나가 적대감의 과잉이다. 정치는 집단 내, 집단 간의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긴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서 상호의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감과 갈등은 오히려 사회문제의 집단적 해결을 저해함으로써 정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따라서 현재 한국 정치에서 적대감의 과잉을 해소할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이러한 해법의 모색을 위해 역사 속에서 가장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를 살펴보고, 유사한 문제 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인물들의 삶과 관념을 탐구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진영 간의 적대감이 심각했던 시기는 해방 직후일 것이다. 일제의 패망으로 인한 권력 공백과 더불어 서로 활동지역, 이념적 뿌리가 다른 집단이 해방 후 한반도에 집결하면서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갈등이 펼쳐졌다. 이와 함께 냉전이라는 새로운 양극체제의 등장하고 양 진영의 상호적대감이 국제체제와 연동함에 따라 적대감의 과잉과 이념적 균열로 인한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다.좌우합작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나타난 좌우합작운동은 이렇듯 좌우로 나뉜 양 진영의 첨예한 갈등을 완화하고 독립운동 세력 간의 협력과 연대를 모색한 정치 활동이었다. 그 주축인물이었던 여운형은 단순히 해방 후 전략적인 이유로 한시적인 화해ㆍ협력 노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서 상이한 배경의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려 애쓴 인물이라는 점에서 좌우합작의 상징적 인물이라 , 그는 나름대로의 지식과 경험을 통해 반봉건, 반제국주의라는 공통된 시대적 과제에 대해 사유하고 있었을 것이다.우선 그가 문제시 한 봉건질서는 조선의 정치체제와 사회제도였다. 이는 특히 임시정부 헌법에서 황실우대에 대한 반대를 표명함으로써 극명하게 드러난다. 황실우대에 반대하는 여운형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이씨 조선 500년의 치적에는 공보다 죄가 많다. 한일합병 조칙문에 거국솔민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명치천황에 봉헌한다고 한 것은 국가와 인민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죄이다. 한일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위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황실의 측근자들이며 이는 정의를 모독하는 것이며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황실우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고종의 서거에 통곡한 민중은 황실의 서거에 대한 비통이라기보다 망국의 원한이 국장을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이다.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여운형은 황실의 통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는 다음의 두 문답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다음은 1929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압송된 후 취조에서 이루어진 여운형과의 문답이다.문 : 피고는 한일합방에 즈음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는가?답 : 비분한 생각이 들었다.문 : 예심법정에서 피고는 합방 당시는 불평등한 게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여 지금 진술한 것과는 다른데 어느 것이 사실인가?답 : 예심에서는 그렇게 진술했지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경우도 있고 또 다른 나라로부터 망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은 조선의 정치 자체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조선인 스스로 망하게 한 것으로서 참으로 슬퍼해야 할 일이라고 하는 의미로 조금 전에 말한 것이다.문 : 비분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답 : 위정자가 악하다는 것과 일반조선인의 자각이 부족했기에 조선이 망했던 것에 대해 비분강개하는 한편, 일본의 처사에 대해서도 분개했다고 하는 의미이다.문 : 피고는 합방 당시부터 합방에 대해 불평을 했는가?답 :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생겨 마르크스주의의 수용은 결과적으로 봉건과 혁명의 이분법적인 인식구도를 낳았다. 비록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구도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하긴 했지만, 그는 대체로 민중의 봉기에 대해 관대하게 인식했으며, 혁명과 동일시했다. 또한 혁명으로 인한 정치변동이 가져오는 단절성에 주목했다.가령 여운형은 중국의 신해혁명 전후를 대립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쑨원이 제창한 신해혁명은 삼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이는 민족, 민권, 민생을 골자로 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만주족 축출, 중화회복, 공화국 창립, 균등한 토지소유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즉 신해혁명의 한 축을 이루는 민족주의는 멸만흥한, 반청복명 등의 구호 하에 만주족 제국에 반대하는 한족 주도의 정치변동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만주족의 질서는 봉건적, 신해혁명은 반봉건적, 혁명적 질서라고 인식하고 있다. 제정 러시아는 아시아를 침범해오는 서양의 거대 제국 중 하나로 인식했지만, 혁명 이후의 러시아-소련은 민중의 정부로 보았다.이는 여운형이 단절적인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만을 가지고 여운형이 완전히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단계적이고 단절적인 역사발전관이란 측면에서 여운형의 역사관은 분명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여운형이 공산주의 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고, 이데올로기를 유용한 수단으로 치부한 측면이 있었다. 이는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자금지원을 얻고자 했던 현실적인 이유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여운형 또한 대략적으로나마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내면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당시의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공산주의 혁명이 아니라 먼저 자본주의 민족경제의 확립이라는 인식 하에 비교적 온건한 좌파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했고, 이는 좌우합작운동의 관념적 배경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3) 김규식과의 비교여운형의 공산주의관은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이갈 알론의 작전참모 역할을 담당한다.‘전우의 도덕적 의무로서 우리는 생명을 바쳐서라도우리 조국이 두 번 다시는 이렇게 무방비로 당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라빈은 독립전쟁을 통해 자신 스스로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의무감을 갖는다. 이후에 라빈은 독립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전쟁을 대비하여 무기체제 도입선 확보와 군수물자 준비에 만반의 기여를 다한다.실제로 라빈이 1974년 총리에 취임하여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신무기와 군 장비의 획득, 그리고 군사 훈련을 통한 이스라엘 군의 전력증강 사업이었다. 라빈은 이스라엘의 안전 문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항상 강조하였으며, 이스라엘 군의 막강한 힘과 확고한 외교 정책만이 아랍 국가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협상에 응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기조 하에 라빈의 총리 재임 기간인 1974년~1977년에 이르는 3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군의 전력은 2배로 증가된다.1948년 독립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팔마치는 해체되었으며, 그 후신으로 이스라엘 방위군이 탄생한다.라빈은 1953년 영국에서 참모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1954~1956년 훈련소장을 지내다 준장으로 승진되었고, 1956년부터 3년간 모세 다얀에 의해 북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된다.959년부터 1년간 작전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군대 내에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는 아랍과의 전선에서 배제 당하자 라빈은 1959년 군을 떠나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것으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전쟁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벤 구리온의 군 동원령에 의해 라빈의 미국 유학은 다시금 미루어지게 된다. 라빈과의 묘한 갈등 관계에 있던 벤 구리온은 1961년 주르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한다. 군에서 진급이 느렸던 라빈은 1963년 벤 구리온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야 1964년 1월 이스라엘 방위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된다.3) 1967년 ‘6일 전쟁’ 시기평화’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에 50년간의 숙적이 밀접하고 내실 있는 동맹관계로 전환된다. 이후 라빈과 페레스는 PLO와의 비밀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단둘이 사안을 의논하고 토론하며 관계를 공고히 다진다.라빈은 페레스에 대해 50년 동안 서로를 잘 알고 지내오면서 많은 기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둘은 함께 이룩하려고 하는 꿈이 있으며 이 평화라는 꿈을 위해 같이 일하고 있다고 말하며, 페레스를 진정한 파트너라고 평가한다. 즉, 라빈과 페레스는 자신들을 적이 아닌 ‘뜻을 같이 하는 사이’, 즉 동지로 관계를 설정해놓고 평화 정책을 함께 만들어 나간 것이다.라빈과 호레스의 지인 호레브 장군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리쿠드당을 견제하기 위해 감정적인 화해가 아닌 이성적인 화해를 한 것이며, 이스라엘 초기 세대들은 살기 위해 팀워크가 관습과도 같은 것이었고, 전쟁으로 인해 젊었을 때 죽은 사람이 나이를 먹고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세대였기에 나이를 먹으면서 화해와 협력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의견을 표했다.결론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던 라빈과 페레스가 1992년에 들어 함께 동지로서 협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평화 노선’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합의가 있었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리쿠드당이 국내정치의 위협적 세력으로 등장하다보니 이를 견제하기 위한 내부 단합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건국부터 오슬로 협정까지의 시간동안 함께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방어하고, 지켜나가는 데에서 그 세대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추억과 관습, 기억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라빈과 페레즈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Ⅲ. 중점 비교 시기 :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과 라빈의 평화노선1.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좌우합작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은 무엇보다 국내정치에서 갈등의 첨예화였다. 특히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에 대한 논쟁을 이용해 좌우 양 진영은 자신의 세력을 최대화하려 했다. 특히 박헌영이 중심이 된 공산당 세력은 당시 남한에진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이스라엘의 신화적 역사 (성서 시대)성서 시대는 역사적인 사실증명에 어려움을 겪지만 구약 성경, 즉 토라(Torah)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고 유대 민족의 myth of nation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고대 역사 시대를 일컫고 있다. 이 시대는 크게 잡자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전부터 유다 왕국의 몰락과 첫 번째 성전 파괴에 잇따른 유대인 디아스포라까지 그 범위를 잡을 수 있다. 이 신화적 역사는 조국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시국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운 땅을 되찾고 그 위에 유대인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희망을 몇 천 년간 유지하면서 공동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유대인들의 신념과 믿음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 중요성을 논할 수 있다.연도주요내용BC 17세기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BC 13세기출애굽 시대BC 13세기~BC 12세기헤브루 민족의 팔레스타인 정착BC 1020년군주제 성립. 초대 왕은 사울BC 100년다비드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이 건설됨BC 960년유대 민족의 첫 번째 성전이 솔로몬 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짐BC 930년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됨BC 722년 ~BC 720년아시리아 침략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BC 930년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다 왕국 멸망. 디아스포라의 출발점.성서에 의하면 “열국(列國)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조상들과 달리 유일신 하느님을 신앙하였으며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으로, 하늘과 땅의 주관자로, 그리고 모든 인류의 심판자로 모시고 섬겼다. 신은 이교 도시 우르에 살던 그를 불러 가나안으로 가서 위대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라고 명한다. 하느님과 유대인 민족은 계약을 맺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에게 충성하고 그의 계명을 따르면 하느님이 그 대가로 그들을 지켜주고 축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고, 이는 유대신앙의 근원이 되는 선민사상(chosen people), am segullah(귀한 백성)와 am nahallah(상속받은 백성) 믿음엘은 1949년 5월 11일 국제연합(UN)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홀로코스트(Holocaust) 생존자 5만여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명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000여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이스라엘에서는 독립전쟁으로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해외거주 유대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 기계화, 상선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광물 개발, 도로 및 통신망 구축에 사용되었다.이스라엘의 건국은 1948년 5월 14일 선포되었는데 이후 10여 년이 흐른 뒤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이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했다. 농업의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다.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800km의 해안 고속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된 교육제도는 아랍계도 포괄하게 되었고,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00만 명 이상이 되었다.이스라엘의 건국 선포(1948년 5월 14일)에 대한 반발로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전투는 1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끝내 승리하였다.1949년 초에 이스라엘은 국제연합(UN)의 후원으로 아랍국가들과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영구적인 회재정위원회경제위원회외교/국방위원회내무/환경위원회이민/수용/디아스포라 위원회교육/문화/체육위원회헌법/법률/정의위원회노동/복지/보건위원회과학기술위원회국가통제위원회여성지위위원회특별위원회 목록마약위원회아동인권위원회외국인노동자위원회중앙선거위원회공공청원위원회2. 행정부(1) 총리총리는 일반적인 의원내각제와 다른 방식으로 선출된다. 국회의원의 선출된 후 대통령이 각 정당 당수들과 협의해 연정 구성을 성사시킬 가능성이 높은 정당의 당수를 총리후보로서 선출한 뒤, 해당 당수가 연정 구성에 성공해 정부 구성안을 국회에 제출, 승인을 받고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받으면 동 당수가 총리직을 시작하게 된다.이스라엘 역대 총리1대 : 다비드 벤구리온(1948-1954)2대 : 모셰 샤레트(1954-1955)3대 : 다비드 벤구리온(1955-1963)4대 : 레비 에슈콜(1963-1969)5대 : 골다 메이어(1969-1974)6대 : 이착 라빈(1974-1977)7대 : 메나헴 베긴(1977-1983)8대 : 이착 샤미르(1983-1984)9대 : 시몬 페레스(1984-1986)10대 : 이착 샤미르(1986-1992)11대 : 이착 라빈(1992-1995)12대 : 시몬 페레스(1995-1996)13대 : 벤야민 네타냐후(1996-1999)14대 : 에후드 바락(1999-2001)15대 : 아리엘 샤론(2001-2006)16대 : 에후드 올멧(2006-2009)17대 : 벤야민 네타냐후(2009-현재)(2) 내각대통령에 의해 연정 구성권을 부여 받은 총리후보는 총선 결과 발표 후 45일 이내에 내각 명단 및 정부 구성안을 작성하여 국회에 제출, 승인을 받아야 한다. 특이한 점은 총리도 특정 부서를 맡아 장관직을 겸할 수 있다는 것이다.행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은 매우 방대하여 법에 의해 위임 받지 않은 다른 기관의 업무도 수행토록 되어 있다. 행정부 자체 업무나 정책 결정 절차는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번 열리는 주례 각료회의에서 결정된다. 필요에 의해서는 특별 각료회의가 개최된다.내각의복무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특히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과 드루즈 교를 믿는 사람들은 군에 복무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과는 달리, 1995년부터 폭력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신념에 의한 병역거부를 허용하고 있는데 정부의 까다로운 검증을 거쳐야 한다. 본인이 이슬람교 신자이거나 무교인 사람이라면 징집이 되지 않으나 자원입대는 허용하고 있다.또한 이스라엘에서는 전체 병력 중 예비군이 72%, 현역이 28%를 차지할 정도로 예비군이 중요한 전력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적은 인구가 최대의 전투 역량을 갖기 위해서 예비군의 전력화가 필수이다. 또한 평상시에 예비군을 훈련시키고 전문성을 보유할 수 있도록 교육하여 유사시에 즉각적인 전력화 체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이를 위해 평상시에 편제될 대대급 위주의 전투훈련(연 1주일)과 전투임무 수행으로 유사시 즉각적인 여단ㆍ사단급 편제화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으며 최대한 조기에 동원하려고 하고 있다.이스라엘의 국방정책의 주안점은 적에 대한 기술 및 질적 우위를 점하고 적은 예산으로 최대의 안전 보장을 확보하고, 최신 무기 체계와 질적 우세를 견지하는 데 두고 있다. 무기의 상당 부분은 이스라엘에서 자체 개발하고 제조하였으며 전쟁 발발 가능성을 감소시킬 수 있는 확고한 전쟁 억제 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이스라엘의 군사전략은 이스라엘 영토가 협소하므로 필요 시에 방어보다는 우세한 공군력을 활용한 선제공격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공격을 당했을 경우에는 조속히 적의 영토로 진입하여 전쟁 발발 초기 단계부터 전쟁지역을 적국 영토 내로 전환하여 자국 내 피해를 최소화하는 군사전략을 구사하고 있다.이스라엘군의 총참모장(중장)은 3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전군의 작전 통제권을 직접 행사한다. 해군 • 공군 사령부(소장)는 총참모장의 보좌 기능을 수행하되, 해당 군의 작전 및 지원 운영을 담당한다. 이스라엘의 장성 수는 중장 1명, 소장 20명, 준장 70여 명 등 총 100여 명으로 추정된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는 소련에서 약 320,000명에 달하는 이주자가 밀려 들어왔다.유대인 이주자의 가장 거대한 뿌리는 소련을 포함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이다. 그 외에도 북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지역에서도 유대인들이 이주해왔다.유대인들의 이주로 유대인 인구가 늘어날 때, 아랍인들은 높은 출산율로 인구를 불려갔다. 전반적으로, 인구는 청년층과 유소년층이 많다. 이스라엘 통계청이 2011년 5월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년간 출생자는 약 15만 5,000명이고 사망자는 약 4만 2,000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균 기대수명은 여성은 84세, 남성은 80세이다.3. Diaspora디아스포라는 분산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유대인의 관습을 유지하며 사는 유대인과 거주지를 뜻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인으로서의 연속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들은 여러 방법으로 각 지역의 독특성을 지닌 채 유대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세계 각지에 있는 유대인들은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근래 21세기 들어서는 인터넷의 발달도 전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을 이어주고 있다.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상대적 신참자로 억압적으로 마이노리티(minority)한 경우가 많고 현지사회에 융화되어 있는 정도가 적지만 중요한 경제활동이나 문화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유대인들은 조직화된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유대인들의 예를 들 수 있다. 오늘날 미국에는 4천 개에 육박하는 유대인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유태인 사회는 본격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전국적 규모의 단체들이 결성되는데 1907년 미국유태인전국위원회(American Jewish Committee:AJC)를 설립하였고, 이어서 미국유태인전국총회(American Jewish Congress:AJC)와 반비방연맹(Anti-Defamation League of B’nai B’rith:ADL)도 발족시켰.